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려주일] 나귀새끼는 진정 누구의 것인가?
본문
나귀새끼는 진정 누구의 것인가?
마태복음21:1~11
종려주일이란,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시에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서 환영하였던 것에서 이름이 붙여졌습니다만, 오히려 “나귀새끼주일”이라고도 붙일 수 있겠다고 여겨집니다. 그 목적은, 거짓된 성전을 부수고 참된 성전을 일으켜 세우시고자 함이었습니다. 이것을 제대로알게 될 때, 하는 예수님의 고난과 부활을 통하여 주어지는 참된 성전 안에서 참된 천국을 소유하고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 여호수아서를 통해서 계속 묵상하며 배우고 있는, 천국을 침노하는 길은 이 길 외에 다른 길이 없습니다. 오늘 본문 속의 예수님의 모습을 통해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천국 침노의 방법과 방식은 무엇일까요?
나귀 새끼를 타시는 예수님
그것은 무엇보다도 먼저 나귀, 그것도 나귀새끼를 타시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우리는 그것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핵심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메시지를 너무 피상적으로만 듣고 흘리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을 좀 더 집중해 보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벳바게 맞은 편 마을로 가서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를 풀어서 가지고 오라고 합니다. 마가와 누가복음에서는 “아직 아무도 타보지 않은 나귀 새끼”(막11:2/눅19:30)를 풀어서 끌고 오라고 합니다. 마태복음에서는 나귀 새끼만 아니라 그 나귀 새끼의 어미도 데리고 오라고 분명히 강조하고 있습니다. 무엇을 강조하는 것일까요?
생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나귀 어미가 있는데 나귀 새끼를 데리고 오는 것이 얼마나 잔인한 일입니까? 그리고 나귀 새끼와 함께 어미를 끌고 오는 것이 더 쉬웠을 것입니다. 아마도 제자 둘을 보낸 것도 이 두 마리를 함께 데리고 오기 위해서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한 번 생각해 보면, 나귀 어미와 나귀 새끼가 있을 때, 만일 예루살렘성에 들어가시면서 무언가를 타셔야 한다면, 어느 것을 타는 것이 더 낫겠습니까? 어미이겠습니까? 그 새끼이겠습니까? 건장한 어미나귀를 타면 훨씬 더 안정감이 있었을 터인데, 어린 새끼를 타셨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이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주님의 겸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친히 말씀하시기를, “나는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나를 배우라”(마11:29)라고도 하셨습니다. “그리하면 쉼을 얻으리니” 약속하시면서 말입니다. 겸손한 것을 허약한 것이라고 오해하지 마십시오. 무조건 지고 양보하고 포기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바울사도는 “악에게 지지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하였습니다. 진정하고 참된 승리의 길이 바로 이 겸손임을 주님께서는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아기 새끼를 타야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세상 일을 하면서 무엇을 타고서 싸우십니까? 군마와 총기를 들고 허세를 부리십니까? 아닙니다. 나귀를 타야 합니다. 나귀새끼를 타야하는 것입니다(예화).
2. 말씀을 성취하시는 예수님
나귀새끼를 타신 것이 겸손을 강조한다고 하는 것은 마태가 인용하고 있는 선지자 스가랴의 글에도 분명하게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는 선지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마태의 이 말은 그저 지나놓고 나서 보니, 그렇게 맞아떨어지더라는 식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의도적으로 그렇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스가라선지자의 예언의 말씀을 항상 기억하시면서 당신의 활동과 사역에서 그것을 이루시기 위하여 총력을 기울이셨다는 것입니다. 스가랴의 예언만이 아닙니다. 구약성경의 모든 말씀들이 바로 당신 자신에게서 성취될 것임을 아시고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엠마로로 가는 두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눅24:44)고 하시면서 당신의 사역과 연관시키셨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에는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이룰 수 있는가 하는 것이 가장 우선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먹을 양식을 구해 왔을 때도,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요4:34)고 하셨고, 십자가상의 마지막 숨이 넘어가시는 순간에조차도 “내가 목마르다”(요19:28)는 말씀을 하시는데 그것조차도 “예수께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루어진 줄 아시고 성경을 응하게 하려”고 그 말씀을 하셨던 것입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고난주간에 더 깊이 묵상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천국을 침노하는 중요한 방법은 말씀을 따라서 살아가는 것이라는 점입니다. 말씀을 따라서 살아가는 것이 바로 성령으로 충만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몇 번이나 반복해서 강조합니다. 말씀을 모르고 말씀에 기초하지 못하면서 성령충만도 거짓된 것일 수가 있습니다. 물론,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매일 적용해야 할 것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부분적인 말씀을 오늘 묵상하면서 좀 더 넓은, 좀 더 깊은, 좀더 본질적인 메시지에 접근해 가는 것이 우선적입니다. 그러면서, 말씀을 따라서 실천하면서 살아가려고 하는 삶, 그것이 바로 천국을 이 땅에서 이루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어렵겠지만, 이런 분투의 모습을 서로가 나누는 것이 바로 ‘예삶모’라는 모임의 취지입니다(예화: 지난 주일 말씀의 적용).
3. 소유권을 주장하시는 예수님
마지막으로 오늘 우리가 적용하도록 도전하는 대지가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것을 소유하시고 필요하실 때에 내어놓도록 요구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나귀와 그 새끼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구체적으로 밝혀놓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밝혀놓지 않은 것 그 자체가 하나의 계시입니다. 강력한 계시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어떤 이들은 벳바게라고 하니, 맞은 편 마을은 베다니일 것이라고 보고 그 베다니에는 나사로와 그 두자매가 살고 있었으니, 나귀와 새끼의 소유주는 나사로가 아니겠느냐고 추측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누가복음을 보면, “벳바게와 베다니에 가까이 가셨을 때”라면서 “맞은 편 마을로 가라”고 하시니 우리는 알 수가 없습니다. 누구인지 구체적으로 알 수가 없습니다. 더욱이나, 당신께서 직접 주인에게 말할 수도 있었을 터인데, 제자 둘을 보냅니다. 사람들의 시선을 끌고자 하였음에 분명합니다. 지금 사람들의 관심을 주목시켜서 당신의 예루살렘 입성에 동원시키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점들이 우리들에게 무슨 교훈을 주느냐 하는 것입니다. 첫째, 예수님께서는 누구에게라도 무엇이라도 요구하실 수 있는 징집권이 있으시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제자들을 통하여 간접적으로 요구하신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이 점을 인정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종려주일은 ‘나귀새끼주일’이라고 하였습니다. 주님께서 이것을 요구하시는 권세가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주님의 제자들이 요구할 때에는 그 권세가 무시되어야 하는 것일까요? 나귀 새끼는 아직 사람을 태운 적이 없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태우고도 반항하지 않았습니다. 본성을 꺾어서 예수님께 순종하였던 것입니다. 우리도 이렇게 본성을 꺾어서 주님의 통치에 순종할 수 있는 것일까요? (예화)
사랑하는 천국제자들교회 성도 여러분, 나귀를 타시고 당신의 성에 들어가시는 예수님을 통해서 무엇을 배우십니까? 그렇게 우리의 주님께서 말씀을 철저하게 성취하셨던 것처럼, 우리도 오늘 말씀을 통하여 순종할 수 있을까요? 우리 주님의 소유권, 바로 나 자신에 대한 소유권을 인정할 수 있는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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