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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려주일] 그리스도의 고난이 주는 의미

본문

우리는 매년 이맘때면 고난주간과 부활절을 기념하여 지킵니다. 고난주간과 부활절은 우리가 믿는 종교인 기독교의 중심되는 절기로 지키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고난과 십자가의 죽으심, 그리고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신 사건은 우리의 구원을 위한 가장 핵심적인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날들을 지킴으로 예수님의 고난과 죽으심의 의미를 생각해 보고, 동시에 우리와 어떤 관련성이 있는지를 살펴보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고난과 십자가 죽으심이 의미하는 가장 중요한 일은 우리가 지은 죄에 대하여 우리가 받아야 할 형벌을 대신하여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죽으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구원을 받아 여호와 하나님과 교제하는 은혜를 받게 되었습니다.
올해 고난주간에는 사도 베드로가 그리스도의 고난을 우리 신자의 생활에 적용하는 내용을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처럼 고난을 받고 십자가에 죽을 수 없습니다. 만약에 우리가 어떤 사람의 죄를 대신하여 고난을 받고 죽는다고 할지라도 그 사람의 죄를 사해주지 못합니다. 예수님의 고난과 십자가 죽으심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한 독특한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고난은 우리의 현실생활에도 아주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고난을 생각하면 모든 어려운 일을 극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본문의 주제는 신자가 여러 사회적인 관계 속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믿음 때문에 고난을 받을 수 있지만 그리스도의 고난을 생각하므로 참고 이기면 여호와 하나님이 주시는 신비한 위로와 은혜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 주제를 중심으로 첫 번째로는 신자가 사회생활을 할 때 받는 고난에 대하여, 두 번째로는 고난을 참고 이기는 방법으로 그리스도의 고난을 생각해야 한다는 점에 대하여, 세 번째로는 베드로가 그리스도의 고난을 설명하는 실제적인 목적이 무엇인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신자가 사회생활을 할 때 받는 고난
우리 신자들은 천국백성이지만 사회라는 울타리 안에 살고 있습니다. 과거 초대교회나 중세교회에 기독교의 복음을 잘못 이해하여 죄를 범하지 않기 위하여 사회를 떠나 수도원이나 산중에 살기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사회 속에서 활동하는 일을 부정적으로 이해하였습니다. 지금도 그러한 현상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를 등한히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사회를 떠나 살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 사회에서 어떻게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신분에 어울리는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중요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 사회에 살면서 가장 기본적으로 남편과 아내의 관계에서부터 부모의 자녀의 관계, 그리고 직장에서 윗사람과 아랫사람의 관계, 정치하는 사람과 백성의 관계 등 크고 작은 관계를 가지며 살고 있습니다. 여기에 갈등을 겪기도 하고, 많은 어려움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여기에서 사람들은 생존하기 위하여 여러 방법들을 모색합니다. 여기에는 정한 법과 양심과 사회적 질서에 따라 하는 사람도 있지만 부정하고 악한 방법으로, 심지어 뇌물과 모함과 폭력으로 일을 도모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 신자들은 이러한 사회적인 관계 속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사도 베드로는 이 점을 말하기 위하여 이 전체 문맥에서 우선적으로 우리 신자가 어떤 사람인지를 베드로전서 2:9-10에 설명하고 있습니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 " 이 말씀의 핵심적인 의미는 구원을 받아 여호와 하나님과 새로운 관계가 되어 여호와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요 왕같은 제사장이 되었기 때문에 어두운데서 불러내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전파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여호와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으로 어떻게 우리를 구원해 주신 주님의 덕과 사랑을 선전하며 살 수 있을까요 그 방법으로 이 세상에서 우리가 맺는 여러 사회적인 관계, 예를 들면 왕과 백성, 주인과 종, 남편과 아내의 관계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를 설명하는 문맥 속에 오늘 읽은 본문이 놓여 있습니다.
이 본문은 사도 베드로가 여러 사회적 관계 중에서 주인과 종의 관계를 가지고 설명하는 내용입니다. 사회적인 관계 가운데 주인과 종의 관계는 가장 포괄적인 의미입니다. 당시 사회에서는 주로 농경사회였기 때문에 오늘날 산업정보화 사회처럼 다양한 관계를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당시 사회에서 주인과 종의 관계는 가장 대표적인 사회적 관계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오늘날은 노사문제나 직장에서 직장상사와 부하직원의 관계, 고용주와 고용인, 사주와 노동자 등의 관계와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이해한다면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이 틀을 벗어난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이 사람들에게 대하여 사도 베드로는 베드로전서 2:18에 이렇게 말씀하였습니다. "사환들아(종들아) 범사에 두려워함으로 주인들에게 순복하되 선하고 관용하는 자들에게만 아니라 또한 까다로운 자들에게도 그리하라. " 여기서 아랫사람들은 윗사람에게, 종은 주인에게, 노동자는 사주에게 순복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특히 관용하고 너그러운 주인만이 아니라 까다롭고 거친 주인에게도 그렇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이 교훈은 현대 사회의 근로자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사실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근로자와 아랫사람들은 윗사람이 볼 때 열심히 일하는 하는 척하고 지켜보는 사람이 없으면 한눈을 파는 것이 일반적인 성향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 근로자들은 두려워함으로 주인에게 순복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에 "두려워하므로"라는 뜻은 "무서워서"라는 뜻은 아닙니다. 여기에 헬라어 성경에 사용된 말인 포보스()라는 말은 주로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고 경외한다는 의미로 사용되는 단어이기도 하고, 존경한다는 의미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 본문에서 "범사에 두려워하므로 주인에게 순복하라"는 뜻은 모든 일에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듯이 주인의 말에 순종하라는 뜻입니다. 특히 베드로는 너그러운 주인만이 아니라 까다로운 상전에게도 그렇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상전 중에는 관대한 자들도 있는 반면에 거칠고 몰인정하고 못된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전들에게 순종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 말이 주인이 불법을 행하고 하고, 여호와 하나님의 뜻과 반대되는 것도 순종하라는 뜻은 아닙니다. 여기에 대하여 영국의 마이클 벤트리(Michael Bentley) 목사님은 이 본문의 의미를 설명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현대사회에서의 경제활동에 엄청난 부정이 개입되어 있다는 사실은 상식에 속하는 일입니다. 장부를 속이고 뇌물을 주고받는 사례가 너무도 허다합니다. 만일 어떤 고용주가 부정한 방법으로 사업을 하면서 그리스도인 피고용인에게 입을 다물거나 부정을 하라고 명령한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바울은 그리스도인 상전에게 순종해야 한다고 말했습니까 그 대답은 '아니오'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여호와 하나님께 복종해야 합니다. 바울의 이 가르침은 부정과 불법을 방조하거나 인정해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
문제는 여기에서 발생합니다. 그리스도인 신자는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듯이 주인의 말에 순종해야 합니다. 하지만 부정과 불법은 행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고난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 본문에서 사도 베드로가 베드로전서 2:19-20에서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여호와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여호와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는 말씀은 바로 이러한 점을 염두에 두고 한 말입니다. 여기에 "애매히"라는 말은 헬라어 성경에 아디코스(-)라는 말인데, "정당하지 못한 방법으로," "부당하게"라는 뜻입니다. 잘못을 행함으로 벌을 받는 것은 아무런 유익이 없고 당연히 받을 벌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으로서 경영주나 직장상사에서 부당하게 고난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본문은 바로 이러한 의미의 고난입니다.
특히 사도 베드로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하여 고난을 받는 일을 가리켜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아름다운 일"이라고 하였습니다. 불법을 행함으로 고난을 당하는 것은 칭찬이 없지만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선을 행하면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아름다운 일이라고 하였습니다(벧전2:20). 우리 성도는 이 사회에서 살 때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믿음과 선을 행한다는 이유 때문에 고난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고난을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아름다운 일이라고 하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2. 그리스도의 고난을 생각하라
그러면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여러 사회적인 관계에서 부당하게 고난을 받을 때 어떻게 이길 수 있을까요 사도 베드로는 부당한 고난을 참고 이기는 방법으로서 그리스도의 고난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2:21에 보면 그리스도의 고난을 어떻게 적용하고 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 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 우리가 부르심을 받은 것은 정당하고 의로운 일을 하도록 하고, 그러면서 그리스도를 아는 영광의 빛을 선전하는 자가 되게 하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살 때 필연적으로 세사에 속한 가치관과의 충돌로 인하여 갈등을 빚을 수밖에 없고 부당한 고난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받으신 것을 생각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베드로전서 2:21의 말씀을 풀어쓰면 이런 뜻입니다. "여러분들이 여호와 하나님의 택한 백성으로 부르심을 받은 것은 정당하고 선한 일을 하여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이 일에는 반드시 부당하게 고난을 당할 수 있습니다. 그 상황에서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위로를 얻으십시오. 그리스도는 우리가 따라야 할 본보기입니다. "
그러면 그리스도의 고난은 어떤 것일까요 사도 베드로는 베드로전서 2:22-25에서 그리스도의 고난의 성격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저는 죄를 범치 아니하시고 그 입에 궤사도 없으시며,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자에게 부탁하시며,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 " 이 말씀을 읽을 때 사도 베드로가 오실 메시아가 오셔서 하실 일을 생생하게 그림을 그리듯 예언하는 이사야 53장의 간접 인용하기도 하고, 해석하여 인용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참고적으로 이사야 53:4-6; 9을 보십시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여호와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며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 그는 강포를 행치 아니하였고 그 입에 궤사가 없었다. "
사도 베드로가 그리스도를 묘사하는 대로 그리스도께서는 죄를 범하지 아니하셨습니다. 그 입에는 악한 말도 담지 않으셨습니다.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고난을 당할 때 그 분의 지위와 능력으로 볼 때 하늘의 수천 수백만 명의 천군천사들을 동원하여 막거나 위협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특히 베드로는 이 장면을 목격한 자였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이 점을 생생하게 묘사할 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협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십자가에서 고난을 받으신 주님은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저들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눅23:33-34)라고 기도하셨습니다. 다만 예수님은 모든 일을 공의롭게 심판하시는 여호와 하나님께 부탁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도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친히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죽으신 목적을 베드로전서 2:24에서 이렇게 설명해 주셨습니다.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 예수님의 고난은 우리의 죄를 담당하신 사건입니다. 이 점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처음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셨을 때의 상태로 돌아가야 합니다. 처음에 우리 인간은 고통도 죽음도 없이 에덴동산에서 여호와 하나님과 영원히 교제하며 살 수 있었습니다. 그 조건은 여호와 하나님과 맺은 언약의 말씀을 지키기만 하면 되었습니다. 이 언약의 말씀이 창세기 2:16-17의 말씀인데, 선악과를 따먹으면 정녕 죽을 것이지만 따먹지 않으면 영생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최초에 맺은 이 계약은 생명의 계약이었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사탄의 유혹을 받아 이기심에 이끌려 이 언약을 깨뜨리고 말았습니다. 우리 인간의 행복이 파괴된 것은 바로 이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어긴 죄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죄가 여호와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단절시켰습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죄를 법하면 그 사람은 그 죄에 대하여 법에 따라서 처벌을 받아야 합니다. 만약에 그 법에 따라 처벌을 받지 않는다면 법의 실효성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를 지으면 항상 여호와 하나님이 정하신 법에 따라서 죄의 벌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의 법을 어겼기 때문에 그의 진노와 저주 아래 놓여져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자신을 구원해 줄 수 있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인간의 지은 죄에 대한 비참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죄를 범한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이 진노의 상태에서 여호와 하나님이 어떤 일을 해주시기 전에는 아무런 소망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악을 따라 그 형벌을 우리에게 내리지 않으시고 예수 그리스도에게 담당시키셨습니다. 베드로는 바로 이 점을 베드로전서 2:24에서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에 "우리 죄를 담당하셨다"고 하는 것은 그 범죄가 포함하고 있는 모든 죄의 책임과 거기에 따른 형벌을 다 담당하셨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지은 죄로 인하여 바로 우리가 받아야 할 형벌을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다 담당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결과를 베드로는 아주 의미있는 표현을 사용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벧전2:24) 이 말씀의 의미는 죄에 대하여 죽었기 때문에 죄가 시키는 대로 행하는 자가 아니라 의를 위하여 사는 자가 되게 하셨다는 뜻입니다.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베드로는 이 관계를 서론적으로 밝히는 베드로전서 2:9에서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셨다"고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서 가지는 여러 사회적인 관계에서 죄가 시키는 대로 행하는 자가 아니라 의를 위하여 사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과 교제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이 점을 베드로는 목자와 양의 이미지를 가지고 베드로전서 2:25에서 이렇게 설명하였습니다.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 " 양이 목자의 품을 떠나면 그는 사나운 짐승의 밥이 되거나 굶어 죽습니다. 우리가 죄를 지었을 때 여호와 하나님을 떠난 우리의 모습이 목자의 보호를 떠난 양이 길을 잃은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영혼의 목자가 되시는 주님의 품에서 주님과 교제하는 축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우리에게 양과 목자의 이미지가 선뜻 와닿지 않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당시 팔레스타인의 문화권에서는 양과 목자의 이미지는 아주 익숙하였습니다. 우리가 '목자'라고 개념을 들을 때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그림인 예수님께서 양들을 안고 인도하시는 모습을 머리 속에 그려보십시오. 그 그림을 볼 때 '사랑,' '관심,' '보호,' '안전' 등과 같은 감정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우리 영혼의 목자이신 여호와 하나님과 영원토록 교제하며 그의 관심의 대상이 되며, 그의 보호와 인도와 축복을 받는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이 모두는 예수님이 우리 죄를 담당하시고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죽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고난주간을 지키는 가장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3. 그리스도의 고난을 설명하는 실제적인 목적
그러면 다시 사도 베드로가 예수님의 고난을 설명하는 실제적인 목적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서 여러 사회적인 관계들 가운데 주인과 종의 관계, 경영주와 노동자, 직장 상사와 부하직원 등의 관계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과 반대되는 명령을 듣지 않음으로 부당하게 고난을 받을 때 그리스도의 고난을 생각하고 참고 인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도 아무 죄도 없고, 악한 말도 하지 않았는데도 고난을 받을 때 여호와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을 바라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부당하게 죽임을 당했다고 할지라도 실제적인 결과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를 구원하여 영혼의 목자되신 여호와 하나님과 교제하는 영원한 생명을 주신 일입니다. 베드로가 그리스도의 고난을 설명하신 목적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이유로 부당하게 고난을 당할 때 그리스도의 고난의 의미를 생각하고 참아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주시기 위함입니다.
우리 신자들이 이 세상에서 다양하고 복잡한 사회적인 관계 속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려고 할 때 고난을 받을 수 있습니다. 때로는 직장상사에게, 때로는 경영주에게, 때로는 우리 윗사람에게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갈 때 부당하게 고난을 받을 수 있습니다. 여기에 대하여 한 가지 실제적인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제가 교회 대학부에서 가르쳤던 한 학생이 대학을 졸업하고 초등학교 교사가 되었습니다. 그 자매는 그리스도인 교사로서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학생들을 가르치기 위하여 온 힘을 기울이는 신실한 교사였습니다. 그런데 학부모가 자기 자녀를 잘 봐달라는 촌지를 가져오자 정중하게 거절을 하였습니다. 몇 번이나 여러 학부모들이 촌지나 부당한 선물을 가져왔으나 정중하게 거절하자 학부모들은 처음에는 당황하였으나 이 선생님을 이해하게 되고 존경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것은 동료교사와 교사의 평점을 매기는 교감선생님과의 갈등과 마찰이었습니다. 다른 교사들이 다 촌지를 받는데 선생님은 뭐 잘났다고 안 받느냐, 선생님은 고상하고 우리는 고상하지 않다는 말이냐, 왜 관행을 거절하느냐고 하면서 고통을 주기 시작하고, 따돌리기 시작하였습니다. 여러분! 이 그리스도인 자매가 잘못했습니까 그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신실하게 교사의 직무를 지금도 잘 수행하고 있습니다. 자매는 비록 상전에게 부당하게 대우를 받거나 고통을 당하지만 여호와 하나님이 주시는 위로를 바라보면서 고난을 견디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죄가 없고 악한 말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고난을 받으신 것은 우리 죄를 담당해 주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주님이 고난을 받을 때 공의로우신 주님의 심판을 바라보고 참고 견디므로 우리를 구원하여 영혼의 목자되시고 감독되신 여호와 하나님과 교제하면서 그 은혜와 축복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우리 역시 주님의 택하신 백성이요 왕같은 제사장으로,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여호와 하나님의 기이하고 신기한 빛으로 들어가게 하신 분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려면 때로 고난을 받을 수 있습니다. 불의를 버리고 의롭게 살려고 할 때 고난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부당하게 고난을 당하기도 하지만 예수님의 고난처럼 여러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여 여호와 하나님과 교제하는 생명을 얻게 할 수 있습니다.
대구의 한 염색공단에 있는 한 공장에서 여종업원들을 부당하게 대하는 한 공장장이 있었습니다. 그 여종업원 중의 일부가 그 공단 안에 있는 교회에 출석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공장장은 특히 신자 여직공들을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산다는 이유와 주일에 교회에 간다는 이유 때문에 부당하게 대했지만 그 분들은 그 고난과 역경 속에서 인내하며 그리스도의 고난을 바라보고 기도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공장장이 회개하고 예수 믿어 그 공장은 사랑과 꿈이 넘치는 일터가 되었습니다. 지금 베드로가 이 본문에서 그리스도의 고난을 소개하는 실제적인 목적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 말씀의 전체적인 뜻은 이렇게 풀어 설명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사회생활을 할 때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일 때문에 부당하게 고난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 때에 그리스도께서 고난받으신 것을 생각하십시오. 그리스도께서 죄가 없으심에도 불구하고 참고 고난을 받으시므로 여러분을 구원하여 죄에 대하여 죽은 자이고 의를 위하여 사는 자로 삼으시지 않았습니까 이 그리스도를 생각함으로 애매하게 고난을 받는다고 할지라도 참고 견디십시오. 그러면 예수님의 고난을 통하여 여러분을 구원하여 영혼의 목자되신 여호와 하나님과 교제하게 하신 것처럼 그들을 구원하는 일도 있게 될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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