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기

TOP
DOWN

[종려주일] 꿈을 위해 고난을 택한 교회

본문

일세기전, 100년전만 하드라도 한국선교의 꿈을 안고 우리나라를 방문한 선교사들에게는 동방예의 지국이라는 우리나라가 참으로 초라한 나라로 보였습니다.
문명의 혜택을 받은것 이라고는 아무것도 없고 그저 가난과 찌든 사람들의 모양만이 그들을 맞이하였습니다.
그러나 기독교 복음이 전파되고 115여년이 지난 지금 이 민족을 보는 시각은 전혀 다른 시각입니다. 정치 경제 사회의 경이로운 발전은 말 할것도 없거니와 특별히 기독교의 선교라는 측면에는 이제는 한국이 세계 선교를 주도해야하는 때가 되었다고 말하는 선교학자들이 다대수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기억하여 본다면 선교사들의 선교를 받고 믿음이 자라서 이제는 선교사를 파송하는 민족이 되었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가격이 되는지 모릅니다.
선교사 초청예배에 참석을 하여보면 수많은 젊은이들이 이미 단기 혹은 장기 선교사로 자원을 하여서 준비를 하는 선교 예비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이처럼 단기간에 선교사들을 이처럼 많이 배출 할 수 있었던 근거는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주님의 비젼을 함께 공유하였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그런 비젼을 함께 공유하지 못하였더라면 불가능한 것들입니다.
우리주님은 어떤 비젼을 갖고 계셨는가
우리주님은 당시에 한번도 해외여행을 하여본 적이 없습니다.
그 좁은 땅만을 다니신 주님이십니다.
우리나라의 강원도 만한 땅을 다니시면서 우리주님은 참으로 엄청난 꿈을 소유하고 계셨습니다.
좁은 팔레스틴땅을 다니시면서 주님은 여호와 하나님의 마음을 읽으신 것입니다. 그것은 세계를 품으신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본래 유대인들은 어떤 민족입니까 그들은 선민사상이 투철하여 이방나라에 대하여는 그들을 철저히 버려진 자들 처럼 생각을 하였습니다.
이방인들을 개라고 부를 정도로 철저한 민족주의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런 유대민족의 한계를 뛰어 넘어서서 세계를 바라보는 안목을 일찍이 갖고 계셨던 것입니다.
복음서에서 우리주님은 이런 말씀을 선언하십니다. 마28;19절의 말씀을 보시면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
주님은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는 이 모든 세계 사람을 대상으로 제자를 삼도록 하여라" -이것이 좁은 생각으로만 가득 차 있던 제자들에게는 참으로 얼마나 우수운 이야기였을까
이스라엘 땅을 한번도 벗어나신 적이 없으시건만 그분은 이런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온 천하에 다니면서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분명히 세계를 품으신 꿈을 갖고 계신 분이십니다.
그런 주님의 비젼이 지금은 어떤가 주님의 그 간절한 소원들을 우리는 어떻게 이루어가고 있는가
주님은 우리에게 지금도 위탁을 하십니다. "세계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이것은 당시의 주님의 제자들에게만 주신 말씀이 아니고 지금의 우리들에게도 동일하게 주신 말씀이신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우리는 이런 주님의 소원을 기억하면서 이 소원을 이루어 드린 교회를 모델로 삼고 우리들이 세계를 품을 수 있는 신앙의 자리로 함께 돌아가고자 합니다.
행13장에는 안디옥 교회를 소개를 하여줍니다.
물론 안디옥 교회는 행11장에서 나타납니다.
우리가 기억을 한 바처럼 안디옥 교회는 성분이 참으로 좋은 교회입니다. 이 교회는 오직 예수의 말씀만으로 살아가는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고난중에도 핍박과 환난중에서도 예수의 말씀만을 전한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행11;19-20절의 말씀을 보시면 "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을 인하여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도를 유대인들에게만 전하는데 그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하니"
이처럼 그들은 그들이 가는 장소에 관계하지 않고 예루살렘에서 성령의 체험을 한 후에 주님의 그 간절한 비젼을 가슴에 안고 선교에 뛰어든 사람들이었습니다.
물론 우리 주님은 예루살렘교회가 이 일들을 이루시기를 원하였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 위대한 일은 안디옥 교회가 주님의 마음을 기억하며 뛰어든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의 그 큰 꿈을 이루기 위하여 무엇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가 안디옥교회는 무엇을 갖고 있었던 교회인가
 첫째는 모두가 여호와 하나님 안에서 하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교회가 여호와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이야기 입니다.
안디옥교회는 크든 작든 있든 없든 유식하든 무식하든 아이든 어른이든 모두가 함께 사역하던 교회였다는 것입니다.
1절의 말씀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 안디옥교회에 선지자들과 ....... "
안디옥교회의 성분을 봅니다. 먼저는 그 교회에 바나바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귀족출신으로 당을 기증 할 만큼 부동산이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리고 마나엔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그는 헤롯의 젓 동생이라고 소개를 합니다. 당시에 이스라엘을 통치하고있던 왕이 헤롯이었는데 그를 그의 젓 동생이라고 소개를 합니다. 이것은 육신의 동생은 아니지만 같은 유모의 젖을 먹고 함께 자라났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나엔이라는 사람도 사실은 귀족출신입니다.
사실은 귀족이 가난한 사람들과 신앙의 자리에 같이 앉는다는 것은 오늘날에는 그 벽이 다 무너진 것이지만 당시에는 참으로 어려운 상황이었는데 그것을 허물고 하나되었다는 것은 참으로 위대한 일입니다.
그것은 주님의 마음을 이미 읽은 그들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 다음에는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이라는 사람입니다. 이 니게르라는 말에서 니그로라하는 말이 나왔습니다.
이것은 흑인이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 교회는 흑인도 함께 있었음을 이야기하여주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그 교회에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아니하였던 것입니다.
저는 우리교회가 장애우와 비장애우가 함께 어우러지는 교회가 되기를 꿈꾸고 있습니다. 많은 장애우들이 함께 여호와 하나님을 찬양 할 수 있는 교회가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물론 교회의 구조적인 건물만으로서 만이 장애우를 포용하는 교회만이 아니라 우리들의 가슴속에 장애에 대한 편견이 사라지고 여호와 하나님 안에서 우리모두가 하나임을 선언 할 수 있는 자리가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사실이지 장애라는 것은 선천적인 장애도 있지만 후천적인 장애가 얼마나 많습니까 이런 혼란의 시대를 살아가면서 누가 장애로부터 면제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우리들은 이미 중도장애인의 예비명부에 올려있음을 인정 안 할 수 없습니다.
우리들에게는 장애라는 것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 교회이기를 바랍니다.. 이런 영성의 교회가 우리들에게는 참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흑인 한사람으로 끝나지 않고 구레네사람 루기오라는 말을 보면 그도 사실은 흑인이었다는 것입니다. 당시에 흑인이 안디옥교회에 많이 들어온 것을 본다면 참으로 이 교회는 열린 교회입니다.
이런 교회를 통하여 여호와 하나님은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의 일들을 만들어 가십니다. 교회 안에는 사실은 이런 보여지지 않는 선들이 무너져야합니다.
(먼져온 교인, 전문성이 있다는 교인, 얼마만큼 이렇다는 식으로 사는 교인..... )
이런 선들을 무너뜨리기 위하여 우리는 얼마나 많은 열린 마음을 소유하고 있는가
 둘째는 이 교회가 아름다운 예배를 갖고 있는 교회였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번 속회심방을 통하여 예배를 소중히 여김을 요청하였습니다. 예배를 소중히 여기는 성도의 자리에 서기를 소원하였습니다.
여러분 예배란 일방통행이 아닙니다. 예배는 쌍방통행입니다. 우리는 예배를 드리는 것으로 끝이 날 때가 참으로 많습니다. 예배는 진정으로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살아있는 예배의 모습입니다.
예배중에 나의 드리는 예배를 받으시고 그 예배 속에서 말씀을 하신다면 얼마나 감격스러울까
오늘의 예배중에도 세미한 음성으로 말씀을 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으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합니다.
오늘의 안디옥교회는 예배중에 주님의 말씀하시는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교회였습니다.
2절의 말씀을 보시면 "주를 섬겨 금식 할 때에 성령이 가라사대 " 성령께서 그들이 예배를 드리는 중에 말씀을 하십니다.
섬긴다는 단어는 예배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예배를 드리면서도 그 예배를 얼마나 아름답게 드리고 있습니까
금식하면서 드렸다는 것입니다. 금식은 무슨 의미입니까 주님 앞에 더 신실하게 섬기기 위하여서 나의 모든 영역들에 여호와 하나님의 영성을 더욱 들어내기 위하여서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 앞에 금식을 실시하며 주님을 섬기게 된 것입니다.
만약에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일들을 적당한 가운데 듣는다면 그 음성은 참으로 보잘것이 없을 것입니다.
그들은 간절한 마음으로 주님을 섬기기 위하여 금식을 선포하고 주님을 섬기기 시작을 하는데 어느날 주님의 음성을 듣게 된것입니다
2절의 말씀을 다시 한번 읽습니다. "주를 섬겨 금식 할 때에 성령이 가라사대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하시니"
그들은 예배를 드리는 중에 주님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여러분 예배 중에 임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을수 있는 자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합니다.
예배가 살아있지 않으면 사람의 소리만 들릴뿐 입니다. 예배의 감격에 빠지지 않으면 여전히 인간적인 이야기로만 들을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드리는 찬양마다 흠향하여 주시는 주님, 내가 기도를 드릴 때마다 그 기도를 들어주시는 주님, 내가 신령과 진정으로 준비된 예배를 드릴 때마다 그 예배를 통하여 나를 보시고 말씀을 하시는 그럼 은혜가 있는 예배자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 예배속에 주님을 향하는 진정한 헌신이 나오고 진정한 봉사가 나오는 것입니다. 진정한 헌신과 봉사는 예배를 통하여 온전히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헌신과 봉사에도 감사가 나오는 것입니다.
예배 없는 사역들은 얼마나 힘이 들고 말이 많은지 모릅니다. 그런 예배를 통하여 진정한 헌신이 나옵니다.
이사야서 6;1절에 보면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성전에 들어가서 여호와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립니다. 이때 천사들의 찬양소리를 듣습니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천사 성가대의 찬양소리를 들으면서 이사야는 보좌에 앉으신 주님을 봅니다.
그 주님은 ' 이 악한세대를 위하여 복음을 전하러 가는 자가 누구냐'고 말씀 하실 때 이사야는 자리에서 벌떡일어나 여호와 하나님 앞에 응답을 합니다. "주여 내가 여기 있사오니 나를 보내주소서. "
그래서 예배를 드리다가 선교를 나가게 되고 예배를 드리다가 진정한 헌신을 드리게 됩니다.
예배 속에 임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자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합니다.
그리고 예배 속에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헌신 자로 일하시는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셋째로는 거룩한 고난을 택하는 교회입니다.
3절의 말씀을 봅니다. "이에 금식하며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
지난 주일에 우리교회에 많은 교역자 인사 이동이있었습니다. 우리교회를 위하여 참으로 많은 일들을 하여준 사람들입니다. 좋은 교회를 위하여 수고한 사람들을 보낸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들이 아닙니다. 그들을 보내는 자리를 알아보고 그들이 그곳에 가서 사역을 잘하였으면 하는 마음으로 보내 드리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권사님이 저에게 지나가는 말로 "목사님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합니까" 우리들의 일들은 그들이 없으므로 문제는 될 수 있지만 해결은 주님이 해 주시는 것입니다. 좋은 길이 있을 때 보내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들에게는 참으로 필요하지만 할 수 있으면 여호와 하나님의 원하시는 쪽으로 갈 수 있어야만 합니다.
안디옥 교회는 사울이라는 사람이 참으로 필요합니다.
그가 가르침으로 안디옥 교회가 온전한 교회가 되었고 그 교회에서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는 칭호가 붙여졌던 것입니다.
그는 안디옥교회에서는 꼭 필요한 사람입니다. 절대적일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성령의 말씀은 그를 따로 세워서 선교사로 파송을 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성령의 말씀앞에 교회는 어떤 자세를 취하고 있었습니까 이에 금식하고 기도하면서 두 사람에게 안수하며 보냈다는 것입니다.
우리 같으면 어떻게 할수 있습니까 꼭 사울이어야 합니까 다른 사람도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안디옥교회는 주님의 명령에 그들은 이렇게 대답을 합니다. "아멘"이라는 것입니다. 안디옥 교회는 틀림없이 교회의 중요한 그들을 보내었기에 심각한 상황에 빠졌든지 어려움을 상당한 기간동안 겪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계획에 순종 할 수 있었던 교회였습니다.
내 생각에 합당하지 않아도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계획에 순종 할 수 있었던, 여호와 하나님의 요청 앞에 희생을 할 수 있었던 사람들이요. 교회였던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지금도 이런 여호와 하나님의 사람들을, 이런 여호와 하나님의 교회를 지금도 간절히 부르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역사를 위하여 고난도 택할줄아는 아름다운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댓글목록 0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