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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려주일] 천국 왕자의 고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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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 깁슨이 제작하고 감독해서 만든 ‘그리스도의 수난 (The Passion of the Christ)’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전세계적으로 붐을 일으키고 있는 그 영화는 예수님이 운명하시기 직전 12시간을 아주 실감나게 다루고 있습니다.
지난달 3월 22일에는 한국에 가져와서 온누리 교회에서 시사회가 열렸는데 관중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당하시는 극심한 고통들....
로마 병사가 쇳조각이 달린 채찍으로 예수님의 등과 이마, 배 등을 때리는 장면들...
그런데 주님이 당하신 십자가 고통은 그 영화보다 더 실제적인 고통이었습니다.
우리는 지난 한주간 집회를 통하여 은혜를 충만히 받고
이번주에는 예수님의 수난, 고통, 죽음을 묵상하는 고난주일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고난주일인 오늘 우리가 함께 십자가를 지시는 주님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은 우리가 잘 아는 겟세마네동산에서의 기도입니다.
제자들과 함께 세족식과 성만찬을 하시고
주님은 평상시처럼 겟세마네동산으로 가신후 밤이 맞도록 엎드려 기도하셨습니다.
그날밤 예수님은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셨는데 얼마나 애타게 기도하셨는지,
땀방울이 피로 변할 정도였습니다.
그날밤 예수님은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라고 여호와 하나님께 통곡하며 기도하셨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주님의 고난을 묵상하는 태평양의 성도 여러분!
우리 주님은 일찍이 공생애 기간동안에 이날처럼 이토록 심각하게 고민하신 적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다른 성경을 보면 예수님은 그때 제자들에게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다’라고 하셨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무엇이 이토록 예수님을 힘들고 괴롭게 하였고, 예수님이 간절히 기도하게 하신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십자가에서 처형 당하는 것을 아시는 육체적인 아픔 때문이었을까요
예수님도 우리와 다를바가 없는 통증을 느끼는 육체를 가지신 분이셨습니다.
모든 육체는 아픔이 있을 때 고통을 느끼게 되어 있습니다.
어제 낮에 저는 대구에서 우리교회까지 달려온 병든 육체의 통증을 부여잡고
괴로워하는 젊은 집사님 부부를 만났습니다.
경북대학교 병원에서 사망진단을 받은 그들은 이제 울 기력도 없이 힘들어하는 그분들을
주님 이름으로 위로해 보았습니다.
폐암으로 돌아가시던 제 가까운 가족이 그 질병의 고통이 너무 힘들어
진땀을 흘리다가 정신을 잃는 것을 지켜보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이 고통스러워 하신 까닭이
십자가에서 못에 박히고 창에 찔리는 것 때문에 겪을 육체적 고통 때문이었을까요
그건 아닙니다.
육체적인 고통 때문에 당한 것이 아니라면 죽음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을까요
학자들은 인간만 아니라 모든 생명들은 한결같이 죽음에 대한 본능적인 두려움이 있다고 합니다.
그토록 힘센 황소도 도살장 앞에서는 울면서 고개를 숙이고,
앙칼스럽던 개들도 개장수 앞에서는 꼬리를 낮춘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억센 사형수라고 해도 사형을 언도 받으면 그토록 강퍅하던 눈빛이 변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도 죽음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그토록 온 밤을 지세우며 고민하고 통곡하셨을까요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시는 예수님은 사역을 시작하시기 전에,
자기가 누구인가라는 정체성을 확립하신 분이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보낸 구세주의 사역을 감당할 메시야임을 분명히 아신 분이셨습니다.
공생애를 마치고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것을 미리 아셨고 살아오셨기 때문에 죽음을 두려워하실 분은 아니십니다.
예수님은 죽음 다음에 분명히 자신이 부활하신다고 말씀하셨기에 죽음이 전부가 아님을 아셨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죽음에 대한 두려움도 없는 예수님께서 통곡하시며 그토록 우셨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육체의 아픔도 아니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도 아니라면 무엇 때문에 힘들어하신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주님이 당하신 영적 고통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영적 고통! 즉 여호와 하나님과 예수님이 떨어지고, 멀어지고, 분리되는 아픔 때문에 주님의 힘들어하신 것이었습니다.
태초부터 그때까지 여호와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 삼위이신 여호와 하나님은 한번도 분리되거나 떨어진 적이 없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과 예수님은 그 영광과 능력과 권능과 성품에 있어서
동일한 속성을 가지신 분이시기에 분리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역사상 딱 한번 분리되게 되었는데 그 순간이 바로 십자가 처형의 순간입니다.
분리의 상징인 십자가에서 죄와 거룩이 분리되고, 여호와 하나님과 인간이 분리된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인간이 지은 죄의 대표로 예수님이 서시고 그 순간에는 여호와 하나님도 예수님을 외면하시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나의 여호와 하나님, 나의 여호와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며 십자가 위에서 절규하셨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의 절규는 바로 여호와 하나님과의 분리에 대한 고통을 보여주는 신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통곡하시는 목소리를 잊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신앙은 여호와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고, 주님과 함께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과 동행하다가 ‘죄’를 짖게 되면 우리는 그 순간에 즉시 거룩하신 여호와 하나님을 떠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는 이사야 59장에서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여호와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동안 새벽집회를 통해서 지키고 있는 사순절은
바로 여호와 하나님을 떠날 수 밖에 없던 죄를 회개하는 기간입니다.
역사적으로 사순절은 ‘재의 수요일, Ash Wednesday’ 이라고 불렀는데
회개할 때 머리에 재를 뿌리던 것에서 유래되었습니다.
그렇게 회개하고 죄를 멀리하겠다고,
여호와 하나님과 다시는 분리되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던것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구약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바로 그러한 신앙! 죄를 범하지 않겠다는 결심이 필요합니다.
죄를 멀리하고 악은 모양이라도 던져 버리고 죄를 짓지 않도록 몸부림치며 자신을 지키는 울부짖음이 필요합니다.
여호와 하나님과 분리되지 않도록 자신을 성결케 하고 잘못을 회개하고 용서를 구하고
이전 못된 행실을 과감히 버려봅시다. 할렐루야!
그러기 위해서는! 그런 능력을 받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가 십자가 현장에서 실패했던 경험을 교훈 삼아야 합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했던 그 원인은 기도하지 않은 것과 자신의 믿음을 믿어 교만했던 것도 문제였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원인이 본문 54절에서 알려주는데 ‘베드로가 멀찍이 따라가니라’ 때문입니다.
‘멀찍이’라는 말은 상황에 따라 가까이 갈 수도 있고, 여차하면 도망갈 수도 있는 애매한 간격을 의미합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베드로는 두 마음을 품고 예수님의 십자가 행렬을 지켜 보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뭔가 큰 일을 하게 되면 가장 먼저 달려가
“주님, 제가 여기에 있습니다, 저는 도망가지 않았습니다” 라고 말하려고 했고
혹시라도 예수님이 그대로 죽으면 당장 줄행랑을 쳐서 살겠다는 이중적인 생각을 가졌던 것입니다.
베드로는 3년 동안 경호원처럼 예수님에게 밀착하여 가장 가까이서 주님의 일을 하던 수제자였습니다.
그러던 그가 멀찍이 계산적으로 따라가다가 결국 자신의 일생에 지울 수 없는 오점을 남기고 말았던 것입니다.
고난주일 주님앞에 오신 태평양의 성도 여러분은 지금 어떻게 예수님을 따라가고 있습니까
지금 여러분들이 서있는 위치는 예수님과 얼만큼 떨어져 있습니까
멀찍이서 따라갑니까, 아니면 가까이서 따라갑니까
교회생활도 적당히 하고 세상일도 적당히 눈치봐서 하는 신앙! 덥지도 차지도 않은 그럭저럭 신앙은 아닙니까
이번 주간에 회개하고 여호와 하나님나라의 주인이요 천국의 왕자이신 예수님께
아픔을 안겨 드리는 그런 죄를 짓지 맙시다.
이번 고난주간에 세상일을 멀리하고
더욱 주님과 가까워지도록 교회로 모여 말씀을 읽으며 승리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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