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려주일] 고난의 잔
본문
마틴 루터 킹 목사는 그가 가장 고통스러운 시절에 이런 글을 썼습니다. "나는 지난 몇 년 동안에 편안한 날을 별로 못 가졌다. 알라바마 감옥에 다섯 번 투옥되었 다. 내 집이 두 번 폭파되었다. 나와 내 가족을 죽이겠다는 위협을 거의 며칠에 한 번씩 받 아왔다. 나는 칼에 찔려 거의 죽을 뻔하였다. 더 이상 이 무거운 짐을 지고 갈 수 있을지 정 직하게 말해서 나 자신 의심스럽다. 정말 조용하고 쉽게 살고 싶은 유혹을 시간마다 받는다. 그러나 이런 유혹을 받을 때마다 내가 힘을 얻고 굴하지 않는 원인은 우리 주님께서 너희가 나의 멍에를 메면 너희 짐이 가벼워질 것이라고 약속해 주신 말씀 때문이었다. 나는 나의 고통의 체험을 통하여 흑암이 얼마나 나에게 도움이 되는 가를 배웠다. 주님을 믿을 때 고 통은 오히려 창조적인 능력으로 변한다는 것을 여러 번 체험하였다. 나의 개인적인 불행은 나를 변화시키며 다른 사람들을 고쳐줄 수 있는 기회인 것이다. 사도 바울이 자랑스럽게 나 는 내 몸에 예수 그리스도의 흔적을 지닌다고 한 말을 실감있게 이해한다. " 여러분들에게도 이번 사순절 기간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영적 체험을 가지심으로 창조적인 능력이 충만하시고, 자신을 변화시키며 더 나아가 다른 사람들을 영육 간에 고쳐줄 수 있는 능력이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본문 1절, "(요18:1)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제자들과 함께 기드론 시내 저편으로 나가 시니 거기 동산이 있는데 제자들과 함께 들어가시다 (요18:2) 거기는 예수께서 제자들과 가 끔 모이시는 곳"은 겟세마네 동산을 말합니다.
예수께서는 십자가의 고난을 목전에 두고 가장 먼저 가지신 것은 바로 기도의 시간이었음 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본문을 통해 보면, 기도란 여호와 하나님과 마주 앉아 자신의 마음을 하나 님께 촛점을 맞추는 시간임을 알 수 있습니다. 기독교의 기도는 단지 자신의 소원과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수단이 아닌 것입니다. 그와 같은 기도는 차라리 주문(呪文)에 불과한 것입니 다.
기도는 여호와 하나님과 대면하여 여호와 하나님께 자신의 마음을 향하게 하는 것입니다. 하루 종일 자신 의 마음이 여호와 하나님과 촛점을 맞추고 있다면 그 사람은 쉬지 않고 기도하는 사람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기도하며 여호와 하나님 말씀을 명상하기도 하며 찬송을 부르기도 하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을 향하여 자신의 마음을 모으고 여호와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발견하고 확인하기 위한 좋은 방법이 되는 것입니다. 또한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찾아 확신한 후에는 그 길이 아무리 험하고 고통스러워 도 여호와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 바람직한 기도생활이며 신앙생활인 것입니다. 겟세마네 동산의 예수 그리스도의 기도에 대한 기사(記事)는 예수께서 자발적으로 고통의 길, 형극(荊棘)의 길을 선택하셨음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편한 길을 선택할 것인가 아니면 가시밭길을 택할 것인가 살아남을 것인가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을 택해야 할 것인가 타 협해서 무사하게 여생을 보낼 것인가 오욕과 수치가 기다리는 그 좁은 길을 선택할 것인 가 이러한 선택의 기로(岐路)에서 "고난의 잔"을 선택하신 것입니다. 본회퍼는 그의 옥중서한에서 예수님의 이러한 선택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을 하였 습니다.
"명령에 따라 고통을 받는 것은 자의로 고통받는 것보다 쉽다. 여럿이 함께 고통받는 것은 혼자 고통받는 것보다 쉽다. 육체적으로 고통받는 것은 정신적으로 고통받는 것보다 쉽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의(自意)로, 혼자서, 육체적 고통과 정신의 고통을 모두 선택하셨다. "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는 사람은, 여호와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 원하는 사람 은 고통의 선택이 얼마든지 가능한 것입니다.
본문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 당하시는 모습은 고뇌에 찬 처절한 고통보다는 오히 려 당당하고 의연하며 기쁨이 넘치기까지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요한 복음에서만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공관 복음서에서는 예수의 고난의 처절함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마26:36)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이르시 되 내가 저기 가서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 하시고 (마26:37) 베드로와 세 베대의 두 아들을 데리고 가실쌔 고민하고 슬퍼하사 (마26:38)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 " "(막14:32) 저희가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나의 기도 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았으라 하시고 (막14:33)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가실 쌔 심히 놀라시며 슬퍼하사 (막14:34)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깨어 있으라 하시고. " "(막15:34) 제 구시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지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를 번역하면 나의 여호와 하나님 나의 여호와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 "(눅22:39) 예수께서 나가사 습관을 좇아 감람산에 가시매 제자들도 좇았더니 (눅22:40) 그 곳에 이르러 저희에게 이르시되 시험에 들지 않기를 기도하라 하시고 (눅22:41) 저희를 떠 나 돌 던질 만큼 가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여 (눅22:42) 가라사대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 (눅22:43) 사자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돕더라 (눅22:44) 예수 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피방울 같이 되더라. " 요한 복음에서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을 당당하고 의연하게 묘사하고 있는 이유는 예수의 부활에 대한 확신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부활신앙이 확고부동하면 어떠한 십자가도 두려 워하지 않고 당당하고 의연하게 맞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의 수난을 자원하고 계시며 적극적으로 그 수난에 참여하고 계 시는데 이는 바로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가롯 유다가 자기를 팔 것을 알고 계시고 잡아가도록 유다가 잘 아는 곳으로 가셔서 기도하시고 내려 오셨던 것입 니다. "(요18:2) 거기는 예수께서 제자들과 가끔 모이시는 곳이므로 예수를 파는 유다도 그곳을 알더라 (요18:3) 유다가 군대와 및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서 얻은 하속들을 데리고 등과 홰와 병기를 가지고 그리로 오는지라 (요18:4) 예수께서 그 당할 일을 다 아시고 나아 가 가라사대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 (요18:5) 대답하되 나사렛 예수라 하거늘 가라사대 내로 라 하시니라 그를 파는 유다도 저희와 함께 섰더라. "
예수께서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을 능동적으로 맞이하실 수 있었던 것은 십자가를 좌절과 패배로 보신 것이 아니라 진리의 궁극적인 승리로 보셨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을 능동적으로 맞이하실 수 있었던 것은 사랑과 진리가 증오와 거짓보다 강하며 결국에는 이긴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죄와 악의 세력이 강한 것처럼 보이지만, 여호와 하나님이 그것보다 더 강하며 여호와 하나님이 결국 승리한다는 확신을 가지셨기 때문입니다. 저항 한번 해 보지 못하고 죄 없이 당하는 예수의 고난과 죽음 속에서 인간의 죄가 용서받으며 여호와 하나님 나라가 세워진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십자가의 길을 피하지 않고 그 길을 끝까지 걸어가신 것입니다.
사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은 십자가만이 아니었습니다. 그 분의 삶 전체가 고난의 삶이었 습니다. 그는 가난한 농부의 딸과 목수인 마리아와 요셉의 가정에 태어나 가난 속에서 자라 셨고 힘든 노동에 종사하셨습니다. 실망도 하고 울기도 하며, 배신도 겪으셨으며 버림을 받 기도 하고 심한 상처도 입으셨던 것입니다. 세상에 가장 고통스러운 십자가의 처형을 받으 실 때까지 그의 일생은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고난은 그 원인이 자신에 게 있었던 것이 전혀 아닙니다. 그는 얼마든지 십자가의 고통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모든 인류를 구원하시고자 하는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의 피할 수 없는 뜻이었기 때문에 그 길을 기쁨으 로, 의연하게 택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인(Christian)이란 예수의 고통에 초대받은 사람들인 것입니다. 기독교인의 삶은 예수님처럼 자발적으로 십자가의 고난을 선택하는 삶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고난 을 겪은 사람이 예수를 보다 더 깊이 잘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이사야 53장은 "고난받는 종 의 노래"입니다.
"(사53:1)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뇨 (사53:2)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사53:3)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 에게 싫어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 을 가리우고 보지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 였도다 (사53:4)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 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여호와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사53: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사53:6) 우리는 다 양 같아 서 그릇 행하며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 도다. "
3,4절을 보면, 예수께서 우리의 고통과 슬픔을 대신 짊어지기 위하여 고통을 선택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기독교인의 사명은 나라와 민족, 더 나아가 세계의 고통과 아픔, 그리고 모든 슬픔을 함께 나누고 대신 짊어지는 자발적인 자세가 요청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의 고통과 아픔을 바로 읽고, 그것을 바로 지기 위하여 십자가의 고난을 선택할 수 있어야 참된 기독교인이며 사명자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5절,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 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 는 말씀을 보면, 예수님의 치유하시는 방법이 치료약을 던져주시는 것이 아니라 그가 선택 한 그 고통 자체가 치료의 방법인 것이었습니다. 말만 가지고서는 선한 사마리아인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눅10:30)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 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눅10:31)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눅10:32) 또 이와 같이 한 레 위인도 그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눅10:33) 어떤 사마리아인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눅10:34)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고 (눅10:35) 이튿날에 데나 리온 둘을 내어 주막 주인에게 주며 가로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부비가 더 들면 내가 돌 아 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눅10:36) 네 의견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 의 이웃이 되겠느냐 (눅10:37) 가로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눅10:34)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 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고 (눅10:35) 이튿날에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막 주인에게 주며 가로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부비가 더 들면 내가 돌아 올 때에 갚으 리라... "고 말하며 그 강도만난 자의 형편과 처지에 동참하는 마음과 행함을 가진 '상처받은 치료자'만이 참된 치료자인 것입니다. 자신의 죄로 말미암아 맞는 채찍이 아니라 우리의 " 이웃"이 당하는 채찍을 자신의 채찍으로 삼게 될 때 "나음"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이웃과 나라 민족의 "나음"을 위해 예수님의 고난의 잔에 동참할 수 있는 성도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다음으로 고난의 잔에 참여하는 길은 순종의 종이 되는 것입니다. "(사53:10) 여호와께서 그로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케 하셨은즉 그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그 씨를 보게 되며 그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 호와의 뜻을 성취하리로다. " "(빌2:7)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빌2:8) 사람의 모양 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 아무리 십자가의 길이 험하고 고통스러워도 끝까지 순종하는 종의 길을 걷는 것이 사명자 의 길이며, 영광스런 승리의 삶이 되는 것입니다. 인도의 시인 타골(Tagore)의 체험담입니다. 어느 날 아침 종이 출근하지 않아 타골은 몹시 화가 났습니다. 종은 오후 2시에 와서 자기의 일을 묵묵히 하는 것이었습니다. "나가라! 너 같은 놈은 필요없다!"고 외치자 종은 조용히 말했습니다. "지난밤에 제 아들이 죽었습니다. " 그는 아들의 죽음과 주인의 분노를 다 짊어지고서도 하루의 책임을 완수했던 것입니다. "(사53:7)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 로 끌려가는 어린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 예수님의 이러한 삶의 자세를 배워 가는 사순절 기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세계에서 가장 높은 십자가 종탑은 시카고 템플교회에 있습니다. 어느 날 수많은 사람이 걸음을 멈추고 이 탑을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번화가 네거리에 이 탑이 있지만 그 동안 쳐 다보는 사람은 거의 없었던 것입니다. 이날 따라 주목거리가 된 것은 높은 탑의 십자가에 일군이 매달려 수리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빈 십자가는 관심밖에 있었으나 사람이 달 려 있을 때 그 십자가는 세상의 눈길을 모았던 것입니다. 잘못지고 있는 자신의 십자가를 이번 사순절 기간을 통해 바로 수리(修理)하기 위해 십자 가에 매달리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십자가에 바로 자기 자신이 달려 있지 아니하면 자신의 가정과 이웃, 그리고 나라 민족에 게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자신이 고난의 십자가에 달려 높이 들려 질 때 가정과 나 라 민족이 "나음"을 입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받으신 "십자가 고난의 잔"은 우리에게 "삶의 치유와 축복의 잔"이 되게 하셨 습니다. 오늘 받으시는 성찬예식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고난의 잔"에 동참하시므로 여러분 의 삶에 "치유와 축복의 잔"이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본문 1절, "(요18:1)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제자들과 함께 기드론 시내 저편으로 나가 시니 거기 동산이 있는데 제자들과 함께 들어가시다 (요18:2) 거기는 예수께서 제자들과 가 끔 모이시는 곳"은 겟세마네 동산을 말합니다.
예수께서는 십자가의 고난을 목전에 두고 가장 먼저 가지신 것은 바로 기도의 시간이었음 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본문을 통해 보면, 기도란 여호와 하나님과 마주 앉아 자신의 마음을 하나 님께 촛점을 맞추는 시간임을 알 수 있습니다. 기독교의 기도는 단지 자신의 소원과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수단이 아닌 것입니다. 그와 같은 기도는 차라리 주문(呪文)에 불과한 것입니 다.
기도는 여호와 하나님과 대면하여 여호와 하나님께 자신의 마음을 향하게 하는 것입니다. 하루 종일 자신 의 마음이 여호와 하나님과 촛점을 맞추고 있다면 그 사람은 쉬지 않고 기도하는 사람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기도하며 여호와 하나님 말씀을 명상하기도 하며 찬송을 부르기도 하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을 향하여 자신의 마음을 모으고 여호와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발견하고 확인하기 위한 좋은 방법이 되는 것입니다. 또한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찾아 확신한 후에는 그 길이 아무리 험하고 고통스러워 도 여호와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 바람직한 기도생활이며 신앙생활인 것입니다. 겟세마네 동산의 예수 그리스도의 기도에 대한 기사(記事)는 예수께서 자발적으로 고통의 길, 형극(荊棘)의 길을 선택하셨음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편한 길을 선택할 것인가 아니면 가시밭길을 택할 것인가 살아남을 것인가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을 택해야 할 것인가 타 협해서 무사하게 여생을 보낼 것인가 오욕과 수치가 기다리는 그 좁은 길을 선택할 것인 가 이러한 선택의 기로(岐路)에서 "고난의 잔"을 선택하신 것입니다. 본회퍼는 그의 옥중서한에서 예수님의 이러한 선택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을 하였 습니다.
"명령에 따라 고통을 받는 것은 자의로 고통받는 것보다 쉽다. 여럿이 함께 고통받는 것은 혼자 고통받는 것보다 쉽다. 육체적으로 고통받는 것은 정신적으로 고통받는 것보다 쉽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의(自意)로, 혼자서, 육체적 고통과 정신의 고통을 모두 선택하셨다. "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는 사람은, 여호와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 원하는 사람 은 고통의 선택이 얼마든지 가능한 것입니다.
본문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 당하시는 모습은 고뇌에 찬 처절한 고통보다는 오히 려 당당하고 의연하며 기쁨이 넘치기까지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요한 복음에서만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공관 복음서에서는 예수의 고난의 처절함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마26:36)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이르시 되 내가 저기 가서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 하시고 (마26:37) 베드로와 세 베대의 두 아들을 데리고 가실쌔 고민하고 슬퍼하사 (마26:38)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 " "(막14:32) 저희가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나의 기도 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았으라 하시고 (막14:33)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가실 쌔 심히 놀라시며 슬퍼하사 (막14:34)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깨어 있으라 하시고. " "(막15:34) 제 구시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지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를 번역하면 나의 여호와 하나님 나의 여호와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 "(눅22:39) 예수께서 나가사 습관을 좇아 감람산에 가시매 제자들도 좇았더니 (눅22:40) 그 곳에 이르러 저희에게 이르시되 시험에 들지 않기를 기도하라 하시고 (눅22:41) 저희를 떠 나 돌 던질 만큼 가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여 (눅22:42) 가라사대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 (눅22:43) 사자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돕더라 (눅22:44) 예수 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피방울 같이 되더라. " 요한 복음에서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을 당당하고 의연하게 묘사하고 있는 이유는 예수의 부활에 대한 확신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부활신앙이 확고부동하면 어떠한 십자가도 두려 워하지 않고 당당하고 의연하게 맞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의 수난을 자원하고 계시며 적극적으로 그 수난에 참여하고 계 시는데 이는 바로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가롯 유다가 자기를 팔 것을 알고 계시고 잡아가도록 유다가 잘 아는 곳으로 가셔서 기도하시고 내려 오셨던 것입 니다. "(요18:2) 거기는 예수께서 제자들과 가끔 모이시는 곳이므로 예수를 파는 유다도 그곳을 알더라 (요18:3) 유다가 군대와 및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서 얻은 하속들을 데리고 등과 홰와 병기를 가지고 그리로 오는지라 (요18:4) 예수께서 그 당할 일을 다 아시고 나아 가 가라사대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 (요18:5) 대답하되 나사렛 예수라 하거늘 가라사대 내로 라 하시니라 그를 파는 유다도 저희와 함께 섰더라. "
예수께서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을 능동적으로 맞이하실 수 있었던 것은 십자가를 좌절과 패배로 보신 것이 아니라 진리의 궁극적인 승리로 보셨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을 능동적으로 맞이하실 수 있었던 것은 사랑과 진리가 증오와 거짓보다 강하며 결국에는 이긴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죄와 악의 세력이 강한 것처럼 보이지만, 여호와 하나님이 그것보다 더 강하며 여호와 하나님이 결국 승리한다는 확신을 가지셨기 때문입니다. 저항 한번 해 보지 못하고 죄 없이 당하는 예수의 고난과 죽음 속에서 인간의 죄가 용서받으며 여호와 하나님 나라가 세워진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십자가의 길을 피하지 않고 그 길을 끝까지 걸어가신 것입니다.
사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은 십자가만이 아니었습니다. 그 분의 삶 전체가 고난의 삶이었 습니다. 그는 가난한 농부의 딸과 목수인 마리아와 요셉의 가정에 태어나 가난 속에서 자라 셨고 힘든 노동에 종사하셨습니다. 실망도 하고 울기도 하며, 배신도 겪으셨으며 버림을 받 기도 하고 심한 상처도 입으셨던 것입니다. 세상에 가장 고통스러운 십자가의 처형을 받으 실 때까지 그의 일생은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고난은 그 원인이 자신에 게 있었던 것이 전혀 아닙니다. 그는 얼마든지 십자가의 고통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모든 인류를 구원하시고자 하는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의 피할 수 없는 뜻이었기 때문에 그 길을 기쁨으 로, 의연하게 택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인(Christian)이란 예수의 고통에 초대받은 사람들인 것입니다. 기독교인의 삶은 예수님처럼 자발적으로 십자가의 고난을 선택하는 삶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고난 을 겪은 사람이 예수를 보다 더 깊이 잘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이사야 53장은 "고난받는 종 의 노래"입니다.
"(사53:1)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뇨 (사53:2)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사53:3)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 에게 싫어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 을 가리우고 보지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 였도다 (사53:4)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 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여호와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사53: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사53:6) 우리는 다 양 같아 서 그릇 행하며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 도다. "
3,4절을 보면, 예수께서 우리의 고통과 슬픔을 대신 짊어지기 위하여 고통을 선택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기독교인의 사명은 나라와 민족, 더 나아가 세계의 고통과 아픔, 그리고 모든 슬픔을 함께 나누고 대신 짊어지는 자발적인 자세가 요청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의 고통과 아픔을 바로 읽고, 그것을 바로 지기 위하여 십자가의 고난을 선택할 수 있어야 참된 기독교인이며 사명자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5절,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 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 는 말씀을 보면, 예수님의 치유하시는 방법이 치료약을 던져주시는 것이 아니라 그가 선택 한 그 고통 자체가 치료의 방법인 것이었습니다. 말만 가지고서는 선한 사마리아인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눅10:30)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 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눅10:31)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눅10:32) 또 이와 같이 한 레 위인도 그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눅10:33) 어떤 사마리아인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눅10:34)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고 (눅10:35) 이튿날에 데나 리온 둘을 내어 주막 주인에게 주며 가로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부비가 더 들면 내가 돌 아 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눅10:36) 네 의견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 의 이웃이 되겠느냐 (눅10:37) 가로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눅10:34)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 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고 (눅10:35) 이튿날에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막 주인에게 주며 가로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부비가 더 들면 내가 돌아 올 때에 갚으 리라... "고 말하며 그 강도만난 자의 형편과 처지에 동참하는 마음과 행함을 가진 '상처받은 치료자'만이 참된 치료자인 것입니다. 자신의 죄로 말미암아 맞는 채찍이 아니라 우리의 " 이웃"이 당하는 채찍을 자신의 채찍으로 삼게 될 때 "나음"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이웃과 나라 민족의 "나음"을 위해 예수님의 고난의 잔에 동참할 수 있는 성도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다음으로 고난의 잔에 참여하는 길은 순종의 종이 되는 것입니다. "(사53:10) 여호와께서 그로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케 하셨은즉 그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그 씨를 보게 되며 그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 호와의 뜻을 성취하리로다. " "(빌2:7)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빌2:8) 사람의 모양 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 아무리 십자가의 길이 험하고 고통스러워도 끝까지 순종하는 종의 길을 걷는 것이 사명자 의 길이며, 영광스런 승리의 삶이 되는 것입니다. 인도의 시인 타골(Tagore)의 체험담입니다. 어느 날 아침 종이 출근하지 않아 타골은 몹시 화가 났습니다. 종은 오후 2시에 와서 자기의 일을 묵묵히 하는 것이었습니다. "나가라! 너 같은 놈은 필요없다!"고 외치자 종은 조용히 말했습니다. "지난밤에 제 아들이 죽었습니다. " 그는 아들의 죽음과 주인의 분노를 다 짊어지고서도 하루의 책임을 완수했던 것입니다. "(사53:7)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 로 끌려가는 어린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 예수님의 이러한 삶의 자세를 배워 가는 사순절 기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세계에서 가장 높은 십자가 종탑은 시카고 템플교회에 있습니다. 어느 날 수많은 사람이 걸음을 멈추고 이 탑을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번화가 네거리에 이 탑이 있지만 그 동안 쳐 다보는 사람은 거의 없었던 것입니다. 이날 따라 주목거리가 된 것은 높은 탑의 십자가에 일군이 매달려 수리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빈 십자가는 관심밖에 있었으나 사람이 달 려 있을 때 그 십자가는 세상의 눈길을 모았던 것입니다. 잘못지고 있는 자신의 십자가를 이번 사순절 기간을 통해 바로 수리(修理)하기 위해 십자 가에 매달리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십자가에 바로 자기 자신이 달려 있지 아니하면 자신의 가정과 이웃, 그리고 나라 민족에 게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자신이 고난의 십자가에 달려 높이 들려 질 때 가정과 나 라 민족이 "나음"을 입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받으신 "십자가 고난의 잔"은 우리에게 "삶의 치유와 축복의 잔"이 되게 하셨 습니다. 오늘 받으시는 성찬예식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고난의 잔"에 동참하시므로 여러분 의 삶에 "치유와 축복의 잔"이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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