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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려주일] 십자가의 도

본문

이번 주는 고난주간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주간이지요. 이 주간을 우리가 어떤 마음의 자세를 가지고 보내야하는지 또한 어떻게 준비해야하는지를 한번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지신 십자가가 우리에게 어떤 역사를 이루었으며 그 십자가의 귀함이 무엇이며 그 능력이 무엇인지를 확인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특히 주님의 십자가가 우리에게 주는 의미를 다시 한번 되새기는 은혜가 있기를 원합니다.
오늘 고린도전서 본문말씀에 ‘십자가의 도’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 십자가의 도가 무엇일까요 십자가의 도를 설명하면서 십자가의 도는 구원의 능력이 된다고 말합니다. 십자가를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구원입니다. 십자가를 빼놓은 상태에서 구원은 절대로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죄사함이 없이는 구원이 없다는 것입니다. 죄사함은 십자가를 통해 이루어 진 것이지요. 우리가 받아야할 죄의 심판을 주님이 대신 받으시고 우리의 죄를 다 담당하시고 한 제물이 되셨으므로 우리는 죄사함을 받을 수 있게 되었고 그 십자가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된 것입니다. 십자가의 가장 귀한 은혜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리고 바울이 그 십자가의 도를 지금 설명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십자가의 도를 이야기하게 된 배경부터 우리는 좀 알 필요성이 있습니다. 배경이라 함은 고린도교회와 그 주변 상황을 알 필요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로마시대에 부유한 도시 중의 하나였습니다. 이런 부유한 도시에 바울이 개척을 하게 되었지요. 그런데 이 고린도교회에는 여러 종류의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가난하고, 어떤 사람들은 부자고 어떤 사람들은 종교적이고 어떤 사람들은 미신적인 성향을 가진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이런 여러 공통체가 모여 고린도교회를 이루었습니다. 그리고 이 교회는 많은 사람들이 다녀갔습니다. 목회자들도 다녀갔고 순례자들도 다녀갔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성도들의 취향에 따라 교회가 형성되고 말았습니다. 다시 말하면 성도들 취향에 따라 분파가 생기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그 분파를 크게 네 종류로 나누어 졌는데 아볼로파와 베드로파 그리고 바울파와 예수그리스도파로 나누어졌습니다.
어떤 사람은 아볼로를 따랐습니다. 아볼로는 소피스트교육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는 소피스트철학을 바탕으로 논리적이고 달변가며 웅변가였습니다. 그러니까 많은 사람들이 그를 추종하게 된 것입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설교를 잘하고 유머도 있고 말 잘하는 목사를 따른다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리고 베드로를 추종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로마 공동체의 대표적인물이지요. 많은 사람들이 베드로의 영향권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신앙의 격상하는 것이라는 심리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큰 교회 다니면 자기도 그런 상류층의 신앙으로 격상하는 것처럼 느끼는 것과 같은 것이라 보면 됩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바울을 따랐습니다. 바울을 따랐든 이유는 바울이 교회를 세웠고 그리고 첫정이 들은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그리고 바울을 따른 사람들은 부유층에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요즘으로 이야기하면 개척멤버를 말하는 것이겠지요. 그리고 그리스도파라는 것은 이 파 저 파도 다 싫다 해서 그리스도파가 생긴 것 입니다.
이처럼 고린도교회는 당파싸움이 문제였습니다. 그 당시는 부자와 가난한자의 갈등도 매우 심했습니다. 그 시대 때는 부자 여인들 같은 경우 머리를 자르고 그 머리위에 금가루를 뿌리기고 다녔습니다. 원래는 로마의 화류계에 있는 여인들이 머리를 자르고 머리위에 금가루를 뿌리고 다녔는데 이런 유행이 로마귀족으로 확산되면서 고린도지역까지 유행했든 것입니다. 그리니까 가난한 여인들은 머리를 자르고 금가루를 뿌리고 다니는 여인들만 보면 부러움의 대상 이였습니다. 그리고 그런 유행이 교회까지 미쳐서 금가루를 뿌린 팀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과의 격차가 심각했던 것이지요. 그 당시에 여인들은 두건을 쓰고 나오게 되는데 금가루를 뿌린 여인들은 두건을 쓰지 않고 나옵니다. 그래서 바울이 ‘머리를 내어 놓고 두건을 쓰지 않고 나오는 것이 양심에 거리낌이 없느냐’고 질책을 하게 된 것입니다.
또 그 당시에는 예배를 드리고 같이 식사를 하게 되는데 끼리끼리 모입니다. 이것이 큰 문제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결국 이런 것이 교회를 나누고 불균형의 기원이 된 것입니다. 예배를 마치고 함께 나누는 식사는 기독교의 전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일은 초대교회 때부터 시작된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우리교회에서 예배를 마치고 함께 나누는 식사는 그런 관점에서 굉장히 귀하고 복된 자리입니다. 식탁에 함께함으로 교제가 있고 하나 되는 일이 있고 나누는 일이 생기게 된다면 이것만큼 귀한 자리는 없다고 봅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는 이런 귀한 시간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는 모습이 아니라 분파의 모습으로 발전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런 모습이 세속적인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법이지 의로운 사람들의 삶의 방법이 아니라는 것을 성경을 통해서 지적하고 있습니다. 십자가의 도는 예수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에게 하나의 저주로 여기고 역사 속에서 잊어진 어리석은 사건으로 생각하겠지만 믿는 자에게 십자가의 도는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교회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십자가의 가르침이라고 말합니다. 교회 미래를 이야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십자가의 도에 관한 가르침입니다. 십자가의 도는 십자가의 말씀입니다. 십자가에서 남긴 칠언이 아닙니다. 십자가의 지혜입니다. 십자가의 지혜란 영적교훈을 말합니다.
고린도 교회는 세상을 좇아갔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종종 이런 말을 씁니다. 성도들이 성령을 좇아 살아가지 못하고 육신을 좇아 살아간다는 것을 계속 지적하고 있습니다. 육신을 좇는 다는 말은 세상감각을 좇는 다는 말입니다. 세상에서 평가 받고 싶고 세상에서 박수 받고 싶고 인정받고 싶은 욕심을 의미합니다. 세상의 감각에 민감한 삶은 영적삶이 되지 못합니다. 늘 갈급하고 채워도 채워도 채울 수 없는 무지개를 따라 인생을 허비하는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음을 성경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고린도교회의 세상적 감각은 유행이었습니다. 그들을 유행을 쫓아가는 삶을 살았고 그런 삶을 부러워했습니다. 그 결과 가난한자와 부유한자의 간격이 생겼습니다. 그런 것들이 또한 교회 당파를 짓는 것으로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신앙의 칼라 때문에 당파가 생긴 것이 아니라 육신을 좇아간 결과라는 말입니다. 오늘 이 말씀이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주는 것입니까 그것은 고린도교회 사람들이 사는 것처럼 살지 말라는 것이지요. 즉, 육신을 좇는 세상적 감각에 메여 살지 말고 영을 추구하면서 살으라는 뜻입니다. 영적인 것을 추구할 십자가의 도는 무엇입니까 영적 삶을 위한 십자가의 지혜는 무엇입니까 잠언 30:2 ‘나는 다른 사람에 비하면 짐승이라 내는 지혜를 배우지 못하였고 또 거룩하신 자를 아는 지식이 없거니와 하늘에 올라갔다가 내려온 자가 누구인지, 바람을 그 장중에 모은 자가 누구인지 물을 옷에 싼 자가 누구인지, 땅에 모든 끝을 정한 자가 누구인지, 그 이름이 무엇인지, 그 아들의 이름이 무엇인지 너는 아느냐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은 다 순전하며 여호와 하나님은 그를 의지하는 자의 방패시니라’여기서 그 아들의 이름은 예수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십자가의 지혜란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이란 뜻입니다. 랍비 문학에서는 그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이 인격을 타고 지상에 왔다고 이야기합니다.
지혜의 근본이 예수그리스도입니다. 믿습니까 빌라도가 지혜가 무엇이뇨 진리가 무엇이뇨 라고 질문을 할 때 예수님은 ‘나로다’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라고 말씀하신 의미를 아셔야합니다. 그러므로 예수그리스도가 바로 지혜요, 진리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 십자가의 도란 버린바 된 생명을 위해, 이 세상의 죄인들을 위해 보좌를 버리고 이 땅에 오신 것은 진리의 길, 생명의 길로 인도하는 지혜를 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도를 통해서만 구원이 있고 생명이 있고 영생이 있을 뿐만 아니라 육신의 것, 세상의 것, 쉬 사라질 것, 세상감각의 삶에서 벗어나 영적감각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도록 능력을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도만이 육의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으며 세상의 문제, 두려움, 염려, 걱정, 고통의 문제를 이 십자가의 도로 해결 할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예수그리스도의 도는 낮아짐의 도입니다. 이것을 빼고 도에 대한 설명은 있을 수없습니다. 임마누엘은 구원을 위해 낮아지고 겸손한 자리에까지 아니 치욕적인 자리까지 내려오는 것이었습니다. 내려오셔서 자신의 명예와 모든 것을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다 비웠습니다.
구원을 이루기 위한 예수그리스도의 행위가 십자가의 도라 했습니다. 이 십자가의 사건이 이제 우리를 통해서 다시 반복 되어야한다는 것이 오늘의 귀한 주제며 교훈입니다. 우리는 겸손한 자리 아니 치욕의 자리에서도 오히려 감사하고 다른 사람들의 영혼을 위해 굳건히 참고 다른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삶을 살아야합니다.
사실 고난주간은 예수님이 잡혀서 모진 고통과 채찍을 당하면서 십자가에 죽는 주간입니다. 우리는 이 주간을 맞이해서 어떤 마음과 자세를 가져야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하늘보좌를 비우고 오신 그 목적을 우리가 다시 재현하는 삶을 사는 것이 그리스도의 제자 된 삶이요 여호와 하나님 백성의 삶이며 천국을 준비하는 사람의 삶입니다. 이것을 다시 한번 생각하고 준비하고 각오하고 헌신하자는 의미가 고난주간의 의미인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자신을 비우는 삶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라고 했습니다. 천국을 소유한자는 심령을 비우는 삶을 살아가야한다는 것이지요. 우리는 고난주간을 통해서 다시 한번 그리스도의 정신을 깨달아야할 것입니다. 우리 안에 살아있는 십자가의 도는 빛이요, 생명이요. 소금이요, 향기입니다. 마태복음 5장 14절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르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우리는 숨을 수 없습니다. 산꼭대기에 서 있는 것과 같이 다 드러나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드러나 있는 존재입니다. 등불을 등경위에 두는 것처럼 우리를 산꼭대기에 세워놓았습니다. 그럴 때 빛은 사방을 비추게 되는 것이지요. 우리는 이런 존재로 부름을 받았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이 사실 이런 점에 취약하다는 것을 느낌입니다. 굉장히 중요한 삶이면서도 서로 여기에 대해서는 말을 안 하기로 했습니다. 서로 쉬쉬거립니다. 그러나 그런다고 우리가 숨어서 살수 있는 존재는 아니지요.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의 빛을 받는 존재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을 한 몸에 받은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그러면 그 받은 빛과 영광을 이웃을 향해 비추어 줄때라는 사실을 고난주간을 통해서 다시 한번 깨닫는 은혜가 있기를 원합니다.
두 번째, 십자가의 도는 못 박힘을 말합니다. 십자가에 자기를 못 박는 행위가 신앙의 행위라고 말합니다. 갈라디아서 2:20‘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우리가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은 못 박히는 아픔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역사가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합니다. 주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은 그 분이 하신 일을 우리가 할 수 있다는 말이며 그 분이 받은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도 받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못 박는 고난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고난보다 더 큰 가치가 우리에게 있기에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는 일에 감사와 감격의 삶이 있어야 될 줄 믿습니다. 내안에 주님이 사신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 인줄 아십니까 진리가 내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보배가 내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승리가 내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의 사역은 이 십자가에 못 박는 사역 이였기에 그는 어디를 가든지 주님의 크신 권능을 행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복음의 역사가 일어났든 것입니다.
‘못 박는다’는 뜻은 3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 아포 스테스코 ‘말라 비틀어져서 죽는다, 지난 과거를 다 죽인다’는 뜻입니다. 두 번째, 디나 토스인데 이 용어는 ‘습기를 다 빨아들여서 말라비틀어지게 만든다’. 이것은 현재 나를 죽인다는 뜻입니다. 셋째, 네크론 이란 단어가 있는데 이 말은 ’미래를 앞당긴다‘ 즉 죽음을 앞당겨서 내가 지금 죽는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결국 과거에 십자가에 달리고 현재도 십자가에 달려 죽고, 미래에 나는 십자가에 달려 죽기를 원한다는 뜻입니다. 매래의 삶까지 죽음으로 나간다는 것입니다.
침례가 바로 이런 의미가 있습니다. 물에 잠겨서 이제 과거의 모든 육의 것은 다 죽고 이제 물위에 다시 올라옴으로 주님과 함께 현재와 미래의 새로운 삶을 사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 새로운 삶이 바로 십자가의 죽는 삶이지요. 모세의 출애굽사건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홍해에서 애굽의 모든 삶은 죽고 이제 다시 홍해에서 올라옴으로 새로운 세계가 펼쳐져서 여호와 하나님의 보살핌 속으로 들어오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십자가의 도’앞에 너무 살아있는 것은 아닌지 한번 돌이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자기 자랑과 교만과 업심 여김과 자기 열심히 세상의 권위를 가지려는 욕심으로 살고 있지는 않는지, 이 세상의 썩어질 것에 연연하여 하늘나라의 것, 거룩한 것을 놓치는 어리석은 삶은 아닌지 이번 기회에 다시 한번 신앙을 되새기는 은혜가 있기를 원합니다. 신앙생활은 말로 하는 것이 아니며 살아서 움직이며 좌충우돌 하여 주위 사람을 괴롭히는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는 죽음의 신학을 다시 한번 정리해야합니다.
과거도 죽었고, 현재도 죽고, 미래도 앞당겨 죽음을 각오의 삶이 있어야합니다. 날마다 자기를 죽이는 이 일이 기독교인의 삶이며 하늘나라의 시민으로서의 삶이며 사실 축복의 삶입니다. 죽으면 삶이 변화됩니다. 자신을 죽일 때 성령이 역사하는 것입니다. 죽는 것이 손해 보는 것이고, 고통을 당하는 것이고, 조롱을 받는 일이라 할지라도 이것으로 인해 우리는 능력이 나오며 생명을 살리며 빛을 전하며 축복을 받는 비결입니다. 이것이 세상 사람들에게는 미련한 것이 될지 몰라도 우리에게는 축복이라 이 말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을 본받지 말아야합니다. 세상은 즐길 곳이 많고, 자존심을 세우는 일이 되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곳일지 몰라도 끝내는 죽을 곳입니다. 허무한 곳입니다. 쉬 사라질 곳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혜로운 삶을 살아가야 됩니다. 그것이 바로 새롭게 되어 날마다 죽음으로 영광의부활의 자리로 가는 것입니다. 어려운 굴을 통과 하는 자만이, 십자가의 도를 통과하는 자만이 어려움과 고난을 통과하는 자만이 영광을 얻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해 참으며 고난을 감사하므로 부활의 영광의 자리에 가야하는 것이지요.
세 번째, 십자가의 도는 주님을 만나는 독대의 자리를 차지하게 됩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인격과 우리의 인격이 영적으로 연합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부활이 우리의 부활이요 주님의 승리가 우리의 승리요 주님의 능력이 우리의 능력이라는 것이지요.
요한복음 1:50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예수님께서 나다나엘을 처음 보고서 ‘간사함이 없다’고 하시면서 나다나엘을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다나엘이 어떻게 나를 아십니까 그랬더니 이전부터 알고 있었다고 말을 하면서 이 신비함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도는 능력이며 승리지요. 십자가의 죽음에서 나오는 승리를 아시겠습니까 그러면 우리도 누릴 수 있는 줄 믿습니다.
CNN에서 사형당하기 직전의 여인을 감시 인터뷰한 적이 있습니다. 터너라는 이 여자는 남편과 정부를 살해한 죄로 사형집행을 받게 되었습니다. 남편과 정부가 간통하는 장면을 현장에서 목격하고 도끼로 남편과 정부를 죽입니다. 그리고 현장에서 살인범으로 체포되어서 감옥에 갇히고 사형 언도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감옥 안에서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그 불같은 여인이, 미움과 증오의 여인이 온순한 사랑의 사람으로 바뀌게 됩니다. 그리고 사형 당하기 전날 인터뷰에서 지극히 온유하고 기쁨이 가득 찬 표정으로 시청자들에게 마지막 말을 남깁니다. ‘여러분 저는 내일 우리 주님을 뵈러 갑니다. 여러분 무두를 사랑합니다. ’ 그리고 감옥 속으로 들어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능력입니다.
우리가 예수피를 뿌린다는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 피를 뿌린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승리와 능력과 생명을 전한다는 뜻입니다. 거기에 주님이 함께하신다는 증거지요. 우리에게 능력이 있음은 바로 이런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우리와 하나 됨의 역사는 바로 믿음으로 선포하거나 믿음으로 간구한 것이 이루어지는 역사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바로 주님이 우리와 연합되어 있고 함께하기 때문입니다. ‘주 예수그리스도 이름으로 명하노니 더러운 귀신아 물러가라’그랬을 때 꼼작하지 못하고 물러가는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가 무서워서 입니까 아닙니다. 마귀는 영의 세계에 사는 영적 존재입니다. 우리가 물러가라고 해서 말을 듣는 존재가 아닙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나가는 이유가 바로 이 말이 주님의 말이며 그 주님의 이름으로 선포되는 말씀은 곧 주님의 능력이 되기 문입니다. 이 천년 전의 능력이 말씀으로 우리의 믿음으로 재현되는 은혜가 바로 십자가의 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4:12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고 하십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도에서 나오는 역사입니다. 이 사실을 우리가 날마다 십자가에 죽음으로서 저와 여러분들이 체험해 가는 축복인줄 믿습니다. 십자가의 도는 예수그리스도처럼 된다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교회란 복음으로 말미암아 십자가의 도를 배우는 곳이며, 성령의 채우심으로 성령의 임재가 역사하는 곳이며, 기적을 만들어 내는 곳입니다. 그런데 이런 교회의 모습에서 세속적인 모습으로 변해가는 모습에 대한 경고의 말씀이라 봅니다. 고린도 교회에 분파가 일어난 이유는 세상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말 잘하는 목사에게 모이고, 인기 있는 목사에게 모이고, 인정 때문에 모이고 하는 곳이 아니라 도의 사명을 배우는 곳입니다. 구원의 능력이 되며 못 박히는 체험이며, 승리의 은혜인 이 십자가의 도를 배우는 교회로서 거듭나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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