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려주일] 고난의 십자가
본문
지난 일주일 동안 십자가를 주제로 은혜, 사랑, 능력 구원에 관한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오늘은 십자가의 고통, 고난에 관해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인간이 만들어 낸 가장 흥미로운 얘기는 그리스 신화 얘기일 것 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실 때 그의 형상을 우리 안에 두셨습니다. 그러나 우습게도 그리스 사람들은 자신들이 신들을 만들어냈습니다.
신들을 만들어 내면서 인간의 형상, 즉 인간의 생각과 마음을 그들 안에 담았습니다. 그리스 신화 중에 프레메토우스(Prometheus)가 있습니다. 그리스 신화를 보면 사람들에게는 불이 없었습니다. 불은 오직 신들만이 사용할 수 있었습니다. 프레메토우스(Prometheus)는 사람들이 불이 없어서 추위에 떨고 방어할 수 없는 상태에서 짐승보다 더 열악하게 사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는 인간들이 불쌍했습니다. 견딜 수 없었던 그는 신들의 집인 올림프스(Olympus)에서 불을 훔쳐 인간들에게 주었습니다. 제우스(Zeus)가 이 사실을 발견하고 프레메토우스(Prometheus)를 코카서스(Caucasus)산 꼭대기에 쇠사슬로 묶어두었습니다. 그리고 매일 해가 뜨면 독수리가 날아들어 묶여있는 그의 간을 쪼아먹게 했습니다. 저녁에 되어 독수리가 날아간 후 한 밤중 동안 그의 간은 다시 재생되고 다음날 아침 다시 독수리가 그의 간을 쪼아 먹는 일은 연속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좋아라 하며 불을 사용하고 있을 때 그는 독수리에게 간을 쪼아 먹히는 고통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아마 옛 그리스 사람들도 우리가 누리는 모든 것에는 어떤 댓가가 따른다는 것을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꾸며낸 이야기지만 깊은 교훈을 줍니다. 세상에 공짜는 없습니다. 모든 좋은 것에는 그만큼 댓 가를 치릅니다. 우리가 누리고 있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에게 소중하고 바람직한 것이 있다면 그것을 위해 우리는 투자하고 수고하는 댓가를 치릅니다.
우리에게는 누리고 있는 특권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죄로 인해 죽었던 우리들이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은혜로 사는 것입니다. 비록 신화에 의한 것이지만 인간이 불을 사용하기 위해 매일 독수리에게 간을 쪼이는 희생이 따랐다면 죄로 죽었던 우리가 다시 살아나고 영생을 얻고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로 사는 은혜를 받기 위해서는 분명히 어떤 댓가가 필요했습니다.
이 댓가는 바로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입니다. 그 분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이 댓가로 치러졌기 때문에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누리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신 십자가의 형벌, 고난 때문입니다. 우리는 십자가 형벌에 대해 잘 알고 있습니다. 2년 전 “Passion of The Christ” 이라는 영화를 통해 십자가 형벌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것인가를 볼 수 있었습니다. 혹독한 고통 속에서 서서히 죽어가는, 인간이 만들어낸 가장 잔인한 처형 법이 십자가 입니다.
예수님은 갈라진 뼈 조각과 쇠붙이로 만든 채찍에 맞아서 등이 패이고 살갗이 떨어져 나갔습니다. 십자가를 등에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올라갔습니다. 옷을 벗기는 수치를 당했고 손목 가운데 못이 박혔습니다.
숨 시는 것조차 너무나 고통스러웠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고통스러웠던 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외면 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철저히 외면 당한 채 혼자서 모든 고통을 감당해야 했습니다.
그는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 이었지만 우리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인간의 몸을 입었기에 우리가 겪어야 하는 모든 아픔과 고통들을 온몸에 지었습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생각할 때마다 얼마나 끔찍하고 아팠을까를 먼저 생각합니다. 십자가의 은혜나 승리 그리고 구원을 생각하기 전에 먼저 고통을 생각합니다. 십자가 형벌의 잔인성 때문이 우리는 또한 눈물 짓습니다.
그리고 고통을 피하고 싶은 인간의 본성 때문에 예수님은 어쩌면 어쩔 수 없이 십자가를 진 것이 아닌가 단순하게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고통에는 그토록 혹독하고 철저하게 버림받고 심한 수치와 고통이 있었지만 그것은 이미 여호와 하나님의 계획안에 있었던 일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고난의 종에 관한 말씀 입니다. 어떻게 그리스도께서 고통을 당하실 것인가 예언한 말씀 입니다. 본문 이사야는 예수님이 죽기 700년 전에 쓰인 글입니다. 이것은 분명한 여호와 하나님의 계획아래, 주권아래 이루어진 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요한 1서 4장 9절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은 우리를 살리기 위함 이라는 분명한 목적까지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미 계획하셨음을 말씀 합니다.
출애굽기 15장 22-26절에 나타나는 ‘마라의 쓴 물’ 은 예수님의 죽음을 예언하는 구약의 또 다른 말씀 입니다. 애굽 땅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해내신 여호와 하나님은 모세를 지도자로 세우고 홍해를 건너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출 애굽 한 백성들은 이제 수르 광야를 향해 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삼일 쯤 지난 뒤 그들은 홍해를 건넜던 기적을 잊기 시작했습니다. 광야에서 물이 없자 여호와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그 때 그들이 도착한 곳이 ‘마라’, 즉 쓴 물 이라는 뜻의 죽은 연못이었습니다. 그물은 죽어있는 물 이었기 때문에 도저히 마실 수 없었습니다. ‘마라’ 는 쓰다 혹은 고통의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모세에게 한 나무를 지
목 하시고 마라의 연못에 던지게 하셨습니다. 나무가 연못에 던져지는 순간 그 물은 생수로 변했습니다. 이것은 많은 성경 학자들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를 질것이라는 것을 예표하는 말씀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죽어있는 마라의 물에 나무가 던져졌을 때 생명의 물로 변했기 때문입니다. 그때 던져진 나뭇가지는 예수님께서 지실 십자가를 예표 합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통해서 죽어있던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초대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단순히 고통과 슬픔의 장소가 아닙니다. 고통과 고난을 통해 열매가 있을 때 희생이라고 부릅니다. 바로 그 고통과 고난의 자리를 생명의 자리로 바꾸어 놓으셨기 때문에 희생의 자리가 될 수 있고 우리가 누리는 생명의 댓가를 치르는 자리가 된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바로 이 길을 가셨습니다. 복음서를 자세히 살펴보면 특별히 주님을 따랐던 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을 멀리서 확인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상한 것은 예수님을 가장 가까이서 따랐던 11명의 제자들은 뿔뿔이 흩어져 버렸습니다. 그리고 베드로 조차도 예수님을 부인하고 있을 때 가장 가까운 곳에서 예수님의 고난에 함께 동참하고 눈물 짖고 있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복음서는 그들을 “여인들” 이라고 표현 합니다. 여인들의 이름 중에 유독 ‘마리아’ 가 많이 등장합니다. 예수님 육신의 어머니,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 그리고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들이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 자리에 있었습니다. ‘마리아’ 라는 이름은 바로 ‘마라’ 라는 이름에서 파생된 것입니다. 썩어있던 마라의 연못에 나뭇가지를 던져 생명의 물로 바꾸신 여호와 하나님 그리고 예수님 주변에 마리아 라는 이름을 가진 많은 여인들이 있었던 일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아무런 소망도 가질 수 없는 쓰디 쓴 인생, 고통과 고난의 자리에 있던 그 여인들이 십자가의 증인으로 서 있습니다. 그리고 십자가 앞에서 그들은 인생의 모든 문제를 해결 받는 영원한 생명의 초대에 가장 먼저 초대받은 증인이 된 것입니다. 이 여인들은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후 부활하셨을 때도 첫 증인들이 되었습니다. ‘마리아’ 라는 이름으로 대표되는 쓰디 쓴 인생, 소망과 희망이 없던 인생을 영원한 생명의 자리로 옮겨주신 은혜에는 십자가 고통의 댓가가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 십자가로 우리를 초대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십자가의 길로 부르셨을 때 묵묵히 온전하게 순종했습니다. 오늘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도 십자가의 자리로 부르셔서 순종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우리에게도 십자가가 있습니다. 그것은 단순하게 우리가 당하는 고난이나 고통이 아닙니다. 한 생명을 위해서 당하는 고난이 있다면 그것이 우리의 십자가 입니다. 십자가는 단순한 고통의 자리가 아니라 생명을 만드는 자리입니다. 우리의 욕심과 자랑 때문에 눈물 흘리는 고통이 아니라 주님을 닮아가기 위해서, 주님처럼 섬기기 위해서,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으로 온전히 서기 위해서 당하는 손해와 고통이 있다면 바로 그곳이 십자가의 자리 입니다. 대부분 십자가의 자리는 우리에게 억울합니다. 내가 잘못하지 않고도 당하는 자리 입니다. 주님을 위해서, 한 생명을 위해서 당하는 억울한 자리이기도 합니다. 당하지 않아도 되는 수모의 자리입니다. 예수님은 더 큰 고통과 고난 가운데 우리를 불러내시기 위해서 이 자리에 섰기 때문에 우리도 순종하는 마음으로 묵묵히 설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자리에 서 있습니까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기 위해서 고통 당하는 자리, 손해 보는 자리, 오해 받는 자리에 서 있다면 주님의 마음을 좀 더 읽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온 몸으로 고난과 고통의 극치를 경험 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어떤 환경에 있다 하더라도 주님께서는 우리 마음을 알아 주십니다. 사람들이 몰라주는 자리에서 주님만은 우리의 심정과 억울함을 아시고 위로해 주십니다. 이런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십니다. 오늘도 주님의 부르심 앞에 묵묵히 우리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순종하길 바랍니다. 이런 믿음의 사람들을 통해서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붙드시고 그의 소원과 꿈을 우리 삶을 통해 이루어 가십니다. 우리들을 너무 사랑해서 우리를 살려내기 위해 보낸 십자가의 자리에 예수님은 순종 하셨던 것처럼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이 땅 가운에 이루기 위해 부르시는 그 자리에 기쁜 마음으로 순종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인간이 만들어 낸 가장 흥미로운 얘기는 그리스 신화 얘기일 것 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실 때 그의 형상을 우리 안에 두셨습니다. 그러나 우습게도 그리스 사람들은 자신들이 신들을 만들어냈습니다.
신들을 만들어 내면서 인간의 형상, 즉 인간의 생각과 마음을 그들 안에 담았습니다. 그리스 신화 중에 프레메토우스(Prometheus)가 있습니다. 그리스 신화를 보면 사람들에게는 불이 없었습니다. 불은 오직 신들만이 사용할 수 있었습니다. 프레메토우스(Prometheus)는 사람들이 불이 없어서 추위에 떨고 방어할 수 없는 상태에서 짐승보다 더 열악하게 사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는 인간들이 불쌍했습니다. 견딜 수 없었던 그는 신들의 집인 올림프스(Olympus)에서 불을 훔쳐 인간들에게 주었습니다. 제우스(Zeus)가 이 사실을 발견하고 프레메토우스(Prometheus)를 코카서스(Caucasus)산 꼭대기에 쇠사슬로 묶어두었습니다. 그리고 매일 해가 뜨면 독수리가 날아들어 묶여있는 그의 간을 쪼아먹게 했습니다. 저녁에 되어 독수리가 날아간 후 한 밤중 동안 그의 간은 다시 재생되고 다음날 아침 다시 독수리가 그의 간을 쪼아 먹는 일은 연속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좋아라 하며 불을 사용하고 있을 때 그는 독수리에게 간을 쪼아 먹히는 고통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아마 옛 그리스 사람들도 우리가 누리는 모든 것에는 어떤 댓가가 따른다는 것을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꾸며낸 이야기지만 깊은 교훈을 줍니다. 세상에 공짜는 없습니다. 모든 좋은 것에는 그만큼 댓 가를 치릅니다. 우리가 누리고 있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에게 소중하고 바람직한 것이 있다면 그것을 위해 우리는 투자하고 수고하는 댓가를 치릅니다.
우리에게는 누리고 있는 특권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죄로 인해 죽었던 우리들이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은혜로 사는 것입니다. 비록 신화에 의한 것이지만 인간이 불을 사용하기 위해 매일 독수리에게 간을 쪼이는 희생이 따랐다면 죄로 죽었던 우리가 다시 살아나고 영생을 얻고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로 사는 은혜를 받기 위해서는 분명히 어떤 댓가가 필요했습니다.
이 댓가는 바로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입니다. 그 분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이 댓가로 치러졌기 때문에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누리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신 십자가의 형벌, 고난 때문입니다. 우리는 십자가 형벌에 대해 잘 알고 있습니다. 2년 전 “Passion of The Christ” 이라는 영화를 통해 십자가 형벌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것인가를 볼 수 있었습니다. 혹독한 고통 속에서 서서히 죽어가는, 인간이 만들어낸 가장 잔인한 처형 법이 십자가 입니다.
예수님은 갈라진 뼈 조각과 쇠붙이로 만든 채찍에 맞아서 등이 패이고 살갗이 떨어져 나갔습니다. 십자가를 등에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올라갔습니다. 옷을 벗기는 수치를 당했고 손목 가운데 못이 박혔습니다.
숨 시는 것조차 너무나 고통스러웠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고통스러웠던 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외면 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철저히 외면 당한 채 혼자서 모든 고통을 감당해야 했습니다.
그는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 이었지만 우리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인간의 몸을 입었기에 우리가 겪어야 하는 모든 아픔과 고통들을 온몸에 지었습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생각할 때마다 얼마나 끔찍하고 아팠을까를 먼저 생각합니다. 십자가의 은혜나 승리 그리고 구원을 생각하기 전에 먼저 고통을 생각합니다. 십자가 형벌의 잔인성 때문이 우리는 또한 눈물 짓습니다.
그리고 고통을 피하고 싶은 인간의 본성 때문에 예수님은 어쩌면 어쩔 수 없이 십자가를 진 것이 아닌가 단순하게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고통에는 그토록 혹독하고 철저하게 버림받고 심한 수치와 고통이 있었지만 그것은 이미 여호와 하나님의 계획안에 있었던 일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고난의 종에 관한 말씀 입니다. 어떻게 그리스도께서 고통을 당하실 것인가 예언한 말씀 입니다. 본문 이사야는 예수님이 죽기 700년 전에 쓰인 글입니다. 이것은 분명한 여호와 하나님의 계획아래, 주권아래 이루어진 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요한 1서 4장 9절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은 우리를 살리기 위함 이라는 분명한 목적까지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미 계획하셨음을 말씀 합니다.
출애굽기 15장 22-26절에 나타나는 ‘마라의 쓴 물’ 은 예수님의 죽음을 예언하는 구약의 또 다른 말씀 입니다. 애굽 땅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해내신 여호와 하나님은 모세를 지도자로 세우고 홍해를 건너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출 애굽 한 백성들은 이제 수르 광야를 향해 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삼일 쯤 지난 뒤 그들은 홍해를 건넜던 기적을 잊기 시작했습니다. 광야에서 물이 없자 여호와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그 때 그들이 도착한 곳이 ‘마라’, 즉 쓴 물 이라는 뜻의 죽은 연못이었습니다. 그물은 죽어있는 물 이었기 때문에 도저히 마실 수 없었습니다. ‘마라’ 는 쓰다 혹은 고통의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모세에게 한 나무를 지
목 하시고 마라의 연못에 던지게 하셨습니다. 나무가 연못에 던져지는 순간 그 물은 생수로 변했습니다. 이것은 많은 성경 학자들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를 질것이라는 것을 예표하는 말씀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죽어있는 마라의 물에 나무가 던져졌을 때 생명의 물로 변했기 때문입니다. 그때 던져진 나뭇가지는 예수님께서 지실 십자가를 예표 합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통해서 죽어있던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초대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단순히 고통과 슬픔의 장소가 아닙니다. 고통과 고난을 통해 열매가 있을 때 희생이라고 부릅니다. 바로 그 고통과 고난의 자리를 생명의 자리로 바꾸어 놓으셨기 때문에 희생의 자리가 될 수 있고 우리가 누리는 생명의 댓가를 치르는 자리가 된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바로 이 길을 가셨습니다. 복음서를 자세히 살펴보면 특별히 주님을 따랐던 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을 멀리서 확인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상한 것은 예수님을 가장 가까이서 따랐던 11명의 제자들은 뿔뿔이 흩어져 버렸습니다. 그리고 베드로 조차도 예수님을 부인하고 있을 때 가장 가까운 곳에서 예수님의 고난에 함께 동참하고 눈물 짖고 있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복음서는 그들을 “여인들” 이라고 표현 합니다. 여인들의 이름 중에 유독 ‘마리아’ 가 많이 등장합니다. 예수님 육신의 어머니,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 그리고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들이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 자리에 있었습니다. ‘마리아’ 라는 이름은 바로 ‘마라’ 라는 이름에서 파생된 것입니다. 썩어있던 마라의 연못에 나뭇가지를 던져 생명의 물로 바꾸신 여호와 하나님 그리고 예수님 주변에 마리아 라는 이름을 가진 많은 여인들이 있었던 일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아무런 소망도 가질 수 없는 쓰디 쓴 인생, 고통과 고난의 자리에 있던 그 여인들이 십자가의 증인으로 서 있습니다. 그리고 십자가 앞에서 그들은 인생의 모든 문제를 해결 받는 영원한 생명의 초대에 가장 먼저 초대받은 증인이 된 것입니다. 이 여인들은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후 부활하셨을 때도 첫 증인들이 되었습니다. ‘마리아’ 라는 이름으로 대표되는 쓰디 쓴 인생, 소망과 희망이 없던 인생을 영원한 생명의 자리로 옮겨주신 은혜에는 십자가 고통의 댓가가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 십자가로 우리를 초대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십자가의 길로 부르셨을 때 묵묵히 온전하게 순종했습니다. 오늘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도 십자가의 자리로 부르셔서 순종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우리에게도 십자가가 있습니다. 그것은 단순하게 우리가 당하는 고난이나 고통이 아닙니다. 한 생명을 위해서 당하는 고난이 있다면 그것이 우리의 십자가 입니다. 십자가는 단순한 고통의 자리가 아니라 생명을 만드는 자리입니다. 우리의 욕심과 자랑 때문에 눈물 흘리는 고통이 아니라 주님을 닮아가기 위해서, 주님처럼 섬기기 위해서,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으로 온전히 서기 위해서 당하는 손해와 고통이 있다면 바로 그곳이 십자가의 자리 입니다. 대부분 십자가의 자리는 우리에게 억울합니다. 내가 잘못하지 않고도 당하는 자리 입니다. 주님을 위해서, 한 생명을 위해서 당하는 억울한 자리이기도 합니다. 당하지 않아도 되는 수모의 자리입니다. 예수님은 더 큰 고통과 고난 가운데 우리를 불러내시기 위해서 이 자리에 섰기 때문에 우리도 순종하는 마음으로 묵묵히 설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자리에 서 있습니까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기 위해서 고통 당하는 자리, 손해 보는 자리, 오해 받는 자리에 서 있다면 주님의 마음을 좀 더 읽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온 몸으로 고난과 고통의 극치를 경험 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어떤 환경에 있다 하더라도 주님께서는 우리 마음을 알아 주십니다. 사람들이 몰라주는 자리에서 주님만은 우리의 심정과 억울함을 아시고 위로해 주십니다. 이런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십니다. 오늘도 주님의 부르심 앞에 묵묵히 우리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순종하길 바랍니다. 이런 믿음의 사람들을 통해서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붙드시고 그의 소원과 꿈을 우리 삶을 통해 이루어 가십니다. 우리들을 너무 사랑해서 우리를 살려내기 위해 보낸 십자가의 자리에 예수님은 순종 하셨던 것처럼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이 땅 가운에 이루기 위해 부르시는 그 자리에 기쁜 마음으로 순종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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