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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려주일] 예수 고난을 “믿습니다”

본문

예수가 고난 받으신 사건은 은밀한 밀실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그 시대 역사의 무대에서 공개적으로 이루어졌다.
그 시대 정치적 배경으로 AD 26~36까지 빌라도가 유대지역의 총독으로 있을 때였다.
그 당시 유대는 로마의 통치지역 가운데 시리아 지역의 한 부분이었다.
빌라도는 시리아 지역에 속한 유대지역 행정 대리인으로 있으면서 그 지역 행정 책임과 재판권을 갖고 있었다.
본래 그의 근무처는 가이샤라빌립에 있었다.
유대인의 명절인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와 있을 때 예수는 유대 산헤드린 앞에서 심문을 받으신 뒤 빌라도에게로 끌려갔다.
예수의 정치적 죄목은 예수는 민중을 선동하여 반란을 일으키려 했다는 것과 로마 황제에게 세금을 바치지 말라고 했다는 것이며, 또한 자칭 왕이라고 했다는 죄목들이었다.
빌라도는 이러한 사유로는 예수의 사건을 다룰 마음이 없어 그 때 예루살렘에 와있던 갈릴리 지방의 영주인 헤롯 안디바에게 예수를 보내 그에게 예수의 사건을 떠맡기려 했다. 헤롯은 오래 전에 예수의 소문을 듣고 직접 보고 싶었던 호기심에 예수를 반겼다.
그러나 예수가 그의 호기심을 만족시켜 주지 않자 조롱하고 모욕한 뒤 다시 빌라도에게 보낸다. 본래 빌라도와 헤롯의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 이 사건으로 인해 두 사람 사이가 서로 친구가 되었다.
빌라도는 세 번이나 예수의 무죄를 주장했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무기력하게도 군중들의 “십자가에 못 박아라”는 함성 속에 잠식되고 만다.
당시 십자가형은 에집트, 페니키아, 칼타코, 페르시아, 앗시리아, 인도, 로마, 그리스 등에서 매우 널리 사용되었던 형 집행 방법이었다.
십자가형은 그 당시 최악형이었다. 예수는 내란 선동이란 정치적 죄목으로 언도 되었다.
이것은 사도신경에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 지내셨다”는 것을 말한다.
사도신경에는 예수가 고난 받으신 사건이 매우 구체적이고 분명하게 첫 장면 다음에 그 다음 장면으로 이어지면서 기록되어 있다.
이 예수의 고난 받으신 사건이 공연히 지어낸 이야기가 아님을 확인하기 위함이다.
예수의 고난 사건에 대한 고백은 그 당시 분명한 역사적 사건으로 있었던 사실을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윌리암 바클레이(William Barclay)는 믿음을 가능케 하는 일에 대하여 6가지를 논한다. 첫째, “믿음은 실험과 논증으로부터 온다”고 했다.
과학도가 실험실에서 실험을 거쳐 분명한 논리로 그 사실을 입증할 때 누구나 그 사실을 믿을 수가 있다. 둘째, “믿음은 논증의 과정으로부터 온다”고 했다.
어떤 모호한 사실을 합리적인 논증으로 계속 입증해 갈 때 그 모호성이 점차 없어지면서 그 사실을 믿게 되는 것이다.
 셋째, “믿음은 권위의 인정으로부터 온다”고 했다. 믿음과 권위는 밀접한 관계가 있다.
아무리 합리적이며 논리에 맞는 학설이나 이론이라도 누가 그것을 말했느냐에 따라 신뢰도가 다르다.
우리가 신뢰할 수 있는 권위를 가진 기관이나 사람으로부터 나온 것일수록 그것을 쉽게 받아 들일 수 있다.
넷째, “믿음은 우리가 신뢰할 수 있는 사람들의 증언으로부터 온다”고 했다. 우리는 일상적인 생활에서 많은 소식들을 들으며 살아가고 있다.
어떤 신비스러운 사건에 관한 소식을 들었을 때 그것을 전해주는 사람이 누구냐에 따라 그것을 받아들이는 태도가 달라진다.
다섯째, “믿음은 어떤 것의 결과를 봄으로써 온다”고 했다.
설득력 있는 논리를 전개할지라도 그 일을 시작해서 행한 결과가 어떤 것이냐에 따라 달라진다. 삶을 통해 나타난 행위의 결과가 중요하다.
여섯째, “믿음은 경험으로부터 온다”고 했다. 어떤 사실에 대한 경험은 직접보고 경험하는 것이 백번 말로 듣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
신앙생활에서 경험은 매우 중요하다. 신앙을 확고하게 세워주는 계기가 된다. 그러므로 믿음은 “내가 믿는다”라고 고백할 때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알아야 한다.
믿음이란 아는 것이다. 믿음은 그 이해한 사실에 대해 동의 하는 것이요, 그 사실에 대해 전적으로 신뢰하고 따르는 것이다.
“내가 믿는다”라고 고백할 때 그것은 내가 그 진리에 대해 분명히 알고 있고 마음으로 동의하고 그것을 신뢰하고 따르겠다는 뜻이다.
올바른 믿음은 올바른 지식으로부터 시작된다. 믿음은 언제나 분명하고 객관적인 사실로부터 시작된다.
우리가 아무리 믿으려 해도 믿을 수 있는 진실된 대상이 아니면 믿는다는 사실은 불가능하다.
기독교 믿음의 유산으로부터 우리 선인들이 불려준 사도신경은 바로 이 믿음을 근거해 제시해 주는 귀중한 영적 유산임을 알아야 한다.
오늘의 시대에 살면서 우리는 주일마다 모여 사도신경의 “여호와 하나님을 믿습니다”라고 습관적으로 고백을 하고 있지만 우리가 고백하는 여호와 하나님, 예수, 성령이 누구이신지 확실한 신앙고백으로 성숙한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
이스라엘의 신앙고백의 기준점은 ‘애굽의 속박에서 우리를 해방 시킨 여호와 하나님이시다’이오, 신약의 신앙고백의 기준점은 ‘십자가를 지시고 구속하신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고백함’에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은 만물을 새롭게 하시겠다는 여호와 하나님의 약속의 시작이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사람은 이 새로운 역사에 구체적으로 동참해 가는 것이다.
역사적 예수의 인격 그리고 그의 생, 죽음, 그리고 부활사건의 의미는 지금도 계속해서 성령에 의해 현실의 역사에서 나타내고 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현존의 인물도 존재한다.
예수가 가이샤라 빌립보 지방에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으실 때, 시몬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고 고백했다.
최초의 신앙 고백이다.
주님은 지금 우리를 향하여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물으신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십자가 죽으심에 대하여 예수가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로 세상에 들어오셔서 선포하신 그의 말씀과 행동은 도래하는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것이었다.
이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는 ‘만물을 새롭게 하시겠다’는 여호와 하나님의 역사의 궁극적인 목적과 관련되어있다. 이러한 예수의 선포와 행동이 유대인들에게는 그들의 율법과 전통을 무시하고 파괴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그들이 율법과 전통을 가지고 지향하는 역사의 궁극적 목적을 향한 삶의 과정과 예수가 말씀하시는 그 목적으로 향하는 삶의 과정은 매우 달라졌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예수를 빌라도에게 데리고 갔다. 빌라도는 로마를 대신하는 행정관이었다. 예수의 여호와 하나님 나라 메시지는 로마에 대해서도 반국가적이었다.
 로마의 세계 통치와는 상반되는 여호와 하나님 나라에 관한 선포였다.
예수께서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시고 유대민족의 억압적인 상황 속에서 민중들을 찾으신 그런 역사 속에서 또 선지자적인 전통이나 사도들의 행적에서 기독교 2000년의 역사 속에서 볼 때,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와 복음은 항상 그 시대적인 과제와 연결되었던 것이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는 이 ‘말씀’은 우리에게 대단히 공허한 것으로 들린다. 우리에게 정말 생동하는 말씀이란 육신이 되신 말씀이다.
이것이 진리이며 우리가 실현해야 할 기독교의 복음이다.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것은 결국 구체적인 역사적인 상황 속에서 내려와서 역사화 했고, 사회화했다는 말이다. 그 시대와 역사적인 상황에 따라서 항상 새롭게 해석되고 새롭게 발견되어야 하는 진리를 말하는 것이다.
예수께서 당시 유대 나라의 사회나 역사를 분석하면서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를 가르치셨는데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는 당시의 상황 속에서 보면 결국 가난한 자들이 풍요함을 누리고 배고픈 자가 배부르게 되고 애통해 하는 자가 위로함을 받고 억눌린 자들이 자유와 해방을 얻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라고 했다.
기독교는 모든 인류가 지향해 나가야 할 기본적인 역사성을 늘 새롭게 의식해야 한다. 이 역사성은 언제나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난 구속사적 역동성에서 동터오고 여호와 하나님 나라에서 그 완성을 기다리는 종말론적 사건에서 드러나는 것이다.
역사는 여호와 하나님과 인간의 협력 속에서 이루어진다. 여호와 하나님은 세계와 인간의 창조자이시며 통치자이시다.
동시에 인간은 여호와 하나님의 일에 참여하는 동참자이다. 여호와 하나님은 오늘의 역사 속에서 일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도 역사 속에서 일해야 한다. 옛 희랍인들은 인간을 자연의 일부분으로 보았다.
그러므로 그들에게서 인간은 운명에 복종할 수밖에 없는 존재였으며 인간은 자유자가 아니라 운명의 노예였다.
그러나 기독교는 인간은 여호와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자이며 여호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이다. 재물, 지식, 능력, 시간 등 모든 것을 여호와 하나님의 역사 창조의 도구로 바치는 자가 인간이며 자유자로서 헌신적인 삶을 사는 역사의 주인이 역시 인간이다.
인류의 역사는 여호와 하나님의 도우심과 함께 하심 가운데서 바로 결단하고 자기 자신을 헌신하며 창조적이고 개척자적인 삶을 사는 사람들에 의해서 계승된다.
기독교는 인류에게 역사의식을 심어준 종교이다. 기독교는 모든 종교 모든 사상 중에서 가장 역사 의식이 강렬한 종교이며, 처음으로 인류에게 가르친 종교이다.
고대 희랍의 사상에서는 역사 의식이 없었다. 그들의 자연철학에는 미래의 완성을 향해 가는 역사관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서 세계의 중심은 희랍이었고 시간의 중심은 없었고 시작도 끝도 없었다. 그들은 세계를 이미 완성되고 조화를 가진 것으로 보았다. 인류에게 역사에 대한 의식을 갖게 한 것은 여호와 하나님을 신앙 하는 히브리 민족이었다.
창세기는 우주의 창조, 인간의 타락, 자연의 고통, 실낙원 심판 등 놀라운 역사 철학사상을 담고 있다.
구약의 예언자들은 훌륭한 역사 해석자들이었고, 역사 안에서의 선구자였다.
기독교는 구약의 사상을 배경으로 하여 선명한 역사관을 가지고 있었다.
유일한 창조의 여호와 하나님께 대한 신앙은 예언자들로 하여금 세계사에 대한 개념을 가지게 하였다.
창조의 여호와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불러 고향을 떠나 미지의 장래를 향하게 함으로서 장소의 속박에서 자기를 풀어 시간의 자유에 자신을 맡기는 역사적인 삶이 되게 하였다.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의 사건은 출애굽의 사건을 통해서 역사 가운데 나타나 그들의 역사의 핵심을 이루고 여호와 하나님의 선택과 계약과 약속은 그들로 하여금 메시아를 대망케 함으로서 이스라엘로 하여금 역사의 중요한 임무를 감당케 하였다.
역사는 항상 해석하는 사람의 역사이고 역사를 바르게 해석하는 사람만이 역사를 책임지고 살아갈 수 있다. 신약의 사상은 그리스도라는 역사의 구속자와 그의 재림 종말 천국 등 위대한 사람들을 교훈하고 있다.
기독교는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이 만드신 세계와 인간이 종말을 향해서 나아간다고 하며, 신앙으로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는 역사와 삶이 있음을 가르친다.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는 신앙 안에서 체험할 수 있다.
여호와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여호와 하나님의 뜻에 절대적으로 복종해야 한다. 여호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조건들은 현재에 이루어지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 조건은 복종이요, 바리세인이나 서기관들의 의를 능가하는 의를 나타내는 것이다. 예수의 인격과 사역을 통하여 도래한 여호와 하나님 나라는 여호와 하나님의 은총의 선물로서 개개인에 의하여 현재 이 순간에 받아들여지는 나라임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여호와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이는 것은 예수의 명령에 복종함으로써 여호와 하나님의 통치에 겸손하고 충성으로 순종해야 함을 말한다.
그러므로 오늘의 우리의 기도는 내일을 향해 드리는 기도가 아니라 내일에 서서 오늘을 향해 드리는 기도이다.
성령의 역사는 개인적인 차원과 사회적인 차원이 동시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의 역사에 의한 기도는 참여자의 기도요 삶의 진실한 표현인 것이다.
주의 뜻은 고통의 역사, 고난의 역사를 통하여 이루어진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뜻이다.
이것은 사순절에 “예수의 고난을 믿습니다”라는 우리의 고백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고난의 종으로 이 시대를 살아가는 고난의 증인이 되어야 한다.
믿음이란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음으로 많은 열매를 거둠과 같이 진리의 열매를 위하여 스스로 죽어지는 것을 뜻한다.
눈으로 볼 수는 없으나 영원히 살아있는 진리와 목숨을 맞바꾸는 자들을 일컬어 우리는 ‘믿는 이’라고 부른다. 예수 고난을 우리는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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