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려주일] 고난 속에 피는 신념
본문
존 번연의 천로역정에 보면 성도가 당하는 고난은 천성 문 앞에 서 있는
사슬에 묶여 있는 두 마리 사자와 같다고 합니다.
천국을 향해 나아가는 성도들을 천성 문 앞에 엎드려 다 잡아먹을 것같이
으르렁거리지마는 그러나 사슬에 묶여 있는 사자이기 때문에
절대로 성도들에게 위협 할 뿐이지 잡아먹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즉 고난 때문에 성도는 절대로 망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도리어 성경은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고 합니다.
미국 엘라베마 주에 가면 곤충 바구미 동상이 세워져 있습니다.
이 엘라베마 주는 원래 목화 생산지였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바구미 떼가 몰려와서 목화를 다 망쳐 놓았습니다.
그러나 땅콩박사로 유명한 워싱톤 카바가
이 지역을 연구하여 땅콩과 커피를 심었는데 엄청난 수확과 부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바구미 때문에 부자가 되었다 해서
바구미 동상을 세우고 그 밑에 워싱톤 카바의 글을 새겨 놓았습니다.
이 땅에 번영을 가져온 바구미 떼에게 깊이 감사하며 이 기념탑을 세운다
오늘 우리가 당하는 고난도 얼마든지 내게 유익이 될 수 있다는 것
마음에 꼭 새겨 두시기 바랍니다.
특히 성도는 고난 속에 피는 신념을 신앙으로 바꾸어 놓는 자들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시137편은 저자가 누구인지 확실하지 않지만
바벨론 포로생활에서 겪었던 신앙의 고초와 삶의 비탄 속에서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신앙적 결단을 노래한 탄원시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솔로몬을 통하여 금 은 백향목으로 지은 성전을 주실 때
성전 예배가 얼마나 귀한 줄 모르고 형식적으로 예배드리며
여호와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는 우상숭배하며 불신앙적으로 살다가
바벨론 느브갓네살 왕에 의하여
예루살렘 성은 함락되고 성전은 훼파되어 버리고
성전의 금으로 만든 기명들은 다 바벨론으로 옮겨지며
백성들마저 바벨론에 포로가 되어 노예로 비참하게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때사 깨닫고 바벨론 여러 강변에서 흘러가는 강물을 바라보고
여호와 하나님의 도성 시온을 생각하며 눈물을 흘리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 백성은 이렇게 고난을 당하면 떠오르는 생각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시온입니다.
시온에 대한 슬픔은 단순히 고향에 대한 향수가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께 대한 예배를 상실한 신앙적 아픔입니다.
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습니까
우리는 인류의 걸어온 발자취를 역사 또는 문화사라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문화사를 기록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의 손길 즉 여호와 하나님의 구속사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의 구속사를 교회사라고도 합니다.
왜 여호와 하나님의 구속사를 교회사라고 합니까
여호와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는 교회를 중심해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의 구속사를 살펴보면
창세기는 여호와 하나님의 가계를 중심해서
광야 40년 생활은 성막을 중심해서, 다윗 이후에는 성전을 중심해서
예수님 이후 신약시대로 넘어 오면 예루살렘 교회를 중심해서
여호와 하나님의 구속의 장이 펼쳐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의 삶의 중심은 항상 성전 중심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성전 중심 그것은 바로 여호와 하나님 중심적인 신앙의 표현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예루살렘 성전은 파괴되고
지금 바벨론에 포로 잡혀와 강가에서 흘러가는 강물을 보고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 시온은 여호와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을 말하여
오늘 우리에게는 교회를 말하고 있습니다.
시온을 생각하며 울었다는 말은 고난을 당하고 보니
교회생활, 예배생활을 등한히 한 것을 깨닫게 됨을 말합니다.
성도가 고난을 당할 때 자세히 보면 교회에서 드리는 예배를 잃어버리고 살아갑니다.
혹 몸은 교회와서 예배를 드린다 할지라도
마음은 여호와 하나님과 거리가 먼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성도가 여호와 하나님을 멀리하고 예배를 바로 드리지 못한다면
반드시 고난을 당하는데 그 고난은
1)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릴 수 있는 기회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2절 그 중의 버드나무에 우리의 수금을 걸었나니
수금은 성전에서 여호와 하나님께 찬양할 때 동반되는 악기인데
지금 버드나무에 걸어 놓았습니다. 이 얼마나 서글픈 현상입니까
여러분은 지금 내게 주신 재능과 은사를
여호와 하나님을 위해 사용하지 못하고 버드나무에 걸어놓고 탄식하고 있지 않습니까
마치 잠자다가 머리 깎인 삼손처럼
신앙의 잠자다가 여호와 하나님 주신 재능 은사 다 녹 쓸어 버리지 아니했습니까
돌이켜 교회 봉사를 통해 여호와 하나님을 위해 쓰임 받는 삶이 되시기 바랍니다.
2) 바로 세상 속에서 수모와 수치로 나타납니다.
3절에 보니 바벨론 사람들이 포로로 잡혀온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조롱 조로 여호와 하나님께 노래을 해보라는 것입니다.
찬송이라는 것이 마음에 감사와 감격이 있어야 나오는데
지금 수치와 수모를 당하면서 어찌 찬송이 입에서 나올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4절에 우리가 이방에 있어서 어찌 여호와께 노래를 부를꼬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 백성이 여호와 하나님 떠나서 세상에서 잘 살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되려 수모와 수치를 당한다는 사실 마음에 새겨 두시기 바랍니다.
성경에 보면 믿음의 조상들도
가나안에 흉년이 들었다고 애굽이나 불레셋으로 갔다가는
꼭 낭패와 수모를 당합니다.
교회생활 어렵다고 교회를 떠난 사람들
반드시 세상에서 낭패와 실망 당한 뒤에 주께로 돌아옵니다.
왜 이스라엘이 이렇게 바벨론에서 수취와 수모를 겪는 고난을 당합니까
5절에 예루살렘아 내가 너를 잊을찐데 내 오른손이 그 재주를 잊을찌로다
그것은 예루살렘을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형식적인 예배와 우상숭배를 하다가 예루살렘이 멸망되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로
마음이 세상에 빼앗겨 우리의 마음의 고향인 교회에 와서
여호와 하나님 앞에 진정한 예배를 드리지 못하고 형식적인 예배를 드리다 보면
심령이 굳어지고 마음의 곤고가 따라오면
육신의 삶도 고달파지는 것입니다.
옛 부흥성가 가운데
물을 떠난 고기가 혹시 산다 하여도 예수 떠난 심령은 사는 법이 없어요.
그 반대로 시122:6절에
예루살렘을 위하여 평안을 구하라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는 형통하리로다
여호와 하나님의 교회를 위하여 기도하고 사랑하는 자는 형통할 줄 믿습니다.
창34장에 야곱이 세겜 땅에서
외동딸 디나가 추장의 아들에게 겁탈을 당하는 큰 낭패의 사건을 만나게 됩니다.
이 사실을 안 둘째 셋째 아들 시므온과 레위가
추장의 아들 세겜에게 세겜성 남자들이 다 할례를 받으면
여동생 디나를 주겠다고 언약하고는
할례 후 고통이 심한 3일 째 세겜 땅 남자들을 칼로 다 살육해 버립니다.
이 이로 말미암아 주변 사람들이 야곱의 가족을 죽이려고 하니
야곱이 심히 두려워하는 가운데 있는데
여호와께서 나타나셔서 하시는 말씀이
창35:1절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하며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여호와 하나님께 거기서 단을 쌓으라 합니다.
그래서 야곱은 온 식구에게 외칩니다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나의 환난 날에 내게 응답하시며
나의 가는 길에서 나와 함께하신 여호와 하나님께 내가 거기서 단을 쌓으려 하노라
그리고는 벧엘을 향해 올라갑니다.
그럴 때 여호와 하나님이 사면 고을들로 크게 두려워하게 하신 고로
추격하는 자가 없더라 고 합니다.
벧엘이 어디입니까
일찍이 야곱이 돌배게 삼고 자다가 여호와 하나님 만나고
거기서 단을 쌓고 서원 했던 장소입니다.
벧엘은 이름 뜻 그대로 여호와 하나님의 집입니다. 바로 우리의 교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혹 인생 가는 길 고난 당하거든
일어나 여호와 하나님 집으로 찾아와 엎드리시기를 바랍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지켜주시고 회복시켜 주실 줄 믿습니다.
마치 집 떠난 탕자가 굶어 죽게 된 지경에서
아버지 집을 찾아오듯이 여호와 하나님의 교회로 와서 여호와 하나님 앞에 엎드리시기를 바랍니다.
시편 기자는 바벨론 사람들의 조롱과 수치와 수모 속에 깨닫게 됩니다.
왜 아름다운 성전 주실 때 바로 예배드리지 못하고
여호와 하나님 앞에 형식적 예배드리다가 이렇게 포로로 잡혀와 고생하게 되었구나
이제 다시는
예루살렘을 잊을찐데 내 오른손이 그 재주를 잊을찌로다 합니다.
오른 손의 재주 - 밥 먹고 글 쓰고 하는 재주
사람이 죽지 아니한 이상 오른 손의 재주는 잊지 않는 법입니다.
그만큼 뼈저리게 고난 속에서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될 사람은 고난 속에 신념을 피웁니다.
그래서 시편기자는 마음에 다짐하고 결단합니다.
6절 내가 예루살렘을 기억지 아니하고 내가 너를 나의 제일 즐거워하는
것보다 지나치게 아니할찐대 내 혀가 입천장에 붙을 찌로다
이렇게 성도는 고난 속에 피는 신념을 신앙으로 승화시키는 자들입니다.
본래 고난이라는 말속에는
소성케 한다 새롭게 한다는 뜻이 있습니다.
성도가 당하는 고난에는 다 뜻이 있습니다.
그 뜻을 발견하고 결단한다면 우리의 삶 소성하고 회복될 줄 믿습니다.
이제 시편 기자는 고난 속에서 결단하게 됩니다.
내 혀가 입천장에 붙지 아니하는 이상은
예루살렘을 기억하고 제일 사랑하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고난 속에 피는 신념입니다.
성도에게 교회는 나의 제일 즐거워하는 것 이상이 되어야 합니다.
그럴 때 여호와 하나님께서 교회를 통하여 시온의 복을 성도의 가정에 주십니다.
성 어거스틴이 말합니다.
고통은 동일하나 고통 당하는 사람은 동일하지 않습니다.
악한 사람은 똑 같은 고통을 당하면서도 여호와 하나님을 비방하지만
선한 사람은 그 고통 속에서도 여호와 하나님을 찾으며 뜻을 찾습니다
모든 사람이 고통을 당하느냐 아니냐가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당하느냐가 문제입니다.
똑 같은 미풍이 불어오지만 오물을 더러운 냄새를 풍기지만
꽃은 향기를 날립니다
고통은 똑 같이 당하지만 그 고통 속에서 신념을 피우는 사람은
결코 그 고통이 삶의 마이너스가 아니라 플러스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역사상 가장 빠르게 선전이 되고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친 사상이 있다면
공산주의를 들 수 있습니다.
1903년 레닌이 처음 공산주의를 외칠 때는 17명의 추종자 밖에 없었습니다.
14년이 지난 후에는 4만 명이 생겼고 그것이 러시아 정부를 정복하고
드디어 반세기가 되지 아니하여 세계적으로 10억이 넘는 사람들이
공산주의 지배 아래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 후 50여 년이 지난 1957년 공산당 서기장 후르시쵸프가 미국을 방문했을 때
텔레비전을 통하여 건방진 소리를 합니다.
역사는 우리편이다 내가 한 가지 분명히 예언을 하는데 너희들의 손자 때가 되면
너희 손자들은 전부 다 우리 사회주의의 지배 아래 들어오고 말 것이다
라고 합니다.
물론 이뤄지지는 아니했지만
공상주의 라고 할 수 있는 공산주의가 어떻게 세계를 정복했습니까
그것은 레인이 10년이 넘도록 감옥에 드나들며
나중에는 4년이나 시베리아 형무소 생활을 통해 신념을 피웠던 것입니다.
그만큼 고난 중에 피는 신념은 무서운 것입니다.
맑스 레닌이 신학교를 나와서 공산주의에 눈뜨지 아니하고
예수 복음에 눈이 뜨여졌다면 기독교의 세계가 달라졌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고통 중에 있는 성도 있습니까
그 고난 속에 피는 신념에 귀를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C. S Luis는 고난은 여호와 하나님의 확성기 라고 합니다.
우리는 고난 속에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신념을 피워나가는 자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난 당한 것이 네게 유익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 백성은 고난 속에 피는 신념을
신앙으로 승화시키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 시편 기자처럼
예루살렘을 잊지 않겠노라 예루살렘을 나의 제일 즐거운 것으로 삼겠노라
하며 신앙으로 이어지는 신념이 되어야 합니다.
왜 예루살렘을 기억하고 예루살렘을 사랑해야 합니까
거기에는 여호와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보호하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복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고난 가운데 있는 성도들 마음에 결단하고
여호와 하나님 사랑하는 마음으로 교회를 사랑하시고
교회를 마음의 고향으로 삼고 진정한 예배를 드리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회복시켜 주실 줄 믿습니다.
인생 살다보면 고난에 부딪힐 때도 있고 실패할 때도 있습니다.
실패가 없는 인생은 아무도 없습니다.
웨이런 이란 사람이 이런 말을 합니다.
나는 얼마 전에 4000년 동안 한 번도 실수하지 아니하고
한 번도 실패하지 아니한 사람을 만났다
바로 그 사람은 대영제국 박물관에 있는 미이라이다
우리가 미이라가 아닌 이상, 살아있는 사람은 실수도 하고 실패도 합니다.
그러나 그 실수 속에 실패 속에서 신념을 피우고
그 신념을 신앙으로 승화시키는 자는
여호와 하나님이 그를 회복시키시고 귀히 여기실 줄 믿습니다.
시편 기자가 고난 중에
이제는 다시 예루살렘을 잊지 아니하고
이 세상 어떤 것보다 예루살렘을 제일 사랑하겠다는 신앙적 결단을 고백하듯이
오늘 우리도 비록 고난 중에서라도
여호와 하나님 사랑하는 마음으로 교회를 사랑하고
교회에 나와 진정한 예배를 드린다면
여호와 하나님은 비록 세상에서 실패하고 고통 중에 있는 자라 할지라도
새롭게 하셔서 더 크게 들어 역사 할 줄 믿습니다.
세계에 가장 재산이 많은 사람은 빌 게이츠입니다.
우리나라 기업 전체를 합쳐도 따라가지 못할 만큼
그가 가진 재산이 약 800억 불 우리나라 돈으로 약 100조에 달합니다.
빌 게이츠가 40대 중반이니깐 앞으로 40년을 더 산다할지라도
돈벌이는 것을 중단하고 쓰기만 해도
하루에 70억을 써야만 재산을 다 쓸 수 있습니다.
그런데 빌 게이츠가 한 일 가운데 획기적인 것 한가지가
미국에서 가장 처절하게 실패를 경험한 경영책임자 10명을 선정해
최고 대우를 조건으로 그들을 영입하여
M. S사를 더 든든하게 세웠다고 합니다.
저는 이 기사를 읽어 면서
빌 게이츠의 손에 붙들려도 완전 실패자도 성공자로 바꾸어 놓는데
만유의 주재가 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 진다면
우리의 실패가 문제가 아니라
얼마든지 값진 삶을 살아갈 수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우리의 신앙의 회복을 방해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7절 여호와여 해 받던 날을 기억하시고 에돔 자손을 치소서
저희 말이 훼파하라, 훼파하라 그 기초까지 훼파하라 하였나이다
이것이 무슨 말인가 하면
에돔은 에서의 후손으로서 예루살렘이 멸망당할 때
예루살렘을 노략질하고 도피자까지 무자비하게 학살을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에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루살렘 성을 중건하고 성전을 지을 때도 많은 방해를 합니다.
그러니 이 말은 단지 에돔 족에 대한 원한이라기 보다는
여호와 하나님 백성을 괴롭히는 원수에 대한 한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 교회를 방해하는 사탄의 세력을
여호와 하나님께서 물리쳐 달라고 탄원하는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에돔 자손은
에서와 야곱의 때로 시작하여
출17:에 아말렉 족속으로 이스라엘 괴롭히기 시작하면
사울과 다윗 왕 때뿐만이 아니라 이렇게 예루살렘이 멸망할 때
그리고 우리가 잘 아는 에스더서에 나오는 하만
유다 민족을 말살하려고 하다가 자기가 장대에 달려 죽는 하만이
바로 에돔 족속이요
그리고 예루살렘을 중건하고 성전을 다시 건축할 때도
에돔 사람들이 모함을 해서 방해 공작을 합니다.
에돔은 이스라엘의 영원한 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영적으로 말한다면 바로 사탄 마귀를 말하는 것입니다.
마귀는 오늘도 교회가 무너지기를 원하고
교인들이 교회에 무관심하게 만들려고 유혹하며
온갖 수단 방법을 동원하여 예배의 실패자로 만들게 합니다.
그러나 속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교회생활을 방해하는 마귀와의 영적전쟁을 선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출17장에 아말렉을 진멸하면서
여호와가 아말렉으로 더불어 대대로 싸우리라 고 합니다.
우리의 교회생활을 방해하는 마귀적 세력을
항상 기도로 물리칠 수 있는 성도들 되시기 바랍니다.
오늘 여호와 하나님 백성의 원한이 무엇이겠습니까
눅18:7절 여호와 하나님께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저희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라고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의 원한이 무엇이겠습니까
오늘 시편 기자는 7절에서 에돔 족속을 치소서 라고 하며
8절에서는
여자 같은 멸망할 바벨론아 네가 우리에게 행한 대로 갚는 자가 유복하리로다
라고 합니다.
이것이 여호와 하나님 백성 이스라엘의 원한입니다.
물론 이 말씀은 자기들이 직접 원수를 갚겠다는 말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들의 대적에게 복수하시고
자신들을 본국으로 귀한케 하실 것을 소망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택한 백성의 원한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여호와 하나님의 교회와 그의 백성과의 관계를 끊어 놓으려고 하는
원수 마귀와 세상 바벨론에 대해
여호와 하나님이 원수를 물리쳐 달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신앙생활에 적용한다면 9
마귀에게 속고 세상에 속아 고생하고 수모 당한 것
이제 원수를 갚듯이 벗어나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며 살아가게 해 달라는 탄원인 것입니다.
그런데 왜 바벨론을 여자 같은 멸망할 바벨론이라고 말합니까
계17: 18:에서는 바벨론은 세상을 가리키며 음녀 바벨론이라고 합니다.
즉 여자 같은 바벨론이라는 말은
세상이 여호와 하나님 백성을 유혹함을 비유해서 말한 표현입니다.
에스겔서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에 포로 잡혀가서도
거기서 바벨론 풍속을 따르고 우상을 섬기며 살아남기 위해서
온갖 불신앙적인 행동을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벨론은 여호와 하나님 백성의 원수가 됨을 직시해야 합니다.
예수를 믿어도 세상이 더 좋아 보이는 교인들
오늘 말씀을 꼭 마음에 세겨야 합니다.
세상은 우리를 유혹하지 참된 기쁨과 소망을 줄 수 없습니다.
땅에 것만 바라보고 살다가 언젠가 큰 실망할 날이 올 것입니다.
백조와 두루미 우화가 있습니다.
물가를 거닐며 고동을 찾고 있던 두루미가
하늘을 나르는 백조에게 물었습니다.
너 어디서 왔니 천국에서 왔다 천국이 어떤 곳이니
천국은 고통과 아름이 없고 영원한 안식만 있으며
열두 진주문이 있고 생명수 강가에는 아름다운 실과가 있는 곳이지
거기에 고동도 있니 아니
야! 그럼 그런 천국 너 혼자나 가라 고동도 없는 천국이 무슨 천국인냐
예수를 믿어도 땅에 것만 생각하고 세상에 속해 살아가는 교인들
그러나 세상 바벨론은 꼭 성도를 실망시키며 고통을 준다는 것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결론
오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성전을 파괴시키고
여호와 하나님 백성들을 조롱하고 고통 당하는 것을 즐거워하는 자가
누구인가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바로 에돔 족속과 바벨론이듯이
마귀와 세상은 항상 여호와 하나님 백성들로 하여금 여호와 하나님을 떠나게 하고
고통당하는 것을 즐거워 하며 조롱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고통가운데서라도 이를 악물고 마음에 결단하여
여호와 하나님 교회에 나와서 신념을 신앙으로 승화시키는
내일교우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슬에 묶여 있는 두 마리 사자와 같다고 합니다.
천국을 향해 나아가는 성도들을 천성 문 앞에 엎드려 다 잡아먹을 것같이
으르렁거리지마는 그러나 사슬에 묶여 있는 사자이기 때문에
절대로 성도들에게 위협 할 뿐이지 잡아먹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즉 고난 때문에 성도는 절대로 망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도리어 성경은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고 합니다.
미국 엘라베마 주에 가면 곤충 바구미 동상이 세워져 있습니다.
이 엘라베마 주는 원래 목화 생산지였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바구미 떼가 몰려와서 목화를 다 망쳐 놓았습니다.
그러나 땅콩박사로 유명한 워싱톤 카바가
이 지역을 연구하여 땅콩과 커피를 심었는데 엄청난 수확과 부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바구미 때문에 부자가 되었다 해서
바구미 동상을 세우고 그 밑에 워싱톤 카바의 글을 새겨 놓았습니다.
이 땅에 번영을 가져온 바구미 떼에게 깊이 감사하며 이 기념탑을 세운다
오늘 우리가 당하는 고난도 얼마든지 내게 유익이 될 수 있다는 것
마음에 꼭 새겨 두시기 바랍니다.
특히 성도는 고난 속에 피는 신념을 신앙으로 바꾸어 놓는 자들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시137편은 저자가 누구인지 확실하지 않지만
바벨론 포로생활에서 겪었던 신앙의 고초와 삶의 비탄 속에서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신앙적 결단을 노래한 탄원시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솔로몬을 통하여 금 은 백향목으로 지은 성전을 주실 때
성전 예배가 얼마나 귀한 줄 모르고 형식적으로 예배드리며
여호와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는 우상숭배하며 불신앙적으로 살다가
바벨론 느브갓네살 왕에 의하여
예루살렘 성은 함락되고 성전은 훼파되어 버리고
성전의 금으로 만든 기명들은 다 바벨론으로 옮겨지며
백성들마저 바벨론에 포로가 되어 노예로 비참하게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때사 깨닫고 바벨론 여러 강변에서 흘러가는 강물을 바라보고
여호와 하나님의 도성 시온을 생각하며 눈물을 흘리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 백성은 이렇게 고난을 당하면 떠오르는 생각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시온입니다.
시온에 대한 슬픔은 단순히 고향에 대한 향수가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께 대한 예배를 상실한 신앙적 아픔입니다.
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습니까
우리는 인류의 걸어온 발자취를 역사 또는 문화사라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문화사를 기록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의 손길 즉 여호와 하나님의 구속사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의 구속사를 교회사라고도 합니다.
왜 여호와 하나님의 구속사를 교회사라고 합니까
여호와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는 교회를 중심해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의 구속사를 살펴보면
창세기는 여호와 하나님의 가계를 중심해서
광야 40년 생활은 성막을 중심해서, 다윗 이후에는 성전을 중심해서
예수님 이후 신약시대로 넘어 오면 예루살렘 교회를 중심해서
여호와 하나님의 구속의 장이 펼쳐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의 삶의 중심은 항상 성전 중심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성전 중심 그것은 바로 여호와 하나님 중심적인 신앙의 표현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예루살렘 성전은 파괴되고
지금 바벨론에 포로 잡혀와 강가에서 흘러가는 강물을 보고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 시온은 여호와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을 말하여
오늘 우리에게는 교회를 말하고 있습니다.
시온을 생각하며 울었다는 말은 고난을 당하고 보니
교회생활, 예배생활을 등한히 한 것을 깨닫게 됨을 말합니다.
성도가 고난을 당할 때 자세히 보면 교회에서 드리는 예배를 잃어버리고 살아갑니다.
혹 몸은 교회와서 예배를 드린다 할지라도
마음은 여호와 하나님과 거리가 먼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성도가 여호와 하나님을 멀리하고 예배를 바로 드리지 못한다면
반드시 고난을 당하는데 그 고난은
1)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릴 수 있는 기회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2절 그 중의 버드나무에 우리의 수금을 걸었나니
수금은 성전에서 여호와 하나님께 찬양할 때 동반되는 악기인데
지금 버드나무에 걸어 놓았습니다. 이 얼마나 서글픈 현상입니까
여러분은 지금 내게 주신 재능과 은사를
여호와 하나님을 위해 사용하지 못하고 버드나무에 걸어놓고 탄식하고 있지 않습니까
마치 잠자다가 머리 깎인 삼손처럼
신앙의 잠자다가 여호와 하나님 주신 재능 은사 다 녹 쓸어 버리지 아니했습니까
돌이켜 교회 봉사를 통해 여호와 하나님을 위해 쓰임 받는 삶이 되시기 바랍니다.
2) 바로 세상 속에서 수모와 수치로 나타납니다.
3절에 보니 바벨론 사람들이 포로로 잡혀온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조롱 조로 여호와 하나님께 노래을 해보라는 것입니다.
찬송이라는 것이 마음에 감사와 감격이 있어야 나오는데
지금 수치와 수모를 당하면서 어찌 찬송이 입에서 나올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4절에 우리가 이방에 있어서 어찌 여호와께 노래를 부를꼬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 백성이 여호와 하나님 떠나서 세상에서 잘 살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되려 수모와 수치를 당한다는 사실 마음에 새겨 두시기 바랍니다.
성경에 보면 믿음의 조상들도
가나안에 흉년이 들었다고 애굽이나 불레셋으로 갔다가는
꼭 낭패와 수모를 당합니다.
교회생활 어렵다고 교회를 떠난 사람들
반드시 세상에서 낭패와 실망 당한 뒤에 주께로 돌아옵니다.
왜 이스라엘이 이렇게 바벨론에서 수취와 수모를 겪는 고난을 당합니까
5절에 예루살렘아 내가 너를 잊을찐데 내 오른손이 그 재주를 잊을찌로다
그것은 예루살렘을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형식적인 예배와 우상숭배를 하다가 예루살렘이 멸망되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로
마음이 세상에 빼앗겨 우리의 마음의 고향인 교회에 와서
여호와 하나님 앞에 진정한 예배를 드리지 못하고 형식적인 예배를 드리다 보면
심령이 굳어지고 마음의 곤고가 따라오면
육신의 삶도 고달파지는 것입니다.
옛 부흥성가 가운데
물을 떠난 고기가 혹시 산다 하여도 예수 떠난 심령은 사는 법이 없어요.
그 반대로 시122:6절에
예루살렘을 위하여 평안을 구하라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는 형통하리로다
여호와 하나님의 교회를 위하여 기도하고 사랑하는 자는 형통할 줄 믿습니다.
창34장에 야곱이 세겜 땅에서
외동딸 디나가 추장의 아들에게 겁탈을 당하는 큰 낭패의 사건을 만나게 됩니다.
이 사실을 안 둘째 셋째 아들 시므온과 레위가
추장의 아들 세겜에게 세겜성 남자들이 다 할례를 받으면
여동생 디나를 주겠다고 언약하고는
할례 후 고통이 심한 3일 째 세겜 땅 남자들을 칼로 다 살육해 버립니다.
이 이로 말미암아 주변 사람들이 야곱의 가족을 죽이려고 하니
야곱이 심히 두려워하는 가운데 있는데
여호와께서 나타나셔서 하시는 말씀이
창35:1절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하며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여호와 하나님께 거기서 단을 쌓으라 합니다.
그래서 야곱은 온 식구에게 외칩니다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나의 환난 날에 내게 응답하시며
나의 가는 길에서 나와 함께하신 여호와 하나님께 내가 거기서 단을 쌓으려 하노라
그리고는 벧엘을 향해 올라갑니다.
그럴 때 여호와 하나님이 사면 고을들로 크게 두려워하게 하신 고로
추격하는 자가 없더라 고 합니다.
벧엘이 어디입니까
일찍이 야곱이 돌배게 삼고 자다가 여호와 하나님 만나고
거기서 단을 쌓고 서원 했던 장소입니다.
벧엘은 이름 뜻 그대로 여호와 하나님의 집입니다. 바로 우리의 교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혹 인생 가는 길 고난 당하거든
일어나 여호와 하나님 집으로 찾아와 엎드리시기를 바랍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지켜주시고 회복시켜 주실 줄 믿습니다.
마치 집 떠난 탕자가 굶어 죽게 된 지경에서
아버지 집을 찾아오듯이 여호와 하나님의 교회로 와서 여호와 하나님 앞에 엎드리시기를 바랍니다.
시편 기자는 바벨론 사람들의 조롱과 수치와 수모 속에 깨닫게 됩니다.
왜 아름다운 성전 주실 때 바로 예배드리지 못하고
여호와 하나님 앞에 형식적 예배드리다가 이렇게 포로로 잡혀와 고생하게 되었구나
이제 다시는
예루살렘을 잊을찐데 내 오른손이 그 재주를 잊을찌로다 합니다.
오른 손의 재주 - 밥 먹고 글 쓰고 하는 재주
사람이 죽지 아니한 이상 오른 손의 재주는 잊지 않는 법입니다.
그만큼 뼈저리게 고난 속에서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될 사람은 고난 속에 신념을 피웁니다.
그래서 시편기자는 마음에 다짐하고 결단합니다.
6절 내가 예루살렘을 기억지 아니하고 내가 너를 나의 제일 즐거워하는
것보다 지나치게 아니할찐대 내 혀가 입천장에 붙을 찌로다
이렇게 성도는 고난 속에 피는 신념을 신앙으로 승화시키는 자들입니다.
본래 고난이라는 말속에는
소성케 한다 새롭게 한다는 뜻이 있습니다.
성도가 당하는 고난에는 다 뜻이 있습니다.
그 뜻을 발견하고 결단한다면 우리의 삶 소성하고 회복될 줄 믿습니다.
이제 시편 기자는 고난 속에서 결단하게 됩니다.
내 혀가 입천장에 붙지 아니하는 이상은
예루살렘을 기억하고 제일 사랑하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고난 속에 피는 신념입니다.
성도에게 교회는 나의 제일 즐거워하는 것 이상이 되어야 합니다.
그럴 때 여호와 하나님께서 교회를 통하여 시온의 복을 성도의 가정에 주십니다.
성 어거스틴이 말합니다.
고통은 동일하나 고통 당하는 사람은 동일하지 않습니다.
악한 사람은 똑 같은 고통을 당하면서도 여호와 하나님을 비방하지만
선한 사람은 그 고통 속에서도 여호와 하나님을 찾으며 뜻을 찾습니다
모든 사람이 고통을 당하느냐 아니냐가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당하느냐가 문제입니다.
똑 같은 미풍이 불어오지만 오물을 더러운 냄새를 풍기지만
꽃은 향기를 날립니다
고통은 똑 같이 당하지만 그 고통 속에서 신념을 피우는 사람은
결코 그 고통이 삶의 마이너스가 아니라 플러스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역사상 가장 빠르게 선전이 되고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친 사상이 있다면
공산주의를 들 수 있습니다.
1903년 레닌이 처음 공산주의를 외칠 때는 17명의 추종자 밖에 없었습니다.
14년이 지난 후에는 4만 명이 생겼고 그것이 러시아 정부를 정복하고
드디어 반세기가 되지 아니하여 세계적으로 10억이 넘는 사람들이
공산주의 지배 아래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 후 50여 년이 지난 1957년 공산당 서기장 후르시쵸프가 미국을 방문했을 때
텔레비전을 통하여 건방진 소리를 합니다.
역사는 우리편이다 내가 한 가지 분명히 예언을 하는데 너희들의 손자 때가 되면
너희 손자들은 전부 다 우리 사회주의의 지배 아래 들어오고 말 것이다
라고 합니다.
물론 이뤄지지는 아니했지만
공상주의 라고 할 수 있는 공산주의가 어떻게 세계를 정복했습니까
그것은 레인이 10년이 넘도록 감옥에 드나들며
나중에는 4년이나 시베리아 형무소 생활을 통해 신념을 피웠던 것입니다.
그만큼 고난 중에 피는 신념은 무서운 것입니다.
맑스 레닌이 신학교를 나와서 공산주의에 눈뜨지 아니하고
예수 복음에 눈이 뜨여졌다면 기독교의 세계가 달라졌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고통 중에 있는 성도 있습니까
그 고난 속에 피는 신념에 귀를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C. S Luis는 고난은 여호와 하나님의 확성기 라고 합니다.
우리는 고난 속에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신념을 피워나가는 자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난 당한 것이 네게 유익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 백성은 고난 속에 피는 신념을
신앙으로 승화시키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 시편 기자처럼
예루살렘을 잊지 않겠노라 예루살렘을 나의 제일 즐거운 것으로 삼겠노라
하며 신앙으로 이어지는 신념이 되어야 합니다.
왜 예루살렘을 기억하고 예루살렘을 사랑해야 합니까
거기에는 여호와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보호하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복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고난 가운데 있는 성도들 마음에 결단하고
여호와 하나님 사랑하는 마음으로 교회를 사랑하시고
교회를 마음의 고향으로 삼고 진정한 예배를 드리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회복시켜 주실 줄 믿습니다.
인생 살다보면 고난에 부딪힐 때도 있고 실패할 때도 있습니다.
실패가 없는 인생은 아무도 없습니다.
웨이런 이란 사람이 이런 말을 합니다.
나는 얼마 전에 4000년 동안 한 번도 실수하지 아니하고
한 번도 실패하지 아니한 사람을 만났다
바로 그 사람은 대영제국 박물관에 있는 미이라이다
우리가 미이라가 아닌 이상, 살아있는 사람은 실수도 하고 실패도 합니다.
그러나 그 실수 속에 실패 속에서 신념을 피우고
그 신념을 신앙으로 승화시키는 자는
여호와 하나님이 그를 회복시키시고 귀히 여기실 줄 믿습니다.
시편 기자가 고난 중에
이제는 다시 예루살렘을 잊지 아니하고
이 세상 어떤 것보다 예루살렘을 제일 사랑하겠다는 신앙적 결단을 고백하듯이
오늘 우리도 비록 고난 중에서라도
여호와 하나님 사랑하는 마음으로 교회를 사랑하고
교회에 나와 진정한 예배를 드린다면
여호와 하나님은 비록 세상에서 실패하고 고통 중에 있는 자라 할지라도
새롭게 하셔서 더 크게 들어 역사 할 줄 믿습니다.
세계에 가장 재산이 많은 사람은 빌 게이츠입니다.
우리나라 기업 전체를 합쳐도 따라가지 못할 만큼
그가 가진 재산이 약 800억 불 우리나라 돈으로 약 100조에 달합니다.
빌 게이츠가 40대 중반이니깐 앞으로 40년을 더 산다할지라도
돈벌이는 것을 중단하고 쓰기만 해도
하루에 70억을 써야만 재산을 다 쓸 수 있습니다.
그런데 빌 게이츠가 한 일 가운데 획기적인 것 한가지가
미국에서 가장 처절하게 실패를 경험한 경영책임자 10명을 선정해
최고 대우를 조건으로 그들을 영입하여
M. S사를 더 든든하게 세웠다고 합니다.
저는 이 기사를 읽어 면서
빌 게이츠의 손에 붙들려도 완전 실패자도 성공자로 바꾸어 놓는데
만유의 주재가 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 진다면
우리의 실패가 문제가 아니라
얼마든지 값진 삶을 살아갈 수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우리의 신앙의 회복을 방해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7절 여호와여 해 받던 날을 기억하시고 에돔 자손을 치소서
저희 말이 훼파하라, 훼파하라 그 기초까지 훼파하라 하였나이다
이것이 무슨 말인가 하면
에돔은 에서의 후손으로서 예루살렘이 멸망당할 때
예루살렘을 노략질하고 도피자까지 무자비하게 학살을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에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루살렘 성을 중건하고 성전을 지을 때도 많은 방해를 합니다.
그러니 이 말은 단지 에돔 족에 대한 원한이라기 보다는
여호와 하나님 백성을 괴롭히는 원수에 대한 한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 교회를 방해하는 사탄의 세력을
여호와 하나님께서 물리쳐 달라고 탄원하는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에돔 자손은
에서와 야곱의 때로 시작하여
출17:에 아말렉 족속으로 이스라엘 괴롭히기 시작하면
사울과 다윗 왕 때뿐만이 아니라 이렇게 예루살렘이 멸망할 때
그리고 우리가 잘 아는 에스더서에 나오는 하만
유다 민족을 말살하려고 하다가 자기가 장대에 달려 죽는 하만이
바로 에돔 족속이요
그리고 예루살렘을 중건하고 성전을 다시 건축할 때도
에돔 사람들이 모함을 해서 방해 공작을 합니다.
에돔은 이스라엘의 영원한 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영적으로 말한다면 바로 사탄 마귀를 말하는 것입니다.
마귀는 오늘도 교회가 무너지기를 원하고
교인들이 교회에 무관심하게 만들려고 유혹하며
온갖 수단 방법을 동원하여 예배의 실패자로 만들게 합니다.
그러나 속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교회생활을 방해하는 마귀와의 영적전쟁을 선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출17장에 아말렉을 진멸하면서
여호와가 아말렉으로 더불어 대대로 싸우리라 고 합니다.
우리의 교회생활을 방해하는 마귀적 세력을
항상 기도로 물리칠 수 있는 성도들 되시기 바랍니다.
오늘 여호와 하나님 백성의 원한이 무엇이겠습니까
눅18:7절 여호와 하나님께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저희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라고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의 원한이 무엇이겠습니까
오늘 시편 기자는 7절에서 에돔 족속을 치소서 라고 하며
8절에서는
여자 같은 멸망할 바벨론아 네가 우리에게 행한 대로 갚는 자가 유복하리로다
라고 합니다.
이것이 여호와 하나님 백성 이스라엘의 원한입니다.
물론 이 말씀은 자기들이 직접 원수를 갚겠다는 말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들의 대적에게 복수하시고
자신들을 본국으로 귀한케 하실 것을 소망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택한 백성의 원한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여호와 하나님의 교회와 그의 백성과의 관계를 끊어 놓으려고 하는
원수 마귀와 세상 바벨론에 대해
여호와 하나님이 원수를 물리쳐 달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신앙생활에 적용한다면 9
마귀에게 속고 세상에 속아 고생하고 수모 당한 것
이제 원수를 갚듯이 벗어나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며 살아가게 해 달라는 탄원인 것입니다.
그런데 왜 바벨론을 여자 같은 멸망할 바벨론이라고 말합니까
계17: 18:에서는 바벨론은 세상을 가리키며 음녀 바벨론이라고 합니다.
즉 여자 같은 바벨론이라는 말은
세상이 여호와 하나님 백성을 유혹함을 비유해서 말한 표현입니다.
에스겔서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에 포로 잡혀가서도
거기서 바벨론 풍속을 따르고 우상을 섬기며 살아남기 위해서
온갖 불신앙적인 행동을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벨론은 여호와 하나님 백성의 원수가 됨을 직시해야 합니다.
예수를 믿어도 세상이 더 좋아 보이는 교인들
오늘 말씀을 꼭 마음에 세겨야 합니다.
세상은 우리를 유혹하지 참된 기쁨과 소망을 줄 수 없습니다.
땅에 것만 바라보고 살다가 언젠가 큰 실망할 날이 올 것입니다.
백조와 두루미 우화가 있습니다.
물가를 거닐며 고동을 찾고 있던 두루미가
하늘을 나르는 백조에게 물었습니다.
너 어디서 왔니 천국에서 왔다 천국이 어떤 곳이니
천국은 고통과 아름이 없고 영원한 안식만 있으며
열두 진주문이 있고 생명수 강가에는 아름다운 실과가 있는 곳이지
거기에 고동도 있니 아니
야! 그럼 그런 천국 너 혼자나 가라 고동도 없는 천국이 무슨 천국인냐
예수를 믿어도 땅에 것만 생각하고 세상에 속해 살아가는 교인들
그러나 세상 바벨론은 꼭 성도를 실망시키며 고통을 준다는 것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결론
오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성전을 파괴시키고
여호와 하나님 백성들을 조롱하고 고통 당하는 것을 즐거워하는 자가
누구인가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바로 에돔 족속과 바벨론이듯이
마귀와 세상은 항상 여호와 하나님 백성들로 하여금 여호와 하나님을 떠나게 하고
고통당하는 것을 즐거워 하며 조롱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고통가운데서라도 이를 악물고 마음에 결단하여
여호와 하나님 교회에 나와서 신념을 신앙으로 승화시키는
내일교우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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