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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려주일] 고난을 통한 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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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후의 명작인 "왕중 왕"(The King of Kings)을 촬영할 때였습니다. 이 영화의 감독 씨콜 드밀(Cecal Demille)은 예수께서 골고다에서 십자가에 못박히는 장면을 위해서 L. A. 에 사는 가난하고 피곤한 사람들을 엑스트라로 삼았습니다. 화난 얼굴들을 촬영해야 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촬영 준 비가 늦어져서 골고다 장면 촬영을 성탄절을 하루 앞둔 날 강행하게 되었습 니다.
 수백 명이 분장을 하고 세 개의 십자가 앞에 늘어섰습니다. 드밀 감 독은 십자가 앞으로 나가 "모두가 그분만 묵상하고 시작합시다"라고 말했습 니다. 그러자 전체가 죽은 듯이 고요해졌습니다. 순간 감독은 '앗차, 실수했 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화나고 소리지르는 군상을 찍어야 하는데 조용하게 만들어서는 안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습니다. 무리의 한 쪽에서 "기쁘다 구주 오셨네"는 캐롤을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수백 명이 따 라서 합창을 하였습니다. 그 다음에는 "고요한 밤 거룩한 밤," 그리고 "참 반 가운 신도여"로 이어졌습니다.

캐롤이 계속되는 동안 거칠고 피곤한 인생을 사는 그들의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습니다. 비록 영화를 찍기 위해 세워논 예수의 십자 가 상 앞이었지만 사람들은 무엇인가 새 출발을 결심하고 있는 듯 했습니다. 감독의 우려와는 달리 이 날 촬영은 대성공이었다고 합니다. 신이 난 군중들 이 배우 못지 않게 연기를 잘했던 것입니다. 후에 드밀 감독은 "그때는 나의 최고의 순간이었다"고 회고하였습니다.

우리는 오늘 주님이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기 위해서 예루살렘에 올라 오신 종려주일을 맞이하였습니다. 우리 주님은 피곤하고 지친 자들에게, 걱 정이 많고 번뇌가 많은 자에게 기쁨이 되고 용기가 되는 분이십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친히 우리 인생들의 모든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대신 짊어지셨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말씀은 고난받는 여호와 하나님의 종이 깊은 고뇌 속에서 부르 짖는 내용입니다. 이 말씀은 수백 년 후에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암 시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오셔서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하시기 700여년 전 에 이미 선지자 이사야의 입을 통해서 예언한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통하여 우리 주님께서 당하신 고난의 뜻과 의미를 깊이 묵상하면서 우리의 신앙을 재다짐하는 거룩한 시간을 가지려고 합니다.

1. 주님은 아침마다 기도의 시간을 가졌습니다(4-6절).

우리 인간이 가지고 있는 오감은 그 어느 것 하나 중요하지 않은 것 이 없을 것입니다. 그 가운데서도 청각기능은 그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합 니다. 물론 보지 못하는 괴로움도 크지만 듣지 못하는 괴로움 또한 그에 못 지 않습니다. 특히 신앙의 세계에 있어서는 듣는 기능이 보는 것이나 육감으 로 의식하는 것보다 더욱 중요합니다. 이 청각기능을 통하여 여호와 하나님의 계시 의 말씀을 들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오감 중 청각 외에 다른 어떤 기능이 장 애를 받는다고 해도 신앙생활은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청각기능이 장애를 일으키게 되면 신앙생활을 지속하기가 정말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들 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기 때문입니다(롬 10:17). 여호와 하나님의 역사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주님의 음 성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서는 여호와 하나님의 놀라 운 역사를 알 수도 없고 행할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 서도 하루의 일과를 시작하시기 전에 새벽에 기도하는 습관을 가졌습니다. 마가복음에 "새벽 오히려 미명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막 1:35) 하였고, 오늘 본문에서도 "아침마다 깨우치시 되 나의 귀를 깨우치시되"(4절)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이신 우리 주님께서도 새벽에 기도하는 시간을 가져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그때 그의 아들에게 말씀을 주셔서 주께서는 그 말씀을 통하여 육 신의 욕심을 제어하는 힘을 얻게 되었고 자신에게 부과된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힘을 제공받았습니다. 이렇게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이신 우리 주님께서도 새벽 에 큰 능력을 얻는 기회를 얻으셨는데 하물며 우리들이 새벽에 여호와 하나님께 기 도하지 않고 어떻게 승리하는 신앙생활을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도 아침 시간에 기도해야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태아는 오감 중에서 청각기능이 무엇보다도 뛰어나다고 합니다. 어머 니의 맥박 소리, 심장 뛰는 소리, 말하는 소리, 심지어는 감정까지도 듣는다 고 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 모든 신앙생활의 첫걸음입니다. 어린 사무엘이 여호와 하나님의 부르시는 음성을 듣 고서 선지자로서의 삶을 시작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사 울아, 사울아" 부르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위대한 그리스도의 종이 되었습 니다. 우리도 주님 앞에 나와 기도하면서 주의 음성을 들을 때 영적인 힘을 얻고 신앙의 깊은 체험을 하게 됩니다. 신앙생활의 비밀이 여기에 있는 것입 니다.

오늘 본문 5절 말씀에서 "주 여호와께서 나의 귀를 열으셨으므로 내 가 거역지도 아니하며 뒤로 물러가지도 아니하며"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예 수께서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음으로 절대 순종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여호와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 정말 어렵다고 낙심하고 핑계만 댈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 앞에 나와 무릎을 꿇고 나의 연약함을 도와주시도록 기도하면 날마 다 승리할 수 있는 능력을 얻게 될 것입니다. 새벽에 기도하는 시간을 어떤 시간보다도 가장 중요하게 알고 기도하게 될 때 우리도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에 절 대로 순종하게 될 것입니다. 이번 13일 특별새벽기도 기간이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 의 음성을 듣는 귀가 열리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2. 주님은 고난을 통해서 사명을 수행하셨습니다(6-7절).

우리 주님께서는 아무런 잘못도 없으신데 원수들에게 붙잡혀 심문을 받으시며 십자가의 고난을 받으시고 죽으셨습니다. 이것은 너무나 고통스러 운 일이었지만 여호와 하나님이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한 방법이라는 것을 아셨기 때문에 그대로 순종하셨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이러한 사실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나를 때리는 자에게 내 등을 맡기며, 나의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나의 뺨을 맡기며, 수욕과 침 뱉음을 피하려고 내 얼굴을 가리우지 아니하였 느니라"(6절). 그러므로 예수의 수난은 인류 구원을 위한 수단이요 바로 우 리 죄를 대신지기 위한 수단이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처절한 기도를 드리면서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 26:39) 하시며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구했습니다. 주님은 끝까지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이루 려고 하셨고 운명하시면서도 여호와 하나님께 자기의 영혼을 맡기셨습니다. 주님은 아버지 여호와 하나님을 끝까지 신뢰하시고 십자가의 죽음까지도 다 맡기셨습니다. 이 모든 것은 여호와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충실히 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뜻보다 나의 뜻을 앞세우는 때가 너무 많습니다. 주님이 나 교회는 좀 손해를 보는 한이 있어도 나는 영광을 받기를 원합니다. 나는 편하기를 원하고 이름나기를 원하고 이익을 보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그리스 도의 십자가에 내 자아를 못박아야 합니다. 그래야 부활의 영광이 있고 영적 인 진보가 있고 승리하는 신앙생활을 하게 됩니다.

우리는 나 자신보다 주님을 더욱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주 님이 이런 고난을 받으신 것은 우리를 자기 생명보다 더 사랑하시기 때문이 었습니다. 우리의 생명을 위하여 우리 대신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시면서 비 참하게 죽으셨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놀라운 사랑의 실천입니다. 주님은 나 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나의 고통을 대신 지셨고,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내 대신 신음하셨고,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대신 죽으셨습니다. 이 얼마나 큰 사랑의 주님이십니까 우리는 이러한 주님의 사랑에 무엇으로 보답하겠습니 까

십자가의 고난을 앞둔 주님께서 모처럼 조용한 시간을 갖고 있었습니 다. 예수께서 어떤 집에서 식사를 하고 있었는데 창녀출신인 한 여자가 눈치 를 살피며 고개를 숙인 채 주님 앞으로 나아왔습니다. 그리고는 품안에 있던 옥합을 깨뜨리고 주님의 머리에 향유를 부었습니다. 삼 백 데나리온이나 되 는 값비싼 향유를 주님을 위해 아낌없이 드렸습니다. 그녀는 이렇게 비싼 향 유를 얻기 위해서 수 없는 치욕의 밤을 감수해야만 했던 여자였습니다. 그러 나 이 여자는 기회를 찾고 있었습니다. 새로운 인간이 될 기회, 자기의 생애 를 가장 값있는 대상에게 바쳐볼 기회를 찾고 있었습니다. 같은 날, 가롯 유다 역시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의 스승인 예수를 대제사장에게 넘겨줄 기회를 찾고 있었습니다. 여인이 깨뜨린 옥합에서 아직도 그 고귀한 향기가 채 사라지기도 전에 유다 는 그 방에서 소리 없이 사라졌습니다. 그리고는 은 삼십을 위해서 대제사장 을 찾아갔습니다. 같은 날 벌어진 이 두 사건은 너무나 큰 차이가 났습니다. 헌신의 기회를 찾는 부끄러운 여인과 배신을 통한 돈벌이의 기회를 찾는 똑 똑한 유다! 이 두 사람은 오늘 우리 들 가운데에서도 찾아볼 수 있을 것입니 다.

이 두 종류의 기회는 실상 날마다 우리 앞에 놓여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어느 쪽을 선택할 것인지는 전적으로 우리의 자유입니다. 예수께서 옥합을 깬 여인에게 "저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막 14:6)고 하시며 많 은 사람들 앞에서 그녀를 칭찬하셨습니다. 그러나 가롯 유다에 대해서는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막 14:21)고 슬 퍼하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옥합을 깬 여인이 될 것인가 주님을 배반하는 가 롯 유다가 될 것인가 선택하며 살게 됩니다. 그 여인은 주님께 향유를 부어 드렸는데 우리는 주님께 무엇을 드리겠습니까 우리의 가장 귀한 것을 드리 고 싶지 않습니까

3. 주님은 어떤 경우에도 승리하셨습니다(8-9절).

고난받는 주님이 자기를 때리는 자에게 등을 맡기고 수염을 뽑는 자 에게 뺨을 맡기고 수욕과 침 뱉음을 피하려고 얼굴을 가리지 않았던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여호와 하나님이 멀리 계시는 것이 아니라 바로 가까이 계신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었습 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와 다툴 자 누구뇨. 나와 함께 살지 어다. 나의 대적이 누구뇨. 내게 가까이 나아 올 지어다"(8절)고 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원수들에게서 피하지 않으셨습니다. 멀찍이 서 있지 않았 습니다. 오히려 가까이 오라고 소리쳤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세상에서 진리 와 공의가 숨겨지고 불의와 편법이 승리하는 것 같아도 여호와 하나님께서 살아 계 시기 때문에 종국에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진실과 정의가 이깁니다. 하나 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두려 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세상을 다 이기신 주님이 그의 마음속에 거하시기 때 문입니다. 세상에서 그 누구도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함께 계시 기 때문입니다.

요사이 IMF 관리체제에서 경제적으로 힘들어서 도저히 살 수 없다는 말을 많이 하고 우리의 체감경기가 전혀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고들 합니다. 그러나 그렇다 할지라도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을 믿고 염려하거나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없는 것도 있게 하시고 있는 것도 없게 하시는 전능하신 하 나님만 우리와 함께 계신다면 우리는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주님이 함께 하 는 사람은 어떤 경우에도 승리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담대할 수 있습니 다.

그러나 우리에게 문제는 내가 과연 여호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사람이 되 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나의 실수로 나의 허물로 혹독한 고난을 당하고 있는 것이라면 상황이 다릅니다. 허황된 욕심에 너무 함부로 회사를 확장하여 부 도를 내고 당하는 고난, 휴식도 없이 너무 무리하게 몸을 쓰다가 쓰러져서 중병을 앓는다든지, 또는 몸을 함부로 내던져 더러운 병을 앓고 있는 이들도 있습니다. 술로 몸을 버리고, 못된 성질로 가정을 파탄으로 이끌어 전혀 희 망이 없는 이들도 있습니다. 이들은 모두 자기 잘못으로 고난을 당하게 된 것입니다. 이런 경우에는 먼저 회개해야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 앞에 바로 서야 합 니다. 그리고는 주님의 자비와 도우심을 간구해야 합니다. 긍휼에 풍성하신 우리 주님은 결코 잘못을 뉘우치고 회개하는 이들의 눈물을 외면하지 않으 시고 회복의 은총을 내려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합 니다. 그 길이 승리하는 길이요 우리 인생이 형통할 수 있는 길입니다. 하나 님 앞에 바로 서는 사람은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주님은 어떤 경우에도 새벽에 기도의 자리에 서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찾았고 여호와 하나님의 주시는 것은 그 어떤 고난도 순종하였습 니다.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 은 우리를 사랑하시므로 무서운 십자가의 고난까지 당하시며 우리를 구원하 셨습니다. 이런 고마우신 주님께 우리는 무엇을 바치오리까 십자가에 달리 신 주님께 우리의 감사와 사랑의 고백과 헌신의 결단을 드리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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