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려주일]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기도
본문
기독교에서는 오늘 이 주일을 종려주일로 지키고 이번 한 주간을 고난주간으로 지키게 됩니다. 종려주일이라는 것은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고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성에 들어가셔서 사람들에게 왕으로 높임을 받으시던 그 날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그리고 고난주일이라는 것은 이 종려주일을 시작으로 해서 주님께서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마지막 한 주간을 기념하면서 지키는 주간입니다.
그리고 이 고난주일이 끝나는 날을 부활주일로 지키게 됩니다.
그래서 종려주일과 고난주간 부활주일 이렇게 이어지는 한 주간을 과거부터 Greet week, 대주간이라고 해서 전통적으로 가장 큰 절기로 여겨왔습니다.
주님의 고난과 부활이야말로 우리 신앙에 있어서 가장 중심된 요소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2 잘못된 메시야 사상
그런데 참 묘한 것은 종려주일 때에 예루살렘에서 그렇게 열렬하게 예수님을 찬양하던 사람들이 딱 일 주일만에 예수님께로부터 등을 돌리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지르면서 흥분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하시기 한 주일 전에 제자들과 함께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성에 들어가셨을 때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나와서 예수님을 영접하고 예수님을 향해서 '호산나 다윗의 자손으로 오시는 이여' 하면서 외쳤습니다.
사람들이 이렇게 예수님을 열렬하게 환호한 것은 예수님이야 말로 이스라엘의 진정한 왕이고 자신들을 구원할 메시야로 받아들였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생각해 보면 이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았는가 생가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사람들이 생각하는 메시야, 구원자라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메시야와 너무나 달랐다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주님께서 정말로 메시야라면 언젠가는 이 예루살렘을 차지하고 이스라엘의 왕으로 즉위해서 그 강한 능력으로 이스라엘을 부강하게 만들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사람들은 메시야를 기다리면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어 주실 메시야라든가,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영원한 멸망에서 구원하시는 그런 메시야를 기다린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정치적인 메시야, 우리 민족만의 메시야, 우리 민족을 로마로부터 구원할 메시야, 다윗과 솔로몬 시절의 그 영화와 번영을 회복시켜 줄 메시야. 그런 메시야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성에 들어가셨을 때 사람들은 대단히 흥분했습니다.
나귀를 탄다는 것은 왕의 모습을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사람들은 지금이 바로 자기들이 희망하던 바로 그 때 인가보다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이런 기대감은 오래 가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고 난 뒤에 사람들은 주님께서 당장에 제사장들을 쫓아내시고 유대의 지도자들도 쫓아내시고 심지어 빌라도의 군대까지 내어 쫓으리라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왕의 모습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뒤에도 여전히 정치적인 일이나 군사적인 일 에는 신경을 쓰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주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어야 한다는 것을 본격적으로 말씀하시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은 점 점 예수님에 대해서 실망 하고 예수님으로부터 등을 돌리기 시작했습니다.
자기들이 바라는 메시야의 모습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예수님의 제자였던 가롯 유다라는 사람은 예수님을 대제사장들에게 팔아 넘기기로 작정하였습니다. 예수님을 더 따라 다녀봐야 더 이상 건질 것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결국 사람들의 손에 붙들려 제사장에게로 끌려가 심문을 받고 십자가의 길을 가게 되신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런 주님의 모습을 보고는 실패한 혁명가다. 거짓 메시야다 그렇게 말을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정치적으로나 군사적으로나 어떤 혁명을 일으키지 않으신 것은 주님의 계획이 실패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주님이 하시고자 하신다면 굳이 혁명을 일으킬 필요가 뭐 있겠습니까
본래부터 이 모든 세상의 주인은 주님이십니다. 세상이 주님의 것이니까 주님께서 천사들을 불러 서 세상을 통치하실 수 있습니다.
나중에 베드로가 주님을 잡으러 온 사람들을 보고 화가 나서 그 중에 한 사람의 귀를 칼로 잘라버렸지 않습니까 그 때 주님께서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마26:53-54을 보면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 두 영 더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리요" 하셨습니다.
주님은 지금 당장이라도 그렇게 하늘 군대를 불러서 세상을 다스리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일들은 주님에게 있어서 전혀 힘든 문제가 아닙니다.
그러나 만약에 그렇게 한다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계획하셨던 일들은 어떻게 됩니까 이루어 질 수 없습니다. 어떤 일입니까 주님이 십자가를 지시는 일이지요.
세상을 일시적으로 뒤집는 일은 무력으로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죄를 사하시고 구원하시는 일은 군대를 불러서 되는 일이 아닙니다.
사람을 죄와 영원한 멸망에서 구원하신다는 여호와 하나님의 그 구원의 계획은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잡혀서 죽어 주셔야지 되는 일입니다.
주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지 않으시면 사람들은 죄로 인하여 진노와 멸망을 피할 수 가 없습니다.
로마의 압제를 당하며 살아가는 일도 힘들고 어려운 일이지만 그것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당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죄로 인한 진노와 멸망은 영원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히9:27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말씀하셨습니다.
이 진노와 멸망의 심판은 아무도 피해갈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이 진노와 멸망의 심판을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오직 세상을 다스릴 권세를 가지셨으면서도 그 권세를 포기하고 우리를 위해 대신해서 죽기로 작정하신 주님께 달려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이시면서도 수 많은 사람들의 조롱과 멸시를 받으면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의 길을 택하신 것입니다.
오늘 이 본문의 사건을 보면 사실은 주님이 그런 십자가의 길을 결정하기 까지 주님 자신도 얼마나 고민하고 고통스러워 하셨는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3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고민과 기도
1. 겟세마네로 향하신 주님과 제자들
주님께서 사람들에게 잡하시기 전 날 밤에 주님은 제자들과 함께 최후의 만찬을 나누셨고 제자들에게 이제 예수님 자신이 죽임을 당할 것이라는 사실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제자들 중에 있던 베드로가 그 말씀을 듣고서는 당장에 나서서 말하기를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주를 버리지 않겠나이다" 그렇게 다짐을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런 베드로의 다짐을 믿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베드로나 제자들이 지금을 그렇게 다짐을 하지만 결국은 주님을 부인하고 모두 다 도망가게 되리라는 것을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런 제자들을 데리고 다시 겟세마네 동산으로 올라 가셨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이 동산에서 제자들과 함께 기도하기를 원하셨습니다.
36절 말씀을 보면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저기 가서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하셨습니다. 그리고는 베드로와 세배대의 두 아들을 따로 데리고 가시면서 이들에게는 주님과 함께 깨어 있으라고 하셨습니다. 누가복음22장을 보면 기도하라고 되어 있습니다.
2. 고민하는 주님
그런데 이렇게 기도하라고 말씀하시는 주님의 그 심정이 평소 때 처럼 편안하지를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이제 이 밤이 지나고 나면 십자가에 달려 죽게 되리라는 것을 알고 계셨기 때문이지요.
물론 이 일은 어쩔 수 없이 당하게 된 것이 아닙니다.
주님 자신이 그 길을 가리라고 선택하신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일을 주님 자신이 선택했다고는 하지만 십자가를 지고 죽어야 한다는 그것을 생각할 때 주님의 마음은 너무나 고통스러웠습니다.
당시에 로마 제국은 그렇게 잔인한 나라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국가에 중대한 해가 된다고 판단되는 시국사범들에 대해서만은 아주 끔찍한 형벌로 다스렸는데 그 끔찍한 형벌들 중에서도 가장 끔찍한 형벌이 바로 십자가 형벌이었습니다.
이 형벌은 죄수의 손과 발목에 못을 쳐서 나무 십자가에 매달아 놓는 간단한 형벌인데 실제로 죄수가 그렇게 십자가에 달리게 되면 그 달린 사람의 몸무게 때문에 뼈마디가 끊어져 나가는 그런 고통을 느끼게 되고 심장은 점 점 압박을 받으면서 호흡이 힘들어 지고, 계속해서 피를 흘리면서 서서히 죽어가는 아주 끔찍한 형벌입니다. 대체로 이렇게 사람들이 십자가 달려서 죽을 때 까지 걸리는 시간은 약 시간 정도라고 합니다.
그러니 십자가에 달린 죄수의 그 고통이 얼마나 엄청나겠습니까
주님도 이미 십자가의 형벌과 고통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이 땅에 인간의 모습으로 계실 때, 주님은 우리와 똑같은 감성과 육신을 가지셨습니다. 우리가 배고프듯이 주님도 배고픔을 느끼셨고, 우리가 슬퍼서 눈물을 흘리듯이 주님도 슬픔을 느끼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손과 발에 못을 박고 십자가를 지웠을 때 당하신 그 고통은, 우리 몸에 못을 박고 십자가를 지울 때 받는 것과 똑 같은 고통을 당하시는 것입니다.
사실 주님은 여호와 하나님의 본체시며 여호와 하나님과 동등된 분이라고 했지 않습니까. 그런데 주님이 우리를 위하여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다는 그것만 해도 주님으로서는 자기 자신을 무한히 낮춘 일입니다. 그런데 거기서 그치지 않고 이제는 사람들도 잘 당하지 않는 그런 형벌을 받아서 저주 가운데 죽어야 한다는 이 사실을 생각할 때 얼마나 고통스러웠겠습니까
37절을 보면 주님께서 고민하고 슬퍼하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38절을 보면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다고 하셨습니다.
주님이 얼마나 고통스러웠으면 이렇게 연약한 제자들에게 조차 주님의 마음을 표현하셨겠습니까
그리고 기도하시면서 말씀하시기를 "아버지여 만일 할 만 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하셨습니다. 할 수 만 있다면 이 십자가만은 안 졌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22장을 보면 주님께서 얼마나 고통 가운데 고민하며 간절하게 기도했는지 그 흐르는 땀이 땅에 떨어지는 피 방울 같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본문 44절을 보면 주님께서 십자가를 피할 수 있다면 피하게 해달라는 똑같은 기도를 세 번이나 반복했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주님의 이 고민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죽음 앞에 서 있는 고민. 그러나 단순한 죽음이 아니라 엄청난 고통이 따르는 십자가에서의 죽음을 당해야 한다는 그 고민. 하지만 자신의 죄 때문에 죽는 것이 아니고 다른 사람들의 죄를 위해서 죽어야 한다는 고민. 지금도 하늘의 군사들을 불러 세상을 심판하실 수 있는 권세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 권세를 스스로 포기하고, 십자가를 선택해야 한다는 그런 고민들을 우리가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주님이 이렇게 고민하고 고통스러워 했던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우리 때문이었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생각하지 않으셨다면 그렇게 고통하며 기도하실 필요가 있겠습니까
주님이 우리를 생각하지 않으셨다면 당장에라도 주님의 천사들을 불러서 이 땅을 심판하셨을 것입니다. 어떻게 자신이 만드신 사람들에게 자신이 잡혀 죽으실 수가 있습니까
그러나 주님이 대신 죽지 않으면 우리가 멸망해야 되니까 주님은 이 길을 그만 둘 수가 없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주님이 흘리신 그 눈물을 생각하면 이 일을 더 분명히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오늘 읽은 이 본문을 보면 주님은 십자가를 지셔야 한다는 그 사실을 앞에 두고 매우 슬퍼하셨다고 했는데. 히5:7을 보면 이 사건을 두고 말씀하시기를 주님은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기도하시면서 심한 통곡을 하시고 눈물을 흘리셨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주님이 눈물을 흘리신 적이 또 있었습니다. 언제일까요
첫째는 주님께서 나사로의 집을 방문하셨을 때 나사로의 누이였던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서 말하기를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하면서 나사로가 이미 죽었음을 알려주었을 때 주님은 눈물을 흘리셨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주님은 나사로를 살려 주실려고 이미 작정 하셨습니다. 그런데 왜 굳이 나사로의 죽음 때문에 눈물을 흘리셨을까요
그것은 인간을 위한 눈물이었습니다.
주님이 아니라면 죽을 수 밖에 없고, 주님이 아니라면 멸망할 수 밖에 없는 그런 인간의 죄와 비참을 보시고 슬퍼하며 눈물을 흘리신 것입니다.
주님이 이 세상에 인간의 몸으로 오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로 그런 인간의 죄와 비참을 해결해 주시기 위해서 인 것이죠.
그리고 둘째는 예루살렘 성을 바라 보시면서 눈물을 흘리셨다고 했습니다. 이제 얼마 있지 않으면 이 예루살렘 성은 무너지고 파괴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 아무리 말씀을 증거하고 아무리 많은 기적을 보여 줘도 도무지 주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고 자기 죄를 회개치 아니하는 이 예루살렘 성의 사람들을 보시면서 너무나 안타까운 그런 마음으로 눈물을 흘리며 우셨다는 것입니다.
이것도 역시 인간을 위한 눈물이었지요.
여러분, 주님은 인간의 죄를 인하여 우셨습니다.
주님은 인간의 그 죄로 인한 멸망을 바라보면서 우셨습니다.
주님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을 가지지 못하는 이 세대를 바라보면서 우셨습니다.
여러분, 주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내일이면 십자가를 져야 한다는 그 엄청난 고통을 가지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 하시면서도 절대로 그 십자가의 길을 포기하지 않으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지금 얼마든지 십자가를 팽개치고 하늘의 권세를 가지실 수 있으 시면서도 그 길을 택하지 않으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우리 때문입니다.
나사로를 보시고 우셨던 것처럼, 예루살렘을 바라보며 우셨던 것처럼. 주님은 우리를 생각할 때 절대로 십자가를 포기할 수 없으셨던 것입니다.
주님은 그것을 생각하시면서 우리가 멸망 당하도록 버려두는 그것 보다는 주님이 십자가를 지시는 쪽을 택하신 것입니다.
그러기에 주님은 그렇게 고민하며 죽게 된 지경이었지만 결국에는 어떻게 기도하셨습니까
39절을 보면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했습니다.
십자가의 길을 가시겠다는 것입니다.
이사야는 이런 주님의 고난을 미리 예언하면서 사53:5-6에서 그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길로 같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 시켰도다. "
사람들은 이렇게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고 실패한 혁명가다. 거짓 선지자라고 조롱했습니다.
그러나 로마서5:8을 보면 이렇게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주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이것이야말로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그 사랑에 대한 확증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십자가를 지시면서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십자가를 따라오면서 눈물을 흘리던 여인들을 향하여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눅23:28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하셨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위해서 해 주실 일은 다 이루셨다는 것입니다.
이제 남은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그것을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그 십자가와 사랑을 받아들이고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살아가느냐 아니면 주님을 믿지 못하고 회개치 못하여 멸망의 길을 떠나지 못하느냐는 것은 우리에게 달려 있습니다.
그러니 주님은 우리에게 그렇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멸망을 향해 끊임 없이 달려가고 있는 이 세대의 자녀들을 위하여 울라고 하신 것입니다.
EX) 잃어 버린 아이를 찾는 아버지의 모습을 TV에서 보도해준 적이 있었습니다.
아이를 잃어버린 지가 벌써 2년이 지났는데도 이 아버지는 아이를 잃어버리고 난 뒤에 제대로 직장생활도 못하고 그만두고, 시간만 나면 아이를 찾아 나선다는 것입니다.
전단지도 인쇄해서 돌리고 사람마다 만나서 물어보고…
그러다가 한 번은 아이들이 붙들려서 앵벌이 같은 일을 하기도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리고는 하루도 편안하게 자 본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제가 한 번 그런 생각을 해 봤습니다.
어느 하늘 아래 아이가 고생하고 있을 것을 생각하면 도저히 그냥 살아갈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모습을 보면서 한 영혼이 죄로 인하여 멸망으로 끌려가는 모습을 보고 계신 여호와 하나님의 심정은 어떨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심정은 더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자신의 독생하신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면서 까지 남은 아이들을 찾으시려 하신 것이 아닙니까
4. 결 론
자녀가 부모의 심정을 다 알 수 없는 것과 같이 우리가 아무리 애써도 주님의 심정을 다 알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고난 주간을 보내면서 주님의 그 고난이 바로 나를 사랑하사 나를 구하시기 위한 고난이었다는 이 한 가지를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주님의 그 사랑을 더 깊이 알게 되고 주님과 더불어 살아가고 주님을 위하여 함께 고난을 감당할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리고 고난주일이라는 것은 이 종려주일을 시작으로 해서 주님께서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마지막 한 주간을 기념하면서 지키는 주간입니다.
그리고 이 고난주일이 끝나는 날을 부활주일로 지키게 됩니다.
그래서 종려주일과 고난주간 부활주일 이렇게 이어지는 한 주간을 과거부터 Greet week, 대주간이라고 해서 전통적으로 가장 큰 절기로 여겨왔습니다.
주님의 고난과 부활이야말로 우리 신앙에 있어서 가장 중심된 요소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2 잘못된 메시야 사상
그런데 참 묘한 것은 종려주일 때에 예루살렘에서 그렇게 열렬하게 예수님을 찬양하던 사람들이 딱 일 주일만에 예수님께로부터 등을 돌리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지르면서 흥분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하시기 한 주일 전에 제자들과 함께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성에 들어가셨을 때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나와서 예수님을 영접하고 예수님을 향해서 '호산나 다윗의 자손으로 오시는 이여' 하면서 외쳤습니다.
사람들이 이렇게 예수님을 열렬하게 환호한 것은 예수님이야 말로 이스라엘의 진정한 왕이고 자신들을 구원할 메시야로 받아들였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생각해 보면 이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았는가 생가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사람들이 생각하는 메시야, 구원자라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메시야와 너무나 달랐다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주님께서 정말로 메시야라면 언젠가는 이 예루살렘을 차지하고 이스라엘의 왕으로 즉위해서 그 강한 능력으로 이스라엘을 부강하게 만들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사람들은 메시야를 기다리면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어 주실 메시야라든가,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영원한 멸망에서 구원하시는 그런 메시야를 기다린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정치적인 메시야, 우리 민족만의 메시야, 우리 민족을 로마로부터 구원할 메시야, 다윗과 솔로몬 시절의 그 영화와 번영을 회복시켜 줄 메시야. 그런 메시야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성에 들어가셨을 때 사람들은 대단히 흥분했습니다.
나귀를 탄다는 것은 왕의 모습을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사람들은 지금이 바로 자기들이 희망하던 바로 그 때 인가보다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이런 기대감은 오래 가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고 난 뒤에 사람들은 주님께서 당장에 제사장들을 쫓아내시고 유대의 지도자들도 쫓아내시고 심지어 빌라도의 군대까지 내어 쫓으리라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왕의 모습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뒤에도 여전히 정치적인 일이나 군사적인 일 에는 신경을 쓰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주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어야 한다는 것을 본격적으로 말씀하시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은 점 점 예수님에 대해서 실망 하고 예수님으로부터 등을 돌리기 시작했습니다.
자기들이 바라는 메시야의 모습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예수님의 제자였던 가롯 유다라는 사람은 예수님을 대제사장들에게 팔아 넘기기로 작정하였습니다. 예수님을 더 따라 다녀봐야 더 이상 건질 것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결국 사람들의 손에 붙들려 제사장에게로 끌려가 심문을 받고 십자가의 길을 가게 되신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런 주님의 모습을 보고는 실패한 혁명가다. 거짓 메시야다 그렇게 말을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정치적으로나 군사적으로나 어떤 혁명을 일으키지 않으신 것은 주님의 계획이 실패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주님이 하시고자 하신다면 굳이 혁명을 일으킬 필요가 뭐 있겠습니까
본래부터 이 모든 세상의 주인은 주님이십니다. 세상이 주님의 것이니까 주님께서 천사들을 불러 서 세상을 통치하실 수 있습니다.
나중에 베드로가 주님을 잡으러 온 사람들을 보고 화가 나서 그 중에 한 사람의 귀를 칼로 잘라버렸지 않습니까 그 때 주님께서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마26:53-54을 보면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 두 영 더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리요" 하셨습니다.
주님은 지금 당장이라도 그렇게 하늘 군대를 불러서 세상을 다스리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일들은 주님에게 있어서 전혀 힘든 문제가 아닙니다.
그러나 만약에 그렇게 한다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계획하셨던 일들은 어떻게 됩니까 이루어 질 수 없습니다. 어떤 일입니까 주님이 십자가를 지시는 일이지요.
세상을 일시적으로 뒤집는 일은 무력으로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죄를 사하시고 구원하시는 일은 군대를 불러서 되는 일이 아닙니다.
사람을 죄와 영원한 멸망에서 구원하신다는 여호와 하나님의 그 구원의 계획은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잡혀서 죽어 주셔야지 되는 일입니다.
주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지 않으시면 사람들은 죄로 인하여 진노와 멸망을 피할 수 가 없습니다.
로마의 압제를 당하며 살아가는 일도 힘들고 어려운 일이지만 그것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당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죄로 인한 진노와 멸망은 영원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히9:27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말씀하셨습니다.
이 진노와 멸망의 심판은 아무도 피해갈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이 진노와 멸망의 심판을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오직 세상을 다스릴 권세를 가지셨으면서도 그 권세를 포기하고 우리를 위해 대신해서 죽기로 작정하신 주님께 달려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이시면서도 수 많은 사람들의 조롱과 멸시를 받으면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의 길을 택하신 것입니다.
오늘 이 본문의 사건을 보면 사실은 주님이 그런 십자가의 길을 결정하기 까지 주님 자신도 얼마나 고민하고 고통스러워 하셨는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3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고민과 기도
1. 겟세마네로 향하신 주님과 제자들
주님께서 사람들에게 잡하시기 전 날 밤에 주님은 제자들과 함께 최후의 만찬을 나누셨고 제자들에게 이제 예수님 자신이 죽임을 당할 것이라는 사실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제자들 중에 있던 베드로가 그 말씀을 듣고서는 당장에 나서서 말하기를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주를 버리지 않겠나이다" 그렇게 다짐을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런 베드로의 다짐을 믿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베드로나 제자들이 지금을 그렇게 다짐을 하지만 결국은 주님을 부인하고 모두 다 도망가게 되리라는 것을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런 제자들을 데리고 다시 겟세마네 동산으로 올라 가셨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이 동산에서 제자들과 함께 기도하기를 원하셨습니다.
36절 말씀을 보면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저기 가서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하셨습니다. 그리고는 베드로와 세배대의 두 아들을 따로 데리고 가시면서 이들에게는 주님과 함께 깨어 있으라고 하셨습니다. 누가복음22장을 보면 기도하라고 되어 있습니다.
2. 고민하는 주님
그런데 이렇게 기도하라고 말씀하시는 주님의 그 심정이 평소 때 처럼 편안하지를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이제 이 밤이 지나고 나면 십자가에 달려 죽게 되리라는 것을 알고 계셨기 때문이지요.
물론 이 일은 어쩔 수 없이 당하게 된 것이 아닙니다.
주님 자신이 그 길을 가리라고 선택하신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일을 주님 자신이 선택했다고는 하지만 십자가를 지고 죽어야 한다는 그것을 생각할 때 주님의 마음은 너무나 고통스러웠습니다.
당시에 로마 제국은 그렇게 잔인한 나라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국가에 중대한 해가 된다고 판단되는 시국사범들에 대해서만은 아주 끔찍한 형벌로 다스렸는데 그 끔찍한 형벌들 중에서도 가장 끔찍한 형벌이 바로 십자가 형벌이었습니다.
이 형벌은 죄수의 손과 발목에 못을 쳐서 나무 십자가에 매달아 놓는 간단한 형벌인데 실제로 죄수가 그렇게 십자가에 달리게 되면 그 달린 사람의 몸무게 때문에 뼈마디가 끊어져 나가는 그런 고통을 느끼게 되고 심장은 점 점 압박을 받으면서 호흡이 힘들어 지고, 계속해서 피를 흘리면서 서서히 죽어가는 아주 끔찍한 형벌입니다. 대체로 이렇게 사람들이 십자가 달려서 죽을 때 까지 걸리는 시간은 약 시간 정도라고 합니다.
그러니 십자가에 달린 죄수의 그 고통이 얼마나 엄청나겠습니까
주님도 이미 십자가의 형벌과 고통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이 땅에 인간의 모습으로 계실 때, 주님은 우리와 똑같은 감성과 육신을 가지셨습니다. 우리가 배고프듯이 주님도 배고픔을 느끼셨고, 우리가 슬퍼서 눈물을 흘리듯이 주님도 슬픔을 느끼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손과 발에 못을 박고 십자가를 지웠을 때 당하신 그 고통은, 우리 몸에 못을 박고 십자가를 지울 때 받는 것과 똑 같은 고통을 당하시는 것입니다.
사실 주님은 여호와 하나님의 본체시며 여호와 하나님과 동등된 분이라고 했지 않습니까. 그런데 주님이 우리를 위하여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다는 그것만 해도 주님으로서는 자기 자신을 무한히 낮춘 일입니다. 그런데 거기서 그치지 않고 이제는 사람들도 잘 당하지 않는 그런 형벌을 받아서 저주 가운데 죽어야 한다는 이 사실을 생각할 때 얼마나 고통스러웠겠습니까
37절을 보면 주님께서 고민하고 슬퍼하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38절을 보면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다고 하셨습니다.
주님이 얼마나 고통스러웠으면 이렇게 연약한 제자들에게 조차 주님의 마음을 표현하셨겠습니까
그리고 기도하시면서 말씀하시기를 "아버지여 만일 할 만 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하셨습니다. 할 수 만 있다면 이 십자가만은 안 졌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22장을 보면 주님께서 얼마나 고통 가운데 고민하며 간절하게 기도했는지 그 흐르는 땀이 땅에 떨어지는 피 방울 같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본문 44절을 보면 주님께서 십자가를 피할 수 있다면 피하게 해달라는 똑같은 기도를 세 번이나 반복했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주님의 이 고민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죽음 앞에 서 있는 고민. 그러나 단순한 죽음이 아니라 엄청난 고통이 따르는 십자가에서의 죽음을 당해야 한다는 그 고민. 하지만 자신의 죄 때문에 죽는 것이 아니고 다른 사람들의 죄를 위해서 죽어야 한다는 고민. 지금도 하늘의 군사들을 불러 세상을 심판하실 수 있는 권세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 권세를 스스로 포기하고, 십자가를 선택해야 한다는 그런 고민들을 우리가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주님이 이렇게 고민하고 고통스러워 했던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우리 때문이었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생각하지 않으셨다면 그렇게 고통하며 기도하실 필요가 있겠습니까
주님이 우리를 생각하지 않으셨다면 당장에라도 주님의 천사들을 불러서 이 땅을 심판하셨을 것입니다. 어떻게 자신이 만드신 사람들에게 자신이 잡혀 죽으실 수가 있습니까
그러나 주님이 대신 죽지 않으면 우리가 멸망해야 되니까 주님은 이 길을 그만 둘 수가 없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주님이 흘리신 그 눈물을 생각하면 이 일을 더 분명히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오늘 읽은 이 본문을 보면 주님은 십자가를 지셔야 한다는 그 사실을 앞에 두고 매우 슬퍼하셨다고 했는데. 히5:7을 보면 이 사건을 두고 말씀하시기를 주님은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기도하시면서 심한 통곡을 하시고 눈물을 흘리셨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주님이 눈물을 흘리신 적이 또 있었습니다. 언제일까요
첫째는 주님께서 나사로의 집을 방문하셨을 때 나사로의 누이였던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서 말하기를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하면서 나사로가 이미 죽었음을 알려주었을 때 주님은 눈물을 흘리셨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주님은 나사로를 살려 주실려고 이미 작정 하셨습니다. 그런데 왜 굳이 나사로의 죽음 때문에 눈물을 흘리셨을까요
그것은 인간을 위한 눈물이었습니다.
주님이 아니라면 죽을 수 밖에 없고, 주님이 아니라면 멸망할 수 밖에 없는 그런 인간의 죄와 비참을 보시고 슬퍼하며 눈물을 흘리신 것입니다.
주님이 이 세상에 인간의 몸으로 오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로 그런 인간의 죄와 비참을 해결해 주시기 위해서 인 것이죠.
그리고 둘째는 예루살렘 성을 바라 보시면서 눈물을 흘리셨다고 했습니다. 이제 얼마 있지 않으면 이 예루살렘 성은 무너지고 파괴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 아무리 말씀을 증거하고 아무리 많은 기적을 보여 줘도 도무지 주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고 자기 죄를 회개치 아니하는 이 예루살렘 성의 사람들을 보시면서 너무나 안타까운 그런 마음으로 눈물을 흘리며 우셨다는 것입니다.
이것도 역시 인간을 위한 눈물이었지요.
여러분, 주님은 인간의 죄를 인하여 우셨습니다.
주님은 인간의 그 죄로 인한 멸망을 바라보면서 우셨습니다.
주님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을 가지지 못하는 이 세대를 바라보면서 우셨습니다.
여러분, 주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내일이면 십자가를 져야 한다는 그 엄청난 고통을 가지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 하시면서도 절대로 그 십자가의 길을 포기하지 않으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지금 얼마든지 십자가를 팽개치고 하늘의 권세를 가지실 수 있으 시면서도 그 길을 택하지 않으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우리 때문입니다.
나사로를 보시고 우셨던 것처럼, 예루살렘을 바라보며 우셨던 것처럼. 주님은 우리를 생각할 때 절대로 십자가를 포기할 수 없으셨던 것입니다.
주님은 그것을 생각하시면서 우리가 멸망 당하도록 버려두는 그것 보다는 주님이 십자가를 지시는 쪽을 택하신 것입니다.
그러기에 주님은 그렇게 고민하며 죽게 된 지경이었지만 결국에는 어떻게 기도하셨습니까
39절을 보면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했습니다.
십자가의 길을 가시겠다는 것입니다.
이사야는 이런 주님의 고난을 미리 예언하면서 사53:5-6에서 그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길로 같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 시켰도다. "
사람들은 이렇게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고 실패한 혁명가다. 거짓 선지자라고 조롱했습니다.
그러나 로마서5:8을 보면 이렇게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주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이것이야말로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그 사랑에 대한 확증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십자가를 지시면서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십자가를 따라오면서 눈물을 흘리던 여인들을 향하여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눅23:28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하셨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위해서 해 주실 일은 다 이루셨다는 것입니다.
이제 남은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그것을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그 십자가와 사랑을 받아들이고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살아가느냐 아니면 주님을 믿지 못하고 회개치 못하여 멸망의 길을 떠나지 못하느냐는 것은 우리에게 달려 있습니다.
그러니 주님은 우리에게 그렇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멸망을 향해 끊임 없이 달려가고 있는 이 세대의 자녀들을 위하여 울라고 하신 것입니다.
EX) 잃어 버린 아이를 찾는 아버지의 모습을 TV에서 보도해준 적이 있었습니다.
아이를 잃어버린 지가 벌써 2년이 지났는데도 이 아버지는 아이를 잃어버리고 난 뒤에 제대로 직장생활도 못하고 그만두고, 시간만 나면 아이를 찾아 나선다는 것입니다.
전단지도 인쇄해서 돌리고 사람마다 만나서 물어보고…
그러다가 한 번은 아이들이 붙들려서 앵벌이 같은 일을 하기도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리고는 하루도 편안하게 자 본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제가 한 번 그런 생각을 해 봤습니다.
어느 하늘 아래 아이가 고생하고 있을 것을 생각하면 도저히 그냥 살아갈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모습을 보면서 한 영혼이 죄로 인하여 멸망으로 끌려가는 모습을 보고 계신 여호와 하나님의 심정은 어떨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심정은 더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자신의 독생하신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면서 까지 남은 아이들을 찾으시려 하신 것이 아닙니까
4. 결 론
자녀가 부모의 심정을 다 알 수 없는 것과 같이 우리가 아무리 애써도 주님의 심정을 다 알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고난 주간을 보내면서 주님의 그 고난이 바로 나를 사랑하사 나를 구하시기 위한 고난이었다는 이 한 가지를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주님의 그 사랑을 더 깊이 알게 되고 주님과 더불어 살아가고 주님을 위하여 함께 고난을 감당할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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