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려주일] 주님이 가신 길
본문
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종려 주일은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 고난을 위해 예루살렘에 공식 입성하심을 축하하는 날로 사순절의 6번째 주일이며 고난 주간이 시작되는 첫날이기도 합니다. 이 날 만왕의 왕이신 성자 여호와 하나님이 어린 나귀를 타시고 겸손한 인간의 모습으로 입성하심으로 낮아지심을 보여주셨습니다. 이 시간에는 주님이 가신 길이라는 제목으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절대적인 것은 아니지만 천국 간증자들의 말을 참고하면 천성에 들어가는 사람의 수가 천 명에 한 명꼴도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 말은 구원의 수가 적다는 뜻이 아니라 천국의 수도 새 예루살렘의 영광을 누림에 합당한 자가 그만큼 적다는 뜻입니다. 새 예루살렘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인데 실재 우리가 돌아보아도 영광스런 신부의 수준에 이른 자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과연 그 수준에 이르렀다고 생각하십니까 모두 그 수준에 이르시기를 축원합니다. 계22:14에 나온 것 같이 이 성에 들어가려면 예수 믿고 또 행실의 두루마기를 빨아야 하는데 그래야 생명나무로 나아가며 천성의 영광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가야 할 길은 우리 주님이 가신 십자가의 좁은 길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좁은 길은 좁고 협착하지만 생명의 길이요 넓은 길은 크고 넓어 수월하지만 사망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마7:13-14)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시면서 주님은 몸소 이 좁은 길을 가셨습니다.
사실 주님에게는 세상 넓은 길이 많이 열려 있었습니다. 사단의 시험과도 같이 돌로 떡을 만들어 민생의 문제를 해결하여 추앙 받는 경제적 메시아의 길도 있었습니다. 혹은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 민중의 박수와 갈채를 받는 종교적 메시아의 길도 있었습니다. 혹은 마귀에게 엎드리어 세속적 권력을 장악함으로써 민족을 해방시키는 정치적 메시아의 길도 있었습니다. 그 뿐 아니라 열두 영도 더 되는 천군을 동원하여 얼마든지 자기를 잡으려던 사람들을 물리치실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 모든 길을 거부하시고 가장 좁고 험하며 괴롭고 쓰라린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그 길만이 우리 인생에게 영생의 구원을 안겨다 줄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그런데 주님은 이 길을 앞서 가시며 우리에게 부탁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하신 말씀입니다. 그 길만이 영생의 길이요 구원의 길이요 영광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럼 우리가 따라가야 할 주님께서 가신 길은 과연 어떤 길일까요
1. 주님께서 가신 길은 자기 부정의 길입니다.
그 말씀이 6절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는 근본 여호와 하나님의 본체시나 여호와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그랬습니다. 이 말씀은 여호와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다는 말씀으로 주님의 철저한 자기 부정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인간이 되신다는 것 상상할 수나 있겠습니까 이것은 철저한 자기 부정입니다. 이 자기 부정은 마16:24에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하신 말씀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자기를 부정하신 주님은 욕을 해도 때려도 배반해도 어린양처럼 잠잠할 뿐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나는 여호와 하나님인데,,, 그렇게 권리를 찾지 않으셨습니다.
이처럼 우리들도 나를 내려놓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내가 죽어야 합니다. 내 자존심, 내 생각도 죽어야 합니다. “나는 아무 것도 아니다. ” 혹은 “나의 존재는 없다. ” 하는 이 자기 부정이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주님의 뒤를 따를 수 있습니다. 내가 강한 사람일수록 갈등이 심합니다. 그러나 나를 십자가에 못 박아버리면 그렇게 편할 수 없습니다. 마음대로 살던 젊은이들이 군대에 들어가면 나를 내려놓고 복종하는 것부터 훈련시키듯 우리 신앙생활도 나 자신을 포기해야 비로소 가능합니다.
2. 주님께서 가신 길은 겸손의 길입니다.
본문 7-8절에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과 동등 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본체이신 예수님께서는 인생의 밑바닥까지 낮아져서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낮아지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 더 이상 낮아지려야 더 낮아질 수 없는 자리까지 자기를 낮추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들레헴 말구유에서 탄생하신 것을 비롯하여 나사렛 목수의 아들로 오시어 천대와 멸시로 일생을 보내시며 가난한 자와, 고아와, 과부와, 소외된 자들과 함께 하시며 병자를 고치시고 약자를 도우시며 죄인의 친구가 되어 주셨습니다. 그 시대의 집 없는 노숙자가 주님이셨습니다. 그래서 마8:20에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셨습니다.
그리고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 물로 주려 함이니라”(마20:28)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죄인을 용납하시고, 병든 자를 고치시며, 배고픈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셨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그냥 죽는 것으로는 부족합니다. 이런 사랑과 겸손의 길을 가야 제자입니다. 이것을 저는 적극적인 죽음이라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1988년 서울올림픽 탁구의 금메달리스트 '녹색 테이블의 여왕'이라고 불렸던 양영자 선수,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라고 하면 일생을 보장 받은 사람 아닙니까 그 이름만 가지고도 부럽지 않게 살 사람입니다. 그러나 양선수는 지금 선교사로 아무도 알아주지도 않고 가난하고 낙후된 몽골에 가서 선교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 성도의 모습입니다. 우리의 처한 환경과 사명은 달라도 이런 사랑과 겸손으로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야 합니다.
산악인에게 왜 산에 오르느냐고 물으면 거기 산이 있기 때문이라고 대답한다고 합니다. 이처럼 우리가 낮추어야 하는 이유는 낮추어야 여호와 하나님께 은혜 받을 뿐 아니라 비로소 낮은 데 처한 사람을 보살핌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을 본 받아 사람들과 함께 울고 함께 웃어야 합니다. 이 십자가의 길이 곧 영생의 길이요 행복의 길입니다.
3. 주님이 가신 길은 희생의 길이었습니다.
8절에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의 죽으심이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를 인류를 위한 속죄의 제물로 바치셨습니다. 이것이 우리들도 희생의 주님을 따라가야 합니다. 이 희생 없이 스데반 집사가 경험한 그 영원한 영생을 경험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기 위해서 주님의 희생적 사랑을 감사하고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저는 지난 주간에 다음 주일은 종려주일이고 특별히 고난주간이니 고난에 관한 말씀 잘 준비해야겠다고 생각하고 한 주간 내내 기도하며 말씀을 준비했습니다. 설교자가 말씀에 관심 갖는 것이 본분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아무리 기도하고 말씀 보아도 전할 영감이 오지 않았습니다. 지난 금요일 지칠 대로 지쳐 상심해 있는데 주님이 제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나의 고난을 묵상하는 것보다 고난주일 설교만 멋지게 하려는데 관심이 있구나. ” 제가 그 책망을 듣고 얼마나 죄송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깨닫고 회개했습니다. 그랬더니 비로소 전할 말씀을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께서도 그 무엇보다 주님의 고난을 생각하며 감사하며 동참하는데 더 마음 쓰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말보다 마음을 보시기 때문입니다. 내 희생 없이 주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편안하게 누워서 성령으로 충만할 수 없습니다. 내 마음과 몸을 드려 예배하고 기도하고 내 물질을 드려 봉사해야 합니다. 육체의 순교도 좋지만 매일의 삶 속에서 희생하는 산 순교가 더 앞서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나는 매일 죽노라고 했습니다. 여러 가지 고난을 받아도 주님을 생각하며 감사해야 합니다. 주님은 얼마나 아프셨을까 주님은 얼마나 참으셨을까 그래도 우리는 주님보다는 못합니다.
그러나 알고 보면 이 길이 최고의 영광의 길입니다.
9-11절을 보세요. “이러므로 여호와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좁은 길 같지만 생명길이요, 고난의 길 같지만 영광의 길입니다. 저주의 길 같지만 가장 복된 길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온전히 함께 하시는 길입니다. 천성의 복락을 지상에서부터 경험할 자가 됩니다. 주님을 따라 십자가의 좁은 길을 가는 자만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자기 행실의 두루마기를 씻으며 문들을 통하여 들어가기를 준비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주님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 말씀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십자가의 길은 자기 부정의 길입니다. 십자가의 길은 사랑과 겸손의 길입니다. 십자가의 길은 자기희생의 길입니다. 그러나 이 길은 생명의 길이요 영광의 길이요 행복의 길입니다. 우리 모두 주님께서 앞서 가신 십자가의 좁은 길을 함께 따라가 영원한 생명과 영광에 이르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절대적인 것은 아니지만 천국 간증자들의 말을 참고하면 천성에 들어가는 사람의 수가 천 명에 한 명꼴도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 말은 구원의 수가 적다는 뜻이 아니라 천국의 수도 새 예루살렘의 영광을 누림에 합당한 자가 그만큼 적다는 뜻입니다. 새 예루살렘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인데 실재 우리가 돌아보아도 영광스런 신부의 수준에 이른 자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과연 그 수준에 이르렀다고 생각하십니까 모두 그 수준에 이르시기를 축원합니다. 계22:14에 나온 것 같이 이 성에 들어가려면 예수 믿고 또 행실의 두루마기를 빨아야 하는데 그래야 생명나무로 나아가며 천성의 영광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가야 할 길은 우리 주님이 가신 십자가의 좁은 길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좁은 길은 좁고 협착하지만 생명의 길이요 넓은 길은 크고 넓어 수월하지만 사망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마7:13-14)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시면서 주님은 몸소 이 좁은 길을 가셨습니다.
사실 주님에게는 세상 넓은 길이 많이 열려 있었습니다. 사단의 시험과도 같이 돌로 떡을 만들어 민생의 문제를 해결하여 추앙 받는 경제적 메시아의 길도 있었습니다. 혹은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 민중의 박수와 갈채를 받는 종교적 메시아의 길도 있었습니다. 혹은 마귀에게 엎드리어 세속적 권력을 장악함으로써 민족을 해방시키는 정치적 메시아의 길도 있었습니다. 그 뿐 아니라 열두 영도 더 되는 천군을 동원하여 얼마든지 자기를 잡으려던 사람들을 물리치실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 모든 길을 거부하시고 가장 좁고 험하며 괴롭고 쓰라린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그 길만이 우리 인생에게 영생의 구원을 안겨다 줄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그런데 주님은 이 길을 앞서 가시며 우리에게 부탁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하신 말씀입니다. 그 길만이 영생의 길이요 구원의 길이요 영광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럼 우리가 따라가야 할 주님께서 가신 길은 과연 어떤 길일까요
1. 주님께서 가신 길은 자기 부정의 길입니다.
그 말씀이 6절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는 근본 여호와 하나님의 본체시나 여호와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그랬습니다. 이 말씀은 여호와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다는 말씀으로 주님의 철저한 자기 부정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인간이 되신다는 것 상상할 수나 있겠습니까 이것은 철저한 자기 부정입니다. 이 자기 부정은 마16:24에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하신 말씀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자기를 부정하신 주님은 욕을 해도 때려도 배반해도 어린양처럼 잠잠할 뿐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나는 여호와 하나님인데,,, 그렇게 권리를 찾지 않으셨습니다.
이처럼 우리들도 나를 내려놓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내가 죽어야 합니다. 내 자존심, 내 생각도 죽어야 합니다. “나는 아무 것도 아니다. ” 혹은 “나의 존재는 없다. ” 하는 이 자기 부정이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주님의 뒤를 따를 수 있습니다. 내가 강한 사람일수록 갈등이 심합니다. 그러나 나를 십자가에 못 박아버리면 그렇게 편할 수 없습니다. 마음대로 살던 젊은이들이 군대에 들어가면 나를 내려놓고 복종하는 것부터 훈련시키듯 우리 신앙생활도 나 자신을 포기해야 비로소 가능합니다.
2. 주님께서 가신 길은 겸손의 길입니다.
본문 7-8절에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과 동등 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본체이신 예수님께서는 인생의 밑바닥까지 낮아져서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낮아지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 더 이상 낮아지려야 더 낮아질 수 없는 자리까지 자기를 낮추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들레헴 말구유에서 탄생하신 것을 비롯하여 나사렛 목수의 아들로 오시어 천대와 멸시로 일생을 보내시며 가난한 자와, 고아와, 과부와, 소외된 자들과 함께 하시며 병자를 고치시고 약자를 도우시며 죄인의 친구가 되어 주셨습니다. 그 시대의 집 없는 노숙자가 주님이셨습니다. 그래서 마8:20에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셨습니다.
그리고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 물로 주려 함이니라”(마20:28)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죄인을 용납하시고, 병든 자를 고치시며, 배고픈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셨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그냥 죽는 것으로는 부족합니다. 이런 사랑과 겸손의 길을 가야 제자입니다. 이것을 저는 적극적인 죽음이라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1988년 서울올림픽 탁구의 금메달리스트 '녹색 테이블의 여왕'이라고 불렸던 양영자 선수,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라고 하면 일생을 보장 받은 사람 아닙니까 그 이름만 가지고도 부럽지 않게 살 사람입니다. 그러나 양선수는 지금 선교사로 아무도 알아주지도 않고 가난하고 낙후된 몽골에 가서 선교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 성도의 모습입니다. 우리의 처한 환경과 사명은 달라도 이런 사랑과 겸손으로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야 합니다.
산악인에게 왜 산에 오르느냐고 물으면 거기 산이 있기 때문이라고 대답한다고 합니다. 이처럼 우리가 낮추어야 하는 이유는 낮추어야 여호와 하나님께 은혜 받을 뿐 아니라 비로소 낮은 데 처한 사람을 보살핌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을 본 받아 사람들과 함께 울고 함께 웃어야 합니다. 이 십자가의 길이 곧 영생의 길이요 행복의 길입니다.
3. 주님이 가신 길은 희생의 길이었습니다.
8절에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의 죽으심이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를 인류를 위한 속죄의 제물로 바치셨습니다. 이것이 우리들도 희생의 주님을 따라가야 합니다. 이 희생 없이 스데반 집사가 경험한 그 영원한 영생을 경험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기 위해서 주님의 희생적 사랑을 감사하고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저는 지난 주간에 다음 주일은 종려주일이고 특별히 고난주간이니 고난에 관한 말씀 잘 준비해야겠다고 생각하고 한 주간 내내 기도하며 말씀을 준비했습니다. 설교자가 말씀에 관심 갖는 것이 본분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아무리 기도하고 말씀 보아도 전할 영감이 오지 않았습니다. 지난 금요일 지칠 대로 지쳐 상심해 있는데 주님이 제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나의 고난을 묵상하는 것보다 고난주일 설교만 멋지게 하려는데 관심이 있구나. ” 제가 그 책망을 듣고 얼마나 죄송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깨닫고 회개했습니다. 그랬더니 비로소 전할 말씀을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께서도 그 무엇보다 주님의 고난을 생각하며 감사하며 동참하는데 더 마음 쓰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말보다 마음을 보시기 때문입니다. 내 희생 없이 주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편안하게 누워서 성령으로 충만할 수 없습니다. 내 마음과 몸을 드려 예배하고 기도하고 내 물질을 드려 봉사해야 합니다. 육체의 순교도 좋지만 매일의 삶 속에서 희생하는 산 순교가 더 앞서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나는 매일 죽노라고 했습니다. 여러 가지 고난을 받아도 주님을 생각하며 감사해야 합니다. 주님은 얼마나 아프셨을까 주님은 얼마나 참으셨을까 그래도 우리는 주님보다는 못합니다.
그러나 알고 보면 이 길이 최고의 영광의 길입니다.
9-11절을 보세요. “이러므로 여호와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좁은 길 같지만 생명길이요, 고난의 길 같지만 영광의 길입니다. 저주의 길 같지만 가장 복된 길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온전히 함께 하시는 길입니다. 천성의 복락을 지상에서부터 경험할 자가 됩니다. 주님을 따라 십자가의 좁은 길을 가는 자만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자기 행실의 두루마기를 씻으며 문들을 통하여 들어가기를 준비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주님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 말씀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십자가의 길은 자기 부정의 길입니다. 십자가의 길은 사랑과 겸손의 길입니다. 십자가의 길은 자기희생의 길입니다. 그러나 이 길은 생명의 길이요 영광의 길이요 행복의 길입니다. 우리 모두 주님께서 앞서 가신 십자가의 좁은 길을 함께 따라가 영원한 생명과 영광에 이르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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