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기

TOP
DOWN

[종려주일] 고난과 성령

본문

사람들은 요즈음을 구조 전환기라고 말합니다. 이 구조 전환기에 많은 사람들이 직장을 잃고 방황하며 헤매는 경우를 우리는 주위에서 종종 봅니다. 그런데 그 고난을 개별화하여 보면 당하는 사람들은 끝없는 소외감과 고통을 받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얼마 전 TV에서는 자신의 장기를 불법으로 판 사람들의 이야기를 소개하였습니다. 한 젊은 사람이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고 식구들에게 폐만 끼치게 된 것을 비관하여 자살을 하려다가 가만히 생각해 보니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을 팔아서 부모님에게 마지막 효도라도 드리는 것이 낫나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장기를 천여만원을 받고 팔았다고 합니다. 이런 극단적인 이야기가 돌아가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인 것 같습니다.
오늘 저는 한 소설에 나오는 사람의 이야기를 통해 고난받는 사람들의 심정이 어떠한가를 알아보고, 그들을 위로하고 돕는 성령의 역할에 대해서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그것은 양귀자의 단편 《불씨》로서 먼저 그 이야기를 소개하고 고리고 그것을 종교적 신학적인 관점에서 해석해보려고 합니다.
이 이야기에 나오는 주인공 ‘그‘는 결혼하여 부천 원미동에 13평짜리 주공아파트를 사서 그곳에서 5년쯤 살고 있는 가장입니다. 그는 서울의 한 대기업인 M식품에 근무하면서 저축도 하고 어느 정도 안정적인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아내가 장사를 해보겠다면서 저축했던 돈을 털어 지하 상가에다 양품점을 하나 차렸는데 1년도 안돼서 망해버리고 보증금까지 모두 날리게 되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몇 달 뒤 그는 회사의 기구축소라는 명목으로 해고를 당했습니다. 약 반년간의 실업자 생활 끝에 결국 그는 13평의 아파트를 팔아 단칸방 전세로 옮기게 되었습니다. 그 기간 동안에 그는 직장을 구하기 위해 신문에 나는 곳이면 모두 이력서를 내었지만 허탕이었습니다. 중간에 한달간의 임시직을 얻은 적이 있었지만 나머지는 일없이 지냈습니다. 그는 숨통이 죄어 오는 앞날의 불안한 예감을 피하여 동네 어떤 상점 앞에서 벌리는 바둑 대결을 옆에서 지켜보기도 했습니다. “돈은 구멍난 자루에서 물이 새어나가듯 그렇게 없어져 갔다. 몇 년에 걸쳐 겨우겨우 이룩해 놓은 윤택한 삶의 모습이 단 몇 달만에 그 빛깔을 바꾸어 황폐해져갔다. “ “실직하기 이전에는 상상조차 못했던 온갖 고통이 그를 짓뭉개고 있었음에도, 매번 그는 내년쯤에는 새로운 일자리가 생겨나리라는 희망을 버릴 수가 없었다“고이야기는 그의 상황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그가 겨우 얻은 직장은 ‘전통문화연구회‘라는 모조 전통예술품 세일즈회사였습니다. 그는 옛 친구들이나 살만한 사람들을 찾아서 팔아보려고 했지만 말이 나오지 않거나 핀잔만 듣는 실패를 계속하였습니다. 이제 그는 팔지는 못하더라도 수 없이 연습한 세일즈 대사만이라도 끝까지 마치는 경험만이라도 꼭 해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어느 날 아침 한 시간 가량이나 계속되는 부인의 생활고 하소연을 듣고 나간 그는 오늘은 꼭 해내야 한다고 다짐을 합니다. 그가 몇 사람과의 실패를 거쳐 겨우 만난 사람은 고속버스 터미널에서 짐을 내리는 짐꾼 권씨였습니다. 다행히도 그 짐꾼은 그가 하는 세일즈 대사를 다 들어주고 때로는 질문도 하는 이상적인 고객이 되어 주었습니다. “지루한 이야기를 다 들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하며 그는 담배를 권합니다. 그의 일차적인 소원이 일단 성취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짐꾼은 비록 가장 싼 것이긴 하지만 촛대 하나를 사주며 서로간의 어려움을 나누는 말동무가 되어 줍니다.
오늘날 이 소설의 주인공과 같이 구조 전환기 속에서 고통 당하고 있는 사람들의 삶의 단면을 가장 잘 표현해 주는 말로서 ‘불안‘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불안은 미래에 대한 불안입니다. 어느 노동자 시인이 이러한 불안한 삶을 다음과 같은 시에서 아주 잘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평온한 저녁을 위하여
나면서부터인가
노동자가 된 후부터인가
내 영혼은 불안하다
잔업 끝난 늦은 귀가 길
산다는 것, 노동자로 산다는 것의
깊은 불안이 또다시 나를 감싼다.
화창한 일요일
가족들과 오붓한 저녁상의 웃음 속에서도
보장 없는 내일에 짙은 불안이 엄습해 온다.
믿을 거라곤 이 근육덩어리 하나
착한 아내와 귀여운 딸내미
기만원짜리 전세 한 칸뿐인데
괴롭기만 한 긴 노동
쪼개고 안 먹고 안 입어도 남는 것 하나 없이 물거품처럼
이러다간 언제 쓰러질지 몰라
그 무엇이 우리를 불안케 하는가
불안 속에 살아온 지난 30년을
그러나 단편 《불씨》의 주인공인 30대의 ‘그‘는 또 다른 민중(짐꾼 권씨)의 협력으로 외판사원의 첫 관문을 통과합니다. 이제 ‘그‘는 세일즈의 두려움을 극복하게 되었고 그 동안 굳게 닫혔던 입이 열렸습니다. ‘그‘에게 있어 구원은 이전 자리로 돌아가는 비현실의 허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가 지금 처해 있는 상황 속에서 직면한 막다른 골목으로부터의 탈출을 의미했던 것입니다. 또 다른 소외된 사람인 그 짐꾼은 그의 이웃이 되어 주었고, 그가 꼭 필요한 것을 도와주었습니다. 그것이 작은 돈이었고, 짧은 시간의 도움이었지만, 이 짐꾼은 정말로 적절한 도움을 주었으며, 이것으로 이이야기의 주인공인 30대의 ‘그‘는 이제 불안을 떨쳐버리고 일어날 수 있는 계기를 갖게 되었습니다.
《불씨》 이야기가 주는 강렬한 인상은 ‘그‘가 당하는 고난이 극히 개별화, 개인화된 고난이라는 것입니다. ‘그‘는 다른 사람들의 관심과 위로를 받지 못합니다. 오로지 혼자서만 외롭게 당하는 고난이었습니다.
혼자서 외롭게, 이른바 ‘현실‘의 공격을 받고 쓰러지는 사람은 이 소설에서 나오는 ‘그‘만이 아닙니다. 우리는 여러 가지 사건과 이유에 의해서 홀로 어려움을 겪을 때가 있습니다. 시편에서는 이러한 사람들의 영적인 외침을 아주 잘 그리고 있습니다. 88장의 말씀입니다:
야훼여, 내가 당신께 부르짖고 새벽부터 당신께 호소하건만
야훼여, 어찌하여 내 영혼을 뿌리치시고 이 몸을 외면하시옵니까
날마다 무서움이 홍수처럼 나를 에웠고
한꺼번에 밀어 닥쳐 나를 덮쳤습니다.
이웃들과 벗들을 나에게서 멀리하였으니
어둠만이 나의 벗이 되었습니다.
아무 잘못 없이 고난받는 자에 대한 뛰어난 문학적 이야기로서 우리는 욥기를 들 수 있습니다. 욥기는 매우 동화적인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이 왜 하필이면 사탄과 짜고 욥을 고통스럽게 하느냐고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이것은 이야기적인 것이니까 따지지 말고 이야기가 우리들에게 주려고 하는 의미를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욥기 첫 장을 보면, 여호와 하나님은 사탄이 하자는 대로 먼저 욥의 가족과 그의 모든 재산과 일꾼들을 빼앗아갑니다. 욥에게 남은 것이라고는 자신의 몸뚱이뿐이었습니다. 그는 이 땅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이었다가 이 땅에서 가장 가난한 사람으로 급전직하했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욥의 입에서는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원망의 소리가 나오지 않았습니다. 가난의 고난 앞에서도 재물에 초연하고 자기의 기구한 운명에 흔들리지 않고 그것을 그대로 받아드립니다. 그는 “야훼께서 주셨던 것을 야훼께서 가져가시니다만 야훼의 이름을 찬양할지라“고 말합니다. 이것을 보고 사탄은 여호와 하나님을 다시 설득하여 더 큰 고난을 욥에게 씌웁니다. 사탄은 욥을 쳐서 발바닥에서 머리 꼭대기까지 부스럼 병이 나게 했습니다.
욥이 토기 조각으로 자기 몸을 긁으며 자신의 운명을 한탄합니다. 아마 자기 자신의 운명을 그렇게 한탄하며 노래한 시는 동서고금의 어디에도 없을 것이라고 봅니다. 그는 자신이 태어난 날을 저주했습니다. “내가 태어난 날이여, 차라리 사라져 버려라. “고 외칩니다. 저는 이 글을 읽으면서 과연 어떤 문학이 이만큼 처절하게 사람의 고난과 절망을 노래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사람은 몸 없이는 살아갈 수 없습니다. 몸이 허약하고 병들면 일할 수 없으니 살아갈 수 없습니다. 세상 모든 것보다도 귀한 것이 몸이요 생명입니다. 욥은 가족과 재물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몸의 건강마저도 잃었습니다. 그가 가진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이제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처절한 고난의 외침이요 원망이었습니다. 그야말로 동물적인 외침이었던 것입니다(욥기 10:6): “당신께서 하시는 일이란 이 몸의 허물이나 들추어내고 이 몸의 죄나 찾아내는 것입니까“ 욥이 여기서 외친 것은 어째서 여호와 하나님이 이중적일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선하시고, 정의로우며, 자애로우신 그 분이 어떻게 이렇게 변덕을 부릴 수 있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어떻게 여호와 하나님이 변덕스러운 운명의 뒤에 존재하는 분일 수 있겠는가에 대한 부르짖음이었습니다. 그래서 변덕스럽게도 의로운 자, 죄 없는 자를 고난 속에 몰아넣을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욥의 친구들은 무엇이라고 말했습니까 욥의 친구들인 소위 말하는 현자들, 지혜 있는 자들, 우리 시대의 종교적인 지도자들은 욥에게 여호와 하나님은 결코 변덕스러운 분이 아니라 잘못한 사람만을 고통 주는 것이니 너의 잘못을 곰곰이 생각하고 그 고난을 달게 받으라는 말을 해주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욥은 그렇지 않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를 들여다보면 악한 자들이 잘살고 오래 살며 늙을수록 건강하고 그들의 후손이 다 잘되고 날로 재산이 늘며, 일생을 행복하게 지내다가 간다는 것입니다. 우리시대의 악한 사람들이 이렇게 잘되는 것은 이들이 죄가 없고,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 때문인가 하는 질문을 욥은 던집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욥의 친구들이 말하고 있는 여호와 하나님과 욥이 말하고 있는 여호와 하나님은 차이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저는 오늘 욥이 의탁하는 여호와 하나님을 예수 그리스도가 그야말로 온전하게 드러내 보여주었다고 생각합니다. 욥기에서는 이 예수 그리스도가 온전히 드러내 주신 여호와 하나님에게 자신을 의탁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욥이 이렇게 말합니다. “보아라, 지금 나의 증인은 하늘에 있다! 나의 보증인은 저 높은 데 있다. “(16:19).
그리스도 예수는 우리들에게 새로운 여호와 하나님을 보여주었습니다. 그 여호와 하나님은 사실 이전부터 계셨고, 구약에서부터 우리 삶 속에 함께 계셨던 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그 분을 잘못 이해하고 잘못 의탁했을 뿐이겠습니다. 그 여호와 하나님은 바로 성령이십니다.
오늘 봉독한 요한복음서에서는 성령이 누구인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나는 너희에게 새 계명을 주겠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키게 될 것이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면 다른 협조자를 보내 주셔서 너희와 영원히 함께 계시도록 하실 것이다. 그분은 곧 진리의 성령이시다.
로마서 8장 26-27절에 이 성령님의 역할에 대해서 바울 선생이 놀라운 말씀을 했습니다. “성령께서도 연약한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도 모르는 우리를 대신해서 말로 다 할 수 없을 만큼 깊이 탄식하시며 여호와 하나님께 간구해 주십니다. 그리고 마음속까지도 꿰뚫어 보시는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성령의 생각을 잘 아십니다. “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은 연약하고 고난 당하기 쉬운 우리들을 도우신다는 것입니다. 고난 당하는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이루 다 할 수 없을 만큼의 탄식을 하시며 고난 당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돕고 간구해 준다는 것입니다. 그 성령님은 우리로 하여금 서로 함께 살 수 있는 상생의 공동체를 이 땅에 건설하라고 인도하시고 지도하십니다.
저는 마지막으로 한 이야기를 해드리고 끝내려고 합니다. 아프리카 나이지리아라고 하는 나라에서 한 남자아이가 닭을 한 마리 키웠습니다. 이 아이와 그 암탉은 아주 가까운 친구였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이 닭이 집을 나가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매우 실망한 아이는 산지사방으로 닭을 찾아다녔지만 찾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기쁘게도 달포가 지나서 이 닭이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일곱 마리의 삐약삐약거리는 예쁜 병아리들을 데리고 돌아왔습니다. 그러다가 하루는 이 마을 나이든 소년들이 마릉 바깥에 있는 숲에 불을 질러서 그 속에 있는 동물들을 잡으려고 했습니다. 불을 내서 많은 동물들이 뛰어 나오면 그것에 창을 던져서 잡곤 했습니다. 그런데 어디선가 다 익은 고기의 냄새가 났습니다. 그래서 그곳에 가보니 한 마리의 새처럼 보이는 것이 타 죽어 있었습니다. 가까이 가보니 그 아이가 그렇게 사랑하던 암탉이었습니다. 너무나 두렵고 놀라 그 타 죽은 닭을 가서 안았습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그 닭 아래서 삐약삐약거리며 병아리들이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이 엄마닭은 자기의 병아리들을 무사하게 보호하느라고 자기 몸을 돌보지 않았던 것입니다.
성령 여호와 하나님은 바로 이러한 엄마닭과 같은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그분은 우리들이 살 수 있도록 우리를 위해서 고난 당하시고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 기도해 주시며 우리의 어려움을 성부 여호와 하나님께 간구해 주시는 분입니다.

댓글목록 0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