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려주일] 고난을 수용한 예수님
본문
본문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위하여 붙잡혀 가시기 직전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제자들과 함께 기도하신 내용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들은 여기 머물러 있어 나를 위하여 기도해 줄 것을 요청하시고는 다음과 같이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만일 할만 하시면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하지마시고 아버지 원대로 하옵소서. ”이와 똑같은 기도를 세 번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뜻은 할 수 있다면 십자가를 비켜가는 것이지만 여호와 하나님의 뜻이 십자가를 지는 것이라면 여호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십자가를 지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져 주셨기에 오늘날 죄인이 의인이 되고,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자유인이 되고, 풍요로운 삶을 살게 되었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예수님께서 왜 고난의 잔을 피하지 않고 감수해야만 했는지 3가지로 나누어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1 한 알의 밀이 썩어야 많은 열매를 맺기 때문입니다.
한 알의 밀이 썩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썩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요12:24) 밀알이 만약 거름냄새나 습기 찬 땅속에 들어가기 싫다고 해서 한 알 그대로 있으면 열매를 맺을 수 없을 뿐더러 결국에는 자기도 죽고 열매도 없게 됩니다.
아담과 하와가 여호와 하나님께서 금해 놓으신 선악과를 따먹음으로 이 세상에 저주와 멸망이 왔습니다. 유혹의 고난을 극복하지 못한 결과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고난의 잔을 받아 마심으로 세상에 죄사함과 용서, 사랑과 영생을 주셨습니다.
인간 예수님으로서는 이 고통을 수용하기에 역부족이었기 때문에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 십자가의 고통을 수용할 수 있는 능력을 구하기 위해서 기도하신 것이었습니다. 그 때, 이마에서 떨어지는 땀방울은 핏방울 같이 보일 정도였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예수님이 당하신 십자가의 고통은 인간으로써는 질 수가 없는 일이었습니다.
“아버지여, 만일 할만 하시면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하지마시고 아버지 원대로 하옵소서. ”
결국 예수님은 여호와 하나님의 뜻대로 십자가의 고통을 혼자서 감당하셨습니다. 오늘날은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세상이 되었지만, 우리 기독교는 예수님과 같이 여호와 하나님이 주시는 고난의 쓴잔을 받아 마실 줄 알아야 하겠습니다.
고난의 잔을 마실 줄 아는 성도들이 많을 때 많은 영혼들이 구원되고, 이 사회가 밝아지고, 미래가 밝아지게 됩니다. 자기의 고난을 다른 사람들에게 미루고 피해가는 사람들이 많은 사회는 어두운 사회, 부패가 난무하는 사회입니다. 따라서 아무도 돌아보지 않아도 자기의 쓴잔을 짊어지고 자기 길을 갈 줄 아는 사람들이 존경받고, 사랑받고, 인정받는 사회가 되도록 우리 기독교인들은 노력해야 합니다.
지금까지는 비켜갈 줄 모르고, 고집스럽게 자기의 짐을 지고 고통스럽게 살아가는 사람을 바보나 실력부재 사람으로 취급했다면 그것은 잘못입니다. ‘Shindler's List'(쉰들러의 명단)이란 헐리우드의 영화가 세계적으로 흥행의 성공과 더불어 전쟁 속에서 꽃핀 휴머니즘으로 보는 이들의 가슴마다 감격을 주었습니다. 이야기는 제2차 세계대전 말 나치 죽음의 수용소에서 1200명의 유대인을 극적으로 구출해 낸 독일인의 영웅 오스카 쉰들러씨와 그의 부인 에밀리가 펼친 감동적인 이야기입니다.
쉰들러 부부는 믿음이 독실한 독일 사람으로, 나치를 설득하여 1천명의 유대인을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빼돌리는데 성공했습니다. 구실로는 폴란드 크라코에 신설한 독일군 무기도금 공장에서 일을 시킨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쉰들러 부부는 1천명의 유대인 노동자의 편한 숙소와 영양이 충분한 식사를 위해 밤낮으로 노력하여 결국 그들의 전 재산을 다 쏟아 부었습니다.
1944년 독일 군이 연합군에게 밀리자 나치는 수많은 사람들을 아우슈비츠로 돌려보내 가스실에서 학살시켰습니다. 그러자 쉰들러 부부는 체코의 브린리츠에 있는 무기 공장에 많은 노동력이 필요하다는 구실로 오히려 아우슈비츠에서 죽음을 기다리는 200명을 더 빼내 도합 1200명을 보호하다 1945년에 전원 도망시키는데 성공했습니다.
이와 같은 쉰들러 부부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여러 사람이 지금까지 생존하고 있습니다. 보에노스 아이레스에 사는 생존자 위흐터씨는 그때를 회상하면서 “쉰들러 내외는 위험을 무릅쓰고 우리를 도왔다. 그들은 식사도 자기들과 함께하고 우리의 친구가 되었고 희망과 빛이었다”라고 말했습니다.
쉰들러 부인은 남편의 무덤 앞에서 기자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의 삶은 고생과 위험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러나 행복했습니다. 나혼자의 행복을 찾는 것보다 이웃의 행복을 위하여 사는 것이 예수님을 믿는 자의 행복 아니겠습니까 그 엄청난 일은 우리가 한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으로만 가능했습니다. ”고난의 잔을 마시는 사람들이 있어야 나라도 잘되고, 교회도 부흥될 수 있습니다.
2 십자가 없이는 면류관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고난의 잔을 마셔 주셨기에 영광스러운 부활의 아침이 왔고, 구원받은 성도들로부터 영원한 찬양과 감사와 경배를 받으시게 되었습니다. 계시록을 보면 어린양의 피로 속죄 받은 천천만만의 셀 수 없는 성도들이 찬양과 감사와 존귀와 영광을 돌리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십자가의 고난의 잔을 마셨기에 이런 영광이 있는 것입니다.
스펄전 목사님은 이 땅에서 십자가를 지지 않고서는 천국에서 면류관을 쓸 사람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이와 같이 십자가의 고난의 잔을 마시지 않고서는 축복의 잔이나 영광의 잔을 마실 수 없습니다. 달콤한 것 속에는 멸망과 파괴의 독이 들어 있을 뿐입니다.
잠5:3 음녀의 입술은 꿀을 떨어뜨리며 그 입술은 기름보다 미끄러우며 나중에는 쑥같이 쓰고 두 날가진 칼 같이 날카로우며 그 발은 사지로 내려가며 그 걸음은 음부로 내려간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달콤하고 미끄러울수록 나중에는 백배 천배 쓴 맛을 보게 되고 두 날 가진 칼로 살을 도려내는 고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복의 근원이 되어서 그를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고, 그를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게 된 것은 누구보다 여호와 하나님이 주시는 고난의 잔을 많이 마셨기 때문입니다. 정든 고향을 떠나라 하실 때 떠났고, 하갈과 이스마엘을 쫓아내라고 하실 때 냉정하게 말씀대로 내어 쫓았으며,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고 하셨을 때 바치려고 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주시는 쓴잔, 고난의 잔을 순순히 받아마셨기에 여호와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뛰어난 인물이 되게 하셨고, 믿음의 조상이 되게 하셨고, 복의 근원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십자가의 고난의 잔은 싫어하고 달콤한 면류관만 받아쓰려고 하면 문제가 생깁니다. 이런 현상이 개인의 양심을 흩트려 놓고 사회를 혼란케 만들고, 국가를 병들게 만들고, 결국은 문제만 남기게 합니다.
3 고난의 잔을 회피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이나 일상생활에서 쓴잔을 회피하는 약삭빠른 버릇은 버려야 합니다. 남들이 피하고 남겨둔 쓴잔을 잘 받아 마시는 사람이 여호와 하나님께 인정받고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칭찬받고 대접받는 자리에는 빠지지 않고, 괴롭고 힘들고 희생을 요구하는 자리에서는 빠져나가 버립니다. 이처럼 타산적이고 약삭빠른 사람들은 여호와 하나님도 인정하지 않으시고, 사람들도 존경하지 않습니다. 옛말에 농속에 간직된 비단이 되지 말고, 손쉽고 필요할 때 쓰이는 걸레가 되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괴로운 일, 궂은 일, 귀찮은 일, 고달픈 일에 앞장서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전7:4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으되 우매한 자의 마음은 혼인집에 있느니라” 좋은 음식을 차려놓고 놀이하는 잔칫집에 가는 것은 좋아하면서 송장 냄새나고, 밤을 새워야 하고, 무거운 관을 메야하는 상갓집에는 가기를 싫어해서는 안 됩니다.
다윗이 여호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고 인정을 받은 것은 양떼를 지킬 때 밤잠을 자지 않고 지켰으며, 곰이나 사자가 나타났을 때에는 목숨을 아끼지 않고 쫓아가 물리쳤고, 다른 형들이 싫어하는 일들을 그가 도맡아 했기 때문입니다. 양떼가 맹수에게 물려가든 말든 낮잠이나 자고 게으름이나 피웠다면 그는 결코 여호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골리앗 장군을 물리친 것도 다른 장수들은 겁이나 나가지 못할 때, 다윗은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물맷돌로 물리쳤습니다. 다윗은 궂은 일, 수고스러운 일, 고난의 일을 회피하지 않고 일했기에 축복을 받았습니다.
나에게 주어진 고통이라면, 또 여호와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면, 아무리 어려워도 피하지 말고 감당해 냅시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크게 사용하실 것입니다.
로마의 박해가 심할 때 베드로는 순교하려고 했으나 잠시 피했다가 다음에 복음을 더 많이 전해야 되지 않겠느냐는 제자들이 간청에 할 수 없이 로마 성을 빠져나가 알반 언덕에 이르렀습니다. 그 때, 베드로는 환한 빛이 비치면서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로마 성으로 들어가고 있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주여, 어디로 가십니까”“네가 양떼를 버리고 도망가니 내가 가서 십자가를 져야 겠노라”베드로는 발걸음을 돌이켜 로마로 들어가 거꾸로 십자가에 매달려 순교했습니다.
내게 주어진 십자가는 내가 지지 않고 피해버린다면 다른 사람이 대신 져야 합니다.
신앙의 선배들, 존경받는 위대한 인물들, 남들이 싫어하는 고난의 잔을 회피하지 않고 잘 마셨습니다. 아무리 아프고 고통스러운 십자가라 하더라도 수용해야 될 이유는 십자가를 져야만 열매를 맺고, 면류관을 받게 되기 때문입니다.
어렵지만 십자가를 흔쾌히 질 때 여호와 하나님께서 사용하심을 믿고, 괴로운 일궂은 일귀찮은 일고달픈 일에 앞장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버지여, 만일 할만 하시면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하지마시고 아버지 원대로 하옵소서. ”이와 똑같은 기도를 세 번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뜻은 할 수 있다면 십자가를 비켜가는 것이지만 여호와 하나님의 뜻이 십자가를 지는 것이라면 여호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십자가를 지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져 주셨기에 오늘날 죄인이 의인이 되고,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자유인이 되고, 풍요로운 삶을 살게 되었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예수님께서 왜 고난의 잔을 피하지 않고 감수해야만 했는지 3가지로 나누어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1 한 알의 밀이 썩어야 많은 열매를 맺기 때문입니다.
한 알의 밀이 썩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썩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요12:24) 밀알이 만약 거름냄새나 습기 찬 땅속에 들어가기 싫다고 해서 한 알 그대로 있으면 열매를 맺을 수 없을 뿐더러 결국에는 자기도 죽고 열매도 없게 됩니다.
아담과 하와가 여호와 하나님께서 금해 놓으신 선악과를 따먹음으로 이 세상에 저주와 멸망이 왔습니다. 유혹의 고난을 극복하지 못한 결과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고난의 잔을 받아 마심으로 세상에 죄사함과 용서, 사랑과 영생을 주셨습니다.
인간 예수님으로서는 이 고통을 수용하기에 역부족이었기 때문에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 십자가의 고통을 수용할 수 있는 능력을 구하기 위해서 기도하신 것이었습니다. 그 때, 이마에서 떨어지는 땀방울은 핏방울 같이 보일 정도였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예수님이 당하신 십자가의 고통은 인간으로써는 질 수가 없는 일이었습니다.
“아버지여, 만일 할만 하시면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하지마시고 아버지 원대로 하옵소서. ”
결국 예수님은 여호와 하나님의 뜻대로 십자가의 고통을 혼자서 감당하셨습니다. 오늘날은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세상이 되었지만, 우리 기독교는 예수님과 같이 여호와 하나님이 주시는 고난의 쓴잔을 받아 마실 줄 알아야 하겠습니다.
고난의 잔을 마실 줄 아는 성도들이 많을 때 많은 영혼들이 구원되고, 이 사회가 밝아지고, 미래가 밝아지게 됩니다. 자기의 고난을 다른 사람들에게 미루고 피해가는 사람들이 많은 사회는 어두운 사회, 부패가 난무하는 사회입니다. 따라서 아무도 돌아보지 않아도 자기의 쓴잔을 짊어지고 자기 길을 갈 줄 아는 사람들이 존경받고, 사랑받고, 인정받는 사회가 되도록 우리 기독교인들은 노력해야 합니다.
지금까지는 비켜갈 줄 모르고, 고집스럽게 자기의 짐을 지고 고통스럽게 살아가는 사람을 바보나 실력부재 사람으로 취급했다면 그것은 잘못입니다. ‘Shindler's List'(쉰들러의 명단)이란 헐리우드의 영화가 세계적으로 흥행의 성공과 더불어 전쟁 속에서 꽃핀 휴머니즘으로 보는 이들의 가슴마다 감격을 주었습니다. 이야기는 제2차 세계대전 말 나치 죽음의 수용소에서 1200명의 유대인을 극적으로 구출해 낸 독일인의 영웅 오스카 쉰들러씨와 그의 부인 에밀리가 펼친 감동적인 이야기입니다.
쉰들러 부부는 믿음이 독실한 독일 사람으로, 나치를 설득하여 1천명의 유대인을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빼돌리는데 성공했습니다. 구실로는 폴란드 크라코에 신설한 독일군 무기도금 공장에서 일을 시킨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쉰들러 부부는 1천명의 유대인 노동자의 편한 숙소와 영양이 충분한 식사를 위해 밤낮으로 노력하여 결국 그들의 전 재산을 다 쏟아 부었습니다.
1944년 독일 군이 연합군에게 밀리자 나치는 수많은 사람들을 아우슈비츠로 돌려보내 가스실에서 학살시켰습니다. 그러자 쉰들러 부부는 체코의 브린리츠에 있는 무기 공장에 많은 노동력이 필요하다는 구실로 오히려 아우슈비츠에서 죽음을 기다리는 200명을 더 빼내 도합 1200명을 보호하다 1945년에 전원 도망시키는데 성공했습니다.
이와 같은 쉰들러 부부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여러 사람이 지금까지 생존하고 있습니다. 보에노스 아이레스에 사는 생존자 위흐터씨는 그때를 회상하면서 “쉰들러 내외는 위험을 무릅쓰고 우리를 도왔다. 그들은 식사도 자기들과 함께하고 우리의 친구가 되었고 희망과 빛이었다”라고 말했습니다.
쉰들러 부인은 남편의 무덤 앞에서 기자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의 삶은 고생과 위험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러나 행복했습니다. 나혼자의 행복을 찾는 것보다 이웃의 행복을 위하여 사는 것이 예수님을 믿는 자의 행복 아니겠습니까 그 엄청난 일은 우리가 한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으로만 가능했습니다. ”고난의 잔을 마시는 사람들이 있어야 나라도 잘되고, 교회도 부흥될 수 있습니다.
2 십자가 없이는 면류관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고난의 잔을 마셔 주셨기에 영광스러운 부활의 아침이 왔고, 구원받은 성도들로부터 영원한 찬양과 감사와 경배를 받으시게 되었습니다. 계시록을 보면 어린양의 피로 속죄 받은 천천만만의 셀 수 없는 성도들이 찬양과 감사와 존귀와 영광을 돌리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십자가의 고난의 잔을 마셨기에 이런 영광이 있는 것입니다.
스펄전 목사님은 이 땅에서 십자가를 지지 않고서는 천국에서 면류관을 쓸 사람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이와 같이 십자가의 고난의 잔을 마시지 않고서는 축복의 잔이나 영광의 잔을 마실 수 없습니다. 달콤한 것 속에는 멸망과 파괴의 독이 들어 있을 뿐입니다.
잠5:3 음녀의 입술은 꿀을 떨어뜨리며 그 입술은 기름보다 미끄러우며 나중에는 쑥같이 쓰고 두 날가진 칼 같이 날카로우며 그 발은 사지로 내려가며 그 걸음은 음부로 내려간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달콤하고 미끄러울수록 나중에는 백배 천배 쓴 맛을 보게 되고 두 날 가진 칼로 살을 도려내는 고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복의 근원이 되어서 그를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고, 그를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게 된 것은 누구보다 여호와 하나님이 주시는 고난의 잔을 많이 마셨기 때문입니다. 정든 고향을 떠나라 하실 때 떠났고, 하갈과 이스마엘을 쫓아내라고 하실 때 냉정하게 말씀대로 내어 쫓았으며,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고 하셨을 때 바치려고 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주시는 쓴잔, 고난의 잔을 순순히 받아마셨기에 여호와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뛰어난 인물이 되게 하셨고, 믿음의 조상이 되게 하셨고, 복의 근원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십자가의 고난의 잔은 싫어하고 달콤한 면류관만 받아쓰려고 하면 문제가 생깁니다. 이런 현상이 개인의 양심을 흩트려 놓고 사회를 혼란케 만들고, 국가를 병들게 만들고, 결국은 문제만 남기게 합니다.
3 고난의 잔을 회피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이나 일상생활에서 쓴잔을 회피하는 약삭빠른 버릇은 버려야 합니다. 남들이 피하고 남겨둔 쓴잔을 잘 받아 마시는 사람이 여호와 하나님께 인정받고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칭찬받고 대접받는 자리에는 빠지지 않고, 괴롭고 힘들고 희생을 요구하는 자리에서는 빠져나가 버립니다. 이처럼 타산적이고 약삭빠른 사람들은 여호와 하나님도 인정하지 않으시고, 사람들도 존경하지 않습니다. 옛말에 농속에 간직된 비단이 되지 말고, 손쉽고 필요할 때 쓰이는 걸레가 되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괴로운 일, 궂은 일, 귀찮은 일, 고달픈 일에 앞장서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전7:4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으되 우매한 자의 마음은 혼인집에 있느니라” 좋은 음식을 차려놓고 놀이하는 잔칫집에 가는 것은 좋아하면서 송장 냄새나고, 밤을 새워야 하고, 무거운 관을 메야하는 상갓집에는 가기를 싫어해서는 안 됩니다.
다윗이 여호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고 인정을 받은 것은 양떼를 지킬 때 밤잠을 자지 않고 지켰으며, 곰이나 사자가 나타났을 때에는 목숨을 아끼지 않고 쫓아가 물리쳤고, 다른 형들이 싫어하는 일들을 그가 도맡아 했기 때문입니다. 양떼가 맹수에게 물려가든 말든 낮잠이나 자고 게으름이나 피웠다면 그는 결코 여호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골리앗 장군을 물리친 것도 다른 장수들은 겁이나 나가지 못할 때, 다윗은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물맷돌로 물리쳤습니다. 다윗은 궂은 일, 수고스러운 일, 고난의 일을 회피하지 않고 일했기에 축복을 받았습니다.
나에게 주어진 고통이라면, 또 여호와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면, 아무리 어려워도 피하지 말고 감당해 냅시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크게 사용하실 것입니다.
로마의 박해가 심할 때 베드로는 순교하려고 했으나 잠시 피했다가 다음에 복음을 더 많이 전해야 되지 않겠느냐는 제자들이 간청에 할 수 없이 로마 성을 빠져나가 알반 언덕에 이르렀습니다. 그 때, 베드로는 환한 빛이 비치면서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로마 성으로 들어가고 있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주여, 어디로 가십니까”“네가 양떼를 버리고 도망가니 내가 가서 십자가를 져야 겠노라”베드로는 발걸음을 돌이켜 로마로 들어가 거꾸로 십자가에 매달려 순교했습니다.
내게 주어진 십자가는 내가 지지 않고 피해버린다면 다른 사람이 대신 져야 합니다.
신앙의 선배들, 존경받는 위대한 인물들, 남들이 싫어하는 고난의 잔을 회피하지 않고 잘 마셨습니다. 아무리 아프고 고통스러운 십자가라 하더라도 수용해야 될 이유는 십자가를 져야만 열매를 맺고, 면류관을 받게 되기 때문입니다.
어렵지만 십자가를 흔쾌히 질 때 여호와 하나님께서 사용하심을 믿고, 괴로운 일궂은 일귀찮은 일고달픈 일에 앞장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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