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려주일] 종려주일을 맞는 성도
본문
오늘은 세상 모든 교회에서 거룩하게 지키는 종려주일입니다. 종려주일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수난을 당하시기 위해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오신 것에 대해 기념하여 모든 교회에서 지키게 되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도 볼 수 있듯이,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시는 예수님은 승리의 왕을 상징하기도 하지만, 그와 더불어 우리의 죄를 짊어지신 속죄양이기도 합니다. 세상의 왕들은 백성들 위에 군림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백성들을 착취하고 억압하여 자신의 부귀와 영화만을 생각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우리 예수님은 여호와 하나님이 보내신 왕 중의 왕이면서도 그분은 세상의 왕들과는 달리 십자가를 짊어지시기까지 우리를 향한 사랑으로 가득하신 분이십니다.
이 진리를 깨닫고 믿게 될 때, 우리는 엄청난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 가운데 거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왕 중의 왕께서 우리를 자신의 목숨을 내놓기까지 사랑하고 있다는데, 그 사실을 알고 변화되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기도하고 있습니다. 에베소서3:17-19의 말씀입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여호와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 무슨 말씀입니까 그리스도의 사랑, 십자가를 짊어지신 그 사랑의 깊이를 깨달아 충만한 삶, 즉 능력 있는 삶을 위해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태국의 밀림지대를 여행하던 네 명의 기독교 여인들이 죽음에 직면하여 겪었던 이야기입니다. 몇 명의 초신자를 방문하기 위해서 여인들은 숲이 우거진 밀림을 지나게 되었는데, 느닷없이 밀림에 숨어있던 세 명의 공산 반군들이 그들에게 나타나 총을 들이 대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돈을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여인들이 돈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서 그들은 화가 났고 죽이겠다고 엄포를 놓았습니다. 그 여인들은 공산반군들에게 제발 총을 쏘지 말아 달라고 호소했지만 반군들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때에 동역자 중의 한 여인이 총살당하기 전에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을 그들에게 이야기할 수 있게 해달라고요 청했습니다. 놀랍게도 총을 든 자들이 동의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들을 사랑했기 때문에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셨다고 여인중의 한 사람이 설명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에게서 깜짝 놀랄만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즉 그들은 총들을 놓고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만일 예수님이 그렇게 많은 사랑을 가지고 있다면 나도 또한 그 사랑을 원한다”라고 말입니다. 곧 세 명의 반군은 모두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했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 그들은 전 삶을 기독교 사역자로써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게 되었다고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될 때, 거기에는 엄청난 능력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예수님의 예루살렘 성, 입성을 기념하는 종려주일을 통해 우리를 사랑하시는 예수님을 위해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3종류의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들은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는 예수님의 사역을 준비한 자들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러한 준비와 태도를 통해 주님의 고귀한 사역에 참여할 수 있는 영광을 누렸습니다. 이들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승리의 왕 앞에, 죄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님 앞에 어떤 모습의 삶을 살아야할지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2. 순종하는 제자
종려주일을 준비하는 첫 번째 사람을 우리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제자에게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을 향하시는 예수님은 벳바게와 베다니에 이르렀을 때 제자들 중에서 두 명을 마을로 보내면서 아무 사람도 타보지 않은 나귀를 풀어 오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 두 명은 어떤 이의도 달지 않고 그대로 행하였습니다. 생면부지의 사람을 찾아가 나귀를 끌고 온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생각은 우리의 생각에 불과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하실 고난과 그로인한 영광을 이미 계획하고 있었기에 나귀를 준비하신 것입니다. 단지 제자들은 거기에 순종하면 되는 것인데, 그토록 말을 듣지 않고 늘 실수만 하던 제자들이 그날은 어찌된 일인지 예수님 말씀에 순종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역시 순조롭게 성취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종려주일을 준비하는 제자에게 필요한 것은 순종입니다. 그리고 그 순종은 오늘 우리에게도 중요한 신앙으로 요구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께 순종하는 삶은 종려주일을 준비하는 제자들이 겪었듯이 우리의 상식을 벗어날 때도 있습니다. 때로는 엄청난 반대에 부딪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말씀에 순종하는 자를 귀하게 여기시고 그러한 자를 기뻐하십니다. 그리고 신앙은 순종을 빼놓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신앙에서 중요한 요소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사무엘이 여호와 하나님의 부르심을 듣게 되었을 때, 그는 어떤 태도를 보였습니까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 참으로 아름다운 이야기입니다. 바로 신앙은, 이런 마음으로, 이런 자세로 여호와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하고 또 한평생 이런 마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마태복음 8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백부장의 신앙을 아주 높이 칭찬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 그렇다면, 주님께서는 왜 이토록 그를 칭찬하셨습니까 그의 순종하는 태도를 높이 사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은 바르게 듣고 바르게 응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순종의 사람을 주님은 귀한 자로 사용하게 되는 것입니다.
3. 나귀주인의 헌신
종려주일을 준비하는 두 번째 사람을 우리는 나귀주인의 헌신에서 볼 수 있습니다.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나타나 주님께서 쓰시겠다고 나귀를 달라고 했을 때, 그는 아낌없이 자신의 나귀를 주님을 위해 내 놓았습니다. 이러한 그의 헌신은 주님의 예루살렘 성 입성에 중요한 의미를 부여했는데, 즉 예수님을 이 땅에 생명의 왕으로 오신 메시야로 알리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주님을 향한 헌신은 주님을 영화롭게 할 뿐만 아니라 그 헌신의 사람에게도 영광과 축복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인으로 살면서 실패하는 원인이 어디에 있습니까 여호와 하나님께 헌신하기 보다는 자신을 위해서 헌신하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26:6-13절에서 우리는 두 종류의 사람을 볼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은 자신을 위해 헌신한 사람이었고 또 다른 한 사람은 주님을 위해 헌신한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을 위해 헌신한 사람은 가룟 유다입니다. 그리고 주님을 위해 헌신한 사람은 마리아입니다. 마리아가 주님의 죽으심을 앞두고 주님에 대한 자신의 사랑과 감사를 무엇으로 표할까 생각하다가 옥합을 깨트려 나드 향유를 주님의 머리에 부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주님을 위해 드렸습니다.
이러한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가룟 유다는 너무도 비싼 향유를 마리아가 주님께 붓자 화가 났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녀에게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이것을 많은 값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을 텐데.. ” 가룟 유다의 말을 들어 보면, 얼마나 그럴듯해 보입니까 그러나 그는 다른 사람을 생각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여기서는 이타적인 마음을 보이는 것처럼 비춰지고 있지만 성경에서 말하는 가룟 유다는 철저한 이기주의자였습니다. 돈에 욕심이 많은 자였습니다. 이런 사람은 자신의 돈으로는 이웃을 돕지 않으면서도 다른 사람의 돈은 구제를 위해 쓰여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결국 두 사람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주님을 위해 헌신한 마리아를 향해 주님은 마태복음26:13절에서 영원한 축복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 ” 반면에 가룟 유다에 대해서는 저주와 안타까움의 말씀을 주님은 남기셨습니다. 마태복음26:24절입니다. “인자는 자기에게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 하였더면 제게 좋을 뻔 하였느니라. ” 오늘 말씀에 나오는 나귀 주인도 이 세상이 존재하는 한 그의 행동과 헌신은 아름답게 성도들에게 기억될 것입니다. 이러한 축복을 그 무엇과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주님께 인정받는다는 것처럼 큰 축복은 없는 것입니다.
4. 백성들의 찬송
종려주일을 준비하는 세 번째 사람을 우리는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을 찬양하는 무리들에게서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제자의 온 무리’로 표기되어 있지만, 다른 복음서에서는 ‘무리들’(the whole crowed)로 표기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들을 예수님의 12제자로 보아서는 안 되고 갈릴리에서부터 예수님을 따라온 순례자들이라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다니시던 곳에는 언제나 많은 사람들이 따라 다녔습니다. 이들이 지금 예루살렘 성으로 입성하는 예수님을 보면서 승리의 왕으로 찬양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직 우리 주님 앞에는 십자가의 고난이 놓여 있지만, 분명 예수님은 승리의 왕이시고 찬양받으실 만한 분이십니다.
그러자 그들 중에 바리새인들이 주님을 찬양하는 무리들을 책망하라고 요구합니다. 여기에 대해 우리 주님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 ”(눅19:40) 무슨 말씀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로부터 찬양받아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놀라우신 권능과 엄청난 사랑을 찬양하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찬양하는 자는 주님을 기쁘시게 할 뿐만 아니라 주님의 도우심으로 악한 마귀를 물리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루터는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찬양이란 무엇인가 마귀를 쫓는 최고의 수단이다. ”라고 말입니다.
구세군이 낳은 세기적인 영적 지도자 브랭글의 영력이 넘치는 글과 설교는 수많은 사람들을 그리스도께로 이끌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엄청난 좌절과 우울한 감정에 맞서 무서운 싸움을 계속한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는 인생의 절망과 위기에 놓였을 때, 자신의 감정을 이렇게 술회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무덤으로 향하여 끝없이 달리는 것같이 느껴졌다. 나는 인생의 모든 영광과 매력과 의미를 잃어버렸다. …기도를 해도 아무 소용이 없고 진정 나는 기도의 영과 기도하는 능력을 잃어버린 것과 같은 느낌이 들었다. ” 그렇다면 그는 어떻게 이 죽음과도 같은 우울증을 극복할 수 있었을까요 그는 자신의 경험을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다음 순간 내가 기억했던 것은 비록 내 마음에는 찬양할 마음이 전혀 없었지만, 내 의지로서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리는 것이었다. 나의 감정은 우울증과 흑암으로 완전히 뒤덮여 있을 뿐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그러나 내가 그러한 시련을 주신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했을 때, 그것은 축복으로 변하기 시작했고 환한 빛이 희미하게 떠오르면서 천천히 타오르는 그 빛은 마침내 내 마음 속에 있던 흑암을 깨뜨리고 말았다. 우울증은 지나가 버렸고 나의 인생은 다시 아름답고 생기 있는 모습으로 변했다. 나는 다시 한 번 은혜로운 축복들로 인하여 감사가 충만함을 경험할 수 있었다. ”
이것은 시편42편에 나오는 시인의 고백과 동일한 것입니다. 시편기자는 자신의 엄청난 고통 속에서도 그는 결국 여호와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42편 8절에서 시편 기자는 찬송으로 여호와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낮에는 여호와께서 그 인자함을 베푸시고 밤에는 그 찬송이 내게 있어 생명의 여호와 하나님께 기도하리로다. ” 그리고 시편기자는 11절에서 더욱 가열 차게 절망과 위기 앞에서 주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여호와 하나님을 바라라 나는 내 얼굴을 도우시는 내 여호와 하나님을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 주님은 우리에게 찬양받기에 합당하신 분이십니다. 여러분은 어떤 자세로 주님 앞에 서 있습니까 주님을 찬양하기 보다는 나에게 없는 것과 잠시의 어려움만을 보고 주님을 원망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주님을 찬양해야만 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찬양하지 않을 때, 주님은 돌들을 명하여 찬양하게 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종려주일을 맞이하여 고난의 종으로 이 땅에 오셨지만 동시에 왕 중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의 위대한 입성과 그 일을 곁에서 준비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주님의 위대한 사역에 우리 성도가 어떻게 참여해야하는지 살펴보았습니다. 즉 우리는 순종과 헌신과 찬양으로 주님의 사역에 참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 오늘 말씀에 나오는 사람들의 아름다운 모습을 따라 주님의 뜻을 이 땅에 이루어 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이 진리를 깨닫고 믿게 될 때, 우리는 엄청난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 가운데 거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왕 중의 왕께서 우리를 자신의 목숨을 내놓기까지 사랑하고 있다는데, 그 사실을 알고 변화되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기도하고 있습니다. 에베소서3:17-19의 말씀입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여호와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 무슨 말씀입니까 그리스도의 사랑, 십자가를 짊어지신 그 사랑의 깊이를 깨달아 충만한 삶, 즉 능력 있는 삶을 위해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태국의 밀림지대를 여행하던 네 명의 기독교 여인들이 죽음에 직면하여 겪었던 이야기입니다. 몇 명의 초신자를 방문하기 위해서 여인들은 숲이 우거진 밀림을 지나게 되었는데, 느닷없이 밀림에 숨어있던 세 명의 공산 반군들이 그들에게 나타나 총을 들이 대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돈을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여인들이 돈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서 그들은 화가 났고 죽이겠다고 엄포를 놓았습니다. 그 여인들은 공산반군들에게 제발 총을 쏘지 말아 달라고 호소했지만 반군들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때에 동역자 중의 한 여인이 총살당하기 전에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을 그들에게 이야기할 수 있게 해달라고요 청했습니다. 놀랍게도 총을 든 자들이 동의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들을 사랑했기 때문에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셨다고 여인중의 한 사람이 설명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에게서 깜짝 놀랄만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즉 그들은 총들을 놓고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만일 예수님이 그렇게 많은 사랑을 가지고 있다면 나도 또한 그 사랑을 원한다”라고 말입니다. 곧 세 명의 반군은 모두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했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 그들은 전 삶을 기독교 사역자로써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게 되었다고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될 때, 거기에는 엄청난 능력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예수님의 예루살렘 성, 입성을 기념하는 종려주일을 통해 우리를 사랑하시는 예수님을 위해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3종류의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들은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는 예수님의 사역을 준비한 자들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러한 준비와 태도를 통해 주님의 고귀한 사역에 참여할 수 있는 영광을 누렸습니다. 이들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승리의 왕 앞에, 죄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님 앞에 어떤 모습의 삶을 살아야할지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2. 순종하는 제자
종려주일을 준비하는 첫 번째 사람을 우리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제자에게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을 향하시는 예수님은 벳바게와 베다니에 이르렀을 때 제자들 중에서 두 명을 마을로 보내면서 아무 사람도 타보지 않은 나귀를 풀어 오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 두 명은 어떤 이의도 달지 않고 그대로 행하였습니다. 생면부지의 사람을 찾아가 나귀를 끌고 온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생각은 우리의 생각에 불과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하실 고난과 그로인한 영광을 이미 계획하고 있었기에 나귀를 준비하신 것입니다. 단지 제자들은 거기에 순종하면 되는 것인데, 그토록 말을 듣지 않고 늘 실수만 하던 제자들이 그날은 어찌된 일인지 예수님 말씀에 순종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역시 순조롭게 성취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종려주일을 준비하는 제자에게 필요한 것은 순종입니다. 그리고 그 순종은 오늘 우리에게도 중요한 신앙으로 요구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께 순종하는 삶은 종려주일을 준비하는 제자들이 겪었듯이 우리의 상식을 벗어날 때도 있습니다. 때로는 엄청난 반대에 부딪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말씀에 순종하는 자를 귀하게 여기시고 그러한 자를 기뻐하십니다. 그리고 신앙은 순종을 빼놓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신앙에서 중요한 요소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사무엘이 여호와 하나님의 부르심을 듣게 되었을 때, 그는 어떤 태도를 보였습니까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 참으로 아름다운 이야기입니다. 바로 신앙은, 이런 마음으로, 이런 자세로 여호와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하고 또 한평생 이런 마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마태복음 8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백부장의 신앙을 아주 높이 칭찬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 그렇다면, 주님께서는 왜 이토록 그를 칭찬하셨습니까 그의 순종하는 태도를 높이 사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은 바르게 듣고 바르게 응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순종의 사람을 주님은 귀한 자로 사용하게 되는 것입니다.
3. 나귀주인의 헌신
종려주일을 준비하는 두 번째 사람을 우리는 나귀주인의 헌신에서 볼 수 있습니다.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나타나 주님께서 쓰시겠다고 나귀를 달라고 했을 때, 그는 아낌없이 자신의 나귀를 주님을 위해 내 놓았습니다. 이러한 그의 헌신은 주님의 예루살렘 성 입성에 중요한 의미를 부여했는데, 즉 예수님을 이 땅에 생명의 왕으로 오신 메시야로 알리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주님을 향한 헌신은 주님을 영화롭게 할 뿐만 아니라 그 헌신의 사람에게도 영광과 축복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인으로 살면서 실패하는 원인이 어디에 있습니까 여호와 하나님께 헌신하기 보다는 자신을 위해서 헌신하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26:6-13절에서 우리는 두 종류의 사람을 볼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은 자신을 위해 헌신한 사람이었고 또 다른 한 사람은 주님을 위해 헌신한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을 위해 헌신한 사람은 가룟 유다입니다. 그리고 주님을 위해 헌신한 사람은 마리아입니다. 마리아가 주님의 죽으심을 앞두고 주님에 대한 자신의 사랑과 감사를 무엇으로 표할까 생각하다가 옥합을 깨트려 나드 향유를 주님의 머리에 부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주님을 위해 드렸습니다.
이러한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가룟 유다는 너무도 비싼 향유를 마리아가 주님께 붓자 화가 났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녀에게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이것을 많은 값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을 텐데.. ” 가룟 유다의 말을 들어 보면, 얼마나 그럴듯해 보입니까 그러나 그는 다른 사람을 생각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여기서는 이타적인 마음을 보이는 것처럼 비춰지고 있지만 성경에서 말하는 가룟 유다는 철저한 이기주의자였습니다. 돈에 욕심이 많은 자였습니다. 이런 사람은 자신의 돈으로는 이웃을 돕지 않으면서도 다른 사람의 돈은 구제를 위해 쓰여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결국 두 사람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주님을 위해 헌신한 마리아를 향해 주님은 마태복음26:13절에서 영원한 축복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 ” 반면에 가룟 유다에 대해서는 저주와 안타까움의 말씀을 주님은 남기셨습니다. 마태복음26:24절입니다. “인자는 자기에게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 하였더면 제게 좋을 뻔 하였느니라. ” 오늘 말씀에 나오는 나귀 주인도 이 세상이 존재하는 한 그의 행동과 헌신은 아름답게 성도들에게 기억될 것입니다. 이러한 축복을 그 무엇과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주님께 인정받는다는 것처럼 큰 축복은 없는 것입니다.
4. 백성들의 찬송
종려주일을 준비하는 세 번째 사람을 우리는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을 찬양하는 무리들에게서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제자의 온 무리’로 표기되어 있지만, 다른 복음서에서는 ‘무리들’(the whole crowed)로 표기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들을 예수님의 12제자로 보아서는 안 되고 갈릴리에서부터 예수님을 따라온 순례자들이라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다니시던 곳에는 언제나 많은 사람들이 따라 다녔습니다. 이들이 지금 예루살렘 성으로 입성하는 예수님을 보면서 승리의 왕으로 찬양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직 우리 주님 앞에는 십자가의 고난이 놓여 있지만, 분명 예수님은 승리의 왕이시고 찬양받으실 만한 분이십니다.
그러자 그들 중에 바리새인들이 주님을 찬양하는 무리들을 책망하라고 요구합니다. 여기에 대해 우리 주님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 ”(눅19:40) 무슨 말씀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로부터 찬양받아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놀라우신 권능과 엄청난 사랑을 찬양하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찬양하는 자는 주님을 기쁘시게 할 뿐만 아니라 주님의 도우심으로 악한 마귀를 물리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루터는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찬양이란 무엇인가 마귀를 쫓는 최고의 수단이다. ”라고 말입니다.
구세군이 낳은 세기적인 영적 지도자 브랭글의 영력이 넘치는 글과 설교는 수많은 사람들을 그리스도께로 이끌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엄청난 좌절과 우울한 감정에 맞서 무서운 싸움을 계속한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는 인생의 절망과 위기에 놓였을 때, 자신의 감정을 이렇게 술회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무덤으로 향하여 끝없이 달리는 것같이 느껴졌다. 나는 인생의 모든 영광과 매력과 의미를 잃어버렸다. …기도를 해도 아무 소용이 없고 진정 나는 기도의 영과 기도하는 능력을 잃어버린 것과 같은 느낌이 들었다. ” 그렇다면 그는 어떻게 이 죽음과도 같은 우울증을 극복할 수 있었을까요 그는 자신의 경험을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다음 순간 내가 기억했던 것은 비록 내 마음에는 찬양할 마음이 전혀 없었지만, 내 의지로서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리는 것이었다. 나의 감정은 우울증과 흑암으로 완전히 뒤덮여 있을 뿐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그러나 내가 그러한 시련을 주신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했을 때, 그것은 축복으로 변하기 시작했고 환한 빛이 희미하게 떠오르면서 천천히 타오르는 그 빛은 마침내 내 마음 속에 있던 흑암을 깨뜨리고 말았다. 우울증은 지나가 버렸고 나의 인생은 다시 아름답고 생기 있는 모습으로 변했다. 나는 다시 한 번 은혜로운 축복들로 인하여 감사가 충만함을 경험할 수 있었다. ”
이것은 시편42편에 나오는 시인의 고백과 동일한 것입니다. 시편기자는 자신의 엄청난 고통 속에서도 그는 결국 여호와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42편 8절에서 시편 기자는 찬송으로 여호와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낮에는 여호와께서 그 인자함을 베푸시고 밤에는 그 찬송이 내게 있어 생명의 여호와 하나님께 기도하리로다. ” 그리고 시편기자는 11절에서 더욱 가열 차게 절망과 위기 앞에서 주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여호와 하나님을 바라라 나는 내 얼굴을 도우시는 내 여호와 하나님을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 주님은 우리에게 찬양받기에 합당하신 분이십니다. 여러분은 어떤 자세로 주님 앞에 서 있습니까 주님을 찬양하기 보다는 나에게 없는 것과 잠시의 어려움만을 보고 주님을 원망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주님을 찬양해야만 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찬양하지 않을 때, 주님은 돌들을 명하여 찬양하게 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종려주일을 맞이하여 고난의 종으로 이 땅에 오셨지만 동시에 왕 중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의 위대한 입성과 그 일을 곁에서 준비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주님의 위대한 사역에 우리 성도가 어떻게 참여해야하는지 살펴보았습니다. 즉 우리는 순종과 헌신과 찬양으로 주님의 사역에 참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 오늘 말씀에 나오는 사람들의 아름다운 모습을 따라 주님의 뜻을 이 땅에 이루어 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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