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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 깨어 있는 신앙의 사람 마 26:69-75, 살전5: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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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어 있는 신앙의 사람 마 26:69-75, 살전5:4-11




미국의 에드워즈 목사가 목회 하던 교구 내에 주정뱅이며 도박꾼으로 타락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한 번은 그가 이른 아침에 파랗게 질려 에드워즈 목사에게 달려왔습니다. 그리고 하는 말이 간밤에 꿈을 꾸었는데 천사가 나타나 “너 만일 회개하지 않으면 일 년 후에 너를 불러가겠다” 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하여튼 그 날부터 그는 술을 끊고, 도박도 끊고, 교회생활에 충실했습니다. 그러나 몇 개월 지나가더니 발걸음이 교회에서 뜸해지고 점점 열심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술도 다시 조금씩 마시고, 도박도 조금씩 손을 대기 시작했습니다. 에드워즈 목사는 그를 권하고 그가 본 꿈의 환상을 상기시켜 주었으나 그는 ‘글쎄요’ 하면서 교회에서 더욱 멀어져 갔습니다.


결국 완전히 이전 상태에 돌아가 권면하는 목사님께 반항적으로 나오면서 “무얼 개꿈을 가지고 그러십니까? 그것에 매여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지 않습니까?” 라고 하였습니다. 어느 날 밤 그는 술집에서 술에 만취가 되어 계단을 내려오다가 실족하여 떨어져 목이 꺾이어 급사를 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에드워즈 목사가 일기장을 찾아보니 그 날이 바로 1년 전 그가 자기를 찾아온 날이었다는 것입니다.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경고를 잊어버린 결과이었습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심판 하실 때 심판하시기 전 여러 차례 선지자나 여러 모양으로 경고 하시며, 권면 하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 때 돌이켜 깨어 있는 바른 신앙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와 사랑 가운데 주님 영광을 드러내며 삽니다.


그러나 그 경고를 무시하고 자행자지 하며 사는 자들에게 마침내 큰 시험에 빠지게 되거나, 심판이 임하게 되고, 그 심판을 피할 수 없게 되어 멸망케 되는 것을 봅니다. 복음서 본문에 베드로가 깨어 있지 못하다 주님을 부인하는 시험에 들었습니다. 서신서 본문에 ‘오직 깨어 정신을 차리라.’고 말씀합니다.


사순절 기간 두 본문을 중심으로 “깨어 있는 신앙의 사람”이란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깨어 있는 신앙의 사람은,


1.깨어 있어 영적으로 잘 무장한 신앙의 사람입니다.


복음서 본문에 베드로가 엉겁결에 주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는 자리에 떨어지게 되었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그것을 미리 아시고 훌륭한 신앙을 고백한 베드로에게 ‘오늘 밤 네가 닭이 울기 전 세 번 나를 부인 하리라’고 말씀 하신 바가 있었습니다. 그 때 베드로는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라고 했습니다. 38절에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고 당부 했는데, 그들은 깨어 기도하지 못하고 자고 있는 제자들에게 40절에 “제자들에게 오사 그가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간도 이렇게 깨어있을 수 없더냐” 여기의 ‘깨어 있다’는 원어로 ‘그레고레이테’인데 ‘영적으로 깨어 있다’는 의미입니다.


성도는 살전 5:16-18의 말씀처럼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며, 범사에 감사 하는 자가 되어야 마땅합니다. 서신서 본문에 주님의 재림에 대한 말씀을 하면서 주님을 도적처럼 맞지 않기 위해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정신을 차리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주님의 당부대로 기도로 깨어 있어야 할 때 잠자다 시험에 든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깨어 기도하지 않으면 시험에 들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크고 작은 시험이 올 때 왜 시험에 들고 넘어질까요? 그 시험을 견디어 낼 능력이 내게 없어서입니다. 깨어 기도하고 하나님 말씀을 가까이 하는 자에게 시험을 이길 능력을 주시고, 피할 길을 주십니다. 그래서 시험을 이길 수 있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깨어있어야 할 때 깨어 있어야 합니다. 제자들은 깨어 기도하기를 원했지만 육체의 피곤함이 그들을 방해하였습니다. 사단은 말씀의 능력을 알기 때문에 졸게 하거나 딴 생각이 나게 해서 말씀을 듣지 못하게 합니다. 또 사단은 기도의 능력이 얼마나 큰지를 알고 있기 때문에 여러 방법을 동원해 기도 하지 못하게 역사합니다. 성도가 기도할 때 주님의 도우시는 은혜를 받게 되어 능히 시험을 이길 수 있게 되고, 믿음의 승리자가 됩니다.


루터(Martin Luther)가 전하는 비유 가운데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어느 날 사단이 교인들의 영혼을 파괴하기 위하여 마귀들과 의논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 마귀가 나와 보고합니다. “한 무리의 교인들이 광야를 걷고 있었습니다. 사자들을 풀어놓았지요. 사막에는 교인들의 찢겨진 시체로 가득해졌습니다.” 그러자 사단은 “그래서 어쨌단 말인가? 사자는 그들의 몸을 파괴했지만 영혼은 구원받지 않았는가? 내가 찾는 것은 영혼이다.”


두 번째 마귀가 보고합니다. “기독교 순례자들이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고 있었습니다. 풍랑을 몰아치게 했습니다. 배가 바위에 부딪히자 타고 있던 교인들이 익사했습니다.” 그때 사단은 “그래서 어쨌단 말인가? 육신은 바다에서 죽었지만 영혼은 구원받지 않았는가? 내가 찾는 것은 영혼이다.”


세 번째 마귀가 보고합니다. “나는 10년 동안 교인들을 잠에 빠지도록 노력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이 신앙을 버리고 주를 부인하는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사단도 그때서야 영혼을 빼앗았다고 기뻐하였습니다. 마귀가 그리스도인을 멸망시키는 전략은 무서운 사자도 거친 태풍도 아닙니다. 질병도 아닙니다. 영적으로 잠들게 하는 전략입니다. 깨어 말씀을 가까이 하고, 기도하지 못하도록 하게 합니다. 조는 것이 자는 것의 예행연습이라면, 자는 것은 죽는 것의 예행연습입니다. 그러므로 깨어 말씀을 가까이 하고, 깨어 기도하여 영적으로 잘 무장하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깨어있지 않으면 결국 베드로처럼 주를 부인하고야 말 것입니다. 베드로는 다행히 닭 우는 소리를 듣고 주님 하신 말씀이 생각이 나 밖에 나가 통곡하며 울었습니다. 아마도 울며 회개하는 기도를 드렸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 늘 깨어 있어 말씀과 기도로 영적 무장을 잘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2.빛의 자녀답게 낮 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는 사람입니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서신서 본문 살전5:4-8에서 “형제들아 너희는 어둠에 있지 아니하매 그 날이 도둑 같이 너희에게 임하지 못하리니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 우리가 밤이나 어둠에 속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정신을 차릴지라 자는 자들은 밤에 자고 취하는 자들은 밤에 취하되 우리는 낮에 속하였으니 정신을 차리고 믿음과 사랑의 호심경을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라고 말합니다. 여기 밤에 속한 자란 주의 재림에 소망을 두지 않고 어두움, 즉 세상 풍조를 따라 죄에 휩쓸려 살아가는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이런 신자를 잠자는 신앙인이라고 말합니다. 잠을 잔다는 말은 그들의 신앙적인 상태를 의미하는데 깨어 경성하여 있지 못한 생활로 세상에 취한 상태, 세속적 신앙, 기복적 신앙에 젖어 있는 상태를 의미하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종말에 살아가는 성도들의 영적 상태에 대하여 이 밤에 속한 상태에 있을 것이라고 경종하셨는데, 노아 시대 사람들의 예를 들어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홍수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저희를 멸하기까지 저희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마24:37-39)고 경종하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고 말합니다. 성도는 참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마음에 모시고 사는 자들로 깨어 근신하는 신앙을 가지고 살게 되는데, 정신을 차리고 믿음과 사랑의 호심경을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고 살아갑니다. 옛날에는 전쟁할 때, 칼을 휘두르거나 활을 쏘거나 창으로 찌르면서 적과 싸웠습니다. 전쟁 중 싸움을 할 때, 사람의 몸에서 가장 보호해야 할 곳이 심장입니다. 심장이 찔리면 한 순간에 죽습니다. 그래서 가슴에 단단한 흉배인 호심경을 붙이어 가슴을 보호합니다. 또 머리도 대단히 중요합니다. 머리를 다치면 생명이 위험합니다. 그래서 머리에는 투구를 써서 생명을 보호했습니다. 8절에 ‘구원의 소망의 투구’라고 했습니다. 성도는 항상 머릿속에 하나님께 대한 소망으로 가득 차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주께서 재림 하시는 ‘주의 날’에 대한 약속을 바라보는 소망이 있어야 합니다.


또한 영적 전쟁에서 성도들이 마귀와의 싸움에서 이기려면 가슴 무장을 잘 해야 하는데, 가슴 무장은 믿음과 사랑으로 해야 합니다. 믿음과 사랑은 서로 정비례 합니다. 믿음이 큰 사람은 사랑도 크고, 사랑이 큰 사람은 믿음도 큽니다. 그래서 성도가 얼마나 주님을 사랑하고, 교회를 사랑하고, 성도를 사랑하는지를 보면 믿음의 수준을 알 수 있습니다. 좋은 믿음에는 언제나 사랑이 따라다닙니다. 부활의 주님은 십자가 사건 후 다시 고기 잡으러 고향으로 내려간 베드로를 만나셔서 ‘네가 나를 사랑 하느냐 세 번이나 물으시면서 주님의 양들을 치는 것과 먹이기를 당부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에 대해 감사 했는데, 그것은 그들에게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성도들은 믿음만큼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하나님을 사랑 하는 사람들은 그의 삶 가운데 나타나는 흔적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만 살려고 힘씁니다. *거룩하게 살려고 힘씁니다. *하나님의 뜻대로만 살려고 노력합니다. *하나님을 위한 소원과 꿈을 가지고 살면서 계획을 세우고, 목표를 정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살아가기를 힘씁니다. *하나님을 위해, 주님과 몸 된 교회와 복음을 위해 받는 고난을 영광으로 알고 기뻐합니다. *주를 위해서 죽도록 충성합니다. 순교를 당해도 영광으로 생각하며 기쁨으로 순교합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주님의 몸 된 교회와 형제들을 사랑합니다. 심지어는 원수까지도 사랑합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기뻐하시고, 영광을 받으십니다.


우리 모두 빛의 자녀답게 낮 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는 성도되시기를 소망합니다.


3.예수께서 항상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의 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복음서 본문 58절에 “베드로가 멀찍이 예수를 따라 대제사장의 집 뜰에까지 가서 그 결말을 보려고 안에 들어가 하인들과 함께 앉았더라.”했습니다. 여기의 ‘멀찍이’는 원어로 ‘아포 마크로덴’인데 ‘관계가 끊어지지 않을 정도의 먼 관계’를 의미합니다. 베드로는 안전을 위해 멀찍이 따를 뿐이었습니다. 멀찍이 따르는 것은 달아나는 것은 아니지만 자신의 충성됨을 드러내지 못하는 나약함을 보이는 모습입니다. 그는 어정쩡하게 따르다 엉겁결에 주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는 자리에 떨어졌습니다.


오늘 우리도 본문의 베드로처럼 부인하지 않기 위해서는 멀찍이 주님을 따르는 모습이 아닌지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말로만 주님을 믿는다 하고 행위로는 부인 하는 신앙, 주를 믿기는 하지만 손해 보지 않을 정도로 거리를 두고 주를 섬기는 신앙, 주님의 뜻을 헤아리기보다 내 생각을 앞세우는 신앙, 다른 사람의 유익을 생각하지 않고 자기 유익만을 앞세우는 이기적인 신앙, 신앙 때문에 고난이 오면 뒷걸음질 하는 신앙, 불의 앞에서 침묵하는 신앙, 강도 만난 이웃을 보고도 모른 척 하는 신앙 등은 멀찍이 주님을 따르는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서신서 본문 살전5:9-10에 “하나님이 우리를 세우심은 노하심에 이르게 하심이 아니요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하심이라/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사 우리로 하여금 깨어 있든지 자든지 자기와 함께 살게 하려 하셨느니라.” 했습니다. 제자들이 주님과 함께 있다가 어느 날 갑자기 몇 날이 지나면 십자가의 죽으심을 말씀 하고 주님이 그들의 곁을 떠나심에 대해 말씀 하실 때 여간 근심 되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것도 그럴 것이 지금까지 주님은 그들에게 삶의 축이요, 삶의 근거와 목적이요, 태산 같은 의지요, 문제의 해결사요, 소망이었습니다. 주님이 그들 곁에 있는 한 그 무엇도, 그 누구도, 어떤 일을 만나도 염려할 것도, 두려울 것도, 부러울 것도 없었습니다. 하나, 하나가 그저 자랑스럽기도 하고, 놀랍기만 했습니다. 가나 혼인 잔치 집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실 때에도, 병자들을 고치실 때에도, 오병이어, 칠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실 때에도, 바람과 바다를 꾸짖어 풍랑을 잔잔케 하실 때에도, 군대 귀신들린 자를 고치실 때에도, 죽은 자를 살리실 때에도, 권세 있는 가르침을 받을 때에도 그저 놀랍고, 감격이었습니다.


그런 주님이 그들 곁에 없게 된다면 지금까지의 모든 기대와 소망이 무너지는 일이었습니다. 주님은 그런 그들에게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14:1-3)고 말씀 하셨습니다. 주님은 십자가 후에 부활을 말씀 하셨지만 제자들의 믿음이 약하여 그 말씀을 소화할 수 없었습니다. 부활 이후, 죽음 넘어 영원한 하늘나라에서 이어지는 영광스런 임마누엘의 은총을 이해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성부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과 일체이신 분으로 창조주요, 모든 권세를 가지신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가 되시는 분이요, 산자와 죽은 자를 심판 하실 분이요, 성도의 위대한 변호사가 되시는 분으로, 이 주님과의 사귐을 가지고 사는 것 보다 가치 있고, 안전하고, 신뢰할 수 있는 것을 세상 어디에서, 누구에게서, 무엇에서 찾아 볼 수 있겠습니까? 링컨 대통령이 변호사로 있을 때 의뢰인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고 합니다.


한 족제비가 닭을 훔쳐 먹은 죄목으로 원숭이 판사의 재판을 받게 됐습니다. 족제비는 머리 좋은 여우를 변호사로 채용했습니다. 여우가 보니 족제비가 닭을 훔쳐 먹은 것이 틀림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증인이 셋이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여우는 이렇게 변호했습니다. “재판장님 족제비가 닭을 훔쳐 먹은 것을 본 증인은 셋밖에 안되지만 보지 못한 증인은 백도 천도 넘습니다. 그러므로 족제비는 무죄입니다.” 결국 머리가 부족한 원숭이는 여우의 논리에 넘어가고 말았습니다.


변호사는 재판에 결정적인 영향을 줍니다. 히 7:25에 ‘예수께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다.’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100% 승소하는 변호사입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며, 보혜사요, 영원한 대제사장이요, 기묘자요, 모사요, 전능하신 하나님이요, 영존하신 아버지요, 평강의 왕이신 예수님을 나의 주와 변호사로 삼게 되면 승리와 영생의 삶이 보장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 깨어 있는 신앙으로 항상 주님과 함께 하는 임마누엘 신앙으로 살다가 주님과 함께 영생에 들어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정리합니다.


사순절 기간 두 본문을 중심으로 “깨어 있는 신앙의 사람”이란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깨어 있는 신앙의 사람은,


◆.깨어 있어 영적으로 잘 무장한 신앙의 사람입니다.


◆.빛의 자녀답게 낮 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는 사람입니다.


◆.예수께서 항상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의 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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