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려주일] 종려나무 가지와 어린 나귀
본문
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종려주일은 부활절로부터 40일 전의 기간을 의미하는 사순절(旬節, Lent)의 마지막 주일로서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우리 개신교 교인들은 성령강림을 의미하는 ‘오순절’(pentecoste)에는 친숙하지만 ‘사순절’(tessaracoste)은 잘 모르는 것 같습니다. 성경에서 40이라는 숫자가 중요한 상징성을 가진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가령 모세의 시내산에서 40일 기도, 출애굽의 40년 여정, 엘리야의 40일 기도, 예수의 40일 금식기도 등입니다. 한 마디로 성경에서 40이라는 숫자는 준비, 철저한 준비를 상징합니다.
부활의 승리를 위한 철저한 준비라는 의미에서 부활절 40일 전의 기간을 사순절이라고 정한 것은 731년 샤를마뉴(Charlemagne) 대제였다고 합니다. 이후 1099년 교황 우르반(Urban) 2세는 이 기간을 속죄기간으로 지명하였고 이른바 ‘성회(聖灰) 수요일’ 곧 Ash Wednesday라고 부르는 전통이 생겨났습니다. 한 해전 종려주일에 사용하였던 종려나무 가지를 모았다가 태우면서 일년동안 지었던 죄를 회개하고 인간이 결국 “먼지와 재”가 될 수밖에 없는 사실을 고백하는 행사인 성회 수요일을 시작으로 사순절 기간이 진행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종교개혁 이후 점차 이러한 속죄일 혹은 사순절 전통이 퇴색하기 시작하였고 현재 개신교에서는 거의 지켜지지 않고 있습니다. 이처럼 일정기간 동안 자신을 돌아보며 회개하면서 부활의 참 기쁨을 준비하는 시간인 사순절 전통이 사라진 것이 아쉽기도 합니다. 현대 교회는 너무 설교 말씀 위주로 진행되기 때문에 교인들이 실제로 참여하고 준비하는 과정이 부족한 면이 많습니다. 또한 이런 축제나 절기 때마다 공동체 전체가 참여하던 관습이 사라졌다는 점도 아쉬운 점입니다. 근대서구에서 개인주의가 발달하면서 교회와 예배도 점차 개인주의적으로 변하여 왔던 것 같습니다.
사순절 마지막 주일인 오늘 종려주일은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예루살렘 주민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들고 예수께 환호와 박수를 보냈던 감격적인 사건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신이 난 아이들이 “호산나, 호산나”를 외치며 예수 일행을 앞장서서 영접했기에 ‘호산나 주일’이라고 칭하기도 하는 날입니다.
그러나 종려주일은 우리가 마냥 기쁘게 기념할 수 있는 주일은 아닙니다. 종려주일은 예루살렘 입성의 기쁜 소식과 동시에 앞으로 다가올 골고다의 죽음을 기억하게 하여주는 날입니다. 마치 개선장군을 맞는 것처럼 드높은 군중들의 환호성과 더불어 며칠 후 그들이 십자가 옆에 서서 퍼부을 저주의 외침도 기억해야 하는 주일입니다. 그래서 종려나무는 기쁨과 슬픔을 동시에 상징합니다. 마치 그 전날 예수님을 위해 마리아가 바쳤던 값비싼 향유와도 같이 예수께 영광을 드리는 기쁨과 동시에 그의 죽음을 미리 준비할 수밖에 없는 슬픔이 함께 담겨져 있습니다.
우리가 기념하는 종려주일은 이처럼 이중적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승리와 개선의 환호로 시작되는 이 주간이 사실은 고난주간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루살렘의 입성은 예수 사역의 큰 전환점이고 복음서 전체의 대반전, anti-climax입니다. 우선 지역적인 의미에서 대반전입니다. 주로 갈릴리에서 활동하던 예수께서는 이제 드디어 중앙무대인 예루살렘으로 진출합니다. 그의 결연한 의지는 “예루살렘을 향하여 앞장서서 가시더라”(누가 19:28)와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 서서 가시는데 저희가 놀라고 쫒는 자들은 두려워 하더라”(마가10:32)는 구절에서 잘 나타납니다.
예수의 제자들에게도 이 날은 대반전의 시작이었던 것 같습니다. 흥분한 제자들은 계속해서 앞으로 차지할 감투에 대한 인사청탁을 했고 심지어 최후의 만찬이 끝난 다음까지도 자리다툼을 했을 정도로 자기들 세상이 오는 줄로 착각하고 있었습니다. 군중들도 새 세상과 새 정권에 대한 기대로 들떠 있기는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오병이어의 기적과 나사로를 살린 영특한 젊은이 예수에 대한 소문이 예루살렘에 파다하였습니다. 예수에 대한 기대와 환호가 너무 큰 탓에 예수에게 호의적이던 바리새인들조차 좀 조용히 하게 하라고 부탁했으며(누가 19:39), 그에게 악의적이던 바리새인들은 이제 모든 음모가 허사로 돌아갔다고 자탄할 정도로 그 기세에 눌려 있었습니다(요한 12:19).
그러나 이런 모든 기대와 환호가 불과 사흘 만에 완전히 악몽으로 변하고 맙니다. 예수는 무기력하게 체포되고, 그를 따르던 제자들은 모두 도망쳐 버렸으며, 실망한 군중들은 예수에 대해 잠시나마 가졌던 희망보다 몇 배나 더 큰 증오를 그에게 퍼붓기 시작합니다. 예수께서는 이 모든 것을 알고 계셨음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그는 입성행진이 끝나자마자 예루살렘을 위하여 짙은 눈물을 흘렸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가까이 오사 성을 보고 우셨으며”(누가 19:41), 권력을 탐하는 제자들을 향하여서도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나의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마태 20:22)라고 안타까워 합니다. 박수치는 군중 속에서 고독을 느끼면서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시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요한 23:34)는 말씀을 미리 준비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오늘 종려주일은 의미의 반전을 뜻하는 주일입니다. 드디어 마지막이 시작되는(beginning of the end) 역설적인 날입니다. 기쁨과 슬픔, 개선과 굴욕, 탄원과 찬양이 교차하면서 십자가의 죽음을 준비하는 날입니다. 그러나 물론 진정한 반전, 역사의 대반전은 한 주일 뒤에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부활의 승리, 곧 죽음 자체를 죽게 하는 역사가 펼쳐질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입성하면서 예수께서 타셨던 어린 나귀도 역시 중요한 의미의 반전을 말해줍니다. 두말할 필요없이 황제는 백마가 끄는 황금마차를 타고 권세를 자랑해야 했습니다. 로마 시대 장군들도 수개월에 걸쳐 개선식을 준비해서 위풍당당하게 군마 퍼레이드를 벌였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초라한 어린 나귀를 타고, 그것도 남의 것을 얻어 타고 입성합니다. 아무리 좋게 보려고 해도 왕의 행차라기에는 너무나 궁색한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어린 나귀를 탄 예수는 황제 같지도 않았고, 장군 같지도 않았고, 영웅 같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예수를 ‘왕’(basileus)으로 영접하였다고 성경은 증언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왕은 그러나 정복과 권세의 왕의 아니라 평강과 화평의 왕입니다. 지고한 자존감으로 치장한 황제가 아니라 미천한 굴욕감으로 상처받게 될 왕입니다. 황금궁전에서 왕자로 태어났던 고귀한 신분이 아니라 짐승우리에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났던 하찮은 인물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당시 군중들은 물론 제자들조차 예수가 ‘왕’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난 뒤에 제자들은 이 미천한 신분의 절은이가 겪어야 했던 모든 굴욕과 고난의 의미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 요한 12장 16절은 “제자들은 처음에 이 일을 깨닫지 못하였다가 예수께서 영광을 얻으신 후에야 이것이 예수에 대하여 기록된 것임과 사람들이 예수께 이같이 한 것인 줄 생각났더라”라고 말합니다. 500여년전 스가랴 선지자의 예언, 곧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9:9)는 말씀을 이루려 했음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어린 나귀는 우리들에게 새로운 의미를 깨닫게 하는 반전의 상징입니다. 예수의 사역, 그의 죽음과 부활은 우리 인류에게 전혀 새로운 시대의 시작을 약속하였음을 깨닫게 합니다. 예수는 결코 당시 군중들과 제자들이 기대했던 왕이 아니었고, 그들이 집권하기 원하던 왕국도 결코 오지 않았으나, 제자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왕국이 이제 시작되었으며 예수가 진정한 의미에서, 완전히 새로운 의미에서 ‘왕’되신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종려나무 가지와 어린 나귀를 통하여 오늘 우리는 예수의 눈으로 이 세상을 보기 원합니다. 세상의 환호성과 박수 소리에 연연하지 않고 우리에게 맡겨진 여호와 하나님의 사명을 직시하기 원합니다. 그것이 너무 고통스럽고 너무 두려운 사명일지라도 십자가에 죽기까지 순종하신 예수를 닮기 원합니다. 예수님은 백마탄 영웅이 아니라 어린 나귀를 탄 반영웅(anti-hero)으로 우리에게 다가 오십니다. 그는 절대로 죽지 않고(die-hard) 반드시 승리하는 헐리우드 식 영웅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는 힘없이 쉽게 죽임을 당하는(die-easy)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죽음을 이겨낸 진정한 승리자 그리스도(Christus Victor)가 되셨습니다. 그는 패배함으로 승리를 얻으신 분. 모욕을 당하심으로 영광을 얻으신 분. 죽음을 당하심으로 영생을 보여주신 우리의 구세주입니다.
부활의 승리를 위한 철저한 준비라는 의미에서 부활절 40일 전의 기간을 사순절이라고 정한 것은 731년 샤를마뉴(Charlemagne) 대제였다고 합니다. 이후 1099년 교황 우르반(Urban) 2세는 이 기간을 속죄기간으로 지명하였고 이른바 ‘성회(聖灰) 수요일’ 곧 Ash Wednesday라고 부르는 전통이 생겨났습니다. 한 해전 종려주일에 사용하였던 종려나무 가지를 모았다가 태우면서 일년동안 지었던 죄를 회개하고 인간이 결국 “먼지와 재”가 될 수밖에 없는 사실을 고백하는 행사인 성회 수요일을 시작으로 사순절 기간이 진행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종교개혁 이후 점차 이러한 속죄일 혹은 사순절 전통이 퇴색하기 시작하였고 현재 개신교에서는 거의 지켜지지 않고 있습니다. 이처럼 일정기간 동안 자신을 돌아보며 회개하면서 부활의 참 기쁨을 준비하는 시간인 사순절 전통이 사라진 것이 아쉽기도 합니다. 현대 교회는 너무 설교 말씀 위주로 진행되기 때문에 교인들이 실제로 참여하고 준비하는 과정이 부족한 면이 많습니다. 또한 이런 축제나 절기 때마다 공동체 전체가 참여하던 관습이 사라졌다는 점도 아쉬운 점입니다. 근대서구에서 개인주의가 발달하면서 교회와 예배도 점차 개인주의적으로 변하여 왔던 것 같습니다.
사순절 마지막 주일인 오늘 종려주일은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예루살렘 주민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들고 예수께 환호와 박수를 보냈던 감격적인 사건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신이 난 아이들이 “호산나, 호산나”를 외치며 예수 일행을 앞장서서 영접했기에 ‘호산나 주일’이라고 칭하기도 하는 날입니다.
그러나 종려주일은 우리가 마냥 기쁘게 기념할 수 있는 주일은 아닙니다. 종려주일은 예루살렘 입성의 기쁜 소식과 동시에 앞으로 다가올 골고다의 죽음을 기억하게 하여주는 날입니다. 마치 개선장군을 맞는 것처럼 드높은 군중들의 환호성과 더불어 며칠 후 그들이 십자가 옆에 서서 퍼부을 저주의 외침도 기억해야 하는 주일입니다. 그래서 종려나무는 기쁨과 슬픔을 동시에 상징합니다. 마치 그 전날 예수님을 위해 마리아가 바쳤던 값비싼 향유와도 같이 예수께 영광을 드리는 기쁨과 동시에 그의 죽음을 미리 준비할 수밖에 없는 슬픔이 함께 담겨져 있습니다.
우리가 기념하는 종려주일은 이처럼 이중적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승리와 개선의 환호로 시작되는 이 주간이 사실은 고난주간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루살렘의 입성은 예수 사역의 큰 전환점이고 복음서 전체의 대반전, anti-climax입니다. 우선 지역적인 의미에서 대반전입니다. 주로 갈릴리에서 활동하던 예수께서는 이제 드디어 중앙무대인 예루살렘으로 진출합니다. 그의 결연한 의지는 “예루살렘을 향하여 앞장서서 가시더라”(누가 19:28)와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 서서 가시는데 저희가 놀라고 쫒는 자들은 두려워 하더라”(마가10:32)는 구절에서 잘 나타납니다.
예수의 제자들에게도 이 날은 대반전의 시작이었던 것 같습니다. 흥분한 제자들은 계속해서 앞으로 차지할 감투에 대한 인사청탁을 했고 심지어 최후의 만찬이 끝난 다음까지도 자리다툼을 했을 정도로 자기들 세상이 오는 줄로 착각하고 있었습니다. 군중들도 새 세상과 새 정권에 대한 기대로 들떠 있기는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오병이어의 기적과 나사로를 살린 영특한 젊은이 예수에 대한 소문이 예루살렘에 파다하였습니다. 예수에 대한 기대와 환호가 너무 큰 탓에 예수에게 호의적이던 바리새인들조차 좀 조용히 하게 하라고 부탁했으며(누가 19:39), 그에게 악의적이던 바리새인들은 이제 모든 음모가 허사로 돌아갔다고 자탄할 정도로 그 기세에 눌려 있었습니다(요한 12:19).
그러나 이런 모든 기대와 환호가 불과 사흘 만에 완전히 악몽으로 변하고 맙니다. 예수는 무기력하게 체포되고, 그를 따르던 제자들은 모두 도망쳐 버렸으며, 실망한 군중들은 예수에 대해 잠시나마 가졌던 희망보다 몇 배나 더 큰 증오를 그에게 퍼붓기 시작합니다. 예수께서는 이 모든 것을 알고 계셨음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그는 입성행진이 끝나자마자 예루살렘을 위하여 짙은 눈물을 흘렸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가까이 오사 성을 보고 우셨으며”(누가 19:41), 권력을 탐하는 제자들을 향하여서도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나의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마태 20:22)라고 안타까워 합니다. 박수치는 군중 속에서 고독을 느끼면서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시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요한 23:34)는 말씀을 미리 준비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오늘 종려주일은 의미의 반전을 뜻하는 주일입니다. 드디어 마지막이 시작되는(beginning of the end) 역설적인 날입니다. 기쁨과 슬픔, 개선과 굴욕, 탄원과 찬양이 교차하면서 십자가의 죽음을 준비하는 날입니다. 그러나 물론 진정한 반전, 역사의 대반전은 한 주일 뒤에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부활의 승리, 곧 죽음 자체를 죽게 하는 역사가 펼쳐질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입성하면서 예수께서 타셨던 어린 나귀도 역시 중요한 의미의 반전을 말해줍니다. 두말할 필요없이 황제는 백마가 끄는 황금마차를 타고 권세를 자랑해야 했습니다. 로마 시대 장군들도 수개월에 걸쳐 개선식을 준비해서 위풍당당하게 군마 퍼레이드를 벌였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초라한 어린 나귀를 타고, 그것도 남의 것을 얻어 타고 입성합니다. 아무리 좋게 보려고 해도 왕의 행차라기에는 너무나 궁색한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어린 나귀를 탄 예수는 황제 같지도 않았고, 장군 같지도 않았고, 영웅 같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예수를 ‘왕’(basileus)으로 영접하였다고 성경은 증언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왕은 그러나 정복과 권세의 왕의 아니라 평강과 화평의 왕입니다. 지고한 자존감으로 치장한 황제가 아니라 미천한 굴욕감으로 상처받게 될 왕입니다. 황금궁전에서 왕자로 태어났던 고귀한 신분이 아니라 짐승우리에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났던 하찮은 인물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당시 군중들은 물론 제자들조차 예수가 ‘왕’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난 뒤에 제자들은 이 미천한 신분의 절은이가 겪어야 했던 모든 굴욕과 고난의 의미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 요한 12장 16절은 “제자들은 처음에 이 일을 깨닫지 못하였다가 예수께서 영광을 얻으신 후에야 이것이 예수에 대하여 기록된 것임과 사람들이 예수께 이같이 한 것인 줄 생각났더라”라고 말합니다. 500여년전 스가랴 선지자의 예언, 곧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9:9)는 말씀을 이루려 했음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어린 나귀는 우리들에게 새로운 의미를 깨닫게 하는 반전의 상징입니다. 예수의 사역, 그의 죽음과 부활은 우리 인류에게 전혀 새로운 시대의 시작을 약속하였음을 깨닫게 합니다. 예수는 결코 당시 군중들과 제자들이 기대했던 왕이 아니었고, 그들이 집권하기 원하던 왕국도 결코 오지 않았으나, 제자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왕국이 이제 시작되었으며 예수가 진정한 의미에서, 완전히 새로운 의미에서 ‘왕’되신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종려나무 가지와 어린 나귀를 통하여 오늘 우리는 예수의 눈으로 이 세상을 보기 원합니다. 세상의 환호성과 박수 소리에 연연하지 않고 우리에게 맡겨진 여호와 하나님의 사명을 직시하기 원합니다. 그것이 너무 고통스럽고 너무 두려운 사명일지라도 십자가에 죽기까지 순종하신 예수를 닮기 원합니다. 예수님은 백마탄 영웅이 아니라 어린 나귀를 탄 반영웅(anti-hero)으로 우리에게 다가 오십니다. 그는 절대로 죽지 않고(die-hard) 반드시 승리하는 헐리우드 식 영웅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는 힘없이 쉽게 죽임을 당하는(die-easy)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죽음을 이겨낸 진정한 승리자 그리스도(Christus Victor)가 되셨습니다. 그는 패배함으로 승리를 얻으신 분. 모욕을 당하심으로 영광을 얻으신 분. 죽음을 당하심으로 영생을 보여주신 우리의 구세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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