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려주일] 도마의 의심과 고난의 흔적
본문
오늘 본문은 제자 중의 한 사람인 도마가 예수님의 부활을 끝까지 믿지 않고 있다가 부활하신 주님이 그를 만나주시고 손과 옆구리의 상처를 보여주시고 나서야 비로소 '나의 주 나의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는 것을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불명예스럽게도 이 사건 이후로 도마의 별명은 '의심많은 도마'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러나 가만히 보면 도마는 바로 우리 주위에서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유형의 사람들임을 알수 있습니다. 그는 아주 현실적이고 실증적인 사람입니다. 눈에 보이는 확실한 증거를 굉장히 중요시하는 사람입니다. 논리적이고 합리적으로 자신에게 납득이 되지 않으면 일단은 한번 회의해 보는 사람입니다. 시대가 발전하고 복잡해질수록 우리는 사람들에게 도마와 같이 이런 현실적이고 실증적인 경향들을 더 많이 보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현대인들 중에 가장 많은 부류의 사람들이 바로 도마와 같은 사람이라고 해도 별로 틀린 말이 아닐 것입니다.
본문을 보면 도마는 부활하신 주님이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있던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평강을 주시면서 사명을 주셨던 그 자리에 있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24절을 보십시오. "열두 제자 중에 하나인 디두모라 하는 도마는 예수 오셨을 때에 함께 있지 아니한지라. " 그렇다면 왜 도마는 제자들이 주님이 부활하셨다는 소리를 듣고 처음으로 함께 모인 그 자리에 없었을까요
우리는 도마가 거기에 없었던 이유를 단순히 도마에게는 연락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도마에게는 좀 독특한 부분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14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떠나 하늘에 처소를 예비하러 가신다고 하셨을 때 유일하게 도마가 주님이 도대체 어디로 떠나시며 어디로 가시는지 그 장소를 정확하게 알려달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주님이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는데 그 길을 어떻게 알겠습니까'라고 말입니다. 이 질문에 예수님이 그 유명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는 답변을 하시는데, 우리는 여기서 도마의 질문을 통하여 도마가 어떤 사람인지 대강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는 주님이 어디로 가시는지 정확하고도 분명하게 가르쳐주지 않으면 그 길을 따라갈 수 없으며 또한 그 길을 모르는 체로는 아무리 주님이 말씀했다 하더라도 그 말씀을 잘 받아들일 수 없다는 태도를 보이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도마는 아주 현실적인 사람입니다. 어떤 것이 확인되고 검증되지 않으면 믿을 수 없는 신중하고도 실증적인 사람입니다.
이것을 볼 때 처음 제자들이 함께 모인 그 자리에 도마가 없었던 것은 그가 연락을 받지 않아서 그 모임에 못간 것이 아닙니다. 그는 못간 것이 아니라 안 갔습니다. 도마는 예수님의 부활의 소식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실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안 갔다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한 해석입니다.
보통 이런 사람들은 초자연적인 세계에 대해서 잘 믿지 못합니다. 다른 제자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보았다고 했을 때 그가 무엇이라고 합니까 25절을 보십시오. "내가 그 손의 못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이 말을 볼 때 이런 부류의 사람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마음에 받아들이고 믿기에는 많은 장애물들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런 사람일수록 혼자 내버려두지 말고 먼저 부활의 주님을 만난 사람들이 강권하여서 자꾸 주님을 만날 수 있도록 함께 모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도마 같은 사람이 혼자 부활이라는 엄청난 사실을 받아들이기에는 너무나 많은 장애물과 걸림돌이 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서든 제자들은 의심하는 그를 강권하여서 일주일 전에 부활하신 주님이 나타나셨던 그 자리에 데려왔던 것입니다. 26절을 보십시오.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었고.. " 일주일 전에는 없었던 도마가 이번에는 다른 제자들과 함께 있습니다. 그 이유는 먼저 부활의 주님을 만난 제자들이 어떻게 해서든 부활하신 주님이 나타났던 그 장소에 강권하여 도마를 오게 했던 것입니다.
제자들은 의심하는 도마를 공격하거나 비난하지 않았습니다. 그를 설득하기 위하여 무진 애를 쓰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이 한 것은 다시 일주일을 기다리고, 그리고 나서 그를 강권하여 함께 모인 것입니다. 그들은 도마를 팽개치지 않았습니다. 도마가 주님의 부활을 믿는 것은 그들이 아무리 설명해도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이것은 주님이 직접 찾아오셔서 그의 불신을 제거하시고 그에게 확신을 주시지 않고는 해결될 수 없는 문제임을 그들은 알았습니다.
저는 강권하여서 도마를 부활하신 주님이 나타나셨던 자리에 동참시켜 놓은 제자들이 그냥 있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아마도 제자들은 이런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주님 지난 번에 두려움 가운데 빠져 있던 우리들에게 찾아오셨지 않습니까. 그리고 평강을 주시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그 때는 우리 중에 한 명이 빠져있었습니다. 그 때 주님의 부활의 소식을 믿지 못한 도마는 이 자리에 오지 않았고 그는 주님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아직도 도마는 주님의 부활을 믿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도저히 도마 이 사람을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에게 주님이 찾아오셔서 우리의 두려움과 의심과 불안을 평강으로 변화시켜 주셨던 것처럼 오늘 다시 우리 가운데 오셔서 그의 모든 의심을 제하시고 그에게 우리와 같은 믿음을 주시기를 바랍니다. '
주님은 이런 제자들의 아름다운 모임 가운데 다시 찾아오셨습니다. 26절을 다시 보십시오.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 지어다 하시고" 주님은 제자들을 찾아오셨습니다. 지난 번에 오셨던 것과 똑같이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여전히 그들에게 평강을 전하십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 지어다"
사실 지난 번에 주님이 평강을 주실 때에는 제자들이 그들 자신의 문제와 미래의 불안 때문에 두려워하고 불안해하는 상태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 주님이 평강을 주신다고 하는 이유는 그런 이유가 아닙니다. 지금 제자들에게는 한 사람의 불신 때문에 서로 하나되지 못한 가운데 일어나는 불안과 갈등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다른 제자들은 주님의 부활을 믿었지만, 한 명이 믿지 않고 있기 때문에 생기는 갈등과 긴장이었습니다.
오늘 제자들은 이런 그들의 갈등과 긴장의 문제를 주님께서 다시 오셔서 해결해주실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모였습니다. 이것이 도마가 함께 모인 두 번째 모임의 특징이었습니다. 그들은 혹시 주님이 또 자기들을 찾아오셔서 의심하는 도마에게 믿음을 주시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가지고 모였습니다.
우리의 본질이 바로 이것입니다. 사람이 모인 공동체의 문제는 바로 이런 여러 가지의 갈등입니다. 사람들이 모인 곳에는 항상 갈등과 불안과 긴장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모임 가운데 평강의 주님이 나타나시고 임재해 주시길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이 우리와 함께 계셔야만 모든 갈등과 긴장이 없어지고 우리 마음에 기쁨과 평강이 충만해 질 수 있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이런 실수를 자주 범합니다. 어떤 때에는 나와 같지 않는 믿음을 가진 사람을 내 힘으로 믿게 하려고 무진 애를 씁니다. 그리고 어떤 때에는 아예 그를 포기해버려서 우리들의 모임 안에 데리고 오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이 사람은 안돼'라는 식으로 단정해버립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 안에도 이런 기대가 있어야 합니다. 주님 앞에 모일 때, 우리는 아무런 생각 없이 아무런 기대 없이 모여서는 안됩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기대와 소망이 있어야 합니다. 모든 모임에는 주님의 임재와 그의 역사하심을 사모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 안에 주의 일을 행하여 주옵소서. 우리들을 변화시켜 주옵소서. 우리에게 믿음과 평강과 사명을 주옵소서. "
"주님, 이 형제는 주님 앞에 함께 나왔지만 실제로는 억지로 나온 것입니다. 이 형제는 아직 주님의 살아계심을 믿지 않고 있습니다. 주님 오셔서 이 형제에게 믿음을 주시고 우리 모두가 믿음으로 하나되게 하옵소서"
"주님, 이 자매는 병들어서 온전치 못합니다. 질병이 그를 침체시키고 있습니다. 이 자매의 질병으로 우리 안에는 같은 아픔과 고통이 있습니다. 주님, 오셔서 우리의 고통을 기쁨으로 바꾸어 주소서"
우리는 적어도 지체들을 위한 이런 의식을 가지고 예배를 드리고 모임을 가져야 합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제자들이 주님이 그들의 모임 가운데 오셔서 역사하는 것을 기대하며 도마를 강권하여 그 자리에 있게 했던 것을 기억하며 이런 사랑과 이런 소망이 충만하기를 주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부활하신 주님께서 어떤 식으로 도마에게 믿음을 주고 있는지를 주목해야 합니다. 27절입니다.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
주님께서 도마에게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도마가 한말 그대로였습니다. 마치 주님이 바로 도마 옆에서 그가 한 말을 다 듣고 계셨던 것처럼 도마의 말을 그대로 하고 계십니다. 도마가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그가 어디서 무슨 생각을 했으며 어떤 말을 했는가를 주님은 다 알고 계셨습니다. 주님은 도마가 한 말을 한 마디도 빼놓지 않고 그대로 하시면서 도마에게 손가락으로 주님의 상처를 만져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는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사실 도마가 주님의 손과 옆구리를 보여 달라고 한 것은 특별한 의도를 가지고 한 말이 아니라 단순히 그냥 자기 눈앞에서 손과 발에 못이 박히고 옆구리를 창에 찔리시면서 죽어간 예수님을 보았기 때문에 그렇게 죽었던 예수님인 것을 확인하기 위해 한 말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도마의 이 말을 사용해서 예수님이 당하신 고난의 흔적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상기시키시고 바로 그 고난의 흔적을 확인시킴으로 도마에게 믿음을 주고 계십니다.
이 사실은 오늘 고난주간을 맞이하는 우리에게 매우 중요하고도 특별한 의미를 부여합니다. 주님이 도마의 말을 그대로 반복하시면서 못자국 난 손과 창에 찔린 옆구리의 상처를 보이시며 만져보라고 말씀하실 때, 그리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하실 때, 도마는 성령의 은혜로 그 손의 상처와 옆구리의 상처가 누구 때문에 입은 상처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주님은 도마에게 그렇게 믿음을 주고 계셨습니다. 성령을 통하여 주님의 고난의 흔적이 어떤 의미의 흔적인가를 알게 하셨습니다.
도마는 주님의 몸에 난 고난의 흔적, 그 고통의 흔적을 보면서 고난 당해야 할 이유가 없는 분, 손과 발에 못을 박혀야 할 이유가 없는 분, 옆구리에 창을 맞고 병정들에게 끌려다니면서 조롱과 침뱉음을 받아야 할 이유가 없는 분이 바로 자신을 위해 그렇게 찔리고 고난당하시고 죽어야 했던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도마는 지금 성령의 은혜로 이 놀라운 구속의 은혜를 깨닫고 있습니다. 그는 지금 주님의 죽으심과 고난의 신비를 깨닫고 있습니다. 논리와 합리로 똘똘 뭉친 사람이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로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구원의 비밀을 알게 됩니다. 무엇을 통해서요 주님의 몸에 있는 뚜렷한 고난의 흔적을 보면서 말입니다.
도마가 지금 보고 있는 예수님의 고난 당하신 흔적, 그 아픔의 흔적, 못자국난 상처, 그보다 더 예수님의 그리스도 되심의 확실한 증거는 없었습니다. 이보다 더 분명한 부활의 증거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외칩니다. 28절입니다. "도마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주시며 나의 여호와 하나님이시니이다" 이 말은 서술형이 아니라 감탄형입니다. 다시 말하면 "아! 나의 주님, 나의 여호와 하나님!!" 그런 뜻입니다. 도마는 비로소 자기 앞에 고난의 흔적을 지닌 예수님이 바로 자신의 주님이며 여호와 하나님인 것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예수님! 예수님의 죽음은 나의 죄 때문이군요.... 예수님의 그 고난은 바로 나를 위한 고난이었군요. 그리고 나를 위해 부활하시고 믿음 없는 나를 위해 이렇게 고난의 흔적을 보여주시고 있군요.. 예수님 당신은 나의 주 나의 여호와 하나님입니다. 나의 구세주요 나의 모든 것이요 나의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본문을 보면 도마는 부활하신 주님이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있던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평강을 주시면서 사명을 주셨던 그 자리에 있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24절을 보십시오. "열두 제자 중에 하나인 디두모라 하는 도마는 예수 오셨을 때에 함께 있지 아니한지라. " 그렇다면 왜 도마는 제자들이 주님이 부활하셨다는 소리를 듣고 처음으로 함께 모인 그 자리에 없었을까요
우리는 도마가 거기에 없었던 이유를 단순히 도마에게는 연락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도마에게는 좀 독특한 부분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14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떠나 하늘에 처소를 예비하러 가신다고 하셨을 때 유일하게 도마가 주님이 도대체 어디로 떠나시며 어디로 가시는지 그 장소를 정확하게 알려달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주님이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는데 그 길을 어떻게 알겠습니까'라고 말입니다. 이 질문에 예수님이 그 유명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는 답변을 하시는데, 우리는 여기서 도마의 질문을 통하여 도마가 어떤 사람인지 대강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는 주님이 어디로 가시는지 정확하고도 분명하게 가르쳐주지 않으면 그 길을 따라갈 수 없으며 또한 그 길을 모르는 체로는 아무리 주님이 말씀했다 하더라도 그 말씀을 잘 받아들일 수 없다는 태도를 보이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도마는 아주 현실적인 사람입니다. 어떤 것이 확인되고 검증되지 않으면 믿을 수 없는 신중하고도 실증적인 사람입니다.
이것을 볼 때 처음 제자들이 함께 모인 그 자리에 도마가 없었던 것은 그가 연락을 받지 않아서 그 모임에 못간 것이 아닙니다. 그는 못간 것이 아니라 안 갔습니다. 도마는 예수님의 부활의 소식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실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안 갔다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한 해석입니다.
보통 이런 사람들은 초자연적인 세계에 대해서 잘 믿지 못합니다. 다른 제자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보았다고 했을 때 그가 무엇이라고 합니까 25절을 보십시오. "내가 그 손의 못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이 말을 볼 때 이런 부류의 사람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마음에 받아들이고 믿기에는 많은 장애물들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런 사람일수록 혼자 내버려두지 말고 먼저 부활의 주님을 만난 사람들이 강권하여서 자꾸 주님을 만날 수 있도록 함께 모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도마 같은 사람이 혼자 부활이라는 엄청난 사실을 받아들이기에는 너무나 많은 장애물과 걸림돌이 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서든 제자들은 의심하는 그를 강권하여서 일주일 전에 부활하신 주님이 나타나셨던 그 자리에 데려왔던 것입니다. 26절을 보십시오.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었고.. " 일주일 전에는 없었던 도마가 이번에는 다른 제자들과 함께 있습니다. 그 이유는 먼저 부활의 주님을 만난 제자들이 어떻게 해서든 부활하신 주님이 나타났던 그 장소에 강권하여 도마를 오게 했던 것입니다.
제자들은 의심하는 도마를 공격하거나 비난하지 않았습니다. 그를 설득하기 위하여 무진 애를 쓰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이 한 것은 다시 일주일을 기다리고, 그리고 나서 그를 강권하여 함께 모인 것입니다. 그들은 도마를 팽개치지 않았습니다. 도마가 주님의 부활을 믿는 것은 그들이 아무리 설명해도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이것은 주님이 직접 찾아오셔서 그의 불신을 제거하시고 그에게 확신을 주시지 않고는 해결될 수 없는 문제임을 그들은 알았습니다.
저는 강권하여서 도마를 부활하신 주님이 나타나셨던 자리에 동참시켜 놓은 제자들이 그냥 있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아마도 제자들은 이런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주님 지난 번에 두려움 가운데 빠져 있던 우리들에게 찾아오셨지 않습니까. 그리고 평강을 주시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그 때는 우리 중에 한 명이 빠져있었습니다. 그 때 주님의 부활의 소식을 믿지 못한 도마는 이 자리에 오지 않았고 그는 주님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아직도 도마는 주님의 부활을 믿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도저히 도마 이 사람을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에게 주님이 찾아오셔서 우리의 두려움과 의심과 불안을 평강으로 변화시켜 주셨던 것처럼 오늘 다시 우리 가운데 오셔서 그의 모든 의심을 제하시고 그에게 우리와 같은 믿음을 주시기를 바랍니다. '
주님은 이런 제자들의 아름다운 모임 가운데 다시 찾아오셨습니다. 26절을 다시 보십시오.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 지어다 하시고" 주님은 제자들을 찾아오셨습니다. 지난 번에 오셨던 것과 똑같이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여전히 그들에게 평강을 전하십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 지어다"
사실 지난 번에 주님이 평강을 주실 때에는 제자들이 그들 자신의 문제와 미래의 불안 때문에 두려워하고 불안해하는 상태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 주님이 평강을 주신다고 하는 이유는 그런 이유가 아닙니다. 지금 제자들에게는 한 사람의 불신 때문에 서로 하나되지 못한 가운데 일어나는 불안과 갈등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다른 제자들은 주님의 부활을 믿었지만, 한 명이 믿지 않고 있기 때문에 생기는 갈등과 긴장이었습니다.
오늘 제자들은 이런 그들의 갈등과 긴장의 문제를 주님께서 다시 오셔서 해결해주실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모였습니다. 이것이 도마가 함께 모인 두 번째 모임의 특징이었습니다. 그들은 혹시 주님이 또 자기들을 찾아오셔서 의심하는 도마에게 믿음을 주시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가지고 모였습니다.
우리의 본질이 바로 이것입니다. 사람이 모인 공동체의 문제는 바로 이런 여러 가지의 갈등입니다. 사람들이 모인 곳에는 항상 갈등과 불안과 긴장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모임 가운데 평강의 주님이 나타나시고 임재해 주시길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이 우리와 함께 계셔야만 모든 갈등과 긴장이 없어지고 우리 마음에 기쁨과 평강이 충만해 질 수 있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이런 실수를 자주 범합니다. 어떤 때에는 나와 같지 않는 믿음을 가진 사람을 내 힘으로 믿게 하려고 무진 애를 씁니다. 그리고 어떤 때에는 아예 그를 포기해버려서 우리들의 모임 안에 데리고 오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이 사람은 안돼'라는 식으로 단정해버립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 안에도 이런 기대가 있어야 합니다. 주님 앞에 모일 때, 우리는 아무런 생각 없이 아무런 기대 없이 모여서는 안됩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기대와 소망이 있어야 합니다. 모든 모임에는 주님의 임재와 그의 역사하심을 사모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 안에 주의 일을 행하여 주옵소서. 우리들을 변화시켜 주옵소서. 우리에게 믿음과 평강과 사명을 주옵소서. "
"주님, 이 형제는 주님 앞에 함께 나왔지만 실제로는 억지로 나온 것입니다. 이 형제는 아직 주님의 살아계심을 믿지 않고 있습니다. 주님 오셔서 이 형제에게 믿음을 주시고 우리 모두가 믿음으로 하나되게 하옵소서"
"주님, 이 자매는 병들어서 온전치 못합니다. 질병이 그를 침체시키고 있습니다. 이 자매의 질병으로 우리 안에는 같은 아픔과 고통이 있습니다. 주님, 오셔서 우리의 고통을 기쁨으로 바꾸어 주소서"
우리는 적어도 지체들을 위한 이런 의식을 가지고 예배를 드리고 모임을 가져야 합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제자들이 주님이 그들의 모임 가운데 오셔서 역사하는 것을 기대하며 도마를 강권하여 그 자리에 있게 했던 것을 기억하며 이런 사랑과 이런 소망이 충만하기를 주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부활하신 주님께서 어떤 식으로 도마에게 믿음을 주고 있는지를 주목해야 합니다. 27절입니다.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
주님께서 도마에게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도마가 한말 그대로였습니다. 마치 주님이 바로 도마 옆에서 그가 한 말을 다 듣고 계셨던 것처럼 도마의 말을 그대로 하고 계십니다. 도마가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그가 어디서 무슨 생각을 했으며 어떤 말을 했는가를 주님은 다 알고 계셨습니다. 주님은 도마가 한 말을 한 마디도 빼놓지 않고 그대로 하시면서 도마에게 손가락으로 주님의 상처를 만져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는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사실 도마가 주님의 손과 옆구리를 보여 달라고 한 것은 특별한 의도를 가지고 한 말이 아니라 단순히 그냥 자기 눈앞에서 손과 발에 못이 박히고 옆구리를 창에 찔리시면서 죽어간 예수님을 보았기 때문에 그렇게 죽었던 예수님인 것을 확인하기 위해 한 말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도마의 이 말을 사용해서 예수님이 당하신 고난의 흔적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상기시키시고 바로 그 고난의 흔적을 확인시킴으로 도마에게 믿음을 주고 계십니다.
이 사실은 오늘 고난주간을 맞이하는 우리에게 매우 중요하고도 특별한 의미를 부여합니다. 주님이 도마의 말을 그대로 반복하시면서 못자국 난 손과 창에 찔린 옆구리의 상처를 보이시며 만져보라고 말씀하실 때, 그리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하실 때, 도마는 성령의 은혜로 그 손의 상처와 옆구리의 상처가 누구 때문에 입은 상처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주님은 도마에게 그렇게 믿음을 주고 계셨습니다. 성령을 통하여 주님의 고난의 흔적이 어떤 의미의 흔적인가를 알게 하셨습니다.
도마는 주님의 몸에 난 고난의 흔적, 그 고통의 흔적을 보면서 고난 당해야 할 이유가 없는 분, 손과 발에 못을 박혀야 할 이유가 없는 분, 옆구리에 창을 맞고 병정들에게 끌려다니면서 조롱과 침뱉음을 받아야 할 이유가 없는 분이 바로 자신을 위해 그렇게 찔리고 고난당하시고 죽어야 했던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도마는 지금 성령의 은혜로 이 놀라운 구속의 은혜를 깨닫고 있습니다. 그는 지금 주님의 죽으심과 고난의 신비를 깨닫고 있습니다. 논리와 합리로 똘똘 뭉친 사람이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로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구원의 비밀을 알게 됩니다. 무엇을 통해서요 주님의 몸에 있는 뚜렷한 고난의 흔적을 보면서 말입니다.
도마가 지금 보고 있는 예수님의 고난 당하신 흔적, 그 아픔의 흔적, 못자국난 상처, 그보다 더 예수님의 그리스도 되심의 확실한 증거는 없었습니다. 이보다 더 분명한 부활의 증거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외칩니다. 28절입니다. "도마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주시며 나의 여호와 하나님이시니이다" 이 말은 서술형이 아니라 감탄형입니다. 다시 말하면 "아! 나의 주님, 나의 여호와 하나님!!" 그런 뜻입니다. 도마는 비로소 자기 앞에 고난의 흔적을 지닌 예수님이 바로 자신의 주님이며 여호와 하나님인 것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예수님! 예수님의 죽음은 나의 죄 때문이군요.... 예수님의 그 고난은 바로 나를 위한 고난이었군요. 그리고 나를 위해 부활하시고 믿음 없는 나를 위해 이렇게 고난의 흔적을 보여주시고 있군요.. 예수님 당신은 나의 주 나의 여호와 하나님입니다. 나의 구세주요 나의 모든 것이요 나의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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