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려주일]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
본문
우리가 지금 사용하고 있는 달력을 그레고리력이라고 말합니다.
전 세계의 회교국가를 비롯하여 불교국가 그리고 예수를 믿지 않는 나라까지도 이 그레고리력을 쓰는데 2001년 오늘 4월 8일은 예수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날을 기준으로 한 것입니다. 따라서 인류 역사는 크게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해서 주전과 주후로 나뉘어 지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인류역사의 주인이시고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참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는 알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실 것을 예언한 책을 구약성경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약속한 대로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셨고 다시 부활 승천하셔서 다시 오실 것을 약속한 말씀을 기록한 책을 신약성경이라고 합니다.
(창3:15)에 보면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이미 창세기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오실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어느 날 여자의 후손이 등장할 것이라고 예언을 했는데 동정녀 마리아를 통하여 탄생한 예수 그리스도 께서 구속의 길을 열어놓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또(말4:2) 보면 역사의 지평선 위에 의로운 태양이 떠오를 것이다 하는 것이 구약의 마지막 예언입니다.
1. 불신앙을 버리고 믿음의 눈으로 그리스도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구약성경을 보면 예수그리스도가 오실 것이라고 예언한 말씀이 수없이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수많은 선지들이 예수그리스도가 다시 오실 것을 예언하였는데 그 중에서도 이사야 선지자는 가장 확실하게 많은 부분을 그리스도가 오실 것을 예언한 선지자입니다. 본문(사53장)에는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에 사람들의 반응, 그리고 예수님께서 받으실 고난을 예언한 중에도 가장 확실하게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예수님은 예언의 말씀대로 세상에 오셨지만 예수님을 맞이하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극 소수였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죄 없으신 몸으로, 사랑의 본체로 오셔서 사랑을 보여 주신 분임에도 불구하고 추악한 죄인이 당하는 고난의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인류를 구원하기 위하여 오신 예수님을 왜 인간들은 깨닫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않았을까
요한 복음에는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그 빛을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참 구주 시며 예수님을 믿어야 구원받는다고 아무리 복음을 전하지만 사람들이 잘 믿지 않는 이유가 있습니다. 본문 1절에 보면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하는 말씀이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예언자는 믿지 아니하는 사람들을 향하여 안타까운 마음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수많은 선지자들이 오실 예수를 증거 하였지만 사람들이 믿지 않는 것은 불 신앙 때문입니다. 사람들의 마음속에 불 신앙이 가득하기 때문에 예언의 약속된바 예수님께서 오셨지만 믿지 않았고 그리고 지금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리라고 전하지만 불 신앙의 사람들은 여전히 믿지 아니합니다.
(요5:38)에 예수님께서는그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지 아니하니 이는 그의 보내신 자를 믿지 아니함이니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말씀이 우리를 지배하지 못하고 우리 속에 거하지 아니하며 인도하지 못하는 것은 우리가 그의 말씀을 믿지 않기 때문이라고 성경을 말합니다.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의 존재와 증거의 결핍 때문에 여호와 하나님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사야52:10)에는여호와께서 열방의 목전에서 그 거룩한 팔을 나타내셨으므로 모든 땅 끝까지도 우리 여호와 하나님의 구원을 보았도다고 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인류역사 가운데 그 팔을 나타내 보이셨지만 불 신앙으로 가득 찬 인간은 여호와 하나님을 믿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역사 하시는 그 손길을 보는 안목이 없어서 보지를 못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지상에 계신 동안 수많은 일을 행하셨습니다. 죽은 자를 살리시고 병든 자를 고치시고 앉은뱅이를 일으키시는 놀라운 일을 행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초자연적인 능력의 예수님을 보고서도 믿기를 거절하였습니다.
오늘 본문 가운데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라는 말씀의 바닥에는 안타까운 예언자의 탄식이 담겨져 있습니다. 이 불신앙은 오늘날에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는 왜 사람들로부터 버림을 받았습니까 그것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는 근본적인 불신앙 때문이었습니다.
2. 예수님은 겸손한 모습으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당시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던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실 때에는 말구유의 초라한 모습으로 오실 분이 아니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메시아가 세상에 오신다고 하면 지상에 놀라운 일이 나타날 것이고 왕처럼 세상에 임재 하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자기 백성을 로마에서 해방시킴으로 고난 중에서 건져내실 것이고 경제적인 부요와 마침내 유대인의 세상이 되는, 유대인이 천하만국을 다스리는 그러한 시대가 올 것이라고 하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기대처럼 그들이 기다리는 예수는 그런 분이 아니셨습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말씀(53:2)을 보면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출생을 생각해 보세요. 예수님의 성장과 전 생애를 관찰하여 보면 외관상으로 볼 때 특별히 뛰어난 것이 없습니다. 보통사람 이상도 아니고 어떤 측면에서는 이하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마음에 하나도 감동되는 것이 없는 그런 모습으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대하는 이상 속의 메시아와 전혀 다른 분으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의 아버지는 목수직업이었고 대부분의 친척들은 어부에 불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무식하고 가난하여 경멸받는 민중들의 애환이 서린 나사렛이라고 하는 조그마한 초라한 동네에서 유년 시절을 지내셨습니다. 연한 순 같았습니다. 조용한 침묵 가운데 소년 시절을 보내셨습니다.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까지의 예수님의 생애는 기록에 남은 것이 없고 베일 속에 가려져 있습니다. 아마 지극히 평범한 생활을 하셨던 것 같습니다. 외모도 특별한 것이 없습니다. 기록된 바 모세가 태어날 때에 성경은준수하였더라고 말씀하였고 다윗은 얼굴이 붉고 눈이 빼어나고 아름답다 그랬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외모는 우리가 생각하고 연상하는 것처럼 뛰어난 외모를 가지신 분이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또한 외관적인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는 사람들에게 매력을 주지 못합니다. 예수님의 출생, 배경, 가문, 학벌 등 자랑할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3. 예수님은 인류의 죄로 인한 질고와 슬픔 때문에 찔림과 상처를 받으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는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삶을 한마디로 말하면 간고를 많이 겪었다는 것입니다. 슬픔을 많이 겪었다는 것입니다. 질고 즉 질병을 아는 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질병에 시달리는 자의 아픔을 동정하셨습니다. 여기에서 병은 특별히 문둥병자를 말합니다. 예수님의 모습을 볼 때에 사람들은 그 얼굴을 가리웠다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문둥병자가 나타나면 얼굴을 가리우거나 돌아섭니다. 문둥병자를 보려고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외적인 모습이 그랬다는 것입니다. 마치 질병을 많이 겪은 사람이나 문둥병자 처럼 보였기 때문에 사람들이 얼굴을 가리우는 것과 같이 그러한 모습으로 예수님께서는 세상을 사셨습니다.
예수님의 생애 가운데 탁월하고 뛰어난 점은 현대인들의 세상적 안목으로는 찾기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대중들은 등을 돌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슬픔이 얼룩진 얼굴 그것은 바로 우리를 바라보시는 예수님의 얼굴이셨습니다.
그리고 본문3절의 마지막 부분에 보면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예수님을 존귀히 여기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왜 만 왕의 왕이신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과 동등하신 예수님께서 그런 초라한 모습으로 세상에 오셨을까 그리고 수난을 겪어야만 했을까 우리는 이 부분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본분4절에 보면 "질고"라는 말과 "슬픔"이라고 하는 단어가 나옵니다. 질고는 육체적인 질병을 뜻하고 슬픔은 정신적인 질병을 뜻합니다. 병은 우리에게 질고와 슬픔을 가져왔습니다. 육체적인 질병의 깊은 곳에도 죄의 문제가 도사리고 있고 정신적인 질병의 배후에도 죄의 문제가 있습니다. 죄는 우리의 육체를 헐어버리고 정신을 파괴합니다. 범죄하기 전 아담에게는 질병과 슬픔이라고 하는 것이 없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죄로 인한 질고와 슬픔 때문에 찔림과 상처를 받으셨습니다. 죄가 가져왔던 질고와 슬픔을 나사렛사람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 예수그리스도가 담당하신 것입니다.
본문5절에는 허물과 죄악이라는 단어가 특별히 나타납니다. 허물이라고 하는 것은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행한 사람들의 범죄를 말하는 것이고 죄악이라고 하는 말은 당연히 해야 할 것을 하지 못한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하라고 명한 것을 하지 못하였고 하지 말라고 명한 것을 이미 하여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의 율법을 파괴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 앞에 인간은 범법자 심판 받아 마땅한 죄인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율법으로 판단할 때에 진노와 여호와 하나님의 저주와 정죄의 대상이 되어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받으신 그 고난 속에서의 일생의 삶은 우리가 받아야 할 그 율법의 저주를 그대로 받으신 삶의 모습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허물과 죄악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찔림과 상함을 주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의 돈 있고 권력 있는 사람들을 만나시려고 오신 것이 아니라 가난하고 헐벗고 죄악으로 고통 당하는 사람들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오늘 본문의 이사야 선지자는 다시 말합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 시키셨도다왜 예수님께서 동정녀를 통하여 이 땅에 오셨습니까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무리의 죄악을 예수님에게 담당 시키셨기 때문입니다. 담당이라고 하는 말은 예수님께서 마치 죄를 범한 사람처럼 되어서 여호와 하나님께 심판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받아야 할 심판, 우리가 받아야 할 질고, 이모든 것을 예수님께서 담당하시기 위하여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여러분 양의 특성 가운데 하나는 다른 동물과 다른 점이 하나 있는데 양은 방향 감각이 둔하다는 것입니다. 다른 동물은 멀리서도 자기 집을 찾아옵니다. 그런데 양은 멀리서는 방향감각을 잃어버려 집을 찾아오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이 바로 그렇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미로를 해 매는 것처럼, 우리는 어디서부터 와서 어디로 가는지, 인생의 방향을 정하지 못하고 해 매는 양과 같이 되어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범죄한 인간, 여호와 하나님을 찾아가지도 못하는 인간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셨던 것입니다.
성경은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므로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의인은 하나도 없으며 선을 행하는 자도 하나도 없도다라고 진단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주님은 죄를 알지도 못하는 분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죄를 범한 죄인처럼 되어서 상상하기도 어려운 심판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왜 찔림을 받고 상함을 받으셨는지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허물과 죄악 때문에 예수님께서 찔림과 상함을 받으셨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4. 예수님의 찔림과 상함은 진정한 평화와 행복을 위함이었습니다.
계속해서 성경은 평화와 안식이라는 단어를 말합니다. 찔림과 상함은 우리에게 평화와 나음을 주었습니다. 인류역사상 수많은 사람들이 평화를 원했지만 진정한 평화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하는 말씀을 하셨고 예수님께서 고난을 받으심으로 인하여 우리에게 진정한 평안을 주셨습니다. 이 평안은 값없이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큰 대가를 치르고 우리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찔림과 상함이라고 하는 값비싼 대가를 치르고 우리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범죄 하여 여호와 하나님과 원수 된 우리와 여호와 하나님 사이의 평화의 다리가 되어주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상처받은 존재입니다. 죄로 인하여 상처받고 살아가면서 상처받은 사람들입니다. 암보다도 더 지독한 죄라고 하는 질병이 우리에게 있었습니다. 죄가 우리를 불행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인간들을 향하여 온 머리는 병들었고 마음은 피곤하여 졌고 발바닥에서부터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는 것이 우리의 모습이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 주님께서는 우리를 의롭다고 선언하십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안에서 평안과 행복을 맛 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인격에 여호와 하나님의 성화가 일어납니다. 의로운 태양이 되셔서 우리를 치료하기 시작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로 하여금 온전한 나음이 이루어지게 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여호와 하나님의 큰 은혜인 것입니다.
5. 예수님은 끝까지 순종하심으로 십자가를 지시고 죄악을 담당하심으로 구원을 이루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끝까지 순종하시면서 인류를 죄악에서 구원하셨습니다.
(마26:63)이하에 보면 대제사장 가야바가 온갖 어지러운 인간의 언어로 예수님을 모욕하고 더럽혔습니다. 예수님은 침묵하셨습니다. 빌라도의 고문과 심문을 받으면서도 여전히 침묵하셨습니다. 우리를 위한 침묵이었습니다. 십자가를 지시지 않으면 해결될 수 없는 우리의 죄와 영원한 심판을 보셨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수난을 겪으시기로 결심을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아버지여 할 수 있거든 이 잔을 나에게서 옮겨 주십시오. "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마셔야할 인류의 죄악이 들어 있는 잔을 보셨고 그것은 십자가라고 하는 사실을 아셨습니다. 온 인류의 죄를 짊어지시고 죽으시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죄와는 가까이 하실 수 없으신 거룩하신 분이 죄를 범한 사람처럼 되어서 십자가에 달린다고 하는 것, 할 수 있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 그러나 순간 주님의 눈앞에 스치고 지나가는 것은 수많은 인류의 얼굴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뜻대로 되시기를 기도 하셨습니다. 날이 밝았고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기까지 기도하셨던 주님, 가롯 유다의 가면적인 입마춤과 더불어 로마병정들에게 예수님은 잡혀가셨습니다. 새벽 2시경 예수님은 법정에 섰습니다. 통치자들은 거짓 증인들을 세워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사형언도를 내리게 됩니다. 그리고 새벽4시경 예수님은 다시 빌라도 앞에 끌려옵니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물었을 때 주님은 침묵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다시 헤롯왕에게 끌려갔습니다. 악독한 헤롯왕 그는 나사렛 예수라는 재물을 앞에 두고 호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하여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하였습니다. 병사들을 시켜서 홍포를 입히고 예수님의 수염을 뽑았고 서른 아홉 번의 채찍을 등에 때렸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사50:6)에나를 때리는 자들에게 내 등을 맡기며 나의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나의 뺨을 맡기며 수욕과 침 뱄음을 피하려고 내 얼굴을 가리지 아니하였노라이렇게 말합니다.
예수님은 다시 빌라도 총독 앞에 섰고 빌라도는 그분을 십자가에 내어주기로 작정하였습니다. 주님의 머리에는 가시 면류관이 씌어졌고 수십 관이나 되는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으로 오르셨습니다. 오전9시 예수님은 십자가에 높이 달리셨습니다. 하늘과 땅 사이 골도다의 언덕에 높이 매달리셨습니다. 갑자기 하늘이 어두워지고 사방이 캄캄하여 졌습니다. 주님은 보혈을 흘리면서 소리쳤습니다. "내가 목마르다! " 몹시도 괴로웠던 생의 마지막 순간 예수님께서는 "다 이루었다!" 하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다 이루었다고 하는 말은 구원의 길을 완전히 이루었다고 하는 말씀입니다. 인류의 죄악을 완전히 사하셨다고 하는 말씀입니다. 누구든지 나의 죄를 예수님께서 대신하여 십자가를 지시고 돌아가셨다고 하는 사실을 믿기만 하면 구원받을 수 있는 도리를 주님은 다 이루어 놓으신 것입니다. 이 사실을 믿기만 하면 우리는 구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예수님께서는 "내 영혼을 부탁하나이다. "하시고 잠드셨습니다. 무정한 로마병정은 예수님의 옆구리를 창으로 찔렀고 주님은 최후의 물과 피를 다 흘리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왜 찔리셨는가 왜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는가 그것은 우리 인류의 죄악 때문에 바로 나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고 하는 사실을 이번 고난 주간을 보내시면서 잊지 마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전 세계의 회교국가를 비롯하여 불교국가 그리고 예수를 믿지 않는 나라까지도 이 그레고리력을 쓰는데 2001년 오늘 4월 8일은 예수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날을 기준으로 한 것입니다. 따라서 인류 역사는 크게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해서 주전과 주후로 나뉘어 지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인류역사의 주인이시고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참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는 알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실 것을 예언한 책을 구약성경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약속한 대로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셨고 다시 부활 승천하셔서 다시 오실 것을 약속한 말씀을 기록한 책을 신약성경이라고 합니다.
(창3:15)에 보면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이미 창세기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오실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어느 날 여자의 후손이 등장할 것이라고 예언을 했는데 동정녀 마리아를 통하여 탄생한 예수 그리스도 께서 구속의 길을 열어놓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또(말4:2) 보면 역사의 지평선 위에 의로운 태양이 떠오를 것이다 하는 것이 구약의 마지막 예언입니다.
1. 불신앙을 버리고 믿음의 눈으로 그리스도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구약성경을 보면 예수그리스도가 오실 것이라고 예언한 말씀이 수없이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수많은 선지들이 예수그리스도가 다시 오실 것을 예언하였는데 그 중에서도 이사야 선지자는 가장 확실하게 많은 부분을 그리스도가 오실 것을 예언한 선지자입니다. 본문(사53장)에는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에 사람들의 반응, 그리고 예수님께서 받으실 고난을 예언한 중에도 가장 확실하게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예수님은 예언의 말씀대로 세상에 오셨지만 예수님을 맞이하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극 소수였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죄 없으신 몸으로, 사랑의 본체로 오셔서 사랑을 보여 주신 분임에도 불구하고 추악한 죄인이 당하는 고난의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인류를 구원하기 위하여 오신 예수님을 왜 인간들은 깨닫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않았을까
요한 복음에는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그 빛을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참 구주 시며 예수님을 믿어야 구원받는다고 아무리 복음을 전하지만 사람들이 잘 믿지 않는 이유가 있습니다. 본문 1절에 보면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하는 말씀이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예언자는 믿지 아니하는 사람들을 향하여 안타까운 마음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수많은 선지자들이 오실 예수를 증거 하였지만 사람들이 믿지 않는 것은 불 신앙 때문입니다. 사람들의 마음속에 불 신앙이 가득하기 때문에 예언의 약속된바 예수님께서 오셨지만 믿지 않았고 그리고 지금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리라고 전하지만 불 신앙의 사람들은 여전히 믿지 아니합니다.
(요5:38)에 예수님께서는그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지 아니하니 이는 그의 보내신 자를 믿지 아니함이니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말씀이 우리를 지배하지 못하고 우리 속에 거하지 아니하며 인도하지 못하는 것은 우리가 그의 말씀을 믿지 않기 때문이라고 성경을 말합니다.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의 존재와 증거의 결핍 때문에 여호와 하나님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사야52:10)에는여호와께서 열방의 목전에서 그 거룩한 팔을 나타내셨으므로 모든 땅 끝까지도 우리 여호와 하나님의 구원을 보았도다고 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인류역사 가운데 그 팔을 나타내 보이셨지만 불 신앙으로 가득 찬 인간은 여호와 하나님을 믿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역사 하시는 그 손길을 보는 안목이 없어서 보지를 못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지상에 계신 동안 수많은 일을 행하셨습니다. 죽은 자를 살리시고 병든 자를 고치시고 앉은뱅이를 일으키시는 놀라운 일을 행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초자연적인 능력의 예수님을 보고서도 믿기를 거절하였습니다.
오늘 본문 가운데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라는 말씀의 바닥에는 안타까운 예언자의 탄식이 담겨져 있습니다. 이 불신앙은 오늘날에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는 왜 사람들로부터 버림을 받았습니까 그것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는 근본적인 불신앙 때문이었습니다.
2. 예수님은 겸손한 모습으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당시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던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실 때에는 말구유의 초라한 모습으로 오실 분이 아니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메시아가 세상에 오신다고 하면 지상에 놀라운 일이 나타날 것이고 왕처럼 세상에 임재 하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자기 백성을 로마에서 해방시킴으로 고난 중에서 건져내실 것이고 경제적인 부요와 마침내 유대인의 세상이 되는, 유대인이 천하만국을 다스리는 그러한 시대가 올 것이라고 하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기대처럼 그들이 기다리는 예수는 그런 분이 아니셨습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말씀(53:2)을 보면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출생을 생각해 보세요. 예수님의 성장과 전 생애를 관찰하여 보면 외관상으로 볼 때 특별히 뛰어난 것이 없습니다. 보통사람 이상도 아니고 어떤 측면에서는 이하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마음에 하나도 감동되는 것이 없는 그런 모습으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대하는 이상 속의 메시아와 전혀 다른 분으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의 아버지는 목수직업이었고 대부분의 친척들은 어부에 불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무식하고 가난하여 경멸받는 민중들의 애환이 서린 나사렛이라고 하는 조그마한 초라한 동네에서 유년 시절을 지내셨습니다. 연한 순 같았습니다. 조용한 침묵 가운데 소년 시절을 보내셨습니다.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까지의 예수님의 생애는 기록에 남은 것이 없고 베일 속에 가려져 있습니다. 아마 지극히 평범한 생활을 하셨던 것 같습니다. 외모도 특별한 것이 없습니다. 기록된 바 모세가 태어날 때에 성경은준수하였더라고 말씀하였고 다윗은 얼굴이 붉고 눈이 빼어나고 아름답다 그랬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외모는 우리가 생각하고 연상하는 것처럼 뛰어난 외모를 가지신 분이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또한 외관적인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는 사람들에게 매력을 주지 못합니다. 예수님의 출생, 배경, 가문, 학벌 등 자랑할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3. 예수님은 인류의 죄로 인한 질고와 슬픔 때문에 찔림과 상처를 받으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는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삶을 한마디로 말하면 간고를 많이 겪었다는 것입니다. 슬픔을 많이 겪었다는 것입니다. 질고 즉 질병을 아는 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질병에 시달리는 자의 아픔을 동정하셨습니다. 여기에서 병은 특별히 문둥병자를 말합니다. 예수님의 모습을 볼 때에 사람들은 그 얼굴을 가리웠다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문둥병자가 나타나면 얼굴을 가리우거나 돌아섭니다. 문둥병자를 보려고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외적인 모습이 그랬다는 것입니다. 마치 질병을 많이 겪은 사람이나 문둥병자 처럼 보였기 때문에 사람들이 얼굴을 가리우는 것과 같이 그러한 모습으로 예수님께서는 세상을 사셨습니다.
예수님의 생애 가운데 탁월하고 뛰어난 점은 현대인들의 세상적 안목으로는 찾기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대중들은 등을 돌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슬픔이 얼룩진 얼굴 그것은 바로 우리를 바라보시는 예수님의 얼굴이셨습니다.
그리고 본문3절의 마지막 부분에 보면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예수님을 존귀히 여기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왜 만 왕의 왕이신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과 동등하신 예수님께서 그런 초라한 모습으로 세상에 오셨을까 그리고 수난을 겪어야만 했을까 우리는 이 부분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본분4절에 보면 "질고"라는 말과 "슬픔"이라고 하는 단어가 나옵니다. 질고는 육체적인 질병을 뜻하고 슬픔은 정신적인 질병을 뜻합니다. 병은 우리에게 질고와 슬픔을 가져왔습니다. 육체적인 질병의 깊은 곳에도 죄의 문제가 도사리고 있고 정신적인 질병의 배후에도 죄의 문제가 있습니다. 죄는 우리의 육체를 헐어버리고 정신을 파괴합니다. 범죄하기 전 아담에게는 질병과 슬픔이라고 하는 것이 없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죄로 인한 질고와 슬픔 때문에 찔림과 상처를 받으셨습니다. 죄가 가져왔던 질고와 슬픔을 나사렛사람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 예수그리스도가 담당하신 것입니다.
본문5절에는 허물과 죄악이라는 단어가 특별히 나타납니다. 허물이라고 하는 것은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행한 사람들의 범죄를 말하는 것이고 죄악이라고 하는 말은 당연히 해야 할 것을 하지 못한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하라고 명한 것을 하지 못하였고 하지 말라고 명한 것을 이미 하여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의 율법을 파괴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 앞에 인간은 범법자 심판 받아 마땅한 죄인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율법으로 판단할 때에 진노와 여호와 하나님의 저주와 정죄의 대상이 되어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받으신 그 고난 속에서의 일생의 삶은 우리가 받아야 할 그 율법의 저주를 그대로 받으신 삶의 모습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허물과 죄악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찔림과 상함을 주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의 돈 있고 권력 있는 사람들을 만나시려고 오신 것이 아니라 가난하고 헐벗고 죄악으로 고통 당하는 사람들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오늘 본문의 이사야 선지자는 다시 말합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 시키셨도다왜 예수님께서 동정녀를 통하여 이 땅에 오셨습니까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무리의 죄악을 예수님에게 담당 시키셨기 때문입니다. 담당이라고 하는 말은 예수님께서 마치 죄를 범한 사람처럼 되어서 여호와 하나님께 심판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받아야 할 심판, 우리가 받아야 할 질고, 이모든 것을 예수님께서 담당하시기 위하여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여러분 양의 특성 가운데 하나는 다른 동물과 다른 점이 하나 있는데 양은 방향 감각이 둔하다는 것입니다. 다른 동물은 멀리서도 자기 집을 찾아옵니다. 그런데 양은 멀리서는 방향감각을 잃어버려 집을 찾아오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이 바로 그렇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미로를 해 매는 것처럼, 우리는 어디서부터 와서 어디로 가는지, 인생의 방향을 정하지 못하고 해 매는 양과 같이 되어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범죄한 인간, 여호와 하나님을 찾아가지도 못하는 인간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셨던 것입니다.
성경은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므로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의인은 하나도 없으며 선을 행하는 자도 하나도 없도다라고 진단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주님은 죄를 알지도 못하는 분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죄를 범한 죄인처럼 되어서 상상하기도 어려운 심판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왜 찔림을 받고 상함을 받으셨는지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허물과 죄악 때문에 예수님께서 찔림과 상함을 받으셨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4. 예수님의 찔림과 상함은 진정한 평화와 행복을 위함이었습니다.
계속해서 성경은 평화와 안식이라는 단어를 말합니다. 찔림과 상함은 우리에게 평화와 나음을 주었습니다. 인류역사상 수많은 사람들이 평화를 원했지만 진정한 평화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하는 말씀을 하셨고 예수님께서 고난을 받으심으로 인하여 우리에게 진정한 평안을 주셨습니다. 이 평안은 값없이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큰 대가를 치르고 우리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찔림과 상함이라고 하는 값비싼 대가를 치르고 우리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범죄 하여 여호와 하나님과 원수 된 우리와 여호와 하나님 사이의 평화의 다리가 되어주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상처받은 존재입니다. 죄로 인하여 상처받고 살아가면서 상처받은 사람들입니다. 암보다도 더 지독한 죄라고 하는 질병이 우리에게 있었습니다. 죄가 우리를 불행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인간들을 향하여 온 머리는 병들었고 마음은 피곤하여 졌고 발바닥에서부터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는 것이 우리의 모습이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 주님께서는 우리를 의롭다고 선언하십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안에서 평안과 행복을 맛 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인격에 여호와 하나님의 성화가 일어납니다. 의로운 태양이 되셔서 우리를 치료하기 시작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로 하여금 온전한 나음이 이루어지게 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여호와 하나님의 큰 은혜인 것입니다.
5. 예수님은 끝까지 순종하심으로 십자가를 지시고 죄악을 담당하심으로 구원을 이루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끝까지 순종하시면서 인류를 죄악에서 구원하셨습니다.
(마26:63)이하에 보면 대제사장 가야바가 온갖 어지러운 인간의 언어로 예수님을 모욕하고 더럽혔습니다. 예수님은 침묵하셨습니다. 빌라도의 고문과 심문을 받으면서도 여전히 침묵하셨습니다. 우리를 위한 침묵이었습니다. 십자가를 지시지 않으면 해결될 수 없는 우리의 죄와 영원한 심판을 보셨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수난을 겪으시기로 결심을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아버지여 할 수 있거든 이 잔을 나에게서 옮겨 주십시오. "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마셔야할 인류의 죄악이 들어 있는 잔을 보셨고 그것은 십자가라고 하는 사실을 아셨습니다. 온 인류의 죄를 짊어지시고 죽으시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죄와는 가까이 하실 수 없으신 거룩하신 분이 죄를 범한 사람처럼 되어서 십자가에 달린다고 하는 것, 할 수 있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 그러나 순간 주님의 눈앞에 스치고 지나가는 것은 수많은 인류의 얼굴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뜻대로 되시기를 기도 하셨습니다. 날이 밝았고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기까지 기도하셨던 주님, 가롯 유다의 가면적인 입마춤과 더불어 로마병정들에게 예수님은 잡혀가셨습니다. 새벽 2시경 예수님은 법정에 섰습니다. 통치자들은 거짓 증인들을 세워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사형언도를 내리게 됩니다. 그리고 새벽4시경 예수님은 다시 빌라도 앞에 끌려옵니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물었을 때 주님은 침묵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다시 헤롯왕에게 끌려갔습니다. 악독한 헤롯왕 그는 나사렛 예수라는 재물을 앞에 두고 호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하여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하였습니다. 병사들을 시켜서 홍포를 입히고 예수님의 수염을 뽑았고 서른 아홉 번의 채찍을 등에 때렸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사50:6)에나를 때리는 자들에게 내 등을 맡기며 나의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나의 뺨을 맡기며 수욕과 침 뱄음을 피하려고 내 얼굴을 가리지 아니하였노라이렇게 말합니다.
예수님은 다시 빌라도 총독 앞에 섰고 빌라도는 그분을 십자가에 내어주기로 작정하였습니다. 주님의 머리에는 가시 면류관이 씌어졌고 수십 관이나 되는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으로 오르셨습니다. 오전9시 예수님은 십자가에 높이 달리셨습니다. 하늘과 땅 사이 골도다의 언덕에 높이 매달리셨습니다. 갑자기 하늘이 어두워지고 사방이 캄캄하여 졌습니다. 주님은 보혈을 흘리면서 소리쳤습니다. "내가 목마르다! " 몹시도 괴로웠던 생의 마지막 순간 예수님께서는 "다 이루었다!" 하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다 이루었다고 하는 말은 구원의 길을 완전히 이루었다고 하는 말씀입니다. 인류의 죄악을 완전히 사하셨다고 하는 말씀입니다. 누구든지 나의 죄를 예수님께서 대신하여 십자가를 지시고 돌아가셨다고 하는 사실을 믿기만 하면 구원받을 수 있는 도리를 주님은 다 이루어 놓으신 것입니다. 이 사실을 믿기만 하면 우리는 구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예수님께서는 "내 영혼을 부탁하나이다. "하시고 잠드셨습니다. 무정한 로마병정은 예수님의 옆구리를 창으로 찔렀고 주님은 최후의 물과 피를 다 흘리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왜 찔리셨는가 왜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는가 그것은 우리 인류의 죄악 때문에 바로 나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고 하는 사실을 이번 고난 주간을 보내시면서 잊지 마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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