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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려주일] 십자가의 고난

본문

十字架의 고난이 아닌것, 이마에서 땀이 흐르도록 受苦의 고난을 받은 아담과 헤와의고난, 왕궁에서 7년동안 逐出을 받은 느브갓네살의 고난, 바벨론에 70년동안 捕虜生活을 한 이스라엘의 고난도 십자가으이 고난은 아니다. 십자가의 고난은 그리스도에게만 適用되는 말이요, 또는 그리스도를 따르다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고난을 받은 성도들에게만 適用할 수 있는 말이다. 비록 애국자로 죽고 정의감에서 희생되었다 할지라도 그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받은 고난이 아니면 십자가의 고난이 될수는 없다.
主님은 十字架의 고난을 받으실만한 아무런 이유도 죄과도 없으셨으나 십자가의 고난의 쓴잔을 마시게 된 것이다. 왜 주님은 십자가의 고난을 받으셨나
1. 요즘 發表된 김구선생 暗殺事件처럼 권력자들의 정책의 제물이 되신 것이다.
당시에 제사장들과 서기관 바리새인들은 그리스도의 말씀과 그의 행하심이 자기들의 敎理나 信條에 맞지 아니하는 동시에 그리스도의 운동이 많은 사람을 따르게 하였으므로 자기들으이 社會的 내지 宗敎的 지위가 동요받게 되었기 때문에 없애 버리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막11:18, 성전 깨끗하게 하신 사건으로 제사장 書記官들이 자신들의 權威失墜를 이유로 어떻게 죽일까 모의함)( 마21: 종려주일 모든 民心이 그리스도에게 돌아가는 것을 보고 분한 생각이 나서)
그리하여 가롯유다를 買受,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고 내려오시는 예수님을 체포,심문하였으나 자기들은 死刑을 執行할 權限이 없으므로 당시 로마로부터 派遣된 總督 빌라도에게 넘기고 사형에 처할것을 요구했으나 빌라도가 審問하여 보니까 죽일만한 아무 죄도 벌견할 수 없었다.
빌라도는 예수님의 무죄를 알면서도 민중들을 겁내어 예수님을 내주고 자기의 자리를 지켰던 것이다. 이세상에는 정책적으로 無故한 사람들이 억울하게 희생을 당하는 일이 많다. (속죄양) 그리스도도 유대의 지도자들과 마음이 약한 빌라도의 野卑한 정책에 의하여 십자가의 고난을 받으신 것이다. 십자가의 고나은 죄 없는자에게 오는 것이다. 야고보10:15에는 慾心이 孕胎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잉태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하였고, 바울사도도 죄의 값은 死亡이라고 하였으나 그리스도의 고난은 결코 죄의 대가가 아니요 의인의죽음이요,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인 것이다. 이 고귀한 죽음을 부러워하는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 하기를 영광스럽게 思慕 하였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려 하여 그 죽으심을 본 받아 어떠하던지 죽은 가운데서 復活함에 이르려 하노니(빌3:10) 하였다. 우리 그리스도 인들에게는 고난이 있다 할지라도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고난이 있을 뿐이요 죽음이 있다 하더라도 또한 그리스도르 말미암는 죽음 곧 십자가의 죽음만 이 있어야 할 것이다.
19세기 찬송가 작자 페니 그로스비
 십자가로 가가이 행케 하옵소서 몸소 받는 고생도 알게 하옵소서 십자가 십자가 무한 영광일세 요단강을 건넌후 무한 영광일세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이 십자가의 고난이야 말로 페니의 말과 같이 無限 榮光임을 알아야 한다. 바울사도는 갈6:14에 나는 오직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하였다. 이 십자가의 苦難은 모든 모든 참된 그리스도인의 最大의 자랑인 것이요 名譽인 것이다.
2. 여호와 하나님 政策에 順應하신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宇宙萬物을 創造하실 때는 말씀 한마디로 창조하셨다. 그러나 죄인을 구속하실때는 그렇게 쉽게 하시지 않으셨다. 롬5:8에 오직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 사랑을 우리에게 나타내셨으니 이는 우리가 죄인 되었을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느니라하였고 갈1:4그리스도게서 여호와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의 몸을 드리셨으니 요3:17 여호와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審判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고 하였다. 이말들을 종합해 보면 범죄한 인간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당신의 아들을 犧牲 시키셨다는 것이다. 生存競爭을 위해서는 수단 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弱肉强食하는 이 세상에서 이해 할 수 없는 말이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하심으로만 人類를 구원하게 되셨으니 여호와 하나님께서도 이 方法 외에는 다른 아무 방법이 없으셨던 것이다. 聖經에 소경이 소경을 인도할 수 없다고 하였다. 물에 빠진 사람이 자기도 죽게 되었는데 다른 사람을 구해줄수 없는 것처럼 罪人을 救援하려 함에는 죄 없는 한 完全한 인간이 요구되는 것이니 주께서 당신의 몸으로 남의 죄를 대신 걸머짐으로만 속죄(贖罪)가 이루워 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히브리 9:14에 흠 없는 自己(그리스도)를 여호와 하나님께 드려 라골 하였고 28절에는 그리스도 한번 자ㅑ기를 드려 뭇사람의 죄를 담당하셨다고 하였으며 마20:20人子의 온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요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代贖物로 주려 함이니라 고 주님 자신이 친히 말씀 하셨다.
세상에는 許多한 宗敎가 있고 수많은 偉人이나 聖子들이 있으나 그들을 우리가 救主로 믿을 수는 없는 것이다. 對答은 간단한 것이다. 죄 없는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인 그리스도처럼 우리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의 고난을 친히 그 몸으로 받으신 것이다. 이것이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독생자를 버리실수 밖에 없는 유일의 정책이시요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의 정책에 順應치 않을 수 없는 使命이었다.

결론.
 십자가의 고난은 그리스도에게 있어서는 아니 받을 수 없는 盞으로서 요18:11에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 하셨으니 주님께서는 피할수 없었던 십자가의 고난이요 눅23:44에 주님이 십자가에 달려 殞命하실때에 제 육시쯤 되어 해가 빛을 잃고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여라고 기록한 대로 이는 獨生子를 贖罪의 祭物로 犧牲시키는 여호와 하나님의 눈이 캄캄하여 짐을 象徵하는 것으로 볼수 있는 것이다. 오늘 우리들은 이 주님의 十字架의 苦難을 생각하고 그 고난의 同參하는 마음을 갖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그는 왜 십자가를 졌나(마16:21-24 2639-42 눅23:44-46)
주님이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베드로의 信仰告白을 들으시고 칭찬하신 다음 너는 땅 윙에서 매고 푸는 특권을 가지게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이때에 베드로는 여호와 하나님의 代言者 가 되었던 것입니다. 마16:21에 보면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長老들과 大祭祀長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3일에 다시 살아나야 할것을 弟子들에게 비로서 가르치시니 하골 기록하였습니다. 여기서 주목할 말씀은 이 때로부터란 말과 비로서 가르치시니 란 말씀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말인가 하면 제자들의 예수는 그리스도시요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확실한 신앙고백을 들으신 후에야 처음으로 십자가의 고난에 대하여 말씀을 하셨던 것입니다. 또 그 다음은 그리스도시요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인 자기의 사명은 십자가의 고난을 통하여서만 완성할 수 있다는 예수님 自身의 本來의 信念이 여기서 처음으로 표현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고로 십자가의 고난은 우연히 부닥쳐서 어쩔수 없어서 당하신 것이 아니요 주님께서는 意識的으로 자진하셔서 이 고난을 안으시고 죽음을 선택하신 것으로 믿을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여호와 하나님의 뜻이요 경륜이시기 때문에 당신이 기꺼이 이 길을 택하여야 된다고 확신을 하셨습니다. (인자가 榮光을 받을 때가 왔도다. )
1. 왜 십자가의 고난을 자취하셨을가
십자가의 고난을 자취하셨다고 하는데에는 얼른 이해하기 困難한 問題들이 있습니다.
그러기에 베드로는 그리 마옵소서 이것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하였던 것입니다. 베드로의 생각에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시는 일이나 유대인들의 待望하는 메시야 王國 도래(到來)케 하는 일은 그의 권능과 영광 가운데서 얼마든지 가능한 일인데 하필 가장 부끄럽고 처참한 십자가의 고난의 방법을 택하실 필요가 어디 있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여기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이 問題에 대한 確實한 解答과 確信을 가지게 될때에 그것ㅇ이 그리스도교 신앙의 진수(眞髓)가 될 것입니다. 베드로는 여호와 하나님의 권능 즉 힘에 의한 메시야 왕국에 건설을 대망하였던 것입니다. 이것은 베드로 뿐만 아니라 그 당시 모든 유대인들의 가지고 있었던 思想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理想的 정치적 메시야 관을 거부하셨습니다. 당신의 天國은 權能이란 힘에 으이하여 건설되는 나라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어거스틴은 이 세상의 평화는 싸움에 依據한다고 하였습니다. 이 세상의 정ㅓ치가들은 힘의 의하여 평화를 창조해 내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것이 여호와 하나님의 힘이든지 인간의 힘이든지 이 힘에 의한 천국의 建設을 拒否하셨습니다.
그 다음으로는 道德主義者들의 天國觀에 대해서 생각해 보면 인간은 선을 행하므로서 구원을 받을 수 있고 힘이 없는 純粹한 善은 인간의 道德的 決斷에 의하여 可能하다고 믿습니다. 이것은 모세의 율법 주의자들과도 통하는데가 있습니다. 예수게서 律法主義 를 批判하시고 율법 지상주의자들인 제사장과 석디관들을 공격하신 것은 그들의 形式主義와 僞善的인 生活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니이버의 말과 같이 인간 정신 속에 있는 죄에 묻힌 자기 모순은 도덕적 행위에 의하여 극복될수 없으며 모든 도덕적 행위는 아무리 고원하고 순수한 것이라 하더라도 죄에 묻힌 자기 모순을 드러낼 뿐인 가닭인 것입니다.
예수께서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로서 십자가를 지신다는 것은 하나의 큰 비극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십자가를 지시기로 決心하시고 自進하셔서 예루살렘으로 향하여 걸어 가셨다고 하는데는 여기 중대한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문제의 焦點은 人間의 罪의 處理 問題에 있는 것입니다.
單刀直入的으로 말해서 그리스도교에서는 人間의 不安과 苦痛과 죽음의 審判이 있는것은 죄 때문이라고 주장합니다. 이 죄가 인간 생활에서 완전히 처리되지 않으면 인간에게 평화도 없고 행복도 있을 수 없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과 인간과의 평화와 인간과 인간 사이에 평화가 깨어진 것은 인간의 죄 때문인 것입니다. 평화의 회복 또는 평화의 유지는 죄의 문제가 처리될 떼에만 오는 것입니다. 문제는 어떻게 하면 죄가 처리되는 것이냐에 있습니다.
예수께서 갈릴리 해변에서 처음으로 천국 복음을 선포하실때에 悔改하라 天國이 가까우니라고 하셨습니다. 죄는 회개를 통하여서만 처리되기 때문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회개 의 눈물을 보시고는 그 죄를 용서하여 주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용서를 받으면 죄는 處理되는 것입니다. 죄가 없어지면 평화가 조성되는 것입니다. 니버는 말하기를 회개를 통하지 않고 힘에 의해 평화를 창조한 자들은 純粹한 平和를 창조 했다고 망상한다 고 하였습니다. 이는 예수의 천국관을 바로 이해한 말이라고 생각 합니다.
인자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은 인간의 죄의 용서를 여호와 하나님게 청하는 인간 회개의 대표적 영원의 표상이 되는 것입니다. 털끝 만큼도 죄가 없으신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 예수그리스도께서 인간의 죄의 책임을 스스로 걸머지시고 십자가의 고난을 달게 받으심으로서 여호와 하나님의 너그러우신 容恕를 請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어린양의 모습을 우리는 십짜가 상에서 피를 흘리시는 예수에게서 찾아 볼수가 있습니다.
이 십자가 앞에 전 인간이 자기의 죄 때문에 예수께서 죽음을 당하신 것을 깨닫고 自己의 罪를 悔改 할 때에 그 곳에 천국은 到來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믿는것이 십자가의 道입니다. 이 소식이 그리스도의 복음이 복음입니다. 영광의 아들은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그는 죄를 征服하시기 위하여 힘을 使用하시지 않으시는 사랑을 쓰셨습니다. 죄를 힘으로 정복하지 않으시고 사랑에 依하여 스스로 무너지게 한 것입니다. 글 사랑때문에 예수께서는 자기의 생명을 바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悲劇的인 十字架의 죽음을 自取하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조건 없이 쏟으시는 아가페의 사랑을 표증하시기 위한 까닭이 었습니다 .
ㄹ여호와 하나님의 나라는 이 비극적인 십자가의 道를 通하여서 이 세계 안으로 突入해 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난의 신ㅂ징요 기적입니다. 이 神秘는 知識으로 理解가 되는 것이 아니요 믿음으만 이해가 되는것입니다.
3. 예수 십자강의 고난을 본 받아서. 예수께서 십자가의 고난을 자취하실 覺悟를 가지고 예루살렘으로 올라 가셨지마는 잡히기 전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 하실때에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 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셨습니다. 만일 할만 하시거든 하시고 애원하신 말씀을 보아서는 예수께서 몹시 마음이 약해지시고 죽음을 두려워하신듯이 보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죽음의 인간성을 솔직하게 들어 내샌 것입니다. 그 反面에 인간의 몸을 입으신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여호와 하나님의 救贖의 經綸을 成就하시기 위해서는 잊지 않으시고 그러나 내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되어지이다 하고 祈禱하신 데에 예수님의 偉大하심이 나타납니다. 여호와 하나님의ㅏ 아들러서의 참된 모습이 여기에 보여집니다.
겟세마네 동산ㅇ의 예수님의 모습을 생각할 때에 우리는 크게 배우고 본 받는 바가 있어야 참된 주님의 제자로서 본분을 다할수가 있을 것이라고 믿어집니다.
그 다음으로 누가 복음 23: 46에 아버지여 내 靈魂을 아버지 손에 付託하나이다 하신 말씀과 요한19 30에 다 이루었다고 하신 最後에 말씀을 간단히 더듬어 봅시다. 우리 주님의 말씀과 생활은 전부가 여호와 하나님의 뜻에 맡기는 것이요 또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 徹頭徹尾한 信仰的 態度는 인간의 영원한 표본이 되는 것입니다. 이 위대한 모습을 바라보는 百部長과 구경꾼들은 이 사람은 정녕 義人이었다(눅23:47)이는 진실로 하난님의 아들이었다라고 感歎하여 마지 않았습니다.
예수께서 최후로 남기신 말씀 중에 영원히 살아서 우리의 마음을 감격시키는 또하나의 말씀은 다 이루었도다 하신 말씀입니다. 십자가의 죽음은 人子 예수에게 있어서는 悲劇的 不幸이었습니다. 인생의 절반도 못사시고 비극적인 죽음으로 막을 닫는 참패의 역사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여한이 없는 만족한 말씀으로 다 이루었다하시고 運命하시었습니다. 십자가의 고난은 예수의 생의 完成이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구원의 완성이 되신 것입니다.
평화를 찾아서 이 世界는 苦悶하고 있습니다. 힘의 의한 平和의 創造 運動은 더 큰 문제와 고민 속으로 인간을 이끌어 넣을 뿐입니다. 우리나라는 分斷 40여년을 지나도 아직도 제대로된 政治를 잘못하고 있습니다. 회개와 희생적 봉사의 생활을 목적으로 하는 십자가의 정신이 이 나라의 指導者들의 精神속에 孕胎되어 있지 아니한 까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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