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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려주일] 고난의 자리에서

본문

오늘 성서의 말씀은 이사야 11: 10의 말씀을 먼저 봉독합니다.
“그 날에 이새의 뿌리에서 한 싹이 나서 만민의 기호로 설 것이요 열방이 그에게로 돌아오리니 그 거한 곳이 영화로우리라” 또한 신약성서 마태복음 11: 28-30에 있는 말씀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우리 모두는 사순절을 맞이해서 여호와 하나님 앞에 고난의 의미를 새기는 귀중한 절기에 임하고 있습니다. 저희 방송은 그 동안 사순절의 첫째주간에서부터 ‘예수의 복은 고난’이라는 말씀을 전해드렸고, 이어서 ‘축복받은 고독’, ‘내려가는 영광’, 이렇게 이어오면서 오늘의 설교는 ‘고난의 자리에서’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그 동안 우리는 많은 고난의 역정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성서의 말씀 가운데 살고자 하는 자는 죽고 죽고자 하는 자는 산다고 하는 역설이 우리들의 설교문 가운데서 다시 한번 확인했던 주간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이 삶을 영위해 가다가 싸움질을 할 때가 있습니다. 싸움을 하고 나면 때리는 사람이 있고 맞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때리는 사람과 맞는 사람의 태도로, 싸움 이후에 그들이 겪는 마음의 상태를 엿볼 수가 있습니다. 때리는 사람은 밤새도록 잠을 못 잔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밤새도록 심리적인 갈등불안초조를 겪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맞은 사람은 발 뻗고 잠을 잔다는 통례적인 얘기가 있습니다. 오늘 이것을 저희들이 생각해 보면서, 말씀을 진전시켜보려고 합니다.
예수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라고 말씀하셨고, 또한 예수 당시 사회적 표준에서 소외당한 민중들을 향하여 하신 말씀이기도 하였습니다. 당시 사회적종교적 지도자들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엄격한 율법과 계명을 지키도록 민중에게 요구합니다. 그러나 그 율법과 계명은 민중에게는 무거운 짐이 되었습니다. 실패한 민중들은 절망하게 되었습니다. 율법과 계명을 따라 살지 못한 민중은 사회적으로 종교적으로 소외되어 그늘진 곳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예수는 이런 소외자들을 향하여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우리들의 육신이 차지하게 될 공간적인 자리와 사회적인 자리가 우리 인간들에게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자리를 갖지 못하게 될 때 참으로 가련하고 불쌍한 사람이 됩니다. 그 예로서, 집이 없다거나 직장이 없어서 몸을 둘 자리가 없고 일할 자리에 없을 때 불안과 초조실망이 쌓이게 됩니다.
사람이란 몸뚱이만 있을 곳을 가졌다고 해서 장소의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닙니다. 우리 인간은 땅위에서도 마치 나그네와 같습니다. 그래서 항상 영원한 본향을 동경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있어야 할 본래적인 장소는 여호와 하나님과 함께 있어야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살아야 참으로 사람의 본자리를 찾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에덴땅에서 여호와 하나님과 함께 있었을 때는 낙원이었으나 여호와 하나님을 떠났을 때는 고통과 절망이었습니다.
예수는 자리를 잃은 사람을 향하여 “다 내게로 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소외당하고 억압당하고 실패하고 절망하며 병들고 힘없는 자들을 향하여 “누구든지 내게로 오라”고 말씀하십니다.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하신 예수는 자리를 잃고 방황하고 있는 가련한 사람들로 하여금 누구든지 내게로 오라고 하십니다. 이렇게 볼 때,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은 인간 부재의 현실에서 전반적인 새로운 인식이 있어야겠습니다. 온전케 하시는 예수를 구체적인 현실상황에서 다시 부각시켜야 합니다. 비인간화가 되어 가는 오늘의 사회를 온전케 하기 위하여 구원자 예수, 해방자 예수의 선교가 삶의 바탕에서, 고난의 자리에서 삶의 자리를 챙겨가야겠습니다.
기독교적 사명은 곧 예수의 품격을 심어주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교회의 성격에 따라 그의 품격이 다르기는 하지만, 개인영혼의 구원을 강조하는 예수상이 있는가 하면, 사회 구원을 강조하는 예수상도 있습니다. 경건한 예수상이 있는가 하면 죄인과 세리와 함께 먹고 마시면서 잔치를 좋아하는 축제적인 너무도 인간적인 예수상도 있습니다. 영혼의 상처만을 어루만져 주시는 예수상이 있는가 하면, 전체 인간과 전체 사회의 온전함을 위해 투쟁하는 예수상도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우리 시대에 고려하여 알아둘 것이 있습니다. 하나는 인간이 동물로 취급되고 인간이 물건으로 전락되는 경제상황이 고려되어야 하고, 비인간화를 더욱 촉진시킨다는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깨진 인간이 온전한 존재가 되도록 도와주는 일에서 예수의 품격을 찾아야 합니다. 예수의 품격은 보다 의로운 역사를 만들고 보다 자유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하여 노력하는 인간 속에서 찾아야 합니다. 보다 정의롭고 자유로운 구조와 역사의 창조를 위해, 오늘의 불우 속에서 고난을 감당하려는 인간의 노력 속에서 예수의 품성을 찾아야 합니다. 예수가 자기 자신을 부인하고 당시 정치범이 치러야 하는 십자가를 걸머지고 골고다를 향해 고난의 길과 죽음의 자리로 가듯이, 우리도 고난의 자리에서 구원의 삶을 보아야 합니다.
예수의 죽음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질문을 우리는 해보면서, 예수의 죽음에 대한 이해를 하게 됩니다. 오직 그리스도교의 전통 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의 희망이 예수의 죽음이 아니라 부활에 근거를 두고 있다 할지라도, 예수의 죽음 자체를 간과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는 아담의 타락한 혈통을 이어 사람이 되시어 죄있는 육신을 취하심으로 불확실하고 모호한 형태의 죽음을 통해서만 발생하는 인간의 삶의 정황으로 들어오셨고, 그는 사물의 기존질서에서 죽음이 천사와 인간 모두에게 있어서 창조의 타락한 상태를 명시, 혹은 표명한 것이었기 때문에 스스로 그것을 떠맡으셨다고도 볼 수가 있습니다.
따라서 모든 사람이 그분의 죽음 안에, 어떤 방식으로든 죽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죽음이 각 사람에게 실현될 필요가 있음을 우리는 주지합니다.
예수의 죽음은 죄가 없으신 죽음으로, 죄 있는 우리를 구원하는 죽음입니다. 이는 십자가를 통한 속죄의 죽음입니다. 그것은 십자가상에서 말씀하신 “다 이루었다”는말씀에 의한 것으로, 아담이 우리 모든 인류의 죄를 모두 속죄하시기 위한 죽음이었습니다. 말하자면 원죄에 의한 죽음을 극복하기 위한 죽음입니다. 이 죽음의 의미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인간을 상대의 세계에서 절대의 세계로 인도하기 위한 계시된 죽음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예수의 죽음으로 인하여 처음으로 죽음의 본질이 죄라는 사실을 믿고, 예수를 믿음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길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이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계시한 세상을 구원하는 죽음으로서 믿게 되고, 성서가 가르치신 대로 구원의 죽음으로서 평가되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여호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바르게 하기 위한 여호와 하나님의 섭리가 있습니다.
예수의 죽음에 의한 삶은 이미 인간적 생명의 무한한 연속이 아니라 죄의 용서함을 받은 삶으로서 영원한 생명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부활 없는 십자가를 믿고 있지 않습니다. 또 믿어서도 안됩니다. 그것은 구원이 되기 때문에 구원이 없는 신앙은 전적으로 우상숭배와 같은 것으로서 죽은 사후세계에 대한 소망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의 십자가상의 죽음과 동시에 부활하셨음을 그리스도인은 믿음으로 받아들입니다. 예수의 무덤은 소망의 무덤이요
사망 권세를 깨뜨린 무덤이요 영생함을 우리에게 주신 무덤이기에 영원한 생명을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예수의 십자가상에서의 죽음은 살리는 여호와 하나님의 섭리가 있는 죽음이기 때문에 그 죽음은 영생으로 통하는 길입니다. 이 빈 무덤의 영원성을 믿는 것은 기독교인의 죽음에 대한 자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고난받으신 핵심이 여기에 있습니다. 그것은 대속, 즉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기 위함이요 우리로 하여금 여호와 하나님과 화해에 이르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구약에서도 희생제물을 통한 속죄의 예를 볼 수 있지만 예수사역에서도 중심적인 것은 십자가의 의미인 것을 알게 됩니다. 십자가 사건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사죄에 대한 선포의 힘을 총괄적으로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가 믿는 도리를 십자가의 말씀이라고 하며 우리는 유의합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처형되었을 때 그것은 교회와 국가의 종교적정치적 사건으로 처리되었지만, 이 사건이야말로 예수께서 자기의 목숨을 온 세상을 위한 희생의 제물로 내놓으실 수 있도록 하신 것입니다. 희생과 화해의 문제는 신약의 공간복음에서 생생히 묘사되고 있듯이, 최후의 만찬을 나누실 때 결정적으로 나타나 보이십니다.
화해의 복음은 인간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죄인됨은 진실한 삶의 원점이신 여호와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졌으며 이로 인해서 사람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 멀어졌음을 말해 줍니다. 그런데 이 멀어짐을 우리는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이것이 우리의 문제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 스스로의 힘과 노력으로가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이 위로부터 거저 주시는 대속의 은혜로 말미암을 뿐인 것입니다.
예수의 고난받으심과 십자가 사건이란 바로 그런 은혜를 총괄적으로 증거하는 것입니다. 예수는 여러가지 무거운 짐을 지고 고생하는 민중들에게 그 짐을 가볍게 해주려고 하셨습니다. 짐진 자들로 하여금 편히 쉬게 해주겠다는 기쁜 메시지, 곧 복음을 전파하셨습니다. 부자유로부터 해방, 불평등으로부터 해방, 경제적 수탈에서 해방, 정치적 구조에서 해방, 정신적육체적 고통과 번민에서부터 해방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보다 정의로운 공동체의 형성을 위해 십자가를 지라는 예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 당시에도 그의 제자들을 보십시다.
하루는 예수가 가이사랴 빌립보 지역을 지나게 되었을 때입니다. 갑자기 그는 그 자신에 대한 세상 여론을 알고 싶어서, “세상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더냐”라고 제자들에게 물으신 적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사회적인 질문입니다. 제자들은 여러가지 여론을 들려줍니다. 갑자기 예수는 제자들에게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하고 물으셨습니다. 이때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대답합니다. 여기 예수의 평가는 흥미롭습니다.
베드로가 대답한 것은 그의 혈육 때문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의 힘 때문이라고 했다는 것을 지난번 설교문에서 밝힌 바가 있습니다. 즉 베드로의 육적인 관심은 예수가 세상에서 영광스러운 자리에 오를 때 한 자리를 갖겠다는 심사였습니다. 비단 베드로뿐만 아니라 예수의 모든 제자들이 혈육을 동시에 가지고 예수를 따라다녔습니다. 예수가 배를 채워주니까, 예수가 잔칫집에서 포도주를 만들어주고, 예수가 병을 고쳐주고 예수가 기적을 행하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예수가 앞으로 왕이 될 것이라고 하는 그 기대치에서 그들은 열심히 그리스도를 따라다녔습니다. 이것들은 인간의 욕구충족에 만족한 기대치였습니다. 비로소 예수는 자기가 걸어가야 할 고난의 자리를 제자들에게 열어 보이십니다.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음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저희에게 가르치시니, 이 놀라운 가르침에 대한 베드로의 반응은 바로 지금까지 예수를 따르던 심사를 드러내 보입니다. 육적인 축복을 안겨다주는 분으로 믿고 그를 따랐던 무리들의 대표적인 반응이었습니다. 오늘의 한국교인들의 반응은 이와 다를 것이 하나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기복적인 반응에 대한 예수의 응답은 바로 분노였습니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라는 꾸지람이었습니다.
이 땅의 인간들은 아담의 원죄 이후에 수고와 고통과 절망의 나날을 보내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는 본문을 통해, 모든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에게 그에게로 나오라고 초대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수고하며 짐진 자들로서 우리 예수의 초대를 받은 것입니다. 그러나 세속적인 사람들은 열매맺지 못하는 노력, 즉 부귀와 영예, 방탕함과 쾌락을 추구하며 그것들로서 스스로를 구원하려고 합니다. 이것은 그들로 하여금 어느 정도 육체적 만족을 얻게 할지는 모르나 종국에는 그들을 사탄의 노예요 참으로 쓸모없는 핍절한 존재로 만들고 말 것입니다.
이들은 쓸데없는 그릇된 짓에 온갖 수고를 쏟다가 마침내 죄와 두려움의 모든 무거운 짐을 지고 절망의 한숨을 쉬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이들에게조차도 당신의 곁으로 와서 영원의 힘을 얻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실로 죄로 참혹해진 인간을 이처럼 따사로이 불러주시는 분은 오직 주님 한 분뿐이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죄로 인해 불행을 느낄 때나 그의 사랑을 믿고 그의 권능으로 도움을 받기 원할 때 주님 앞에 나와 모든 인생의 짐을 내려놓을 수 있어야겠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 앞으로 나오는 것은 지치고 무거운 짐진 죄인들의 의미인 동시에 기쁨의 특권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우리는 똑똑히 기억해야겠습니다. 이것이 고난의 자리에서 구원의 도를 깨닫는 것입니다. 이 악하고 패역한 불신세상과 비인간세상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영원하신 구원이 이룰 수 있겠는가 하는 의문을 가져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수고하고 무거움이란 헬라어 분사형태로 인간이 당하는 수고와 고난이 인생을 마감하는 순간까지 지속됨을 보여준다는 점을 유의해 봅니다. 뿐만 아니라 내게로 오라는 메시아의 위대한 구원으로서의 초청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서만 영원한 하늘안식의 기쁨, 즉 구원이 있음을 보여준 것입니다. 우리 인간들은 십자가를 지신 주님의 은총에 감사하며, 온유와 겸손으로 십자가를 지신 우리 주님의 희생과 봉사정신을 본받아, 날마다 나눔과 섬김으로 고난의 자리에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을 초대하시는 예수의 음성을 듣는 사순절이 되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미국의 복음전도자 드와이트 리만 무디가 “믿음 최대의 것을 얻고, 사랑은 위대한 역사를 만들며, 겸손은 가장 좋은 것을 보장한다. ”고 한 말을 한 번 새겨보면서 사순절에 임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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