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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려주일] 주님의 고난의 발자취를 따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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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1월에 독일에 있는 튀빙겐 대학에 전 세계적으로 이름 있는 학자들 70여명이 모여서 심포지움을 열었습니다. 과정신학(Process Theology)의 대가인 John Cobb과 Schubert Ogden을 비롯해서 Landon Gilkey, J웦gen Habermas, Hans K웢g, Martin Marty, Paul Ricoeur, David Tracy 같은 현대의 지성(知性)을 대표할 수 있는 각 분야의 권위있는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심포지움의 주제는 요즈음 한국에서도 한창 이슈가 되고 있는 Post-modernism (탈현대화, 脫現代化, 後現代化)에 대한 것이 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의 곳곳에서 탈현대화 현상이 일어 나고 있기 때문에 신학에 대한 paradigm(해석학적인 모델)을 다시 검토해야 하지 않느냐 하는 것이 심포지움의 주제였습니다. 그 심포지움의 결과가 신학에서의 패러다임의 변화(Paradigm Change in Theology)라는 한 권의 책으로 나왔습니다.
참석자 중에 T웑ingen 대학의 신학부의 교수로 있는 Norbert Greinacher라는 사람은 주제 강연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이번 심포지움에 참석하신 여러분들은 3가지 점을 깊이 생각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곳 T웑ingen은 참으로 아름다운 도시입니다. 그러나, 바로 여기서 부터 불과 15마일 떨어진 Grossengstingen이라는 곳에 핵무기 기지가 있습니다. 그곳에 6개의 핵유도탄이 있습니다. 그 유도탄의 위력은 히로시마에 떨어졌던 원자탄의 12배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이 이런 사실을 고려하지 않고 어떻게 신학을 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이런 사실에 대한 죄의식과 책임감이 없이 신학을 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둘째로, 이곳 T웑ingen은 참 아름다운 곳입니다. 하지만 이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Baden- W웦ttemberg 가면 90%가 넘은 나무들이 공해로 죽어 가고 있습니다. 자연을 정복하는 것을 지상과제로 삼았던 현대문명의 결과로 생태계는 파괴되고 있습니다. 바로 이런 현실 속에서 신학을 말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는 것입니까 셋째로, 여러분이 시간이 나는대로 이곳 T웑ingen의 시청 앞에서 아침마다 열리는 마켓을 한번 둘러 보십시요. 저는 오늘 아침에 감자를 sale하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감자는 Peru에서 수입한 감자였는데 Peruvian potatoes라고 씌어 있었습니다. 이곳 T웑ingen 사람들은 Peru 에서도 가장 가난한 사람들로 알려진 그 사람들이 생산한 감자를 먹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이 사실을 보면서 앞으로의 신학의 Paradigm이 어떻게 변화되어 하겠는가를 생각했습니다. 오늘날 전 세계의 8억의 사람들이 굶주리는 대가로 나머지 사람들의 배부르게 먹고 있습니다. ”
어떻습니까 여러분! Greinacher가 제기한 문제는 ”오늘 우리가 이런 문제를 다루지 않고 신학을 한다고 할 수 있겠는가” 하는 질문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오늘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주간을 맞아 제가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 싶은 말씀도 그런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은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베드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고난을 받으신 것은 우리에게 본을 보여 주셔서 그 자취를 따라 살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1 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베드로전서, 후서는 물론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가 쓴 편지입니다. 흔히 성경학자들은 베드로전서는 A. D. 64년경에 기록한 것으로, 베드로후서는 그보다 2년 후인 A. D. 66년 경에 기록했다고 합니다. 여러분, 그 때가 어느 때인지 아십니까 네로 황제에 의해 기독교에 대한 박해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던 때입니다. 베드로전서, 후서는 이 때에 핍박 받는 그리스도인들을 격려하기 위한 격려의 편지입니다. 이들에게 소망을 심어 주기 위한 소망의 편지입니다. 베드로전서, 후서의 키워드는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산 소망(living hope) 2 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고난을 받으심으로 우리에게 본을 보여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에는 고난이 있다는 것을 보여 주시고, 그 고난을 어떻게 이겨나가야 하는지, 그리고 그 고난의 의미는 무엇인지를 보여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난의 때에 당황하지 말고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발자국만 그대로 따라가면 힘들지 않다는 것입니다. 다시 부활하신 그분을 바라보는 산 소망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제가 어렸을 때 살던 시골은 눈이 많이 왔습니다. 눈이 올 때면 저의 형과 함께 눈길을 걷던 생각이 납니다. 눈이 많이 와서 발이 푹푹 빠집니다. 새벽에 아무도 걸어가지 않는 눈 길을 걷는 것은 재미는 있지만 힘이 듭니다. 그러나 이미 누군가가 걸어간 길은 힘이 들지 않습니다. 그 발자국이 나 있는대로 따라만 가면 되기 때문입니다.
어렸을 때 저의 기억입니다만, 저의 어머니에게 버선 본을 빌리러 오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버선은 조금 크게 만들어지면 자꾸 베껴지고 모양이 없습니다. 조금 빡빡하다싶게 만들어야 모양이 좋습니다. 그렇다고 너무 작게 되면 발이 아파서 오래 신고 있기가 힘이듭니다. 그래서 어머니들이 버선 본을 떠 두었다가 만들 때마다 그대로 만드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누가 만든 버선이 예쁘다고 소문이 나면 버선 본을 빌리러 옵니다. 그 모양을 본따서 그대로 만들면 되기 때문입니다. 서로 발 모양이 달라서 맞지 않을텐데도 여자들의 심리가 그게 아닌지 빌리러 옵니다.
얼마 전에 어떤 신앙서적에 재미있는 글이 실린 것을 보았습니다. 지금까지 출판된 책 중에 가장 많이 팔린 책은 성경이고, 두번 째로 많이 팔린 책이 토마스 아 켐피스(Thomas Kempis, 1379-1471)가 쓴그리스도를 본받아라는 책이라고 합니다. 토마스는 독일의 라인강 하류에 있는 켐펜이라는 조그만 마을에서 한 가난한 기술자의 아들로 태어 났습니다. 그는 성장해서 어거스틴 수도원에 들어 갔습니다. 그곳에서 엄격한 수도생활을 훈련 받고 신부가 되어서는 주로 수도생들의 교육을 맡아 보았습니다. 나중에 그 수도원의 원장이 된 토마스는 일생을 설교와 책 쓰는 것과 고전 필사(筆寫)에 바쳤습니다. 그의 경건하고 모범적인 신앙생활은 수도사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다고 합니다.
그 책의 내용은 주로 자신을 너무 믿지 말고 이 세상의 유혹과 위험으로부터 피하라는 것, 자신을 바로 아는 지식이 있어야 한다는 것, 자신에 대한 계속적인 비판이 필요하다는 것,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이 추구해야 할 덕목(德目)들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가 쓴 책은 라틴어로De imitatione Christi라고 되어 있고, 영어로는Imitation of Christ로 번역되었습니다.
”imitation”이란 말은 ”모방, 흉내, 복사” 라는 뜻으로 중세 수도사들의 냄새를 물씬 풍기는 말입니다.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님의 삶을 그대로 모방하는 것을 최고의 미덕으로 여겨졌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래서걸식교단(mendicant order)이라는 것이 생겨났지요. 프랜시스(Francis) 같은 사람은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집이나 아내나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린 자는 영생을 얻으리라. 3 는 말씀을 따라서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버렸습니다. 그리고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이나 가지지 말고, 여행을 위하여 주머니나 두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 ”4 는 말씀대로 제자들을 끌고 다니면서 이 집 저 집에서 걸식을 하면서 전도했습니다.
해마다 예루살렘에서는 골고다 언덕으로 가는 비아 돌로로사(Via Dolorosa)라는 길에서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가장행렬을 합니다. 그리고 해마다 해외토픽에 보면 이 맘 때 쯤해서 에수님의 십자가의 고통을 직접 맛보겠다고 자기 손과 발에 대못을 박는 용감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 삶을 그대로 모방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오늘 현대를 살아 가는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본을 따라, 그 자취를 따라 산다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본문에 나오는 ”자취”라는 말은 ”휴포그라모스(hupogramos)”라는 말인데, 여기에 두가지 뜻이 있습니다. 하나는 어린이들이 글씨를 배울 때 그 위를 따라 쓰는 점선으로 된 글씨본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이 경우에는 그대로 똑 같이 복사하는 것처럼 copy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이렇게 글씨 공부하는 사람은 장래성이 없습니다.
또 하나는 본받아야 할 좋은 글씨체라는 뜻이 있습니다. 훌륭한 스승 밑에서 글씨 공부를 한 사람은 자연히 그 스승의 영향을 받습니다. 훌륭한 제자는 스승의 영향을 받지만 그 가르침을 자기 것으로 만듭니다. 그러나 결코 스승을 모방하지는 않습니다. 훌륭한 제자는 스승의 가르침을 새롭게 해석해서 자기 체를 만들어냅니다. 그래도 전문가들은 그가 누구의 가르침을 받았는지 압니다. 그래서 훌륭한 제자는 모든 영광을 스승에게 돌립니다.
오늘 예수 그리스도의 본을 따라 고난의 현대적인 의미를 생각해 보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닐까요 문자적인 의미에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겠다고 나서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삶을 imitate하겠다고 나서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고난의 의미를 이 시대에 새롭게 해석하는 것, 좀 더 전문적인 용어로 말한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신앙생활의 패러다임(paradigm)으로 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다른 사람이 받아야 할 고난을 대신 짊어진 사건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런 고난을 받으셔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그분은 모욕을 당하시면서도 모욕을 갚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이 매맞고 상처를 입으신 덕분에 우리의 상처가 낫게 되었습니다. ”5 베드로는 ”그러므로,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애매하고 억울하게 고난을 받는 일이 있어도 그리스도의 고난을 생각하면서 참으면 이는 아름다운 일이라. ” 고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의 의미를 해석했습니다.
오늘 여러분은 이 말씀을 어떻게 여러분의 삶에 적용해야 하겠습니까 좀 더 쉬운 말로 바꾸어 말한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다른 사람이 받을 고난을 대신 받는 삶을 살겠습니까 여러분은 어떻게 남의 고통과 아픔을 함께 나누는 삶을 살겠습니까 여러분은 어떻게 다른 사람과 동병상린(同病相隣)하고 동고동락(同苦同樂)하겠습니까 이 질문에 어떻게 응답하느냐 하는 것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맡겨진 과제입니다. ”아니, 목사님, 내 한 몸 살기도 바쁜데, 왜 다른 사람의 고통을 내가 집니까 예수 믿는다는 것이 그런 것입니까” 저는 적어도 여러분들이 이런 수준의 질문을 뛰어넘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실험실에서 밤낮으로 연구하는 하는 학생들은 왜 그런 지루한 일을 계속합니까 학위를 받으려고요 실험 결과를 얻으려고요Nature지(誌)에 연구 업적이 실려서 학자들의 주목을 받으려고 합니까 아니면 언젠가 내가 하는 이 실험이 나에게 부와 명예를 가져다 줄 것을 바라고 합니까 그저 실험을 위한 실험이 아니라 병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그 병에 걸린 수많은 사람들의 고통을 나의 고통으로 알고 연구할 수 없습니까 나의 지금 이 연구가 성공해서 인류의 복지에 이바지하게 될 꿈을 가지고 실험할 수 없습니까
제너(Edward Jenner, 1749-1823) 이야기를 아십니까 제너는 영국 글로스터셔(Gloucestershire) 주의 버클리(Berkeley)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제너는 어릴 때부터 의사가 되려고 생각했습니다. 1773년에 그는 의사의 자격을 얻어 고향으로 돌아 와 개업했습니다. 고향에 돌아온 제너는 당시에 무서운 질병이었던 천연두에 대해 의문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상하게도 도시의 여자들보다 소나 말을 키우는 시골의 여자들이 천연두에 걸리는 일이 훨씬 적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1796년에 제너는 이 사실을 인체 실험을 통해 증명했습니다. 아니, 그보다 5년 전에 제너는 자신의 한 살된 아들에게 인체 실험을 했다는 사실이 알려졌습니다. 어떤 사람이 제너를 비판하는 글을 보았습니다. ”제너가 한 일은 매우 비윤리적이었다는 사실이다. 동물실험에서 효과와 부작용을 전혀 확인하지 않은 채 사람을, 그것도 어린이를 대상으로 생체실험을 한 것이다. ” 책상에 앉아서 이런 글이나 쓰는 사람이 어떻게 천연두로 죽어가는 수많은 사람들의 고통을 덜어주고자 했던 제너의 마음을 알겠습니까 오죽했으면 한 살난 자기 아들에게 그 실험을 했겠습니까 그를 비윤리적이라고 비난하겠습니까 제너 덕분에 1977년에 마침내 천연두는 세상에서 사라진 병이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자기의 생명을 내어 주는 사건이었습니다. 십자가는 자기의 것을 다른 사람과 같이 나누어 쓰는 삶에 대한 paradigm입니다. 십자가는 인간이 만들어 놓은 모든 이념(理念, ideology)이나 자기만 아는 자기 중심적인 이기주의를 뛰어 넘어서 인류가 함께 사는 삶에 대한 패러다임입니다. 저는 적어도 우리교회의 젊은이들이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내 삶에서 실천하겠다는 용기와 꿈을 가진 젊은이들이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단순히 저의 소망이겠습니까 여호와 하나님께서 오늘 찾고 계시는 사람들이 이런 사람들이 아니겠습니까
미국이 낳은 훌륭한 크리스찬 중에 글렌 커닝햄(Glen Cunniugham)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소년 시절에 집에 불이 나서 다리에 심한 화상을 입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는 육상 선수가 되어서 올림픽 경기에 나가 1마일 경주에서 금메달을 땄습니다. 그후에 그는 자기의 생을 신체 장애자들을 위한 복지 사업에 헌신했습니다. 장애자들을 위해 너무 많이 기부금을 내기 때문에 부인이 더 이상 살림을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여보, 남들은 장애자 사업을 본체만체 하는데 우리만 이런다고 누가 알아 줍니까” 부인의 말에 커닝햄은 ”여보, 내 생각은 그렇지 않아요. 이 일은 남들이 거들떠 보지도 않으니까 우리가 하는 것이요. 예수님께서 자기를 부인하라는 말씀은 바로 이렇게 살라는 뜻이 아니겠소”
지난 2월 17일 91세의 나이로 리차드 범브란트 목사님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 목사님은 루마니아의 공산치하에서 14년 동안 감옥에 감금생활을 하면서 루마니아의 지하 교회를 이끌었던, 이 시대의 산 순교자로 알려진 분입니다. 이 범브란트 목사님이 마지막으로 감옥에서 풀려 났을 때, 아들 마이클이 이렇게 물었다고 합니다. ”어버지, 아버지는 지금까지 겪으신 고통을 통해서 무엇을 배우셨는지 알고 싶습니다. ” 범브란트 목사님은 아들을 껴안으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마이클, 아버지는 감옥에서도 늘 이 네가지를 생각했단다. 첫째는 여호와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 둘째는 그리스도가 우리의 구세주시라는 것, 셋째는 영원한 삶이 있다는 것, 넷째는 사랑이 최선이라는 것이다. ” 아버지의 말에 아들 마이클은 ”아버지, 그 말씀은 제가 정말 듣기를 원했던 말씀이예요. ” 이렇게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T웑ingen의 한 신학자가 길 가에 말라 죽어 가는 나무들을 보면서 인류의 공동의 운명을 생각했고, 전 인류를 몇 번 씩이라도 죽일 수 있는 엄청난 힘을 가진 핵무기들이 우리 곁에 있는 현실을 보면서 남의 불행은 나의 불행이고, 남의 행복은 나의 행복이라는 인식을 했던 것 처럼, 시장에서 무심코 살 수 있는 한봉지의 감자를 보면서 내가 배부르게 먹고 있을 때에 이 세상엔 배고픈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처럼, 오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고난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해야 하는 그런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 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 여러분은 이 말씀에 어떻게 응답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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