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려주일] 고난받는 종
본문
행 8장에는 빌립 집사가 에디오피아의 내시에게 전도하는 기사가 대단히 박진감있게 나옵니다. 성령께서 빌립을 인도하여 병거를 타고 가는 내시를 만나게 하셨는데 그때 내시가 읽고 있던 두루마리 성경은 사 53장입니다. “그가 도살자에게로 가는 양과 같이 끌려갔고 털 깎는 자 앞에 있는 어린 양이 조용함과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그가 굴욕을 당했을 때 공정한 재판도 받지 못하였으니 누가 그의 세대를 말하리요 그의 생명이 땅에서 빼앗김이로다”(53:7-8, 행 8:32-33).
내시가 빌립에게 묻습니다. “청컨대 내가 묻노니 선지자가 이 말한 것이 누구를 가르킴이냐 자기를 가리킴이냐 타인을 가르킴이냐” 그때까지만 해도 유대교에서는 어느 누구도 메시야를 고난의 종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내시는 이 기사가 이사야 자신이나 혹은 열국의 빛으로 여기던 이스라엘 백성에 관한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빌립이 바로 이 고난의 종은 메시야이며 그 메시야는 바로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시라고 복음을 증거하였던 것입니다.
메시야가 고난의 종이라는 메시지는 메시야 전체 예언 중 가장 핵심적인 것입니다. 특별히 사 52:13-53:12은 그 가운데도 가장 애독되고 중요한 의미를 가진 예언입니다. 메시야는 인간의 죄를 위하여 대신 고통을 당하는 종의 모습을 가지셨습니다. 이 부분에서 세 절씩 한 단락으로 해서 고난받는 종의 탁월함(13-15), 종의 인격(1-3), 종의 고난(4-6), 종의 순종(7-9), 종의 운명(10-12) 등 다섯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이 고난의 종은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이 충만하시나 비천한 배경에서 나시고,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시고, 극도의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시고, 승천하셔서 여호와 하나님 우편에 앉으시고, 영적 후손을 낳고, 영적으로 승리하심으로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신다는 것입니다. 오늘 아침에는 이 고난의 종이 당하신 고난의 의미를 살펴봅시다.
대속의 교리에 대한 여러 가지 어려운 설명들이 있습니다만 그 가장 상식적인 원리는 고난 없이는 잘못된 일을 바르게 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떻게 해서 예수님의 고난이 우리의 형벌을 대신하셨는가를 완전히 설명할 수 없다고 해도 적어도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받으심으로써, 고난받는 종이 되심으로써 우리의 치명적으로 잘못된 그 무엇을 바르게 하셨다는 것을 압니다. 벧전 1:12의 말씀입니다.
“이 섬긴 바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임이 계시로 알게 되었으니 이것은 하늘로부터 보내신 성령을 힘입어 복음을 전하는 자들로 이제 너희에게 알린 것이요 천사들도 살펴 보기를 원하는 것이니라” 우리의 멸망을 영생으로 바꾸신 고난받는 종은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분이십니다.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받으심으로써 우리를 살려내신 것입니다. 구약과 신약을 연결시키는 한 가지 기준은 이 고난의 종입니다. 이 구약에 나타난 고난의 종이 어떻게 신약에서 고난의 종인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되는가 그것이 바로 성경에 나타난 가장 중요한 예언의 성취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가 먼저 많은 고난을 받으며 이 세대에게 버린 바 되어야 할지니라(눅 17:25)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그들에게 가르치시되(막 8:31, 마 6:21) 내가 내 목숨을 버리는 것은 그것을 내가 다시 얻기 위함이니 이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느니라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요 10:17-18)”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을 따라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미리 예언한 그대로 고난을 받으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셨습니다. 고난의 종인 예수님은 아버지의 계명을 따라서, 또는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의 자유를 가지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우리들은 이 고난의 종에게서 여호와 하나님 약속의 성취와 여호와 하나님 사랑의 진실함과 여호와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봅니다.
첫째로, 본문 10-12절에서 고난받는 종의 운명을 살펴봅시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하게 하셨은즉 그의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씨를 보게 되며 그의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성취하리로다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하게 여길 것이라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로다 그러므로 내가 그에게 존귀한 자와 함께 몫을 받게 하며 강한 자와 함께 탈취한 것을 나누게 하리니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받았음이니라 그러나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
이 세상에서 나를 대신하여 고난받으시고 몸을 드려 나를 섬겨주시는 분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예언적으로 볼 때, 나를 위해 고난받는 종은 오직 예수님뿐이십니다. 예수님만이 요 10장에 말씀하신대로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신 선한 목자요, 양으로 생명을 얻되 더욱 풍성하게 하시는 메시야이십니다.
신학적으로 말하면, 첫째 이 고난받는 종은 예수님이요, 둘째 구약교회인 이스라엘 백성의 남은 자요, 신약교회의 택한 백성들이기도 합니다. 잘못된 것을 바로 잡기 위해서는 반드시 고난의 대가가 지불되어야 한다는 평범한 상식으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셔야만 했다면 오늘날도 교회가 고난을 받지 않으면 세계가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고난 없이는 잘못된 것이 바로잡아지지 않는다면 오늘날 예수님은 당신의 몸된 교회를 통하지 않고는 존재하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물리적 예수, 육체를 가지신 예수는 한 곳 밖에 계시지 못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온 세상에 계십니다. 어떻게요 성령으로, 두세 사람이 주님의 이름으로 모인 교회 가운데 함께 계십니다. 만일 오늘날 교회가 고난의 종의 길을 피하면 피하는 그만큼 세상은 예수 그리스도를 보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구약과 신약을 연결시키는 한 가지 기준은 이 고난의 종입니다. 고난의 종의 주제가 신구약을 연결시키는데 그것이 곧 주님의 사명이었고, 주님은 또한 그 사명을 우리 믿는 성도들, 교회에게 남겨주셨습니다. 요 14:12에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 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오늘날 교회가 그리스도보다 범위에 있어 더 큰 일을 하기 위해서는 더 큰 고난의 종의 역할을 감당해야 합니다. 교회가 고난의 더 큰 역할을 감당하는 만큼 구속받은 백성이 더 많이 나타날 것이고, 교회는 보다 더 독특한 고난의 종으로서의 모습을 드러내게 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빌 1:29에 말씀합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 고난은 절대로 가학도 아니고 자학도 아닙니다. 오늘날 교회가 해야 할 일입니다. 세계적으로 역사적으로 얼마나 많고 큰 고난의 역사가 있었고, 지금도 있는지요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올바른 삶, 그것은 바로 오늘 성도가 짊어지고 가야 할 십자가의 삶입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 16:24, 막 8:34). 세상은 예수님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 말씀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예수 믿는 우리는 심령으로 이 말씀을 잘 이해합니다. 성도는 첫째, 헛된 영광에 목말라 하는 자기 부인이라는 죽음(mortificatio)의 과정을 통과해야 합니다. 둘째, 그리스도께서 맡기신 사명, 선교를 위해 자기를 희생하는 삶, 곧 자기 십자가를 지는 죽음(mortificatio)의 과정을 통과해야 합니다.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딤후 4:6)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해야 하는 것입니다(행 20:24). 탐욕에서 나눔으로, 야심에서 섬김으로 변화의 삶을 살게 될 때 비로소 위대한 소생(vivificatio)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골 1:24-29에서 그리스도의 고난과 성도의 고난을 연결하여 말씀합니다.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내가 교회의 일꾼 된 것은 여호와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직분을 따라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니라 이 비밀은 만세와 만대로부터 감추어졌던 것인데 이제는 그의 성도들에게 나타났고 여호와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얼마나 풍성한지를 알게 하려 하심이라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
그리스도는 대속의 고난의 종이요, 교회는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의 종입니다. 고난의 종은 예언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요, 신학적으로는 예수의 교회입니다. 신앙적으로 볼 때 고난받는 종은 예수 그리스도요, 현실 삶으로 볼 때 고난받는 종은 이 땅 위의 교회입니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이 땅 위에서 고난받는 바로 그것이 오늘날 성도의 삶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삶입니다. Life for church, 교회를 위한 삶이 곧 예수를 위한 삶인 것입니다.
둘째로, 본문 4-6절에서 고난받는 종의 모습을 살펴봅시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여호와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사람들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고난의 종으로 하여금 자신의 죄로 인하여 고통을 당하도록 하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가 우리를 대신해서 고통을 당하셨던 것입니다. 그의 고통과 죽음은 대속적인 것입니다. 본문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고난받으시는 그대로의 모습을 봅니다. 그때 불법으로 예수님을 재판하던 대제사장 가야바조차도(요 18:14, 요 11:49) 냉소를 띄며 말합니다. “너희가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도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하지 아니하는도다”(요 11:49-50). 그 다음 절에 가야바의 이 말에 대한 성령의 해석이 나옵니다. “이 말은 스스로 함이 아니요 그 해의 대제사장이므로 예수께서 그 민족을 위하시고 또 그 민족만 위할 뿐 아니라 흩어진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를 모아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하여 죽으실 것을 미리 말함이러라”(요 11:51-52).
예수님의 고난은 의로운 자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는 고난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교회의 머리이십니다. 그가 대속의 고난을 받고 영화롭게 되셨으므로 그의 몸인 교회도 고난을 받고 영화롭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합니다.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눅 24:26). 사도 바울도 말씀합니다.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여호와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롬 8:17).
얼마나 명명백백한 진리입니까 영화로우신 교회의 머리는 지상에 있는 그의 몸인 교회를 통하여 이 대속과 영화의 복음을 증거하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오늘도 당신의 몸된 교회와 함께하시고, 당신의 남은 고난에 참여하고 계십니다. 머리가 영화로우면 몸도 영화롭고, 몸이 아프면 머리도 아픈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고난은 그리스도의 고난이요, 교회를 핍박하는 것은 곧 그리스도를 핍박하는 것입니다.
성도는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대속의 수난을 증거하기 위하여 존재합니다. 우리가 깨끗하고 정직하지만 억울하게 슬픔을 당하며 고통을 견딜수록 예수님이 더 많이 나타납니다. 우리가 이웃의 고난에 동참하고 그들의 무거운 짐을 나누어지는 만큼 그리스도의 복음이 드러납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눅 9:23).
셋째로, 본문 7-9절에서 고난받는 종의 순종을 살펴봅시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 갔으나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살아 있는 자들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 때문이라 하였으리요 그는 강포를 행하지 아니하였고 그의 입에 거짓이 없었으나 그의 무덤이 악인들과 함께 있었으며 그가 죽은 후에 부자와 함께 있었도다” 예수님은 사랑하기 때문에 침묵하셨고, 사랑하기 때문에 무덤 속으로까지 낮아지셨습니다.
베드로는 그 순종의 모습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여호와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그러나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여호와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그는 죄를 범하지 아니하시고 그 입에 거짓도 없으시며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벧전 2:19-24).
히 12:2-3에는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여호와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하지 않기 위하여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이를 생각하라”고 했는데 이것이 곧 교회를 위해 고난받는 종의 태도입니다. 끝까지 참읍시다. 그래서 주님과 함께 왕 노릇 합시다. 올해도 제직원으로 임명되신 여러분, 2009년이 저물 때까지 끝까지 참고 침묵하며 가장 낮은 자리에서 주님께 충성하십시다.
우리의 삶은 우리를 위하여 고난받은 종이신 예수께서 주신 삶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을 위하여 기꺼이 남은 여생을 고난받으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Life for Jesus, 예수님을 위하여 사는 삶은 곧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한 삶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남겨 놓으신 고난, 교회의 고난에 참여할 때, 우리의 삶의 모습과 자세가 적극적으로 고난받는 종이 될 때, 우리는 비로소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과 진실 속에 산다고 떳떳하게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내시가 빌립에게 묻습니다. “청컨대 내가 묻노니 선지자가 이 말한 것이 누구를 가르킴이냐 자기를 가리킴이냐 타인을 가르킴이냐” 그때까지만 해도 유대교에서는 어느 누구도 메시야를 고난의 종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내시는 이 기사가 이사야 자신이나 혹은 열국의 빛으로 여기던 이스라엘 백성에 관한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빌립이 바로 이 고난의 종은 메시야이며 그 메시야는 바로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시라고 복음을 증거하였던 것입니다.
메시야가 고난의 종이라는 메시지는 메시야 전체 예언 중 가장 핵심적인 것입니다. 특별히 사 52:13-53:12은 그 가운데도 가장 애독되고 중요한 의미를 가진 예언입니다. 메시야는 인간의 죄를 위하여 대신 고통을 당하는 종의 모습을 가지셨습니다. 이 부분에서 세 절씩 한 단락으로 해서 고난받는 종의 탁월함(13-15), 종의 인격(1-3), 종의 고난(4-6), 종의 순종(7-9), 종의 운명(10-12) 등 다섯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이 고난의 종은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이 충만하시나 비천한 배경에서 나시고,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시고, 극도의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시고, 승천하셔서 여호와 하나님 우편에 앉으시고, 영적 후손을 낳고, 영적으로 승리하심으로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신다는 것입니다. 오늘 아침에는 이 고난의 종이 당하신 고난의 의미를 살펴봅시다.
대속의 교리에 대한 여러 가지 어려운 설명들이 있습니다만 그 가장 상식적인 원리는 고난 없이는 잘못된 일을 바르게 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떻게 해서 예수님의 고난이 우리의 형벌을 대신하셨는가를 완전히 설명할 수 없다고 해도 적어도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받으심으로써, 고난받는 종이 되심으로써 우리의 치명적으로 잘못된 그 무엇을 바르게 하셨다는 것을 압니다. 벧전 1:12의 말씀입니다.
“이 섬긴 바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임이 계시로 알게 되었으니 이것은 하늘로부터 보내신 성령을 힘입어 복음을 전하는 자들로 이제 너희에게 알린 것이요 천사들도 살펴 보기를 원하는 것이니라” 우리의 멸망을 영생으로 바꾸신 고난받는 종은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분이십니다.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받으심으로써 우리를 살려내신 것입니다. 구약과 신약을 연결시키는 한 가지 기준은 이 고난의 종입니다. 이 구약에 나타난 고난의 종이 어떻게 신약에서 고난의 종인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되는가 그것이 바로 성경에 나타난 가장 중요한 예언의 성취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가 먼저 많은 고난을 받으며 이 세대에게 버린 바 되어야 할지니라(눅 17:25)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그들에게 가르치시되(막 8:31, 마 6:21) 내가 내 목숨을 버리는 것은 그것을 내가 다시 얻기 위함이니 이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느니라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요 10:17-18)”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을 따라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미리 예언한 그대로 고난을 받으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셨습니다. 고난의 종인 예수님은 아버지의 계명을 따라서, 또는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의 자유를 가지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우리들은 이 고난의 종에게서 여호와 하나님 약속의 성취와 여호와 하나님 사랑의 진실함과 여호와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봅니다.
첫째로, 본문 10-12절에서 고난받는 종의 운명을 살펴봅시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하게 하셨은즉 그의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씨를 보게 되며 그의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성취하리로다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하게 여길 것이라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로다 그러므로 내가 그에게 존귀한 자와 함께 몫을 받게 하며 강한 자와 함께 탈취한 것을 나누게 하리니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받았음이니라 그러나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
이 세상에서 나를 대신하여 고난받으시고 몸을 드려 나를 섬겨주시는 분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예언적으로 볼 때, 나를 위해 고난받는 종은 오직 예수님뿐이십니다. 예수님만이 요 10장에 말씀하신대로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신 선한 목자요, 양으로 생명을 얻되 더욱 풍성하게 하시는 메시야이십니다.
신학적으로 말하면, 첫째 이 고난받는 종은 예수님이요, 둘째 구약교회인 이스라엘 백성의 남은 자요, 신약교회의 택한 백성들이기도 합니다. 잘못된 것을 바로 잡기 위해서는 반드시 고난의 대가가 지불되어야 한다는 평범한 상식으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셔야만 했다면 오늘날도 교회가 고난을 받지 않으면 세계가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고난 없이는 잘못된 것이 바로잡아지지 않는다면 오늘날 예수님은 당신의 몸된 교회를 통하지 않고는 존재하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물리적 예수, 육체를 가지신 예수는 한 곳 밖에 계시지 못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온 세상에 계십니다. 어떻게요 성령으로, 두세 사람이 주님의 이름으로 모인 교회 가운데 함께 계십니다. 만일 오늘날 교회가 고난의 종의 길을 피하면 피하는 그만큼 세상은 예수 그리스도를 보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구약과 신약을 연결시키는 한 가지 기준은 이 고난의 종입니다. 고난의 종의 주제가 신구약을 연결시키는데 그것이 곧 주님의 사명이었고, 주님은 또한 그 사명을 우리 믿는 성도들, 교회에게 남겨주셨습니다. 요 14:12에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 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오늘날 교회가 그리스도보다 범위에 있어 더 큰 일을 하기 위해서는 더 큰 고난의 종의 역할을 감당해야 합니다. 교회가 고난의 더 큰 역할을 감당하는 만큼 구속받은 백성이 더 많이 나타날 것이고, 교회는 보다 더 독특한 고난의 종으로서의 모습을 드러내게 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빌 1:29에 말씀합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 고난은 절대로 가학도 아니고 자학도 아닙니다. 오늘날 교회가 해야 할 일입니다. 세계적으로 역사적으로 얼마나 많고 큰 고난의 역사가 있었고, 지금도 있는지요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올바른 삶, 그것은 바로 오늘 성도가 짊어지고 가야 할 십자가의 삶입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 16:24, 막 8:34). 세상은 예수님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 말씀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예수 믿는 우리는 심령으로 이 말씀을 잘 이해합니다. 성도는 첫째, 헛된 영광에 목말라 하는 자기 부인이라는 죽음(mortificatio)의 과정을 통과해야 합니다. 둘째, 그리스도께서 맡기신 사명, 선교를 위해 자기를 희생하는 삶, 곧 자기 십자가를 지는 죽음(mortificatio)의 과정을 통과해야 합니다.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딤후 4:6)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해야 하는 것입니다(행 20:24). 탐욕에서 나눔으로, 야심에서 섬김으로 변화의 삶을 살게 될 때 비로소 위대한 소생(vivificatio)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골 1:24-29에서 그리스도의 고난과 성도의 고난을 연결하여 말씀합니다.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내가 교회의 일꾼 된 것은 여호와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직분을 따라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니라 이 비밀은 만세와 만대로부터 감추어졌던 것인데 이제는 그의 성도들에게 나타났고 여호와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얼마나 풍성한지를 알게 하려 하심이라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
그리스도는 대속의 고난의 종이요, 교회는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의 종입니다. 고난의 종은 예언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요, 신학적으로는 예수의 교회입니다. 신앙적으로 볼 때 고난받는 종은 예수 그리스도요, 현실 삶으로 볼 때 고난받는 종은 이 땅 위의 교회입니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이 땅 위에서 고난받는 바로 그것이 오늘날 성도의 삶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삶입니다. Life for church, 교회를 위한 삶이 곧 예수를 위한 삶인 것입니다.
둘째로, 본문 4-6절에서 고난받는 종의 모습을 살펴봅시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여호와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사람들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고난의 종으로 하여금 자신의 죄로 인하여 고통을 당하도록 하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가 우리를 대신해서 고통을 당하셨던 것입니다. 그의 고통과 죽음은 대속적인 것입니다. 본문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고난받으시는 그대로의 모습을 봅니다. 그때 불법으로 예수님을 재판하던 대제사장 가야바조차도(요 18:14, 요 11:49) 냉소를 띄며 말합니다. “너희가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도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하지 아니하는도다”(요 11:49-50). 그 다음 절에 가야바의 이 말에 대한 성령의 해석이 나옵니다. “이 말은 스스로 함이 아니요 그 해의 대제사장이므로 예수께서 그 민족을 위하시고 또 그 민족만 위할 뿐 아니라 흩어진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를 모아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하여 죽으실 것을 미리 말함이러라”(요 11:51-52).
예수님의 고난은 의로운 자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는 고난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교회의 머리이십니다. 그가 대속의 고난을 받고 영화롭게 되셨으므로 그의 몸인 교회도 고난을 받고 영화롭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합니다.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눅 24:26). 사도 바울도 말씀합니다.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여호와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롬 8:17).
얼마나 명명백백한 진리입니까 영화로우신 교회의 머리는 지상에 있는 그의 몸인 교회를 통하여 이 대속과 영화의 복음을 증거하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오늘도 당신의 몸된 교회와 함께하시고, 당신의 남은 고난에 참여하고 계십니다. 머리가 영화로우면 몸도 영화롭고, 몸이 아프면 머리도 아픈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고난은 그리스도의 고난이요, 교회를 핍박하는 것은 곧 그리스도를 핍박하는 것입니다.
성도는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대속의 수난을 증거하기 위하여 존재합니다. 우리가 깨끗하고 정직하지만 억울하게 슬픔을 당하며 고통을 견딜수록 예수님이 더 많이 나타납니다. 우리가 이웃의 고난에 동참하고 그들의 무거운 짐을 나누어지는 만큼 그리스도의 복음이 드러납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눅 9:23).
셋째로, 본문 7-9절에서 고난받는 종의 순종을 살펴봅시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 갔으나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살아 있는 자들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 때문이라 하였으리요 그는 강포를 행하지 아니하였고 그의 입에 거짓이 없었으나 그의 무덤이 악인들과 함께 있었으며 그가 죽은 후에 부자와 함께 있었도다” 예수님은 사랑하기 때문에 침묵하셨고, 사랑하기 때문에 무덤 속으로까지 낮아지셨습니다.
베드로는 그 순종의 모습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여호와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그러나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여호와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그는 죄를 범하지 아니하시고 그 입에 거짓도 없으시며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벧전 2:19-24).
히 12:2-3에는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여호와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하지 않기 위하여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이를 생각하라”고 했는데 이것이 곧 교회를 위해 고난받는 종의 태도입니다. 끝까지 참읍시다. 그래서 주님과 함께 왕 노릇 합시다. 올해도 제직원으로 임명되신 여러분, 2009년이 저물 때까지 끝까지 참고 침묵하며 가장 낮은 자리에서 주님께 충성하십시다.
우리의 삶은 우리를 위하여 고난받은 종이신 예수께서 주신 삶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을 위하여 기꺼이 남은 여생을 고난받으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Life for Jesus, 예수님을 위하여 사는 삶은 곧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한 삶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남겨 놓으신 고난, 교회의 고난에 참여할 때, 우리의 삶의 모습과 자세가 적극적으로 고난받는 종이 될 때, 우리는 비로소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과 진실 속에 산다고 떳떳하게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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