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려주일] 고난의 주 예수님
본문
하루는 예수님이 길을 가시다가 제자들한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너희 스스로 죄인이라고 생각하느냐. ' 제자들이 입을 모아 대답했습니다. '예, 저희는 다 죄인이라고 생각합니다. 죄를 짓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 그러자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그래. 그렇다면 자기가 지은 죄의 크기에 해당된다고 생각하는 만큼 돌을 주워 오너라. ' 그래서 제자들이 다 길가로 나가서 돌을 주워 옵니다. 베드로는 아주 큰 돌을 주워 왔습니다. 가룟 유다는 콩알만한 돌을 주워 왔습니다. 자기 주먹만한 돌을 주워 온 제자도 있었고 자기 주먹보다 더 큰 돌을 주워 온 제자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다시 말씀하십니다. '각자 자기의 돌을 들고 저 산으로 올라가자. ' 가룟 유다는 신나게 콧노래를 부르면서 올라갑니다. 베드로는 끙끙거리면서 올라갑니다.
산꼭대기에 다 올라가자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이제 들고 온 돌을 자기 앞에 내려놓아라. 다들 시장하지. 그 돌로 빵을 만들어 먹자꾸나. ' 역전의 순간입니다. 가장 크게 놀란 사람은 바로 가룟 유다와 베드로입니다. 내가 지은 죄가 이렇게 득이 될 줄을 어떻게 알았겠습니까. 자기 스스로 죄인임을 아는 사람은 복된 사람입니다. 내가 아주 큰 죄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주 복된 사람입니다. 자기 자신이 죄인임을 깨달은 사람은 자기의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살 길을 찾게 됩니다. 살 길을 찾는 사람을 구도자라고 합니다. 진정한 구도자는 우리의 영원한 살 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사실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만 하면 우리의 죄가 오히려 우리를 살리는 빵으로 변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죄가 깊은 곳에 은혜도 더 크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짓습니다. 죄를 짓지 않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3:23). 우리의 문제는 우리가 죄를 짓느냐, 짓지 않느냐 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문제는 우리가 지은 죄를 자각하느냐, 자각하지 못하느냐 하는 데 있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의 죄를 자각하는 사람은 자기의 죄 문제를 해결하는 길을 간절히 찾게 될 것입니다. 왜냐 하면 죄의 대가가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롬6:23). 죄를 지은 사람은 사형을 모면할 수 없습니다. 피를 흘리고 죽어야 합니다. '...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레17:11). 죄를 지은 사람이 자기 자신의 죄를 해결하는 길은 단 하나, 피를 흘려야 하는 것입니다. '...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히9:22).
우리는 우리 자신이 지은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피를 흘려야 합니다. 그런데 누구의 피를 흘려야 하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의 피입니까, 남의 피입니까. 자기 자신의 피를 흘려야 한다면 스스로 죽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자살자가 될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피를 흘려야 한다면 살인자가 될 것입니다. 이것도 안 되고 저것도 안 됩니다. 진퇴양난입니다. 과연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정말 살 길이 없는 것입니까. 여호와 하나님이 만들어주신 길이 없단 말입니까. 아닙니다. 있습니다. 아주 오래 전에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에게 살 길을 주셨습니다. 그 살 길이 어디에 있습니까. 창3:6-7을 봅시다. 아담은 여호와 하나님을 배신하고 여호와 하나님이 따먹지 말라고 하신 선악과일을 따먹고 말았습니다. 아담이 죄를 짓고 만 것입니다. 그래서 아담은 자기 자신이 지은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스스로 살 길을 찾아보았습니다.
스스로 찾은 길이 무엇입니까.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만들고 그 치마로 자기의 치부를 가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살 길은 완전한 길이 아닙니다. 인간이 스스로 만든 길은 결코 완전한 길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호와 하나님이 만들어주신 길은 무엇입니까. 창3:21을 봅시다. 여호와 하나님은 아담이 지은 죄를 해결하시기 위해 짐승을 잡아 피를 흘리고 그 짐승의 가죽으로 옷을 지어 입혀주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죄의 대가는 피흘리는 사형입니다. 내가 죽든지, 누가 죽든지 죽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지은 죄를 해결하기 위해 내 스스로 피흘리고 죽는다면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죄 문제는 해결되겠지만 내가 죽고 마는데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내가 자살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남을 죽일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그렇다면 여호와 하나님이 직접 만들어주신 살 길은 무엇입니까. 짐승의 피를 흘리는 것입니다. 내 대신에 짐승이 피를 흘리고 죽어주면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여호와 하나님께서 만들어주신 살 길입니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복음이 무엇입니까. 복음은 좋은 소식입니다. 무엇이 좋은 소식이란 말입니까. 내가 내 죄 때문에 죽어 마땅한데 누군가가 내 대신에 죽어주었다면 이것이 바로 복음이 아니겠습니까. 마18:23-27에 보면 1만 달란트 빚진 한 채무자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1달란트가 대충 1억 원이라면 1만 달란트는 1조 원입니다. 어마어마한 빚입니다. 자기 몸과 처자식과 자기 소유를 다 팔아서 갚아야 할 지경입니다. 그런데 마음씨 좋은 채권자가 그만 그 엄청난 빚을 다 탕감해 줍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내가 진 빚을 누군가가 대신 갚아주는 것, 이것이 복음이라는 것입니다.
1조 원은 어마어마한 돈입니다. 그런데 이 1조 원보다 더 귀한 것이 있다면 내 목숨입니다. 내가 내 죄 때문에 피흘리고 죽어 마땅한데 누군가가 내 대신에 피흘리고 죽어주었다면 이것이 바로 복음 중에 복음이 아니겠습니까. 2차 세계대전 때에 독일에 아우슈비츠 포로수용소가 있었습니다. 이 수용소에 갇힌 포로들은 차례 차례로 가스실에 끌려 들어가 죽어야 했습니다. 지금 가스실에 끌려 들어가야 할 사람은 가요니체크라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는 나치 독일군의 발에 매달려 애걸복걸합니다. '제발 살려 주십시요. 나한테는 젊은 아내와 갓난 아이가 있습니다. 제발 살려 주십시요. ' 그 때 한 신부님이 나타나서 독일군에게 말합니다. '내가 언제 끌려갈 지 모르지만 내 순서를 이 사람과 바꾸어 주시오. ' 그래서 그 날에 그 신부님은 가스실에서 죽었고 가요니체크는 끝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1972년 10월 로마교황청은 그 죽은 신부님에게 성자의 품위를 주었습니다. 그 자리에 참석한 가요니체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결코 잊을 수 없는 그 날 아침에 신부님은 나에게 미소를 보내면서 가스실로 끌려 가셨습니다. 그 때 나는 왜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는 지 알게 됐습니다. 나는 마치 골고다 언덕의 십자가 옆에 서 있는 것 같았습니다. ' 복음이 무엇입니까. 복된 소식입니다. 무엇이 복된 소식입니까. 내가 내 죄 때문에 죽어 마땅한데 누군가가 내 대신에 죽어주었다는 것, 이것이 복음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일찌감치 이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1년에 한 번씩 자신들의 죄를 대신해서 짐승의 피를 흘리는 속죄일 행사를 지켰습니다. '오직 둘째 장막은 대제사장이 일년 일차씩 들어가되 피 없이는 아니하나니 이 피는 자기와 백성의 허물을 위하여 드리는 것이라'(히9:7).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의 죄를 아주 잘 자각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아예 연례행사로 속죄일을 정해 놓고 지켰던 것입니다. 오늘의 성경본문 레16:15-16을 봅시다. 이스라엘의 속죄일에 그 해의 대제사장은 속죄제물인 숫염소 한 마리를 잡아 그 피를 가지고 지성소에 들어가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든 죄를 대속하기 위해 속죄소 위에 뿌리고 속죄소 앞에 뿌립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든 죄를 대속하는 속죄제사입니다. 이렇게 피흘리는 속죄제사를 드린 뒤에 대제사장이 또 하나의 살아 있는 숫염소를 취합니다. 이 번에는 죽이지 않습니다. 레16:20-22을 봅시다. 대제사장은 그 살아 있는 숫염소의 머리에 안수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든 죄를 고백하면서 그 죄를 그 염소한테 떠넘깁니다. 그리고 그 염소를 아무 사람도 살지 않는 광야로 쫓아냅니다. 첫 번째 염소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든 죄를 대속하기 위해 피흘리고 죽어야 했고 두 번째 염소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든 죄를 대속하기 위해 광야로 내쫓겨야 했습니다.
어쨌거나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 때문에 두 염소 다 대신 죽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레16:7-10을 봅시다. 그 해의 속죄일에 대제사장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든 죄를 대속하기 위해 두 마리의 숫염소를 취합니다. 그 중에 한 마리는 피흘려 죽어야 했습니다. 그 염소는 지성소 안에서 피를 뿌리기 위해서 선택됐습니다. 다른 염소 한 마리는 그 자리에서 죽지는 않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든 죄를 다 짊어지고 광야로 쫓겨나서 결국에는 죽어야 했습니다. 그러니까 한 마리의 염소는 지성소 안의 제물이 되어 피흘려 죽어야 했고 다른 한 마리의 염소는 광야로 떠나야 하는 아사셀의 제물이 되어 죽어야 했던 것입니다. 두 염소 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 때문에 대신 죽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일년에 일차씩 이런 속죄일 행사를 거국적으로 거행하곤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더 이상 이런 속죄일 행사를 거행하지 않아도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친히 우리 인간의 모든 죄를 대신 속죄하는 속죄제물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속죄일 행사를 위해 준비된 두 염소 중에서 피흘려 죽은 염소는 십자가에 매달려 피흘리고 돌아가신 예수님을 나타냅니다. 또 광야로 쫓겨난 다른 염소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철저히 버림당하신 예수님을 나타냅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 사람들로부터 철저히 버림을 당한 아사셀의 염소였고 또 이 세상 사람들의 모든 죄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으신 속죄제물의 염소였던 것입니다.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히9:12). 이전에는 대제사장이 지성소에 들어가서 염소의 피를 뿌림으로써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가 사해졌습니다. 이런 속죄일 행사는 해마다 반복돼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이런 것이 다 필요 없게 됐습니다. 히9:25-26을 봅시다. 예수님께서 친히 속죄제물의 죽는 염소가 되시고 아사셀의 쫓겨나는 염소가 되신 것입니다. 이전에는 해마다 속죄제사를 지내야 했지만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예수님께서 자기 자신의 피로 단번에 영원한 속죄제사를 드리신 것입니다. 염소를 잡아서 해마다 반복적으로 드리는 속죄제사가 아니라 친히 자기 몸을 드려서 단번에 영원한 속죄제사를 드리셨다는 것입니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고 피흘려 돌아가신 것은 다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의 모든 죄를 대속하기 위해 속죄제물의 죽는 염소로, 그리고 아사셀의 쫓겨나는 염소로 친히 희생당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이 이 예수님을 보고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여호와 하나님의 어린 양'(요1:29)이라고 선포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속죄제물의 죽는 희생양이었고 또 아사셀의 쫓겨나는 희생양이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속죄일 행사를 통해서 죄 없는 염소는 죽고 죄 많은 사람들은 다시 살게 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죄가 하나도 없으신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피흘려 돌아가시고 죄 많은 우리 인간은 이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영원히 살게 되는 것입니다. 사53:4-6을 봅시다. 예수님은 인간의 모든 죄를 대속하기 위해 피흘려 죽어야 했던 속죄제물의 염소였고 또 인간의 모든 죄를 뒤집어쓰고 광야로 내쫓겨야 했던 아사셀의 염소였던 것입니다. 바로 저와 여러분의 죄 때문에 예수님이 돌아가셨던 것입니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다 죄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 사형감입니다. 그것도 피를 흘리면서 죽어 마땅합니다. 그런데 우리 대신에 예수님이 죽어주신 것입니다.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롬4:25). 예수님은 우리 인간의 죄 때문에 십자가의 죽음에 내어줌이 되고 또 광야의 죽음에 내어줌이 되었던 것입니다. 바로 저와 여러분의 죄 때문에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이 포기되어야 했던 것입니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2주 전에 우리는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이신 예수님에 대해서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정말 예수님은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이 세상의 만물과 천사를 창조하신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이요,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이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요, 여호와 하나님 그 자신입니다. 이 세상에서 그 어느 것도 예수님 없이 창조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또 지난 주에 우리는 겸손한 왕이신 예수님에 대해서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 왕으로 오셨습니다. 그런데 천리마를 타고 오신 것이 아니라 멍에 매는 나귀의 새끼를 타고 오셨다고 했습니다. 사람들 위에서 군림하는 그런 왕이 아니라 사람들 밑에서 겸손하게 섬기는 그런 왕으로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이 시간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예수님은 바로 고난받으시는 주님이십니다.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이 낮고 낮은 세상에 오신 것만 해도 그 어디입니까.
그런데 이 여호와 하나님이 이제는 속죄제물이 되어 피흘려 죽으시다니요. 바로 저와 여러분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다니요. 그러나 그것은 사실입니다. '그리스도께서도 한 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여호와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벧전3:18). 이전에는 해마다 인간을 대신해서 짐승이 죽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친히 자기 몸으로 단번에 영원한 속죄제사를 드리셨기 때문에 그럴 필요가 전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을 창조하신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 나귀 새끼를 타고 나타나신 겸손한 왕이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바로 저와 여러분이 지은 모든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친히 십자가에서 죽으신 고난의 주님이십니다. 다 같이 사53:4-6을 찾아 읽으시겠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바로 저와 여러분의 죄 때문에 희생양으로 돌아가셨습니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죄 때문에 우리 대신에 십자가의 고난을 친히 당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면서 다 같이 기도하시겠습니다. '예수님, 우리는 다 죄인임을 고백합니다. 우리는 죄 때문에 피흘려 죽어 마땅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피흘려 돌아가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죽으시고 우리는 영원히 살게 됐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믿고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를 영원히 살려주신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산꼭대기에 다 올라가자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이제 들고 온 돌을 자기 앞에 내려놓아라. 다들 시장하지. 그 돌로 빵을 만들어 먹자꾸나. ' 역전의 순간입니다. 가장 크게 놀란 사람은 바로 가룟 유다와 베드로입니다. 내가 지은 죄가 이렇게 득이 될 줄을 어떻게 알았겠습니까. 자기 스스로 죄인임을 아는 사람은 복된 사람입니다. 내가 아주 큰 죄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주 복된 사람입니다. 자기 자신이 죄인임을 깨달은 사람은 자기의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살 길을 찾게 됩니다. 살 길을 찾는 사람을 구도자라고 합니다. 진정한 구도자는 우리의 영원한 살 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사실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만 하면 우리의 죄가 오히려 우리를 살리는 빵으로 변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죄가 깊은 곳에 은혜도 더 크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짓습니다. 죄를 짓지 않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3:23). 우리의 문제는 우리가 죄를 짓느냐, 짓지 않느냐 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문제는 우리가 지은 죄를 자각하느냐, 자각하지 못하느냐 하는 데 있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의 죄를 자각하는 사람은 자기의 죄 문제를 해결하는 길을 간절히 찾게 될 것입니다. 왜냐 하면 죄의 대가가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롬6:23). 죄를 지은 사람은 사형을 모면할 수 없습니다. 피를 흘리고 죽어야 합니다. '...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레17:11). 죄를 지은 사람이 자기 자신의 죄를 해결하는 길은 단 하나, 피를 흘려야 하는 것입니다. '...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히9:22).
우리는 우리 자신이 지은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피를 흘려야 합니다. 그런데 누구의 피를 흘려야 하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의 피입니까, 남의 피입니까. 자기 자신의 피를 흘려야 한다면 스스로 죽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자살자가 될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피를 흘려야 한다면 살인자가 될 것입니다. 이것도 안 되고 저것도 안 됩니다. 진퇴양난입니다. 과연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정말 살 길이 없는 것입니까. 여호와 하나님이 만들어주신 길이 없단 말입니까. 아닙니다. 있습니다. 아주 오래 전에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에게 살 길을 주셨습니다. 그 살 길이 어디에 있습니까. 창3:6-7을 봅시다. 아담은 여호와 하나님을 배신하고 여호와 하나님이 따먹지 말라고 하신 선악과일을 따먹고 말았습니다. 아담이 죄를 짓고 만 것입니다. 그래서 아담은 자기 자신이 지은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스스로 살 길을 찾아보았습니다.
스스로 찾은 길이 무엇입니까.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만들고 그 치마로 자기의 치부를 가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살 길은 완전한 길이 아닙니다. 인간이 스스로 만든 길은 결코 완전한 길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호와 하나님이 만들어주신 길은 무엇입니까. 창3:21을 봅시다. 여호와 하나님은 아담이 지은 죄를 해결하시기 위해 짐승을 잡아 피를 흘리고 그 짐승의 가죽으로 옷을 지어 입혀주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죄의 대가는 피흘리는 사형입니다. 내가 죽든지, 누가 죽든지 죽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지은 죄를 해결하기 위해 내 스스로 피흘리고 죽는다면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죄 문제는 해결되겠지만 내가 죽고 마는데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내가 자살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남을 죽일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그렇다면 여호와 하나님이 직접 만들어주신 살 길은 무엇입니까. 짐승의 피를 흘리는 것입니다. 내 대신에 짐승이 피를 흘리고 죽어주면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여호와 하나님께서 만들어주신 살 길입니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복음이 무엇입니까. 복음은 좋은 소식입니다. 무엇이 좋은 소식이란 말입니까. 내가 내 죄 때문에 죽어 마땅한데 누군가가 내 대신에 죽어주었다면 이것이 바로 복음이 아니겠습니까. 마18:23-27에 보면 1만 달란트 빚진 한 채무자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1달란트가 대충 1억 원이라면 1만 달란트는 1조 원입니다. 어마어마한 빚입니다. 자기 몸과 처자식과 자기 소유를 다 팔아서 갚아야 할 지경입니다. 그런데 마음씨 좋은 채권자가 그만 그 엄청난 빚을 다 탕감해 줍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내가 진 빚을 누군가가 대신 갚아주는 것, 이것이 복음이라는 것입니다.
1조 원은 어마어마한 돈입니다. 그런데 이 1조 원보다 더 귀한 것이 있다면 내 목숨입니다. 내가 내 죄 때문에 피흘리고 죽어 마땅한데 누군가가 내 대신에 피흘리고 죽어주었다면 이것이 바로 복음 중에 복음이 아니겠습니까. 2차 세계대전 때에 독일에 아우슈비츠 포로수용소가 있었습니다. 이 수용소에 갇힌 포로들은 차례 차례로 가스실에 끌려 들어가 죽어야 했습니다. 지금 가스실에 끌려 들어가야 할 사람은 가요니체크라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는 나치 독일군의 발에 매달려 애걸복걸합니다. '제발 살려 주십시요. 나한테는 젊은 아내와 갓난 아이가 있습니다. 제발 살려 주십시요. ' 그 때 한 신부님이 나타나서 독일군에게 말합니다. '내가 언제 끌려갈 지 모르지만 내 순서를 이 사람과 바꾸어 주시오. ' 그래서 그 날에 그 신부님은 가스실에서 죽었고 가요니체크는 끝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1972년 10월 로마교황청은 그 죽은 신부님에게 성자의 품위를 주었습니다. 그 자리에 참석한 가요니체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결코 잊을 수 없는 그 날 아침에 신부님은 나에게 미소를 보내면서 가스실로 끌려 가셨습니다. 그 때 나는 왜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는 지 알게 됐습니다. 나는 마치 골고다 언덕의 십자가 옆에 서 있는 것 같았습니다. ' 복음이 무엇입니까. 복된 소식입니다. 무엇이 복된 소식입니까. 내가 내 죄 때문에 죽어 마땅한데 누군가가 내 대신에 죽어주었다는 것, 이것이 복음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일찌감치 이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1년에 한 번씩 자신들의 죄를 대신해서 짐승의 피를 흘리는 속죄일 행사를 지켰습니다. '오직 둘째 장막은 대제사장이 일년 일차씩 들어가되 피 없이는 아니하나니 이 피는 자기와 백성의 허물을 위하여 드리는 것이라'(히9:7).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의 죄를 아주 잘 자각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아예 연례행사로 속죄일을 정해 놓고 지켰던 것입니다. 오늘의 성경본문 레16:15-16을 봅시다. 이스라엘의 속죄일에 그 해의 대제사장은 속죄제물인 숫염소 한 마리를 잡아 그 피를 가지고 지성소에 들어가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든 죄를 대속하기 위해 속죄소 위에 뿌리고 속죄소 앞에 뿌립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든 죄를 대속하는 속죄제사입니다. 이렇게 피흘리는 속죄제사를 드린 뒤에 대제사장이 또 하나의 살아 있는 숫염소를 취합니다. 이 번에는 죽이지 않습니다. 레16:20-22을 봅시다. 대제사장은 그 살아 있는 숫염소의 머리에 안수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든 죄를 고백하면서 그 죄를 그 염소한테 떠넘깁니다. 그리고 그 염소를 아무 사람도 살지 않는 광야로 쫓아냅니다. 첫 번째 염소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든 죄를 대속하기 위해 피흘리고 죽어야 했고 두 번째 염소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든 죄를 대속하기 위해 광야로 내쫓겨야 했습니다.
어쨌거나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 때문에 두 염소 다 대신 죽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레16:7-10을 봅시다. 그 해의 속죄일에 대제사장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든 죄를 대속하기 위해 두 마리의 숫염소를 취합니다. 그 중에 한 마리는 피흘려 죽어야 했습니다. 그 염소는 지성소 안에서 피를 뿌리기 위해서 선택됐습니다. 다른 염소 한 마리는 그 자리에서 죽지는 않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든 죄를 다 짊어지고 광야로 쫓겨나서 결국에는 죽어야 했습니다. 그러니까 한 마리의 염소는 지성소 안의 제물이 되어 피흘려 죽어야 했고 다른 한 마리의 염소는 광야로 떠나야 하는 아사셀의 제물이 되어 죽어야 했던 것입니다. 두 염소 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 때문에 대신 죽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일년에 일차씩 이런 속죄일 행사를 거국적으로 거행하곤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더 이상 이런 속죄일 행사를 거행하지 않아도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친히 우리 인간의 모든 죄를 대신 속죄하는 속죄제물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속죄일 행사를 위해 준비된 두 염소 중에서 피흘려 죽은 염소는 십자가에 매달려 피흘리고 돌아가신 예수님을 나타냅니다. 또 광야로 쫓겨난 다른 염소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철저히 버림당하신 예수님을 나타냅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 사람들로부터 철저히 버림을 당한 아사셀의 염소였고 또 이 세상 사람들의 모든 죄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으신 속죄제물의 염소였던 것입니다.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히9:12). 이전에는 대제사장이 지성소에 들어가서 염소의 피를 뿌림으로써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가 사해졌습니다. 이런 속죄일 행사는 해마다 반복돼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이런 것이 다 필요 없게 됐습니다. 히9:25-26을 봅시다. 예수님께서 친히 속죄제물의 죽는 염소가 되시고 아사셀의 쫓겨나는 염소가 되신 것입니다. 이전에는 해마다 속죄제사를 지내야 했지만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예수님께서 자기 자신의 피로 단번에 영원한 속죄제사를 드리신 것입니다. 염소를 잡아서 해마다 반복적으로 드리는 속죄제사가 아니라 친히 자기 몸을 드려서 단번에 영원한 속죄제사를 드리셨다는 것입니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고 피흘려 돌아가신 것은 다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의 모든 죄를 대속하기 위해 속죄제물의 죽는 염소로, 그리고 아사셀의 쫓겨나는 염소로 친히 희생당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이 이 예수님을 보고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여호와 하나님의 어린 양'(요1:29)이라고 선포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속죄제물의 죽는 희생양이었고 또 아사셀의 쫓겨나는 희생양이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속죄일 행사를 통해서 죄 없는 염소는 죽고 죄 많은 사람들은 다시 살게 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죄가 하나도 없으신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피흘려 돌아가시고 죄 많은 우리 인간은 이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영원히 살게 되는 것입니다. 사53:4-6을 봅시다. 예수님은 인간의 모든 죄를 대속하기 위해 피흘려 죽어야 했던 속죄제물의 염소였고 또 인간의 모든 죄를 뒤집어쓰고 광야로 내쫓겨야 했던 아사셀의 염소였던 것입니다. 바로 저와 여러분의 죄 때문에 예수님이 돌아가셨던 것입니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다 죄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 사형감입니다. 그것도 피를 흘리면서 죽어 마땅합니다. 그런데 우리 대신에 예수님이 죽어주신 것입니다.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롬4:25). 예수님은 우리 인간의 죄 때문에 십자가의 죽음에 내어줌이 되고 또 광야의 죽음에 내어줌이 되었던 것입니다. 바로 저와 여러분의 죄 때문에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이 포기되어야 했던 것입니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2주 전에 우리는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이신 예수님에 대해서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정말 예수님은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이 세상의 만물과 천사를 창조하신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이요,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이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요, 여호와 하나님 그 자신입니다. 이 세상에서 그 어느 것도 예수님 없이 창조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또 지난 주에 우리는 겸손한 왕이신 예수님에 대해서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 왕으로 오셨습니다. 그런데 천리마를 타고 오신 것이 아니라 멍에 매는 나귀의 새끼를 타고 오셨다고 했습니다. 사람들 위에서 군림하는 그런 왕이 아니라 사람들 밑에서 겸손하게 섬기는 그런 왕으로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이 시간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예수님은 바로 고난받으시는 주님이십니다.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이 낮고 낮은 세상에 오신 것만 해도 그 어디입니까.
그런데 이 여호와 하나님이 이제는 속죄제물이 되어 피흘려 죽으시다니요. 바로 저와 여러분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다니요. 그러나 그것은 사실입니다. '그리스도께서도 한 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여호와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벧전3:18). 이전에는 해마다 인간을 대신해서 짐승이 죽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친히 자기 몸으로 단번에 영원한 속죄제사를 드리셨기 때문에 그럴 필요가 전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을 창조하신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 나귀 새끼를 타고 나타나신 겸손한 왕이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바로 저와 여러분이 지은 모든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친히 십자가에서 죽으신 고난의 주님이십니다. 다 같이 사53:4-6을 찾아 읽으시겠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바로 저와 여러분의 죄 때문에 희생양으로 돌아가셨습니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죄 때문에 우리 대신에 십자가의 고난을 친히 당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면서 다 같이 기도하시겠습니다. '예수님, 우리는 다 죄인임을 고백합니다. 우리는 죄 때문에 피흘려 죽어 마땅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피흘려 돌아가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죽으시고 우리는 영원히 살게 됐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믿고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를 영원히 살려주신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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