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려주일] 그리스도인의 고난
본문
오늘 본문의 내용을 요약하면 여호와 하나님의 뜻으로 받는 고난에 대해서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고 기뻐하고 즐거워하라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으로서 받는 고난은 내 개인적인 실수나 잘못으로 인해서 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오는 고난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으로서의 고난이 아닌 것도 있다고 했습니다. 15절 말씀입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살인이나 도적질이나 악행이나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로 고난을 받지 말려니와”라고 말씀하면서 16절 말씀에 그리스도인으로서 만일 고난을 당하면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15절에 악한 일로 받는 고난은 부끄러운 일입니다.
살인을 하거나 도적질을 해서 형벌로 감옥에 들어갔습니다. 그것은 고난이 아니라 심판이자 벌입니다. 심는 대로 거두는 여호와 하나님의 법칙입니다. 그러나 한동대 김영길 총장의 경우와 같이 법의 적용과 형평이 어긋나고 지역 사회 인사들의 이기적인 모함에 의해서 감옥에 가는 경우는 여호와 하나님의 뜻이 있는 고난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아침에는 그리스도인의 고난에 대해서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1. 그리스도인의 고난은 시련(훈련)입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오는 고난은 시련입니다. 12-13절 말씀에 보니까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우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시험”이라고 하였습니다. 훈련이라는 것이죠. 훈련이라는 것은 우리를 더욱 더 성장시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고 오히려 즐거워하라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를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들기 위해서 시련을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군인이 되면 제일 먼저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머리를 박박 밀고 신병훈련소에 가서 훈련을 받습니다. 저도 비록 방위로 군생활을 했지만, 처음 신병훈련소에 가기 위해서 머리를 깎을 때 얼마나 서러운지, 꼭 죽으러 가는 사람처럼, 다시는 사회에 못나오는 사람처럼 심정이 착잡하더라고요.
그런데, 내가 아무리 가기 싫다고 해도 신병훈련을 받지 않으면 군인이 될 수 있습니까 ”나는 훈련만 빼주세요. 그리고 군인이 되겠습니다”한다고 그렇게 해주는 군대는 이 지구상에 없습니다. 군인이 되기 위해서는 훈련이 필수인 것입니다. 군대에 가기 위해서 신체검사에 합격했다고 훈련도 없이 군인이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판검사가 되기 위해서 사법고시를 다 통과하고 제일 먼저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연수원에서 교육을 받고 훈련을 받는 것입니다. 사법고시 통과했다고 훈련 없이 판검사가 될 수 있습니까
제가 처음 신학대학교에 입학을 하고 2학년인가 3학년에 목사후보생고시를 통과했습니다. 그 시험을 통과하면 법적으로 노회에서 전도사로 일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집니다. 그렇다고 무조건 시간만 지나면 목사가 됩니까 아닙니다. 학사과정을 남은 기간 충실하게 다녀야 합니다. 그래서 졸업장을 따야 됩니다. 그리고 나서 또 총신신학대학원이라는 과정에 시험을 통과해야 합니다. 그 시험에 합격하면 끝납니까 아닙니다. 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훈련을 학교에서 받아야 합니다. 또 그 졸업장을 받고 6개월 후에 또 강도사 고시를 합격해야 합니다. 그리고 1년을 또 각 지교회에서 목회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하물며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 백성이 되는 것이 예수님만 영접하면 바로 되는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겠죠 구원은 믿음으로 받지만, 여호와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거듭 태어나기 위해서는 반드시 훈련이라는 과정을 통과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난받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2. 그리스도인의 고난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13절 말씀에 우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시험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라고 하면서 그 이유를 가르쳐 줍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즉 우리에게 오는 훈련이 주님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기 때문에 즐거워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된 그 순간부터 우리가 당하는 고난은 내가 당하는 고난으로만 끝나는 문제가 아닙니다. 주님이 당하는 고난이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한 몸으로 구성됩니다. 무형교회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머리는 그리스도요 지체는 우리 그리스도인 한 사람 한 사람입니다. 우리가 손가락이 아프면 내가 아픈 것이지 손가락만 아프다고 하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회심하는 사건이 있을 때에 주님께서 바울에게 말씀하기를 ”사울아 어찌하여 네가 나를 핍박하느냐”(행9:4)고 물었을 때 바울은 깜짝 놀라서 ”주여 뉘시오니이까”하고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또 한 번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행9:5)고 대답하셨습니다. 주님은 성도들이 핍박당하고 고난 당하는 것이 바로 자신이 고난 당하고 핍박을 당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거기서 바울이 충격을 받고 회심하는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빌3:10절에 보면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서 살아간다고 하면서 다 이룬 것으로 여기지 않고 푯대를 행하여 잡으려고 노력한다고 고백하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성도는 주님의 고난과 부활에 함께 동참하고 참여하는데, 지금 당하는 고난은 당연하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다음절에 보면 부활에 이르려 한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참 중요한 말씀입니다. 부활은 목표이고 푯대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을 잡은 줄로 여기지 않고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해서 좇아간다고 고백하였습니다(빌3:14). 지금 좇아가는 것은 십자가입니다. 고난입니다. 기꺼이 푯대를 향해서 가는 수고와 고난과 핍박을 감수하겠다는 말씀입니다. 바울의 행적을 보면 고난의 역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고후11:23-30). 그래서 바울은 자신의 고난을 자랑하고 기뻐하고 즐거워합니다. 왜냐하면 그 고난이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인 줄로 알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예수님을 만날 때 깨우친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약한 것을 자랑하고 고난받기를 즐거워하였습니다. 고난받는 것이 은혜를 받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빌1:29, 빌2:17, 고후11:30).
3. 그리스도인의 고난은 복 받은 자의 증거입니다.
14절 말씀에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 있는 자로다” 참 귀한 말씀입니다. 고난받기를 싫어하는 현대인에게 꼭 필요한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에,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기를 싫어하는 우리들에게 꼭 필요한 말씀입니다. 듣기 싫어도 들어야 하는 말씀이요, 먹기 싫어도 먹어야 하는 영의 양식인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복 받기는 좋아하면서 고난받기는 싫어한다면 그것은 모순입니다. 고난이 있어야 부활이라는 복이 있는 것입니다. 13절 말씀도 고난에 참예하기를 즐거워하는 이유는 주님의 영광이 나타날 때에 우리도 그 영광에 참여하기 위함이라고 하였습니다. 히12장에 보면 우리를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과 같이 대우하시기 위해서 징계하신다고 하면서 징계가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히12:7-8).
훌륭한 군인은 시련과 훈련이라는 고난을 통과한 자입니다. 훌륭한 군인이라는 복은 그냥 얻은 것이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은 여호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라는 말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라는 의미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된 복을 누릴 수 있는 사람은 여호와 하나님이 주시는 징계를 훌륭하게 통과하는 자인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마5:장에서 산상수훈을 주실 때도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고 말씀하시고 또 반복해서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라고 하시면서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고 상까지 약속해 주셨습니다(마5:10-12).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고난은 우리 성도들에게 참 좋은 것입니다. 복된 것입니다. 고난은 시련이고 훈련입니다. 우리를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드는 훈련입니다. 또 고난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주님과 우리는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고난은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이고 복입니다. 그러므로 고난을 무서워하지 않는 삶이 되시기를 부탁드립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으로서의 고난이 아닌 것도 있다고 했습니다. 15절 말씀입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살인이나 도적질이나 악행이나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로 고난을 받지 말려니와”라고 말씀하면서 16절 말씀에 그리스도인으로서 만일 고난을 당하면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15절에 악한 일로 받는 고난은 부끄러운 일입니다.
살인을 하거나 도적질을 해서 형벌로 감옥에 들어갔습니다. 그것은 고난이 아니라 심판이자 벌입니다. 심는 대로 거두는 여호와 하나님의 법칙입니다. 그러나 한동대 김영길 총장의 경우와 같이 법의 적용과 형평이 어긋나고 지역 사회 인사들의 이기적인 모함에 의해서 감옥에 가는 경우는 여호와 하나님의 뜻이 있는 고난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아침에는 그리스도인의 고난에 대해서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1. 그리스도인의 고난은 시련(훈련)입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오는 고난은 시련입니다. 12-13절 말씀에 보니까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우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시험”이라고 하였습니다. 훈련이라는 것이죠. 훈련이라는 것은 우리를 더욱 더 성장시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고 오히려 즐거워하라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를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들기 위해서 시련을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군인이 되면 제일 먼저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머리를 박박 밀고 신병훈련소에 가서 훈련을 받습니다. 저도 비록 방위로 군생활을 했지만, 처음 신병훈련소에 가기 위해서 머리를 깎을 때 얼마나 서러운지, 꼭 죽으러 가는 사람처럼, 다시는 사회에 못나오는 사람처럼 심정이 착잡하더라고요.
그런데, 내가 아무리 가기 싫다고 해도 신병훈련을 받지 않으면 군인이 될 수 있습니까 ”나는 훈련만 빼주세요. 그리고 군인이 되겠습니다”한다고 그렇게 해주는 군대는 이 지구상에 없습니다. 군인이 되기 위해서는 훈련이 필수인 것입니다. 군대에 가기 위해서 신체검사에 합격했다고 훈련도 없이 군인이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판검사가 되기 위해서 사법고시를 다 통과하고 제일 먼저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연수원에서 교육을 받고 훈련을 받는 것입니다. 사법고시 통과했다고 훈련 없이 판검사가 될 수 있습니까
제가 처음 신학대학교에 입학을 하고 2학년인가 3학년에 목사후보생고시를 통과했습니다. 그 시험을 통과하면 법적으로 노회에서 전도사로 일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집니다. 그렇다고 무조건 시간만 지나면 목사가 됩니까 아닙니다. 학사과정을 남은 기간 충실하게 다녀야 합니다. 그래서 졸업장을 따야 됩니다. 그리고 나서 또 총신신학대학원이라는 과정에 시험을 통과해야 합니다. 그 시험에 합격하면 끝납니까 아닙니다. 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훈련을 학교에서 받아야 합니다. 또 그 졸업장을 받고 6개월 후에 또 강도사 고시를 합격해야 합니다. 그리고 1년을 또 각 지교회에서 목회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하물며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 백성이 되는 것이 예수님만 영접하면 바로 되는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겠죠 구원은 믿음으로 받지만, 여호와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거듭 태어나기 위해서는 반드시 훈련이라는 과정을 통과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난받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2. 그리스도인의 고난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13절 말씀에 우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시험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라고 하면서 그 이유를 가르쳐 줍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즉 우리에게 오는 훈련이 주님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기 때문에 즐거워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된 그 순간부터 우리가 당하는 고난은 내가 당하는 고난으로만 끝나는 문제가 아닙니다. 주님이 당하는 고난이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한 몸으로 구성됩니다. 무형교회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머리는 그리스도요 지체는 우리 그리스도인 한 사람 한 사람입니다. 우리가 손가락이 아프면 내가 아픈 것이지 손가락만 아프다고 하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회심하는 사건이 있을 때에 주님께서 바울에게 말씀하기를 ”사울아 어찌하여 네가 나를 핍박하느냐”(행9:4)고 물었을 때 바울은 깜짝 놀라서 ”주여 뉘시오니이까”하고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또 한 번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행9:5)고 대답하셨습니다. 주님은 성도들이 핍박당하고 고난 당하는 것이 바로 자신이 고난 당하고 핍박을 당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거기서 바울이 충격을 받고 회심하는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빌3:10절에 보면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서 살아간다고 하면서 다 이룬 것으로 여기지 않고 푯대를 행하여 잡으려고 노력한다고 고백하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성도는 주님의 고난과 부활에 함께 동참하고 참여하는데, 지금 당하는 고난은 당연하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다음절에 보면 부활에 이르려 한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참 중요한 말씀입니다. 부활은 목표이고 푯대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을 잡은 줄로 여기지 않고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해서 좇아간다고 고백하였습니다(빌3:14). 지금 좇아가는 것은 십자가입니다. 고난입니다. 기꺼이 푯대를 향해서 가는 수고와 고난과 핍박을 감수하겠다는 말씀입니다. 바울의 행적을 보면 고난의 역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고후11:23-30). 그래서 바울은 자신의 고난을 자랑하고 기뻐하고 즐거워합니다. 왜냐하면 그 고난이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인 줄로 알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예수님을 만날 때 깨우친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약한 것을 자랑하고 고난받기를 즐거워하였습니다. 고난받는 것이 은혜를 받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빌1:29, 빌2:17, 고후11:30).
3. 그리스도인의 고난은 복 받은 자의 증거입니다.
14절 말씀에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 있는 자로다” 참 귀한 말씀입니다. 고난받기를 싫어하는 현대인에게 꼭 필요한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에,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기를 싫어하는 우리들에게 꼭 필요한 말씀입니다. 듣기 싫어도 들어야 하는 말씀이요, 먹기 싫어도 먹어야 하는 영의 양식인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복 받기는 좋아하면서 고난받기는 싫어한다면 그것은 모순입니다. 고난이 있어야 부활이라는 복이 있는 것입니다. 13절 말씀도 고난에 참예하기를 즐거워하는 이유는 주님의 영광이 나타날 때에 우리도 그 영광에 참여하기 위함이라고 하였습니다. 히12장에 보면 우리를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과 같이 대우하시기 위해서 징계하신다고 하면서 징계가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히12:7-8).
훌륭한 군인은 시련과 훈련이라는 고난을 통과한 자입니다. 훌륭한 군인이라는 복은 그냥 얻은 것이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은 여호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라는 말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라는 의미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된 복을 누릴 수 있는 사람은 여호와 하나님이 주시는 징계를 훌륭하게 통과하는 자인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마5:장에서 산상수훈을 주실 때도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고 말씀하시고 또 반복해서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라고 하시면서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고 상까지 약속해 주셨습니다(마5:10-12).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고난은 우리 성도들에게 참 좋은 것입니다. 복된 것입니다. 고난은 시련이고 훈련입니다. 우리를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드는 훈련입니다. 또 고난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주님과 우리는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고난은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이고 복입니다. 그러므로 고난을 무서워하지 않는 삶이 되시기를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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