[종려주일] 예수님의 죽으심
본문
다음 주는 종려주일이고 고난주간을 맞이하게 됩니다. 우리는 사순절이나 고난주간에만 예수님을 생각하고 바라보는 것은 아닙니다. 언제나 주님을 기억해야 되고 그 분의 십자가의 공로를 힘입고 살아가야 됩니다. 지금 우리와 동행하시는 분은 부활하신 예수그리스도입니다. 죄에서 해방시키시고 죽음에서 승리하신 그 분이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누더기 옷을 입고 샌들을 신고 초라한 모습의 주님이 우리와 함께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가 십자가를 이해하지 못하면 그 죽으심을 깨닫지 못하면 부활하시고 승리하신 예수님과 함께 동행 하는 삶을 누리지 못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됩니다. 왜냐하면 십자가를 알아야 부활을 앎니다. 십자가의 죽으심을 알아야 우리가 죄인임을 알고 십자가의 고통을 알아야 우리의 죄가 얼마나 무거운 것인지 알게 됩니다.
체력 단련장에서 늘 만나서 함께 운동하는 정신지체장애자가 있습니다. 금요심야예배 때 가끔씩 이야기 했는데요, 이 청년이 자기는 장애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정신적으로 문제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그 이야기를 할 때마다 ‘아니야 너는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어! 너는 정신지체장애자야, 그래서 네가 약을 먹고 있지 않니’ 이것을 계속 일깨워줍니다. 왜냐하면 이 청년이 그것을 알아야 치료에 노력을 하든지 기도를 하든지 자기를 인식할 것 아닙니까
술 중독자가 자기는 애주가라고 하는 이상 절대로 치료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모르면 십자가가 소용없습니다. 그 공로가 그에게는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끊임없이 우리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죄인이라고 느끼고, 깨닫고, 알 때 이 죄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공로가 얼마나 복된 것인지 알게 되는 것이지요. 주님을 바라볼 수 있다는 말입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 목요일 밤에 잡히셔서 금요일 새벽까지 신문을 받으십니다. ‘네가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는 것입니다. 이 질문에 예수님은 스스로 메시야이심을 드러내셨고 당시 유대 사회의 민중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메시야라고 기대하고 따랐습니다. 그러나 당시 유대사회의 종교지도자들, 정치지도자인 대제사장들과 장로들 서기관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이 저들을 향해 서슴없이 질책하셨기 때문에 적대관계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두렵기도 하고 괘씸하기도 한 그런 마음으로 예수님을 죽이고자 마지막으로 확인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십니다. ‘내가 너로 살아계신 여호와 하나님께 맹세하노니’이렇게 강조합니다. 여기서 이런 표현은 상대방으로 하여금 진실을 말하게 하는 맹세 법으로 사용하는 용어입니다. 예수님이 메시야임을 확실하게 공포하시고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고 대답하십니다.
그런데 여기서 가만히 보면 문구가 잘 안 맞는 것 같습니다. 내가 메시야다 하신 후 ‘그러나’를 빼야 됩니다. 여러분들이 아시다시피 ‘그러나’의 접속사는 앞문장과 뒷문장이 다를 때 사용합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앞문장과 뒷문장이 같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왜 ‘그러나’라는 접속사를 붙였느냐 하면 그 당시 실상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메시야냐 아니냐 하는 문제에 초미의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습니다. 그 당시 유대인들이 기다리든 메시야는 어떤 모습의 메시야인가를 잘 설명하는 부분이 시편에 나와 있습니다.
시편 2:1-12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민족들이 허사를 경영하는 고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 기름 받은 자들 대적하며 우리가 그 맨 것을 끊고 그 결박을 벗어 버리자 하도다 하늘에 계신 자가 웃으심이여 주께서 저희를 비웃으시리로다 그때에 분을 발하며 진노하사 저희를 놀래어 이르기를 내가 나의 왕을 내 거룩한 산 시온에 세웠다 하시리로다 내가 영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 내게 구하라 내가 열방을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 끝까지 이르리로다 네가 철장으로 저희를 깨뜨림이여 질그릇 같이 부수리라 하시도다 그런즉 군왕들아 너희는 지혜를 얻으며 세상의 관원들아 교훈을 받을지어다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할지어다 그 아들에게 입 맞추라 그렇지 아니하면 진노하심으로 너희가 길에서 망하리니 그 진노가 급하심이라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다 복이 있도다’ 이 시편에 나오는 메시야에 대한 이미지는 일단 계급이 높습니다. 군왕들과 관원들 사이에서 언급되는 지위를 가지며 그 언급되는 내용들이 열방에 관한 것이요, 세상에 관한 것입니다.
그 소유가 땅 끝까지 이르고 그 다스림의 권세는 철장으로 저희를 깨뜨리는 권세입니다. 이것이 당시 유대인들이 기대한 메시야입니다. 메시야가 오시면 압제자 로마를 격파시키고 이스라엘의 정치적인회복과 또 종교적인 회복과 열방 앞에 뛰어난 영광으로 보상받을 것이라는 기대를 한 것입니다. 메시야은 그래서 당연히 빛나는 갑옷을 입고 백마 탄 그런 해방자여야 합니다. 그러나 지금 예수님은 아무런 증거를 제시하지 못하고 보잘것없는 세력 앞에 붙잡혀온 죄수같이 초라한 모습으로 대답하고 있습니다. 저들이 비웃을만하지요.
예수님의 이력서란 고작 갈릴리 시골사람인 나사렛 예수가 전부입니다. 이런 자들의 분위기를 알기 때문에 ‘그러나’를 붙인 것입니다. 너희들이 도저히 믿기지 않느냐 너희들이 생각하는 메시야가 아니냐 ‘그러나 나는 메시야다’입니다. ‘이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보고 참다운 메시야인 내가 영광을 드러내는 것을 보리라’는 말에 당시 적대세력들은 확신 한 것입니다. 메시야라는 것을 확신한 것이 아니라 메시야가 아니구나하는 것을 확신했다는 말입니다. 꼬투리를 잡아야 되는데 꼬투리를 잡을 수 없어서 고심하든 저들에게는 이 예수님의 말씀이 확신한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지금 예수그리스도요 메시야라는 것을 증명해야 되는데 언제 올지 모르는 미래를 이야기하고 있단 말입니다. 이것이 사기가 아니고 무엇이냐는 것이지요. 예수님의 말씀이 사기라는 것을 확실히 아는 계기로 삼은 것입니다. 얼마만큼 확신 했습니까 ‘이에 제사장이 자기 옷을 찢으며 가로되 저가 참람한 말을 하였으니 어찌 더 증인을 요구하리요’ 제사장이 옷을 찢을 때는 여호와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을 들을 때입니다. 그러니까 얼마나 확신에 찬 행동입니까
이 이후의 행동들은 메시야가 아니라는 확신에 차서 한 조롱들입니다. 그러나 이 문제야말로 당시 유대인 사회의 문제 일뿐 아니라 모든 인류의 문제이고 오늘 성도들에게도 커다란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왜 예수님께서 로마황제가 되지 않았을까 라는 것이야말로 오고 오는 모든 세대들에게 신앙 생활하는 자에게나 믿지 않는 자들에게 문제 거리가 되었단 말입니다.
보세요 이미 예수님을 증거하러 앞서 온 침례요한 마저도 메시야직분의 의심거리가 된 것입니다. 마11:2-6 ‘요한이 옥에서 그리스도의 하신 일을 듣고 제자들을 보내어 예수께 여짜오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 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
침례요한이 옥에서 들으니 자기가 메시야라고 증거 했던 이분이 메시야로서의 기대했던 역할을 안하시고 쓸데없고 별 볼일 없는 패거리들과 몰려다니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당신이 메시야가 맞느냐고 묻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증거로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하라’는 것입니다.
질문과 전혀 맞지 않은 답을 하는 것 같지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로마서 6:6-11 말씀에 기록되어있듯이 예수그리스도의 죽음이 갖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왜 죽으셔야만 했습니까 우리를 죄와 사망이라는 영역에서 구출하여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라는 영역으로 우리를 이전시키시기 위하여 그 방법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 방법 만으로만 가능한 것입니다.
믿는 자에게는 두 개의 영역이 있습니다. 구원 받은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된 영역과 옛 습관과 본성으로 아직도 기웃거리고 있는 옛 영역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으면 마음의 갈등이 훨씬 많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한 마음으로 죄를 지으면 되는데 예수 믿는 자들은 왔다 갔다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침례요한의 자자들에게 대답하신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일어나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는 것은 소경과 눈을 뜬것의 차이를 말씀하는 것입니다. 소경이 병이 나은 것을 말씀하시기보다 소경이 사는 삶의 세계와 눈뜬 자의 사는 세계가 전혀 다른 것입니다. 이것이 메시야가 오셔야하는 이유입니다. 복음을 얻은 자와 얻지 못한 자의 차이를 비교하고 있는 것입니다.
가난한 자가 부자가 되고 소경이 눈을 뜨는 것이 낮았던 자리에서 뭐가 덧붙여지는 지는 것이 아니라 별개의 두 세계, 비교할 수 없는 대조를 우리에게 제시하시고 그 옮김을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오셨다는 것을 우리에게 설명하는 것이 예수님의 답변입니다. 사도행전 3장 1-10절에 보면 우리가 잘 아는 성전미문에서 앉은뱅이 된 자를 걷게 하는 기적의 사건이 나옵니다. 이 사건에서 베드로의 선언은 무엇입니까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어라’입니다.
은과 금과 예수그리스도의 왕 되심을 비교하고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은과 금으로 살았든 그 영역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영역으로 바뀌어 온 것을 증거하는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왜 하필 앉은뱅이가 일어납니까 예수그리스도의 통치는 이를 고쳤다가 아니라 앉은뱅이가 사는 세계와 자기 발로 돌아다니는 세계의 차이를 만들어 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죽으심의 의미입니다.
이것을 모르면 자신의 신앙인 됨과 보상과 삶에 대해서 회의를 가지게 됩니다. 단순히 앉은뱅이가 치료받는 것이 은과 금으로 할 수 없는 것을 종교적인 힘으로 고쳐냈다고 하면 ‘나는 왜 예수 믿었는데 저 사람들보다 못합니까’ 이렇게 나오게 됩니다. 나도 종교적으로 생활했는데 나에게 돈과 건강과 지위가 없습니까 이렇게 나온단 말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딴 세상에 사는 것입니다.
빌립보4:10-13 ‘내가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함은 너희가 나를 생각하던 것이 이제 다시 싹이 남이니 너희가 또한 이를 위하여 생각은 하였으나 기회가 없었느니라 내가 궁핍함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가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이 말씀은 아주 귀한 말씀입니다. 그래서 표구해서 집안에 걸어놓는 경우도 많습니다.
이 말씀을 사도바울이 하게 된 배경은 당시 바울이 로마감옥에 갇혀 있는 상황이었고 빌립보 성도들이 바울에게 여러 번 위로를 해 왔습니다. 찾아오기도 하고 필요한 물건을 넣어주기도 하고 여러 방면으로 바울을 격려하고 위로했습니다. 바울은 빌립보 성도가 찾아온 것에 대해 기뻐했습니다. 그런데 찾아와서 필요를 채워주었기 때문에 기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랑에 참여한 그 자세와 태도가 기뻐다는 말입니다. 바울을 어떠한 경우라도 자족하기를 배웠기 때문에 괜찮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바울은 비천에도 처할 줄 알고 풍부에도 처할 줄 알아 모든 일제의 비밀을 깨달은 사람이었습니다.
풍부한 것과 궁핍한 것은 극단적으로 대조가 됩니다. 그러나 바울이 하는 일은 예수그리스도의 힘으로만 하는 것이기 때문에 궁핍이나 풍부나 그것으로 도움이 되거나 방해가 되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하는 말씀은 내가 하는 일은 내게 능력주시는 자 그리스도로부터만 오는 것으로 힘과 내용을 삼는 일이라서 세상의 것으로는 내가 하려는 것을 도와 줄 수도 없고 방해할 수 도 없는 일이라는 말입니다. 영적인 영역에 속한 일들을 감당하는 사역이라 세상 것으로는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가 준비하고 있고 감당하고 있고 추구하는 것이 세상 것이 아닌데 세상 것으로 기뻐하고 슬퍼하고 힘을 얻기도 하고 잃기도 하고 그렇지 않다는 말입니다.
물론 복음을 위해서 좀더 유리한 내용을 삼기위해 돈이 있어야 되고 권력이 있어야 되고 지혜가 있어야 된다는 것을 부인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분명히 알아야 될 것은 이런 좋은 조건이 있다고 해서 신앙이 성장하는 것도 아니고 헌신하는 것도 아니고 그리고 복음을 전하는데 영향을 받지도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됩니다.
광주 상무대 교회에 다닐 때 거기 교장인 투 스타 장군께서 교회를 다녔습니다. 그러니까 차모들이 줄줄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분이 전출을 가니까 참모들도 다 같이 불교로 전출을 갔다는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복음은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능력으로입니다. 돈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영혼을 사랑하는 열정입니다. 물론 열정과 풍부함이 있었으면 더 좋겠지만 그러나 세상 것으로 큰 영향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좋은 환경과 좋은 조건을 달라고 기도하는 것 정당한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가는 길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것이지, 이왕이면 좋은 차타고 다니십시오. 좋은 집을 위해 기도하십시오. 부자 되십시오. 그러나 그것은 정당한 조건으로만 요구되는 것이지, 그것이 목표가 아닙니다. 우리의 목표는 언제나 하늘나라입니다. 재산을 팔아 보물이 숨겨져 있는 밭을 사는 삶입니다. 아시겠지요.
여러분들이 가졌습니까 가진 것을 어떻게 쓰는가가 신앙의 내용입니다. 여러분이 높은 지위에 계십니까 그 지위를 어떻게 사용하는가 하는 것이지 높은 지위를 더 가지는 것이 신앙의 목표는 아닙니다. 주신 것에 어떻게 쓰임을 받느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점검하시고 확인해야 하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고 그리스도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거룩한 삶을 살 수 있고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을 소유할 수 있고 믿음으로 세상을 이기고 평강과 감사와 감격의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이 성도들의 보람과 보상과 평가입니다. 이것은 사실 조건이 좋으냐, 나쁘냐와 상관이 없습니다. 조건이 나쁜 것에서는 나쁜 대로 여러분의 신앙이 드러날 것이요, 좋으면 좋은 대로 여러분의 신앙이 드러날 것입니다.
여러분이 무능하다고 신자의 삶에 방해 되지 않습니다. 유능하다고 방해되지도 않습니다. 우리는 유능하면 잘난 척 하고 무능하면 꼭 초를 칩니다. 그런데 우리는 양쪽 다 신앙의 삶을 살아가는데 두 조건이 차이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어떤 상황과 형편에 처해 있다하더라도 주님을 드러내는 삶은 차이가 없는 것입니다.
빌립보4:4-7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아무것도 엄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여호와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여호와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왜 기뻐하라고 합니까 왜 관용하라고 합니까 이미 가졌기 때문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 되시고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여러분의 필요를 여호와 하나님 앞에 다 구하십시오. 여호와 하나님이 알아서 해 주실 것입니다. 여기에 나오는 ‘시각에 뛰어난 여호와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이 말씀을 명심하십시오.
우리의 신앙의 실패는, 불평과 불만은 언제나 여호와 하나님 앞에 서 있지 않아서 나타난 결과입니다. 우리의 욕심과 세상의 유혹에 빠져서 여호와 하나님이 부족해 보일 뿐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원망스러워 보입니다. 조용히 여호와 하나님과 만남의 시간을 가져보십시오. 그 분께 목 놓아 한 번 불러보십시오. 간절히 한 번 찾아보십시오. 여호와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 마음과 생각을 지켜주실 것입니다.
성도의 신앙을 점검하는 가장 중요한 평가 기준은 감사할 줄 아는가에 있습니다. 감사는 가진 것을 확인하는데 있고 가진 것을 확인하는데도 영안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가진 것이 없다고 늘 이야기하는데 가진 것이 없는 것처럼 생각하고 삶을 살아가는데 영안을 가지고 한 번 보십시오. 우리가 가진 것이 많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내가 가지지 못한 것만 봅니다.
아닙니다. 이제 가진 것을 보는 시각을 가지세요. 예수님께서 죽으심으로 만드신 십자가를 지심으로 만드신, 귀한 영생이 있습니다. 은혜가 있습니다. 축복이 있습니다. 기적이 있습니다. 치유가 있습니다. 이것을 찾아 누릴 수 있는 복 있는 심령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은혜를 누리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죽으시고 만드신 놀라운 기적들을 누릴 수 있는 복된 심령들이 되시길 축복합니다.
누더기 옷을 입고 샌들을 신고 초라한 모습의 주님이 우리와 함께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가 십자가를 이해하지 못하면 그 죽으심을 깨닫지 못하면 부활하시고 승리하신 예수님과 함께 동행 하는 삶을 누리지 못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됩니다. 왜냐하면 십자가를 알아야 부활을 앎니다. 십자가의 죽으심을 알아야 우리가 죄인임을 알고 십자가의 고통을 알아야 우리의 죄가 얼마나 무거운 것인지 알게 됩니다.
체력 단련장에서 늘 만나서 함께 운동하는 정신지체장애자가 있습니다. 금요심야예배 때 가끔씩 이야기 했는데요, 이 청년이 자기는 장애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정신적으로 문제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그 이야기를 할 때마다 ‘아니야 너는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어! 너는 정신지체장애자야, 그래서 네가 약을 먹고 있지 않니’ 이것을 계속 일깨워줍니다. 왜냐하면 이 청년이 그것을 알아야 치료에 노력을 하든지 기도를 하든지 자기를 인식할 것 아닙니까
술 중독자가 자기는 애주가라고 하는 이상 절대로 치료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모르면 십자가가 소용없습니다. 그 공로가 그에게는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끊임없이 우리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죄인이라고 느끼고, 깨닫고, 알 때 이 죄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공로가 얼마나 복된 것인지 알게 되는 것이지요. 주님을 바라볼 수 있다는 말입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 목요일 밤에 잡히셔서 금요일 새벽까지 신문을 받으십니다. ‘네가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는 것입니다. 이 질문에 예수님은 스스로 메시야이심을 드러내셨고 당시 유대 사회의 민중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메시야라고 기대하고 따랐습니다. 그러나 당시 유대사회의 종교지도자들, 정치지도자인 대제사장들과 장로들 서기관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이 저들을 향해 서슴없이 질책하셨기 때문에 적대관계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두렵기도 하고 괘씸하기도 한 그런 마음으로 예수님을 죽이고자 마지막으로 확인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십니다. ‘내가 너로 살아계신 여호와 하나님께 맹세하노니’이렇게 강조합니다. 여기서 이런 표현은 상대방으로 하여금 진실을 말하게 하는 맹세 법으로 사용하는 용어입니다. 예수님이 메시야임을 확실하게 공포하시고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고 대답하십니다.
그런데 여기서 가만히 보면 문구가 잘 안 맞는 것 같습니다. 내가 메시야다 하신 후 ‘그러나’를 빼야 됩니다. 여러분들이 아시다시피 ‘그러나’의 접속사는 앞문장과 뒷문장이 다를 때 사용합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앞문장과 뒷문장이 같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왜 ‘그러나’라는 접속사를 붙였느냐 하면 그 당시 실상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메시야냐 아니냐 하는 문제에 초미의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습니다. 그 당시 유대인들이 기다리든 메시야는 어떤 모습의 메시야인가를 잘 설명하는 부분이 시편에 나와 있습니다.
시편 2:1-12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민족들이 허사를 경영하는 고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 기름 받은 자들 대적하며 우리가 그 맨 것을 끊고 그 결박을 벗어 버리자 하도다 하늘에 계신 자가 웃으심이여 주께서 저희를 비웃으시리로다 그때에 분을 발하며 진노하사 저희를 놀래어 이르기를 내가 나의 왕을 내 거룩한 산 시온에 세웠다 하시리로다 내가 영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 내게 구하라 내가 열방을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 끝까지 이르리로다 네가 철장으로 저희를 깨뜨림이여 질그릇 같이 부수리라 하시도다 그런즉 군왕들아 너희는 지혜를 얻으며 세상의 관원들아 교훈을 받을지어다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할지어다 그 아들에게 입 맞추라 그렇지 아니하면 진노하심으로 너희가 길에서 망하리니 그 진노가 급하심이라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다 복이 있도다’ 이 시편에 나오는 메시야에 대한 이미지는 일단 계급이 높습니다. 군왕들과 관원들 사이에서 언급되는 지위를 가지며 그 언급되는 내용들이 열방에 관한 것이요, 세상에 관한 것입니다.
그 소유가 땅 끝까지 이르고 그 다스림의 권세는 철장으로 저희를 깨뜨리는 권세입니다. 이것이 당시 유대인들이 기대한 메시야입니다. 메시야가 오시면 압제자 로마를 격파시키고 이스라엘의 정치적인회복과 또 종교적인 회복과 열방 앞에 뛰어난 영광으로 보상받을 것이라는 기대를 한 것입니다. 메시야은 그래서 당연히 빛나는 갑옷을 입고 백마 탄 그런 해방자여야 합니다. 그러나 지금 예수님은 아무런 증거를 제시하지 못하고 보잘것없는 세력 앞에 붙잡혀온 죄수같이 초라한 모습으로 대답하고 있습니다. 저들이 비웃을만하지요.
예수님의 이력서란 고작 갈릴리 시골사람인 나사렛 예수가 전부입니다. 이런 자들의 분위기를 알기 때문에 ‘그러나’를 붙인 것입니다. 너희들이 도저히 믿기지 않느냐 너희들이 생각하는 메시야가 아니냐 ‘그러나 나는 메시야다’입니다. ‘이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보고 참다운 메시야인 내가 영광을 드러내는 것을 보리라’는 말에 당시 적대세력들은 확신 한 것입니다. 메시야라는 것을 확신한 것이 아니라 메시야가 아니구나하는 것을 확신했다는 말입니다. 꼬투리를 잡아야 되는데 꼬투리를 잡을 수 없어서 고심하든 저들에게는 이 예수님의 말씀이 확신한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지금 예수그리스도요 메시야라는 것을 증명해야 되는데 언제 올지 모르는 미래를 이야기하고 있단 말입니다. 이것이 사기가 아니고 무엇이냐는 것이지요. 예수님의 말씀이 사기라는 것을 확실히 아는 계기로 삼은 것입니다. 얼마만큼 확신 했습니까 ‘이에 제사장이 자기 옷을 찢으며 가로되 저가 참람한 말을 하였으니 어찌 더 증인을 요구하리요’ 제사장이 옷을 찢을 때는 여호와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을 들을 때입니다. 그러니까 얼마나 확신에 찬 행동입니까
이 이후의 행동들은 메시야가 아니라는 확신에 차서 한 조롱들입니다. 그러나 이 문제야말로 당시 유대인 사회의 문제 일뿐 아니라 모든 인류의 문제이고 오늘 성도들에게도 커다란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왜 예수님께서 로마황제가 되지 않았을까 라는 것이야말로 오고 오는 모든 세대들에게 신앙 생활하는 자에게나 믿지 않는 자들에게 문제 거리가 되었단 말입니다.
보세요 이미 예수님을 증거하러 앞서 온 침례요한 마저도 메시야직분의 의심거리가 된 것입니다. 마11:2-6 ‘요한이 옥에서 그리스도의 하신 일을 듣고 제자들을 보내어 예수께 여짜오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 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
침례요한이 옥에서 들으니 자기가 메시야라고 증거 했던 이분이 메시야로서의 기대했던 역할을 안하시고 쓸데없고 별 볼일 없는 패거리들과 몰려다니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당신이 메시야가 맞느냐고 묻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증거로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하라’는 것입니다.
질문과 전혀 맞지 않은 답을 하는 것 같지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로마서 6:6-11 말씀에 기록되어있듯이 예수그리스도의 죽음이 갖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왜 죽으셔야만 했습니까 우리를 죄와 사망이라는 영역에서 구출하여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라는 영역으로 우리를 이전시키시기 위하여 그 방법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 방법 만으로만 가능한 것입니다.
믿는 자에게는 두 개의 영역이 있습니다. 구원 받은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된 영역과 옛 습관과 본성으로 아직도 기웃거리고 있는 옛 영역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으면 마음의 갈등이 훨씬 많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한 마음으로 죄를 지으면 되는데 예수 믿는 자들은 왔다 갔다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침례요한의 자자들에게 대답하신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일어나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는 것은 소경과 눈을 뜬것의 차이를 말씀하는 것입니다. 소경이 병이 나은 것을 말씀하시기보다 소경이 사는 삶의 세계와 눈뜬 자의 사는 세계가 전혀 다른 것입니다. 이것이 메시야가 오셔야하는 이유입니다. 복음을 얻은 자와 얻지 못한 자의 차이를 비교하고 있는 것입니다.
가난한 자가 부자가 되고 소경이 눈을 뜨는 것이 낮았던 자리에서 뭐가 덧붙여지는 지는 것이 아니라 별개의 두 세계, 비교할 수 없는 대조를 우리에게 제시하시고 그 옮김을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오셨다는 것을 우리에게 설명하는 것이 예수님의 답변입니다. 사도행전 3장 1-10절에 보면 우리가 잘 아는 성전미문에서 앉은뱅이 된 자를 걷게 하는 기적의 사건이 나옵니다. 이 사건에서 베드로의 선언은 무엇입니까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어라’입니다.
은과 금과 예수그리스도의 왕 되심을 비교하고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은과 금으로 살았든 그 영역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영역으로 바뀌어 온 것을 증거하는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왜 하필 앉은뱅이가 일어납니까 예수그리스도의 통치는 이를 고쳤다가 아니라 앉은뱅이가 사는 세계와 자기 발로 돌아다니는 세계의 차이를 만들어 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죽으심의 의미입니다.
이것을 모르면 자신의 신앙인 됨과 보상과 삶에 대해서 회의를 가지게 됩니다. 단순히 앉은뱅이가 치료받는 것이 은과 금으로 할 수 없는 것을 종교적인 힘으로 고쳐냈다고 하면 ‘나는 왜 예수 믿었는데 저 사람들보다 못합니까’ 이렇게 나오게 됩니다. 나도 종교적으로 생활했는데 나에게 돈과 건강과 지위가 없습니까 이렇게 나온단 말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딴 세상에 사는 것입니다.
빌립보4:10-13 ‘내가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함은 너희가 나를 생각하던 것이 이제 다시 싹이 남이니 너희가 또한 이를 위하여 생각은 하였으나 기회가 없었느니라 내가 궁핍함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가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이 말씀은 아주 귀한 말씀입니다. 그래서 표구해서 집안에 걸어놓는 경우도 많습니다.
이 말씀을 사도바울이 하게 된 배경은 당시 바울이 로마감옥에 갇혀 있는 상황이었고 빌립보 성도들이 바울에게 여러 번 위로를 해 왔습니다. 찾아오기도 하고 필요한 물건을 넣어주기도 하고 여러 방면으로 바울을 격려하고 위로했습니다. 바울은 빌립보 성도가 찾아온 것에 대해 기뻐했습니다. 그런데 찾아와서 필요를 채워주었기 때문에 기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랑에 참여한 그 자세와 태도가 기뻐다는 말입니다. 바울을 어떠한 경우라도 자족하기를 배웠기 때문에 괜찮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바울은 비천에도 처할 줄 알고 풍부에도 처할 줄 알아 모든 일제의 비밀을 깨달은 사람이었습니다.
풍부한 것과 궁핍한 것은 극단적으로 대조가 됩니다. 그러나 바울이 하는 일은 예수그리스도의 힘으로만 하는 것이기 때문에 궁핍이나 풍부나 그것으로 도움이 되거나 방해가 되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하는 말씀은 내가 하는 일은 내게 능력주시는 자 그리스도로부터만 오는 것으로 힘과 내용을 삼는 일이라서 세상의 것으로는 내가 하려는 것을 도와 줄 수도 없고 방해할 수 도 없는 일이라는 말입니다. 영적인 영역에 속한 일들을 감당하는 사역이라 세상 것으로는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가 준비하고 있고 감당하고 있고 추구하는 것이 세상 것이 아닌데 세상 것으로 기뻐하고 슬퍼하고 힘을 얻기도 하고 잃기도 하고 그렇지 않다는 말입니다.
물론 복음을 위해서 좀더 유리한 내용을 삼기위해 돈이 있어야 되고 권력이 있어야 되고 지혜가 있어야 된다는 것을 부인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분명히 알아야 될 것은 이런 좋은 조건이 있다고 해서 신앙이 성장하는 것도 아니고 헌신하는 것도 아니고 그리고 복음을 전하는데 영향을 받지도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됩니다.
광주 상무대 교회에 다닐 때 거기 교장인 투 스타 장군께서 교회를 다녔습니다. 그러니까 차모들이 줄줄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분이 전출을 가니까 참모들도 다 같이 불교로 전출을 갔다는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복음은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능력으로입니다. 돈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영혼을 사랑하는 열정입니다. 물론 열정과 풍부함이 있었으면 더 좋겠지만 그러나 세상 것으로 큰 영향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좋은 환경과 좋은 조건을 달라고 기도하는 것 정당한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가는 길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것이지, 이왕이면 좋은 차타고 다니십시오. 좋은 집을 위해 기도하십시오. 부자 되십시오. 그러나 그것은 정당한 조건으로만 요구되는 것이지, 그것이 목표가 아닙니다. 우리의 목표는 언제나 하늘나라입니다. 재산을 팔아 보물이 숨겨져 있는 밭을 사는 삶입니다. 아시겠지요.
여러분들이 가졌습니까 가진 것을 어떻게 쓰는가가 신앙의 내용입니다. 여러분이 높은 지위에 계십니까 그 지위를 어떻게 사용하는가 하는 것이지 높은 지위를 더 가지는 것이 신앙의 목표는 아닙니다. 주신 것에 어떻게 쓰임을 받느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점검하시고 확인해야 하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고 그리스도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거룩한 삶을 살 수 있고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을 소유할 수 있고 믿음으로 세상을 이기고 평강과 감사와 감격의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이 성도들의 보람과 보상과 평가입니다. 이것은 사실 조건이 좋으냐, 나쁘냐와 상관이 없습니다. 조건이 나쁜 것에서는 나쁜 대로 여러분의 신앙이 드러날 것이요, 좋으면 좋은 대로 여러분의 신앙이 드러날 것입니다.
여러분이 무능하다고 신자의 삶에 방해 되지 않습니다. 유능하다고 방해되지도 않습니다. 우리는 유능하면 잘난 척 하고 무능하면 꼭 초를 칩니다. 그런데 우리는 양쪽 다 신앙의 삶을 살아가는데 두 조건이 차이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어떤 상황과 형편에 처해 있다하더라도 주님을 드러내는 삶은 차이가 없는 것입니다.
빌립보4:4-7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아무것도 엄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여호와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여호와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왜 기뻐하라고 합니까 왜 관용하라고 합니까 이미 가졌기 때문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 되시고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여러분의 필요를 여호와 하나님 앞에 다 구하십시오. 여호와 하나님이 알아서 해 주실 것입니다. 여기에 나오는 ‘시각에 뛰어난 여호와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이 말씀을 명심하십시오.
우리의 신앙의 실패는, 불평과 불만은 언제나 여호와 하나님 앞에 서 있지 않아서 나타난 결과입니다. 우리의 욕심과 세상의 유혹에 빠져서 여호와 하나님이 부족해 보일 뿐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원망스러워 보입니다. 조용히 여호와 하나님과 만남의 시간을 가져보십시오. 그 분께 목 놓아 한 번 불러보십시오. 간절히 한 번 찾아보십시오. 여호와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 마음과 생각을 지켜주실 것입니다.
성도의 신앙을 점검하는 가장 중요한 평가 기준은 감사할 줄 아는가에 있습니다. 감사는 가진 것을 확인하는데 있고 가진 것을 확인하는데도 영안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가진 것이 없다고 늘 이야기하는데 가진 것이 없는 것처럼 생각하고 삶을 살아가는데 영안을 가지고 한 번 보십시오. 우리가 가진 것이 많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내가 가지지 못한 것만 봅니다.
아닙니다. 이제 가진 것을 보는 시각을 가지세요. 예수님께서 죽으심으로 만드신 십자가를 지심으로 만드신, 귀한 영생이 있습니다. 은혜가 있습니다. 축복이 있습니다. 기적이 있습니다. 치유가 있습니다. 이것을 찾아 누릴 수 있는 복 있는 심령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은혜를 누리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죽으시고 만드신 놀라운 기적들을 누릴 수 있는 복된 심령들이 되시길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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