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려주일] 예수님의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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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이 시간에는 "예수님의 죽음"이란 제목으로 같이 은혜를 나누시겠습니다. 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내일부터 토요일까지 고난주간입니다. 또 4월 13일 금요일 날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성(聖) 금요일입니다.
예수님이 왜 그처럼 고난을 당하시고 죽으셨을까 분명히 성경은 예수님이 오시기 600년 전에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이렇게 예언해 놓으셨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사 53:5). 그는 누구입니까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이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예수님이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예수님이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예수님이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 속에는 각자 자기가 포함됩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찔림은 나의 허물을 인함이요, 예수님이 상함은 나의 죄악을 인함이라. 예수님이 징계를 받음으로 내가 평화를 누리고, 예수님이 채찍에 맞음으로 내가 나음을 입었도다. 믿습니까 믿을 수 있습니까
여러분들은 구원의 확신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구원 받은 사람들입니다. 은혜 받은 사람들입니다. 사랑 받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은, 자기를 위한 것이며, 우리를 위한 것이며, 인류를 위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너무 많은 사람들로부터 수치와 모욕을 당한 사건이었습니다. 당시의 제자들, 헤롯과 대제사장, 서기관, 장로 무리들, 로마 총독과 헌병, 그리고 강도까지 모두가 하나 되어서 예수님을 모욕하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그 중 주님께 칭찬을 받은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마리아였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께 좋은 일을 행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떻게 죽으실 것을 그녀는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옥합을 깼습니다. 예수님의 발 앞에 놓았습니다. 그리고 머리를 풀어서 기름 묻은, 향유 묻은 예수님의 발을 씻겨주었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마태복음 26장 10절입니다. 예수께서 아시고 저희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이 여자를 괴롭게 하느냐 저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고 그러셨습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을 향해 좋은 일을 할 때에 큰 축복이 임했습니다. 우리도 마리아처럼 예수님이 왜 죽으셨는가를 바로 알고 우리도 예수님을 위해서 좋은 일을 함으로 말미암아, 여호와 하나님께 인정받고, 사랑 받고, 복 받는 우리 모두가 됩시다. 성경은 다시 말을 합니다 마태복음 26장 13절 말씀이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 하시니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시간, 우리를 위해서 당하신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을 살펴봄으로 말미암아 그 은혜를 알고, 그 은혜를 누리고, 더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님의 은혜에 감사해서 예수님께 더 좋은 일을 할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됩시다.
첫째, 배신 당하신 예수님
첫째로, 예수님의 죽음은 예수님이 배신 당하신 것으로부터 시작이 됩니다. "배신 당하신 예수님. " 사랑하는 사람에게,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을 당하면 죽는 것보다 고통스럽습니다.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은 그가 믿었던 제자들, 가룟 유다의 배신과 또 수제자인 베드로의 배신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가룟 유다는 은 30냥에 예수님을 팔았습니다. 수제자라고 말했던 베드로는 예수님이 고난을 당하셨을 때, 잡히셨을 때에 예수님을 피해 도망갔습니다. 도망만 간 게 아닙니다. 예수님을 모른다고 했습니다. 그냥 모른다고 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저주하면서까지 모른다고 했습니다. 제자가 많지 않았습니다. 불과 12명밖에 안 되는데 제자인 가롯 유다로부터 배신을 당하고, 사도인 제자 베드로에게 배신을 당하셨습니다.
마치 뭐와 같습니까 첫 아담이 모든 것을 믿고 맡겨 둔 여호와 하나님을 배신한 것처럼. 아담도 하와도 여호와 하나님을 배신했습니다. 에덴 동산을 다 지으셨습니다. 아담을 잘 먹고, 잘 입고, 잘 살고, 행복하게 살게 하시고, 다 지으셔서 아담에게 몽땅 주셨습니다. "다 먹어라. 다 마셔라. 다 누려라. 맘대로 살아라. 그러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 이것만은 먹지 말라. 먹는 날에는 정녕 죽는다. "(창 2:16-17), 그러셨습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는 여호와 하나님을 배반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배신했습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따먹어 버렸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돈궤를 맡은 가롯 유다는 은 30냥에 예수님을 팔아버렸습니다. 예수님을 배신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가롯 유다를 미워하기보다는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성경은 말을 합니다. 마태복음 26장 24절 말씀이십니다. 인자는 자기에게 대하여 기록된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 하였더면 제게 좋을뻔 하였느니라. 가롯 유다는 가롯 유다이고, 예수님은 예수님이십니다. 사람은 사람이고, 여호와 하나님은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따라서 죄인된 우리는 세상에서 수시로 예수님을 배신하고 잘못을 범할 수 있습니다. 그 순간에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찾아오신, 베드로를 찾아오신 그 예수님을 기억하고, "주여, 잘못했습니다. 주님, 내가 잘못했습니다. "라고 회개하고 용서받는 우리 모두가 됩시다. 우리를 위해서 고통받으신 예수님께로 나아가면 용서가 있습니다. 다시 회복이 있습니다. 다시 사랑이 있습니다.
둘째, 잡히신 예수님
두 번째, "잡히신 예수님. " 그렇습니다. 사단의 권세 아래에 있는 죄인들을 위해서 오신 예수님이 검과 몽치로 무장한 무리들에게 붙잡히셨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함으로 말미암아 모두가 다 사단의 권세 아래에 잡혔습니다. 죄의 종이 되었습니다. 그런 인류를, 그런 인간을 구원해 주시기 위하여, 해방시켜 주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이 이제 검과 몽치로 무장한 무리들에게 붙잡히셨습니다.
얼마든지 천사들을 부르실 수 있었습니다. 그는 얼마든지 이기실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이루시기 위해서 묶이신 것입니다. 왜요 구약성경에는 예수님이 오셔서 잡히실 것을 예언해 놓으셨으니까. 성경말씀을 이루시기 위하여 잡히신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합니다. 마태복음 26장 53절로 54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 두 영 더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리요 하시더라. 예수님이 왜 잡히셨느냐 힘이 없어서 잡히신 것이 아니라, 성경에 그렇게 예언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대로 이루어 드리기 위해서 예수님은 잡히셔야 했기 때문에 그렇게 하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얼마나 여호와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을 이루셨느냐 십자가에서 마지막 죽으시기까지 순종하시면서 예수님은 말씀을 다 이루셨습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다 이루었다. "(요 19:30)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인류의 구원을 이룬 것만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이 예언해 놓으신 모든 예언의 말씀을 다 이루어 드렸다는 것입니다. 죄와 저주와 죽음의 공포로 포로된 자들을 자유케 하려고 스스로 포로가 되셨다, 이 말이신 것입니다.
혹시 지금 내 인생에서 묶여져 있는 것들이 있습니까 여호와 하나님의 뜻이라면 인내하고, 소망 중에 기도하고 기다려서, 큰 기적을 체험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그것이 사단의 저주라면 여호와 하나님 앞에 먼저 회개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 내가 잘못했습니다. 내가 죄를 져서 죄 값으로 어려움을 당합니다. 잘못했습니다. " 하고 회개해야 할 것입니다. 회개했으면 그 다음에 예수의 이름을 사용해야 할 것입니다.
구원하신 예수님이 부활 승천하시면서 제자들에게 당부하신 축복의 말씀이 있습니다.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찌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막 16:17-18)고 그랬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정말로 구원의 확신이 있으면, 죄를 회개했으면, 예수님의 이름으로 사단이 갖다준 문제와 저주를 물리쳐야 될 것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모든 원수 마귀는 물러갈지어다", "원수 사단은 물러갈지어다", "저주야, 물러가라", "가난아, 물러가라", "질병아, 물러가라. " 당당하게 물리치고, 이기는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셋째, 심문 당하신 예수님
세 번째, "심문 당하신 예수님. " 아무 죄도 없으신 분이, 아무 흠도 없으신 예수님이, 죄인으로부터 심문을 당하십니다. 모든 권세를 가지신 예수님이 세상 권세로부터 심문을 당하셨습니다. 세상이 거짓 증거로 예수님을 죽이려고 할 때, 예수님은 당당하게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인 그리스도이심을 선포하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장차 있을 종말과 심판에 대해서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은 죄인들이 심문하는 것을 듣지도 않으셨습니다. 왜 상관이 없어요. 왜 우리 예수님은 죄가 없으시거든. 죄인에게 심판 받으실 분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당당하게 복음만 전하는 것입니다. 당당하게 그들에게 깨우쳐 주고 그들을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6장 63절로 64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잠잠하시거늘 대제사장이 가로되 내가 너로 살아 계신 여호와 하나님께 맹세하게 하노니 네가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 리에게 말하라(마 26:63),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 때 예수님이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말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마 26:64)고 하셨습니다.
세상은 지금도 각종 위선과 거짓으로 우리들을 속이고, 죽이려고 합니다. 그럴 때, 세상의 위선과 거짓에 변명하고 반응하기보다는 진리를 선포하는 우리 모두가 됩시다. 세상이 어둡고 캄캄합니다.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원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불평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럴 때 더 당당하게 복음만을 전하면, 말씀만을 선포하면 어둠은 물러갑니다. "진리가 있는 곳에 자유함이 있다"(요 8:32)라고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이 썩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소금이 없는 게 문제인 것입니다. 세상이 어두운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빛이 없는 게 문제인 것입니다. 소금이 녹으면 썩지 않습니다. 소금이 녹으면 맛이 있습니다. 빛을 발하면 어둠이 물러갑니다.
큰 저수지에 장마가 져 가지고 흙탕물이 꽉 찼습니다. 그 흙탕물을 보고 원망할 필요 없어요. 낙심할 필요 없어요. 그 연못 어딘가에 샘물 줄기만 있다면, 시간이 가면 흙탕물은 다 떠내려 갈 것입니다. 흙탕물은 다 가라앉을 것입니다. 샘물이 솟아서 그 연못을 새 물로, 깨끗한 물로, 마실 수 있는 물로, 살 수 있는 물로 가득가득 채워주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들, 우리 모두 샘물 줄기가 됩시다. 성령충만하면 샘물 줄기가 됩니다. 우리 모두가 다 말씀을 가지고 선포함으로 말미암아 어둠을 물리치고, 썩는 것을 막는, 그래서 맛을 낼 수 있는, 정말로 밝은 세상을 만드는 데에 주역이 되는 우리 모두가 됩시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당당하게 복음을 증거하고, 장차 될 일과 바른 길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넷째, 매 맞으신 예수님
네 번째, "매 맞으신 예수님. " 여러분, 매 맞아 보셨어요 매 맞아 보셨어요 매 맞는 고통은 얼마나 아픈지 몰라요. 예수님은 우리를 모든 병과 연약함으로부터 강건케 하기 위하여 매맞으셨습니다. 약한 것을 강하게 하고, 병을 치료해 주시기 위하여 예수님께서 대신 매를 맞으셨다, 그 말입니다. 그래서 이사야서 53장 5절 하반절에 보니까,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예수님께서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예수님은 그냥 매를 맞으신 것이 아닙니다. 빌라도에게 매를 맞으실 때에 서른 아홉 차례 매를 맞으셨습니다. 그 매는 손잡이가 있어요. 이런 가죽끈이 다섯 개예요. 다섯 개. 끝마다 뼈로 뾰족한 갈고리를 만들었어요. 끝마다 납덩이를 붙여놨어요, 이걸 가지고 예수님의 등,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예수님의 등을 그 힘있고 우직한 로마 병정이 때립니다. 한번 때릴 적마다 예수님의 등에 다섯 줄기의 홈이 패입니다. 그 끝에 달려져 있는 가죽으로 만든 꼬챙이와 같은 것들이 예수님의 살을 찍습니다. 납덩어리가 예수님의 살을 파고듭니다. 그 때 그 채찍을 탁 놓아요. 살이 찢어집니다. 살집이 막 묻어납니다. 자그마치 서른 아홉 차례. 성경 학자들의 말에 따르면, 당시의 매질은 피가 분수같이 뿜어 나온다고 합니다. 혈관이 터지니까 혈관 속에서 피가 막 솟아납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뼈가 드러나고, 내장까지 튀어나올 정도로 가혹했다고 그랬습니다.
우리는 조금만 몸이 힘들고 피곤하면 주의 일을 게을리 하려고 합니다. "전도도 힘들어", "심방도 힘들어", "여호와 하나님의 일이 힘들어. " 십자가 위에서 우리를 위해서, 우리를 치료해 주시기 위하여, 우리에게 건강을 주시기 위하여, 우리를 강하게 해 주시기 위하여, 그렇게 죽으신, 그렇게 매 맞으신 예수님을 생각한다면, 우리가 꾀병부리면 안됩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매맞으셨기 때문에 우리가 건강하고, 기도를 이 병이 치료받는 거예요. 그냥 되는 게 아니에요. 예수님께서 그렇게 매 맞고 고통을 당하셨기 때문에 그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만 하면 어떤 병이든지 치료받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를 위해서 매 맞으시고, 고통 받으신 예수님을 기억하면서, 주님으로부터 받은 이 귀한 몸, 건강한 몸, 힘있는 몸, 주님의 일을 위해서 헌신하는 우리 모두가 됩시다.
다섯째, 가시관 쓰신 예수님
다섯 번째, "가시관 쓰신 예수님. " 그렇습니다. 존귀와 영광으로 관을 쓰셔야 할 예수님이 저주와 조롱의 가시관을 쓰셨습니다. 마태복음 27장 29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가시 면류관을 엮어 그 머리에 씌우고 갈대를 그 오른손에 들리고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희롱하여 가로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찌어다. 귀한 면류관을 쓰셔야 할 예수님의 머리 위에 가시로 엮은 가시 면류관, 저주를 상징하는 가시 면류관을 예수님 머리 위에 팍 씌웠습니다. 이마가 팍 찔리셨습니다. 피가 막 흘러 눈을 뜰 수가 없습니다.
인간의 모든 허물을 감싸주고, 나의 허물을 다 감싸주시고, 영원히 덮어주시기 위해서 예수님이 가시관을 쓰신 것입니다. 아담이 지은 허물, 하와가 지은 허물, 조상이 지은 허물, 알고도 지은 허물, 모르고도 지은 허물, 내가 지은 허물, 여러분이 지은 허물 때문에, 예수님이 그렇게 가시관을 쓰셨습니다. 우리의 허물이 가시가 되어 머리를 찔렀음에도 불구하고, 허물로 인해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 참고 인내하셨다, 그 말인 것입니다.
죄 없으신 예수님이 죄인을 대신하여 그렇게 고통을 당하면서도 참으셨다, 그 말입니다. 인내하셨다, 그 말입니다. 우리는 한번 생각해 봐야 합니다. 허물을 들춰내는 일은 사람을 죽이지만, 허물을 감싸주고 용서해 주는 일은 한 영혼을 구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주님이 쓰신 가시관을 우리도 쓰고, 이웃의 허물까지도 덮어주고, 사랑해 주고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됩시다.
여섯째, 십자가를 지고 가신 예수님
여섯 번째는, "십자가를 지고 가신 예수님. "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채찍에 등이 찢기셨잖아요. 얼마나 아파요 살점이 뚝뚝 떨어져 나가는데, 성한 살이 하나도 없는데, 얼마나 아파요 그런데 그 예수님이 어깨에, 찢어진 어깨에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향해서 올라가시는 것입니다. 넘어져도 가고, 쓰러져도 가고, 아파도 가고. 그 뿐이 아닙니다. 로마 병정들이 발길로 찹니다. 채찍으로 때립니다. 지나가는 사람들마다 조롱합니다. 침을 뱉고 막 비웃습니다.
그 십자가는 인생의 모든 질고와, 우리의 모든 질고와, 나의 모든 질고와, 슬픔과, 고통과, 눈물을 대신 짊어지신 사건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사야서 53장 4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여호와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예수님께 모든 짐을 맡겨버린 우리에게 더 이상 인생의 짐은 없는 것으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이제 우리는 영혼 구원을 위한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좇아가야 합니다. 아직 구원받지 못한 내 가족, 내 친구, 내 이웃, 인천에 있는 모든 시민들, 우리 민족, 전 세계 사람들을 향해서, 분명히 이제 구원의 복음을 들고, 십자가의 복음을 들고, 그들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서, 각자 목사가 진 십자가, 장로가 진 십자가, 권사가 진 십자가, 안수집사가 진 십자가, 구역장이 진 십자가, 성가대원이 진 십자가, 교사가 진 십자가, 내가 진 십자가를 내가 지고, 예수님을 따라가는 우리 모두가 됩니다. 성경은 말을 합니다. 마가복음 8장 34절 말씀이십니다.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일곱째, 벌거벗기신 예수님
일곱 번째, "벌거벗기신 예수님. " 예수님의 나이가 삼십 삼 세이십니다. 건강하신 예수님, 인격자이신 예수님이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벌거벗기셨습니다. 옷,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못하셨습니다. 온갖 조롱과 비웃음 속에서 예수님은 옷까지 빼앗기시고, 벌거벗기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인격과 자존심이 짓밟히시면서까지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나 때문에 우리 때문에, 인류 때문에 예수님은 만민 앞에서 온갖 수치와 모욕을 당하셨습니다. 그래서 로마서 10장 11절에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예수님을 믿는 사람에게 부끄러움을 당치 않게 하시려고 예수님이 대신 부끄러움을 당하셨습니다. 건강한 몸에 실오라기 하나도 걸치지 아니 하시고 만인 앞에서 다 벗기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으면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고, 예수를 믿으면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고,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을 받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혹이라도 전도하고 봉사하다가 당하는 수치와 모욕이 있다면 그것은 더 이상 부끄러움이 아닌 것입니다. 전도하다가 당하는 부끄러움, 봉사하다가 당하는 부끄러움, 수치와 모욕은 영광으로 아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전도의 어려움은 예수님의 수치와 모욕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그 말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이름의 영광을 위해 나 같은 존재가 쓰임 받은 것을 감사하고, 여호와 하나님이 나를 복음 전하는 전도자로 써 주신 것을 감사하고, 천사에게도 맡기지 아니하신 복음 전도의 사명을 나에게 맡겨주심을 알고서 감사하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하신 그 일, 그 일을 감당하시다가 십자가에 죽으신 사건의 그 일, 복음 전하는 일에 나를 써 주신 것을 알고, 감사하며, 감격하며, 참여하는 우리 모두가 됩시다. 사도행전 5장 41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기뻐했다는 것입니다.
여덟째,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
여덟 번째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 " 우리가 양손과 양발로 지은 죄, 생각으로 지은 죄, 마음으로 지은 죄 때문에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양손에 못이 박히셨습니다. 양발이 포개져서 못 박히셨습니다. 머리에 가시관을 쓰셔서, 옆구리에 창을 찔리셔서, 물과 피를 다 흘리시고, 우리를 위해서 물과 피를 다 쏟아내시고, 당신의 몸을 희생하셨습니다. 하나밖에 없는 생명과 육체를, 우리를 위해서 희생하셨다는 것입니다.
이 은혜를 아는 자는 주님을 위해서 시간과 물질을 드리는 것을 아까워하지 않아야 합니다. 주일날 주일 성수하는 것이 아깝지 않고, 전도하는 시간, 전도하는 물질, 모두가 다 아깝지 않고. 왜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님의 은혜, 예수님의 죽음 때문에, 예수님은 생명까지 바쳐서 나를 구원하셔서,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로 삼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이 구원하신 이 사건은 너무나 고마운 것입니다. 주님이 구원하기 원하시는 이웃들이 있습니다. 아직 구원받지 못한 가족이 있습니다. 친척이 있습니다. 이웃이 있습니다. 민족이 있습니다. 세계가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우리도 눈물 흘리고, 우리도, 우리도 피흘리고 사명을 감당하는 우리 모두가 됩시다.
아홉째,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
마지막 아홉 번째입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 " 이 땅에서의 모든 죽음은 누구에게든지 절망이요, 좌절이요, 끝장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죽음은 구원입니다. 영생입니다. 희망입니다. 승리요, 새로운 창조 역사의 시작인 것입니다.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강도를 낙원에 초청하시고, 부자관계를 뛰어넘어 효를 선언하시고, 휘장을 나눠서 하늘로 가는 길을 열어 놓으신 사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사건은 보통 은혜가 아닌 것입니다. 히브리서 10장 19절에서 20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이 죽어 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께로 가는 길이 확 열렸습니다. 예배의 길이 열렸습니다. 기도의 길이 열렸습니다. 응답의 길이 열렸습니다. 천국의 길이 열렸습니다. 은혜요, 은혜요, 은혜인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이제 누구든지 죄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못났음에도 불구하고, 버림받아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남녀노소, 빈부귀천, 누구든지 예수를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아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이 됩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를 수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이 복된 소식을 나만 알고 나만 믿는 것이 아니라, 가족, 친척, 이웃들에게, 인천시, 전국 도시, 천하 만민에게 선포하는 우리 모두가 됩시다.
결론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나 때문에 고난 당하시고,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습니다. 우리 모두가 다 나를 위해 고난을 당하시고, 죽임을 당하신 예수님을 위해서 마리아처럼 좋은 일을 하는 성도가 됩시다.
예수님이 왜 그처럼 고난을 당하시고 죽으셨을까 분명히 성경은 예수님이 오시기 600년 전에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이렇게 예언해 놓으셨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사 53:5). 그는 누구입니까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이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예수님이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예수님이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예수님이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 속에는 각자 자기가 포함됩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찔림은 나의 허물을 인함이요, 예수님이 상함은 나의 죄악을 인함이라. 예수님이 징계를 받음으로 내가 평화를 누리고, 예수님이 채찍에 맞음으로 내가 나음을 입었도다. 믿습니까 믿을 수 있습니까
여러분들은 구원의 확신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구원 받은 사람들입니다. 은혜 받은 사람들입니다. 사랑 받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은, 자기를 위한 것이며, 우리를 위한 것이며, 인류를 위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너무 많은 사람들로부터 수치와 모욕을 당한 사건이었습니다. 당시의 제자들, 헤롯과 대제사장, 서기관, 장로 무리들, 로마 총독과 헌병, 그리고 강도까지 모두가 하나 되어서 예수님을 모욕하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그 중 주님께 칭찬을 받은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마리아였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께 좋은 일을 행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떻게 죽으실 것을 그녀는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옥합을 깼습니다. 예수님의 발 앞에 놓았습니다. 그리고 머리를 풀어서 기름 묻은, 향유 묻은 예수님의 발을 씻겨주었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마태복음 26장 10절입니다. 예수께서 아시고 저희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이 여자를 괴롭게 하느냐 저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고 그러셨습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을 향해 좋은 일을 할 때에 큰 축복이 임했습니다. 우리도 마리아처럼 예수님이 왜 죽으셨는가를 바로 알고 우리도 예수님을 위해서 좋은 일을 함으로 말미암아, 여호와 하나님께 인정받고, 사랑 받고, 복 받는 우리 모두가 됩시다. 성경은 다시 말을 합니다 마태복음 26장 13절 말씀이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 하시니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시간, 우리를 위해서 당하신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을 살펴봄으로 말미암아 그 은혜를 알고, 그 은혜를 누리고, 더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님의 은혜에 감사해서 예수님께 더 좋은 일을 할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됩시다.
첫째, 배신 당하신 예수님
첫째로, 예수님의 죽음은 예수님이 배신 당하신 것으로부터 시작이 됩니다. "배신 당하신 예수님. " 사랑하는 사람에게,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을 당하면 죽는 것보다 고통스럽습니다.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은 그가 믿었던 제자들, 가룟 유다의 배신과 또 수제자인 베드로의 배신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가룟 유다는 은 30냥에 예수님을 팔았습니다. 수제자라고 말했던 베드로는 예수님이 고난을 당하셨을 때, 잡히셨을 때에 예수님을 피해 도망갔습니다. 도망만 간 게 아닙니다. 예수님을 모른다고 했습니다. 그냥 모른다고 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저주하면서까지 모른다고 했습니다. 제자가 많지 않았습니다. 불과 12명밖에 안 되는데 제자인 가롯 유다로부터 배신을 당하고, 사도인 제자 베드로에게 배신을 당하셨습니다.
마치 뭐와 같습니까 첫 아담이 모든 것을 믿고 맡겨 둔 여호와 하나님을 배신한 것처럼. 아담도 하와도 여호와 하나님을 배신했습니다. 에덴 동산을 다 지으셨습니다. 아담을 잘 먹고, 잘 입고, 잘 살고, 행복하게 살게 하시고, 다 지으셔서 아담에게 몽땅 주셨습니다. "다 먹어라. 다 마셔라. 다 누려라. 맘대로 살아라. 그러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 이것만은 먹지 말라. 먹는 날에는 정녕 죽는다. "(창 2:16-17), 그러셨습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는 여호와 하나님을 배반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배신했습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따먹어 버렸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돈궤를 맡은 가롯 유다는 은 30냥에 예수님을 팔아버렸습니다. 예수님을 배신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가롯 유다를 미워하기보다는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성경은 말을 합니다. 마태복음 26장 24절 말씀이십니다. 인자는 자기에게 대하여 기록된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 하였더면 제게 좋을뻔 하였느니라. 가롯 유다는 가롯 유다이고, 예수님은 예수님이십니다. 사람은 사람이고, 여호와 하나님은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따라서 죄인된 우리는 세상에서 수시로 예수님을 배신하고 잘못을 범할 수 있습니다. 그 순간에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찾아오신, 베드로를 찾아오신 그 예수님을 기억하고, "주여, 잘못했습니다. 주님, 내가 잘못했습니다. "라고 회개하고 용서받는 우리 모두가 됩시다. 우리를 위해서 고통받으신 예수님께로 나아가면 용서가 있습니다. 다시 회복이 있습니다. 다시 사랑이 있습니다.
둘째, 잡히신 예수님
두 번째, "잡히신 예수님. " 그렇습니다. 사단의 권세 아래에 있는 죄인들을 위해서 오신 예수님이 검과 몽치로 무장한 무리들에게 붙잡히셨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함으로 말미암아 모두가 다 사단의 권세 아래에 잡혔습니다. 죄의 종이 되었습니다. 그런 인류를, 그런 인간을 구원해 주시기 위하여, 해방시켜 주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이 이제 검과 몽치로 무장한 무리들에게 붙잡히셨습니다.
얼마든지 천사들을 부르실 수 있었습니다. 그는 얼마든지 이기실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이루시기 위해서 묶이신 것입니다. 왜요 구약성경에는 예수님이 오셔서 잡히실 것을 예언해 놓으셨으니까. 성경말씀을 이루시기 위하여 잡히신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합니다. 마태복음 26장 53절로 54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 두 영 더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리요 하시더라. 예수님이 왜 잡히셨느냐 힘이 없어서 잡히신 것이 아니라, 성경에 그렇게 예언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대로 이루어 드리기 위해서 예수님은 잡히셔야 했기 때문에 그렇게 하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얼마나 여호와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을 이루셨느냐 십자가에서 마지막 죽으시기까지 순종하시면서 예수님은 말씀을 다 이루셨습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다 이루었다. "(요 19:30)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인류의 구원을 이룬 것만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이 예언해 놓으신 모든 예언의 말씀을 다 이루어 드렸다는 것입니다. 죄와 저주와 죽음의 공포로 포로된 자들을 자유케 하려고 스스로 포로가 되셨다, 이 말이신 것입니다.
혹시 지금 내 인생에서 묶여져 있는 것들이 있습니까 여호와 하나님의 뜻이라면 인내하고, 소망 중에 기도하고 기다려서, 큰 기적을 체험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그것이 사단의 저주라면 여호와 하나님 앞에 먼저 회개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 내가 잘못했습니다. 내가 죄를 져서 죄 값으로 어려움을 당합니다. 잘못했습니다. " 하고 회개해야 할 것입니다. 회개했으면 그 다음에 예수의 이름을 사용해야 할 것입니다.
구원하신 예수님이 부활 승천하시면서 제자들에게 당부하신 축복의 말씀이 있습니다.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찌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막 16:17-18)고 그랬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정말로 구원의 확신이 있으면, 죄를 회개했으면, 예수님의 이름으로 사단이 갖다준 문제와 저주를 물리쳐야 될 것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모든 원수 마귀는 물러갈지어다", "원수 사단은 물러갈지어다", "저주야, 물러가라", "가난아, 물러가라", "질병아, 물러가라. " 당당하게 물리치고, 이기는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셋째, 심문 당하신 예수님
세 번째, "심문 당하신 예수님. " 아무 죄도 없으신 분이, 아무 흠도 없으신 예수님이, 죄인으로부터 심문을 당하십니다. 모든 권세를 가지신 예수님이 세상 권세로부터 심문을 당하셨습니다. 세상이 거짓 증거로 예수님을 죽이려고 할 때, 예수님은 당당하게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인 그리스도이심을 선포하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장차 있을 종말과 심판에 대해서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은 죄인들이 심문하는 것을 듣지도 않으셨습니다. 왜 상관이 없어요. 왜 우리 예수님은 죄가 없으시거든. 죄인에게 심판 받으실 분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당당하게 복음만 전하는 것입니다. 당당하게 그들에게 깨우쳐 주고 그들을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6장 63절로 64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잠잠하시거늘 대제사장이 가로되 내가 너로 살아 계신 여호와 하나님께 맹세하게 하노니 네가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 리에게 말하라(마 26:63),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 때 예수님이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말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마 26:64)고 하셨습니다.
세상은 지금도 각종 위선과 거짓으로 우리들을 속이고, 죽이려고 합니다. 그럴 때, 세상의 위선과 거짓에 변명하고 반응하기보다는 진리를 선포하는 우리 모두가 됩시다. 세상이 어둡고 캄캄합니다.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원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불평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럴 때 더 당당하게 복음만을 전하면, 말씀만을 선포하면 어둠은 물러갑니다. "진리가 있는 곳에 자유함이 있다"(요 8:32)라고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이 썩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소금이 없는 게 문제인 것입니다. 세상이 어두운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빛이 없는 게 문제인 것입니다. 소금이 녹으면 썩지 않습니다. 소금이 녹으면 맛이 있습니다. 빛을 발하면 어둠이 물러갑니다.
큰 저수지에 장마가 져 가지고 흙탕물이 꽉 찼습니다. 그 흙탕물을 보고 원망할 필요 없어요. 낙심할 필요 없어요. 그 연못 어딘가에 샘물 줄기만 있다면, 시간이 가면 흙탕물은 다 떠내려 갈 것입니다. 흙탕물은 다 가라앉을 것입니다. 샘물이 솟아서 그 연못을 새 물로, 깨끗한 물로, 마실 수 있는 물로, 살 수 있는 물로 가득가득 채워주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들, 우리 모두 샘물 줄기가 됩시다. 성령충만하면 샘물 줄기가 됩니다. 우리 모두가 다 말씀을 가지고 선포함으로 말미암아 어둠을 물리치고, 썩는 것을 막는, 그래서 맛을 낼 수 있는, 정말로 밝은 세상을 만드는 데에 주역이 되는 우리 모두가 됩시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당당하게 복음을 증거하고, 장차 될 일과 바른 길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넷째, 매 맞으신 예수님
네 번째, "매 맞으신 예수님. " 여러분, 매 맞아 보셨어요 매 맞아 보셨어요 매 맞는 고통은 얼마나 아픈지 몰라요. 예수님은 우리를 모든 병과 연약함으로부터 강건케 하기 위하여 매맞으셨습니다. 약한 것을 강하게 하고, 병을 치료해 주시기 위하여 예수님께서 대신 매를 맞으셨다, 그 말입니다. 그래서 이사야서 53장 5절 하반절에 보니까,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예수님께서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예수님은 그냥 매를 맞으신 것이 아닙니다. 빌라도에게 매를 맞으실 때에 서른 아홉 차례 매를 맞으셨습니다. 그 매는 손잡이가 있어요. 이런 가죽끈이 다섯 개예요. 다섯 개. 끝마다 뼈로 뾰족한 갈고리를 만들었어요. 끝마다 납덩이를 붙여놨어요, 이걸 가지고 예수님의 등,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예수님의 등을 그 힘있고 우직한 로마 병정이 때립니다. 한번 때릴 적마다 예수님의 등에 다섯 줄기의 홈이 패입니다. 그 끝에 달려져 있는 가죽으로 만든 꼬챙이와 같은 것들이 예수님의 살을 찍습니다. 납덩어리가 예수님의 살을 파고듭니다. 그 때 그 채찍을 탁 놓아요. 살이 찢어집니다. 살집이 막 묻어납니다. 자그마치 서른 아홉 차례. 성경 학자들의 말에 따르면, 당시의 매질은 피가 분수같이 뿜어 나온다고 합니다. 혈관이 터지니까 혈관 속에서 피가 막 솟아납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뼈가 드러나고, 내장까지 튀어나올 정도로 가혹했다고 그랬습니다.
우리는 조금만 몸이 힘들고 피곤하면 주의 일을 게을리 하려고 합니다. "전도도 힘들어", "심방도 힘들어", "여호와 하나님의 일이 힘들어. " 십자가 위에서 우리를 위해서, 우리를 치료해 주시기 위하여, 우리에게 건강을 주시기 위하여, 우리를 강하게 해 주시기 위하여, 그렇게 죽으신, 그렇게 매 맞으신 예수님을 생각한다면, 우리가 꾀병부리면 안됩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매맞으셨기 때문에 우리가 건강하고, 기도를 이 병이 치료받는 거예요. 그냥 되는 게 아니에요. 예수님께서 그렇게 매 맞고 고통을 당하셨기 때문에 그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만 하면 어떤 병이든지 치료받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를 위해서 매 맞으시고, 고통 받으신 예수님을 기억하면서, 주님으로부터 받은 이 귀한 몸, 건강한 몸, 힘있는 몸, 주님의 일을 위해서 헌신하는 우리 모두가 됩시다.
다섯째, 가시관 쓰신 예수님
다섯 번째, "가시관 쓰신 예수님. " 그렇습니다. 존귀와 영광으로 관을 쓰셔야 할 예수님이 저주와 조롱의 가시관을 쓰셨습니다. 마태복음 27장 29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가시 면류관을 엮어 그 머리에 씌우고 갈대를 그 오른손에 들리고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희롱하여 가로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찌어다. 귀한 면류관을 쓰셔야 할 예수님의 머리 위에 가시로 엮은 가시 면류관, 저주를 상징하는 가시 면류관을 예수님 머리 위에 팍 씌웠습니다. 이마가 팍 찔리셨습니다. 피가 막 흘러 눈을 뜰 수가 없습니다.
인간의 모든 허물을 감싸주고, 나의 허물을 다 감싸주시고, 영원히 덮어주시기 위해서 예수님이 가시관을 쓰신 것입니다. 아담이 지은 허물, 하와가 지은 허물, 조상이 지은 허물, 알고도 지은 허물, 모르고도 지은 허물, 내가 지은 허물, 여러분이 지은 허물 때문에, 예수님이 그렇게 가시관을 쓰셨습니다. 우리의 허물이 가시가 되어 머리를 찔렀음에도 불구하고, 허물로 인해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 참고 인내하셨다, 그 말인 것입니다.
죄 없으신 예수님이 죄인을 대신하여 그렇게 고통을 당하면서도 참으셨다, 그 말입니다. 인내하셨다, 그 말입니다. 우리는 한번 생각해 봐야 합니다. 허물을 들춰내는 일은 사람을 죽이지만, 허물을 감싸주고 용서해 주는 일은 한 영혼을 구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주님이 쓰신 가시관을 우리도 쓰고, 이웃의 허물까지도 덮어주고, 사랑해 주고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됩시다.
여섯째, 십자가를 지고 가신 예수님
여섯 번째는, "십자가를 지고 가신 예수님. "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채찍에 등이 찢기셨잖아요. 얼마나 아파요 살점이 뚝뚝 떨어져 나가는데, 성한 살이 하나도 없는데, 얼마나 아파요 그런데 그 예수님이 어깨에, 찢어진 어깨에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향해서 올라가시는 것입니다. 넘어져도 가고, 쓰러져도 가고, 아파도 가고. 그 뿐이 아닙니다. 로마 병정들이 발길로 찹니다. 채찍으로 때립니다. 지나가는 사람들마다 조롱합니다. 침을 뱉고 막 비웃습니다.
그 십자가는 인생의 모든 질고와, 우리의 모든 질고와, 나의 모든 질고와, 슬픔과, 고통과, 눈물을 대신 짊어지신 사건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사야서 53장 4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여호와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예수님께 모든 짐을 맡겨버린 우리에게 더 이상 인생의 짐은 없는 것으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이제 우리는 영혼 구원을 위한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좇아가야 합니다. 아직 구원받지 못한 내 가족, 내 친구, 내 이웃, 인천에 있는 모든 시민들, 우리 민족, 전 세계 사람들을 향해서, 분명히 이제 구원의 복음을 들고, 십자가의 복음을 들고, 그들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서, 각자 목사가 진 십자가, 장로가 진 십자가, 권사가 진 십자가, 안수집사가 진 십자가, 구역장이 진 십자가, 성가대원이 진 십자가, 교사가 진 십자가, 내가 진 십자가를 내가 지고, 예수님을 따라가는 우리 모두가 됩니다. 성경은 말을 합니다. 마가복음 8장 34절 말씀이십니다.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일곱째, 벌거벗기신 예수님
일곱 번째, "벌거벗기신 예수님. " 예수님의 나이가 삼십 삼 세이십니다. 건강하신 예수님, 인격자이신 예수님이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벌거벗기셨습니다. 옷,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못하셨습니다. 온갖 조롱과 비웃음 속에서 예수님은 옷까지 빼앗기시고, 벌거벗기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인격과 자존심이 짓밟히시면서까지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나 때문에 우리 때문에, 인류 때문에 예수님은 만민 앞에서 온갖 수치와 모욕을 당하셨습니다. 그래서 로마서 10장 11절에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예수님을 믿는 사람에게 부끄러움을 당치 않게 하시려고 예수님이 대신 부끄러움을 당하셨습니다. 건강한 몸에 실오라기 하나도 걸치지 아니 하시고 만인 앞에서 다 벗기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으면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고, 예수를 믿으면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고,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을 받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혹이라도 전도하고 봉사하다가 당하는 수치와 모욕이 있다면 그것은 더 이상 부끄러움이 아닌 것입니다. 전도하다가 당하는 부끄러움, 봉사하다가 당하는 부끄러움, 수치와 모욕은 영광으로 아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전도의 어려움은 예수님의 수치와 모욕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그 말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이름의 영광을 위해 나 같은 존재가 쓰임 받은 것을 감사하고, 여호와 하나님이 나를 복음 전하는 전도자로 써 주신 것을 감사하고, 천사에게도 맡기지 아니하신 복음 전도의 사명을 나에게 맡겨주심을 알고서 감사하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하신 그 일, 그 일을 감당하시다가 십자가에 죽으신 사건의 그 일, 복음 전하는 일에 나를 써 주신 것을 알고, 감사하며, 감격하며, 참여하는 우리 모두가 됩시다. 사도행전 5장 41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기뻐했다는 것입니다.
여덟째,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
여덟 번째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 " 우리가 양손과 양발로 지은 죄, 생각으로 지은 죄, 마음으로 지은 죄 때문에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양손에 못이 박히셨습니다. 양발이 포개져서 못 박히셨습니다. 머리에 가시관을 쓰셔서, 옆구리에 창을 찔리셔서, 물과 피를 다 흘리시고, 우리를 위해서 물과 피를 다 쏟아내시고, 당신의 몸을 희생하셨습니다. 하나밖에 없는 생명과 육체를, 우리를 위해서 희생하셨다는 것입니다.
이 은혜를 아는 자는 주님을 위해서 시간과 물질을 드리는 것을 아까워하지 않아야 합니다. 주일날 주일 성수하는 것이 아깝지 않고, 전도하는 시간, 전도하는 물질, 모두가 다 아깝지 않고. 왜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님의 은혜, 예수님의 죽음 때문에, 예수님은 생명까지 바쳐서 나를 구원하셔서,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로 삼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이 구원하신 이 사건은 너무나 고마운 것입니다. 주님이 구원하기 원하시는 이웃들이 있습니다. 아직 구원받지 못한 가족이 있습니다. 친척이 있습니다. 이웃이 있습니다. 민족이 있습니다. 세계가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우리도 눈물 흘리고, 우리도, 우리도 피흘리고 사명을 감당하는 우리 모두가 됩시다.
아홉째,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
마지막 아홉 번째입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 " 이 땅에서의 모든 죽음은 누구에게든지 절망이요, 좌절이요, 끝장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죽음은 구원입니다. 영생입니다. 희망입니다. 승리요, 새로운 창조 역사의 시작인 것입니다.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강도를 낙원에 초청하시고, 부자관계를 뛰어넘어 효를 선언하시고, 휘장을 나눠서 하늘로 가는 길을 열어 놓으신 사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사건은 보통 은혜가 아닌 것입니다. 히브리서 10장 19절에서 20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이 죽어 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께로 가는 길이 확 열렸습니다. 예배의 길이 열렸습니다. 기도의 길이 열렸습니다. 응답의 길이 열렸습니다. 천국의 길이 열렸습니다. 은혜요, 은혜요, 은혜인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이제 누구든지 죄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못났음에도 불구하고, 버림받아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남녀노소, 빈부귀천, 누구든지 예수를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아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이 됩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를 수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이 복된 소식을 나만 알고 나만 믿는 것이 아니라, 가족, 친척, 이웃들에게, 인천시, 전국 도시, 천하 만민에게 선포하는 우리 모두가 됩시다.
결론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나 때문에 고난 당하시고,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습니다. 우리 모두가 다 나를 위해 고난을 당하시고, 죽임을 당하신 예수님을 위해서 마리아처럼 좋은 일을 하는 성도가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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