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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려주일]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

본문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고 이 자리에 나오신 구도자 여러분, 이 주간은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 당하신 것을 기념해서 고난 주간으로 지키고 있습니다. 거룩하신 분께서 - "그 눈이 정결하시므로 악을 차마 보지 못하시며 패역을 용인치 못하시는" 분께서 불의한 세상에 들어오신 순간부터 고난의 삶이셨습니다만 특히 이 한 주간에는 그 고난이 극치를 이룬 기간입니다.
그 고난의 절정을 일컬어서 사도신경은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라고 고백합니다. 당시 유대 지역의 총독 본디오 빌라도의 언도대로 사형이 집행된 시간이 이번 금요일 정오라고 교회는 믿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시간에 맞추어 정사예배를 십자가에 못박힌 것을 기념하는 예배를 드려왔습니다. 하지만 오늘처럼 세속화된 도시생활 가운데 따로 시간을 내어서 예배하는 것이 힘들기 때문에 주님이 "호산나" 환호를 받으시며 입성하신 종려주일에 대개 고난을 기억하는 예배를 드리게 됩니다. 더 많은 성도들이 주님의 고난을 기념해서 함께 예배할 수 있는 시간이 되기 때문입니다.
주안에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본문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수난이 오늘에 주는 의미를 살피겠습니다. 아들의 고난으로 말미암아서 우리를 자기 자녀 삼으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바라시는 바가 무엇인지를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란 제목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언제나 그렇듯이 먼저 문맥을 살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우선 오늘 본문 골로새서 1장 24절의 위치를 살펴봅시다. 본문은 골로새서의 서론이 끝난 다음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맨 먼저 문안과 감사, 기도와 찬송 그리고 바로 앞부분에서 찬송에 내포된 위대한 진리를 골로새 성도들의 삶에 적용시킨 설교조차 이젠 끝난 것 같습니다. "복음에 굳게 서라"면서 그 복음의 성격과 범위 그 사역자된 자신에 대해서 언급합니다(23절)
이제 24절을 보면 복음의 일꾼이요 교회의 일꾼된 그의 사명에 대한 고백으로 시작합니다. 말하자면 개인적인 간증을 하는 시간과 같습니다. 29절까지는 자신이 맡은 사역과 관련한 간증이라면 2장 1절부터 5절까지는 골로새 성도를 향한 관점에서 간증하고 있습니다.
초대교회 예배의 생동적인, 유동적인 성격을 우리는 짐작할 수 있습니다. 교회가 커다란 건물을 갖고나서 이와 같은 중후한 강대상을 들이고 나면서부터 우리가 잃어버린 게 있습니다. 그것은 예배의 유동적, 자발적 성격을 잃어버렸습니다. 예배는 어떤 규범에 따라서 드려져야만 된다고 사람들은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예배에 나온 여러분은 사회자가 인도하는 데로 따라가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예배를 위한 공간은 확보되어야 하지만 공간을 확보한 교회는 이 유동적인, 그러면서 자발적인 측면을 상실하지 않도록 노력해야만 합니다. 여러분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구역예배를 모이는 자리를 생각해 보십시오. 7,8명 둘러 앉아서 예배를 하게 되면 사회자가 몇 장 부르자고 할 수 있지만 "집사님 85장 한 장 같이 부릅시다. " 누군가 그렇게 이야기해도 안되는 것이 아닙니다.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아마 전체가 모인 예배에서 모두가 한 장씩 부르자고 하면 예배 끝이 안나겠지요. 그래서 순서를 정해서 가고 있지만 찬송 한 장 바꿔 부른다고 해서 누가 큰일 나는 것은 아닙니다. 한번은 찬송을 하나 바꿔 불렀더니 당장 어떤 분이 와서 정하신데로 해야지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어디서 그런 법들을 만들었는지 모르겠어요. 창세기에서 계시록에도 없는 얘기를 말입니다. 조금 자유로울수 있는 것 그것이 예배의 본질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예배는 성령님께서 주장하시기 때문에 물 흐르듯이 흘러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자발적인 반응이 나올수 있도록 하는 것이 진정한 예배의 특성입니다. 바울이 자기의 간증을 하는 것처럼 우리에게 느껴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초대교회의 예배가 지금보다는 형식에 매이지 않았다고 생각할수 있는 많은 근거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바울은 24절부터 본격적으로 이 편지를 받은 골로새 성도들을 위한 자신의 목회적 관심을 밝히고 있습니다.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내가 교회의 일꾼된 것은 여호와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경륜을 따라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니라(24-25).
오늘 우리는 우선 그 첫 절을 중심으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라는 제목으로 그 고난의 극치인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을 기념하고 그 고난이 오늘 우리의 삶에 주는 의미를 살피려고 합니다. 본문 24절은 두 문장으로 되어있습니다: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한다는 한 문장이 있고, 그리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운다" 는 두 번째 문장이 있습니다.
표준 새 번역으로 한 번 더 읽어보겠습니다: "이제 나는 여러분을 위하여 고난받는 것을 즐겁게 여기고 있으며 그의 몸 곧 교회를 위하여 내 육신으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채워가고 있습니다" 바울은 지금 골로새 성도를 위하여 고난받는 것을 기뻐한다고 말합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자신의 몸에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채워가고 있다고 밝힙니다.
맨 먼저 우리가 던질 질문은 바울이 지금 받는 괴로움은 무엇일까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지금 죄수로서 옥중에 갇혀 있습니다. 바울이 옥중에서 이 편지를 썼다는 것을 엿볼 수 있는 구절들이 골로새서에 나옵니다. "전도할 문"(4:3)을 열어달라는 기도부탁 속에 그의 갇힌 상태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4장 18절에는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나 바울은 친필로 문안하노니 나의 매인 것을 기억하라 은혜가 너희에게 있을 찌어다"(4:18).
그러므로 우리는 그가 지금 받는 괴로움이 감옥에 갇힌 것 때문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지금 죄수로서 현재 갇혀 있는 상태를 기뻐한다고 말하는 셈입니다. 어떻게 바울은 지금 죄수로서 감옥에 갇힌 자신의 처지를 기뻐할 수 있을까요 사실 바울이 감옥에 갇힌 사실 때문에 소아시아에 있는 성도들은 근심하고 당혹스러워 합니다. 도대체 사도가,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받는 종이 어떻게 수감될 수 있는지를 교회는 이해를 하지 못하고 답답해 하고 있습니다. 정작 본인은 "죄수로서 현재의 상태"를 기뻐한다고 밝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왜 그가 그 상태에서 기뻐할 수 있었는지 궁금해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왜 바울은 그 고난을 기뻐했을까요 그것은 자기가 받는 괴로움이 이 편지를 받는 골로새 성도를 위한 것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좀 더 범위를 넓게 잡으면 골로새 성도들을 포함한 이방교회를 위한 것이요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 모두를 위한 것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감옥에 갇히지 아니하였다면 골로새서 성경은 쓰이지 아니하였을 겁니다. 2000년 후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유익을 줄어들었을 겁니다. 바울은 언제나 자신이 이방인의 사도임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갈라디아에 보낸 편지에는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베드로에게 역사하사 그를 할례자의 사도로 삼으신 이가 또한 내게 역사하사 나를 이방인의 사도로 삼으셨느니라 또 내게 주신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를 알므로 기둥같이 여기는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도 나와 바나바에게 교제의 악수를 하였으니 이는 우리는 이방인에게로 저희는 할례자에게로 가게 하려 함이니라"(갈 2:8-9).
같은 옥중에서 골로새서와 비슷한 시기에 쓴 것으로 추측되는 에베소서에는 이방인의 사도된 자신의 사역을 인해서 감격해합니다: "이제 그의 거룩한 사도들과 선지자들에게 성령으로 나타내신 것같이 다른 세대에는 사람의 아들들에게 알게 하지 아니하셨나니 이는 이방인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후사가 되고 함께 지체가 되고 함께 약속에 참여하는 자가 됨이라" 이전 시대에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적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제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안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이 함께 여호와 하나님의 상속자가 되고 함께 지체과 되고 함께 영광스런 약속에 참여하는 자가 된 이 시대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복음을 위하여 그의 능력이 역사 하는 대로 내게 주신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따라 내가 일꾼이 되었노라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시고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여호와 하나님 속에 감취었던 비밀의 경륜이 어떠한 것을 드러내게 하려 하심이라... 그러므로 너희에게 구하노니 너희를 위한 나의 여러 환난에 대하여 낙심치 말라 이는 너희의 영광이니라"(엡 3:5-9,13).
바울은 이같이 자신이 당하는 괴로움과 고난이 듣는 성도들에게 낙심이 아니라 영광의 찬송이 되기를 부탁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지금 자신이 감옥에서 고난을 받는 것이 이방인의 사도로서 그의 몸인 교회를 위한 것임을 알았기에 기뻐합니다. 비록 바울은 한 번도 골로새 교회를 방문한 적도 없고 복음을 전한 적도 없지만 이방인의 사도로서 그가 받는 괴로움도 넓은 의미에서 만세와 만대로부터 옴으로 감취인 비밀의 영광이신 그리스도를 이방 가운데 풍성히 나타내는 과정에서 겪는 것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를 사도라 부르신 여호와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서 비밀의 영광이요 영광의 소망이신 그리스도를 이방인 가운데 선포하는 일을 위해서임을 알기에 기뻐했습니다. 관점을 바꾸어 말하면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한 자로 세우기 위한 괴로움이기에 그는 지금 기뻐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바울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겠지만 그의 이 헌신은 오늘 우리에게까지 유익을 미치고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 위에서 그리스도께서 받은 고난을 한 걸음 더 나아가 바울은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자신의 몸에 채운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그리스도의 고난이란 무엇을 의미합니까 성 금요일 십자가 위에서 그리스도께서 받은 고난은 온전히 그리스도의 몫입니다. 아무도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 그리스도를 대신해서, 혹은 그리스도와 함께 그 고난을 나눌 수 없습니다. 한 분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흘린 피로 그 죽음으로 몸된 교회를 구속하기 위한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바울은 이 사실을 누누이 골로새 성도들에게 증거한 바 있습니다.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구속 곧 죄사함을 받았도다"(14절).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과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심이라"(20절)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케 하사"(22절). 교회를 탄생시키기 위한 고난은 오직 그리스도의 몫이셨습니다.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그리스도의 고난은 성금요일 그리스도께서 받으신 고난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무엇입니까 지금 바울이 자신의 몸에 채워가고 있는 그리스도의 고난은 무엇입니까 이 고난은 그의 교회를 위한, 그의 교회를 그리스도 예수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자라게 하기 위한 고난입니다.
28절이 설명하는 대로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기" 위한 고난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한 고난은 금요일날 십자가에서 완성하셨지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완전케 하기 위한 고난은 아직도 종료되지 않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를 이제 구원받은 자로서 살게 하는 성숙한 신자답게 살아가게 하는 일을 위해서는 성도님들이 받아야 하는 고난이 있다는 것입니다.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일은 아직 진행 중에 있기 때문입니다.
끝나지 않는 공사 현장에는 누군가가 계속 일을 해야 합니다. 바울은 지금 그 일을 자신의 몸으로 감당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모든 성도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일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우리 구주 예수님과 같아지기 위해서는 작업이 계속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지금 자신이 이방인의 사도로서 당하는 고난이 좁게는 골로새 성도를 위한 것이요 넓게는 그의 몸된 교회 전체를 위한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그가 겪는 고난은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 모두를 위한 것이요 온 교회의 유익을 주는 것임을 그는 믿고 있습니다.
그러면 왜 바울은 이 고난을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라고 했을까요 교회의 탄생을 위한 고난은 성금요일에 십자가위에서 완료되었습니다만 이 교회를 성장시키고 확장해가는데 따르는 고난은 모두 끝난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교회가 흠도 티도 주름잡힌 것이 없이 여호와 하나님 앞에 서도록 하기까지 아직도 그리스도께서 그 교회를 위해서 하실 일이 남아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한 자로서 우리가 서기까지는 여러분과 제가 아직도 손질이 더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신부 화장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이야기입니다. 그 남은 사역에는 또한 고난이 동반되기에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성금요일 십자가 위에서 그의 몸에 고난 당하신 그리스도께서는 오늘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해서 수난을 받고 계십니다. 그리스도의 수난은 그의 몸인 교회가 땅에 남아 있는 한 끝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원수들은 이천 년 전 어느 금요일에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음으로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를 향한 그들의 미움은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죽게 함으로 끝나지 않고 끊임없는 미움으로 이제는 그의 백성들을 향해서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를 향했던 화살이 이제 그의 백성들을 향해서 쏟아지고 있습니다.
"용이 자기가 땅으로 내어쫓긴 것을 보고 남자를 낳은 여자를 핍박하는" 계시록의 환상을 기억해 보십시오. "용이 여자에게 분노하여 돌아가서 그 여자의 남은 자손 곧 여호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과 더불어 싸우려는" 그 위용을 떠올려 보십시오. 그런 의미에서 모든 진실한 성도들은 예수께서 겪어야 할 고난을 그 분 대신 받는 자들입니다. 주님이 친히 남긴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제자가 그 선생보다, 또는 그 종이 그 상전보다 높지 못하나니 제자가 그 선생 같고 종이 그 상전 같으면 족하도다. 집주인을 바알세불이라 하였거늘 하물며 그 집사람들이랴"(마 10:24-25). 집주인인 예수님을 보고 귀신의 왕이라고 험담을 했다고 하면 하물며,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들에게 세상에 무슨 소리를 못하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성금요일에 수난으로 그리스도의 고난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성도들을 향해 쏟아지는 고난은 모두 그리스도께서 겪고 있는 고난입니다. 바울은 이 사실을 누구보다고 잘알고 있습니다. 그의 전 존재에 충격을 주었던 하늘의 음성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금요일 수난으로 그리스도의 고난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오늘 날 성도를 향해 쏟아지는 고난은 모두 그리스도께서 친히 겪는 고난입니다. 바울은 이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의 전 존재에 충격을 준 하늘의 음성을 그는 생생히 기억하고 산 사람입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주 안에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이 편지를 쓴 바울은 그 때 유대에 있는 성도들을 핍박했고 다메섹에 있는 성도들을 체포하기 위해서 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태양보다 밝은 빛이 한 줄기 그 위에 비취면서 들린 음성은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는 음성을 듣고 그는 넘어졌습니다. 그가 핍박한 것은 나사렛 괴수를 따르는 무리들이었으나 나사렛 예수는 그 백성과 자신을 동일시하여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고 다그치고 있습니다.
이 사건 이후로 바울로서는 기억속에 지울 수 없는 깨달음이 있었습니다. 천상의 그리스도께서는 지상의 성도들이 당하는 조롱과 모욕, 핍박과 고난에 함께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수난은 그의 몸인 교회가 이 땅에 남아 있는 한 끝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와 그의 몸인 교회는 이제 영원히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이 불가분리성을 강조하기 위해서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요(18절) 그의 몸된 교회"라고 바울은 말한 바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복음 때문에 받는 조롱과 모욕이 있습니까 복음 때문에 당하는 핍박과 고난이 있습니까 결코 여러분 홀로 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언제나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함께 고난을 받습니다. 성금요일 십자가 위에서 그의 몸에 고난을 당하신 그리스도께서는 오늘도 그의 몸인 교회의 수난 현장에 동참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여러분 홀로 고난당하는 현장에 그리스도께서는 결코 세워두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복음을 위해서 고난받는 것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바울뿐 아니라 이 땅을 살아가는 모든 성도는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에 동참하는 자들입니다. 다시 한 번 제자들에게 권면한 사도 바울의 말을 새겨 들어보십시오. "또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행 14:22하).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받는 것은 그와 함께 영광을 누리기 위한 전제 조건으로서 성경은 말합니다. "자녀이면 또한 후사요 곧 여호와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롬 8;17). 그리스도께서 먼저 고난을 받으셨고 지금 영광가운데 올리우셨습니다. 그러기에 오늘 우리 삶에도 먼저 고난을 받는 것이고 장차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공유하게 될것입니다.
주 안에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러나 그 어떤 고난도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에서 결코 분리시킬 수 없습니다. 또한 현세에서 우리가 겪는 고난은 장차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습니다. 고린도후서에서는 지금 받는 환난에 지극히 경한 것이 장차 이르게 될 영광에 엄청난 것을 비교할 수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제 마지막 질문을 던져봅시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위하여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자신의 몸에 채운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왜 남은 고난을 자신의 몸에 채운다고 말합니까
여기는 설명이 필요합니다. 본문은 그리스도의 남은 일반적 고난을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남은 그 고난을 내 몸에 채워간다"가 오히려 그렇게 번역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입니다. 천하 만민에게 복음을 남김없이 증거하고 거룩하고 흠없고 책망받을 것이 없는 자로 교회를 세우기 위해 필요한 고난을 의미합니다. 유대적인 배경을 우리가 가지고 이 글을 읽는다고 하면 훨씬 더 쉽게 이해할 법 합니다. 새 시대가 태어나기 위한 고통이요 고난을 가리킵니다. 새로운 시대가 태어나기 위해서 산고의 고통, 그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환난의 분량을 정하시는 분이십니다. 환난의 내용과 시간을 결정하신 분이십니다.
이 미리 정해진 분량을 채우는 일에 기꺼이 자신을 드려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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