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려주일] 고난에 처한 하나님의 종
본문
나를 때리는 자들에게 내 등을 맡기며 나의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나의 뺨을 맡기며 수욕과 침 뱉음을 피하려고 내 얼굴을 가리우지 아니하였느니라
(사 50:6)
지금은 사순절 기간 중이며 주님께서 고난의 길을 향하여 나아가신 달입니다. 주님의 고난을 생각하면서 모든 어려운 일을 전부 승리하는 복 있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예루살렘의 성지를 가면 주님께서 걸어가신 "고난의 길"이란 곳이 있습니다. 그 길을 따라서 가다보면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가다가 쓰러진 곳이 여덟 군데가 있는데 쓰러진 곳마다 표시를 해 놓았습니다.
예수께서 더 이상은 삼십 관이 넘는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갈 수가 없다고 생각한 로마병정과 유대관원들은 마침 그곳을 지나가던 구레네 사람인 시몬에게 그 십자가를 지고 가게 했습니다. 이때 십자가를 대신 짐으로써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한 시몬은 은혜를 받고 나중에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고난에 처한 여호와 하나님의 종"이란 제목의 말씀으로 은혜를 받으려고 합니다.
예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 이르렀을 때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하고 물으셨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은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고 합니다. "하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너희는 나를 누구라 생각하느냐"하고 질문하셨습니다. 그 때 제자 중에서 베드로가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
그러자 예수님은 이와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마 16:17)
이것은 예수께서 분명히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는 것을 입증해 주신 말씀입니다.
이처럼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이 고난을 당하셨으니 여호와 하나님께서 얼마나 안타까웠겠습니까
누구든지 자기 자식만은 고생을 시키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 인지상정(人之常情)입니다. 그러나 자식을 지나치게 사랑한 나머지 군대에 보내지 않았기 때문에 지도자가 되려고 하는 사람이 그 일에 대한 후유증으로 많은 사람에게 비난을 받고 있는 것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지 모릅니다.
이것은 전부 자기 자식만은 고생시키고 싶지 않은 마음 때문입니다. 아마 여러분도 자식이 군대에 갔는데 제일 힘든 곳에서 고생한다면 잠을 편하게 자지 못할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도 우리와 똑같이 인격을 갖고 계신 분인데 하늘 보좌를 버리고 이 세상에 오신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이 잠을 잘 자리도 없고 제대로 먹지 못하고 굶주려 가면서 사는 모습을 보시고 얼마나 안타까워했겠습니까
결국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십자가를 졌을 때 여호와 하나님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정도로 심했을 것입니다.
사람마다 고통이 다 있습니다. 고통이 없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면 무슨 고통이 있습니까
1) 질병의 고통이 있습니다.
사람이 제일 먼저 겪는 고통은 질병의 고통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세상에 태어난 후 제일 먼저 만나는 것이 질병이기 때문입니다. 이 질병 때문에 사람들이 얼마나 고생을 하는지 모릅니다.
요즘에는 아이를 낳으면 곧 출생신고를 하지만 옛날에는 태어난 아이가 병들지 않고 잘 크는 것을 확인한 후에 신고를 했기 때문에 어떤 아이는 세살 어떤 아이는 네 살, 어떤 아이는 다섯 살에 출생신고를 했습니다. 왜냐하면 질병 때문에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서 죽은 경우가 매우 많았기 때문입니다.
여기 앉아있는 사람들도 다른 경력은 없어도 병을 앓은 경력은 전부 갖고 있을 것입니다. 옛날에는 지금의 감기인 고뿔을 비롯해서 홍역이나 마마 때문에 얼마나 고통을 당했는지 모릅니다.
2) 가난의 고통이 있습니다.
아마 사십대 이상인 사람은 가난의 고통이 무엇인지 조금은 알 것입니다. 게다가 50대와 60대 이상인 사람은 가난의 고통 다시 말해서 먹지 못하는 고통이 얼마나 쓰라린 것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6. 25전쟁이라는 비극을 겪었기 때문입니다.
나도 썩은 콩깻묵을 물에 씻어서 먹었으며 상한 음식을 먹으면서 살았습니다. 아마 요즘 같으면 병에 걸리기 쉬운 음식입니다. 그러나 그때는 그런 것을 먹어도 병이 나지 않았습니다.
3) 무지의 고통입니다.
선교사들이 우리나라에 와서 보니까 백성의 무지함이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양반계층의 사람은 한학을 배웠지만 그 외의 서민은 공부하는 곳의 근처에도 가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당시에는 "아는 것이 힘이다", "배워야 산다. "하는 말을 많이 했습니다.
4) 주권과 인권을 잃어버린 고통입니다.
우리는 일제의 침략을 받아 주권을 뺏기고 인권이 억압당하는 엄청난 고통을 당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해방된 이후에도 군사정권 하에서 얼마나 인권을 유린당하는 고통을 겪었는지 모릅니다.
언젠가 신문에 "어머니의 기도"라는 글이 실렸는데 이런 내용이 담겨져 있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 나는 따뜻한 방에서/
/잠을 자고 있는데/
/왜 내 몸은 이렇게 추위를 느낍니까/
/나는 오늘 분명히/
/저녁식사를 먹었는데/
/왜 이렇게 배고픔을 느낍니까/
이것은 인권운동을 하던 중 체포되어 감옥에 수감된 분이 자기의 자녀들을 생각하면서 쓴 기도문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모든 고통의 근원은 어디에서 시작되었을까요 고난의 시발점은 죄입니다. 따라서 고난은 죄의 과정이요 죄의 결과는 죽음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려지지 않을 때 우리에게 고통이 오게 됩니다.
여러분이 우리 교회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그 말씀이 꿀 송이처럼 달 때가 여러분의 심령이 가장 아름다울 때입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을 오래 하다 보니까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 수면제가 되어서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시작하면 벌써 졸기 시작합니다. 이처럼 예배시간에 설교가 들리지 않고 졸음이 왔을 때 아마 영적인 경험이 있는 사람은 굉장히 고통을 느꼈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아무리 피곤하더라도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순간에 힘이 샘솟듯이 솟아나는 때가 있는데 우리 교회에서 드려지는 철야기도시간입니다. 그러나 요즘에는 밤 12시만 넘으면 벌써 졸기 시작합니다. 피곤이 몰려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 꿀 송이처럼 달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영적으로 고장이 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시간에 영적인 고장을 잘 수리해서 싱싱한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꽃은 수분과 거름이 충분하면 결코 시들지 않습니다. 하지만 수분이 부족하면 벌써 시들기 시작합니다. 이런 일이 자주 반복되면 꽃이 꼬부라지면서 병이 들기 시작합니다.
이러한 것을 바라보면서 교인들의 심령도 꽃과 똑같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여러분이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의 수분을 매주일 받으면 싱싱합니다. 그리고 은혜의 거름을 충분히 받으면 믿음이 잘 자라게 됩니다. 그러면 거기서 꽃이 피고 열매가 맺히게 되는데, 30배, 60배, 100배의 수확을 거두게 됩니다.
고난은 피해가려고 하지 말고 극복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고난을 피하려고 하면 산 넘어 산이요 강 건너 강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넘어야 할 고난은 반드시 극복해야만 합니다.
우리 기도원 옆에 있는 산은 경기도에서 가장 높은 산인 명지산입니다. 이 산을 올라가려고 했는데 끝까지 올라가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멀리서 본 것과는 달리 대단히 험한 산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 인생은 이 산보다도 더 험한 산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이 이번 달이 지나가면 다음달에는 좋아지겠지 하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살아가면서 항상 부딪치는 친구가 있는데 그것은 고난이라는 친구입니다. 이 고간이라는 친구를 마지막까지 잘 극복한 사람은 승리하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은 실패하게 됩니다.
제2차 세계대전때 대서양 사령관으로 임명된 아이젠하워 장군은 강력하게 저항하고 있는 독일군의 허를 찌르기 위해서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세웠습니다. 그런데 그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감행하는 때에 큰 태풍이 온다는 기상예보가 있었기 때문에 큰 어려움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태풍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뿐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오로지 여호와 하나님만 이 태풍을 이길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이젠하워 장군의 기도를 들어주셨기 때문에 태풍은 오지 않았고 노르망디 상륙작전은 계획대로 성공했습니다. 그 때부터 독일군은 패전하기 시작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방송국에서 대서양 사령관인 아이젠하워와 극동군 사령관인 맥아더를 초청하여 인터뷰를 했습니다. 기자가 두 사람에게 "당신들이 제2차 세계대전을 어떻게 승리할 수 있었습니까" 하고 묻자, 맥아더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우리의 전략과 전술 때문에 승리했습니다. " 그러나 아이젠하워는 이와 같이 대답했습니다. " 첫째, 여호와 하나님께서 승리하게 해주셨습니다. 둘째, 미국 국민이 승리하게 지원해주었습니다. 셋째, 미국 병사들이 용감했기 때문에 승리했습니다. " 결국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미국 대통령선거에서 아이젠하워는 대통령에 당선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여호와 하나님은 맥아더처럼 자기의 머리와 전술을 의지한 사람을 쓰시는 것이 아니라 아이젠하워처럼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모든 공로를 국민과 병사에게 돌리는 겸손한 사람을 귀하게 쓰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마 23:12)
우리 인간은 에덴동산에 살던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은 이후부터 계속해서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죄를 부둥켜안고 살아왔습니다. 이 죄의 고통의 문제는 여러분의 부모도 남편이나 아내도 자식도 해결해 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의 어느 누구도 여러분의 죄의 고만을 대신 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의 고난의 짐을 대신 지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히브리 사람들은 모든 고난은 인과응보(因果應報)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죄가 인과응보가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을 알게 하는 통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죄를 졌을 때 여호와 하나님께서 매로 깨우쳐주시고 고통으로 알게 하시며 슬픔과 탄식을 통해서 여호와 하나님의 진리를 알게 해주시기 때문입니다. 죄의 고난은 불의를 의로 만들고 불안을 위로해주시는 역사를 일으키게 합니다. 저는 후두암이라는 질병 때문에 여호와 하나님의 영계를 깊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지금 이 시간에도 여러분 앞에서 확신을 갖고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1969년 1월 2일에 여호와 하나님의 영계를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살아계신 여호와 하나님은 그때 나를 깨우치게 해주셨습니다. 그러나 그때 깨우쳐주신 진리를 당시에는 깨달았지만 만약 35년이 지난 오늘날에는 깨닫지 못한다면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를 배신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 바울이 "사람을 기쁘게 하려 함이 아니요 오직 우리 마음을 감찰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함이라"(살전 2:4)하고 말씀한 것처럼 나도 여호와 하나님께 선택권을 두고 살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여호와 하나님께 선택권을 두고 살 때 여호와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모든 고통을 해결해 주시는 위로자가 되실 것입니다.
(사 50:6)
지금은 사순절 기간 중이며 주님께서 고난의 길을 향하여 나아가신 달입니다. 주님의 고난을 생각하면서 모든 어려운 일을 전부 승리하는 복 있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예루살렘의 성지를 가면 주님께서 걸어가신 "고난의 길"이란 곳이 있습니다. 그 길을 따라서 가다보면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가다가 쓰러진 곳이 여덟 군데가 있는데 쓰러진 곳마다 표시를 해 놓았습니다.
예수께서 더 이상은 삼십 관이 넘는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갈 수가 없다고 생각한 로마병정과 유대관원들은 마침 그곳을 지나가던 구레네 사람인 시몬에게 그 십자가를 지고 가게 했습니다. 이때 십자가를 대신 짐으로써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한 시몬은 은혜를 받고 나중에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고난에 처한 여호와 하나님의 종"이란 제목의 말씀으로 은혜를 받으려고 합니다.
예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 이르렀을 때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하고 물으셨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은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고 합니다. "하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너희는 나를 누구라 생각하느냐"하고 질문하셨습니다. 그 때 제자 중에서 베드로가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
그러자 예수님은 이와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마 16:17)
이것은 예수께서 분명히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는 것을 입증해 주신 말씀입니다.
이처럼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이 고난을 당하셨으니 여호와 하나님께서 얼마나 안타까웠겠습니까
누구든지 자기 자식만은 고생을 시키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 인지상정(人之常情)입니다. 그러나 자식을 지나치게 사랑한 나머지 군대에 보내지 않았기 때문에 지도자가 되려고 하는 사람이 그 일에 대한 후유증으로 많은 사람에게 비난을 받고 있는 것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지 모릅니다.
이것은 전부 자기 자식만은 고생시키고 싶지 않은 마음 때문입니다. 아마 여러분도 자식이 군대에 갔는데 제일 힘든 곳에서 고생한다면 잠을 편하게 자지 못할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도 우리와 똑같이 인격을 갖고 계신 분인데 하늘 보좌를 버리고 이 세상에 오신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이 잠을 잘 자리도 없고 제대로 먹지 못하고 굶주려 가면서 사는 모습을 보시고 얼마나 안타까워했겠습니까
결국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십자가를 졌을 때 여호와 하나님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정도로 심했을 것입니다.
사람마다 고통이 다 있습니다. 고통이 없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면 무슨 고통이 있습니까
1) 질병의 고통이 있습니다.
사람이 제일 먼저 겪는 고통은 질병의 고통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세상에 태어난 후 제일 먼저 만나는 것이 질병이기 때문입니다. 이 질병 때문에 사람들이 얼마나 고생을 하는지 모릅니다.
요즘에는 아이를 낳으면 곧 출생신고를 하지만 옛날에는 태어난 아이가 병들지 않고 잘 크는 것을 확인한 후에 신고를 했기 때문에 어떤 아이는 세살 어떤 아이는 네 살, 어떤 아이는 다섯 살에 출생신고를 했습니다. 왜냐하면 질병 때문에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서 죽은 경우가 매우 많았기 때문입니다.
여기 앉아있는 사람들도 다른 경력은 없어도 병을 앓은 경력은 전부 갖고 있을 것입니다. 옛날에는 지금의 감기인 고뿔을 비롯해서 홍역이나 마마 때문에 얼마나 고통을 당했는지 모릅니다.
2) 가난의 고통이 있습니다.
아마 사십대 이상인 사람은 가난의 고통이 무엇인지 조금은 알 것입니다. 게다가 50대와 60대 이상인 사람은 가난의 고통 다시 말해서 먹지 못하는 고통이 얼마나 쓰라린 것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6. 25전쟁이라는 비극을 겪었기 때문입니다.
나도 썩은 콩깻묵을 물에 씻어서 먹었으며 상한 음식을 먹으면서 살았습니다. 아마 요즘 같으면 병에 걸리기 쉬운 음식입니다. 그러나 그때는 그런 것을 먹어도 병이 나지 않았습니다.
3) 무지의 고통입니다.
선교사들이 우리나라에 와서 보니까 백성의 무지함이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양반계층의 사람은 한학을 배웠지만 그 외의 서민은 공부하는 곳의 근처에도 가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당시에는 "아는 것이 힘이다", "배워야 산다. "하는 말을 많이 했습니다.
4) 주권과 인권을 잃어버린 고통입니다.
우리는 일제의 침략을 받아 주권을 뺏기고 인권이 억압당하는 엄청난 고통을 당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해방된 이후에도 군사정권 하에서 얼마나 인권을 유린당하는 고통을 겪었는지 모릅니다.
언젠가 신문에 "어머니의 기도"라는 글이 실렸는데 이런 내용이 담겨져 있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 나는 따뜻한 방에서/
/잠을 자고 있는데/
/왜 내 몸은 이렇게 추위를 느낍니까/
/나는 오늘 분명히/
/저녁식사를 먹었는데/
/왜 이렇게 배고픔을 느낍니까/
이것은 인권운동을 하던 중 체포되어 감옥에 수감된 분이 자기의 자녀들을 생각하면서 쓴 기도문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모든 고통의 근원은 어디에서 시작되었을까요 고난의 시발점은 죄입니다. 따라서 고난은 죄의 과정이요 죄의 결과는 죽음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려지지 않을 때 우리에게 고통이 오게 됩니다.
여러분이 우리 교회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그 말씀이 꿀 송이처럼 달 때가 여러분의 심령이 가장 아름다울 때입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을 오래 하다 보니까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 수면제가 되어서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시작하면 벌써 졸기 시작합니다. 이처럼 예배시간에 설교가 들리지 않고 졸음이 왔을 때 아마 영적인 경험이 있는 사람은 굉장히 고통을 느꼈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아무리 피곤하더라도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순간에 힘이 샘솟듯이 솟아나는 때가 있는데 우리 교회에서 드려지는 철야기도시간입니다. 그러나 요즘에는 밤 12시만 넘으면 벌써 졸기 시작합니다. 피곤이 몰려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 꿀 송이처럼 달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영적으로 고장이 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시간에 영적인 고장을 잘 수리해서 싱싱한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꽃은 수분과 거름이 충분하면 결코 시들지 않습니다. 하지만 수분이 부족하면 벌써 시들기 시작합니다. 이런 일이 자주 반복되면 꽃이 꼬부라지면서 병이 들기 시작합니다.
이러한 것을 바라보면서 교인들의 심령도 꽃과 똑같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여러분이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의 수분을 매주일 받으면 싱싱합니다. 그리고 은혜의 거름을 충분히 받으면 믿음이 잘 자라게 됩니다. 그러면 거기서 꽃이 피고 열매가 맺히게 되는데, 30배, 60배, 100배의 수확을 거두게 됩니다.
고난은 피해가려고 하지 말고 극복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고난을 피하려고 하면 산 넘어 산이요 강 건너 강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넘어야 할 고난은 반드시 극복해야만 합니다.
우리 기도원 옆에 있는 산은 경기도에서 가장 높은 산인 명지산입니다. 이 산을 올라가려고 했는데 끝까지 올라가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멀리서 본 것과는 달리 대단히 험한 산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 인생은 이 산보다도 더 험한 산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이 이번 달이 지나가면 다음달에는 좋아지겠지 하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살아가면서 항상 부딪치는 친구가 있는데 그것은 고난이라는 친구입니다. 이 고간이라는 친구를 마지막까지 잘 극복한 사람은 승리하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은 실패하게 됩니다.
제2차 세계대전때 대서양 사령관으로 임명된 아이젠하워 장군은 강력하게 저항하고 있는 독일군의 허를 찌르기 위해서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세웠습니다. 그런데 그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감행하는 때에 큰 태풍이 온다는 기상예보가 있었기 때문에 큰 어려움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태풍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뿐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오로지 여호와 하나님만 이 태풍을 이길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이젠하워 장군의 기도를 들어주셨기 때문에 태풍은 오지 않았고 노르망디 상륙작전은 계획대로 성공했습니다. 그 때부터 독일군은 패전하기 시작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방송국에서 대서양 사령관인 아이젠하워와 극동군 사령관인 맥아더를 초청하여 인터뷰를 했습니다. 기자가 두 사람에게 "당신들이 제2차 세계대전을 어떻게 승리할 수 있었습니까" 하고 묻자, 맥아더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우리의 전략과 전술 때문에 승리했습니다. " 그러나 아이젠하워는 이와 같이 대답했습니다. " 첫째, 여호와 하나님께서 승리하게 해주셨습니다. 둘째, 미국 국민이 승리하게 지원해주었습니다. 셋째, 미국 병사들이 용감했기 때문에 승리했습니다. " 결국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미국 대통령선거에서 아이젠하워는 대통령에 당선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여호와 하나님은 맥아더처럼 자기의 머리와 전술을 의지한 사람을 쓰시는 것이 아니라 아이젠하워처럼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모든 공로를 국민과 병사에게 돌리는 겸손한 사람을 귀하게 쓰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마 23:12)
우리 인간은 에덴동산에 살던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은 이후부터 계속해서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죄를 부둥켜안고 살아왔습니다. 이 죄의 고통의 문제는 여러분의 부모도 남편이나 아내도 자식도 해결해 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의 어느 누구도 여러분의 죄의 고만을 대신 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의 고난의 짐을 대신 지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히브리 사람들은 모든 고난은 인과응보(因果應報)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죄가 인과응보가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을 알게 하는 통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죄를 졌을 때 여호와 하나님께서 매로 깨우쳐주시고 고통으로 알게 하시며 슬픔과 탄식을 통해서 여호와 하나님의 진리를 알게 해주시기 때문입니다. 죄의 고난은 불의를 의로 만들고 불안을 위로해주시는 역사를 일으키게 합니다. 저는 후두암이라는 질병 때문에 여호와 하나님의 영계를 깊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지금 이 시간에도 여러분 앞에서 확신을 갖고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1969년 1월 2일에 여호와 하나님의 영계를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살아계신 여호와 하나님은 그때 나를 깨우치게 해주셨습니다. 그러나 그때 깨우쳐주신 진리를 당시에는 깨달았지만 만약 35년이 지난 오늘날에는 깨닫지 못한다면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를 배신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 바울이 "사람을 기쁘게 하려 함이 아니요 오직 우리 마음을 감찰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함이라"(살전 2:4)하고 말씀한 것처럼 나도 여호와 하나님께 선택권을 두고 살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여호와 하나님께 선택권을 두고 살 때 여호와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모든 고통을 해결해 주시는 위로자가 되실 것입니다.
댓글목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