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려주일] 빌라도의 재판
본문
우리 교회는 매년 예수님의 고난받으심과 십자가의 죽으심을 기념하여 고난주간을 지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으심에 대하여 계속하여 기념하고 강조하고 있는 것은 그 사건이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기 위한 구속사역의 핵심을 이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행적을 기록하고 있는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의 내용을 자세히 읽고 조사해 보면 모든 논의의 초점은 예수님의 고난과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에 맞추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그 책의 분량도 그리스도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죽으신 일주일에 있었던 사건을 책의 거의 절반을 할애하여 기술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믿는 기독교의 복음이 예수님의 고난받으심과 십자가에 죽으심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 기독교를 상징하는 앰브럼(emblem)도 십자가로 사용하고 있는데 이는 십자가에 우리 기독교의 핵심이 담겨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이 고난받으시고 십자가에 죽으시기 전에 당시 유대에 파견된 로마총독 빌라도의 재판과정에 나타난 내용을 통하여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 지, 왜 고난받으시고 죽으셨는지를 그 의미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1. 빌라도 법정에 오게된 경위
예수님은 죄로 인하여 타락한 인간을 구원하여 여호와 하나님 나라를 회복하시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이 일은 이미 인간의 타락 이전에 여호와 하나님이 아시고 우리를 구원하실 것을 예언하시고 그 예언한 대로 역사 가운데 행하신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구약성경에 예언된 메시아요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여러 증거와 가르침을 통하여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이 이 세상에 왔으나 믿지 못하던 한 무리들이 있었는데 당시에 가장 율법에 정통하다고 생각했던 제사장들과 유대인들의 지도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행하시고 가르치신 일들을 보고 구약성경에 선지자들이 말했던 메시아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오히려 그들의 사회적 지위를 유지하려는 잘못된 욕심 때문에 메시아를 알아보지 못하고 항상 죽일 궁리를 하였습니다. 드디어 때가 되어 가룟 유다의 탐욕을 이용하여 예수님을 배신하게 하여 붙잡았습니다(마26:14-16). 과거나 지금이나 사탄은 탐욕적인 사람들을 사용하여 주님과 교회를 고통스럽게 하지만 그 일로 탐욕적인 사람을 심판하고 교회를 건강하게 세우고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수단으로 사용합니다.
이 일을 오늘날의 시간표에 따라 도식화하면 수요일에 가룟 유다가 은 30에 예수님을 넘기려고 제사장들과 만나 모의하고 서로 계약을 맺었습니다(마26:14-16; 막14:10-11; 눅22:3-6). 목요일 저녁에 만찬을 드시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밤에 붙잡히시고 금요일 새벽까지 산헤드린 공회에서 밤새도록 대제사장들에 의해 심문을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금요일 새벽에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정을 내리고 당시 로마 총독이었던 빌라도에게 넘겨주었습니다. 요한복음에는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넘겨준 시간이 나타나 있지 않지만
마가복음 15:1에 보면 “새벽에 대제사장들과 즉시 장로들과 서기관들 곧 온 공회로 더불어 의논하고 예수를 결박하고 끌고 가서 빌라도에게 넘겨주니”라고 기록함으로 넘겨준 시간이 새벽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시각이 오늘날로 말하면 아침 6시에서 7시경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린 시각이 유대인의 시간이 제 삼시입니다(막15:25). 오늘날로 말하면 오전 9시입니다. 그러면 빌라도에게 재판을 받은 시간은 골고다까지 십자가를 지고 가고 거기에 매달리기까지의 과정을 생각한다면 불과 한 시간에서 두 시간 정도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제 삼시에 십자가에 달리시고 제 구시(오늘날의 시각은 오후 3시)에 운명하시고, 안식후 첫날(오늘날로 말하면 주일)에 부활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지금 빌라도 법정에 오게된 경위는 탐욕적인 사람인 유다와 당시 유대의 정치종교지도자들인 대제사장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이 서로 은 30에 파는 조건으로 계약을 맺고 빌라도 법정에 서게 된 것은 불과 이틀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유대인들이 왜 예수님을 빌라도의 법정에 예수님을 넘겼을까요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을 ‘관정으로’ 끌고 갔다고 하였습니다. 여기 ‘관정’(πραιδωριον)은 성경에 기록된 몇 안 되는 라틴어인데 Praetorium으로 총독이 공적인 업무를 보는 장소입니다. 사실 유대인의 산헤드린 공회는 사형집행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당시 로마가 지배를 했지만 로마는 정복당한 나라들에게 자치권을 허용하여 사형집행권까지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 성경학자들은 산헤드린 공회가 사형집행권이 없었기 때문에 빌라도에게 넘겨주었다고 말합니다. 그 근거로 요한복음 18:31에 보면 “우리에게는 사람을 죽이는 권이 없나이다”라는 말씀을 들고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에 보면 산헤드린 공회는 재판을 하고 사형을 집행할 수 있는 권한까지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사도행전 7장에 보면 산헤드린 공회의 재가를 받은 바울이 스데반을 돌로 쳐죽였습니다. 빌라도도 예수님을 재판하는 일에 대하여 요한복음 18:31에 “너희가 저를 데려다가 너희 법대로 재판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제사장들이 이 방법을 선택한 것은 당시에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들이 많았기 때문에 확실하게 죽일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재량권을 가지고 있는 종교적인 이유로 집행하지 않고 안전하고 확실하게 죽이기 위하여 정치적인 죄목을 씌어 죽이려고 한 것입니다. 만약에 이들이 재판하여 죽였다면 예수님의 시체를 자기 마음대로 처리하였을 것이고 부활을 입증할 수 있는 아리마대 요셉의 무덤에 들어가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한 행동을 가만히 보면 아주 이상한 부분이 있습니다. 이 때가 유월절 기간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유월절 무교병을 먹기 위하여 빌라도의 관정에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이 기간 동안에 유대인과 이방인이 서로 가까이 하고 교제하는 것은 위법이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구전으로 전해져 오는 장로들의 율법을 모은 미쉬나(Mishnah)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또한 사도행전에서도 사도 베드로가 로마의 백부장 고넬료에게 가는 문제를 말할 때 유대인과 이방인이 서로 교제하는 것이 위법이라고 하는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행10:28). 빌라도도 이 사실을 알고 직접 나가서 예수님을 고소하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물었습니다. 요한복음 18:29의 말씀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빌라도가 밖으로 저희에게 나가서 말하되 ‘무슨 일로 이 사람을 고소하느냐’” 그리고 나중에 재판을 할 때는 다시 관정으로 데리고 들어갔습니다(요18:33). 빌라도가 관정 밖으로 나와서 예수님을 고소하는 이유를 묻자 그들은 “이 사람이 행악자가 아니었더면 우리가 당신에게 넘기지 아니하였겠나이다”(요18:30)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빌라도는 “그러면 너희들이 데려다가 너희 법대로 재판하라”(요18:31)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이미 예수님을 죽이려고 계획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빌라도 법정까지 오게 한 것은 이미 그들이 여러 번 정죄한 바가 있는 신성모독죄, 즉 자신이 여호와 하나님이요 메시아라고 하는 죄(요5:18; 8:59; 10:31)로 인하여 사형을 시킬 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중을 소요하고 자기 나라를 건립한다는 정치적인 죄목으로 바꾸어 예수님을 안전하고 확실하게 죽이려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유대인들이 로마인의 관정에 들어가지 못한 이유를 율법을 지키는 것과 연관짓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 번째로는 예수님이 언제 십자가에 못 박히셨는지를 보여주려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는 이들의 행동이 이율배반적임을 보여주려는 것입니다. 당시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유월절을 거룩하게 지키려고 빌라도 법정에 내어주고 그 안에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유월절은 장래에 오실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사건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보지 못하고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게 하는 결정을 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외식적으로 거룩한 체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2. 여호와 하나님의 역사섭리와 시간표에 따라 진행된 사건
그런데 바로 이 사건에 대하여 요한복음 18:32에서 이 책의 저자인 사도 요한은 주석하기를 “이는 예수께서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가리켜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여러분! 이 의미가 무엇일까요 지금 성경의 기록자는 대제사장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이 탐욕스러운 가룟 유다와 계약을 맺어 이미 그들의 재판에서 사형을 언도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요한복음에도 보면 여러 차례 돌로 쳐서 죽일 수 있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요한복음 8:59과 10:31에 보면 나와 있습니다. 하지만 그 때 예수님이 어떤 방법으로 피하셨는지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지 않습니다만 돌에 맞아 죽는 죽음을 면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여러 번 자신이 십자가에 달려 죽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를 들어 요한복음 8:28에 보면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인자를 든 후에 내가 그 인 줄을 알고 또 내가 스스로 아무 것도 아니하고 오직 아버지께서 가르치신 대로 이러 것을 말하는 줄도 알리라”라고 하였습니다. 요한복음 12:32에서도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에 ‘인자가 들린다’라는 표현은 십자가에 달리신 사건과 승천하신 사건을 다 말할 수 있습니다만 일차적으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라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마태복음 20:18-19에 보면 더욱 분명한 주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거기에는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기우매 저희가 죽이기로 결안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주어 그를 능욕하며 채찍질하며 십자가에 못박게 하리니 제 삼일에 살아나리라”고 하셨습니다(참고 마26:2; 막10:33; 눅18:32). 그러면 사도 요한이 대제사장들이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내어주는 사건을 가리켜 십자가에 죽으실 것이라고 예언하신 것이 성취되는 사건으로 보고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흥미있는 것은 가룟 유다는 자신의 탐욕에 이끌려 사탄의 도구가 되어 은 30을 얻는 것처럼 보였으나 은 30 사용하지 못하고 자살하여 죽었습니다. 또한 대제사장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을 죽임으로 그들의 목적을 이루었다고 생각했으나 결국은 여호와 하나님이 작정하시고 주님이 이미 말씀하신 대로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이루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역사의 주도권을 사람들이 자기 스스로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그 역사의 배후에서 여호와 하나님이 주도권(initiative)을 가지고 계신다고 하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임으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지만 오히려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는 이 사건은 예수님이 힘이 없어서가 아니라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작정하신 것을 이루시는 일이라고 하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러한 사상은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고 제자들과 함께 내려오실 때에 예수님이 하신 말씀 가운데 잘 볼 수 있습니다. 유월절에 제자들과 만찬을 드신 후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고 내려오실 때에 그를 제자 중에 하나인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팔아 넘겼습니다.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에게서 파송된 무리들이 가룟 유다와 함께 검으로 잡으려고 왔습니다. 이것을 보고 베드로는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귀를 잘랐습니다. 이때에 예수님은 아주 놀라운 말씀을 하셨습니다. “네 검을 도로 집에 꽂으라.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하느니라.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 두 영 더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 아느냐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리요”(마26:52-54) 그리고 무리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강도를 잡는 것같이 검과 몽치를 가지고 나를 잡으러 나왔느냐 내가 날마다 성전에 앉아 가르쳤으되 너희가 나를 잡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나 이렇게 된 것은 다 선지자들의 글을 이루려 함이니라”(마26:55-56)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볼 때 우리가 알 수 있는 중요한 사상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죽으셔야 하는 것은 이미 우리의 구원을 위한 작정 가운데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3. 빌라도의 재판
이 사실은 빌라도가 예수님을 심문하는 사건 가운데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빌라도가 예수님을 심문하시는 내용 가운데 예수님에 관하여 세 가지 중요한 사실을 알게 해 줍니다. 첫 번째로는 예수님이 왜 이 세상에 오셨는지를 말해주고 있고, 두 번째로는 죄가 없으신 분이시며, 세 번째로는 모든 역사는 여호와 하나님이 주장하신다는 것입니다.
(1) 예수님은 여호와 하나님 나라를 세우시기 위하여 오신 왕이시다
먼저 빌라도의 심문에서 예수님이 왜 이 세상에 오셨는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빌라도가 예수님을 불러서 제일 먼저 물어본 말이 무엇입니까 요한복음 18:33을 보십시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빌라도가 이 질문을 한 것은 대제사장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이 고발한 죄목에 따라 유대국가를 세울 왕이냐고 물은 것입니다.
이 질문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이는 네가 스스로 하는 말이뇨 다른 사람들이 나를 대하여 하는 말이뇨”(요18:34)라고 물으셨습니다. 예수님이 빌라도에게 질문하신 것은 빌라도 개인에게 “너는 나에게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하는 질문입니다. 그러나 빌라도는 예수님의 이 질문에 대하여서는 대답하지 않고 “내가 유대인이냐 네 나라 사람과 대제사장들이 너를 넘겼으니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라고 다시 물었습니다. 빌라도의 이 대답은 빌라도 자신이 유대인이 아니기 예수님의 질문에 대답할 이유가 없고, 또한 할 필요도 없다고 하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다만 빌라도는 예수님이 어떤 일로 잡혀오게 되었는지를 밝히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빌라도가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라고 질문한 것은 그의 사고로 볼 때 논리적으로 맞지 않는 질문입니다. 빌라도가 보기에는 왕은 자기 군사도 있어야 하고, 무기도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빌라도의 눈에 비친 예수님은 이상한 왕이었습니다. 이러한 그에게 예수님이 “이는 네가 스스로 하는 말이뇨 다른 사람들이 나를 대하여 하는 말이뇨”라고 물었을 때 얼마나 황당했을까요 이 때에 예수님께서는 유대인의 왕이 아니고 온 세상의 주가 되신다고 하는 사실과, 여호와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왜 이 땅에 오셨는지를 명확하게 나타내 주는 말입니다. 요한복음 18:36에 보면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기우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나라가 아니었습니다. 헬라어 원문에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다”(υκ στιν κ του κοσμου τουτου)라는 의미는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이 말씀은 주님의 나라가 세상으로부터(out of) 세워지는 정부가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나라가 만일 세상으로부터 세워진 세상의 나라라고 한다면 자기 종들이 싸워서 빌라도 앞에 세우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의 나라가 어디에(장소) 있는지에 관하여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고, 그 나라가 어떤 것(본질)인지에 대하여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은 장소적인 개념의 유대인의 왕으로 제한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온 세상의 왕이심을 증거하신 것입니다.
여기에 대하여서는 이 말씀을 듣던 빌라도의 질문과 예수님의 답변에서 더욱 분명해 집니다. 빌라도가 예수님께서 세우실 나라에 대하여 이야기를 듣고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요18:37)라고 묻자 예수님께서는 “네 말과 같이 나는 왕이다. 내가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려 함이다”(요18:37)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빌라도의 심문을 받으면서 자신이 온 세상의 왕이며 그 여호와 하나님 나라의 구현을 위하여 세상에 왔다고 하시고, 곧 그 진리에 대하여 전파하시기 위하여 세상에 오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주님이 왕이 되어 영원히 다스려 주시는 여호와 하나님 나라를 이루시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어떻게 여호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될 수 있는지도 말씀해 주셨습니다. 요한복음 18:37을 보십시오. “빌라도가 가로되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려 함이로라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소리를 듣느니라 하신대” 예수님은 자신이 왕이라고 하시고,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소리를 듣느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목자와 양의 비유를 통하여 말씀하신 내용 가운데서도 나타나 있습니다. 요한복음 10:27에 보면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너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도 분명히 볼 수 있는 사상은 주님의 양들은 주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게 되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양이 아닌 자들은 그 말씀을 순종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빌라도에게 하신 이 말씀은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한다면 주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이루시는 여호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빌라도의 심문을 받으면서 자신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을 증거하시고, 누구든지 주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면 그 나라에 들어가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빌라도의 심문은 재판기록을 통하여 예수님의 온 세상의 왕이 되시며 그 나라를 이루시기 위하여 오셨다고 하는 사실을 증거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지막까지 여호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하시고 그 나라에 속한 자는 그 진리를 받아들이게 될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아마도 빌라도는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는 “진리가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우리는 진리가 무엇인지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말씀하시기를 “내가 곧 그 길이요 그 진리요 그 생명이라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고 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으면 주님이 다스리시는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이것이 빌라도가 “진리가 무엇이냐”에 대한 대답입니다. 빌라도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다면 그 역시 생명을 얻어서 여호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우유부단하게도 자신의 정치적인 생명의 염려로 인하여 그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하였습니다.
(2)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분이시다
빌라도의 재판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두 번째 진리는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분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빌라도가 예수님에 대하여 심문하시고 난 뒤에 유대인들에게 나가서 그는 말하기를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겠느라”고 하였습니다. 빌라도가 예수님을 심문한 결과 예수님에게 죄가 없다고 하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당시 유대인의 가장 중요한 명절인 유월절이 되면 한 사람을 놓아주는 관례에 따라 예수님과 강도인 바라바 중에 한 사람을 놓아 줄 것인데 한 사람을 택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런 백성들은 예수님 대신에 바라바를 선택하였습니다. 또한 빌라도가 재판 결과 죄가 없음을 보고도 예수님을 석방하지 못하고 대신 바라바를 놓아준 것은 민란이 일어나는 것을 두려워하였기 때문입니다(마27:24). 그리고 자신의 정치적 생명을 염려하였기 때문이기도 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이 소리를 지르며 “이 사람을 놓으면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니이다 무릇 자기를 왕이라 하는 자는 가이사를 배반하는 것이니이다”(요19:12)라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빌라도의 행동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이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죄가 없으신 분이심에도 불구하고 죽으셨다고 하는 것을 증거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죄가 없으심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바로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한 것입니다(벧전3:18).
(3) 모든 역사는 여호와 하나님이 주관하신다
특히 빌라도에게 심문을 받으신 사건이 기록된 것은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드러내 주는 사건 외에도 아주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고난과 십자가에 죽으시는 사건이 사람들이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빌라도는 A. D. 26-36년 어간에 유대를 통치한 로마의 총독이었습니다. 이것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우리 역사 가운데 이루셨다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고백하는 신앙고백 가운데 사도신경에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라고 되어 있습니다만 라틴어로 된 원문은 “본디오 빌라도가 통치하는 시대에 고난을 받으셨다”(passus sub Pontio Pilato, suffered under Pontius Pilate)라고 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죽으신 사건은 사람들이 지어낸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리고 빌라도의 이야기가 기록된 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행동과 세상 정부와의 관계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빌라도가 사형을 내리지만 실제로는 이 모든 일이 여호와 하나님의 구원역사 가운데서 여호와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되고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구원을 이루시되 세상의 여러 제도나 심지어 국가 권력을 통하여서도 이루신다고 하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주관하시고 통치하십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자기의 행위에 대하여 책임을 지게 되어 있습니다. 이 두 가지는 서로 상충되는 원리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여호와 하나님의 명령대로 움직일 수 있도록 칩(chip)이 내장된 대로 움직이는 로봇이 아니라 자유롭게 의사를 결정할 수 있는 인격적인 존재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이 우리의 행위에 대한 구실과 변명이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빌라도 법정까지 내어주어 십자가에 달리게 한 사건에서 잘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십자가의 형틀에 달리게 한 배후에 탐욕에 눈이 멀어 사탄의 도구가 되어 제사장들에게 넘겨주기로 한 가룟 유다와 역시 권력과 지위에 눈이 어두워 진리를 보지 못한 대제사장들과 장로들과 빌라도 역시 그 책임을 져야 합니다. 하지만 그들의 악한 행동조차도 그들의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구약시대부터 예언된 여호와 하나님의 거룩한 목적을 달성하는 도구일 뿐입니다. 그래서 저는 우리 교회 가족들에게 이 세상에 살면서 사탄의 도구가 되지 말고 여호와 하나님이 쓰시는 선한 도구가 되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고난주간을 맞이하면서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을 다시 확인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여 여호와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히 살게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는 죄가 없으신 분으로서 이 세상에 오셔서 고난을 받으신 것은 바로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님이 통치하시는 여호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위해서는 죄가 용서함을 받아야 합니다. 죄가 용서함을 받아 여호와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은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분으로서 우리의 죄를 당당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셨다고 하는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이것이 빌라도 법정에 말씀하신 진리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여 여호와 하나님과 교제하는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하여 행하신 이 모든 일을 꼭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할 때 주님이 고난받으시고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이루어주신 그 여호와 하나님 나라에서 참된 왕이신 주님의 통치를 받으며 살게됩니다.
그리고 그 책의 분량도 그리스도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죽으신 일주일에 있었던 사건을 책의 거의 절반을 할애하여 기술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믿는 기독교의 복음이 예수님의 고난받으심과 십자가에 죽으심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 기독교를 상징하는 앰브럼(emblem)도 십자가로 사용하고 있는데 이는 십자가에 우리 기독교의 핵심이 담겨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이 고난받으시고 십자가에 죽으시기 전에 당시 유대에 파견된 로마총독 빌라도의 재판과정에 나타난 내용을 통하여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 지, 왜 고난받으시고 죽으셨는지를 그 의미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1. 빌라도 법정에 오게된 경위
예수님은 죄로 인하여 타락한 인간을 구원하여 여호와 하나님 나라를 회복하시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이 일은 이미 인간의 타락 이전에 여호와 하나님이 아시고 우리를 구원하실 것을 예언하시고 그 예언한 대로 역사 가운데 행하신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구약성경에 예언된 메시아요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여러 증거와 가르침을 통하여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이 이 세상에 왔으나 믿지 못하던 한 무리들이 있었는데 당시에 가장 율법에 정통하다고 생각했던 제사장들과 유대인들의 지도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행하시고 가르치신 일들을 보고 구약성경에 선지자들이 말했던 메시아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오히려 그들의 사회적 지위를 유지하려는 잘못된 욕심 때문에 메시아를 알아보지 못하고 항상 죽일 궁리를 하였습니다. 드디어 때가 되어 가룟 유다의 탐욕을 이용하여 예수님을 배신하게 하여 붙잡았습니다(마26:14-16). 과거나 지금이나 사탄은 탐욕적인 사람들을 사용하여 주님과 교회를 고통스럽게 하지만 그 일로 탐욕적인 사람을 심판하고 교회를 건강하게 세우고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수단으로 사용합니다.
이 일을 오늘날의 시간표에 따라 도식화하면 수요일에 가룟 유다가 은 30에 예수님을 넘기려고 제사장들과 만나 모의하고 서로 계약을 맺었습니다(마26:14-16; 막14:10-11; 눅22:3-6). 목요일 저녁에 만찬을 드시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밤에 붙잡히시고 금요일 새벽까지 산헤드린 공회에서 밤새도록 대제사장들에 의해 심문을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금요일 새벽에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정을 내리고 당시 로마 총독이었던 빌라도에게 넘겨주었습니다. 요한복음에는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넘겨준 시간이 나타나 있지 않지만
마가복음 15:1에 보면 “새벽에 대제사장들과 즉시 장로들과 서기관들 곧 온 공회로 더불어 의논하고 예수를 결박하고 끌고 가서 빌라도에게 넘겨주니”라고 기록함으로 넘겨준 시간이 새벽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시각이 오늘날로 말하면 아침 6시에서 7시경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린 시각이 유대인의 시간이 제 삼시입니다(막15:25). 오늘날로 말하면 오전 9시입니다. 그러면 빌라도에게 재판을 받은 시간은 골고다까지 십자가를 지고 가고 거기에 매달리기까지의 과정을 생각한다면 불과 한 시간에서 두 시간 정도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제 삼시에 십자가에 달리시고 제 구시(오늘날의 시각은 오후 3시)에 운명하시고, 안식후 첫날(오늘날로 말하면 주일)에 부활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지금 빌라도 법정에 오게된 경위는 탐욕적인 사람인 유다와 당시 유대의 정치종교지도자들인 대제사장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이 서로 은 30에 파는 조건으로 계약을 맺고 빌라도 법정에 서게 된 것은 불과 이틀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유대인들이 왜 예수님을 빌라도의 법정에 예수님을 넘겼을까요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을 ‘관정으로’ 끌고 갔다고 하였습니다. 여기 ‘관정’(πραιδωριον)은 성경에 기록된 몇 안 되는 라틴어인데 Praetorium으로 총독이 공적인 업무를 보는 장소입니다. 사실 유대인의 산헤드린 공회는 사형집행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당시 로마가 지배를 했지만 로마는 정복당한 나라들에게 자치권을 허용하여 사형집행권까지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 성경학자들은 산헤드린 공회가 사형집행권이 없었기 때문에 빌라도에게 넘겨주었다고 말합니다. 그 근거로 요한복음 18:31에 보면 “우리에게는 사람을 죽이는 권이 없나이다”라는 말씀을 들고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에 보면 산헤드린 공회는 재판을 하고 사형을 집행할 수 있는 권한까지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사도행전 7장에 보면 산헤드린 공회의 재가를 받은 바울이 스데반을 돌로 쳐죽였습니다. 빌라도도 예수님을 재판하는 일에 대하여 요한복음 18:31에 “너희가 저를 데려다가 너희 법대로 재판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제사장들이 이 방법을 선택한 것은 당시에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들이 많았기 때문에 확실하게 죽일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재량권을 가지고 있는 종교적인 이유로 집행하지 않고 안전하고 확실하게 죽이기 위하여 정치적인 죄목을 씌어 죽이려고 한 것입니다. 만약에 이들이 재판하여 죽였다면 예수님의 시체를 자기 마음대로 처리하였을 것이고 부활을 입증할 수 있는 아리마대 요셉의 무덤에 들어가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한 행동을 가만히 보면 아주 이상한 부분이 있습니다. 이 때가 유월절 기간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유월절 무교병을 먹기 위하여 빌라도의 관정에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이 기간 동안에 유대인과 이방인이 서로 가까이 하고 교제하는 것은 위법이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구전으로 전해져 오는 장로들의 율법을 모은 미쉬나(Mishnah)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또한 사도행전에서도 사도 베드로가 로마의 백부장 고넬료에게 가는 문제를 말할 때 유대인과 이방인이 서로 교제하는 것이 위법이라고 하는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행10:28). 빌라도도 이 사실을 알고 직접 나가서 예수님을 고소하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물었습니다. 요한복음 18:29의 말씀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빌라도가 밖으로 저희에게 나가서 말하되 ‘무슨 일로 이 사람을 고소하느냐’” 그리고 나중에 재판을 할 때는 다시 관정으로 데리고 들어갔습니다(요18:33). 빌라도가 관정 밖으로 나와서 예수님을 고소하는 이유를 묻자 그들은 “이 사람이 행악자가 아니었더면 우리가 당신에게 넘기지 아니하였겠나이다”(요18:30)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빌라도는 “그러면 너희들이 데려다가 너희 법대로 재판하라”(요18:31)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이미 예수님을 죽이려고 계획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빌라도 법정까지 오게 한 것은 이미 그들이 여러 번 정죄한 바가 있는 신성모독죄, 즉 자신이 여호와 하나님이요 메시아라고 하는 죄(요5:18; 8:59; 10:31)로 인하여 사형을 시킬 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중을 소요하고 자기 나라를 건립한다는 정치적인 죄목으로 바꾸어 예수님을 안전하고 확실하게 죽이려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유대인들이 로마인의 관정에 들어가지 못한 이유를 율법을 지키는 것과 연관짓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 번째로는 예수님이 언제 십자가에 못 박히셨는지를 보여주려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는 이들의 행동이 이율배반적임을 보여주려는 것입니다. 당시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유월절을 거룩하게 지키려고 빌라도 법정에 내어주고 그 안에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유월절은 장래에 오실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사건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보지 못하고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게 하는 결정을 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외식적으로 거룩한 체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2. 여호와 하나님의 역사섭리와 시간표에 따라 진행된 사건
그런데 바로 이 사건에 대하여 요한복음 18:32에서 이 책의 저자인 사도 요한은 주석하기를 “이는 예수께서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가리켜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여러분! 이 의미가 무엇일까요 지금 성경의 기록자는 대제사장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이 탐욕스러운 가룟 유다와 계약을 맺어 이미 그들의 재판에서 사형을 언도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요한복음에도 보면 여러 차례 돌로 쳐서 죽일 수 있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요한복음 8:59과 10:31에 보면 나와 있습니다. 하지만 그 때 예수님이 어떤 방법으로 피하셨는지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지 않습니다만 돌에 맞아 죽는 죽음을 면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여러 번 자신이 십자가에 달려 죽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를 들어 요한복음 8:28에 보면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인자를 든 후에 내가 그 인 줄을 알고 또 내가 스스로 아무 것도 아니하고 오직 아버지께서 가르치신 대로 이러 것을 말하는 줄도 알리라”라고 하였습니다. 요한복음 12:32에서도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에 ‘인자가 들린다’라는 표현은 십자가에 달리신 사건과 승천하신 사건을 다 말할 수 있습니다만 일차적으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라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마태복음 20:18-19에 보면 더욱 분명한 주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거기에는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기우매 저희가 죽이기로 결안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주어 그를 능욕하며 채찍질하며 십자가에 못박게 하리니 제 삼일에 살아나리라”고 하셨습니다(참고 마26:2; 막10:33; 눅18:32). 그러면 사도 요한이 대제사장들이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내어주는 사건을 가리켜 십자가에 죽으실 것이라고 예언하신 것이 성취되는 사건으로 보고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흥미있는 것은 가룟 유다는 자신의 탐욕에 이끌려 사탄의 도구가 되어 은 30을 얻는 것처럼 보였으나 은 30 사용하지 못하고 자살하여 죽었습니다. 또한 대제사장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을 죽임으로 그들의 목적을 이루었다고 생각했으나 결국은 여호와 하나님이 작정하시고 주님이 이미 말씀하신 대로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이루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역사의 주도권을 사람들이 자기 스스로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그 역사의 배후에서 여호와 하나님이 주도권(initiative)을 가지고 계신다고 하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임으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지만 오히려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는 이 사건은 예수님이 힘이 없어서가 아니라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작정하신 것을 이루시는 일이라고 하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러한 사상은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고 제자들과 함께 내려오실 때에 예수님이 하신 말씀 가운데 잘 볼 수 있습니다. 유월절에 제자들과 만찬을 드신 후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고 내려오실 때에 그를 제자 중에 하나인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팔아 넘겼습니다.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에게서 파송된 무리들이 가룟 유다와 함께 검으로 잡으려고 왔습니다. 이것을 보고 베드로는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귀를 잘랐습니다. 이때에 예수님은 아주 놀라운 말씀을 하셨습니다. “네 검을 도로 집에 꽂으라.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하느니라.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 두 영 더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 아느냐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리요”(마26:52-54) 그리고 무리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강도를 잡는 것같이 검과 몽치를 가지고 나를 잡으러 나왔느냐 내가 날마다 성전에 앉아 가르쳤으되 너희가 나를 잡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나 이렇게 된 것은 다 선지자들의 글을 이루려 함이니라”(마26:55-56)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볼 때 우리가 알 수 있는 중요한 사상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죽으셔야 하는 것은 이미 우리의 구원을 위한 작정 가운데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3. 빌라도의 재판
이 사실은 빌라도가 예수님을 심문하는 사건 가운데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빌라도가 예수님을 심문하시는 내용 가운데 예수님에 관하여 세 가지 중요한 사실을 알게 해 줍니다. 첫 번째로는 예수님이 왜 이 세상에 오셨는지를 말해주고 있고, 두 번째로는 죄가 없으신 분이시며, 세 번째로는 모든 역사는 여호와 하나님이 주장하신다는 것입니다.
(1) 예수님은 여호와 하나님 나라를 세우시기 위하여 오신 왕이시다
먼저 빌라도의 심문에서 예수님이 왜 이 세상에 오셨는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빌라도가 예수님을 불러서 제일 먼저 물어본 말이 무엇입니까 요한복음 18:33을 보십시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빌라도가 이 질문을 한 것은 대제사장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이 고발한 죄목에 따라 유대국가를 세울 왕이냐고 물은 것입니다.
이 질문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이는 네가 스스로 하는 말이뇨 다른 사람들이 나를 대하여 하는 말이뇨”(요18:34)라고 물으셨습니다. 예수님이 빌라도에게 질문하신 것은 빌라도 개인에게 “너는 나에게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하는 질문입니다. 그러나 빌라도는 예수님의 이 질문에 대하여서는 대답하지 않고 “내가 유대인이냐 네 나라 사람과 대제사장들이 너를 넘겼으니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라고 다시 물었습니다. 빌라도의 이 대답은 빌라도 자신이 유대인이 아니기 예수님의 질문에 대답할 이유가 없고, 또한 할 필요도 없다고 하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다만 빌라도는 예수님이 어떤 일로 잡혀오게 되었는지를 밝히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빌라도가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라고 질문한 것은 그의 사고로 볼 때 논리적으로 맞지 않는 질문입니다. 빌라도가 보기에는 왕은 자기 군사도 있어야 하고, 무기도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빌라도의 눈에 비친 예수님은 이상한 왕이었습니다. 이러한 그에게 예수님이 “이는 네가 스스로 하는 말이뇨 다른 사람들이 나를 대하여 하는 말이뇨”라고 물었을 때 얼마나 황당했을까요 이 때에 예수님께서는 유대인의 왕이 아니고 온 세상의 주가 되신다고 하는 사실과, 여호와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왜 이 땅에 오셨는지를 명확하게 나타내 주는 말입니다. 요한복음 18:36에 보면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기우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나라가 아니었습니다. 헬라어 원문에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다”(υκ στιν κ του κοσμου τουτου)라는 의미는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이 말씀은 주님의 나라가 세상으로부터(out of) 세워지는 정부가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나라가 만일 세상으로부터 세워진 세상의 나라라고 한다면 자기 종들이 싸워서 빌라도 앞에 세우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의 나라가 어디에(장소) 있는지에 관하여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고, 그 나라가 어떤 것(본질)인지에 대하여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은 장소적인 개념의 유대인의 왕으로 제한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온 세상의 왕이심을 증거하신 것입니다.
여기에 대하여서는 이 말씀을 듣던 빌라도의 질문과 예수님의 답변에서 더욱 분명해 집니다. 빌라도가 예수님께서 세우실 나라에 대하여 이야기를 듣고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요18:37)라고 묻자 예수님께서는 “네 말과 같이 나는 왕이다. 내가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려 함이다”(요18:37)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빌라도의 심문을 받으면서 자신이 온 세상의 왕이며 그 여호와 하나님 나라의 구현을 위하여 세상에 왔다고 하시고, 곧 그 진리에 대하여 전파하시기 위하여 세상에 오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주님이 왕이 되어 영원히 다스려 주시는 여호와 하나님 나라를 이루시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어떻게 여호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될 수 있는지도 말씀해 주셨습니다. 요한복음 18:37을 보십시오. “빌라도가 가로되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려 함이로라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소리를 듣느니라 하신대” 예수님은 자신이 왕이라고 하시고,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소리를 듣느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목자와 양의 비유를 통하여 말씀하신 내용 가운데서도 나타나 있습니다. 요한복음 10:27에 보면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너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도 분명히 볼 수 있는 사상은 주님의 양들은 주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게 되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양이 아닌 자들은 그 말씀을 순종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빌라도에게 하신 이 말씀은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한다면 주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이루시는 여호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빌라도의 심문을 받으면서 자신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을 증거하시고, 누구든지 주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면 그 나라에 들어가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빌라도의 심문은 재판기록을 통하여 예수님의 온 세상의 왕이 되시며 그 나라를 이루시기 위하여 오셨다고 하는 사실을 증거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지막까지 여호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하시고 그 나라에 속한 자는 그 진리를 받아들이게 될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아마도 빌라도는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는 “진리가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우리는 진리가 무엇인지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말씀하시기를 “내가 곧 그 길이요 그 진리요 그 생명이라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고 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으면 주님이 다스리시는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이것이 빌라도가 “진리가 무엇이냐”에 대한 대답입니다. 빌라도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다면 그 역시 생명을 얻어서 여호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우유부단하게도 자신의 정치적인 생명의 염려로 인하여 그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하였습니다.
(2)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분이시다
빌라도의 재판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두 번째 진리는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분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빌라도가 예수님에 대하여 심문하시고 난 뒤에 유대인들에게 나가서 그는 말하기를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겠느라”고 하였습니다. 빌라도가 예수님을 심문한 결과 예수님에게 죄가 없다고 하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당시 유대인의 가장 중요한 명절인 유월절이 되면 한 사람을 놓아주는 관례에 따라 예수님과 강도인 바라바 중에 한 사람을 놓아 줄 것인데 한 사람을 택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런 백성들은 예수님 대신에 바라바를 선택하였습니다. 또한 빌라도가 재판 결과 죄가 없음을 보고도 예수님을 석방하지 못하고 대신 바라바를 놓아준 것은 민란이 일어나는 것을 두려워하였기 때문입니다(마27:24). 그리고 자신의 정치적 생명을 염려하였기 때문이기도 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이 소리를 지르며 “이 사람을 놓으면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니이다 무릇 자기를 왕이라 하는 자는 가이사를 배반하는 것이니이다”(요19:12)라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빌라도의 행동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이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죄가 없으신 분이심에도 불구하고 죽으셨다고 하는 것을 증거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죄가 없으심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바로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한 것입니다(벧전3:18).
(3) 모든 역사는 여호와 하나님이 주관하신다
특히 빌라도에게 심문을 받으신 사건이 기록된 것은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드러내 주는 사건 외에도 아주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고난과 십자가에 죽으시는 사건이 사람들이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빌라도는 A. D. 26-36년 어간에 유대를 통치한 로마의 총독이었습니다. 이것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우리 역사 가운데 이루셨다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고백하는 신앙고백 가운데 사도신경에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라고 되어 있습니다만 라틴어로 된 원문은 “본디오 빌라도가 통치하는 시대에 고난을 받으셨다”(passus sub Pontio Pilato, suffered under Pontius Pilate)라고 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죽으신 사건은 사람들이 지어낸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리고 빌라도의 이야기가 기록된 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행동과 세상 정부와의 관계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빌라도가 사형을 내리지만 실제로는 이 모든 일이 여호와 하나님의 구원역사 가운데서 여호와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되고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구원을 이루시되 세상의 여러 제도나 심지어 국가 권력을 통하여서도 이루신다고 하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주관하시고 통치하십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자기의 행위에 대하여 책임을 지게 되어 있습니다. 이 두 가지는 서로 상충되는 원리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여호와 하나님의 명령대로 움직일 수 있도록 칩(chip)이 내장된 대로 움직이는 로봇이 아니라 자유롭게 의사를 결정할 수 있는 인격적인 존재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이 우리의 행위에 대한 구실과 변명이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빌라도 법정까지 내어주어 십자가에 달리게 한 사건에서 잘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십자가의 형틀에 달리게 한 배후에 탐욕에 눈이 멀어 사탄의 도구가 되어 제사장들에게 넘겨주기로 한 가룟 유다와 역시 권력과 지위에 눈이 어두워 진리를 보지 못한 대제사장들과 장로들과 빌라도 역시 그 책임을 져야 합니다. 하지만 그들의 악한 행동조차도 그들의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구약시대부터 예언된 여호와 하나님의 거룩한 목적을 달성하는 도구일 뿐입니다. 그래서 저는 우리 교회 가족들에게 이 세상에 살면서 사탄의 도구가 되지 말고 여호와 하나님이 쓰시는 선한 도구가 되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고난주간을 맞이하면서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을 다시 확인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여 여호와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히 살게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는 죄가 없으신 분으로서 이 세상에 오셔서 고난을 받으신 것은 바로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님이 통치하시는 여호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위해서는 죄가 용서함을 받아야 합니다. 죄가 용서함을 받아 여호와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은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분으로서 우리의 죄를 당당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셨다고 하는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이것이 빌라도 법정에 말씀하신 진리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여 여호와 하나님과 교제하는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하여 행하신 이 모든 일을 꼭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할 때 주님이 고난받으시고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이루어주신 그 여호와 하나님 나라에서 참된 왕이신 주님의 통치를 받으며 살게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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