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려주일] 고난의 순기능
본문
세상에서 당하는 고생 중에는 '몸 고생'도 있고 '마음고생'도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런 고생을 하게 될 때 어떻게든 거기서 벗어나기만을 바랍니다.
견디기 힘든 이 현실에서 벗어날 수 만 있다면 뭐든 하겠다는 심정을 갖습니다.
때론 내 힘으로 벗어나기 어렵다는 판단이 되었기에 다른 이의 도움을 통하여서라도 이 고생을 끝내고 싶어 하기도 합니다.
혹시 여러분은 문제가 어렵지 않게 지나가 주길 바라는 마음에서 외부적인 도움을 통하여서라도 쉽게 해결되기만을 바라지는 않았습니까!
고생과 고난 역경과 환난은 분명 우리 인생에서 반가운 손님은 아닙니다.
힘겹고 아프고 견디기 어려운 연단과 시련의 시간입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우리 인생길에서 만나는 고생스러운 시간과 연단의 시간 속에 담겨 있는 “의미”마저 놓쳐서는 안 된다는 점입니다.
나비가 애벌레 단계를 지나서 고치를 뚫고 거기서 삐져나오느라고 기진맥진이 됩니다.
이때 나비의 수고를 덜어주겠다고 그 고치를 누군가 찢어주어서 수월하게 빠져나오게 하면 이상하게도 그 나비는 날지도 못하고 얼마 못가 죽더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지기 힘으로 고치를 뚫고 빠져나온 나비는 아름다운 날갯짓을 하며 하늘높이 날아오릅니다.
고생은 반가운 일은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 삶에서 그 시간은 참으로 "의미"가 있는 시간입니다.
힘들고 어렵다고 불평하고 나에게 이런 시간을 주신 주님을 원망하며, 나를 속히 이 지긋지긋한 고생의 자리에서 벗어나게 해달라고만 외칠 것이 아닙니다.
때론 이 시간의 고생을 통하여 정말 의미있는 것, 꼭 필요한 것을 얻고 있다는 생각을 하시길 바랍니다.
나의 인생을 통하여 주님이 하시고자 하시는 일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길 바립니다.
지금 주님이 내 인생가운데 열어두신 길이 '몸 고생길' ' 마음고생길'이라면 이 길을 외면하거나 회피하지 말고, 인내하고 순종하고 받아들이시길 바랍니다.
만일 우리가 이토록 고생하고 힘겹게 살아간다 하더라도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과 "나를 향한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과 "여호와 하나님의 지혜"를 의지한다면 문제는 전혀 달라집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 속에는 3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하나는 '소통'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을 걸어오시고, 우리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기도 하십니다.
또 다른 하나는 잠잠히 우리의 의견을 들으시기도 하십니다.
그리고 원하는 것은 들어주시기도 하십니다.
문제는 마지막 한 가지 요소인데, 그것은 "명령"입니다.
우리의 뜻을 묻지 않으시고, 일방적으로 명령하십니다.
이때는 '내소원', '내 의견'은 아예 고려의 대상이 되질 않습니다.
이럴 경우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의 일방적인 뜻을 어떻게 수용할 것인가 하는 것이 문제가 됩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태초에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신 인간에게는 "위임장"을 주셨습니다.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권세도 주시고, 무엇이든 하지 않을 권세도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결정에 책임도 지라고 하신 것이 여호와 하나님의 위임입니다.
에덴동산에 선악과를 두지 마시든지, 거기 선악과를 두셨으면 아담과 하와가 얼씬도 못하게 고압전류가 흐르는 철조망으로라도 둘러 두시든지 하지 않으시고, 그저 말로만 '선악과는 먹지마라',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하신 여호와 하나님께 불만 가득한 초신 자들이 있습니다.
이건 에덴동산에 국한 된 이야기가 아니고, 지금 우리들의 현실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 이야기입니다.
인격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일을 하지 않을 수도 있고, 할 수도 있는 재량권을 소유한 것을 말합니다.
철조망을 쳐놓고, 결코 얼씬 거릴 수도 없게끔 만들어 놓고나서 '선악과 먹지마라'고 명하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 인격을 소유한 인간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일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인간에게 인격을 부여하셨던 것입니다.
오늘날도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 믿는 이들이 이 세상 살면서 무엇이든 할 수도 있고, 하지 않을 수도 있는 재량권을 주셨습니다.
"아담아, 선악과가 여기 있다. 너 이것을 먹을 수도 있고, 안 먹을 수도 있다. 나는 네가 이것을 먹지 않기를 바라고 내 명령에 순종하는 모습을 보기 원한다. "
오늘날 그것은 부정일 수도 있고, 뇌물일 수도 있고, 쾌락일 수도 있고, 세상 유혹일 수도 있습니다.
'왜 그런 것을 주셔서 나로 범죄케 하셨느냐'고 여호와 하나님께 책임 전가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우릴 태엽감은 장난감이나 무선 조종로봇으로 만드신 게 아니고, 스스로 결정하고, 자기가 책임지는 인격으로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거룩하여 주길, 순결하여 주길 원하시는 것입니다.
말씀을 지속적으로 들려주시면서 여호와 하나님이 마음을 전하고 계십니다.
성령의 감동으로 선지자들의 예언으로 설교자들을 말씀 증거의 도구로 삼으시면서 "얘야, 나는 네가 스스로 선한 일을 결정하고, 죄악을 거절하는 사람으로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 싶구나.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본문 4절을 보면, 여호와 하나님이 그 백성을 꾸짖고 계십니다.
"너는 완악하며 네 목의 힘줄은 무죄요, 네 어미는 놋이라. "
많은 죄악과 불신앙으로 타락하고 교만하여진 인간의 모습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아이를 키우면서보면 뭐라 야단을 치려고만 하여도 눈에서 눈물이 떨어지는 아이가 있습니다.
반면에 야단을 맞고 매를 맞으면서도 '잘못했다'는 소리를 안하는 아이도 있습니다.
이런 고집을 꺾으려면 부모가 먼저 지치기 쉽습니다.
'목의 힘줄은 무죄'라는 표현은 인생의 꺾이지 않는 고집을 표현하신 것입니다.
하지만 여호와 하나님도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본문 9절 "내 이름을 위하여 내가 노하기를 더디 할 것이며 내 영예를 위하여 내가 참고 너를 멸절하지 아니하랄. "
본문 11절 "내가 나를 위하여 이를 이룰 것이라. 어찌 내 이름을 욕되게 하리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주지 아니하리라. "고 말씀하십니다.
즉, 절대 나를 포기하지 않고 기어이 회개시키겠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여기 몸 고생, 마음고생중인 분이 계십니까 고생의 의미를 발견하고 가시기 바랍니다.
10절 '내가 너를 연단하였으나 은처럼 하지 아니하고 너를 고난의 풀무에서 택하였노라' 즉, 연단은 마음고생, 몸 고생은 정화의 의미가 있다는 말씀이 다 그 고생의 시간을 지나면서 말씀에 귀 기울이게 하시고 순종하게 하시고 결국 여호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백성으로 만들어 가시겠다는 것입니다.
10절에 '고난의 풀무'라고 하는 말씀은 장차 이 백성이 겪게 될 고난의 시간, 고생의 시간을 예고하시는 말씀입니다.
이토록 완악하고 고집스러운 백성을 이 바벨론에 멸망을 당하게 되고 70년 세월을 바벨론 포로생활을 하게 될 것임을 선언하셨습니다.
이렇게 해서라도 너희가 마음을 열고 내 말에 귀 기울 일수만 있다면 나는 너희를 살리기 위해 그 고난의 길로 몰아갈 것입니다.
영적으로 살아야 하고 은혜 가운데 거하여야 할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가 육신의 재미에 몰두하고 이생의 자랑과 안목의 정욕에 정신 팔려 살아가기 시작하면 붙들고 설득하고 권면한다고 한들 돌이키기 어렵습니다.
이때 고난의 풀무가 준비 됩니다. 반드시 한풀꺽어야 여호와 하나님이 쓰실 재목이 될 인간 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그를 쓰시기 위하여 마음고생, 몸 고생 시키시는 것입니다.
사람은 어떻게 하여야 스스로 여호와 하나님 앞에 겸손하여 질수 있는 것일까요
저는 교양서적을 많이 읽는 분을 보았습니다. 교양서적이 그를 겸손하게 만들어 주지 못하였습니다.
공부를 많이 한 분도 보았습니다. 학식이 그를 겸손하게 만들지 못하였습니다.
기도생활을 열심히 하는 분도 보았습니다. 저도 열심히 한다고 그 인간이 겸손으로 바뀌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사람이 근본이 바뀌는 경우도 보았습니다. 어떤 경우인가 하면 고난의 풀무를 지난 사람입니다.
쉽게 말하자면 여호와 하나님이 크게 손보신 사람, 되게 얻어맞은 사람입니다.
여러분!
겸손은 고난의 풀무에서 받을 수 있는 소중한 선물임을 잊지 마시길 바랍니다.
그 정도 고생을 해봐야만 비로소 우상을 버리고 세성정욕 버리고 여호와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되는 것을 여호와 하나님은 잘 알고 계십니다.
내가 버리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것을 여호와 하나님이 끊어 버리게 만드십니다. 그러므로 고난의 풀무는 우리를 결단의 사람으로 만들어 주고 진실한 사람을 만들어 주고 순수하게 만들어 주는 효과가 있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경제적 문제, 사회적 문제, 정치적 문제, 가정적 문제, 개인적 문제들 속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문제가 한두 가지가 아니어서 문제에서 벗어나는 길도 쉽게 찾아지질 않습니다.
사고의 틀도 바뀌고 사고방식도 바뀌는 삶을 살아갑니다.
정말 소중히 여겨야 할 것이 무엇인지, 나를 행복하게해 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가장 먼저 해결하고 넘어갈 일이 무엇인지를 이 고난의 풀무에서 배워야 할 것입니다.
고난의 자리, 마음고생, 몸 고생의 자리에서 비로소 인생에 눈을 뜨는 사람이 있습니다.
고난의 풀무에서 보니 '내가 더 사랑하고 베풀고 용서하고 양보하고 살지 못한 것이 후회되고' 고난의 풀무에서 보니 '내가 얼마나 이기적이고 독선적이고 무례하고 말을 함부로 하고 부정적, 비관적, 비판적이었는지 나로 인하여 상처받았을 사람들이 상한 마음들이 눈에 들어옵니다. '
고난의 풀무에서 보니 '여호와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삶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알게 되고 그동안 뒤로 미뤄오기만 했던 일들이 얼마나 서둘렀어야 하는 것이었는지도 알게 됩니다. '
마음고생, 몸 고생하면서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으시길 바랍니다.
'내가 너를 고난의 풀무에서 택하였노라 나를 위하여 이를 이룰 것이라 어찌 내 이름을 욕되게 하리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주지 아니하니라. '
욥기 23장 10절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
'여호와 하나님은 고난의 풀무에서 나를 택하셨습니다. '는 고백으로 승리하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람들은 이런 고생을 하게 될 때 어떻게든 거기서 벗어나기만을 바랍니다.
견디기 힘든 이 현실에서 벗어날 수 만 있다면 뭐든 하겠다는 심정을 갖습니다.
때론 내 힘으로 벗어나기 어렵다는 판단이 되었기에 다른 이의 도움을 통하여서라도 이 고생을 끝내고 싶어 하기도 합니다.
혹시 여러분은 문제가 어렵지 않게 지나가 주길 바라는 마음에서 외부적인 도움을 통하여서라도 쉽게 해결되기만을 바라지는 않았습니까!
고생과 고난 역경과 환난은 분명 우리 인생에서 반가운 손님은 아닙니다.
힘겹고 아프고 견디기 어려운 연단과 시련의 시간입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우리 인생길에서 만나는 고생스러운 시간과 연단의 시간 속에 담겨 있는 “의미”마저 놓쳐서는 안 된다는 점입니다.
나비가 애벌레 단계를 지나서 고치를 뚫고 거기서 삐져나오느라고 기진맥진이 됩니다.
이때 나비의 수고를 덜어주겠다고 그 고치를 누군가 찢어주어서 수월하게 빠져나오게 하면 이상하게도 그 나비는 날지도 못하고 얼마 못가 죽더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지기 힘으로 고치를 뚫고 빠져나온 나비는 아름다운 날갯짓을 하며 하늘높이 날아오릅니다.
고생은 반가운 일은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 삶에서 그 시간은 참으로 "의미"가 있는 시간입니다.
힘들고 어렵다고 불평하고 나에게 이런 시간을 주신 주님을 원망하며, 나를 속히 이 지긋지긋한 고생의 자리에서 벗어나게 해달라고만 외칠 것이 아닙니다.
때론 이 시간의 고생을 통하여 정말 의미있는 것, 꼭 필요한 것을 얻고 있다는 생각을 하시길 바랍니다.
나의 인생을 통하여 주님이 하시고자 하시는 일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길 바립니다.
지금 주님이 내 인생가운데 열어두신 길이 '몸 고생길' ' 마음고생길'이라면 이 길을 외면하거나 회피하지 말고, 인내하고 순종하고 받아들이시길 바랍니다.
만일 우리가 이토록 고생하고 힘겹게 살아간다 하더라도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과 "나를 향한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과 "여호와 하나님의 지혜"를 의지한다면 문제는 전혀 달라집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 속에는 3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하나는 '소통'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을 걸어오시고, 우리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기도 하십니다.
또 다른 하나는 잠잠히 우리의 의견을 들으시기도 하십니다.
그리고 원하는 것은 들어주시기도 하십니다.
문제는 마지막 한 가지 요소인데, 그것은 "명령"입니다.
우리의 뜻을 묻지 않으시고, 일방적으로 명령하십니다.
이때는 '내소원', '내 의견'은 아예 고려의 대상이 되질 않습니다.
이럴 경우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의 일방적인 뜻을 어떻게 수용할 것인가 하는 것이 문제가 됩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태초에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신 인간에게는 "위임장"을 주셨습니다.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권세도 주시고, 무엇이든 하지 않을 권세도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결정에 책임도 지라고 하신 것이 여호와 하나님의 위임입니다.
에덴동산에 선악과를 두지 마시든지, 거기 선악과를 두셨으면 아담과 하와가 얼씬도 못하게 고압전류가 흐르는 철조망으로라도 둘러 두시든지 하지 않으시고, 그저 말로만 '선악과는 먹지마라',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하신 여호와 하나님께 불만 가득한 초신 자들이 있습니다.
이건 에덴동산에 국한 된 이야기가 아니고, 지금 우리들의 현실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 이야기입니다.
인격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일을 하지 않을 수도 있고, 할 수도 있는 재량권을 소유한 것을 말합니다.
철조망을 쳐놓고, 결코 얼씬 거릴 수도 없게끔 만들어 놓고나서 '선악과 먹지마라'고 명하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 인격을 소유한 인간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일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인간에게 인격을 부여하셨던 것입니다.
오늘날도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 믿는 이들이 이 세상 살면서 무엇이든 할 수도 있고, 하지 않을 수도 있는 재량권을 주셨습니다.
"아담아, 선악과가 여기 있다. 너 이것을 먹을 수도 있고, 안 먹을 수도 있다. 나는 네가 이것을 먹지 않기를 바라고 내 명령에 순종하는 모습을 보기 원한다. "
오늘날 그것은 부정일 수도 있고, 뇌물일 수도 있고, 쾌락일 수도 있고, 세상 유혹일 수도 있습니다.
'왜 그런 것을 주셔서 나로 범죄케 하셨느냐'고 여호와 하나님께 책임 전가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우릴 태엽감은 장난감이나 무선 조종로봇으로 만드신 게 아니고, 스스로 결정하고, 자기가 책임지는 인격으로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거룩하여 주길, 순결하여 주길 원하시는 것입니다.
말씀을 지속적으로 들려주시면서 여호와 하나님이 마음을 전하고 계십니다.
성령의 감동으로 선지자들의 예언으로 설교자들을 말씀 증거의 도구로 삼으시면서 "얘야, 나는 네가 스스로 선한 일을 결정하고, 죄악을 거절하는 사람으로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 싶구나.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본문 4절을 보면, 여호와 하나님이 그 백성을 꾸짖고 계십니다.
"너는 완악하며 네 목의 힘줄은 무죄요, 네 어미는 놋이라. "
많은 죄악과 불신앙으로 타락하고 교만하여진 인간의 모습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아이를 키우면서보면 뭐라 야단을 치려고만 하여도 눈에서 눈물이 떨어지는 아이가 있습니다.
반면에 야단을 맞고 매를 맞으면서도 '잘못했다'는 소리를 안하는 아이도 있습니다.
이런 고집을 꺾으려면 부모가 먼저 지치기 쉽습니다.
'목의 힘줄은 무죄'라는 표현은 인생의 꺾이지 않는 고집을 표현하신 것입니다.
하지만 여호와 하나님도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본문 9절 "내 이름을 위하여 내가 노하기를 더디 할 것이며 내 영예를 위하여 내가 참고 너를 멸절하지 아니하랄. "
본문 11절 "내가 나를 위하여 이를 이룰 것이라. 어찌 내 이름을 욕되게 하리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주지 아니하리라. "고 말씀하십니다.
즉, 절대 나를 포기하지 않고 기어이 회개시키겠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여기 몸 고생, 마음고생중인 분이 계십니까 고생의 의미를 발견하고 가시기 바랍니다.
10절 '내가 너를 연단하였으나 은처럼 하지 아니하고 너를 고난의 풀무에서 택하였노라' 즉, 연단은 마음고생, 몸 고생은 정화의 의미가 있다는 말씀이 다 그 고생의 시간을 지나면서 말씀에 귀 기울이게 하시고 순종하게 하시고 결국 여호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백성으로 만들어 가시겠다는 것입니다.
10절에 '고난의 풀무'라고 하는 말씀은 장차 이 백성이 겪게 될 고난의 시간, 고생의 시간을 예고하시는 말씀입니다.
이토록 완악하고 고집스러운 백성을 이 바벨론에 멸망을 당하게 되고 70년 세월을 바벨론 포로생활을 하게 될 것임을 선언하셨습니다.
이렇게 해서라도 너희가 마음을 열고 내 말에 귀 기울 일수만 있다면 나는 너희를 살리기 위해 그 고난의 길로 몰아갈 것입니다.
영적으로 살아야 하고 은혜 가운데 거하여야 할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가 육신의 재미에 몰두하고 이생의 자랑과 안목의 정욕에 정신 팔려 살아가기 시작하면 붙들고 설득하고 권면한다고 한들 돌이키기 어렵습니다.
이때 고난의 풀무가 준비 됩니다. 반드시 한풀꺽어야 여호와 하나님이 쓰실 재목이 될 인간 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그를 쓰시기 위하여 마음고생, 몸 고생 시키시는 것입니다.
사람은 어떻게 하여야 스스로 여호와 하나님 앞에 겸손하여 질수 있는 것일까요
저는 교양서적을 많이 읽는 분을 보았습니다. 교양서적이 그를 겸손하게 만들어 주지 못하였습니다.
공부를 많이 한 분도 보았습니다. 학식이 그를 겸손하게 만들지 못하였습니다.
기도생활을 열심히 하는 분도 보았습니다. 저도 열심히 한다고 그 인간이 겸손으로 바뀌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사람이 근본이 바뀌는 경우도 보았습니다. 어떤 경우인가 하면 고난의 풀무를 지난 사람입니다.
쉽게 말하자면 여호와 하나님이 크게 손보신 사람, 되게 얻어맞은 사람입니다.
여러분!
겸손은 고난의 풀무에서 받을 수 있는 소중한 선물임을 잊지 마시길 바랍니다.
그 정도 고생을 해봐야만 비로소 우상을 버리고 세성정욕 버리고 여호와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되는 것을 여호와 하나님은 잘 알고 계십니다.
내가 버리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것을 여호와 하나님이 끊어 버리게 만드십니다. 그러므로 고난의 풀무는 우리를 결단의 사람으로 만들어 주고 진실한 사람을 만들어 주고 순수하게 만들어 주는 효과가 있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경제적 문제, 사회적 문제, 정치적 문제, 가정적 문제, 개인적 문제들 속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문제가 한두 가지가 아니어서 문제에서 벗어나는 길도 쉽게 찾아지질 않습니다.
사고의 틀도 바뀌고 사고방식도 바뀌는 삶을 살아갑니다.
정말 소중히 여겨야 할 것이 무엇인지, 나를 행복하게해 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가장 먼저 해결하고 넘어갈 일이 무엇인지를 이 고난의 풀무에서 배워야 할 것입니다.
고난의 자리, 마음고생, 몸 고생의 자리에서 비로소 인생에 눈을 뜨는 사람이 있습니다.
고난의 풀무에서 보니 '내가 더 사랑하고 베풀고 용서하고 양보하고 살지 못한 것이 후회되고' 고난의 풀무에서 보니 '내가 얼마나 이기적이고 독선적이고 무례하고 말을 함부로 하고 부정적, 비관적, 비판적이었는지 나로 인하여 상처받았을 사람들이 상한 마음들이 눈에 들어옵니다. '
고난의 풀무에서 보니 '여호와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삶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알게 되고 그동안 뒤로 미뤄오기만 했던 일들이 얼마나 서둘렀어야 하는 것이었는지도 알게 됩니다. '
마음고생, 몸 고생하면서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으시길 바랍니다.
'내가 너를 고난의 풀무에서 택하였노라 나를 위하여 이를 이룰 것이라 어찌 내 이름을 욕되게 하리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주지 아니하니라. '
욥기 23장 10절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
'여호와 하나님은 고난의 풀무에서 나를 택하셨습니다. '는 고백으로 승리하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댓글목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