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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려주일] 세 개의 십자가

본문

'해골의 곳,' 골고다 언덕에는 세 개의 십자가가 서 있었습니다. 정중앙에 우리 주 예수님을 매달기 위한 십자가가 있었고, 두 사람의 행악자들이 좌편과 우편에 함께 못 박혔습니다(마 27: 38; 막 15: 27). 이 두사람이 구체적으로 어떤 잘못을 저질렀는지 명확하지 않지만 십자가에 처형될 만큼 큰 죄를 저지른 흉악범들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만일 오늘 우리가 예수님을 비롯한 두 명의 강도들을 동시에 같은 장소에서 십자가에 매단다면, 성경에 나오는 위치와는 사뭇 다르게 할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외아들과 강도 두 사람을 똑같이 매 달수는 없기에 두 사람은 서로 가까이 함께 십자가에 못박을 것이고, 예수님은 이들로부터 조금 떨어진 곳에 있게 해서 거룩하신 예수님과 흉악범들을 구분시키고자 할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33절에 보면 분명히 예수님을 정중앙으로 해서 두 명의 강도들이 왼쪽과 오른쪽에서 각각 십자가에 달렸다고 말씀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이것은 가장 거룩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이 가장 불의한 흉악범들과 함께 숨지도록 배려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특별한 계획 때문이었습니다. 사 53: 12은 말씀합니다.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입었음이라. " 메시아 예수께서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입게 하도록 강도 두 사람들 사이에 끼여서 함께 십자가형을 받도록 여호와 하나님께서 계획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 시대의 십자가형은 한 가지 중요한 목적이 있었습니다. 로마 황제에 대항해서 반란을 일으키거나 국법질서를 문란시키는 사람들, 혹은 살인이나 폭동을 일으키는 흉악범들을 처벌하기 위하여 인류가 그 때까지 고안해 낼 수 있었던 가장 잔인한 사형방법이 십자가형이었습니다. 그런데 십자가형은 철두철미 'public spectacle,' 즉 십자가형의 잔인성을 만천하의 대중들에게 보여줌으로서 똑같은 범죄가 재발되는 것을 막는데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 인간이 느낄 수 있는 최고의 수치와 고통을 온 천하에 공개함으로서, 이를 지켜보는 백성들이 공포에 떨게 해서 비슷한 범죄를 미리 예방하려는데 그 중요한 목적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께서 잔인 무도한 강도 두 사람 사이에 끼여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은 우연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의 섬세한 뜻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베들레헴 마구간에서 짐승들에 둘러 쌓여 태어나셨던 예수님은 죽음 역시 가장 비천하고 죄많은 사람들과 더불어 나누셨던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극악무도한 강도들과 똑같은 죄인이 되셔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입니다.
 승(承): '최후의 갈림길'
두 사람의 강도들 중에 어떤 사람이 더 많은 죄를 저질렀는지 분명치 않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분명히 무지막지해서 전과가 아주 좋지 않은 무장강도들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최고형인 십자가형에 처해졌으며, 더욱이 성경은 이들이 남의 물건을 강제로 빼앗는 강도들이라고 분명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도적들이요 산적들이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면 이들과 마찬가지로 우리 역시 도적들입니다. 강도들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생명 주시고, 달란트를 주시고, 물질을 주시고, 친구와 기회와 시간을 주셨는데 우리는 그 모든 것을 여호와 하나님 위하여 쓰지 않았습니다. 거꾸로 우리 자신의 이기적인 목적만을 위하여 사용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역시 영적인 도적들이요 십자가 위에서 형벌 받아 마땅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예수님 좌우 편에 각각 못 박혔던 강도들이 우리들의 모습일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두 사람의 강도가 똑같이 십자가 위에서 최후를 맞았지만 예수님을 대하는 태도는 판이하게 달랐습니다. 한 강도는 이렇게 예수님을 조롱하고 비방했습니다. 39절을 보세요.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 여러분, 본문 말씀을 자세히 읽어보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 예수님을 조롱했던 무리는 크게 세 부류였습니다. 먼저 35절에 보면 '유대교의 관원들과 백성들'이 예수님을 비웃었습니다. "저가 남을 구원하였으니 만일 여호와 하나님의 택하신 자 그리스도여든 자기도 구원할지어다" 라고 조롱했습니다. 또한 36-37절에 보면 '로마 군병들'이 예수님께 신 포도주를 주면서 희롱했습니다. "네가 만일 유대인의 왕이어든 네가 너를 구원하라"고 야유를 보냈습니다. 그리고 강도 한 사람이 이들 무리와 똑같은 방법으로 예수님을 모욕했습니다.
자기의 동료 강도 한 사람이 예수님을 비웃는 모습을 지켜 본 다른 편 강도는 그를 점잖게 꾸짖습니다. 40-41절을 자세히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가로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여호와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느냐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의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이 사람은 분명히 최후의 순간을 맞으면서 자기의 죄를 깨달은 것이 분명합니다. 한 사람의 강도는 마지막 죽어가면서도 자신의 죄를 전혀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예수님을 조롱했지만, 다른 한 사람의 강도는 확실히 달랐습니다. 그는 자기 자신은 죄를 지었기에 당연히 받아야 할 십자가형을 받고 있지만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힐만한 아무런 죄가 없는 분이심을 확신했습니다.
아마도 이 사람의 마음을 움직였던 것은 십자가 위에서 보여주신 예수님의 놀라운 사랑과 용서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34절을 보세요.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 자기를 십자가에 못박는 원수들을 용서해달라고 기도하시는 예수님, 이것은 예수님이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고서는 할 수 없는 기도였습니다. 어떤 계기이든지 간에 한 사람의 강도는 마지막 숨을 거두기 바로 직전에 예수님께서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게 된 것은 확실합니다. 그가 이와 같은 확신이 있었다는 증거는 42절에 그대로 나타납니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 예수님께서 운명하신 다음에 천국에 들어가시게 될 때 자기도 기억해달라는 부탁을 하였던 것입니다. 결국 그의 소원대로 이 강도는 운명한 뒤 예수님과 더불어 낙원에 들어가는 은혜를 얻게 되었습니다.
아이러니컬한 것은 예수님과 더불어 천국에 들어간 최초의 사람은 베드로나 야고보나 요한과 같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도 아니었습니다. 사도 바울도 아니었습니다. 정반대로 일생 동안 못된 짓만 골라했던 흉악범, 강도 한 사람이 천국에 들어간 첫 번째 손님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학자는 이 구원받은 강도의 이야기가 '기독교 최초의 설교'라고까지 말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친 예수님의 제자들, 즉 베드로를 비롯한 사도들조차도 깨닫지 못한 구속론적 진리를 이 강도는 바로 깨달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메시아가 버림받고, 고난받고, 십자가에 못 박힌다는 사실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예수님을 버리고 제 목숨 하나 보전하기 위하여 살길 찾아 뿔뿔이 흩어졌던 것입니다. 그런데 전혀 엉뚱하게도 강도 한 사람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는 무기력한 예수님이 진정한 메시아인 것을 발견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이 자기와 마찬가지로 죄인의 모습이 되어 처절히 죽어가야만 한다는 사실을 옳게 깨달았던 것입니다.
 전(轉): '역전승(逆轉勝)의 십자가,' '완패(完敗)의 십자가,' 그리고 '완승(完勝)의 십자가'
여러분, 우리는 구원받은 강도의 믿음을 예사롭게 보아 넘겨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그는 예수님께서 능력이 많으실 때 자기를 기억해달라고 부탁한 것이 아닙니다. 각색 병자들을 고치시고, 죽은 자들을 살리시고, 물이 변하여 포도주 만드실 때 예수님을 믿었던 것이 아닙니다. 정반대로 자기와 똑같이 십자가 위에서 무기력하게 죽어 가시는 지금, 예수님의 여호와 하나님 아들 되심을 믿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자기 자신은 물론이고 아무도 구원할 수 없는 가장 무기력한 상태에 빠져 있습니다. 'Helplessness!,' '속수무책,' 아무것도 하실 수 없는 절망적인 상황 한 가운데 빠진 예수님께 부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무언가 도움이 필요할 때 우리는 결코 우리와 똑같은 어려움 속에 빠진 사람에게 도움을 요청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하나의 상식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강도가 자기와 함께 무기력하게 죽어 가시는 예수님께 자기를 구원해달라고 부탁한 것은 그의 거짓 없고 순수한 믿음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가 예수님을 믿은 것은 예수님의 인기가 높았을 때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엄청난 기적을 행할 때가 결코 아니었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믿은 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다음 해가 빛을 잃고 온 땅에 어둠이 덮었을 때가 아닙니다(눅 23: 44 참조).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둘로 찢어지고 땅이 진동하고 바위가 터지고 무덤들이 열려 죽은 자들의 몸이 많이 일어난 때가 아닙니다(마 27: 51-2 참조). 그는 이와 같이 아직도 그 어떠한 부활과 승천의 조짐도 기대할 수 없었던 절망적인 상황 한가운데에서 예수님을 의지했던 것입니다.
분명히 예수님께서 먼저 십자가 위에서 운명하신 뒤 강도들이 뒤이어 세상을 떠났습니다. 천국 낙원에 먼저 도착하신 예수님께서 예수님을 인정한 강도를 기쁨으로 영접했을 것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찰스 스펄젼(Charles Spurgeon)은 구원받은 강도를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그는 지상에서 예수님의 마지막 동반자였을 뿐 아니라 천국에 함께 들어간 최초의 동반자이기도 했다. " 옳습니다. 그는 세례나 성만찬도 받지 않은 채 예수님과 함께 낙원에 들어가는 영광을 얻었습니다. 이것은 100% 그의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자기는 자기의 죄로 인해 마땅히 받아야만 할 형벌을 받고 있지만 예수님은 죄 없이 십자가를 지신다는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천국으로 인도하시라는 확신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는 구원받은 강도 이야기를 읽으면서 9회 말 3: 0으로 지고 있는 한 야구팀의 마지막 타자를 연상하게 되었습니다. 2사(死) 후 만루가 된 상태에서 투 스트라이크 쓰리 볼의 풀 카운트 하에서 타자가 투수를 노려봅니다. 만일 여기서 삼진 아웃이 되면 경기는 3: 0으로 지고 맙니다. 이 때 타자는 온 사력을 다해서 투수가 던진 볼을 힘껏 내려 쳤는데 홈런이었습니다. 지고 있었던 팀이 4: 3으로 역전승을 거둔 것입니다! 구원받은 강도는 바로 이와 같이 역전의 홈런을 친 야구 선수와도 같습니다. 그는 한번도 예수님을 만나보지 못한 가운데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을 처음 만났습니다. 그냥 죄인으로 죽느냐, 아니면 그동안의 죄를 다 씻고 새사람으로 다시 태어나느냐 하는 절체 절명의 위기 속에서 그는 역전의 홈런을 쳤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패배하고 있던 인생을 승리하도록 인생의 수레바퀴를 되돌릴 수가 있었습니다.
여러분, 그러나 구원받지 못한 강도를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그에게도 똑같이 역전의 홈런을 칠 수 있는 기회가 왔지만 그는 내세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자기가 지은 죄에 대해서 죄책감도 없었습니다. 더욱이 그는 예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자기와 똑같은 십자가형의 죄수로 생각하면서 마지막 죽어 가는 순간까지 예수님을 모욕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구원받은 강도와 구원받지 못한 강도를 갈라놓은 것은 누가 죄를 더 많이 지었느냐, 적게 지었느냐가 아니었습니다. 누가 예수님의 십자가로부터 더 가까이 혹은 더 멀리 떨어져 있었느냐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믿음 하나가 천당과 지옥을 갈라놓았던 것입니다!
여러분, 이 두 사람의 강도들이야말로 온 인류를 그대로 대변합니다. 구원받은 세계와 구원받지 못한 세계는 지리적으로나 인종적으로나 경제적으로 갈라지지 않습니다! 상대적으로 더 선하고 상대적으로 더 악한 사람들에 의하여 구분되지도 않습니다. 온 인류, 온 세계, 온 문화가 오직 십자가 하나로 구분이 됩니다. 십자가 한 편에 예수님의 구주 되심을 인정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구원받은 세계에 사는 사람들입니다! 십자가 다른 편에 죽어 가는 마지막 순간까지 예수님을 인정하지 않는 불신앙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구원받지 못한 세계에 사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들은 오늘 예수님의 십자가 어느 편에 서 계십니까 여러분이 죄인들임을 인정하시고 예수님의 용서와 은혜를 구하는 강도 편에서 서 계십니까 아니면 끝까지 여러분의 죄악을 자백하지 않은 채 불신앙에 가득 차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조롱하는 편에 서 계십니까 한 강도의 십자가는 완패(完敗)의 십자가였습니다. 역전할 기회가 똑같이 주어졌지만 불신앙의 길을 걸어감으로서 인생에 완전히 패배한 사람이 지는 십자가인 것입니다. 또 한 사람의 강도가 진 십자가는 역전승(逆轉勝)의 십자가였습니다. 자신의 죄를 깨닫고 뉘우치면서 십자가 위에서 가장 무기력했던 예수님을 믿어서 화려한 재기에 성공한 사람인 것입니다. 비록 이 땅위에서의 삶의 부끄러운 전과로 가득 찼지만 다가오는 내세에서는 주님과 함께 낙원에 들어가는 역전의 영광을 얻었습니다. 또한 구원받은 강도의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마지막 숨을 거두시는 그 시간까지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눅 19: 10)라는 말씀을 이루셨음을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십자가는 완승(完勝)의 십자가인 것입니다.
 결(結): '어떤 십자가를 선택하려는가'
렘브란트(Rembrandt, 1606-69)의 그림 중에 세 개의 십자가(The Three Crosses)라는 명화가 있습니다. 이 그림의 정중앙에는 예수님께서 달려 돌아가신 십자가가 서 있습니다. 그리고 그 좌우 편에 두 강도가 달려 있습니다. 그런데 십자가 밑에 모여서 야유를 퍼붓는 군중들의 모습이 매우 인상적입니다. 예수님을 조롱하고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외치는 사람들의 얼굴 표정 하나 하나가 아주 실감나게 그려져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요, 그림 모퉁이 구석에다가 그림자에 가려 간신히 알아 볼 수 있는 사람의 얼굴이 하나 그려져 있습니다. 미술사가들은 이 사람은 렘브란트가 자신의 모습을 그려 넣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렘브란트 역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는 일에 동참했다는 사실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는 그 때 그 무리들과 함께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주인공들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생이 끝나는 날 예수님의 오른편과 왼편에 달린 강도들처럼 천국이냐 지옥이냐 둘 중 하나를 선택할 입장에 놓이게 될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은 어떤 십자가를 선택하시겠습니까 구원받은 강도의 십자가입니까 아니면 구원받지 못한 강도의 십자가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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