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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려주일]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받으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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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4월이 되었습니다. T. S. 엘리어트(Thomas Stearns Eliot, 1888~1965)는 황무지(The Waste Land)라는 장시(長詩) 1편 “죽은 자의 매장(The Burial of the Dead)“ 에서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4월은 가장 잔인한 달 / April is the cruelest month, breeding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 내고 / Lilacs out of the dead land, mixing
추억과 욕정을 뒤섞고 / Memory and desire, stirring
잠든 뿌리를 봄비로 깨운다. / Dull roots with spring rain.
겨울이 차라리 따스했었나니 / Winter kept us warm, covering
망각의 눈으로 대지를 덮고 / Earth in forgetful snow, feeding
마른 구근(球根)으로 작은 목숨을 대어 주었다. / A little life with dried tubers.
또 우리 나라의 모윤숙(毛允淑, 1909~1990) 시인은4월의 본능이라는 수필에서 4월을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4월은 부활의 달이다. 자유가 꽃잎술을 내미는 매혹의 아침이요,
수줍은 꿈이 터지는 젊음의 아침이다. 천만 풀이 머리를 들고
만개의 꽃부리가 물을 채워 생명의 개가를 부른다.
4월은 인생의 아가씨요, 신(神)의 피리로 이루어지는 사랑의 서곡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4월은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도 4월이고, 부활하신 것도 4월입니다. 해마다 우리는 고난주간과 부활주일을 맞이하면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의미를 새롭게 새겨 보아야 합니다. 십자가와 부활이야말로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의 요약(要約)일 뿐만 아니라,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끊임없이 자신들의 삶을 점검해 보아야 하는 잣대이기도 합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받으심으로 세계 역사가 달라졌고, 인류의 역사가 달라졌습니다. “만약(if)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 없었더라면” 이런 생각을 해 보셨습니까 바울도 그런 생각을 해 보았던 모양입니다. 그가 쓴 고린도전서 15장에 보면 그런 말씀이 나오지요 “만일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으면(13절)” “만일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14절)” “(만일)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을 없으면(17절)”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은 십자가에서 끝나지 않고 부활로 이어졌습니다. 바울은 감격적인 목소리로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우리가 전한 것도 헛된 것이요, 여러분의 믿음도 헛된 것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14절). ”
오늘 본문 말씀은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가 A. D. 64년 경에 로마에서 기록한 것입니다. 그 때는 네로 황제에 의해 기독교에 대한 박해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던 해였습니다. 베드로는 이 편지를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져 나그네 생활을 하고 있는(베드로전서 1:1)” 디아스포라(diaspora) 형제들에게 썼습니다. 아이로닉 하게도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강력하게 부인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 말씀이 마가복음 8:33에 나옵니다. 예수님은 자기 제자들에게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하리라. ”고 분명하게(plainly) 가르치셨습니다. 성경에는 이 말을 듣고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했다”고 했습니다만, N4 영어 성경에는 “Peter took him aside and began to rebuke him. ”이라고 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따로 데리고 가서 비난했다(rebuke)는 것입니다. 이 때 예수님도 베드로를 “rebuke” 했습니다.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여호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구나(You do not have in mind the things of God, but the things of men. )!” 이 말씀을 하시고 남기신 유명한 말씀이 있지요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34-35절). ”
어쩌면 베드로에게는 끝내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의 의미가 깨달아지지 않았는지 모릅니다. 그건 베드로 뿐만 아니고 다른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잡혔을 때 제자들은 모두 도망가지 않았습니까 베드로는 예수님을 3번이나 모른다고 부인(否認)했고요.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3년 동안이나 따라다니면서 직접 말씀을 듣고, 예수님께서 하시는 모든 것을 옆에서 목격했던 제자들에게도 십자가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이 그렇게 말했습니다.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이요, 여호와 하나님의 지혜니라(To those whom God has called, both Jews and Greeks, Christ the power of God and the wisdom of God. , 고린도전서 1:24)” 라고 했습니다. 십자가는 여호와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사람의 지혜로, 세상의 지혜를 가지고는 결코 이해할 수 없습니다. 나중에 성령께서 제자들을 깨닫게 해 주실 때, 그들의 눈을 열어 주실 때, 그들의 마음을 뜨겁게 해 주실 때, 제자들은 십자가의 의미를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그렇지 않은가요 왜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셔야 했는지, 그의 십자가의 죽음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지, 속 시원하게 깨닫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계속 화제가 되고 있는 영화그리스도의 수난(The Passion of the Christ)을 본 사람들의 반응이 엇갈립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말합니다. “그 영화에서 왜 예수라는 사람이 그렇게 맞아야 했는지 모르겠다. ” 또 어떤 사람은 이런 평을 했습니다. “그 영화에서 예수의 육체적인 아픔은 지나칠 정도로 잘 그려냈지만, 그가 느꼈을 고뇌와 아픔은 잘 그려내지 못했다. ”
물론 한 영화를 통해서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기대하는 것을 만족시킬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 영화를 보고 난 후 우리는 한 정직한 질문 앞에 서게 됩니다. “예수는 왜 그렇게 맞아야 했는가 그의 고난은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성경은 일관되게 말합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며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이사야 53:5-6). ” 우리는 이미 배워서 잘 압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악 때문에, 우리의 허물 때문에 그런 고난을 당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고난 덕분에 우리는 모두 나음을 입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고난을 당하심으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살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잘 설명하지 못합니다. 왜 예수님께서 나의 죄 때문에 그런 고난을 받으셔야 했는지, 그리고 그가 십자가를 지심으로 어떻게 나의 죄가 용서를 받게 되었는지 우리는 잘 설명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엄연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여호와 하나님의 지혜로 말미암은 것이기 때문에, 우리의 지혜로 깨닫지 못하는 것 뿐입니다.
바울이 고린도전서 2:9-10, 12에 있는 말씀을 알고 계십니까 “주님과 같으신 신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듣지도 못하였습니다. 구원해 달라고 기다리는 모든 사람에게 그토록 엄청난 일을 행하는 것을 눈으로 본 일도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일을 알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우리에게 알려 주셨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여호와 하나님의 가장 깊은 비밀까지도 통찰하여 우리에게 알려 주십니다……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의 영이 아닌 여호와 하나님의 영을 우리에게 주셔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값없이 우리에게 주신 놀라운 은혜의 선물을 알게 하셨습니다. ”
로마 정부로부터의 갑작스런 박해로 카타콤, 지하 교회로 들어간 형제들에게 베드로가 쓴 격려와 위로와 소망의 편지 속에는 뜻 밖에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메시지가 들어 있습니다. 그는 환난과 박해를 받고 있는 형제들에게 들려 줄 유일한 최상의 메시지는 십자가의 메시지라고 생각했던 것이 분명합니다. 베드로 그는 과거에 얼마 전까지 예수님의 십자가를 부인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는 이제 십자가를 긍정(肯定)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십자가를 부인했던 사람이 십자가의 메시지를 전파하는 사도로 변화하게 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마음에 사람의 일(the things of men)만 생각하던 사람이 이제 여호와 하나님의 일(the things of God)을 생각하는 사람으로, 변화하게 된 이유는 무엇입니까
먼저 베드로가 부활의 주님을 만났다는 사실을 지적해야 합니다. 정확하게 말한다면 베드로가 부활의 주님을 만난 것이 아니라, 부활하신 주님이 베드로를 개인적으로(personally) 만나 주신 것입니다. 그것도 사람들 앞에서 그를 3번씩이나 부인한 사람을 만나 주신 것입니다. 베드로의 마음에 예수님께 대한 사랑을 회복 시켜 주시고, “내 양을 먹이라”는 생의 사명(使命)을 주셨습니다.
또 하나는 베드로가 성령을 체험했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합니다. 한 곳에 모였던 제자들이 모두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을 때(When the disciples were filled with the Holy Spirit), 베드로도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성령 충만함을 받은 베드로가 사람들 앞에 나가서 설교했을 때, 그 설교의 중심 메시지는 놀랍게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었습니다(사도행전 2:22-24). ”
오늘 말씀에서 베드로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셨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셨다는 이 사실 때문에(because Christ suffered for us)” 오늘 우리들이 당하는 고난에는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그리스도인들이 받고 있는 환난과 박해와 핍박,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빛에서 이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두려움도 아니고 생의 위기(危機)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그리스도인들이 당하고 있는 상황(狀況)은 낙심하거나 절망할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그가 말하고 있는 십자가의 메시지는 무엇입니까 그는 예수 그리스도는 고난을 받으심으로 우리에게 본(example)을 남기셨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가 걸으셨던 발자취대로(in his steps) 그가 남기신 본을 따라야 한다고 합니다.
이 말씀이 오늘 여러분에게 어떤 도전(挑戰)을 줍니까 우리는 뭔가 근본적으로 잘못 알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가 고난의 생애였다면, 그분의 발자취를 따라 사는 우리들의 삶도 고난의 삶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고난이 아니라 편안함과 안락한 삶을 찾고 있습니다. 주님은 일찍이 제자가 되겠다는 사람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누가복음 9:58). ”
전부 그런 식입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겠다는 사람들마저도 재자됨(discipleship)의 의미를 모릅니다. 마치 자격증을 여러 개 가지고 있는 사람이 discipleship이라는 자격증을 하나 더 얻는 것처럼 그렇게 생각합니다. 부자 청년이 그렇지 않았습니까 많은 돈과, 지위와, 성경 교육과, 이 위에 예수님을 통해서 영생(永生)을 소유하고 싶었습니다. 전부 이런 식입니다. 제가 사순절 새벽 기도 때 말하지 않았습니까 좋은 집 사고, 좋은 차 사고, 자녀 교육 잘 시키고, 비지네스 잘 되고, 남편은 교회 장로이고, 부인은 권사이고, 더 바랄 것이 없습니다. 전부 이런 식이라면, 과연 이 땅에 참 그리스도의 제자는 얼마나 되는 것입니까
어떤 엉터리 같은 사람이 이런 식으로 가리켰는지, 처음부터 어떤 엉터리 같은 사람에게서 이런 식으로 배웠는지, 도무지 고쳐지지 않습니다. 전 자신 있게 말합니다. 저는 이런 식으로 성경을 가리킨 적이 없습니다. 도대체 누구에게서 이런 식으로 배웠습니까
사람은 누구나 편안함과 안락함을 좋아합니다. 이것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편안함과 안락함을 좋아합니다. 편안과 안락함은 세상적인 가치(價値)의 가장 큰 특징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리스도인들마저도 편안함과 안락함을 추구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큰 문제는 이것을 여호와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예수 믿고 축복을 받은 사람은 모두 그렇게 되는 것을 아는 것이 문제입니다. 도대체 그런 생각을 가지고 이 고난주간을 어떻게 무슨 생각을 하면서 보낼 수 있습니까 도대체 그런 생각을 하면서 예수님의 십자가의 의미를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습니까 제가 성경 말씀 하나 읽어 드릴까요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내 생활을 본받으십시오. 그리고 나를 본받아 사는 사람들을 눈 여겨 보십시오. 내가 이처럼 전에도 여러 번 당부한 일을 지금 다시 눈물로 호소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이라 내세우면서도 실제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as enemies of the cross of Christ)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는 영원한 멸망이 기다릴 뿐입니다. 그들은 욕망을 여호와 하나님처럼 섬기고 수치스러운 것을 대단한 것인 양 자랑하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오직 이 세상 일에만 마음을 씁니다(빌립보서 3:17-19). ”
우리는 이 고난주간에 자신의 삶을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한 주간 내내 자신의 삶을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자동차도 제 때 점검을 해 주면 문제 없이 오래 탈 수 있습니다. 우리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나는 그리스도의 본을 따라서 그분의 발자취를 따르고 있는가 “ “지금 나의 삶 속에 예수 그리스도가 받으신 그런 고난이 있는가” “나는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서 사실은 십자가를 거부하고 있지 않는가”
그리스도의 본을 따라 그분의 발자취를 따라 사는 사람들은 구별된(distinguished)삶을 삽니다. 억울한 일을 당해도 문제 삼지 않습니다. 억울한 일이란 자기가 이유 없이 받는 불이익을 말합니다. 그런 억울한 일을 당하고 가만 있을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 주님은 그런 억울한 일을 당하고도 그대로 당하셨습니다. 그리고 선한 일을 하다가 오해를 받고 해도 그것도 문제 삼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주님이 그렇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내가 싸워서 내 권리를 찾기 보다는 공의(公義)로 판단하시는 여호와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깁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본을 따라 사는 사람은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삽니다. 죄의 유혹에 대하여 반응도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의로운 일이라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친히 십자가 위에서 담당하셨기 때문입니다.
또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본을 따라 사는 사람은 영혼의 목자(Overseer of souls)를 모시고 삽니다. 죄 없으신 주님께서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와 깊은 교제를 나누셨던 것처럼, 그리스도의 본을 따라서 사는 사람은 여호와 하나님을 목자로 삼고 삽니다. 그의 생애 기쁨이 있다면 그것은 영혼의 목자이신 여호와 하나님께 순종했을 때입니다. 그의 생에 목적이 있다면 그것은 그의 영혼의 목자이신 그분의 뜻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의 생에 행복이 있다면 그의 영혼의 목자 되시는 그분의 인도와 보호 속에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 잘 들으십시오. A. D. 64년경에 베드로가 이 편지를 썼을 때, 베드로의 마음 속에는 선명한 그리스도인에 대한 이미지가 있었습니다. 그리스도를 본으로 삼고 그의 발자취를 따라 사는 사람은 이렇다고 하는 선명한 이미지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2000년이 지난 후 그 이미지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 이미지가 얼마나 왜곡되었습니까 여러분 자신과 베드로가 그렸던 그리스도인의 이미지를 비교해 보십시오.
베드로가 그렸던 선명한 그리스도인의 이미지대로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면 대번에 구별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우리 시대의 그리스도인의 정체성(正體性, identity)은 애매모호합니다. 도대체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사람들인지, 무엇을 하는 사람들인지 혼란스럽습니다. 목사의 정체성은 더 혼란스럽습니다. 도대체 목사는 어떤 사람입니까 무슨 일을 하는 사람입니까 혼란스럽습니다. 내일부터 시작되는 고난주간이 우리에게 조금이나마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을 회복하는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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