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려주일] 하나님께 쓰임받고 있습니까?
본문
오늘은 예수님께서 어린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한 것을 상기하는 종려주일입니다.
유대나라에는 남자가 12살 이상만 되면 누구든지 1년에 꼭 한번 유월절에 성전에 가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여기 유월절은 유대인의 해방기념일로 애굽의 노예 생활에서 해방된 날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유월절을 지키려고 사방에서 모여드는 군중들도, 부모를 따라 성전에 들어온 아이들도 그렇게 예수님께 대하여 환호한 까닭은 무엇일까 그 원인이 어디에 있는 것일까
그 원인을 우리는 예루살렘의 역사에서 찾아 보아야 합니다.
예루살렘이라는 이스라엘 왕도의 명칭은 평강을 뜻합니다. "예루"는 "이레" 즉 "준비"라는 뜻이며(여호와이레,창22:14), "살렘"은 평화 또는 평강이란 뜻이다(살렘왕 멜기세댁,창14:18). 예루살렘은 여호와 하나님이 준비한 거룩한 평화의 도성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이름과는 달리 평화롭지 못한 것이 예루살렘의 역사였습니다. 예루살렘에 빚어진 역사상의 비극 중 가장 처참했던 것만 열거해 봅니다.
B. C 586년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군대에 의하여, B. c 168년 수리아 안디오쿠스 에피파네스 군대에 의하여, A. D 63년 로마 봄베이 장군의 군대에 의하여 여러 차례 철저히 파괴되었습니다. 이런 비참한 광경을 내다본 예레미야였기에 그는 뼈가 녹는 애가를 불렀습니다.
애가4:9-10 "굶어 죽느니 칼에 죽는 것이 낫다 ..... 사랑하는 어미가 손으로 그 자식을 삶아 먹는도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름은 예루살렘이건만 현실은 몸서리 쳐지는 비극의 역사를 살아 그 맥을 이어온 예루살렘 시민 그들은 가끔 지배국가의 장군이나 총독이 위풍당당하게 입성하는 것을 볼 때마다 얼마나 많은 분노를 삼켰으며 불안과 공포에 떨었을 것인가 언제 메시야가 와서 주권을 회복하고 당당하게 입성할 수 있을 것인가 언제 메시야가 와서 우리의 평안을 빼앗는 저 원수를 몰아내고, 예루살렘 이름 그대로 참 평강을 이룰 수 있을까 그러한 상황가운데 예수님이 나귀타고 입성하시는 모습을 본 그들은 드디어 가슴 속에 팽창한 메시야 환영의 감격을 폭발시켰던 것입니다.
시이저가 B. C 45년 루비콘 강을 건너 로마로 입성할 때 100만의 인파가 그의 개선을 축하했습니다. 나폴레옹이 1815년 파리로 입성할 때에 50만 파리 시민들이 나와 그의 개선을 축하했습니다. 학자들에 의하면, 그 당시 270만명 정도가 유월절만 되면 예루살렘에 모였다고 합니다. 수많은 군중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호산나 ! 호산나 !("호산나"의 뜻은 "지금 구원하소서"이다) 만세를 불렀고 자기들의 겉옷을 길게 깔며 종려나무(종려나무는 상당히 크게 자라며, 꼭대기에만 잎이 나서 투구 모양이 되고, 대추와 같은 열매를 맺으며, 애굽과 이스라엘에 많이 있고, 신성한 나무로 평화를 상징한다고 합니다(출15:37). 가지를 꺽어들고 흔들며 영접했기 때문에 종려주일이라고 합니다.
주전 520년 스가랴 선지자는 이날의 입성에 대해 예언하기를 "시온의 딸아 크게 기 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새끼 나귀니라"(스가랴9:9)말씀하십니다.
본문 말씀 내용을 보시면 예루살렘에 마지막 입성하실 때에 감람산 기슭에서 두 제자를 아랫마을로 보내시면서 그곳에 한 번도 사람이 타지 않은 나귀새끼가 매여 있을터이니 끌어 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가 "임자가 보고 물으면 무엇이라고 대답하오리이까 "라고 묻자 예수님께서는 "내가(주가)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임자는 아무 향변 없이 나귀를 보내 드렸습니다. 스가랴선지자 예언에 응함을 증명합니다.
세계의 모든 것이 다 주님의 것입니다. 그동안 우리는 주님의 것을 주님이 쓰시겠다고 하실 때 너무나 많은 이유를 붙이지는 않았는지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오늘 우리들이 주를 위해서 일을 한다고 하면서도 얼마나 이유가 많습니까 바쁘다, 시간이 없다, 형편이 안 된다 등 이 핑계, 저 핑계하고 그럽니다. 그렇게 해서 무슨 일을 하겠습니까 여호와 하나님이 "네 인생이 필요하다"하시면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이 사용하시도록 내어놓아야 합니다. 내 시간, 내 물질, 내 인생 여호와 하나님이 필요하시다 하면 내 놓아야 합니다. 무조건의 충성, 여호와 하나님 제일주의, 여호와 하나님의 요구라면 조건과 핑계가 없는 무조건의 충성, 이것이 신앙인의 인생관이며 전부입니다. 그때 여호와 하나님은 나의 삶을 도맡아 책임을 지시는 것입니다. 아 멘.
영국 런던의 왕립박물관 옥상에는 "땅과 거기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중에 거하는 자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시편24:1)란 글이 새겨져 있습니다. 이것이 영국 사람들의 신앙입니다. 또 미국 사람들은 그들이 사용하는 동전에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을 신뢰한다"고 썼습니다. 그것은 돈을 신뢰하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을 신뢰하고 산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쓰시겠다 하시면 우리의 재산과 역량과 몸과 영과 마음과 그 이외에 무엇이라도 아낌없이 바칠 각오가 되어져야만 참다운 성도의 생활을 할 수가 있는줄 압니다. 불란서 옛 성전 입구에는 이런 말이 쓰여져 있다고 합니다. "제단에 예물없이 나오는 자는 축복을 받을 수 없다. " 이것은 예배자를 위한 법칙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것은 인생의 전반에 적용되는 진리입니다. 다른 말로 설명해서 "우리는 드림으로써만 받을 수 있고, 심음으로써 거둘 수 있습니다. 이것은 위대한 삶의 법칙의 하나입니다"
존 웨슬리는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으로 네가 할 수 있는 모든 장소에서 네가 할 수 있는 모든 한도에서 돈을 벌어라. 그리고 그것을 여호와 하나님과 이웃을 위하여 모두 쓰라. " 물질은 여호와 하나님이 허락하신 축복일 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을 위하여 선하게 써야 할 선물입니다. 그것은 묵혀 두고 감추어 둘 것이 아닙니다. 옷장 속에 보관해 둘 물건이 아닙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에게 "네 마음을 달라"고 하셨습니다. 마음이 바쳐진 나귀를 원하십니다. 마음이 바쳐진 봉사, 마음이 바쳐진 예배, 마음이 바쳐진 헌금을 원하십니다. 우리의 눈물과 땀이 섞인 정성어린 제물을 원하십니다. 최선을 다해 드리시기 바랍니다. 여호와 하나님께 드린것만 남습니다. 아 멘.
오왈즈 스미스 올사가 쓴 '여호와 하나님께서 쓰시는 사람'에 보면 "오 여호와 하나님 나의 죄 용서해 주옵소서, 미움이 있는 자에게 사랑의 도구로, 가난한 자에게 부요하게 하는 스승으로, 여호와 하나님께 쓰임 받을 수 있다면 어떠한 희생이라도 달게 받게 하옵소서 아멘"
우리 옛말에 "선비는 자기를 알아 주는 사람을 위해 신명을 다한다"고 했습니다.
칼빈은 말하기를 "여호와 하나님 한 분에게 인정 받는 것이 전 세계에 칭찬보다 승하다"고 고백 했습니다.
쓰이는 축복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입니다.
아무나 쓰임 받는 것은 아닙니다. 마치 예루살렘 성의 모든 나귀가 축복 받은 것이 아닌 것처럼 말입니다. 예수님께 사용된 나귀는 30절에 보면 아직 아무도 타보지 않은 나귀새끼입니다. 구약에서 제사제물은 멍에 메지 않았던 송아지로 드렸습니다. 삼상6장에 보면 여호와의 궤를 옮길 수레는 멍에 메어 보지 않은 젖나는 소를 사용하였습니다. 이 나귀는 아직 어려 세상에 때묻지 않고 불의한 곳에 사용된 적이 없는 나귀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성경을 살펴 볼때 성경은 자기를 깨끗하게 준비한 사람을 주께서 쓰십니다. 딤후2장에 보면 사람을 그릇으로 비유했습니다. 그릇 중에는 귀히 쓰이는 그릇도 있고 천히 쓰는 그릇도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 쓰시기에 합당한 그릇은 어떤 그릇이냐,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예비함이 되리라"(딤후2:21)고 말씀하십니다. 여기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의 원문의 뜻을 생각하여 해석하면 곧 '죄로부터 마음을 깨끗이 청소하면'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 쓰여지기 위해 영혼을 죄로부터 깨끗하게 청소해야하겠습니다. "깨끗한 자에게는 주의 깨끗하심을 보이신다"(시18:26)고 하셨으며,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여호와 하나님을 볼 것"(마5:8)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친히 말씀하시기를 "소경된 바리새인아 너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마23:26). 예수님께서 당시 지도자들에게 '저들은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속은 탐욕과 방탕이 가득하다'고 지적했습니다.
오늘 우리를 주목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은 외모나 행동보다 먼저 우리의 마음중심을 보십니다. 곧 자기를 깨끗하. 게 준비한 사람이 가장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어느 국민하교 교사가 정년이 되어서 퇴임하는 모습입니다. 그분은 45년 동안 어린이들과 함께 살았습니다. 45년 동안 교직에 있으면서 교감도 해본 일이 없고 더구나 교장도 해본 일이 없는 그저 평교사로서 오직 교육만을 위해 시골 학교에서 교육을 하다가 정년을 맞은 것입니다. 그분이 퇴임을 하면서 마지막 남긴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내 생애 여한은 없다"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자신이 지금까지 일생 동안 쏟은 그 삶에 부끄러움이 없다는 말입니다. 아쉬움이 전혀 없다는 고백입니다. 일생을 다 바쳐서 유감없이 살았다. 만족한다는 말입니다. 우리들도 여호와 하나님께 쓰임받다가 마지막에 이 같은 고백을 할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 아 멘 -
유대나라에는 남자가 12살 이상만 되면 누구든지 1년에 꼭 한번 유월절에 성전에 가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여기 유월절은 유대인의 해방기념일로 애굽의 노예 생활에서 해방된 날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유월절을 지키려고 사방에서 모여드는 군중들도, 부모를 따라 성전에 들어온 아이들도 그렇게 예수님께 대하여 환호한 까닭은 무엇일까 그 원인이 어디에 있는 것일까
그 원인을 우리는 예루살렘의 역사에서 찾아 보아야 합니다.
예루살렘이라는 이스라엘 왕도의 명칭은 평강을 뜻합니다. "예루"는 "이레" 즉 "준비"라는 뜻이며(여호와이레,창22:14), "살렘"은 평화 또는 평강이란 뜻이다(살렘왕 멜기세댁,창14:18). 예루살렘은 여호와 하나님이 준비한 거룩한 평화의 도성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이름과는 달리 평화롭지 못한 것이 예루살렘의 역사였습니다. 예루살렘에 빚어진 역사상의 비극 중 가장 처참했던 것만 열거해 봅니다.
B. C 586년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군대에 의하여, B. c 168년 수리아 안디오쿠스 에피파네스 군대에 의하여, A. D 63년 로마 봄베이 장군의 군대에 의하여 여러 차례 철저히 파괴되었습니다. 이런 비참한 광경을 내다본 예레미야였기에 그는 뼈가 녹는 애가를 불렀습니다.
애가4:9-10 "굶어 죽느니 칼에 죽는 것이 낫다 ..... 사랑하는 어미가 손으로 그 자식을 삶아 먹는도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름은 예루살렘이건만 현실은 몸서리 쳐지는 비극의 역사를 살아 그 맥을 이어온 예루살렘 시민 그들은 가끔 지배국가의 장군이나 총독이 위풍당당하게 입성하는 것을 볼 때마다 얼마나 많은 분노를 삼켰으며 불안과 공포에 떨었을 것인가 언제 메시야가 와서 주권을 회복하고 당당하게 입성할 수 있을 것인가 언제 메시야가 와서 우리의 평안을 빼앗는 저 원수를 몰아내고, 예루살렘 이름 그대로 참 평강을 이룰 수 있을까 그러한 상황가운데 예수님이 나귀타고 입성하시는 모습을 본 그들은 드디어 가슴 속에 팽창한 메시야 환영의 감격을 폭발시켰던 것입니다.
시이저가 B. C 45년 루비콘 강을 건너 로마로 입성할 때 100만의 인파가 그의 개선을 축하했습니다. 나폴레옹이 1815년 파리로 입성할 때에 50만 파리 시민들이 나와 그의 개선을 축하했습니다. 학자들에 의하면, 그 당시 270만명 정도가 유월절만 되면 예루살렘에 모였다고 합니다. 수많은 군중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호산나 ! 호산나 !("호산나"의 뜻은 "지금 구원하소서"이다) 만세를 불렀고 자기들의 겉옷을 길게 깔며 종려나무(종려나무는 상당히 크게 자라며, 꼭대기에만 잎이 나서 투구 모양이 되고, 대추와 같은 열매를 맺으며, 애굽과 이스라엘에 많이 있고, 신성한 나무로 평화를 상징한다고 합니다(출15:37). 가지를 꺽어들고 흔들며 영접했기 때문에 종려주일이라고 합니다.
주전 520년 스가랴 선지자는 이날의 입성에 대해 예언하기를 "시온의 딸아 크게 기 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새끼 나귀니라"(스가랴9:9)말씀하십니다.
본문 말씀 내용을 보시면 예루살렘에 마지막 입성하실 때에 감람산 기슭에서 두 제자를 아랫마을로 보내시면서 그곳에 한 번도 사람이 타지 않은 나귀새끼가 매여 있을터이니 끌어 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가 "임자가 보고 물으면 무엇이라고 대답하오리이까 "라고 묻자 예수님께서는 "내가(주가)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임자는 아무 향변 없이 나귀를 보내 드렸습니다. 스가랴선지자 예언에 응함을 증명합니다.
세계의 모든 것이 다 주님의 것입니다. 그동안 우리는 주님의 것을 주님이 쓰시겠다고 하실 때 너무나 많은 이유를 붙이지는 않았는지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오늘 우리들이 주를 위해서 일을 한다고 하면서도 얼마나 이유가 많습니까 바쁘다, 시간이 없다, 형편이 안 된다 등 이 핑계, 저 핑계하고 그럽니다. 그렇게 해서 무슨 일을 하겠습니까 여호와 하나님이 "네 인생이 필요하다"하시면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이 사용하시도록 내어놓아야 합니다. 내 시간, 내 물질, 내 인생 여호와 하나님이 필요하시다 하면 내 놓아야 합니다. 무조건의 충성, 여호와 하나님 제일주의, 여호와 하나님의 요구라면 조건과 핑계가 없는 무조건의 충성, 이것이 신앙인의 인생관이며 전부입니다. 그때 여호와 하나님은 나의 삶을 도맡아 책임을 지시는 것입니다. 아 멘.
영국 런던의 왕립박물관 옥상에는 "땅과 거기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중에 거하는 자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시편24:1)란 글이 새겨져 있습니다. 이것이 영국 사람들의 신앙입니다. 또 미국 사람들은 그들이 사용하는 동전에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을 신뢰한다"고 썼습니다. 그것은 돈을 신뢰하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을 신뢰하고 산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쓰시겠다 하시면 우리의 재산과 역량과 몸과 영과 마음과 그 이외에 무엇이라도 아낌없이 바칠 각오가 되어져야만 참다운 성도의 생활을 할 수가 있는줄 압니다. 불란서 옛 성전 입구에는 이런 말이 쓰여져 있다고 합니다. "제단에 예물없이 나오는 자는 축복을 받을 수 없다. " 이것은 예배자를 위한 법칙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것은 인생의 전반에 적용되는 진리입니다. 다른 말로 설명해서 "우리는 드림으로써만 받을 수 있고, 심음으로써 거둘 수 있습니다. 이것은 위대한 삶의 법칙의 하나입니다"
존 웨슬리는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으로 네가 할 수 있는 모든 장소에서 네가 할 수 있는 모든 한도에서 돈을 벌어라. 그리고 그것을 여호와 하나님과 이웃을 위하여 모두 쓰라. " 물질은 여호와 하나님이 허락하신 축복일 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을 위하여 선하게 써야 할 선물입니다. 그것은 묵혀 두고 감추어 둘 것이 아닙니다. 옷장 속에 보관해 둘 물건이 아닙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에게 "네 마음을 달라"고 하셨습니다. 마음이 바쳐진 나귀를 원하십니다. 마음이 바쳐진 봉사, 마음이 바쳐진 예배, 마음이 바쳐진 헌금을 원하십니다. 우리의 눈물과 땀이 섞인 정성어린 제물을 원하십니다. 최선을 다해 드리시기 바랍니다. 여호와 하나님께 드린것만 남습니다. 아 멘.
오왈즈 스미스 올사가 쓴 '여호와 하나님께서 쓰시는 사람'에 보면 "오 여호와 하나님 나의 죄 용서해 주옵소서, 미움이 있는 자에게 사랑의 도구로, 가난한 자에게 부요하게 하는 스승으로, 여호와 하나님께 쓰임 받을 수 있다면 어떠한 희생이라도 달게 받게 하옵소서 아멘"
우리 옛말에 "선비는 자기를 알아 주는 사람을 위해 신명을 다한다"고 했습니다.
칼빈은 말하기를 "여호와 하나님 한 분에게 인정 받는 것이 전 세계에 칭찬보다 승하다"고 고백 했습니다.
쓰이는 축복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입니다.
아무나 쓰임 받는 것은 아닙니다. 마치 예루살렘 성의 모든 나귀가 축복 받은 것이 아닌 것처럼 말입니다. 예수님께 사용된 나귀는 30절에 보면 아직 아무도 타보지 않은 나귀새끼입니다. 구약에서 제사제물은 멍에 메지 않았던 송아지로 드렸습니다. 삼상6장에 보면 여호와의 궤를 옮길 수레는 멍에 메어 보지 않은 젖나는 소를 사용하였습니다. 이 나귀는 아직 어려 세상에 때묻지 않고 불의한 곳에 사용된 적이 없는 나귀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성경을 살펴 볼때 성경은 자기를 깨끗하게 준비한 사람을 주께서 쓰십니다. 딤후2장에 보면 사람을 그릇으로 비유했습니다. 그릇 중에는 귀히 쓰이는 그릇도 있고 천히 쓰는 그릇도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 쓰시기에 합당한 그릇은 어떤 그릇이냐,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예비함이 되리라"(딤후2:21)고 말씀하십니다. 여기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의 원문의 뜻을 생각하여 해석하면 곧 '죄로부터 마음을 깨끗이 청소하면'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 쓰여지기 위해 영혼을 죄로부터 깨끗하게 청소해야하겠습니다. "깨끗한 자에게는 주의 깨끗하심을 보이신다"(시18:26)고 하셨으며,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여호와 하나님을 볼 것"(마5:8)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친히 말씀하시기를 "소경된 바리새인아 너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마23:26). 예수님께서 당시 지도자들에게 '저들은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속은 탐욕과 방탕이 가득하다'고 지적했습니다.
오늘 우리를 주목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은 외모나 행동보다 먼저 우리의 마음중심을 보십니다. 곧 자기를 깨끗하. 게 준비한 사람이 가장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어느 국민하교 교사가 정년이 되어서 퇴임하는 모습입니다. 그분은 45년 동안 어린이들과 함께 살았습니다. 45년 동안 교직에 있으면서 교감도 해본 일이 없고 더구나 교장도 해본 일이 없는 그저 평교사로서 오직 교육만을 위해 시골 학교에서 교육을 하다가 정년을 맞은 것입니다. 그분이 퇴임을 하면서 마지막 남긴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내 생애 여한은 없다"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자신이 지금까지 일생 동안 쏟은 그 삶에 부끄러움이 없다는 말입니다. 아쉬움이 전혀 없다는 고백입니다. 일생을 다 바쳐서 유감없이 살았다. 만족한다는 말입니다. 우리들도 여호와 하나님께 쓰임받다가 마지막에 이 같은 고백을 할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 아 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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