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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려주일] 고난 가운데 만나주시는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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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먼드 모리스는 동물과 인간의 행동의 유사성을 비교 연구한 저서 "인간동물원(人間動物園)"에서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는 것은 자극을 거부하는 것이며, 자극을 거부함으로써 분명한 것은 "목숨을 연장하는 것이 아니라 단축하는 것이 된다"고 하였습니다.
이를테면 동물원의 곰은 개울 속에 던져준 먹이(생선)를 물어 얼음 위에 숨겨두고는 개울 속에 들어가 그 먹이를 찾아 헤매는 시늉을 오래 지속합니다. 가상의 먹이를 상상하고 잡는 시늉을 다 합니다. 살아가는데 필요한 최소한의 자극을 이렇게 얻습니다.
중남미에 사는 아구치라는 살쾡이과 짐승은 감자를 주건, 사과를 주건, 빵을 주건, 일단 껍질을 벗기고 먹습니다. 정갈해서 껍질을 벗기는 것이 아닙니다. 생존을 위한 적당한 자극이 필요하기 때문에 본능적으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벗기고 난 다음 그 껍질까지 먹어 버립니다.
이와 같이 사람도 적절한 자극이 없이는 못 사는 동물이며, 그 적절한 자극 이하의 환경 속에 살면 병이 생기고 생명이 단축된다고 데스먼드 모리스는 이 저술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우리 선조들도 여인의 생활 속에서 이러한 지혜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옛날 어머니들이 하는 일 가운데 일부러 사서하는 고생이 적지 않았습니다. 이를테면 뉘 가리는 일을 일부러 만들어 하기 위해 방아 찧을 때 탈곡되지 않은 뉘를 쌀 한 말 당 한 줌씩 넣어 담는 것도 그것입니다.
이러한 일련의 연구와 삶의 지혜를 통해서 우리는 인간의 삶에 있어서 고난은 완전히 제거되어야만 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 여호와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난 당하는 것이 바로 이러한 의미가 있음을 농사를 실례로 들어서 깨우쳐 주시고 있습니다.
농부가 봄이 되어 농사를 시작하려면 먼저 땅을 갈아엎고, 흙을 잘게 부수어 지면을 고르게 합니다. 이렇게 땅을 갈아엎고 흙을 부수고 고르게 함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닙니다. 파종할 수 있도록 흙을 부드럽게 하기 위함입니다.
공동번역 이사야 28장 23-26
23 귀를 기울여 내 소리를 들어라. 정신 차려 내 말을 들어라.
24 농부가 날마다 밭만 갈겠느냐 땅을 뒤집고 써레질만 하겠느냐
25 땅을 고르고 나서 검정풀씨나 회향초씨를 뿌리지 않겠느냐 밀과 보리를 심지 않겠느냐 밭 가장자리에는 쌀보리를 심지 않겠느냐
26 이런 농사법을 일러 주신 이가 누구냐 여호와 하나님께서 농부에게 가르쳐 주신 것이다.
이처럼 우리 인생의 고난도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드럽게 하사 알곡 인생이 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곡식을 거두어들일 때도 작대기로 털며 밟기도 하지만, 부서뜨리는 것이 아니라 알곡을 골라내는 것입니다.
공동번역 이사야 28장27-29
27 검정풀씨를 타작기로 떨더냐 탈곡기를 굴려 회향초를 떨더냐 검정풀씨는 막대기로 두드려 떤다. 회향초는 도리깨로 두드려 떤다.
28 어찌 밀알이 바서지도록 두드리겠느냐 아니다, 무작정 두드리지는 않는다. 바서지기까지 탈곡기를 굴리지는 않는다.
29 이 생각도 만군의 야훼께서 가르쳐 주신 것이다. 놀라운 계획을 멋지게 이루시는 야훼께서 가르쳐 주신 것이다.
이와 같이 지금 우리에게 닥쳐온 고난도, 그 고난으로 신앙의 껍질과 찌꺼기를 제거하여 우리의 신앙과 삶을 아름답게 하시고, 알곡 되게 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손길이라는 것입니다.
영국의 시인 윌리암 워즈워드(William Wordsworth, 1770-1850)가 쓴 시중에 다음과 같은 내용의 시가 있습니다.
황량하고 거친 산 속에 살고 있는 새 한 마리가 어느 날 들에 나갔다가 폭풍을 만났습니다. 그 새는 자기의 둥지를 떠나지 않기 위하여 있는 힘을 다해서 그 산을 향해 날아가려고 발버둥쳤습니다. 자기가 태어나 살고 있는 산을 떠나면 죽을 것만 같아서 안간힘을 썼으나 그것은 허사였습니다. 폭풍을 이기고 날아갈 수가 없었습니다. 하는 수 없이 그 새는 폭풍이 부는 대로 자기의 몸을 맡기고 그 방향으로 날기 시작했습니다. 강한 폭풍을 따라 한참 날아갔습니다. 드디어 폭풍도 약해 졌습니다. 그런데 그 새의 눈 앞에는 푸른 초장과 멋진 수풀의 아름다운 산이 나타나는 것이었습니다. 과거에 자기가 살던 거친 수풀의 산과는 비교가 안 되는 훌륭한 수풀과 산이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여호와 하나님은 고난의 바람으로 우리를 새로운 신앙의 세계로 인도하십니다.
이와 같은 여호와 하나님의 섭리를 깨달은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은 고난을 피하지 않고 고난 중에 여호와 하나님을 만남으로 고난을 이겨나갔습니다. 러시아의 문호 도스토예프스키(1821-1881)는 평생을 간질병을 앓았는데, 그는 자신의 병을 거룩한 병이라고 불렀습니다. 이 불치의 질병을 자기의 문학적 소양을 키워준 여호와 하나님의 거룩한 손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시베리아 유형, 부인과 아이의 죽음, 강제 노동과 많은 중병을 앓으면서 인류의 가슴에 길이 남을 명작들을 썼던 것입니다. 그의 작품들은 평안과 부요의 산물이 아니라 실로 고통 중에 여호와 하나님을 만난 산물들이었습니다.
찬송가에 영광송이 있습니다. 2장과 4장(Gloria Patri는 아버지께 영광의 뜻)입니다.
성부 성자 성령께 찬송과 영광 돌려 보내세
태초로 지금까지 또 영원무궁토록 성 삼위께 영광 영광
이 찬송은 곡은 후세의 것이나 찬송시는 가장 오랜 것으로 사도 시대(1세기)에 이미 불리던 찬송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로마의 박해 때 사형장에 끌려가면서 이 찬송을 불렀습니다. 그래서순례자의 노래로 불려졌습니다. 순교자들은 육신의 죽음으로 인생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은 여호와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죽음을 행복한 새 출발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죽음조차도 두려워하지 않고 영광의 찬송을 부르며 십자가 형틀이나 굶주린 사자 앞으로 전진했습니다.
성부 성자 성령께
성부 성자 성령께 찬송과 영광 돌려보내세
태초로 지금까지 또 영원무궁토록 성 삼위께 영광 영광.
아멘
그들은 네로 황제에게는 무가치한 패배자로 보였으나 그들의 피 위에 로마 제국뿐이 아니라 유럽과 아메리카와 아시아와 아프리카 전 세계에 복음의 개선가가 울려 퍼지는 결과를 낳았던 것입니다. 고난을 통하여 더 맑아진, 성숙한 신앙으로 초대교인들은 고난을 가한 사람들을 사랑하며, 고난의 십자가를 사랑하며, 복음을 전파하였습니다.
지금 우리는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그리스도 예수의 고난과 십자가의 죽음을 우리의 삶에 되새기는 사순절 절기를 지내고 있습니다.
사순절이란 뜻의 영어단어 렌트(Lent)는 '이른 봄'이라는 라틴어에서 유래됐는데 이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 유대인의 봄 축제인 유월절 전후에 행해졌기 때문입니다.
사순절기간은 재의 수요일(Ash Wednesday)에서 부활절 전날(Easter Eve)까지의 일요일을 제외한 40일입니다. 중세의 크리스천들에 의하면 사순절은 '연중 40일간의 묵상과 기도의 시기'라고 불렀습니다.
이 기간은 우리의 죄를 깊이 자각하고 통회하며 그리스도가 당하신 고난과 죽음을 묵상함으로 예수님을 만나는 기간을 말합니다.
이러한 사순절에는 목회자가 자주색 후드를 착용하는데 이는 자주 혹은 보라색이 회개를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예배 때에 일상적으로 상용되었던 '알렐루야'와 '대 영광송'같은 찬송들은 금지됩니다. 예배에서 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금식과 금욕생활을 통해 자기를 반성하고 회개에로 나아갈 것이 요청되었습니다.
금식은 기독교 초기의 수세기 동안 엄격하게 시행되었습니다. 금식은 21세에서 60세까지의 모든 크리스천들이 저녁이 되기 직전에 하루 한 끼만을 식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금욕은 만 14세부터 재의 수요일과 사순절동안의 매 금요일마다 육식과 물고기 그리고 지역에 따라서는 달걀과 우유로 만든 음식은 제외한 채 빵과 물과 채소만으로 식사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현대에 와서는 금식자체보다는 희생과 봉사행위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이해되었으며 그러한 고난을 통하여 우리를 위해 고난 당하신 예수님을 만나는데 사순절이 가진 본래의 의미를 살릴 수 있는 것으로 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사순절동안은 유흥이나 오락을 금하고 평소보다 더 많이 예배에 참여하고, 봉사함으로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함으로 예수님을 만나는 절기가 되어야 합니다.
말씀의결론입니다.
사순절 기간 동안 모든 예배와 봉사에 적극 동참함으로 주님의 고난에 참여하여 고난 가운데 역사 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만납시다.
우리에게 닥쳐온 고난은 극복하는데 의의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만나는 데 의의가 있습니다.
어떤 음악가가 있었습니다. 불행히도 그의 생애는 그야말로 말할 수 없는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열 살도 되기 전에 아버지와 어머니가 돌아가셨습니다. 그를 키워 준 형이 있었지만, 그 형은 자기가 먹여 살려야만 되는 동생을 몹시 미워했습니다. 그 후 어른이 되어서도 생활은 마찬가지로 어려웠습니다. 결혼한 지 13년 되던 해 부인이 죽었습니다. 또 다시 결혼하게 된 그는 모두 20명의 자녀를 갖게 1되었는데 그 중 10명은 어려서 죽고 말았습니다. 다른 한 명은 스무 살이 지나서 죽고 말았으며, 또 다른 한 명은 정신박약아였습니다. 나이가 많아지자 이 사람은 앞을 보지 못하는 장님이 되고 말았습니다. 게다가 뇌일혈로 쓰러져 반신 불구까지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그는 여호와 하나님을 찬양하는 세계적인 불후의 명곡들을 계속 작곡하였습니다. 그의 곡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경배하고 찬양할 뿐 만 아니라 수많은 사람의 영혼을 완전히 사로잡을 만큼 웅장하고 장엄한 찬양과 경배와 감사의 노래들로, 그야말로 불후의 명작들이었습니다.
도대체 이토록 어렵게 살면서도 전심전력을 다하여 여호와 하나님을 찬양한 사람은 누구일까 세계 역사상 교회 음악 작곡가들 가운데 가장 뛰어난 요한 세바스찬 바하(1685.3. 21 - 1750. 7. 28)가 바로 그 사람입니다. 그는 칸타타, 미사곡, 오라토리오, 수난곡, 합창곡 등 200곡이 넘게 작곡하였습니다.
그가 이처럼 성숙한 믿음으로 심오한 찬양을 여호와 하나님께 드릴 수 있었던 것은 고난을 통하여 살아 계신 여호와 하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그는 고난에 져서 여호와 하나님을 원망하고 사람들을 미워하는 인생의 실패자가 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을 묵상함으로 고난 중에 여호와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하며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데 일생을 바친 사람입니다.
제가 52년 동안 신앙생활을 하면서 여호와 하나님을 실재로 만난 때가 언제인가 하면, 가장 절박한 고통과 외로움과 절망 속에 빠져있을 그때였습니다. 고난 가운데 나를 사랑하여 주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손길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사순절 기간 동안 모든 예배와 봉사에 적극 동참하여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채움으로 고난 가운데 역사 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만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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