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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려주일] 고난 받으신 메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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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국민일보 신문에 보니 영국 멘체스더 대학 연구팀이 첨단 법의학 기술과 컴퓨터 그래픽을 이용하여 예수님의 실제 얼굴을 복원하여 발표한 사진을 보았습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성화에서 본 예수님은 서양화가들이 자기들의 모습처럼 서양사람의 얼굴과 머리를 길게 기른 모습으로 나오지만 이번 합성사진은 1세기 유대인의 무덤에서 발견한 두개골을 토대로 그렸기 때문에 정말 예수님의 모습과 비슷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 모습은 곱슬머리에 구렛나루가 덥수룩한 흔히 상상하기에 베드로와 같은 유대인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어디까지나 상상으로 그린 것이지, 예수님의 실제 모습은 아닙니다. 아무도 예수님의 실제 모습은 알 수 없습니다.
우리가 단지 알 수 있는 것은 성경말씀에 입각해서 예수님의 모습을 가장 잘 표현한 이사야 53장의 2절 말씀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주안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체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오늘날 우리들처럼 잘 먹어서 배나오고, 얼굴에 기름기가 도는 얼굴은 아니었을 것 같고 또 십자가를 지고 가실 때에 여러 번 넘어지고 결국은 구레네 시몬이 대신 지고 간 것을 보아 풍체도 건장하지는 않았을 것으로 상상됩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이 2000년 전에 이 땅의 인류를 구원하러 오셔서 죄로 말미암아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들을 위해서 십자가에서 대신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그 것을 잊지 않기 위하여 예수님 덕분에 구원 받은 우리는 올해 또 고난주간을 지키며 주님의 고난을 기억하고 고난의 의미를 새기며 고난의 은혜를 감사하기 위하여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은 본문 말씀을 중심으로 나를 위하여 고난 받으신 예수님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1. 예수님께서는 멸시를 받았습니다.
3절 말씀을 보면 "그는 멸시를 받아서" 라고 하였습니다. 여러분 멸시 당해 보셨습니까 남자들은 군대가서 얼마나 무시당하고 멸시 당한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예수 믿으면서는 전도하다가 무시당해 본 일도 많을 것입니다.
전도지 줄 때 외면하거나 뿌리치고 가는 사람 앞에서 얼마나 무안합니까 또 불신자들이 우리를 무시하고 함부로 말하고 무시할 때 얼마나 무안합니까 그런데 멸시하는 것은 무시하는 것보다 더 심한 것입니다. 쉬운 표현으로 아주 짓이기는 것이 멸시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처럼 멸시를 당하였습니다.
왜정 때 일본인들이 걸핏하면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조센징, 빠가야로"라고 한 말이 멸시하는 말입니다. "조선놈, 바보새끼"라는 말입니다. 자기들은 힘있는 국민이니까 조선사람은 저항하지 못할 줄 알고 완전히 무시하고 욕하며 멸시한 것입니다.
 왜정 때 그 유명한 광주학생 사건은 일본 남학생이 우리나라 여학생을 멸시하고 희롱하는 것을 참지 못하여 일어난 사건입니다. 지금 우리나라도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일시키고 임금도 주지 않고 협박하고 폭행하는 자가 있다고 하는데 그러면 안됩니다. 요사이 학교에서 왕따 시키는 것도 멸시 때문에 일어나는 사건입니다.
어느 학교에서 공부도 못하고 힘없고 가난한 어느 학생을 왕따 시켜 얼마나 괴롭혔던지 견딜 수 없어 그 아이가 자살해 버린 사건이 있지 않았습니까 미국에서는 왕따 당하던 학생이 견디다 못해 분풀이로 집에서 총을 가지고 와서 무차별 사격하여 죄 없는 학생들을 여러 명 죽인 사건도 일어났습니다. 여러분 중에 누가 그렇게 어굴하게 멸시 당하면 견디겠습니까 이처럼 멸시는 견디기 힘든 것입니다.
 3절 말씀을 다시 보세요.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들에게 싫어 버린바 되었으며'라고 했습니다. 싫어 버린바 되었다는 말은 사람 취급 안 해 주었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성자 여호와 하나님이 인류를 구원하시려고 이 땅에 오셨기에 제대로 하면 여호와 하나님 대접을 받으셔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여호와 하나님 대접은커녕 사람 대접도 안 해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 내용은 사도요한이 잘 기록해 놓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10말씀에 보면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 하였다. '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고향사람들은 어떻게 하였습니까 '가난한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라고 하고 오히려 예수님을 배척하고 심지어는 예수님을 동네 낭떨어지에 떨어 뜨려 죽이려고 까지 하였습니다.
또 '간고를 많이 격었다. '고 하였습니다. 간고란 가난하여 심히 고생스러움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우리 나라 말로 하자면 헐벗고 굶주려 고생했다는 말입니다. 옛날에는 가난한 사람은 사람 취급도 받지 못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지금은 살만 하니까 가난에 대한 실감을 못 하지만 불과 지금부터 30년 전만해도 부잣집 잔치가 있으면 그냥 가서 일해주고 밥 얻어먹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때는 부잣집 아들이 가나한 집 아이를 거지 취급하고 때려줘도 그냥 맞기만 하였습니다. 그런데 2000년 전에 로마의 지배를 받던 이스라엘 땅에서 가난한 사람은 어떠하였겠습니까 그러니까 예수님의 고향사람들이 가난한 목수의 아들이라고 예수님을 멸시하고, 가난한 것이 무슨 구세주냐고 죽이려고 까지 한 것입니다.
또 얼마나 철저하게 멸시 당했느냐면 예수님이 체포되었을 때 제사장들은 예수님의 얼굴에 침을 뱉고 주먹으로 치고 손으로 뺨을 때렸습니다. 십자가에 매달아 놓고는 희롱하였습니다. 이 때는 예수님의 제자들조차도 다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갔고, 그렇게 믿음직스러웠던 베드로도 결정적인 순간에는 예수고 뭐고 다 팽개치고 도망가고 예수님을 모른다고 펄펄 뛰며 부인하였습니다.
3절 하반절에 보면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 즉,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스라엘의 메시아를 귀하게 여기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과연 우리가 예수님을 귀하게 여기고 있습니까 주일 예배 안 드리고 예식장 가고, 놀러 가는 것이 예수님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예배드리러 와도 예배 시간에 늦는 것이 예수님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또 예배드리면서 자세가 공손하지 않는 것도 예수님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왜냐면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는 마음속 깊이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여호와 하나님으로 대접하지 않는 것이 여호와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의 잘못을 되풀이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이번 고난주간에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고난 당하신 주님의 은혜를 깊이 생각하면서 무엇보다도 먼저 경건한 예배 자세를 회복하는 기회로 삼아야 하겠습니다.
2. 사람들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오해하고 있었습니다.
4절 말씀을 보면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계를 받아서 여호와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 오시기전 700여 년 전에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의 말씀인데 그 사실이 700년 후에 그대로 이루어 졌습니다. 마태복음 27:39말씀을 보면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보면서 지나가던 자들이 예수님을 모욕하며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이면 십자가에서 내려와서 네가 스스로 너를 구원하라고 하였습니다. '너를 구원하라'라는 말은 너 죄지어서 십자가 형벌을 받는구나 그렇다면 네 능력으로 내려와 보라고 한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이면 한번 내려와 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오히려 여호와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소서'라고 하였습니다. 내려올 수 없어서 못 내려온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지고 인류를 구원하는 것이 주님의 사명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죄 값으로 죽으시되 예수님의 죄로 죽으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들의 죄를 대신하여 죽으신 것입니다. 그 것도 예수님을 모욕하고 멸시하던 자들의 죄를 위하여 죽으신 것입니다. 그런데 정작 은혜받은 자들은 예수님이 자기 죄로 죽는 줄 알았던 것입니다. 그 것을 이사야 선지자는 5절 말씀에서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라고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가시면류관 쓰시고 찔린 것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고 채찍에 맞아 상한 것은 우리의 죄악 때문인 것입니다. 선지자의 예언이 정확하게 이루어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얼마든지 다른 방법으로 죽으실 수도 있는데, 가장 고통스런 방법으로 가시관 쓰고 고통 당하고 채찍 맞아 쓰라리고 온몸이 피투성이 되어 십자가에 죽으신 것조차 예언대로 된 것입니다. 그렇게 구세주 예수님께서 고난 당하심으로 우리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5절 하반절에 보면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라고 하였습니다.
 죄는 우리가 짓고 죄 값은 예수님이 당하시고 은혜는 우리가 누리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징계가 우리의 평화를 이루기 위한 목적이었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불행이 어디에 있습니까 평화가 깨지면 불행합니다. 평화가 얼마나 좋은 것입니까 여러분 평안하십니까 주님의 은혜인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희생이 없이는 평안이 없는 법입니다. 한 쪽이 평안하기 위하여 한 쪽에서는 희생이 있는 법입니다. 평안에는 대가가 있어야 합니다. 국가가 평안하기 위해서는 잠을 안자고 휴전선을 지키는 군대가 있기 때문입니다. 가정이 평안하기 위해서는 부모들의 헌신적인 희생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영혼이 평안하기 위해서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 몸을 십자가에 희생하셨습니다. 그 희생은 땀 흘리고 잠 못자고 배고픈 희생이 아니라 죽어야 되는 희생이었습니다.
2차 대전 때 독일군들은 포로 수용소에 갇혀 있던 사람들을 차례차례 죽였습니다. 어느 날 한 남자가 간수의 호출을 받았습니다. 이 때 이 사람은 살려달라고 부르짖었습니다. '나는 살아야 됩니다. 나에게는 장애인인 어린 자식이 있습니다. 내가 죽으면 그 자식을 돌봐줄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나는 살아야 됩니다. '라고 울부짖었습니다. 이 때 이것을 보고 같이 갇혀 있던 한 젊은이가 자원하였습니다. "나는 아무 부양할 가족이 없으니 대신 나를 데려가시오" 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 젊은이가 대신 끌려가 죽었고 얼마 있다가 독일군의 패배로 수용소는 열리고 울부짖던 그 남자는 살아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 후 이 사람은 자기 대신 죽은 젊은이를 생각하며 그 수용소 옆으로 이사와서 평생 하루 하루를 그 젊은이를 생각하며 감사하며 살았다고 합니다.
여러분 마찬가지로 우리가 지금 살아 있고 평화를 누리는 것도 예수님께서 그처럼 대신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나는 살았으니까 주님은 어떻게 죽었던지 관심이 없다면 사람의 도리가 아닐 것입니다. 자녀가 부모님의 은혜를 생각하지 못하면 불효한 자식입니다. 국민이 조국의 은혜를 생각하지 못 하면 불충한 백성입니다. 마찬가지로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가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지 못 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감사하지 못 하면 여호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자격이 없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자격이 없으면 여호와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자격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주님의 고난을 기억하며 지낼 이 한 주간 잃어 버렸던 주님의 십자가의 은혜를 회복하시고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도 회복하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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