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려주일]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
본문
예수님이 우리의 죄, 나의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고난을 받고 죽으셨습니다. 이것을 믿습니까 이것을 믿으면 죄사함을 받고 구원 받습니다. 진실한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러나 믿지 않는다면, 믿고 싶어도 믿어 지지 않는다면, 죄사함도 구원도 받지 못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나를 위해 십자가에 고난 받으시고 죽으셨음을 믿습니까 이 질문은 간단하지만 참으로 심각한 질문입니다. 한번 대답해 보십시다.
신앙생활을 오래 했기 때문에 그런 유치한 질문은 대답할 필요가 없다고 해서 안 됩니다. 초신자라서 차차 알아보겠다고 해도 안 됩니다. 교회만 다니면 되지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이 나와 무슨 연관이 되는지 깊이 생각하고 싶지 않다고 해서도 안 됩니다. 많이 들은 이야기이기 때문에 다 알고 있다고 피해서도 안 됩니다. 예수님이 나의 죄를 위해 죽으셨고, 예수님을 믿음으로 모든 죄를 사함 받고 여호와 하나님이 자녀가 되고 영생을 받았다고 진실하게 고백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십자가에서 죽을 만한 죄가 무엇인가
십자가가 무엇입니까 로마 시대의 처형법입니다. 십자가 형벌은 역사상 가장 무섭고 잔인한 처형법입니다.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은 큰 죄인에게 해당하는 이야기입니다. 잡범이나 경범죄를 두고 십자가 형벌까지 이야기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이셨다고 고백합니다. 왜 예수님은 형벌 중에서도 가장 잔인하고 무서운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을 당했습니까 우리의 죄가 십자가에서 죽을 만한 큰 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지은 죄가 시시하고 가볍고 아무 것도 아닌 것이라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을 필요가 없습니다. 감옥에 가서 며칠 지내다 나오면 됩니다.
우리가 죄가 있다고 합시다. 그 죄가 십자가에서 죽을 만큼 큰 죄입니까 우리가 큰 죄인이라면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과 죽으심을 고맙게 여길 것입니다. 감격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십자가에서 죽이실 필요도 없고, 감격할 이유도 없습니다. 어떻습니까
세상의 실정법을 위반한 것이 큰 죄입니다. 우리는 법을 우습게 아는 경향이 있습니다. 형사법이나 민사법이나 어떤 법이라고 어기면 응분의 벌을 받아야 합니다. 비록 실정법은 아니라도 미풍양속을 해치거나 양심의 법을 어겨도 벌을 받아야 합니다. 줄 서기를 위반하고 새치기를 하는 것도 큰 죄입니다. 도덕과 양심이 발달할수록 작은 죄도 큰 죄가 됩니다.
율법을 어긴 죄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한 것이 한 둘이 아닙니다. 티끌과 같고 먼지와 같은 것이 율법을 어긴 우리의 죄입니다. 바울 같이 율법을 잘 지킨다는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도 율법을 지킬 수 없다고 탄식했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구원하랴! 그러나 율법대로 죽음에 해당하는 위법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신성모독이나 살인죄 같은 중죄를 제외하고 죽을 만큼의 죄는 흔치 않습니다.
우리가 양심을 어기거나 실정법을 어긴 것이나 율법을 어긴 것으로 과연 험한 십자가 형벌을 받을 만큼의 죄는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셔야 합니까 우리가 십자가 형벌을 받을만한 죄가 무엇입니까 여호와 하나님 앞에 죄입니다.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죽을 만한 죄가 무엇입니까 양심이나 도덕적인 죄 이상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계명과 율법을 어긴 것 이상의 근본적인 죄입니다. 마음에 여호와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여호와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 합당한 존귀와 영광을 돌리지 않는 것입니다.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지 않습니다. 해와 달과 별을 보고 절하고 심지어는 돼지 머리를 놓고 복을 빌며 절합니다. 이런 것이 죽음에 해당하는 죄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고 여호와 하나님으로 즐거워하지 않는 것이 죄입니다. 여호와 하나님 보실 때 이보다 더 큰 죄가 어디 있습니까 세상을 자기 맘대로 하고, 여호와 하나님께 도전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거부하는 인간의 죄는 죽음에 해당하는 벌을 받아야 합니다.
인간 자율주의입니다. 인간 스스로 판단하고 인간 스스로 주인노릇하고 사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었을 때 여호와 하나님과 관계를 끊고 스스로 알아서 살겠다고 선포한 것입니다. 인간 자율주의로 인해 사망이 임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창조주로 알고 주인으로 섬기기를 거부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언약대로 살면 영생을 줄 것이고, 선악과를 먹고 인간 자율주의를 선언하면 정녕 죽으리라 하셨습니다. 선악과를 먹음으로 죽게 된 것입니다.
왜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을 바라보고도 감동이 없습니까 죄에 대해 심각하게 인식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람 앞과 여호와 하나님 앞에 죄인이라는 진솔한 고백이 있기를 바랍니다.
지난 목요일에 미국에서 인기리에 상영된 화제의 영화 “패선 오브 더 크리이스트”가 국내에서 개봉되었습니다.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붙잡혀서 고난 받고 죽으시는 성경의 기록을 그대로 영화로 만든 것입니다. 매우 성경적이고 사실적입니다. 예수님의 고난을 영화 장면으로 잘 그렸습니다. 그런데 두 시간 동안 영화가 전부 예수님이 고난 받고 죽은 것을 사실적으로 전하는데 비해, 왜 저렇게 고난을 받고 죽어야 하는지 공감이 잘 안 됩니다. 물론 우리의 죄를 위해서 예수님이 고난 받고 죽으셨습니다. 과연 그 영화에서 우리의 죄로 인해 예수님이 죽으셨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 과연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고난을 객관적으로 그렸다고 진리를 전한 것은 아닙니다. 고난 받은 사실을 영화화 하는 것도 귀하지만, 왜 고난을 받아야 하는지에 대한 설득이 부족하다면 로마 시대에 행해진 평범한 십자가 처형을 본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 하나님 앞에 죄인임을 고백하십니까 “나는 죄인입니다”고 하고 십자가에 앞에 설 때 용서와 구원의 감격이 있습니다.
성령의 감화 감동이 아니면 우리의 죄를 깨닫고 고백할 수 없습니다. 성령은 진리의 영입니다. 거룩한 영입니다. 이사야 선지가가 성전에 기도하러 들어갔다가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다고 하고 여호와 하나님 앞에 엎드린 것처럼, 성령의 강력한 임재로 우리의 허물을 볼 수 있기를 원합니다. 성령이 우리 마음속에서 죄를 깨닫게 해야 우리는 십자가를 붙드는 신자가 될 수 있습니다.
2. 왜 여호와 하나님은 무조건 용서하지 못하시는가
우리에게 십자가에서 죽을 만한 죄가 있다고 합시다. 여호와 하나님이 눈감아 주면 되는 것 아닙니까 무조건 용서하면 되는 것 아닙니까 하고 반문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아들이 십자가에서 고난 받고 죽으실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문제가 간단하지 않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인간의 죄를 무조건 없는 일로 하고 덮을 수 없습니다. 여호와 하나님 편에서도 그렇고 인간의 편에서도 그렇습니다.
먼저 인간 편에서 볼 때 죄를 지었으면 죄에 대해 벌을 받는 것이 인간적인 대접입니다. 자신의 잘못에 대해 책임을 지는 것이 인간적입니다. 잘한 것에 대해 인정을 받는 것이 인간에 대한 대접입니다. 상도 없고 벌도 없다면 인간은 인격적이고 도덕적인 존재가 아닙니다. 죄를 죄가 아니라고 하고 눈 감는 것은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존엄성도 무시하는 것입니다.
과연 인간의 죄를 무조건 용서할 수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인간이 왜 지를 짓습니까 인간의 연약함으로 죄를 짓는다고 합니다. 인간이 책임질 죄입니다. 인간의 나태와 게으름과 욕심과 정욕으로 짓는 죄입니다. 선악과를 먹은 아담과 하와의 죄는 얼마든지 짓지 않을 수 있습니다. 다윗이 밧세바와 간음한 죄는 얼마든지 피할 수 있습니다. 가인이 동생 아벨을 죽인 죄를 보십시오. 죄를 짓지 않을 수 있습니다. 불법한 불로 제사를 드리다가 죽은 아론의 두 아들들을 보십시오. 조금만 주의하면 짓지 않을 죄입니다. 인간의 죄들이 여호와 하나님에게 무슨 책임을 돌릴 만한 것입니까 다 인간의 책임입니다. 인간이 의도적이고 의지적으로 저지른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 편에서도 무조건 용서하는 것이 합당치 않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사랑이 많으십니다. 어떤 죄인이라도 사랑하십니다. 조건 없이 사랑하십니다. 그러나 엄격하게 말하서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은 거룩한 사랑입니다. 구별된 사랑입니다. 아무렇게나 하는 싸구려 사랑이 아닙니다. 비인격적이고 스스로 모순 된 사랑이 아닙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의와 거룩을 범하면서까지 무조건적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거룩과 여호와 하나님의 의를 만족시키는 사랑이 참 사랑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위엄하신 분입니다. 높은 보좌에 앉으신 분입니다. 그 보좌는 마귀나 사단이 침입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아우성과 인간의 권모술수가 침범할 수 없습니다. 아무도 여호와 하나님의 권위와 영광에 도전할 수 없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높이만 아니라 거리에서도 우리와 멀리 떨어져 계십니다.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거리를 두시는 분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얼굴을 본 사람이 없습니다. 우리는 여기 있지만, 여호와 하나님은 여호와 하나님이 계셔야 할 곳에 계십니다. 또한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의 죄에 대해 진노하십니다. 지옥을 흔히 불타는 곳으로 표현합니다. 죄에 대해서 여호와 하나님은 불타는 진노를 나타내십니다. 소돔성이 유황불로 불탔습니다. 바벨탑은 무너졌습니다. 노아 시대에는 홍수로 심판을 받았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공의와 거룩하심은 무조건적인 용서를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값싼 용서, 무조건적인 용서는 여호와 하나님을 가볍게 여기는 것이고, 인간을 비인격적이고 무책임한 존재로 만드는 것입니다. 과연 여호와 하나님의 용서와 구원은 어떻게 임합니까 우리가 감격하고 감사할 수 있는 죄사함의 길은 어디에 있습니까 여호와 하나님 스스로에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제시한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이 참 죄사함의 길이고 구원의 길입니다.
3. 공의와 사랑을 만족케 하는 십자가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이 왜 필요합니까 인간의 필요에 의해 것이 아닙니다. 인간에게 감동을 주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물론 죄 없는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죽는 것을 보면 사람들은 마음에 감동을 받을 수 있습니다. 서로 용서하고 서로 화해하는데 십자가를 모범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과연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에게 감동을 주기 위해 고난 받고 죽기까지 해야 합니까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의 십자가의 희생을 싸구려로 생각해서 안 됩니다. 사람들은 종종 자신이 십자가를 지고 고난을 당한다고 합니다. 자기를 따르라고 합니다. 과연 거룩하시고 죄 없으신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에게 희생의 모범을 보이기 위해 십자가를 지고 죽을 이유가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리스도가 죄인을 불쌍히 여겨서 인간을 대신해서 속죄한 것도 아닙니다. 성부 아버지의 뜻과는 상관없이 그리스도가 고난 받고 죽을 수는 없습니다. 그리스도는 아버지의 뜻대로 십자가의 고난을 받고 죽으셨습니다. 모든 것을 아버지의 뜻에 따라 행합니다. 만약 그리스도가 행한 속죄라면 성부 아버지 대신 그리스도가 모든 영광을 받으셔야 하는데 비성경적입니다.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은 인간을 위한 것이나 그리스도를 위한 것이 아닙니다. 성부 여호와 하나님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 왜 여호와 하나님을 먼저 만족시켜야 합니다. 인간의 죄로 인해 피해를 입은 당사자는 인간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여호와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동시에 만족시킵니다. 우리를 사랑하사 독생자에게 진노하시고 십자가에서 고난 받고 죽게 하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스스로 만족하시고, 화해하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죄악의 담이 사라졌습니다. 성소에서 지성소로 나아가는 길이 열렸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화해하신다고 하시니 우리가 믿음으로 나아가면 됩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부인하는 자는 여전히 여호와 하나님과 원수 된 자입니다. 멸망의 자식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가로막을 담이 없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너희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라 하셨습니다.
바벨탑 심판을 보라. 홍수 심판을 보라. 소돔성에 임한 유황불 심판을 보라.
여호와 하나님은 비록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이라 할지라도 예루살렘 성전이 불타고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는 엄한 심판을 행하셨습니다.
십자가로 여호와 하나님과 화해합시다. 날마다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로 복된 삶을 누립시다.
4. 왜 예수님이 대신 고난 받고 죽으시는가
여호와 하나님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드리는 제사에는 제사를 집례하는 제사장과 제물이 있어야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여호와 하나님과 화해하는데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제물로 삼았습니다. 제사장은 흠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흠없는 제사장입니다. 짐승의 제물은 반복해서 드려야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거룩한 당신의 몸으로 제물을 삼았습니다. 영원한 제물입니다. 두번 다시 드릴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으로 완전한 제사를 드렸습니다.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한 것입니다. 이것을 대속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이 나의 고난과 죽음을 대신한 것을 믿어야 합니다. 나와 예수님이 어떻게 연관됩니까 어떻게 내 것이 예수님의 것이 되고, 예수님 이것이 내 것이 됩니까 나와 예수님이 어떻게 하나입니까 대신하는 원리로 이해해야 합니다.
4절을 봅시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는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여호와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
여기서 서로 비교되는 단어를 발견합니다. 그와 우리입니다. 우리는 죄인이고 그는 오실 메시야입니다. 메시야가 죄인을 대신해서 고난을 받고 죽습니다. 이와 같이 남을 대신하는 고난과 죽음을 대속이라고 합니다.
성경에서 대속의 원리를 가장 근본적인 원리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음으로 죄를 지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들을 에덴에서 쫓아내십니다. 양의 가죽으로 옷을 입혀서 내보냈습니다. 장차 메시야가 대속의 피를 흘림으로 죄 사함을 받고 구원받을 것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스스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메시야가 대속의 고난과 죽음으로 인간을 구원한다는 것이 여호와 하나님의 진리입니다.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깰 것이라고 했습니다. 메시야가 뱀의 머리를 깨고 인간을 구원합니다. 인간 스스로 구원받지 못합니다. 여자의 후손으로 오신 메시야가 바로 동정녀 마리에게서 탄생하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구약의 제사 제도는 대속의 원리를 잘 표현합니다. 죄인은 제사를 드릴 때 짐승의 제물을 가지고 왔습니다. 제사장은 죄인의 모든 죄를 짐승에게 전가시킵니다. 짐승은 죄인을 대신해서 죽습니다. 죄인의 짐승의 제물 때문에 죄사함을 받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구약의 모든 제물이 예표한 실상입니다. 수많은 짐승이 피를 흘리며 죽은 것은 장차 오실 메시야의 고난과 죽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요한은 예수님을 보고,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여호와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세상 죄를 대신 지고 가는 어린양으로 죽었습니다. 예수님은 유월절에 죽었습니다.
유월절을 아십니까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해방된 날입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르라고 했습니다. 그 날밤 죽음의 천사가 모든 애굽 사람의 장자를 죽이는 가운데 이스라엘 사람이 바른 양의 피를 보고 뛰어넘어 갔습니다. 어린양의 피 곧, 대속이 피를 믿는 자에게는 구원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종교세를 냅니다. 애굽의 모든 장자가 죽을 때에 이스라엘의 장자는 죽지 않은 것을 기념한 것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죄가 하나도 없는 분입니다. 고난 받을 필요도 없고, 죽을 이유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 죄인을 위해 죽으셨습니다. 믿는 자는 대속의 죽음의 효력을 볼 것입니다.
요셉은 형들이 미움으로 노예로 팔려갔습니다. 미디안 상인들은 요셉을 애굽 사람들에게 팔았습니다. 누군가 요셉의 몸값을 지불하는 사람이 주인이 되는 것입니다. 요셉 스스로 돈을 지불하면 스스로 풀려납니다. 그럴 능력이 없습니다. 다른 사람이 요셉의 몸값을 지불하면 그는 자유할 수 있습니다. 누군가 대신해서 값을 지불하면 됩니다. 우리도 죄 값을 지불하지 못해서 노예로 팔린 자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스스로 해결할 수 없습니다. 누군가 죄를 대신해야 합니다. 물에 빠진 사람이 스스로 헤엄을 쳐서 밖으로 나오면 됩니다. 그러나 스스로 나오지 못하는 사람은 남의 구조를 받아야 합니다. 그 구조를 받아들이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은 우리의 죄 값을 대신한 것입니다. 성경이 증거하는 대로 예수님의 대속의 고난과 죽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신앙생활을 오래 했기 때문에 그런 유치한 질문은 대답할 필요가 없다고 해서 안 됩니다. 초신자라서 차차 알아보겠다고 해도 안 됩니다. 교회만 다니면 되지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이 나와 무슨 연관이 되는지 깊이 생각하고 싶지 않다고 해서도 안 됩니다. 많이 들은 이야기이기 때문에 다 알고 있다고 피해서도 안 됩니다. 예수님이 나의 죄를 위해 죽으셨고, 예수님을 믿음으로 모든 죄를 사함 받고 여호와 하나님이 자녀가 되고 영생을 받았다고 진실하게 고백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십자가에서 죽을 만한 죄가 무엇인가
십자가가 무엇입니까 로마 시대의 처형법입니다. 십자가 형벌은 역사상 가장 무섭고 잔인한 처형법입니다.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은 큰 죄인에게 해당하는 이야기입니다. 잡범이나 경범죄를 두고 십자가 형벌까지 이야기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이셨다고 고백합니다. 왜 예수님은 형벌 중에서도 가장 잔인하고 무서운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을 당했습니까 우리의 죄가 십자가에서 죽을 만한 큰 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지은 죄가 시시하고 가볍고 아무 것도 아닌 것이라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을 필요가 없습니다. 감옥에 가서 며칠 지내다 나오면 됩니다.
우리가 죄가 있다고 합시다. 그 죄가 십자가에서 죽을 만큼 큰 죄입니까 우리가 큰 죄인이라면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과 죽으심을 고맙게 여길 것입니다. 감격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십자가에서 죽이실 필요도 없고, 감격할 이유도 없습니다. 어떻습니까
세상의 실정법을 위반한 것이 큰 죄입니다. 우리는 법을 우습게 아는 경향이 있습니다. 형사법이나 민사법이나 어떤 법이라고 어기면 응분의 벌을 받아야 합니다. 비록 실정법은 아니라도 미풍양속을 해치거나 양심의 법을 어겨도 벌을 받아야 합니다. 줄 서기를 위반하고 새치기를 하는 것도 큰 죄입니다. 도덕과 양심이 발달할수록 작은 죄도 큰 죄가 됩니다.
율법을 어긴 죄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한 것이 한 둘이 아닙니다. 티끌과 같고 먼지와 같은 것이 율법을 어긴 우리의 죄입니다. 바울 같이 율법을 잘 지킨다는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도 율법을 지킬 수 없다고 탄식했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구원하랴! 그러나 율법대로 죽음에 해당하는 위법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신성모독이나 살인죄 같은 중죄를 제외하고 죽을 만큼의 죄는 흔치 않습니다.
우리가 양심을 어기거나 실정법을 어긴 것이나 율법을 어긴 것으로 과연 험한 십자가 형벌을 받을 만큼의 죄는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셔야 합니까 우리가 십자가 형벌을 받을만한 죄가 무엇입니까 여호와 하나님 앞에 죄입니다.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죽을 만한 죄가 무엇입니까 양심이나 도덕적인 죄 이상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계명과 율법을 어긴 것 이상의 근본적인 죄입니다. 마음에 여호와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여호와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 합당한 존귀와 영광을 돌리지 않는 것입니다.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지 않습니다. 해와 달과 별을 보고 절하고 심지어는 돼지 머리를 놓고 복을 빌며 절합니다. 이런 것이 죽음에 해당하는 죄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고 여호와 하나님으로 즐거워하지 않는 것이 죄입니다. 여호와 하나님 보실 때 이보다 더 큰 죄가 어디 있습니까 세상을 자기 맘대로 하고, 여호와 하나님께 도전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거부하는 인간의 죄는 죽음에 해당하는 벌을 받아야 합니다.
인간 자율주의입니다. 인간 스스로 판단하고 인간 스스로 주인노릇하고 사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었을 때 여호와 하나님과 관계를 끊고 스스로 알아서 살겠다고 선포한 것입니다. 인간 자율주의로 인해 사망이 임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창조주로 알고 주인으로 섬기기를 거부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언약대로 살면 영생을 줄 것이고, 선악과를 먹고 인간 자율주의를 선언하면 정녕 죽으리라 하셨습니다. 선악과를 먹음으로 죽게 된 것입니다.
왜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을 바라보고도 감동이 없습니까 죄에 대해 심각하게 인식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람 앞과 여호와 하나님 앞에 죄인이라는 진솔한 고백이 있기를 바랍니다.
지난 목요일에 미국에서 인기리에 상영된 화제의 영화 “패선 오브 더 크리이스트”가 국내에서 개봉되었습니다.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붙잡혀서 고난 받고 죽으시는 성경의 기록을 그대로 영화로 만든 것입니다. 매우 성경적이고 사실적입니다. 예수님의 고난을 영화 장면으로 잘 그렸습니다. 그런데 두 시간 동안 영화가 전부 예수님이 고난 받고 죽은 것을 사실적으로 전하는데 비해, 왜 저렇게 고난을 받고 죽어야 하는지 공감이 잘 안 됩니다. 물론 우리의 죄를 위해서 예수님이 고난 받고 죽으셨습니다. 과연 그 영화에서 우리의 죄로 인해 예수님이 죽으셨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 과연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고난을 객관적으로 그렸다고 진리를 전한 것은 아닙니다. 고난 받은 사실을 영화화 하는 것도 귀하지만, 왜 고난을 받아야 하는지에 대한 설득이 부족하다면 로마 시대에 행해진 평범한 십자가 처형을 본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 하나님 앞에 죄인임을 고백하십니까 “나는 죄인입니다”고 하고 십자가에 앞에 설 때 용서와 구원의 감격이 있습니다.
성령의 감화 감동이 아니면 우리의 죄를 깨닫고 고백할 수 없습니다. 성령은 진리의 영입니다. 거룩한 영입니다. 이사야 선지가가 성전에 기도하러 들어갔다가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다고 하고 여호와 하나님 앞에 엎드린 것처럼, 성령의 강력한 임재로 우리의 허물을 볼 수 있기를 원합니다. 성령이 우리 마음속에서 죄를 깨닫게 해야 우리는 십자가를 붙드는 신자가 될 수 있습니다.
2. 왜 여호와 하나님은 무조건 용서하지 못하시는가
우리에게 십자가에서 죽을 만한 죄가 있다고 합시다. 여호와 하나님이 눈감아 주면 되는 것 아닙니까 무조건 용서하면 되는 것 아닙니까 하고 반문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아들이 십자가에서 고난 받고 죽으실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문제가 간단하지 않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인간의 죄를 무조건 없는 일로 하고 덮을 수 없습니다. 여호와 하나님 편에서도 그렇고 인간의 편에서도 그렇습니다.
먼저 인간 편에서 볼 때 죄를 지었으면 죄에 대해 벌을 받는 것이 인간적인 대접입니다. 자신의 잘못에 대해 책임을 지는 것이 인간적입니다. 잘한 것에 대해 인정을 받는 것이 인간에 대한 대접입니다. 상도 없고 벌도 없다면 인간은 인격적이고 도덕적인 존재가 아닙니다. 죄를 죄가 아니라고 하고 눈 감는 것은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존엄성도 무시하는 것입니다.
과연 인간의 죄를 무조건 용서할 수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인간이 왜 지를 짓습니까 인간의 연약함으로 죄를 짓는다고 합니다. 인간이 책임질 죄입니다. 인간의 나태와 게으름과 욕심과 정욕으로 짓는 죄입니다. 선악과를 먹은 아담과 하와의 죄는 얼마든지 짓지 않을 수 있습니다. 다윗이 밧세바와 간음한 죄는 얼마든지 피할 수 있습니다. 가인이 동생 아벨을 죽인 죄를 보십시오. 죄를 짓지 않을 수 있습니다. 불법한 불로 제사를 드리다가 죽은 아론의 두 아들들을 보십시오. 조금만 주의하면 짓지 않을 죄입니다. 인간의 죄들이 여호와 하나님에게 무슨 책임을 돌릴 만한 것입니까 다 인간의 책임입니다. 인간이 의도적이고 의지적으로 저지른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 편에서도 무조건 용서하는 것이 합당치 않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사랑이 많으십니다. 어떤 죄인이라도 사랑하십니다. 조건 없이 사랑하십니다. 그러나 엄격하게 말하서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은 거룩한 사랑입니다. 구별된 사랑입니다. 아무렇게나 하는 싸구려 사랑이 아닙니다. 비인격적이고 스스로 모순 된 사랑이 아닙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의와 거룩을 범하면서까지 무조건적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거룩과 여호와 하나님의 의를 만족시키는 사랑이 참 사랑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위엄하신 분입니다. 높은 보좌에 앉으신 분입니다. 그 보좌는 마귀나 사단이 침입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아우성과 인간의 권모술수가 침범할 수 없습니다. 아무도 여호와 하나님의 권위와 영광에 도전할 수 없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높이만 아니라 거리에서도 우리와 멀리 떨어져 계십니다.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거리를 두시는 분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얼굴을 본 사람이 없습니다. 우리는 여기 있지만, 여호와 하나님은 여호와 하나님이 계셔야 할 곳에 계십니다. 또한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의 죄에 대해 진노하십니다. 지옥을 흔히 불타는 곳으로 표현합니다. 죄에 대해서 여호와 하나님은 불타는 진노를 나타내십니다. 소돔성이 유황불로 불탔습니다. 바벨탑은 무너졌습니다. 노아 시대에는 홍수로 심판을 받았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공의와 거룩하심은 무조건적인 용서를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값싼 용서, 무조건적인 용서는 여호와 하나님을 가볍게 여기는 것이고, 인간을 비인격적이고 무책임한 존재로 만드는 것입니다. 과연 여호와 하나님의 용서와 구원은 어떻게 임합니까 우리가 감격하고 감사할 수 있는 죄사함의 길은 어디에 있습니까 여호와 하나님 스스로에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제시한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이 참 죄사함의 길이고 구원의 길입니다.
3. 공의와 사랑을 만족케 하는 십자가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이 왜 필요합니까 인간의 필요에 의해 것이 아닙니다. 인간에게 감동을 주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물론 죄 없는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죽는 것을 보면 사람들은 마음에 감동을 받을 수 있습니다. 서로 용서하고 서로 화해하는데 십자가를 모범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과연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에게 감동을 주기 위해 고난 받고 죽기까지 해야 합니까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의 십자가의 희생을 싸구려로 생각해서 안 됩니다. 사람들은 종종 자신이 십자가를 지고 고난을 당한다고 합니다. 자기를 따르라고 합니다. 과연 거룩하시고 죄 없으신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에게 희생의 모범을 보이기 위해 십자가를 지고 죽을 이유가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리스도가 죄인을 불쌍히 여겨서 인간을 대신해서 속죄한 것도 아닙니다. 성부 아버지의 뜻과는 상관없이 그리스도가 고난 받고 죽을 수는 없습니다. 그리스도는 아버지의 뜻대로 십자가의 고난을 받고 죽으셨습니다. 모든 것을 아버지의 뜻에 따라 행합니다. 만약 그리스도가 행한 속죄라면 성부 아버지 대신 그리스도가 모든 영광을 받으셔야 하는데 비성경적입니다.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은 인간을 위한 것이나 그리스도를 위한 것이 아닙니다. 성부 여호와 하나님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 왜 여호와 하나님을 먼저 만족시켜야 합니다. 인간의 죄로 인해 피해를 입은 당사자는 인간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여호와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동시에 만족시킵니다. 우리를 사랑하사 독생자에게 진노하시고 십자가에서 고난 받고 죽게 하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스스로 만족하시고, 화해하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죄악의 담이 사라졌습니다. 성소에서 지성소로 나아가는 길이 열렸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화해하신다고 하시니 우리가 믿음으로 나아가면 됩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부인하는 자는 여전히 여호와 하나님과 원수 된 자입니다. 멸망의 자식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가로막을 담이 없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너희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라 하셨습니다.
바벨탑 심판을 보라. 홍수 심판을 보라. 소돔성에 임한 유황불 심판을 보라.
여호와 하나님은 비록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이라 할지라도 예루살렘 성전이 불타고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는 엄한 심판을 행하셨습니다.
십자가로 여호와 하나님과 화해합시다. 날마다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로 복된 삶을 누립시다.
4. 왜 예수님이 대신 고난 받고 죽으시는가
여호와 하나님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드리는 제사에는 제사를 집례하는 제사장과 제물이 있어야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여호와 하나님과 화해하는데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제물로 삼았습니다. 제사장은 흠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흠없는 제사장입니다. 짐승의 제물은 반복해서 드려야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거룩한 당신의 몸으로 제물을 삼았습니다. 영원한 제물입니다. 두번 다시 드릴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으로 완전한 제사를 드렸습니다.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한 것입니다. 이것을 대속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이 나의 고난과 죽음을 대신한 것을 믿어야 합니다. 나와 예수님이 어떻게 연관됩니까 어떻게 내 것이 예수님의 것이 되고, 예수님 이것이 내 것이 됩니까 나와 예수님이 어떻게 하나입니까 대신하는 원리로 이해해야 합니다.
4절을 봅시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는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여호와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
여기서 서로 비교되는 단어를 발견합니다. 그와 우리입니다. 우리는 죄인이고 그는 오실 메시야입니다. 메시야가 죄인을 대신해서 고난을 받고 죽습니다. 이와 같이 남을 대신하는 고난과 죽음을 대속이라고 합니다.
성경에서 대속의 원리를 가장 근본적인 원리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음으로 죄를 지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들을 에덴에서 쫓아내십니다. 양의 가죽으로 옷을 입혀서 내보냈습니다. 장차 메시야가 대속의 피를 흘림으로 죄 사함을 받고 구원받을 것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스스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메시야가 대속의 고난과 죽음으로 인간을 구원한다는 것이 여호와 하나님의 진리입니다.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깰 것이라고 했습니다. 메시야가 뱀의 머리를 깨고 인간을 구원합니다. 인간 스스로 구원받지 못합니다. 여자의 후손으로 오신 메시야가 바로 동정녀 마리에게서 탄생하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구약의 제사 제도는 대속의 원리를 잘 표현합니다. 죄인은 제사를 드릴 때 짐승의 제물을 가지고 왔습니다. 제사장은 죄인의 모든 죄를 짐승에게 전가시킵니다. 짐승은 죄인을 대신해서 죽습니다. 죄인의 짐승의 제물 때문에 죄사함을 받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구약의 모든 제물이 예표한 실상입니다. 수많은 짐승이 피를 흘리며 죽은 것은 장차 오실 메시야의 고난과 죽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요한은 예수님을 보고,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여호와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세상 죄를 대신 지고 가는 어린양으로 죽었습니다. 예수님은 유월절에 죽었습니다.
유월절을 아십니까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해방된 날입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르라고 했습니다. 그 날밤 죽음의 천사가 모든 애굽 사람의 장자를 죽이는 가운데 이스라엘 사람이 바른 양의 피를 보고 뛰어넘어 갔습니다. 어린양의 피 곧, 대속이 피를 믿는 자에게는 구원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종교세를 냅니다. 애굽의 모든 장자가 죽을 때에 이스라엘의 장자는 죽지 않은 것을 기념한 것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죄가 하나도 없는 분입니다. 고난 받을 필요도 없고, 죽을 이유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 죄인을 위해 죽으셨습니다. 믿는 자는 대속의 죽음의 효력을 볼 것입니다.
요셉은 형들이 미움으로 노예로 팔려갔습니다. 미디안 상인들은 요셉을 애굽 사람들에게 팔았습니다. 누군가 요셉의 몸값을 지불하는 사람이 주인이 되는 것입니다. 요셉 스스로 돈을 지불하면 스스로 풀려납니다. 그럴 능력이 없습니다. 다른 사람이 요셉의 몸값을 지불하면 그는 자유할 수 있습니다. 누군가 대신해서 값을 지불하면 됩니다. 우리도 죄 값을 지불하지 못해서 노예로 팔린 자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스스로 해결할 수 없습니다. 누군가 죄를 대신해야 합니다. 물에 빠진 사람이 스스로 헤엄을 쳐서 밖으로 나오면 됩니다. 그러나 스스로 나오지 못하는 사람은 남의 구조를 받아야 합니다. 그 구조를 받아들이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은 우리의 죄 값을 대신한 것입니다. 성경이 증거하는 대로 예수님의 대속의 고난과 죽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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