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려주일] 고난속에서 말씀하시는 주님
본문
주님께서 오셨던 시대에는 십자가는 흉칙한 것 이였고 죄인들이나 지는 고통의 극치였습니다. 그러한 십자가를 예수님께서 지심으로 인하여 완전히 그 가치가 달라졌습니다. 십자가는 죄악의 상징이 아닌 구원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하여 광야 생활 할 때에 원망이 일상화 되어서 심지어 여호와 하나님까지 원망하게 되었습니다. 민21:4-9"백성이 호르산에서 진행하여 홍해 길로 좇아 에돔 땅을 둘러 행하려 하였다가 길로 인하여 백성의 마음이 상하니라 백성이 여호와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되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올려서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고 이곳에는 식물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박한 식물을 싫어하노라 하매 여호와께서 불뱀들을 백성 중에 보내어 백성을 물게 하시므로 이스라엘 백성 중에 죽은 자가 많은지라 백성이 모세에게 이르러 가로되 우리가 여호와와 당신을 향하여 원망하므로 범죄하였사오니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 뱀들을 우리에게서 떠나게 하소서 모세가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마다 놋뱀을 쳐다본즉 살더라" 에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십자가를 믿는자마다 구원받아 부활하여 영생 할 수 있다는 것을 모세 당시부터 예시하여 주셨던 것입니다.
십자가는 고난을 상징하지만 고난속에서 말씀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계획이 내재하여 있습니다. 시119:67"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 시119:71"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 고난을 통한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살펴보며 은혜받고자 합니다.
I. 고난속에 영생이 내재되어있습니다.
기독교사에서 유명한 성 어거스틴은 "The City of God, 여호와 하나님의 도성"이라고 하는 불후의 명저 속에서 이렇게 유명한 말을 합니다. '고통이란 동일한 것이다. 누구에게나 고통이란 있고 고통은 동일한 것이로되 고통을 당하는 사람은 동일하지 않다. 악한 사람은 고통 속에서 여호와 하나님을 비방하고, 원망하고, 모독하고. 선한 사람은 고난을 통해서 여호와 하나님을 찾고 여호와 하나님을 알고 궁극에서는 여호와 하나님을 찬양하게 되느니라. ' 그 고통의 결과를 이렇게 맺고 있다 하는 말입니다.
또한 '무슨 고통을 당하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어떤 자세로 고난을 당하느냐에 따라서 결과가 달라지고 고난의 의미도 달라지는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예수님게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때에 양쪽에 두 강도가 달려 죽었습니다. 두 강도중 하나는 십자가에서 죽음으로 지옥에 갔고 한 강도는 십자가에 달림으로 천국에 갔습니다.
눅23:39-43"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가로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가로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여호와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느냐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의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가로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똑같은 십자가인데 어떤이에게는 저주의 십자가로 어떤이에게는 구원의 십자가가 되는 것입니다. 성도여러분! 우리는 어떠한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것입니까
구레네 사람 시몬이진 십자가를 억지로 진 십자가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는 일부러지신 십자가입니다. 성도님들은 억지로라도 일부로라도 구원의 십자가를 지고 주를 따르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쿼바디스" 소설로도, 영화로도 나왔습니다. 쿼바디스의 장면을 자세히 보면 로마라고 하는 도시가 맘에 안 들어서, 소위 예술가를 자처하는 네로 황제가 사람을 시켜서 불을 지릅니다. 다 태워버리고 다시 만들려고. 아, 불을 지른 다음에 원망이 많으니까 이것을 기독교인에게 씌워버립니다. 기독교인들이 항상 불로 심판한다고 하다가 불을 지른다고. 불은 네로 황제가 지르고 죽기는 기독교인이 죽습니다. 수만 명을 잡아다가 원형극장에서 죽입니다. 이렇게 억울하고 무모한 죽음을 당해야 하겠습니까 그래서 거기에 있던 베드로가 같이 있는 사람들과 함께 도망을 합니다.
로마에서만 빠져나가면 되니까. 로마성 밖으로 나갈 때에 예수님께서 길을 막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로마쪽으로 향하여 가십니다. "쿼바디스 도미네, 주여 어디로 가십니까" 그때에 예수님 말씀이 "네가 버리고 나온 로마를 향해서 내가 가서, 다시 십자가에 못 박히려 한다" 베드로가 "아닙니다. 제가 가겠습니다. " 다시 발걸음을 돌이켜서 로마로 갑니다. 가서 그는 십자가에 죽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는데 "내가 감히 어떻게 같은 모양으로 죽겠느냐 거꾸로 매달아라. " 거꾸로 십자가에 달려서 베드로가 순교를 합니다. 그가 예수님을 만났던 곳, 거기에 발자국이 있습니다.
여러분, 피해가다가 잡히는 것은 십자가가 아닙니다. 한탄하며, 저주하며, 죽는 것도 순교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의 고난은 죄가 있어서 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일부러 당하는 것입니다.
우스운 이야기가 있습니다. 소크라테스가 잘 아는 대로 억울하게 죽지 않았습니까 유명한 말이 있죠, 악법도 법이라고. 악법에 의해 그는 처형이 되는데, 처형장에 나갈 때에 그의 제자들이 따라가면서 "억울합니다. 분합니다. 억울합니다. 무슨 죄가 있어서 선생님이 이렇게 죽으십니까" 그러니까 소크라테스가 돌아서서 빙그레 웃고 한 말이, 이것이 명답입니다. "이놈들아, 그럼 내가 죄가 있어서 죽어야 하겠느냐" 그렇지 않습니까 적어도 죄가 없이 죽어야지. 여러분, 어차피 고난을 당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이 억울하다, 억울하다고 하지만 사실 억울한 고난을 당해야 사람다운 사람이지 죄가 있어서 당해서야 되겠습니까 그 억울하다는 것은 괜찮은 것입니다.
2. 고난속에 축복이 내재하여 있습니다.
빅터 E. 프랭클(Victor E. Frankel) 이라고 하는 분은 나치 독일의 강제 노동수용소에서 많은 고난을 겪었고 다른 사람들도 고난 겪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는 책을 썼습니다. "죽음의 수용소에서"라는 책을 썼습니다. 그 책에서 "고난 속에서 포기한 사람에게는 고난은 저주이지만, 고난 속에서 그 고난의 의미를 발견한 사람에게는 고난은 놀라운 축복일 수 있다. 고난의 의미를 아는 자에게는 고난은 축복일 수 있다. " 오늘 본문에는 '고난 당하지 않는 자가 있다. 어떻게 해야 고난을 면할 수 있다. 고난을 피해야 한다' 이런 이야기가 없습니다. 고난이라고 하는 실존적 현실을 그대로 인정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전에는 십자가가 저주의 상징 이였습니다. 흉악범들에게 가장 무서운 형틀이 십자가 였습니다. 그러데 죄도 없고 흠도 없으신 주님이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인하여 십자가가 복음의 핵심이 되는 축복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십자가의 고난에는 여호와 하나님의 경륜이 있습니다. 고난 속에 독생자를 보내 주시고 독생자를 십자가에 못박히는 내어주시는 아픔속에 구원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시나리오가 있습니다.
요3:16-"여호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여호와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하려 하심이라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여호와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
예수님께서 천국복음을 가르쳐 주실때에도 요14:6"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 도토리속에서 도토리묵만 볼수 있는 눈은 아무나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도토리속에서 도토리 나무를 볼 수 있는 눈은 아무나 가진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알면 다 볼 수 있습니다. 십자가를 보고 십자가를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십자가 속에서 죄 용서함의 능력을 볼수 있고 천국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진눈은 믿음의 눈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십자가의 고난속에서 천국의 축복,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의 축복, 하늘을 유업으로 받을자의 축복을 볼 수 있는 영안을 가지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시나리오는 반드시 해피엔드입니다. 십자가를 통한 부활과 천국의 축복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러한 해피앤드를 믿는이들에게는 근심 걱정이 없습니다.
마6:31-34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날에 족하니라 "
여러분, 해피엔드를 믿는 사람은 그 과정에 대해서 아무런 걱정이 없습니다. 혹 여러분, 서부영화를 보십니까 서부영화를 볼 때에는 마음을 탁 놓고 보십시오. 주연배우는 절대로 안 죽습니다. 안 죽게 되어있습니다. 나쁜 놈만 죽지 좋은 사람은 안 죽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시나리오, 해피엔드, 오메가 포인트( point)를 딱 손에 들고 믿음을 고백하고 그리고 오늘을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복음 자체가 good news 곧 기쁜소식,좋은 소식입니다. 복음 속에는 무한한 축복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사람은 나가도 복을 받고, 들어와도 복을 받게 됩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해받음이 없습니다.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베풀어 주시는 축복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3. 고난속에서 여호와 하나님을 더욱더 가까이 하십니다.
벧전2:25"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 "
욥1:21-22"가로되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 가올찌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찌니이다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여호와 하나님을 향하여 어리석게 원망하지 아니하니라"
욥42:5"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
한 불행한 예술가가 있었습니다. 그는 열살도 되기 전에 고아가 되었습니다. 배고픈 소년기를 보냈습니다. 가족을 부양하기 위하여 힘겨워서 동생들을 미워하기도 했습니다. 장성한 뒤에도 불행은 계속됩니다.
결혼한 지 13년만에 아내와 사별하고 재혼을 했습니다. 그는 무려 스물명의 자녀를 낳았는데 그 중의 열명이 열살 전에 죽었습니다. 얼마나 비참한 생을 살았습니까 그 남은 가운데도 하나는 정신박약아입니다. 이 예술가는 노후에도 비참했습니다. 인생 말년에 시력을 잃었으며 뇌출혈로 인하여 반신불수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일생을 통해서 역경을 뚫고 끊임없이 불후의 명작을 썼습니다. 명곡을 썼습니다. 그의 작품마다 그 첫머리에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라고 쓰고 작품마다 마무리에는 "오직 여호와 하나님께 영광"이라고 썼습니다. 이 사람이 바로 요한 세바스찬 바하입니다.
이러한 고백으로 바하음악은 교회음악이 되었습니다. 바하를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바하의 곡을 듣지 않은 사람도 없습니다. 그 영광이 넘치는 바하를 알지만은 바하가 한평생 이렇게 모진 고생을 했다는 것은 알기가 어렵습니다. 그는 고난 속에서 주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 모진 고난 속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감동적인 것입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인은 고난의 의미를 압니다. 그 속에 있는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을 압니다. 고난 속에서 새롭게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하면서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고, 높은 곳으로 점점 성숙해 가는 것입니다.
고전10:31"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고난속에서 영생을 보고.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의 축복을 보고 주님의 영광을 보면서 주를 따르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하여 광야 생활 할 때에 원망이 일상화 되어서 심지어 여호와 하나님까지 원망하게 되었습니다. 민21:4-9"백성이 호르산에서 진행하여 홍해 길로 좇아 에돔 땅을 둘러 행하려 하였다가 길로 인하여 백성의 마음이 상하니라 백성이 여호와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되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올려서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고 이곳에는 식물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박한 식물을 싫어하노라 하매 여호와께서 불뱀들을 백성 중에 보내어 백성을 물게 하시므로 이스라엘 백성 중에 죽은 자가 많은지라 백성이 모세에게 이르러 가로되 우리가 여호와와 당신을 향하여 원망하므로 범죄하였사오니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 뱀들을 우리에게서 떠나게 하소서 모세가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마다 놋뱀을 쳐다본즉 살더라" 에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십자가를 믿는자마다 구원받아 부활하여 영생 할 수 있다는 것을 모세 당시부터 예시하여 주셨던 것입니다.
십자가는 고난을 상징하지만 고난속에서 말씀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계획이 내재하여 있습니다. 시119:67"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 시119:71"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 고난을 통한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살펴보며 은혜받고자 합니다.
I. 고난속에 영생이 내재되어있습니다.
기독교사에서 유명한 성 어거스틴은 "The City of God, 여호와 하나님의 도성"이라고 하는 불후의 명저 속에서 이렇게 유명한 말을 합니다. '고통이란 동일한 것이다. 누구에게나 고통이란 있고 고통은 동일한 것이로되 고통을 당하는 사람은 동일하지 않다. 악한 사람은 고통 속에서 여호와 하나님을 비방하고, 원망하고, 모독하고. 선한 사람은 고난을 통해서 여호와 하나님을 찾고 여호와 하나님을 알고 궁극에서는 여호와 하나님을 찬양하게 되느니라. ' 그 고통의 결과를 이렇게 맺고 있다 하는 말입니다.
또한 '무슨 고통을 당하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어떤 자세로 고난을 당하느냐에 따라서 결과가 달라지고 고난의 의미도 달라지는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예수님게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때에 양쪽에 두 강도가 달려 죽었습니다. 두 강도중 하나는 십자가에서 죽음으로 지옥에 갔고 한 강도는 십자가에 달림으로 천국에 갔습니다.
눅23:39-43"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가로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가로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여호와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느냐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의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가로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똑같은 십자가인데 어떤이에게는 저주의 십자가로 어떤이에게는 구원의 십자가가 되는 것입니다. 성도여러분! 우리는 어떠한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것입니까
구레네 사람 시몬이진 십자가를 억지로 진 십자가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는 일부러지신 십자가입니다. 성도님들은 억지로라도 일부로라도 구원의 십자가를 지고 주를 따르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쿼바디스" 소설로도, 영화로도 나왔습니다. 쿼바디스의 장면을 자세히 보면 로마라고 하는 도시가 맘에 안 들어서, 소위 예술가를 자처하는 네로 황제가 사람을 시켜서 불을 지릅니다. 다 태워버리고 다시 만들려고. 아, 불을 지른 다음에 원망이 많으니까 이것을 기독교인에게 씌워버립니다. 기독교인들이 항상 불로 심판한다고 하다가 불을 지른다고. 불은 네로 황제가 지르고 죽기는 기독교인이 죽습니다. 수만 명을 잡아다가 원형극장에서 죽입니다. 이렇게 억울하고 무모한 죽음을 당해야 하겠습니까 그래서 거기에 있던 베드로가 같이 있는 사람들과 함께 도망을 합니다.
로마에서만 빠져나가면 되니까. 로마성 밖으로 나갈 때에 예수님께서 길을 막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로마쪽으로 향하여 가십니다. "쿼바디스 도미네, 주여 어디로 가십니까" 그때에 예수님 말씀이 "네가 버리고 나온 로마를 향해서 내가 가서, 다시 십자가에 못 박히려 한다" 베드로가 "아닙니다. 제가 가겠습니다. " 다시 발걸음을 돌이켜서 로마로 갑니다. 가서 그는 십자가에 죽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는데 "내가 감히 어떻게 같은 모양으로 죽겠느냐 거꾸로 매달아라. " 거꾸로 십자가에 달려서 베드로가 순교를 합니다. 그가 예수님을 만났던 곳, 거기에 발자국이 있습니다.
여러분, 피해가다가 잡히는 것은 십자가가 아닙니다. 한탄하며, 저주하며, 죽는 것도 순교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의 고난은 죄가 있어서 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일부러 당하는 것입니다.
우스운 이야기가 있습니다. 소크라테스가 잘 아는 대로 억울하게 죽지 않았습니까 유명한 말이 있죠, 악법도 법이라고. 악법에 의해 그는 처형이 되는데, 처형장에 나갈 때에 그의 제자들이 따라가면서 "억울합니다. 분합니다. 억울합니다. 무슨 죄가 있어서 선생님이 이렇게 죽으십니까" 그러니까 소크라테스가 돌아서서 빙그레 웃고 한 말이, 이것이 명답입니다. "이놈들아, 그럼 내가 죄가 있어서 죽어야 하겠느냐" 그렇지 않습니까 적어도 죄가 없이 죽어야지. 여러분, 어차피 고난을 당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이 억울하다, 억울하다고 하지만 사실 억울한 고난을 당해야 사람다운 사람이지 죄가 있어서 당해서야 되겠습니까 그 억울하다는 것은 괜찮은 것입니다.
2. 고난속에 축복이 내재하여 있습니다.
빅터 E. 프랭클(Victor E. Frankel) 이라고 하는 분은 나치 독일의 강제 노동수용소에서 많은 고난을 겪었고 다른 사람들도 고난 겪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는 책을 썼습니다. "죽음의 수용소에서"라는 책을 썼습니다. 그 책에서 "고난 속에서 포기한 사람에게는 고난은 저주이지만, 고난 속에서 그 고난의 의미를 발견한 사람에게는 고난은 놀라운 축복일 수 있다. 고난의 의미를 아는 자에게는 고난은 축복일 수 있다. " 오늘 본문에는 '고난 당하지 않는 자가 있다. 어떻게 해야 고난을 면할 수 있다. 고난을 피해야 한다' 이런 이야기가 없습니다. 고난이라고 하는 실존적 현실을 그대로 인정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전에는 십자가가 저주의 상징 이였습니다. 흉악범들에게 가장 무서운 형틀이 십자가 였습니다. 그러데 죄도 없고 흠도 없으신 주님이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인하여 십자가가 복음의 핵심이 되는 축복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십자가의 고난에는 여호와 하나님의 경륜이 있습니다. 고난 속에 독생자를 보내 주시고 독생자를 십자가에 못박히는 내어주시는 아픔속에 구원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시나리오가 있습니다.
요3:16-"여호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여호와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하려 하심이라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여호와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
예수님께서 천국복음을 가르쳐 주실때에도 요14:6"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 도토리속에서 도토리묵만 볼수 있는 눈은 아무나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도토리속에서 도토리 나무를 볼 수 있는 눈은 아무나 가진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알면 다 볼 수 있습니다. 십자가를 보고 십자가를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십자가 속에서 죄 용서함의 능력을 볼수 있고 천국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진눈은 믿음의 눈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십자가의 고난속에서 천국의 축복,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의 축복, 하늘을 유업으로 받을자의 축복을 볼 수 있는 영안을 가지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시나리오는 반드시 해피엔드입니다. 십자가를 통한 부활과 천국의 축복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러한 해피앤드를 믿는이들에게는 근심 걱정이 없습니다.
마6:31-34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날에 족하니라 "
여러분, 해피엔드를 믿는 사람은 그 과정에 대해서 아무런 걱정이 없습니다. 혹 여러분, 서부영화를 보십니까 서부영화를 볼 때에는 마음을 탁 놓고 보십시오. 주연배우는 절대로 안 죽습니다. 안 죽게 되어있습니다. 나쁜 놈만 죽지 좋은 사람은 안 죽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시나리오, 해피엔드, 오메가 포인트( point)를 딱 손에 들고 믿음을 고백하고 그리고 오늘을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복음 자체가 good news 곧 기쁜소식,좋은 소식입니다. 복음 속에는 무한한 축복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사람은 나가도 복을 받고, 들어와도 복을 받게 됩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해받음이 없습니다.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베풀어 주시는 축복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3. 고난속에서 여호와 하나님을 더욱더 가까이 하십니다.
벧전2:25"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 "
욥1:21-22"가로되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 가올찌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찌니이다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여호와 하나님을 향하여 어리석게 원망하지 아니하니라"
욥42:5"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
한 불행한 예술가가 있었습니다. 그는 열살도 되기 전에 고아가 되었습니다. 배고픈 소년기를 보냈습니다. 가족을 부양하기 위하여 힘겨워서 동생들을 미워하기도 했습니다. 장성한 뒤에도 불행은 계속됩니다.
결혼한 지 13년만에 아내와 사별하고 재혼을 했습니다. 그는 무려 스물명의 자녀를 낳았는데 그 중의 열명이 열살 전에 죽었습니다. 얼마나 비참한 생을 살았습니까 그 남은 가운데도 하나는 정신박약아입니다. 이 예술가는 노후에도 비참했습니다. 인생 말년에 시력을 잃었으며 뇌출혈로 인하여 반신불수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일생을 통해서 역경을 뚫고 끊임없이 불후의 명작을 썼습니다. 명곡을 썼습니다. 그의 작품마다 그 첫머리에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라고 쓰고 작품마다 마무리에는 "오직 여호와 하나님께 영광"이라고 썼습니다. 이 사람이 바로 요한 세바스찬 바하입니다.
이러한 고백으로 바하음악은 교회음악이 되었습니다. 바하를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바하의 곡을 듣지 않은 사람도 없습니다. 그 영광이 넘치는 바하를 알지만은 바하가 한평생 이렇게 모진 고생을 했다는 것은 알기가 어렵습니다. 그는 고난 속에서 주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 모진 고난 속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감동적인 것입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인은 고난의 의미를 압니다. 그 속에 있는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을 압니다. 고난 속에서 새롭게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하면서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고, 높은 곳으로 점점 성숙해 가는 것입니다.
고전10:31"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고난속에서 영생을 보고.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의 축복을 보고 주님의 영광을 보면서 주를 따르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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