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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려주일] 십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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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인생을 살아가면서 어려움을 당할 때 그 어려움과 힘든 일을 극복하는 방법들을 터득하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우리 믿는 사람들은 힘들고 고통스러울 때, 일반적으로 주님의 십자가를 생각하면서 그 고통을 잘 견뎌 나갑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조금만 힘들면 죽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신자들은 힘들고 어려울 때라도 도리어 주님으로 인해 살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제가 수술 후에 지난 수요일까지 5차례 항암치료를 받았습니다. 네 번째까지 받을 때는 힘들어도 책을 읽기도 하고 노트북으로 작업도 하고 인터넷 강의도 듣고 잘 보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번 항암치료는 너무 힘이 들었습니다. 주사 바늘을 꽂는 순간부터 뺄 때까지 힘이 들었습니다. 잠도, 음식도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많이 가져갔던 자료를 하나도 보지 못하고 고통가운데 주님의 십자가만 생각하다가 내려 왔습니다. 이번 주 저의 설교를 위해 오히려 더 좋은 경험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한 병실에 다섯 명의 암환자와 다섯 명의 보호자까지 모두 10명이 있습니다.
함께 주사를 맞던 어떤 환자는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죽어도 좋으니까 주사를 뽑고 나가버리기도 했습니다. 좀 더 참아야 하는데 고통을 참지 못해서 죽음과 바꾸겠다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또 한 사람은 저와 같은 병명으로 수술을 했는데 14번 치료를 받았습니다. 이 주사약이 제대로 효과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고통만 당했던 것입니다. 오히려 다른 곳으로 전이되어서 6개월밖에 살지 못한다는 선고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생명을 연장할 수 있는 방법이 있는데 한 달에 300만원 정도하는 주사를 맞으면 된다는 겁니다. 그의 부인이 직장생활하면서 어렵게 투병생활하는 형편이었습니다. 부인이 저녁에 들어와서 물어도 의사의 말을 전하지 못하고 밤새도록 끙끙 앓으면서 고민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자기가 좀 더 살고자 온 가족들에게 경제적인 고통을 주게 될 것인데 어떻게 해야 하는지 고민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제가 성구암송이 녹음이 된 MP3를 귀에 꽂고 비몽사몽간에 계속 들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제가 이번 주에 십자가에 대한 설교를 하기 때문에 십자가와 연결해서 계속 생각했습니다. 특별히 마틴 로이드 존스와 존 스토트 목사님의 십자가에 관한 책을 생각하면서 저의 상황과 관련시켜 묵상하였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어떤 환난과 고통이 와도 십자가만 생각하고 묵상하여 자기에게 적용시키면 어떤 어려움도 다 이길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신기하게도 도저히 일어설 수 없을 것 같았는데 오는 날 12시가 되니까 갑자기 힘이 솟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직접 운전해서 내려왔습니다. 사흘을 정신없이 쳐져 있다가 어떻게 그런 힘이 솟아나는지 정말 신기했습니다. 그리고 목요일부터 오늘까지 편안하게 잘 지내게 되었습니다. 하루에도 기적같은 일들이 몇 번씩이나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1. 제3시에서 제9시까지
주님의 십자가를 생각해보면 말로 다할 수 없는 육체적인 고통을 맛보셨습니다. 주님이 밤이 맞도록 기도하셨습니다. 땀이 피가 될 만큼 진액을 쏟아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검과 몽치를 든 무리들에게 잡혀서 끌려갔습니다. 이어서 안나스와 가야바에게 심문을 받고 헤롯에게 그리고 산헤드린으로 끌려 다니면서 심문을 받았습니다. 마지막으로 빌라도에게 심문을 받고 십자가 언도형을 받아 채찍을 맞고 비아 돌로로사(Via Dolorosa)의 그 길을 따라 골고다로 올라갔습니다. 되어진 모든 일들이 아주 짧은 시간에 이루어졌습니다. 체포에서 심문, 판결, 형이 집행되는 일이 순식간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린 시간이 제 삼시라고 했습니다. 유대인의 삼시라는 것은 아침 9시에 못 박힌 것입니다. 제 9시에 운명하셨는데 이 시간은 오후 3시입니다. 9시에 십자가에 못박혀서 오후 3시까지 6시간동안 달려 계셨습니다. 그리고 새벽에 잡혀서 끌려 다니다가 심문을 당했고 거의 12시간 안되는 시간에 이 엄청난 일들이 예루살렘에서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이 오전 9시에 못박혀 3시에 운명하시기 까지 모두 7마디의 말씀을 남겼습니다. 십자가에 못박은 군병들을 보면서 “아버지여 저희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저희가 하는 일들을 알지 못하나이다. ” 두 번째로 한 편 강도에게 “오늘 내가 너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 그리고 십자가 아래에 있는 어머니와 제자를 보면서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보라 네 어머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을 통해서 예수님의 제자였던 요한이 한 평생 마리아를 터키 에베소에서 모셨습니다. 그리고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나의 여호와 하나님 나의 여호와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이 말씀은 구약성경 시편 22편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다섯 번째로 “내가 목마르다” 여섯 번째로 “다 이루었다”고 하셨는데 이 말은 헬라어 원문을 보면 약간 다르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테텔레스타이(Tetevlestai)라는 단어는 ‘내가 값을 다 치루었다’, ‘내가 다 갚았다’는 의미입니다. 인류의 죄값을 다 지불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구원을 완성했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라고 여호와 하나님께 자신을 맡기고 운명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하는 과정 속에서 얼마나 많은 고통과 아픔과 힘든 일이 많았겠습니까 밑에 있는 사람들의 욕과 저주와 비난을 듣기도 하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내려오라는 온갖 저주의 소리에 결코 반응하지 않으시고 묵묵히 인내하시고 참으셨습니다. 제가 병상에서 이 십자가를 묵상하면서 십자가를 우리가 지는 것은 인내하고 참는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중간에 포기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일들에 흔들리지 않고, 다른 사람들의 온갖 비방과 욕설과 저주를 들으면서 결코 거기에 반응하지 않고 끝까지 참는 것이 바로 십자가의 의미입니다. 죽어도 좋다고 하며 주사바늘을 뽑고 나가는 것도 일종의 반응입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모든 것을 다 참고 다 이루었다고 선포하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이 십자가에 달려 있을때, 여러 가지 현상들이 있었습니다.
온 땅에 어두움에 잠겨 운명하시기까지 예루살렘이 캄캄했습니다. 그리고 성소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졌습니다. 그리고 지진이 일어나서 땅이 흔들리고 무덤이 열려 잠자던 성도들이 일어나는 그런 일들이 있었습니다. 특별히 성소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졌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히브리서 기자의 증언을 보면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히 10:19-20)” 이제 누구든지 성소에 드나들 수 있습니다. 성소에는 원래 아무나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그것을 가로막고 있는 커튼이 있었는데 그 속에는 일년에 한 번 이스라엘의 대 제사장이 자신과 모든 백성들의 죄를 사함받기 위해서 여호와 하나님 앞에 제물을 갖고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성소의 휘장이 찢어짐으로 말미암아 누구나 여호와 하나님께 직접 나아갈 수 있는 근거가 되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구원의 길을 활짝 열어놓는 그런 중요한 사건입니다.
2. 주님이 지신 십자가의 의미
우리가 신앙생활하면서 십자가의 의미를 바로 아는 것이 참 중요합니다. 신학적으로 십자가의 의미를 여러 가지로 설명하지만 십자가의 의미를 모르고 신앙생활 한다면 우리는 잘못 하고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모르고 구원의 확신은 없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십자가의 의미를 바로 알고 바로 믿고 은혜를 얻기를 바랍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이 의미를 정확히 알았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교인들은 이 의미에 대해 무관심합니다. 미국에 터너 리러치 그룹(TRG) 여론회사에서 미국 기독교인 5000명을 대상으로 여론조사를 했습니다. 구원의 확신에 대해 물었는데 53%의 기독교인들이 있다고 답했습니다. 두 번째로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믿느냐는 물음에 대해 39%만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는다고 답했습니다. 이해되지 않는 통계입니다. 구원의 확신이 있다면 적어도 그 보다는 더 많은 사람들이 죽음과 부활을 믿어야 하는데 어떻게 더 적은 사람들이 나올 수 있습니까 이것을 보면 제대로 십자가와 부활을 알지 못하고 바른 신앙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말입니다. 교회를 다니긴 다니지만 여러 가지 다른 목적이나 잘못된 믿음을 가지고 다닌다는 것이 드러난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지않고 구원을 말할 수 없습니다. 기독교의 구원이 이것이 빠지면 성립이 안됩니다. 신앙의 본질적인 것을 놓치고 피상적으로만 신앙생활한다는 의미입니다.
십자가는 원래 로마의 사형틀입니다. 로마시민에게는 적용하지도 않았습니다. 가장 힘들고 고통스럽게 죽이는 형틀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스파르타쿠스라는 영화를 보신 분은 기억하실텐데 로마 연변에 반란을 일으켰던 사람들을 길게 줄지어 십자가에 달아놓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한 번에 수천명을 길가에 십자가에 달아놓은 것을 봅니다. 예루살렘에서 70년 폭동이 일어나서 티토장군이 함락시킨 뒤에 수천 명의 사람들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던 역사가 유세비우스에 의해서 증언되고 있습니다. 십자가는 이만큼 고통의 상징이요 흉악범과 정치범을 처벌하는 하나의 형틀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지신 십자가는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의 상징이요 구원의 상징이요, 용서의 상징이요, 화목의 상징이요, 승리의 상징, 능력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로마서 8장을 보면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십자가는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에게 보여준 가장 구체적인 사례입니다. 십자가는 대속의 상징, 구원의 상징입니다. 여러분 대속(Redemption)이라는 말은 값을 지불하고 해방시켰다는 의미입니다. 노예의 값을 대시 내주고 그에게 자유를 주는 겁니다. 구속(Atonement)이라는 단어는 보상한다는 의미입니다. 죄로 말미암아 사탄의 노예가 되어 죄의 종살이를 하던 우리를 피의 값으로 우리를 자유케 하고 해방시키셨습니다. 요한이 세례받고 가시는 예수님을 보고 세상 죄를 지고가는 여호와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증언했습니다. “다 이루었다”는 이 말씀 역시 모든 빚을 다 청산했다는 뜻입니다. 모든 죄에 대한 값을 다 지불했다는 의미입니다. 십자가를 지고 죽음으로 모든 죄인들의 죄를 청산했다는 의미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고통을 당하시고 죽으셨다는 이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도바울이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롬 1:16)”
십자가는 용서의 상징입니다. 의인이 하나도 없다고 했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로 죽어야 하는데 우리가 의롭다 함을 입고 그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되었습니다. 십자가는 여호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화목을 상징합니다. 골로새서 1장 20절에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하나되게 하셨느니라”고 하셨습니. 여호와 하나님과 인간이 하나되게 하셨고 인간과 인간이 하나되게 하셨습니다.
십자가는 승리의 상징입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란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칼이랴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롬 8:35-37)”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에게는 미련하지만 구원얻는 우리에게는 능력이 된다고 했습니다. 국기에 십자가가 그려져 있는 북유럽 지역의 국가들인 스위스, 노르웨이, 덴마크, 아이슬랜드는 온 국민들이 십자가의 신앙아래 하나되고 한 민족이 되었습니다. 결국 다 잘 살고 부강하고 평안을 누리는 복을 얻었습니다. 싸우고 죽이고 편 갈라지고 폭력이 난무하는 것과는 정반대로 그렇게 평화롭고 잘 살고 좋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바른 십자가의 신앙을 가질 때, 나와 너, 우리 모든 문제가 해결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이 지신 십자가의 의미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바로 믿어야 합니다. 바로 우리의 삶 속에서 실천해 나가야 됩니다.
3. 로마 백부장의 고백
54절을 보시면 “백부장과 및 함께 예수를 지키던 이들이 지진과 그 된 일들을 보고 심히 두려워하여 이는 진실로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이었다” 라고 고백했습니다. 시작부터 끝까지 지켜봤던 사형 집행 책임자가 그 광경을 보고 고백한 마지막 고백이 “이는 진실로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이었다”였습니다. 죄인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진정한 고백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나 따르는 무리들이 고백한 것이 예수를 믿지않고 도리어 사형을 집행했던 집행관이 그 모든 모습을 바라보면서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믿고 고백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진실이고 사실이라는 것을 증언합니다. 십자가의 사건은 거짓없는 여호와 하나님의 구원사역입니다.
전설에 의하면 이 백부장의 이름이 페트로니우스(Petronius)인데 사형을 집행할 때, 전체를 지휘했습니다. 이 사람은 그 광경을 보고 예수를 구주로 믿고 회개하고 군대생활을 청산하고 유명한 전도자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또 다른 이야기도 있는데 여기서는 그의 이름이 론지누스(Longinus)라는 백부장이고 이 사람이 예수님의 옆구리를 창으로 찔렀던 사람이라는 겁니다. 시신을 확인한 사람입니다. 동일인인지는 모르지만 이 론지누스도 이 사건을 계기로 심령의 충격을 받아 변화되어 지금의 터키지방 카파도키아 체사레아의 수도원에서 수도생활을 하면서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를 했다고 합니다. 이 사람의 유해는 지금도 만투아라는 곳에 보존되어 있고 로마교에서는 이 사람을 성인으로 봉축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비겁하게 못박아 죽게 한 빌라도가 나중에 로마황제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빌라도의 보고서라는 것을 남겼는데 “십자가 옆에서 말쿠스가 고백한 것처럼 나는 진실로 이 사람이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이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라는 겁니다. 어떻게 사형언도를 내린 빌라도가 나사렛 청년 예수가 진실로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이었다고 보고할 수 있습니까 이 문서는 지금 터키 이스탄불의 성 소피아 사원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때때로 사실아닌 것을 사실로 믿는가 하면 사실을 사실 아닌 것으로 생각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십자가와 부활 이 두 사건은 기독교의 핵심진리입니다.
어떤 사람이 시험을 칩니다. 그 시험문제를 정확하게 확인하고 정답을 쓰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모나미 볼펜을 가지고 시험을 치더라고 정확하게 알고 쓰기 때문에 그는 합격합니다. 그런데 수십만원하는 몽블랑 만년필로 시험을 친다하더라고 문제를 잘 모르고 답을 잘 못적으면 불합격입니다. 오늘날 교인들가운데 후자의 수준이 많습니다. 나는 유명한 교회 다닌다. 나는 유명한 목사님이 목회하는 교회의 교인이다는 것을 굉장히 자라합니다. 그런데 정말 중요한 것은 지하 조그만 개척교회 교인이라 할지라도 십자가를 바로 알고 구원의 원리를 바로 아는 사람이라면 이 사람이 정말 바른 믿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가 너무나 잘못된 허위의식속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기독교가 더 심합니다. 너무나 감성적인 것을 중요시하고 자꾸 본질에서 이탈되게 만듭니다. 여러분 십자가를 이상하게 달고 다니는 사람이 너무 많아요. 제대로 믿으면서 달면 모르겠지만 하나의 액세서리로 단다면 그것은 무지의 소치입니다. 십자가는 결코 악세사리가 아닙니다. 십자가는 나의 구원의 길이요 믿음의 참된 문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십자가가 없이는 면류관이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피하는 자가 아니라 십자가를 달게 지고 주님을 따르는 복된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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