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려주일] 고난 극복의 열쇠, 비하
본문
지난 주간에는 대구에서 지하철 방화 사건이 있었습니다. 김대한(57) 씨가 혼자 죽기 싫어서 전동차 내에서 죽으려고 불을 낸 것이 그만 수백명의 사상자를 냈습니다. 거기에는 한 가족의 생계를 책임진 가장도 있습니다. 아이들을 홀로 키우던 어머니도 있습니다. 결혼한지 몇 개월 안된 아내도 있습니다. 입학식과 졸업식을 앞둔 청년도 있습니다. 할머니 손에 이끌려 나간 어린 아이도 있습니다. 그들은 어둠과 연기와 열기 속에서 처절하게 죽어갔습니다. 죽어가면서 그들이 핸드폰에 남긴 메시지는 듣는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했습니다. "엄마 문이 안 열려요" "엄마 사랑해" "여보 사랑해" "어머니 아이들 잘 돌봐 주세요" "얘야 나를 위해 기도해다오" 그 때 그들이 가졌을 심정을 생각해 보면 아픔이 저며 옵니다. 그들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해 가족들의 절규하는 모습 또한 우리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건설본부의 잘못, 사령팀의 잘못, 기관사의 잘못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일차적으로 방화범의 잘못이 가장 큽니다. 그는 도덕적으로 볼 때 수백명의 사상자를 낸 책임을 어떤 형태로도 면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한편으론 방화범이 살아 나온 것이 밉기만 합니다. 그런데 그 방화범에 대한 또 다른 고통이 느껴집니다. 그는 2년 전에 뇌졸증으로 쓰러져 병원에서 입원치료를 받아 오다가 지금까지 중풍으로 통원 치료를 받아 왔습니다. 3-4개월 전부터 포악해졌습니다. 그 날도 병원에서 불을 지르겠다고 소동을 피웠습니다. 병원 치료에 대한 물만과 사회 구조에 대해 분노가 있었던 것입니다. 얼마나 힘들었으면 자살을 하려고 했을까 얼마나 힘들었으면 그 고통스런 분신 자살을 택했을까 얼마나 힘들었으면 그 분노가 많은 사람과 같이 죽어야 하는 데까지 이르렀을까 결국 자신에게 당면한 문제들을 아무리 해결하려 해도 해결할 수 없다는 절박한 상황 속에서 선택한 길일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현재 경제적 위기에서 분노하고 있는 우리의 모습입니다.
빌립보 교인들은 핍박으로 인하여 고난을 당했습니다. 바울은 감옥에 갇혔습니다. 빌립보 교인들은 그로 인하여 근심하며 절망했습니다. 바울은 좌절하고 있는 빌립보 교인들에게 '예수님의 마음을 품으라'고 했습니다. 5절에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라고 했습니다. 경제적으로 고난을 당하고 절망에 빠진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예수님의 마음을 품는 것입니다.
1. 자기 자신을 낮추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보이신 모본은 자신을 스스로 낮추는 것이었습니다. 비하(卑下)의 마음입니다. 6-7절에 "그는 근본 여호와 하나님의 본체시나 여호와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본질적 존재에 있어서 여호와 하나님과 동등한 지위를 가지신 분입니다. 예수님은 태초부터 여호와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분입니다 (미5:2, 히1:2, 골1:15-17).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요한복음1:1에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여호와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여호와 하나님이시니라"고 했습니다. 요한복음은 공관복음들처럼 유대인에게 보내진 책이 아니라 헬라인(그리이스인)에게 보내진 책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성령의 감동 가운데 헬라 사람들이 사용하는 용어와 논리를 많이 사용하였습니다. 여기에서 '말씀'으로 번역된 '로고스'(λογοs)이라는 용어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시 헬라 철학에서 '로고스'는 영원 전부터 있어서 우주를 주관하는 절대자를 의미합니다. 유대인 용어로 바꾼다면 '여호와 하나님'의 개념인 것입니다. 그런데 14절에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육신'으로 번역된 '싸륵스'(σαρξ)는 사람의 몸인 뼈와 살과 피부를 가리켜 한 말입니다. 곧 예수님은 영원 전부터 여호와 하나님으로 계셨던 분인데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사람이 된 것입니다. 창조자가 피조물이 된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는 피조 세계로 오신 것입니다 (요일1:1-2).
예수님은 사람으로 살아가는 동안에도 철저히 낮아졌습니다. 그는 마구간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렸을 때 피난 생활을 했습니다. 목수 일을 하면서 자랐습니다. 이 세상에 머리 둘 곳을 얻지 못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섬김을 받지 못했습니다. 온갖 조롱과 능욕과 핍박을 받았습니다. 많은 사람의 대속물이 되었습니다. 흉악한 죄인처럼 십자가에 못 박혀 죽기까지 낮아졌습니다. 그는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지위와 특권과 영광을 포기한 것입니다.
고통과 역경 가운데 있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스스로 낮아지는 정신입니다. 어려울 때 낮아지면 삽니다. 지위와 체면을 생각지 말아야 합니다. 권리와 영광을 포기해야 합니다. 철저히 낮아져야 합니다. 의식주부터 낮아지고 직업의 선택에서 낮아져야 합니다. 인간 관계에서 다른 사람의 평가에 집착하지 말고 낮아져야 합니다. 그럴 때 역경을 이기는 힘이 생기고 그 고난은 장래에 누릴 영광의 기초석이 될 것입니다.
'골짜기가 어떻게 해서 생기게 되었는가' 하는 우화가 있습니다. 처음에는 초원에 넓은 벌판만 있었고 골짜기는 없었습니다. 어느 날 창조주가 벌판의 잔디 위를 거닐다가 "너 푸른 초원아, 네게는 풀만 무성하고 꽃이 없구나. 왜 꽃을 피우지 않니"하고 물었습니다. 초원은 "제게는 씨가 없습니다"고 대답했습니다. 창조주는 새들에게 온갖 꽃씨를 물어다가 초원 곳곳에 뿌리라고 명령했습니다. 푸른 초원에는 여러 종류의 꽃들이 피었습니다. 창조주는 매우 기뻐했습니다. 그런데 창조주가 다시 왔을 때에 그 꽃들은 한 송이도 없었습니다. 창조주는 "그 꽃들은 어디에 있느냐"고 초원에게 물었습니다. 초원은 “주인이시여, 저는 그런 꽃을 피울 수 없습니다. 거친 바람 때문에 꽃씨들이 땅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뜨거운 태양열 때문에 자라나던 꽃들마저 말라 버리고 맙니다”고 대답했습니다. 그 때 창조주는 초원의 중심에 번개와 우뢰와 태풍을 내렸습니다. 초원은 가슴이 쪼개지고 갈라지면서 받는 엄청난 고통 때문에 신음에 신음을 거듭했습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난 후, 갈라진 초원의 골짜기에 강물이 흐르기 시작했습니다. 다시 한번 새들이 꽃씨를 흩뿌렸을 때 골짜기의 바위에는 이끼가 덮히고. 덩굴이 덮히고, 구석 구석에 꽃 자라나기 시작했습니다. 거대한 느릅나무가 하늘 높이 솟고, 과일 나무가 자랐습니다. 초원은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경험했으나 아름다운 동산으로 바뀌었습니다.
서양 속담에 "흐르는 냇물에서 돌들을 치워버리면 그 냇물은 노래를 잃어버린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에 역경과 고난의 돌을 치워 버리면 우리는 아름다운 노래를 들을 수 없게 됩니다. '할렐루야'를 작곡한 헨델은 건강이 매우 나빴습니다. 그는 병을 고치기 위해 재산을 모두 탕진했습니다. 그러고도 모자라서 남의 돈을 빌려 썼습니다. 그러나 건강도 찾지 못했고 돈도 갚지 못했습니다. 결국 반신불수의 비참한 상태로 감옥에 갇히고 말았습니다. 그는 불행했고 고통스러웠습니다. 그러나 연주를 듣던 왕도 일어섰다는 불후의 명작 '할렐루야'를 작곡한 곳은 바로 이 감옥이었습니다. '마지막 잎새'를 쓴 소설가 O. 헨리는 은행원으로 근무할 때 부정 대출 사건에 관련되어 감옥에 들어갔습니다. 거기에서 글을 썼습니다. 그 단편소설이 학생 때 누구나 한번쯤은 읽는 '마지막 잎새'입니다. 미국의 대통령에 4번이나 당선되었던 루즈벨트는 소아마비로 지체가 부자유했습니다. 하지만 모든 장애를 극복하고 세계 초강대국의 영도자로서 많은 업적을 남겼습니다. 고난과 역경이 반드시 유익이 될 줄 알고 낮아지시기 바랍니다.
2. 낮아짐은 여호와 하나님을 복종하기 위함이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스스로 낮아진 것은 여호와 하나님을 순종하기 위함이었습니다. 8절에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사람 몸을 입고 와서 십자가에 못 박히기까지 낮아진 것은 무력해서가 아니라 순전히 자발적인 것이었습니다. 그가 그렇게 하신 것을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복종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요한복음6:38-39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과 동등됨을 버리고 사람의 몸으로 오신 것도, 이 세상에서 멸시와 천대와 조롱과 능욕과 핍박을 당하신 것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도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 뜻은 구원하기로 계획한 영혼을 한 사람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살리는 것이라 했습니다. 디모데전서 1:15에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고 했습니다. 그가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도 고난을 당하신 것은 구원 사역을 이루기 위함이었습니다 (마20:28).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히5:8).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이로서 십자가에 못 박히지 않을 수도 있었지만 그 길을 택하신 것은 우리로 부요케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마28:18, 마26:53, 고후8:9).
바울도 그런 정신을 가진 사람 중의 한 사람입니다. 바울은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 앞에서 고린도 교인들에게 대접받을 권리가 있었지만 죽을지언정 그 권리를 쓰지 않겠다고 결심한 것은 그로 인하여 한 영혼이라도 살리기 위함이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바울을 사역자로 부르신 목적을 이루기 위함이었습니다 (고전 9:4-15). 바울이 자지 못하고 먹지 못하고 입지 못하고 여러 가지 위험에 노출되고 바다에서 표류하고 매를 맞고 죽을 뻔한 적이 많았습니다. 그런 고난을 당하지 않을 수도 있으나 그가 그런 고난을 당한 것은 여호와 하나님이 그를 사도로 부르신 목적을 이루기 위함이었습니다 (고후11:23-29).
우리가 낮아지고 포기하고 고난받으면서 가져야 할 정신입니다. 베드로전서2:19-20에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여호와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여호와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받는 고난은 대부분 애매히 받는 고난일 것입니다. 그래도 여호와 하나님을 생각하므로 참으면 아름답다고 했습니다. 어떤 종류의 고난이든 여호와 하나님 뜻과 관련있게 의미를 부여하시고 인내하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고난을 이길 수 있는 힘이 생기는 것을 경험할 것입니다.
찬송가 '내 영혼 평안해'를 작사한 H. G. 스파포드는 미국 시카고의 사업가요, 변호사요, 대학 법리학 교수였습니다. 시카고에 대화재가 났을 때 재산을 다 잃었습니다. 그는 시카고에서 있었던 그 일을 잊기 위해 유럽 여행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부인과 4명의 아이들는 먼저 보내고 그는 화재의 뒷처리를 한 다음에 출발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런데 부인과 4 아이들을 태운 배가 영국의 철선과 정면으로 충돌하였습니다. 4명의 아이들은 다 죽고 부인만 익사 직전에 기적적으로 구조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웨일즈에 도착하여 시카고 있는 남편에게 전문을 띄웠습니다. "혼자만 살아 남았음" 그런데 스파포드는 "나에게 어떠한 희생이 올지라도 주를 의지하게 되는 것이 기쁘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리고 배를 타고 자녀들이 죽은 장소를 통과하면서 '내 영혼 평안해'라는 찬송가를 작사했습니다. 스파포드는 참을 수 없는 슬픔 속에서도 여호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평안을 얻었습니다. 역경 속에서도 여호와 하나님의 의도와 관계된 의미를 찾을 때 기쁨을 얻게 됩니다 (고후6:9-10).
9-11절에 "이러므로 여호와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히7:25, 계12:5,10, 요17:5). 여호와 하나님은 예수님을 비하의 자리에서 승귀의 자리로 옮기셨습니다. 비천한 자리에서 존귀한 자리로 옮기셨습니다. 종의 자리에서 주인의 자리로 옮기셨습니다. 야고보서 4:10에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고 했습니다. 베드로전서 5:6에도 "그러므로 여호와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고 했습니다. 낮아지시기 바랍니다. 그 낮아짐이 주를 위함이 되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주를 위해 낮아지는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주께서 반드시 회복시키시고 회복되는 날에 만인들 위에 뛰어나도록 높이실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이며 여호와 하나님의 사명을 가진 자이며 여호와 하나님이 함께 하는 자임을 나타낼 것입니다.
건설본부의 잘못, 사령팀의 잘못, 기관사의 잘못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일차적으로 방화범의 잘못이 가장 큽니다. 그는 도덕적으로 볼 때 수백명의 사상자를 낸 책임을 어떤 형태로도 면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한편으론 방화범이 살아 나온 것이 밉기만 합니다. 그런데 그 방화범에 대한 또 다른 고통이 느껴집니다. 그는 2년 전에 뇌졸증으로 쓰러져 병원에서 입원치료를 받아 오다가 지금까지 중풍으로 통원 치료를 받아 왔습니다. 3-4개월 전부터 포악해졌습니다. 그 날도 병원에서 불을 지르겠다고 소동을 피웠습니다. 병원 치료에 대한 물만과 사회 구조에 대해 분노가 있었던 것입니다. 얼마나 힘들었으면 자살을 하려고 했을까 얼마나 힘들었으면 그 고통스런 분신 자살을 택했을까 얼마나 힘들었으면 그 분노가 많은 사람과 같이 죽어야 하는 데까지 이르렀을까 결국 자신에게 당면한 문제들을 아무리 해결하려 해도 해결할 수 없다는 절박한 상황 속에서 선택한 길일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현재 경제적 위기에서 분노하고 있는 우리의 모습입니다.
빌립보 교인들은 핍박으로 인하여 고난을 당했습니다. 바울은 감옥에 갇혔습니다. 빌립보 교인들은 그로 인하여 근심하며 절망했습니다. 바울은 좌절하고 있는 빌립보 교인들에게 '예수님의 마음을 품으라'고 했습니다. 5절에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라고 했습니다. 경제적으로 고난을 당하고 절망에 빠진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예수님의 마음을 품는 것입니다.
1. 자기 자신을 낮추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보이신 모본은 자신을 스스로 낮추는 것이었습니다. 비하(卑下)의 마음입니다. 6-7절에 "그는 근본 여호와 하나님의 본체시나 여호와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본질적 존재에 있어서 여호와 하나님과 동등한 지위를 가지신 분입니다. 예수님은 태초부터 여호와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분입니다 (미5:2, 히1:2, 골1:15-17).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요한복음1:1에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여호와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여호와 하나님이시니라"고 했습니다. 요한복음은 공관복음들처럼 유대인에게 보내진 책이 아니라 헬라인(그리이스인)에게 보내진 책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성령의 감동 가운데 헬라 사람들이 사용하는 용어와 논리를 많이 사용하였습니다. 여기에서 '말씀'으로 번역된 '로고스'(λογοs)이라는 용어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시 헬라 철학에서 '로고스'는 영원 전부터 있어서 우주를 주관하는 절대자를 의미합니다. 유대인 용어로 바꾼다면 '여호와 하나님'의 개념인 것입니다. 그런데 14절에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육신'으로 번역된 '싸륵스'(σαρξ)는 사람의 몸인 뼈와 살과 피부를 가리켜 한 말입니다. 곧 예수님은 영원 전부터 여호와 하나님으로 계셨던 분인데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사람이 된 것입니다. 창조자가 피조물이 된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는 피조 세계로 오신 것입니다 (요일1:1-2).
예수님은 사람으로 살아가는 동안에도 철저히 낮아졌습니다. 그는 마구간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렸을 때 피난 생활을 했습니다. 목수 일을 하면서 자랐습니다. 이 세상에 머리 둘 곳을 얻지 못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섬김을 받지 못했습니다. 온갖 조롱과 능욕과 핍박을 받았습니다. 많은 사람의 대속물이 되었습니다. 흉악한 죄인처럼 십자가에 못 박혀 죽기까지 낮아졌습니다. 그는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지위와 특권과 영광을 포기한 것입니다.
고통과 역경 가운데 있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스스로 낮아지는 정신입니다. 어려울 때 낮아지면 삽니다. 지위와 체면을 생각지 말아야 합니다. 권리와 영광을 포기해야 합니다. 철저히 낮아져야 합니다. 의식주부터 낮아지고 직업의 선택에서 낮아져야 합니다. 인간 관계에서 다른 사람의 평가에 집착하지 말고 낮아져야 합니다. 그럴 때 역경을 이기는 힘이 생기고 그 고난은 장래에 누릴 영광의 기초석이 될 것입니다.
'골짜기가 어떻게 해서 생기게 되었는가' 하는 우화가 있습니다. 처음에는 초원에 넓은 벌판만 있었고 골짜기는 없었습니다. 어느 날 창조주가 벌판의 잔디 위를 거닐다가 "너 푸른 초원아, 네게는 풀만 무성하고 꽃이 없구나. 왜 꽃을 피우지 않니"하고 물었습니다. 초원은 "제게는 씨가 없습니다"고 대답했습니다. 창조주는 새들에게 온갖 꽃씨를 물어다가 초원 곳곳에 뿌리라고 명령했습니다. 푸른 초원에는 여러 종류의 꽃들이 피었습니다. 창조주는 매우 기뻐했습니다. 그런데 창조주가 다시 왔을 때에 그 꽃들은 한 송이도 없었습니다. 창조주는 "그 꽃들은 어디에 있느냐"고 초원에게 물었습니다. 초원은 “주인이시여, 저는 그런 꽃을 피울 수 없습니다. 거친 바람 때문에 꽃씨들이 땅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뜨거운 태양열 때문에 자라나던 꽃들마저 말라 버리고 맙니다”고 대답했습니다. 그 때 창조주는 초원의 중심에 번개와 우뢰와 태풍을 내렸습니다. 초원은 가슴이 쪼개지고 갈라지면서 받는 엄청난 고통 때문에 신음에 신음을 거듭했습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난 후, 갈라진 초원의 골짜기에 강물이 흐르기 시작했습니다. 다시 한번 새들이 꽃씨를 흩뿌렸을 때 골짜기의 바위에는 이끼가 덮히고. 덩굴이 덮히고, 구석 구석에 꽃 자라나기 시작했습니다. 거대한 느릅나무가 하늘 높이 솟고, 과일 나무가 자랐습니다. 초원은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경험했으나 아름다운 동산으로 바뀌었습니다.
서양 속담에 "흐르는 냇물에서 돌들을 치워버리면 그 냇물은 노래를 잃어버린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에 역경과 고난의 돌을 치워 버리면 우리는 아름다운 노래를 들을 수 없게 됩니다. '할렐루야'를 작곡한 헨델은 건강이 매우 나빴습니다. 그는 병을 고치기 위해 재산을 모두 탕진했습니다. 그러고도 모자라서 남의 돈을 빌려 썼습니다. 그러나 건강도 찾지 못했고 돈도 갚지 못했습니다. 결국 반신불수의 비참한 상태로 감옥에 갇히고 말았습니다. 그는 불행했고 고통스러웠습니다. 그러나 연주를 듣던 왕도 일어섰다는 불후의 명작 '할렐루야'를 작곡한 곳은 바로 이 감옥이었습니다. '마지막 잎새'를 쓴 소설가 O. 헨리는 은행원으로 근무할 때 부정 대출 사건에 관련되어 감옥에 들어갔습니다. 거기에서 글을 썼습니다. 그 단편소설이 학생 때 누구나 한번쯤은 읽는 '마지막 잎새'입니다. 미국의 대통령에 4번이나 당선되었던 루즈벨트는 소아마비로 지체가 부자유했습니다. 하지만 모든 장애를 극복하고 세계 초강대국의 영도자로서 많은 업적을 남겼습니다. 고난과 역경이 반드시 유익이 될 줄 알고 낮아지시기 바랍니다.
2. 낮아짐은 여호와 하나님을 복종하기 위함이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스스로 낮아진 것은 여호와 하나님을 순종하기 위함이었습니다. 8절에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사람 몸을 입고 와서 십자가에 못 박히기까지 낮아진 것은 무력해서가 아니라 순전히 자발적인 것이었습니다. 그가 그렇게 하신 것을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복종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요한복음6:38-39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과 동등됨을 버리고 사람의 몸으로 오신 것도, 이 세상에서 멸시와 천대와 조롱과 능욕과 핍박을 당하신 것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도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 뜻은 구원하기로 계획한 영혼을 한 사람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살리는 것이라 했습니다. 디모데전서 1:15에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고 했습니다. 그가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도 고난을 당하신 것은 구원 사역을 이루기 위함이었습니다 (마20:28).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히5:8).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이로서 십자가에 못 박히지 않을 수도 있었지만 그 길을 택하신 것은 우리로 부요케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마28:18, 마26:53, 고후8:9).
바울도 그런 정신을 가진 사람 중의 한 사람입니다. 바울은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 앞에서 고린도 교인들에게 대접받을 권리가 있었지만 죽을지언정 그 권리를 쓰지 않겠다고 결심한 것은 그로 인하여 한 영혼이라도 살리기 위함이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바울을 사역자로 부르신 목적을 이루기 위함이었습니다 (고전 9:4-15). 바울이 자지 못하고 먹지 못하고 입지 못하고 여러 가지 위험에 노출되고 바다에서 표류하고 매를 맞고 죽을 뻔한 적이 많았습니다. 그런 고난을 당하지 않을 수도 있으나 그가 그런 고난을 당한 것은 여호와 하나님이 그를 사도로 부르신 목적을 이루기 위함이었습니다 (고후11:23-29).
우리가 낮아지고 포기하고 고난받으면서 가져야 할 정신입니다. 베드로전서2:19-20에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여호와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여호와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받는 고난은 대부분 애매히 받는 고난일 것입니다. 그래도 여호와 하나님을 생각하므로 참으면 아름답다고 했습니다. 어떤 종류의 고난이든 여호와 하나님 뜻과 관련있게 의미를 부여하시고 인내하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고난을 이길 수 있는 힘이 생기는 것을 경험할 것입니다.
찬송가 '내 영혼 평안해'를 작사한 H. G. 스파포드는 미국 시카고의 사업가요, 변호사요, 대학 법리학 교수였습니다. 시카고에 대화재가 났을 때 재산을 다 잃었습니다. 그는 시카고에서 있었던 그 일을 잊기 위해 유럽 여행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부인과 4명의 아이들는 먼저 보내고 그는 화재의 뒷처리를 한 다음에 출발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런데 부인과 4 아이들을 태운 배가 영국의 철선과 정면으로 충돌하였습니다. 4명의 아이들은 다 죽고 부인만 익사 직전에 기적적으로 구조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웨일즈에 도착하여 시카고 있는 남편에게 전문을 띄웠습니다. "혼자만 살아 남았음" 그런데 스파포드는 "나에게 어떠한 희생이 올지라도 주를 의지하게 되는 것이 기쁘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리고 배를 타고 자녀들이 죽은 장소를 통과하면서 '내 영혼 평안해'라는 찬송가를 작사했습니다. 스파포드는 참을 수 없는 슬픔 속에서도 여호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평안을 얻었습니다. 역경 속에서도 여호와 하나님의 의도와 관계된 의미를 찾을 때 기쁨을 얻게 됩니다 (고후6:9-10).
9-11절에 "이러므로 여호와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히7:25, 계12:5,10, 요17:5). 여호와 하나님은 예수님을 비하의 자리에서 승귀의 자리로 옮기셨습니다. 비천한 자리에서 존귀한 자리로 옮기셨습니다. 종의 자리에서 주인의 자리로 옮기셨습니다. 야고보서 4:10에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고 했습니다. 베드로전서 5:6에도 "그러므로 여호와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고 했습니다. 낮아지시기 바랍니다. 그 낮아짐이 주를 위함이 되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주를 위해 낮아지는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주께서 반드시 회복시키시고 회복되는 날에 만인들 위에 뛰어나도록 높이실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이며 여호와 하나님의 사명을 가진 자이며 여호와 하나님이 함께 하는 자임을 나타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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