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려주일] 고난 당하신 메시야
본문
우리 예수님께서 못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시고 온갖 고난을 다 당하시고 죽으신 날이 이제 점점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때에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십자가 위에서 고난 당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다시 한 번 생각하는 가운데 여호와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시는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을 기록한 이사야 선지자는 주전 8세기 때의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보다도 700-800년 정도 앞선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사야 선지자는 성령의 감화하심에 따라서 믿음의 눈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너무나도 분명하고 선명하게 바라보고 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700년이나 앞서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그렇듯 분명하게 바라보았다면, 하물며 우리들은 어떠해야 하겠습니까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멀리서만 바라보려고 하지 말고 바로 우리 눈앞에 두고서 바라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오늘 읽은 본문을 통해서 고난 당하시는 메시야의 모습을 세 가지로 설명해 주었습니다.
첫째로, 1-3절의 말씀입니다. 우리 예수님은 철저하게 버림을 받으셨습니다. 나를 위하여 처절할 정도로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으시고, 십자가 위에서는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로부터도 버림을 받으셨습니다.
둘째로, 4-6절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못난 나를 살리시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시고 온갖 고초를 다 겪으시고 죽으신 모습을 우리에게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아무런 죄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대속의 죽음을 죽으신 것입니다.
셋째로, 7-9절의 말씀입니다. 침묵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난 속에서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셨습니다. 끝까지 침묵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위하여 그 모든 고난을 끝까지 인내하신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한 절 한 절 말씀을 읽으면서 묵상하는 가운데 성령께서 감화를 주셔서, 십자가에 달리셔서 고난 당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우리 눈앞에 더 가까이, 더 선명하게 바라보이게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로, 1-3절은 나를 대신해서 버림받으신 예수님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1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뇨. "
여호와 하나님은 자기 백성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그 거룩하신 팔을 나타내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불신앙 때문에 메시야를 영접하지 못했습니다. 그 사실을 사도 요한은 요1:10-11절에서 잘 설명해 주었습니다.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 백성들에게서조차도 버림을 당하셨습니다. 그 당시에 종교 지도자들이었던 대제사장, 장로들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을 배척했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여호와 하나님을 잘 믿는다는 종교 지도자들로부터도 버림을 당하신 것입니다. 심지어 예수님은 고향 사람들로부터도 배척을 받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탄식 가운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선지자가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는 자가 없도다. "
심지어 그 당시 사람들은 예수님을 손가락질하면서 미쳤다고 까지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친척들이 예수님을 붙들러 나오기까지 했습니다.
왜 예수님이 자기 백성들에게조차도 배척을 당하셨습니까 이사야 선지자는 그 이유를 2절에서 이렇게 밝히고 있습니다.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
우리 예수님의 외모가 너무 초라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연한 순 같이 나약해 보이셨습니다. 마른 땅에서 겨우 나온 줄기처럼 아무런 힘이 없어 보이셨습니다. 예수님에게는 고운 모양도 없었고, 위풍당당한 풍채도 없으셨습니다. 사람들이 우러러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인간적인 매력이 전혀 없으셨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님을 가리켜서 "저가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 마리아의 아들이 아니냐 무슨 나사렛에서 선한 것이 나겠느냐"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초라한 모습 때문에 예수님을 그저 별 볼일 없는 사람으로 취급했습니다. 어디 그것뿐입니까 3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
예수님은 멸시를 받으셨습니다. 사람들에게 싫어 버림받으셨습니다. 빌라도의 법정에서 빌라도가 사람들에게 물었습니다.
"내가 너희들에게 살인강도 바라바를 놓아주랴 그렇지 않으면 예수를 놓아주랴"
사람들은 일제히 소리를 질렀습니다.
"우리에게 바라바를 놓아주소서!"
우리 예수님은 심지어 살인강도보다도 못한 취급을 받으셨습니다. 멸시를 받으셨습니다. 사람들에게 싫어 버린바 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간고를 많이 겪으셨습니다. 온갖 질고를 다 당하셨습니다. 침뱉음을 당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은 손바닥으로 예수님의 뺨을 때리면서 희롱했습니다. 갈대로 예수님을 치면서 희롱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결국 예수님은 사람들의 외면과 멸시 속에 죄인 취급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심지어 사람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밑에서까지도 앞을 다투어서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희롱했습니다.
"네가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이든, 그리스도이든 십자가에서 내려와서 네 자신이나 한 번 구원해 보아라!"
예수님은 이처럼 사람들에게서 멸시를 당하시고 철저하게 버림을 받으셨습니다. 어디 그것뿐입니까 우리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고통 가운데서 절규하셨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나의 여호와 하나님 나의 여호와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예수님은 사람들에게서만 버림을 받으신 것이 아니고, 십자가 위에서는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로부터도 버림을 받으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인류 역사상 그 누가 우리 예수님만큼 철저하게 버림을 받았겠습니까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다 보면 때로는 우리도 남들에게서 멸시를 당하고, 배신을 당하고, 버림을 받을 때가 없지 않아 있을 것입니다. 배운 것이 없다고 무시를 당할 때도 있고, 가진 것 없다고 멸시를 당할 때도 있고, 못생겼다고 멸시를 당할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너무 괴로워하지 마세요. 그럴수록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 분이 우리 앞서서 버림받으셨지 않습니까 내가 버림받은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예수님은 철저하게 버림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시면서 위로를 받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예수님이 버림을 받으신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으로 끝나버렸습니까 아닙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건축자들이 버린 돌을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게 하셨습니다. 우리 여호와 하나님은 예수님을 지극히 높여주셨습니다. 그리해서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하여금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 앞에 꿇게 하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모든 입으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시인케 하셨습니다. 문자 그대로 건축자들의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돌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인류 역사를 한 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사람들에게서 버림을 받은 자가 오히려 인류 사회의 큰 기여를 한 예가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만유인력으로 잘 알려진 아이삭 뉴턴은 학교에 다닐 때 늘 꼴지만 도맡아 하던 열등아였습니다. 놀림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발명왕 토마스 에디슨은 어떠했습니까 선생님에 의해서 "너 같은 멍텅구리는 내가 가르칠 수 없다!"라고 해서 학교에서 쫓겨남을 당했습니다. 그래서 그 어머니가 대신 에디슨을 가르쳤습니다. 음악가 베토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음악 선생님으로부터 "너는 음악에는 전혀 소질이 없는 아이야!"라는 핀잔을 받았던 아이였습니다. 디즈니랜드를 만들었던 월트 디즈니도 마찬가지입니다. 본시 그는 신문기자였습니다. 그러나 아이디어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해고를 당했습니다. 그랬던 그가 아이디어를 내서 디즈니랜드를 만들었습니다. 이들 모두가 다 버림을 받은 이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은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 오히려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게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때로는 배운 것이 없고, 가진 것이 없고, 못생겼다고 버림을 당한다 할지라도 그것 때문에 낙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시면서 주님 앞으로 더 가까이 나오시기 바랍니다. 나보다도 먼저 버림을 받으신 예수님, 철저하게 버림을 받으신 예수님이 나를 굳세게 붙들어 주셔서 나로 하여금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게 하실 것입니다. 그러니 너무 괴로워하지 마시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시면서 십자가의 능력으로 다시금 일어나셔서 승리하는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4-6절에서는 예수님이 나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시고, 고난 당하시고 죽으신 모습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4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여호와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
왜 그 당시 사람들이 예수님의 십자가 밑에서조차도 앞을 다투어서 예수님을 희롱했습니까 예수님이 우리의 질고를 대신 지셨다는 사실을 그들은 깨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슬픔을 대신 당하셨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생각하기를 예수님이 자신의 잘못으로 징벌을 받고, 여호와 하나님에게 매를 맞으며 그것 때문에 고난을 당한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어린 시절 주일학교 선생님들에게서 자주 듣던 이야기가 있습니다. 철수라는 아이는 본시 성격이 매우 명랑하고 쾌활한 아이였습니다. 그런데 커갈수록 성격이 내성적으로 바뀌어졌습니다. 친구들과 어울리기를 싫어했습니다. 외톨이로 놀기를 좋아했습니다. 학교에 가는 것조차도 싫어했습니다. 심지어 집에서는 책가방을 싸들고 학교에 간다고 이야기하고서는 뒷동산에 올라가서 혼자 시간을 보내다가 시간이 되면 집으로 돌아올 때도 있었습니다.
때로는 타일러 보고 때로는 달래보기도 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습니다. 참다못한 그의 어머니가 회초리를 들고서 사정없이 치면서 다그쳤습니다. 그제야 철수는 소리내어 울면서 왜 자신이 학교에 가는 것을 그토록 싫어하는지 이유를 밝혔습니다.
"학교에 가면 저를 보는 친구들마다 놀리잖아요! 어머니 얼굴이 귀신의 얼굴과 같다고요. 저도 귀신의 아들이래요! 그러니 제가 무슨 재미로 학교에 가겠어요!"
그제야 철수의 어머니는 왜 자기의 얼굴이 그토록 흉하게 일그러졌는지 비로소 철수에게 그 까닭을 설명해 주었습니다.
"얘야, 나도 과거에는 이쁜이라고 불려질 만큼 얼굴이 고운 사람이었다. 네가 갓난 아이때 잠시 너를 재워두고서 집밖으로 나갔다 왔더니 그 사이에 그만 집에서 큰불이 나고 말았다. 너무나도 불길이 거세어서 모두들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지. 그러나 차마 나는 너를 그대로 죽게 내버려 둘 수가 없어서, 그 불길 속으로 뛰어 들어갔단다. 그리고는 너를 품안에 안고 나오다가, 그만 화상을 입고서 얼굴이 이렇게 흉하게 일그러지고야 말았단다. "
그 말을 들은 철수는 어머니의 품에 와락 안겼습니다. 그리고는 흐느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머니, 잘못했습니다. 용서해 주세요. 제가 다시는 어머니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 않겠습니다. "
그는 집밖으로 뛰쳐나왔습니다. 동네 친구들을 다 불러 모았습니다. 그리고 소리쳤습니다.
"나는 이제 더 이상 우리 어머니의 흉한 얼굴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어머니는 나를 살리기 위해서 그렇게 되셨다. 나는 어머니 때문에 살았다. 이 세상에서 그 누가 무엇이라고 해도 우리 어머님이 제일 이쁜 미인이다!"
철수는 그 때부터 두 번 다시 어머니의 흉한 얼굴을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이 질고를 지신 것은 우리를 위해서 지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슬픔을 당하신 것도 우리를 대신해서 당하신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좀 더 구체적으로 왜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셔야 했는지 5절에서 그 이유를 밝히고 있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
여러분, 예수님의 십자가를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왜 우리 예수님이 찔리셨습니까 왜 예수님의 이마가 가시 면류관에 찔리셨습니까 왜 예수님의 손과 발이 굵은 못에 찔리셨습니까 왜 예수님의 허리가 날카로운 창에 찔리셨습니까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 왜 예수님의 몸과 마음이 상하셨습니까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 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징계를 받으셨습니까 우리에게 평화를 주시기 위해서 입니다. 죄악으로 여호와 하나님과 우리 사이는 원수가 되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평화를 주시기 위해서 우리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징계를 받으셨습니다. 왜 우리 예수님이 채찍에 맞으셨습니까 죄로 멍든 우리의 영혼을 치유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우리에게 나음을 주시기 위해서 우리 예수님이 채찍에 맞으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힘들고 어렵고 삶에 지치실 때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면서 주님의 십자가 밑으로 나오시기 바랍니다. 우리 예수님이 나를 대신하여 찔리셨고, 우리 예수님이 나를 대신하여 상하셨기 때문에 그 찔림과 상함 안에서 우리의 허물과 죄악이 다 용서함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징계를 받으시고, 나를 대신하여 채찍에 맞으셨기 때문에 그 징계와 채찍에 맞으심 안에서 우리가 평화를 누리게 되고, 우리의 몸과 마음이 다 나음을 입게 되는 것입니다. 6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며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
양이 목자를 떠났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릇 행할 수밖에 없습니다. 광야를 헤매다가 사나운 짐승에 찢겨서 죽고, 낭떠러지에 떨어져서 죽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영적으로 보건대, 선한 목자되신 여호와 하나님을 멀리 떠나서 죄에 빠져 죽음의 광야를 방황했습니다.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지 아니하시고,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고, 우리의 모든 죄악을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 그 분에게 담당시키셨습니다. 우리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우리의 모든 죄를 다 담당하시고, 속죄제물이 되셔서 우리의 죄 값을 다 지불해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죄에서 자유케 하셨습니다.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미국의 백인들이 서부를 개척할 당시였습니다. 어느 마을에 있는 인디언들을 쫓아내야 되겠는데 쫓아낼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그 때 인디언들은 넓은 평원에 대규모의 옥수수밭을 만들어 놓고, 그 한복판에 장막을 치고 살았습니다. 백인들은 그들을 쫓아내기 위해서 양 사방에 큰불을 질렀습니다. 불길이 점점 타들어 오기 시작합니다. 이제 한 두 시간만 지나면 그 불길이 마을까지 번지게 되었습니다. 너무나도 불길이 거세기 때문에 어느 방향으로든지 뚫고 나갈 수가 없습니다. 인디언들은 모두가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습니다. 그 때 노련하고 경험이 많은 노인 한 사람이 마을 사람들을 향해서 외쳤습니다.
"마을에서 100발자국 떨어진 곳에 불을 질러라! 운동장 크기만 하게 불을 질러라!"
사람들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불 때문에 죽을 지경인데 또 불을 지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워낙 노련하고 경험이 많은 노인이 하는 말이기 때문에 마을 사람들은 순종해서 마을에서 100발자국 떨어진 곳에 불을 질렀습니다. 드디어 불탄 자리가 운동장 크기만 하게 되었습니다. 노인은 또 마을 사람들을 향해서 외쳤습니다.
"이제는 모두가 그 불탄 자리 위에 올라서라!"
왜 그랬겠습니까 노인은 경험적으로 한 번 불에 탄 자리는 두 번 다시 불에 타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을사람 모두가 불탄 자리 위에 올라서서 죽지 않고 살아남았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의 모든 죄를 다 담당하시고 속죄제물이 되셨습니다. 우리의 모든 죄 값을 다 지불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죄 값을 우리 스스로 지불할 필요가 없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으면 두 번 다시 결코 정죄함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이 우리의 죄 값을 다 지불해 주셨고, 우리를 죄에서 자유케 하시고 영원한 생명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언제나 그리스도 예수 안에 거하는 우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뜨거운 보혈로 우리의 머리 정수리에서 발꿈치까지 흠뻑 적셔주실 것입니다. 이러한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셋째로, 7-9절에서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하셨지만 못난 우리를 위하여 그 입을 열지 아니하시고 끝까지 침묵하시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7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
예수님은 빌라도의 법정에서 말로 다 할 수 없는 곤욕을 당하셨습니다. 그 누가 보더라도 그 법정은 불의한 법정이었습니다. 억울한 재판을 당하시는 예수님은 얼마나 괴로우셨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그 입을 열지 아니하셨습니다. 한 마디도 대답지 아니하시고 끝까지 침묵을 지키셨습니다.
그 뿐만 아니고 예수님은 헤롯의 궁궐에서도 침묵하셨습니다. 비열한 헤롯은 예수님을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면서 온갖 희롱을 아끼지 아니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예수님은 끝까지 침묵을 지키셨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 언덕으로 끌려가셨습니다. 로마 군병의 채찍 속에서도 예수님은 입을 열지 아니하셨습니다. 끝까지 침묵하셨습니다. 왜 우리 예수님이 침묵하셨습니까 8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가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 갔으니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산 자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을 인함이라 하였으리요. "
마땅히 형벌 받을 우리의 허물로 인해서 우리 예수님이 산 자의 땅에서 끊어져야 하시기 때문에, 예수님은 인내하시면서 묵묵히 그 모든 고난을 받아들이신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완수하시기 위해서 예수님은 고통 속에서도 입을 열지 아니하시고 침묵하신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에게 하실 말씀이 없으셨습니까 아닙니다. 누가 보더라도 불의한 재판이었습니다. 얼마든지 하실 말씀이 많이 있으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에게 지식과 논리가 부족해서 예수님이 입을 다무셨습니까 아닙니다. 우리 예수님은 이미 열두 살 때 예루살렘 성전에서 랍비들과 함께 성경을 가지고 토론하실 만큼 지혜로우신 분이셨습니다. 얼마든지 말씀하실 수 있는 분이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침묵하셨습니다.
예수님에게 힘과 권세가 없으셔서 침묵하셨습니까 아닙니다. 우리 예수님은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당장이라도 하늘로부터 열두 영이 더 되는 천사들을 불러오실 수 있는 능력이 있는 분이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침묵하셨습니다. 왜 그러셨습니까 자신이 마땅히 형벌을 받을 우리의 허물로 인해서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셔야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끝까지 침묵하신 것입니다. 마지막 9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는 강포를 행치 아니하였고 그 입에 궤사가 없었으나 그 무덤이 악인과 함께 되었으며 그 묘실이 부자와 함께 되었도다. "
우리 예수님에게 무슨 죄가 있으셨습니까 예수님은 강포를 행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 입에 궤사가 있으신 적이 없습니다. 말과 행동에 전혀 잘못이 없는 분이십니다. 죄와는 상관이 없으신 분이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악인처럼 취급을 당하셨습니다. 강도들과 함께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그들은 예수님의 시신을 아마도 강도들과 함께 묻어버리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은 그들의 악한 계획을 막으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어떻게 하셨습니까
"그 묘실이 부자와 함께 되었도다. "
여호와 하나님은 아리마대 부자 요셉의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아리마대 부자 요셉은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님의 시신을 달라고 청했습니다. 요셉은 그 시신을 자기를 위해서 바위 속에 파놓은 새 무덤에 고이 모셨습니다. 이와 같이 이사야 선지자가 7-800년 전에 예언했던 그 말이 한 마디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고 정확하게 예수님에게 그대로 성취된 것을 우리가 볼 수 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성령의 감동하심에 따라서 이미 7-800년 전에도 예수님의 십자가의 모습을 너무나도 생생하게 바라보았습니다. 앞으로 되어질 일을 그렇게 바라보았다면 우리는 이미 되어진 예수님의 십자가를 어떻게 바라보아야겠습니까 예수님의 십자가를 그냥 멀치감치서 바라보지 않고, 바로 우리 눈앞에 있는 것처럼 더욱더 선명하게 바라볼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침묵하셨습니다. 하실 말씀이 많이 있으셨고 얼마든지 말씀하실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못난 우리를 위해서 그 입을 열지 아니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예수님의 침묵하신 그 모습을 본받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마땅히 침묵해야 할 그 자리에서도 침묵하지 못할 때가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조금 힘들다고 해서 입을 열어서 불평하고, 조금 속상하다고 해서 입을 열어서 마구잡이 떠들면서 원망할 때가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예수님이 그 고난 속에서도 입을 열지 아니하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서 침묵하셨던 모습을 본받는 우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상대성 원리로 잘 알려진 앨버트 아이슈타인 박사에게 학생들이 찾아와서 이렇게 물었습니다.
"교수님, 교수님처럼 위대한 과학자가 될 수 있는 비결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 때 아이슈타인 박사가 이렇게 일렀습니다.
"입은 적게 움직이고 그 대신 머리를 많이 움직이도록 하게. "
입은 적게 움직이고 머리를 많이 움직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위대한 과학자가 될 수 있는 비결이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의 충성된 일꾼이 될 수 있는 비결이 무엇이겠습니까 입을 적게 움직이세요. 그 대신 몸을 많이 움직이시기 바랍니다. 손과 발을 많이 움직이시기 바랍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다섯 달란트를 받았던 사람처럼, 두 달란트를 받았던 사람처럼 착한 종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충성스러운 일꾼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손과 발은 움직이려고 들지 않고, 말로 떠들고 입만 많이 움직이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한 달란트를 받은 사람처럼 악한 종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게으른 종이 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나를 위하여 버림을 받으셨습니다. 철저하게 버림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온갖 고초를 다 겪으시고 보혈을 흘려주시고 살이 찢기시며 죽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나를 살리시기 위해서 그 입을 열지 아니하셨습니다. 철저하게 침묵하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다음 주일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찢기신 살과 흘리신 보혈을 기념하면서 성찬식에 임하게 될 것입니다. 이번 한 주간 예수님의 십자가를 묵상하면서 묵묵히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경건에 힘쓸 수 있는 우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특별히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 입술에 파수꾼을 세워 주시기 바랍니다.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말하지 말고 침묵하면서 예수님의 십자가만을 바라보면서 나와 주님과의 관계를 바르게 정립할 수 있는 우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꼭 말을 해야 된다면 은혜로운 말, 덕을 세우는 말, 남에게 감화를 줄 수 있는 말, 경건한 말, 믿음이 있는 말을 할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다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을 기록한 이사야 선지자는 주전 8세기 때의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보다도 700-800년 정도 앞선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사야 선지자는 성령의 감화하심에 따라서 믿음의 눈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너무나도 분명하고 선명하게 바라보고 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700년이나 앞서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그렇듯 분명하게 바라보았다면, 하물며 우리들은 어떠해야 하겠습니까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멀리서만 바라보려고 하지 말고 바로 우리 눈앞에 두고서 바라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오늘 읽은 본문을 통해서 고난 당하시는 메시야의 모습을 세 가지로 설명해 주었습니다.
첫째로, 1-3절의 말씀입니다. 우리 예수님은 철저하게 버림을 받으셨습니다. 나를 위하여 처절할 정도로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으시고, 십자가 위에서는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로부터도 버림을 받으셨습니다.
둘째로, 4-6절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못난 나를 살리시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시고 온갖 고초를 다 겪으시고 죽으신 모습을 우리에게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아무런 죄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대속의 죽음을 죽으신 것입니다.
셋째로, 7-9절의 말씀입니다. 침묵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난 속에서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셨습니다. 끝까지 침묵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위하여 그 모든 고난을 끝까지 인내하신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한 절 한 절 말씀을 읽으면서 묵상하는 가운데 성령께서 감화를 주셔서, 십자가에 달리셔서 고난 당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우리 눈앞에 더 가까이, 더 선명하게 바라보이게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로, 1-3절은 나를 대신해서 버림받으신 예수님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1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뇨. "
여호와 하나님은 자기 백성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그 거룩하신 팔을 나타내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불신앙 때문에 메시야를 영접하지 못했습니다. 그 사실을 사도 요한은 요1:10-11절에서 잘 설명해 주었습니다.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 백성들에게서조차도 버림을 당하셨습니다. 그 당시에 종교 지도자들이었던 대제사장, 장로들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을 배척했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여호와 하나님을 잘 믿는다는 종교 지도자들로부터도 버림을 당하신 것입니다. 심지어 예수님은 고향 사람들로부터도 배척을 받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탄식 가운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선지자가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는 자가 없도다. "
심지어 그 당시 사람들은 예수님을 손가락질하면서 미쳤다고 까지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친척들이 예수님을 붙들러 나오기까지 했습니다.
왜 예수님이 자기 백성들에게조차도 배척을 당하셨습니까 이사야 선지자는 그 이유를 2절에서 이렇게 밝히고 있습니다.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
우리 예수님의 외모가 너무 초라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연한 순 같이 나약해 보이셨습니다. 마른 땅에서 겨우 나온 줄기처럼 아무런 힘이 없어 보이셨습니다. 예수님에게는 고운 모양도 없었고, 위풍당당한 풍채도 없으셨습니다. 사람들이 우러러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인간적인 매력이 전혀 없으셨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님을 가리켜서 "저가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 마리아의 아들이 아니냐 무슨 나사렛에서 선한 것이 나겠느냐"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초라한 모습 때문에 예수님을 그저 별 볼일 없는 사람으로 취급했습니다. 어디 그것뿐입니까 3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
예수님은 멸시를 받으셨습니다. 사람들에게 싫어 버림받으셨습니다. 빌라도의 법정에서 빌라도가 사람들에게 물었습니다.
"내가 너희들에게 살인강도 바라바를 놓아주랴 그렇지 않으면 예수를 놓아주랴"
사람들은 일제히 소리를 질렀습니다.
"우리에게 바라바를 놓아주소서!"
우리 예수님은 심지어 살인강도보다도 못한 취급을 받으셨습니다. 멸시를 받으셨습니다. 사람들에게 싫어 버린바 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간고를 많이 겪으셨습니다. 온갖 질고를 다 당하셨습니다. 침뱉음을 당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은 손바닥으로 예수님의 뺨을 때리면서 희롱했습니다. 갈대로 예수님을 치면서 희롱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결국 예수님은 사람들의 외면과 멸시 속에 죄인 취급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심지어 사람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밑에서까지도 앞을 다투어서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희롱했습니다.
"네가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이든, 그리스도이든 십자가에서 내려와서 네 자신이나 한 번 구원해 보아라!"
예수님은 이처럼 사람들에게서 멸시를 당하시고 철저하게 버림을 받으셨습니다. 어디 그것뿐입니까 우리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고통 가운데서 절규하셨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나의 여호와 하나님 나의 여호와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예수님은 사람들에게서만 버림을 받으신 것이 아니고, 십자가 위에서는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로부터도 버림을 받으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인류 역사상 그 누가 우리 예수님만큼 철저하게 버림을 받았겠습니까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다 보면 때로는 우리도 남들에게서 멸시를 당하고, 배신을 당하고, 버림을 받을 때가 없지 않아 있을 것입니다. 배운 것이 없다고 무시를 당할 때도 있고, 가진 것 없다고 멸시를 당할 때도 있고, 못생겼다고 멸시를 당할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너무 괴로워하지 마세요. 그럴수록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 분이 우리 앞서서 버림받으셨지 않습니까 내가 버림받은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예수님은 철저하게 버림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시면서 위로를 받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예수님이 버림을 받으신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으로 끝나버렸습니까 아닙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건축자들이 버린 돌을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게 하셨습니다. 우리 여호와 하나님은 예수님을 지극히 높여주셨습니다. 그리해서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하여금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 앞에 꿇게 하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모든 입으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시인케 하셨습니다. 문자 그대로 건축자들의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돌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인류 역사를 한 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사람들에게서 버림을 받은 자가 오히려 인류 사회의 큰 기여를 한 예가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만유인력으로 잘 알려진 아이삭 뉴턴은 학교에 다닐 때 늘 꼴지만 도맡아 하던 열등아였습니다. 놀림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발명왕 토마스 에디슨은 어떠했습니까 선생님에 의해서 "너 같은 멍텅구리는 내가 가르칠 수 없다!"라고 해서 학교에서 쫓겨남을 당했습니다. 그래서 그 어머니가 대신 에디슨을 가르쳤습니다. 음악가 베토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음악 선생님으로부터 "너는 음악에는 전혀 소질이 없는 아이야!"라는 핀잔을 받았던 아이였습니다. 디즈니랜드를 만들었던 월트 디즈니도 마찬가지입니다. 본시 그는 신문기자였습니다. 그러나 아이디어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해고를 당했습니다. 그랬던 그가 아이디어를 내서 디즈니랜드를 만들었습니다. 이들 모두가 다 버림을 받은 이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은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 오히려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게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때로는 배운 것이 없고, 가진 것이 없고, 못생겼다고 버림을 당한다 할지라도 그것 때문에 낙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시면서 주님 앞으로 더 가까이 나오시기 바랍니다. 나보다도 먼저 버림을 받으신 예수님, 철저하게 버림을 받으신 예수님이 나를 굳세게 붙들어 주셔서 나로 하여금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게 하실 것입니다. 그러니 너무 괴로워하지 마시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시면서 십자가의 능력으로 다시금 일어나셔서 승리하는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4-6절에서는 예수님이 나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시고, 고난 당하시고 죽으신 모습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4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여호와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
왜 그 당시 사람들이 예수님의 십자가 밑에서조차도 앞을 다투어서 예수님을 희롱했습니까 예수님이 우리의 질고를 대신 지셨다는 사실을 그들은 깨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슬픔을 대신 당하셨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생각하기를 예수님이 자신의 잘못으로 징벌을 받고, 여호와 하나님에게 매를 맞으며 그것 때문에 고난을 당한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어린 시절 주일학교 선생님들에게서 자주 듣던 이야기가 있습니다. 철수라는 아이는 본시 성격이 매우 명랑하고 쾌활한 아이였습니다. 그런데 커갈수록 성격이 내성적으로 바뀌어졌습니다. 친구들과 어울리기를 싫어했습니다. 외톨이로 놀기를 좋아했습니다. 학교에 가는 것조차도 싫어했습니다. 심지어 집에서는 책가방을 싸들고 학교에 간다고 이야기하고서는 뒷동산에 올라가서 혼자 시간을 보내다가 시간이 되면 집으로 돌아올 때도 있었습니다.
때로는 타일러 보고 때로는 달래보기도 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습니다. 참다못한 그의 어머니가 회초리를 들고서 사정없이 치면서 다그쳤습니다. 그제야 철수는 소리내어 울면서 왜 자신이 학교에 가는 것을 그토록 싫어하는지 이유를 밝혔습니다.
"학교에 가면 저를 보는 친구들마다 놀리잖아요! 어머니 얼굴이 귀신의 얼굴과 같다고요. 저도 귀신의 아들이래요! 그러니 제가 무슨 재미로 학교에 가겠어요!"
그제야 철수의 어머니는 왜 자기의 얼굴이 그토록 흉하게 일그러졌는지 비로소 철수에게 그 까닭을 설명해 주었습니다.
"얘야, 나도 과거에는 이쁜이라고 불려질 만큼 얼굴이 고운 사람이었다. 네가 갓난 아이때 잠시 너를 재워두고서 집밖으로 나갔다 왔더니 그 사이에 그만 집에서 큰불이 나고 말았다. 너무나도 불길이 거세어서 모두들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지. 그러나 차마 나는 너를 그대로 죽게 내버려 둘 수가 없어서, 그 불길 속으로 뛰어 들어갔단다. 그리고는 너를 품안에 안고 나오다가, 그만 화상을 입고서 얼굴이 이렇게 흉하게 일그러지고야 말았단다. "
그 말을 들은 철수는 어머니의 품에 와락 안겼습니다. 그리고는 흐느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머니, 잘못했습니다. 용서해 주세요. 제가 다시는 어머니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 않겠습니다. "
그는 집밖으로 뛰쳐나왔습니다. 동네 친구들을 다 불러 모았습니다. 그리고 소리쳤습니다.
"나는 이제 더 이상 우리 어머니의 흉한 얼굴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어머니는 나를 살리기 위해서 그렇게 되셨다. 나는 어머니 때문에 살았다. 이 세상에서 그 누가 무엇이라고 해도 우리 어머님이 제일 이쁜 미인이다!"
철수는 그 때부터 두 번 다시 어머니의 흉한 얼굴을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이 질고를 지신 것은 우리를 위해서 지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슬픔을 당하신 것도 우리를 대신해서 당하신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좀 더 구체적으로 왜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셔야 했는지 5절에서 그 이유를 밝히고 있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
여러분, 예수님의 십자가를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왜 우리 예수님이 찔리셨습니까 왜 예수님의 이마가 가시 면류관에 찔리셨습니까 왜 예수님의 손과 발이 굵은 못에 찔리셨습니까 왜 예수님의 허리가 날카로운 창에 찔리셨습니까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 왜 예수님의 몸과 마음이 상하셨습니까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 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징계를 받으셨습니까 우리에게 평화를 주시기 위해서 입니다. 죄악으로 여호와 하나님과 우리 사이는 원수가 되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평화를 주시기 위해서 우리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징계를 받으셨습니다. 왜 우리 예수님이 채찍에 맞으셨습니까 죄로 멍든 우리의 영혼을 치유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우리에게 나음을 주시기 위해서 우리 예수님이 채찍에 맞으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힘들고 어렵고 삶에 지치실 때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면서 주님의 십자가 밑으로 나오시기 바랍니다. 우리 예수님이 나를 대신하여 찔리셨고, 우리 예수님이 나를 대신하여 상하셨기 때문에 그 찔림과 상함 안에서 우리의 허물과 죄악이 다 용서함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징계를 받으시고, 나를 대신하여 채찍에 맞으셨기 때문에 그 징계와 채찍에 맞으심 안에서 우리가 평화를 누리게 되고, 우리의 몸과 마음이 다 나음을 입게 되는 것입니다. 6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며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
양이 목자를 떠났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릇 행할 수밖에 없습니다. 광야를 헤매다가 사나운 짐승에 찢겨서 죽고, 낭떠러지에 떨어져서 죽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영적으로 보건대, 선한 목자되신 여호와 하나님을 멀리 떠나서 죄에 빠져 죽음의 광야를 방황했습니다.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지 아니하시고,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고, 우리의 모든 죄악을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 그 분에게 담당시키셨습니다. 우리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우리의 모든 죄를 다 담당하시고, 속죄제물이 되셔서 우리의 죄 값을 다 지불해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죄에서 자유케 하셨습니다.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미국의 백인들이 서부를 개척할 당시였습니다. 어느 마을에 있는 인디언들을 쫓아내야 되겠는데 쫓아낼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그 때 인디언들은 넓은 평원에 대규모의 옥수수밭을 만들어 놓고, 그 한복판에 장막을 치고 살았습니다. 백인들은 그들을 쫓아내기 위해서 양 사방에 큰불을 질렀습니다. 불길이 점점 타들어 오기 시작합니다. 이제 한 두 시간만 지나면 그 불길이 마을까지 번지게 되었습니다. 너무나도 불길이 거세기 때문에 어느 방향으로든지 뚫고 나갈 수가 없습니다. 인디언들은 모두가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습니다. 그 때 노련하고 경험이 많은 노인 한 사람이 마을 사람들을 향해서 외쳤습니다.
"마을에서 100발자국 떨어진 곳에 불을 질러라! 운동장 크기만 하게 불을 질러라!"
사람들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불 때문에 죽을 지경인데 또 불을 지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워낙 노련하고 경험이 많은 노인이 하는 말이기 때문에 마을 사람들은 순종해서 마을에서 100발자국 떨어진 곳에 불을 질렀습니다. 드디어 불탄 자리가 운동장 크기만 하게 되었습니다. 노인은 또 마을 사람들을 향해서 외쳤습니다.
"이제는 모두가 그 불탄 자리 위에 올라서라!"
왜 그랬겠습니까 노인은 경험적으로 한 번 불에 탄 자리는 두 번 다시 불에 타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을사람 모두가 불탄 자리 위에 올라서서 죽지 않고 살아남았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의 모든 죄를 다 담당하시고 속죄제물이 되셨습니다. 우리의 모든 죄 값을 다 지불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죄 값을 우리 스스로 지불할 필요가 없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으면 두 번 다시 결코 정죄함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이 우리의 죄 값을 다 지불해 주셨고, 우리를 죄에서 자유케 하시고 영원한 생명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언제나 그리스도 예수 안에 거하는 우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뜨거운 보혈로 우리의 머리 정수리에서 발꿈치까지 흠뻑 적셔주실 것입니다. 이러한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셋째로, 7-9절에서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하셨지만 못난 우리를 위하여 그 입을 열지 아니하시고 끝까지 침묵하시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7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
예수님은 빌라도의 법정에서 말로 다 할 수 없는 곤욕을 당하셨습니다. 그 누가 보더라도 그 법정은 불의한 법정이었습니다. 억울한 재판을 당하시는 예수님은 얼마나 괴로우셨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그 입을 열지 아니하셨습니다. 한 마디도 대답지 아니하시고 끝까지 침묵을 지키셨습니다.
그 뿐만 아니고 예수님은 헤롯의 궁궐에서도 침묵하셨습니다. 비열한 헤롯은 예수님을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면서 온갖 희롱을 아끼지 아니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예수님은 끝까지 침묵을 지키셨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 언덕으로 끌려가셨습니다. 로마 군병의 채찍 속에서도 예수님은 입을 열지 아니하셨습니다. 끝까지 침묵하셨습니다. 왜 우리 예수님이 침묵하셨습니까 8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가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 갔으니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산 자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을 인함이라 하였으리요. "
마땅히 형벌 받을 우리의 허물로 인해서 우리 예수님이 산 자의 땅에서 끊어져야 하시기 때문에, 예수님은 인내하시면서 묵묵히 그 모든 고난을 받아들이신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완수하시기 위해서 예수님은 고통 속에서도 입을 열지 아니하시고 침묵하신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에게 하실 말씀이 없으셨습니까 아닙니다. 누가 보더라도 불의한 재판이었습니다. 얼마든지 하실 말씀이 많이 있으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에게 지식과 논리가 부족해서 예수님이 입을 다무셨습니까 아닙니다. 우리 예수님은 이미 열두 살 때 예루살렘 성전에서 랍비들과 함께 성경을 가지고 토론하실 만큼 지혜로우신 분이셨습니다. 얼마든지 말씀하실 수 있는 분이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침묵하셨습니다.
예수님에게 힘과 권세가 없으셔서 침묵하셨습니까 아닙니다. 우리 예수님은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당장이라도 하늘로부터 열두 영이 더 되는 천사들을 불러오실 수 있는 능력이 있는 분이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침묵하셨습니다. 왜 그러셨습니까 자신이 마땅히 형벌을 받을 우리의 허물로 인해서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셔야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끝까지 침묵하신 것입니다. 마지막 9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는 강포를 행치 아니하였고 그 입에 궤사가 없었으나 그 무덤이 악인과 함께 되었으며 그 묘실이 부자와 함께 되었도다. "
우리 예수님에게 무슨 죄가 있으셨습니까 예수님은 강포를 행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 입에 궤사가 있으신 적이 없습니다. 말과 행동에 전혀 잘못이 없는 분이십니다. 죄와는 상관이 없으신 분이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악인처럼 취급을 당하셨습니다. 강도들과 함께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그들은 예수님의 시신을 아마도 강도들과 함께 묻어버리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은 그들의 악한 계획을 막으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어떻게 하셨습니까
"그 묘실이 부자와 함께 되었도다. "
여호와 하나님은 아리마대 부자 요셉의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아리마대 부자 요셉은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님의 시신을 달라고 청했습니다. 요셉은 그 시신을 자기를 위해서 바위 속에 파놓은 새 무덤에 고이 모셨습니다. 이와 같이 이사야 선지자가 7-800년 전에 예언했던 그 말이 한 마디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고 정확하게 예수님에게 그대로 성취된 것을 우리가 볼 수 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성령의 감동하심에 따라서 이미 7-800년 전에도 예수님의 십자가의 모습을 너무나도 생생하게 바라보았습니다. 앞으로 되어질 일을 그렇게 바라보았다면 우리는 이미 되어진 예수님의 십자가를 어떻게 바라보아야겠습니까 예수님의 십자가를 그냥 멀치감치서 바라보지 않고, 바로 우리 눈앞에 있는 것처럼 더욱더 선명하게 바라볼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침묵하셨습니다. 하실 말씀이 많이 있으셨고 얼마든지 말씀하실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못난 우리를 위해서 그 입을 열지 아니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예수님의 침묵하신 그 모습을 본받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마땅히 침묵해야 할 그 자리에서도 침묵하지 못할 때가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조금 힘들다고 해서 입을 열어서 불평하고, 조금 속상하다고 해서 입을 열어서 마구잡이 떠들면서 원망할 때가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예수님이 그 고난 속에서도 입을 열지 아니하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서 침묵하셨던 모습을 본받는 우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상대성 원리로 잘 알려진 앨버트 아이슈타인 박사에게 학생들이 찾아와서 이렇게 물었습니다.
"교수님, 교수님처럼 위대한 과학자가 될 수 있는 비결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 때 아이슈타인 박사가 이렇게 일렀습니다.
"입은 적게 움직이고 그 대신 머리를 많이 움직이도록 하게. "
입은 적게 움직이고 머리를 많이 움직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위대한 과학자가 될 수 있는 비결이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의 충성된 일꾼이 될 수 있는 비결이 무엇이겠습니까 입을 적게 움직이세요. 그 대신 몸을 많이 움직이시기 바랍니다. 손과 발을 많이 움직이시기 바랍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다섯 달란트를 받았던 사람처럼, 두 달란트를 받았던 사람처럼 착한 종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충성스러운 일꾼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손과 발은 움직이려고 들지 않고, 말로 떠들고 입만 많이 움직이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한 달란트를 받은 사람처럼 악한 종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게으른 종이 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나를 위하여 버림을 받으셨습니다. 철저하게 버림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온갖 고초를 다 겪으시고 보혈을 흘려주시고 살이 찢기시며 죽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나를 살리시기 위해서 그 입을 열지 아니하셨습니다. 철저하게 침묵하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다음 주일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찢기신 살과 흘리신 보혈을 기념하면서 성찬식에 임하게 될 것입니다. 이번 한 주간 예수님의 십자가를 묵상하면서 묵묵히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경건에 힘쓸 수 있는 우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특별히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 입술에 파수꾼을 세워 주시기 바랍니다.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말하지 말고 침묵하면서 예수님의 십자가만을 바라보면서 나와 주님과의 관계를 바르게 정립할 수 있는 우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꼭 말을 해야 된다면 은혜로운 말, 덕을 세우는 말, 남에게 감화를 줄 수 있는 말, 경건한 말, 믿음이 있는 말을 할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다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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