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려주일] 고난을 이기는 힘
본문
믿음 좋은 어느 며느리가 시어머니의 핍박을 받으며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그럼에도 며느리는 시어머니를 위해서 눈물로 기도했습니다. 그때마다 찬송가 395장 ‘너 시험을 당해 범죄치 말고’를 불렀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교회에서 심방온 성도들이 시어머니에게 전도했습니다. “예수 믿으세요. 늘 며느님이 어머님을 위해서 눈물로 기도합니다. ”
그러자 시어머니가 말했습니다. “내 며느리는 왕내숭이에요. 기도한다기에 가만히 들어보니 시어미 이기자는 노래만 부르고 있습디다. ”
다시 성도가 물었습니다. “아니 도대체 어떤 찬송을 불렀는데요”
시어머니는 곧장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너 시어밀 당해 범죄치 말고 너 용기를 다해 물리쳐라. 너 시어밀 이겨 새 힘을 얻고…”
고부간의 갈등은 참 어려운 관계입니다. 그러나 이런 시어미니와 며느리도 있습니다.
지난 3월 19일, 오후 삼성의료원 3층 중환자실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신문보도에 따르면,
3일전, 3월 16일 간경화로 4년째 투병중이던 시어머니(52)에게 자신의 간 60%(584g)를 떼어드린 결혼 3년 차, 며느리 이효진 씨가 이식수술 후 처음으로 만난 시어머니의 손을 꼭 잡고 있었습니다.
가정학습지 방문교사인 며느리 이효진씨는 2002년 4월 경기 안산에서 야채도매상을 하는 남편과 결혼한 뒤로 경기도 시흥에서 시부모, 시동생과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시어머니의 증세가 간경화 말기까지 악화되어, 간이식수술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시아버지와 아들 3형제 모두 이식가능 여부를 조사해 보니, 간염 보균자로 판정되어 간 이식이 불가능했습니다.
그래서 며느리 이효진씨가 가족 몰래 검사해 보니 이식이 가능하다는 결과가 나왔고, 10시간의 수술 끝에 성공적으로 시어머니에게 간을 떼어주게 된 것이었습니다.
기증 사유란에 며느리 이효진씨가 이렇게 썼답니다.
“나는 그 분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시어머니를 사랑하니 간을 떼어 주기까지 한 것입니다.
대단하지요 어떤 고부간은 평생원수이지만, 어떤 고부간은 부모자식 이상입니다.
♡ 사랑은 모든 것을 주게 됩니다. 그 중에 가장 큰 사랑은 생명까지 주는 사랑입니다. 왜 며느리 이효진씨가 착한 며느리입니까 시어미를 위해서 간을 준다는 것은 자신의 생명을 줄 수 있다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간을 주는 며느리는 시어머니를 위하여 그 어떤 것도 다 할 수 있는 며느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예수님은 저와 여러분을 위하여 십자가에서 목숨을 주셨습니다. 저와 여러분을 위하여 목숨을 주고, 죄악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입니다.
(1)마 20:28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우리 예수님은 죽기까지 십자가의 모진 고통을 감당하기 위하여 영적인 준비를 하셨는데, 땀방울이 핏방울이 될 정도로 처절하게 기도하신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기도입니다.
멜 깁슨의 그리스도의 수난이라는 영화는 바로 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장면으로 시작됩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신 후, 유대 병정들이 예수님을 잡아 십자가에 매달기 위하여 겟세마네 동산으로 올 때에, 예수님께서는 담대하게 그들에게 나아갔습니다.
본문 6절을 보면,
(2)요 18:6 “예수께서 저희에게 내로라 하실 때에, 저희가 물러가서 땅에 엎드러지는지라”
예수님을 잡으러 온 군사들이, 오히려 예수님 앞에서 땅에 엎드려 경배한 내용을 보게 됩니다. 즉 예수님을 붙잡으러 온 것인지, 아니면 호위하러 온 것인지 이해가 안 될 정도로 예수님께는 권세가 있으셨다는 말씀입니다.
또, 8절을 보면, 붙잡혀 가시는 예수님이 오히려 군사들에게 부탁하기를, 제자들이 가는 것을 용납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3)요 18:8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너희에게 내로라 하였으니 나를 찾거든 이 사람들의 가는 것을 용납하라 하시니”
생각해 보십시오. 제자들이 붙잡혀 가시는 예수님을 걱정하고 책임져야 할 텐데, 오히려 붙잡혀 가시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걱정하고, 책임지시는 겁니다. 베드로는 칼을 들고, 대항하다가 말고의 귀를 잘라버리고는 일을 더욱 꼬이게 만들뿐입니다.
여러분! 왜 이런 차이가 나는 것일까요
예수님께서는 고난을 이길 근본적인 답을 가지고 계셨지만, 제자들은 그 답을 가지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 최면으로 고난을 이기신 것이 아닙니다. 고난을 이기는 근본적인 답을 가지셨습니다. 그것을 보아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도 고난당할 때, 당황하지 않고 고난과 싸워 이길 수 있습니다.
첫째는 믿음입니다.
겟세마네 동산에 대한 동일한 장면이 마태복음 26장에도 나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마 26:53에서는 베드로에게
(4)마 26:53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 두 영(부대)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천군 천마가 자신을 둘러싸고 있음을 아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만 보신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 뒤의 부활도 보셨고, 부활 뒤의 승천도 보셨고, 이 땅의 일만 보신 것이 아니라 천국도 보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십자가의 고통이 얼마나 처절하고, 잔혹스러운지 이미 아셨지만, 십자가로만으로 끝나지 않고, 부활, 승천, 천국을 보셨기 때문에 십자가의 고난을 이길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고난 앞에서 믿음의 눈을 떠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셔야 했던 것처럼 우리에게도 여호와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고난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에게 육체의 가시가 있었습니다. 그는 괴로웠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문제를 놓고 여호와 하나님께 세 번씩이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바울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셨습니다. "나의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 바울은 이 응답을 통하여 여호와 하나님께서 바울이 자고하지 못하도록 육체의 가시를 허락하셨음을 깨닫고 더 이상 괴로워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육체의 가시를 감사하게 생각했습니다.
낮은 울타리라는 잡지를 발행하는 문화 사역자 신상언형제, 청주교육대학 일학년 일학기 등록금을 내지 못하여 제적을 당할 지경이 되었었답니다. 학비가 거의 들지 않는 2년제 교육대학 그마저 중간에 그만 두어야 했습니다. 돈 없는 부모에 대한 원망, 친척들에 대한 원망, 모든 사람들에 대한 원망,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원망, 세상을 저주하였답니다. “반드시 복수하리라”
그런데 등록 마감 직전에 과외자리가 났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학교로 달려갔습니다. 사정을 했더니 무뚝뚝해 보이던 학생과장이 자신의 저금통장을 내밀며 우선 학비를 내고 천천히 갚으라 하셨답니다. 정확히 마감 5분전에, 등록금을 내고 나오면서 얼굴에는 눈물인지 땀인지가 흐르더랍니다.
“여호와 하나님 감사합니다. ” 하는데, 여호와 하나님께서 어두운 골목 저편에서 지켜보시는 것 같더랍니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안되었단다. 이런 방법이 아니면 너의 가슴을 열 수 가 없었단다. ”
신상언형제는 그 때 여호와 하나님을 만났답니다. 상처 많은 성격, 모난 성품, 자존심과 열등감에 병든 상태에서 비로소 사랑의 여호와 하나님, 응답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만났답니다.
성도 여러분, 여호와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고난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아주 망하도록 허락하신 고난은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천지를 지으시고 복의 근원이시며,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에는 영혼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하였습니다. 붙잡혀 가시는 예수님이시지만, 제자들을 향한 사랑이 있었습니다.
이 사랑은 단순히 3년 동안의 의리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제자들이 곧 자신을 배신할 것임을 아셨습니다. 이미 가룟 유다는 돈 30냥에 당신을 팔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런 제자들을 더욱 사랑하셨다고 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예수님은 사람들에 대한 사랑으로 마음이 뜨거웠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사랑스럽기 때문에 사랑하는, 에로스의 사랑이 아닙니다. 죄 때문에 지옥으로 향하여 가는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아가페 사랑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이 십자가를 지시지 않는다면, 모든 사람들이 지옥에 갈 수 밖에 없음을 아셨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들이 마귀와 죄의 종노릇하며 지옥에 가는 것을 보고 계실 수가 없으셨습니다. 그래서 온 인류의 죄를 대신 지시고, 온 인류가 당해야 할 지옥의 고통을 당신이 당하시기로 작정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그 사랑 때문에 자신을 배신하고 도망갈 제자들을 끝까지 사랑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주님의 사랑을 알고 난 사람은 사명에 눈이 뜨입니다. 사명을 발견하면 모든 불평과 염려는 의미가 달라지게 됩니다.
해방되기 전, 함경북도 나남 이라는 도시에 한 여자 거지가 있었답니다. 젊은 여자인데, 살이 보이는 남루한 옷을 입고 이집 저집 다니며 구걸행각을 하였습니다. 젊은 것이 무엇을 못하여 거지가 됐느냐, 멀쩡한 여자가 일하기 싫어서 그 모양이냐 하며 남들이 욕을 해도, 한 번도 화내는 일이 없이 그저 싱글벙글 웃어만 보일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미친 여자라고 생각하고는 상대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815 해방이 되고 나남에 소련군이 진주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여자 거지가 소련군 장교 옷을 입고 중위 견장을 달고 나타난 것입니다. 다 깜짝 놀랐습니다. 그는 거지가 아니라 소련군으로부터 밀파된 여자 간첩이었습니다. 이 여자가 그동안 자기를 거지로 미친 여자로 조롱하고 업신여기던 사람들 앞에서 태연하고 여유 있는 자세를 취할 수 있었던 까닭은 자기 신분과 사명에 대한 긍지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물며 소련군 장교만 되어도 사명을 위해서라며 어떤 멸시도 조롱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면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가 화 낼일 두려워 할 일, 낙심할 일이 무엇입니까
왜 내 형편은 이런가 왜 나는 남만 못하나 환경과 사람을 향한 불평과 원망은 사명을 깨닫지 못하였기 때문에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의 진정한 평가는 여기서 내려지는 것이 아닙니다.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내려지는 것입니다.
33333
사랑했던 제자에게 배신을 당하고 무지한 로마 병정에게 매를 맞고 얼굴에 침 뱉음을 당하고 머리에 가시관을 쓰고, 욕을 먹고 살인 강도와 똑같은 취급을 당하면서도 한마디 불평도 하지 않으셨던 예수님, 그것은 모든 사람들을 지옥의 길에서 구원하여야 하겠다는 사랑, 그 사랑에서 나온 사명의 힘이었습니다.
그러면 고난도 이길 수 있는 이 믿음과 사랑은 어떻게 생기는 것입니까
기도입니다. 우리는 믿음도 있다고 생각하고, 사랑도 갖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 가지고는 고난을 이길 수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믿음도 있어 보이고, 사랑도 웬만큼 있는 것처럼 사는데, 왜 자꾸 고난에 허덕입니까
이유는 제대로 기도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믿음과 사랑은, 기도를 통하여 비로소 어떤 고난도 이길 만큼 충만하게 됨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땀을 흘리며 기도하셨습니다. 그 기도가 그친 후 예수님은 담대하셨습니다. 그러나 베드로와 제자들은 졸음을 이기지 못해서 기도하지 못하였습니다. 마음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아니 그 마음과 열정은 대단했습니다.
마26:33에서 베드로는
(5)마 26:33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그렇게 할 수 없었고, 그럴수록 더욱 더 실수와 좌절을 많이 겪었습니다. 왜냐하면 어처구니없이 졸음을 이기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 문제는 솔직히 우리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왜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가, 당당하게 살지 못하고, 무기력하게 삽니까
여호와 하나님을 믿지 않기 때문도 아닙니다. 십자가의 사랑을 모르기 때문도 아닙니다. 졸음을 이기고 기도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베드로의 삶은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예수님 부활 승천 후 마가 다락방에 모여 성령의 충만을 사모하며 기도하며 기다리다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그 이후 하루에 3천명씩, 5천명씩 구원시키는 사도가 되었고 정말 순교로 그 사명을 마치는 대 역사를 감당했던 것입니다.
저는 몇달전, 이런 경험을 했습니다.
모든 것이 짜증이 납니다. 귀찮고, 마음에 드는 것이 하나도 없는 메마른 삶을 살아간 적이 있었습니다.
새벽에 기도를 하는데, 기도하고 싶은 마음이 안드는 겁니다. 기도하면, 사람들에 대한 미움이 점점 더 커지는 겁니다. 사실은 기도라기보다는 그 사람에 대한 생각이지요. 예를들어, 집사람을 생각하면 잘하는 것보다, 못하는 것만 떠오르고, 불만이 생기고, 화가 나고, 신경질이 나서, 더 이상 생각하기가 싫습니다. 그래서 기도로 가장한 생각을 집어치우려고 하는데 마음 한 구석에서, “조금만 더 기도해봐라!” 그러는 겁니다. 그래서 기도 무릎을 털고 일어서려다가 에잇! 하면서 더 끓어 엎드렸습니다.
그리고는 지겹다는 듯이 주여! 크게 외쳤습니다. 사실, 기도로 가장한 생각에 빠져 있을 때에는 한숨 대신에 주여! 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지겹다는 듯이 주여! 했지만, 그 주여!는 맡기는 외침이었습니다. 내 힘으로 집사람 하나 바꿀 수 없습니다. 주님 알아서 하십시오. 그런 의미였습니다.
그리고는 기도문이 열리기 시작합니다. 나의 안타까움을 주님께 정말 기도로 아뢰기 시작했습니다. 그랬더니 기도하는 가운데 이상하게 제 생각이 바뀌는 것입니다. 내가 미워하는 사람들이 너무 귀중한 사람들임을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우리 집사람을 두고도 갑자기 너무 사랑스러운 겁니다.
생각해보십시오. 교회를 위하여 사모로서 얼마나 애를 씁니까 작년 말부터 금식바람이 불더니, 7일동안의 완전 금식을 벌써 2차례나 했습니다. 그리고는 저녁 금식은 이제 생활이 되어 버렸습니다. 저는 목사로서, 이런 사모에게 불평을 논할 자격이 없는 자입니다.
여러분! 사랑도 언제 가능한지 아십니까 그를 위하여 기도할 때에 가능합니다.
여러분, 나누어 드린 중보기도제목 날마다 붙들고 기도하십시오,
그 기도모습이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모습이고, 교회를 사랑하는 모습입니다.
그리고 가족들을 위하여 날마다 기도하십시오. 정말로 가족을 사랑하는 표현입니다.
자신을 사랑한다면 자신을 주님께 맡기는 기도를 때마다 드려야 합니다. 그래야 진정으로 자신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날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면, 주님의 사랑으로 살게 되는 겁니다.
성도가 세상의 고난을 이기는 힘은 오직 기도할 주어지는 성령충만에서 오는 것임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하며 기도하셨습니다. 사람이 꼭 목숨이 끊어져야 죽은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꿈, 계획, 고집을 버리는 것이 곧 죽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이미 겟세마네 기도 동산에서 죽은 것입니다. 이미 죽은 자이기에 고난이 두렵지 않았던 것입니다.
지난 주간에, 노숙자들을 위하여 봉사하고, 선교하는 부산 도시빈민선교회에서 나자로라는 회보가 왔습니다. 저는 그 회보를 무심히 보다가 정말 충격이랄까 감격이랄까 묘한 장면을 목격했습니다.
우리 선교회의 이모저모라는 사진을 게시한 페이지가 있는데, 다음 3컷의 사진이 눈에 확 들어 왔습니다.
여러분! ohp로 희미하게라도 보일는지 모르지만,
처음 사진 밑에, 2002. 12. 29, 마지막 주일 공동예배를 최문한(죠지) 형제의 임종예배를 드리고 있다. 예배당 앞에 최 형제님의 손을 들어 보인다.
두 번째 사진 밑에, 임종예배 진행중 사모님이 최문한 형제에게 꽃다발을 드리고 있다.
마지막 사진 밑에는, 2003.1.3. 최문환 형제는 1월 2일 새벽 소천하였고, 이날 김목사님의 인도로 애빈교회에서 고별 예배를 드리고 있다.
여러분! 의학적으로 사형선고를 받은 이 노숙자가 예수님을 영접하고, 아직 죽지도 않았는데, 임종예배를 드릴 때에 손을 들어 보이고, 더 이상 육신의 고통이 없는 천국을 바라보며, 꽃다발을 받아 안는 이 최문환 형제의 마음을 아십니까
죽음을 이긴 자, 천국과 영생을 믿는 자만이 가질 수 있는 여유이지요.
죽을병에 걸려, 여호와 하나님께 매달려 기도해서 고침 받은 사람도 있습니다. 구약성경의 히스기야가 그랬지요. 오늘날도 죽기로 각오하고 기도해서 병을 낫는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살아계신 여호와 하나님의 역사지요.
그러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죽음조차도 여호와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이고, 죽음을 극복하는 힘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
바로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사람들의 특권입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면, 죽는 것도 기쁨이요, 사는 것도 기쁨입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다는 것은, 이제부터는 주님만 바라보며, 오직 주님만을 위해 살아가겠다는 신앙자세를 말합니다.
바로 주님을 영접한 자세, 주님 뜻대로만 살겠다는 자세가 바로 고난을 극복하는 힘인 줄로 믿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교회에서 심방온 성도들이 시어머니에게 전도했습니다. “예수 믿으세요. 늘 며느님이 어머님을 위해서 눈물로 기도합니다. ”
그러자 시어머니가 말했습니다. “내 며느리는 왕내숭이에요. 기도한다기에 가만히 들어보니 시어미 이기자는 노래만 부르고 있습디다. ”
다시 성도가 물었습니다. “아니 도대체 어떤 찬송을 불렀는데요”
시어머니는 곧장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너 시어밀 당해 범죄치 말고 너 용기를 다해 물리쳐라. 너 시어밀 이겨 새 힘을 얻고…”
고부간의 갈등은 참 어려운 관계입니다. 그러나 이런 시어미니와 며느리도 있습니다.
지난 3월 19일, 오후 삼성의료원 3층 중환자실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신문보도에 따르면,
3일전, 3월 16일 간경화로 4년째 투병중이던 시어머니(52)에게 자신의 간 60%(584g)를 떼어드린 결혼 3년 차, 며느리 이효진 씨가 이식수술 후 처음으로 만난 시어머니의 손을 꼭 잡고 있었습니다.
가정학습지 방문교사인 며느리 이효진씨는 2002년 4월 경기 안산에서 야채도매상을 하는 남편과 결혼한 뒤로 경기도 시흥에서 시부모, 시동생과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시어머니의 증세가 간경화 말기까지 악화되어, 간이식수술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시아버지와 아들 3형제 모두 이식가능 여부를 조사해 보니, 간염 보균자로 판정되어 간 이식이 불가능했습니다.
그래서 며느리 이효진씨가 가족 몰래 검사해 보니 이식이 가능하다는 결과가 나왔고, 10시간의 수술 끝에 성공적으로 시어머니에게 간을 떼어주게 된 것이었습니다.
기증 사유란에 며느리 이효진씨가 이렇게 썼답니다.
“나는 그 분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시어머니를 사랑하니 간을 떼어 주기까지 한 것입니다.
대단하지요 어떤 고부간은 평생원수이지만, 어떤 고부간은 부모자식 이상입니다.
♡ 사랑은 모든 것을 주게 됩니다. 그 중에 가장 큰 사랑은 생명까지 주는 사랑입니다. 왜 며느리 이효진씨가 착한 며느리입니까 시어미를 위해서 간을 준다는 것은 자신의 생명을 줄 수 있다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간을 주는 며느리는 시어머니를 위하여 그 어떤 것도 다 할 수 있는 며느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예수님은 저와 여러분을 위하여 십자가에서 목숨을 주셨습니다. 저와 여러분을 위하여 목숨을 주고, 죄악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입니다.
(1)마 20:28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우리 예수님은 죽기까지 십자가의 모진 고통을 감당하기 위하여 영적인 준비를 하셨는데, 땀방울이 핏방울이 될 정도로 처절하게 기도하신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기도입니다.
멜 깁슨의 그리스도의 수난이라는 영화는 바로 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장면으로 시작됩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신 후, 유대 병정들이 예수님을 잡아 십자가에 매달기 위하여 겟세마네 동산으로 올 때에, 예수님께서는 담대하게 그들에게 나아갔습니다.
본문 6절을 보면,
(2)요 18:6 “예수께서 저희에게 내로라 하실 때에, 저희가 물러가서 땅에 엎드러지는지라”
예수님을 잡으러 온 군사들이, 오히려 예수님 앞에서 땅에 엎드려 경배한 내용을 보게 됩니다. 즉 예수님을 붙잡으러 온 것인지, 아니면 호위하러 온 것인지 이해가 안 될 정도로 예수님께는 권세가 있으셨다는 말씀입니다.
또, 8절을 보면, 붙잡혀 가시는 예수님이 오히려 군사들에게 부탁하기를, 제자들이 가는 것을 용납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3)요 18:8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너희에게 내로라 하였으니 나를 찾거든 이 사람들의 가는 것을 용납하라 하시니”
생각해 보십시오. 제자들이 붙잡혀 가시는 예수님을 걱정하고 책임져야 할 텐데, 오히려 붙잡혀 가시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걱정하고, 책임지시는 겁니다. 베드로는 칼을 들고, 대항하다가 말고의 귀를 잘라버리고는 일을 더욱 꼬이게 만들뿐입니다.
여러분! 왜 이런 차이가 나는 것일까요
예수님께서는 고난을 이길 근본적인 답을 가지고 계셨지만, 제자들은 그 답을 가지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 최면으로 고난을 이기신 것이 아닙니다. 고난을 이기는 근본적인 답을 가지셨습니다. 그것을 보아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도 고난당할 때, 당황하지 않고 고난과 싸워 이길 수 있습니다.
첫째는 믿음입니다.
겟세마네 동산에 대한 동일한 장면이 마태복음 26장에도 나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마 26:53에서는 베드로에게
(4)마 26:53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 두 영(부대)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천군 천마가 자신을 둘러싸고 있음을 아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만 보신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 뒤의 부활도 보셨고, 부활 뒤의 승천도 보셨고, 이 땅의 일만 보신 것이 아니라 천국도 보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십자가의 고통이 얼마나 처절하고, 잔혹스러운지 이미 아셨지만, 십자가로만으로 끝나지 않고, 부활, 승천, 천국을 보셨기 때문에 십자가의 고난을 이길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고난 앞에서 믿음의 눈을 떠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셔야 했던 것처럼 우리에게도 여호와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고난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에게 육체의 가시가 있었습니다. 그는 괴로웠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문제를 놓고 여호와 하나님께 세 번씩이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바울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셨습니다. "나의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 바울은 이 응답을 통하여 여호와 하나님께서 바울이 자고하지 못하도록 육체의 가시를 허락하셨음을 깨닫고 더 이상 괴로워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육체의 가시를 감사하게 생각했습니다.
낮은 울타리라는 잡지를 발행하는 문화 사역자 신상언형제, 청주교육대학 일학년 일학기 등록금을 내지 못하여 제적을 당할 지경이 되었었답니다. 학비가 거의 들지 않는 2년제 교육대학 그마저 중간에 그만 두어야 했습니다. 돈 없는 부모에 대한 원망, 친척들에 대한 원망, 모든 사람들에 대한 원망,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원망, 세상을 저주하였답니다. “반드시 복수하리라”
그런데 등록 마감 직전에 과외자리가 났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학교로 달려갔습니다. 사정을 했더니 무뚝뚝해 보이던 학생과장이 자신의 저금통장을 내밀며 우선 학비를 내고 천천히 갚으라 하셨답니다. 정확히 마감 5분전에, 등록금을 내고 나오면서 얼굴에는 눈물인지 땀인지가 흐르더랍니다.
“여호와 하나님 감사합니다. ” 하는데, 여호와 하나님께서 어두운 골목 저편에서 지켜보시는 것 같더랍니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안되었단다. 이런 방법이 아니면 너의 가슴을 열 수 가 없었단다. ”
신상언형제는 그 때 여호와 하나님을 만났답니다. 상처 많은 성격, 모난 성품, 자존심과 열등감에 병든 상태에서 비로소 사랑의 여호와 하나님, 응답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만났답니다.
성도 여러분, 여호와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고난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아주 망하도록 허락하신 고난은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천지를 지으시고 복의 근원이시며,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에는 영혼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하였습니다. 붙잡혀 가시는 예수님이시지만, 제자들을 향한 사랑이 있었습니다.
이 사랑은 단순히 3년 동안의 의리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제자들이 곧 자신을 배신할 것임을 아셨습니다. 이미 가룟 유다는 돈 30냥에 당신을 팔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런 제자들을 더욱 사랑하셨다고 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예수님은 사람들에 대한 사랑으로 마음이 뜨거웠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사랑스럽기 때문에 사랑하는, 에로스의 사랑이 아닙니다. 죄 때문에 지옥으로 향하여 가는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아가페 사랑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이 십자가를 지시지 않는다면, 모든 사람들이 지옥에 갈 수 밖에 없음을 아셨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들이 마귀와 죄의 종노릇하며 지옥에 가는 것을 보고 계실 수가 없으셨습니다. 그래서 온 인류의 죄를 대신 지시고, 온 인류가 당해야 할 지옥의 고통을 당신이 당하시기로 작정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그 사랑 때문에 자신을 배신하고 도망갈 제자들을 끝까지 사랑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주님의 사랑을 알고 난 사람은 사명에 눈이 뜨입니다. 사명을 발견하면 모든 불평과 염려는 의미가 달라지게 됩니다.
해방되기 전, 함경북도 나남 이라는 도시에 한 여자 거지가 있었답니다. 젊은 여자인데, 살이 보이는 남루한 옷을 입고 이집 저집 다니며 구걸행각을 하였습니다. 젊은 것이 무엇을 못하여 거지가 됐느냐, 멀쩡한 여자가 일하기 싫어서 그 모양이냐 하며 남들이 욕을 해도, 한 번도 화내는 일이 없이 그저 싱글벙글 웃어만 보일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미친 여자라고 생각하고는 상대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815 해방이 되고 나남에 소련군이 진주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여자 거지가 소련군 장교 옷을 입고 중위 견장을 달고 나타난 것입니다. 다 깜짝 놀랐습니다. 그는 거지가 아니라 소련군으로부터 밀파된 여자 간첩이었습니다. 이 여자가 그동안 자기를 거지로 미친 여자로 조롱하고 업신여기던 사람들 앞에서 태연하고 여유 있는 자세를 취할 수 있었던 까닭은 자기 신분과 사명에 대한 긍지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물며 소련군 장교만 되어도 사명을 위해서라며 어떤 멸시도 조롱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면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가 화 낼일 두려워 할 일, 낙심할 일이 무엇입니까
왜 내 형편은 이런가 왜 나는 남만 못하나 환경과 사람을 향한 불평과 원망은 사명을 깨닫지 못하였기 때문에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의 진정한 평가는 여기서 내려지는 것이 아닙니다.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내려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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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했던 제자에게 배신을 당하고 무지한 로마 병정에게 매를 맞고 얼굴에 침 뱉음을 당하고 머리에 가시관을 쓰고, 욕을 먹고 살인 강도와 똑같은 취급을 당하면서도 한마디 불평도 하지 않으셨던 예수님, 그것은 모든 사람들을 지옥의 길에서 구원하여야 하겠다는 사랑, 그 사랑에서 나온 사명의 힘이었습니다.
그러면 고난도 이길 수 있는 이 믿음과 사랑은 어떻게 생기는 것입니까
기도입니다. 우리는 믿음도 있다고 생각하고, 사랑도 갖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 가지고는 고난을 이길 수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믿음도 있어 보이고, 사랑도 웬만큼 있는 것처럼 사는데, 왜 자꾸 고난에 허덕입니까
이유는 제대로 기도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믿음과 사랑은, 기도를 통하여 비로소 어떤 고난도 이길 만큼 충만하게 됨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땀을 흘리며 기도하셨습니다. 그 기도가 그친 후 예수님은 담대하셨습니다. 그러나 베드로와 제자들은 졸음을 이기지 못해서 기도하지 못하였습니다. 마음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아니 그 마음과 열정은 대단했습니다.
마26:33에서 베드로는
(5)마 26:33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그렇게 할 수 없었고, 그럴수록 더욱 더 실수와 좌절을 많이 겪었습니다. 왜냐하면 어처구니없이 졸음을 이기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 문제는 솔직히 우리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왜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가, 당당하게 살지 못하고, 무기력하게 삽니까
여호와 하나님을 믿지 않기 때문도 아닙니다. 십자가의 사랑을 모르기 때문도 아닙니다. 졸음을 이기고 기도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베드로의 삶은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예수님 부활 승천 후 마가 다락방에 모여 성령의 충만을 사모하며 기도하며 기다리다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그 이후 하루에 3천명씩, 5천명씩 구원시키는 사도가 되었고 정말 순교로 그 사명을 마치는 대 역사를 감당했던 것입니다.
저는 몇달전, 이런 경험을 했습니다.
모든 것이 짜증이 납니다. 귀찮고, 마음에 드는 것이 하나도 없는 메마른 삶을 살아간 적이 있었습니다.
새벽에 기도를 하는데, 기도하고 싶은 마음이 안드는 겁니다. 기도하면, 사람들에 대한 미움이 점점 더 커지는 겁니다. 사실은 기도라기보다는 그 사람에 대한 생각이지요. 예를들어, 집사람을 생각하면 잘하는 것보다, 못하는 것만 떠오르고, 불만이 생기고, 화가 나고, 신경질이 나서, 더 이상 생각하기가 싫습니다. 그래서 기도로 가장한 생각을 집어치우려고 하는데 마음 한 구석에서, “조금만 더 기도해봐라!” 그러는 겁니다. 그래서 기도 무릎을 털고 일어서려다가 에잇! 하면서 더 끓어 엎드렸습니다.
그리고는 지겹다는 듯이 주여! 크게 외쳤습니다. 사실, 기도로 가장한 생각에 빠져 있을 때에는 한숨 대신에 주여! 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지겹다는 듯이 주여! 했지만, 그 주여!는 맡기는 외침이었습니다. 내 힘으로 집사람 하나 바꿀 수 없습니다. 주님 알아서 하십시오. 그런 의미였습니다.
그리고는 기도문이 열리기 시작합니다. 나의 안타까움을 주님께 정말 기도로 아뢰기 시작했습니다. 그랬더니 기도하는 가운데 이상하게 제 생각이 바뀌는 것입니다. 내가 미워하는 사람들이 너무 귀중한 사람들임을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우리 집사람을 두고도 갑자기 너무 사랑스러운 겁니다.
생각해보십시오. 교회를 위하여 사모로서 얼마나 애를 씁니까 작년 말부터 금식바람이 불더니, 7일동안의 완전 금식을 벌써 2차례나 했습니다. 그리고는 저녁 금식은 이제 생활이 되어 버렸습니다. 저는 목사로서, 이런 사모에게 불평을 논할 자격이 없는 자입니다.
여러분! 사랑도 언제 가능한지 아십니까 그를 위하여 기도할 때에 가능합니다.
여러분, 나누어 드린 중보기도제목 날마다 붙들고 기도하십시오,
그 기도모습이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모습이고, 교회를 사랑하는 모습입니다.
그리고 가족들을 위하여 날마다 기도하십시오. 정말로 가족을 사랑하는 표현입니다.
자신을 사랑한다면 자신을 주님께 맡기는 기도를 때마다 드려야 합니다. 그래야 진정으로 자신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날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면, 주님의 사랑으로 살게 되는 겁니다.
성도가 세상의 고난을 이기는 힘은 오직 기도할 주어지는 성령충만에서 오는 것임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하며 기도하셨습니다. 사람이 꼭 목숨이 끊어져야 죽은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꿈, 계획, 고집을 버리는 것이 곧 죽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이미 겟세마네 기도 동산에서 죽은 것입니다. 이미 죽은 자이기에 고난이 두렵지 않았던 것입니다.
지난 주간에, 노숙자들을 위하여 봉사하고, 선교하는 부산 도시빈민선교회에서 나자로라는 회보가 왔습니다. 저는 그 회보를 무심히 보다가 정말 충격이랄까 감격이랄까 묘한 장면을 목격했습니다.
우리 선교회의 이모저모라는 사진을 게시한 페이지가 있는데, 다음 3컷의 사진이 눈에 확 들어 왔습니다.
여러분! ohp로 희미하게라도 보일는지 모르지만,
처음 사진 밑에, 2002. 12. 29, 마지막 주일 공동예배를 최문한(죠지) 형제의 임종예배를 드리고 있다. 예배당 앞에 최 형제님의 손을 들어 보인다.
두 번째 사진 밑에, 임종예배 진행중 사모님이 최문한 형제에게 꽃다발을 드리고 있다.
마지막 사진 밑에는, 2003.1.3. 최문환 형제는 1월 2일 새벽 소천하였고, 이날 김목사님의 인도로 애빈교회에서 고별 예배를 드리고 있다.
여러분! 의학적으로 사형선고를 받은 이 노숙자가 예수님을 영접하고, 아직 죽지도 않았는데, 임종예배를 드릴 때에 손을 들어 보이고, 더 이상 육신의 고통이 없는 천국을 바라보며, 꽃다발을 받아 안는 이 최문환 형제의 마음을 아십니까
죽음을 이긴 자, 천국과 영생을 믿는 자만이 가질 수 있는 여유이지요.
죽을병에 걸려, 여호와 하나님께 매달려 기도해서 고침 받은 사람도 있습니다. 구약성경의 히스기야가 그랬지요. 오늘날도 죽기로 각오하고 기도해서 병을 낫는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살아계신 여호와 하나님의 역사지요.
그러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죽음조차도 여호와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이고, 죽음을 극복하는 힘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
바로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사람들의 특권입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면, 죽는 것도 기쁨이요, 사는 것도 기쁨입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다는 것은, 이제부터는 주님만 바라보며, 오직 주님만을 위해 살아가겠다는 신앙자세를 말합니다.
바로 주님을 영접한 자세, 주님 뜻대로만 살겠다는 자세가 바로 고난을 극복하는 힘인 줄로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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