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려주일] 주님이 당하신 고난
본문
그리스 신화에서 가장 유명한 이야기 중의 하나가 프로메테우스의 이야기입니다. 그 이야기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아주 옛날에 인간들은 아직 불을 가지고 있지 못했습니다. 이것을 불쌍히 여겼던 프로메테우스는 신들에게서 불을 훔쳐다가 사람들에게 갖다 주었습니다. 후에 이 사실을 알게된 제우스는 격노하여 프로메테우스를 붙잡아 오게 했습니다.
그리고는 프로메테우스를 아드리아해의 한가운데 솟은 바위에 쇠사슬로 묶어 버렸습니다. 거기에서 프로메테우스는 낮에는 뜨거운 태양열로 고통을 당하고 밤에는 혹독한 추위에 시달려야만했습니다. 게다가 제우스는 독수리 한 마리를 보내어 그의 간을 파먹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프로메테우스는 신이었기 때문에 독수리가 간을 파먹어도 죽지 않았습니다. 독수리가 간을 파먹으면 계속해서 새로운 간이 생겨나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프로메테우스는 영원히 간을 파 먹히는 고통을 당해야 했습니다.
프로메테우스가 영원히 당해야만 했던 그 형벌은 참으로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생각만 해도 끔찍하고 몸서리가 쳐지는 고통 아닙니까 생각해 보십시오. 더위나 추위는 그렇다 치더라도 날마다 독수리에게 간을 파 먹히는 고통이라니요 그것도 하루나 이틀이 아니고 영원히 그 일을 당해야 했으니 말입니다. 차라리 죽을 수만 있다면 일찌감치 죽는 것이 행복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혹시 여러분들이 다른 사람을 대신해서 이런 고통을 당해야 할 일이 생긴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아마 그 다른 사람이 부모와 형제라고 할지라도 선뜻 응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를 위해 이와 같은 고난을 받으실 분이 있다고 소개합니다. 그가 누구입니까 바로 우리 구주 예수님이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공생애 3년 기간을 고난으로 점철된 삶을 사셨습니다. 그리고 끝내는 십자가에서 모진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물론 이런 예수님의 고난이 프로메테우스가 당한 고난에 비하면 더 가볍지 않느냐, 순간적이요 짧지 않느냐 하고 반문하실 분이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프로메테우스 이야기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한낱 허구적인 이야기에 불과하지만 우리 예수님이 당하신 이 수난은 역사적인 실제였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당하신 고난은 구체적으로 어떤 고난입니까
1 여호와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습니다.
한때 우리 사회에 고시를 준비하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사회 문제가 된 적이 있었습니다.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하지도 않은 사람들이 너도나도 할 것 없이 고시에 매달렸던 것입니다.
그런데 심각했던 것은 한번 고시에 마음을 두었던 사람들이 그것을 잘 포기하지 못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자꾸만 떨어지면서도 혹시나 하는 기대를 버리지 못해서 자꾸만 도전하다가 사회에서 낙오자가 되는 사람들이 많았던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너무 많아지다 보니 그것이 심각한 사회문제로 떠올랐던 것입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합격도 못하는 고시 공부에 매달려서 인생을 낭비하는지 아십니까 그것은 바로 신분 상승의 욕구 때문인 것입니다. 몇 번 떨어지더라도 붙기만 하면 한 번에 상류 계급의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야망 때문입니다. 이해가 안되는 것도 아닙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시험에 붙기만 하면, 법관이 되어서 영감님이라고 불리게 됩니다. 그리고 돈 많고 예쁜 신부감들이 줄을 서게 됩니다. 한꺼번에 부와 명예를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생각하니 월급쟁이로 살아간다는 것이 시시하게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욱더 고시 공부에 매달리게 되는 것이지요.
성도 여러분! 사실 이것은 단순히 몇몇 사람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가 부귀와 명예를 얻고 싶어합니다. 높아지기를 바랍니다. 가난해지고 낮아지기를 진심으로 바라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래서 어쩌다가 집안이 망해서 가난해지기라도 하면 깊은 절망에 빠지게 됩니다. 어쩌다가 직장을 잃고 실업자가 되기라도 하면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충격을 견디지 못하는 사람들은 자살을 하기도 합니다.
만약, 어느 날 여러분이 직장에 출근했는데 여러분의 책상이 치워지고 자리가 없어졌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의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아마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다는 말이 실감이 날것입니다. 살아갈 일도 막막하겠거니와 낙오자가 되었다는 절망감이 더욱 견디기 힘들 것입니다.
이처럼 사람들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조그마한 것만 잃어버려도 견디지 못합니다. 그것 때문에 절망에 빠져서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게 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스스로 하늘의 보좌를 버리셨던 것입니다. 온 우주 만물을 다스리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과 위엄을 버리셨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2:6-7은 그것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근본 여호와 하나님의 본체시나 여호와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바울은 주님께서 종의 형체를 가져서 사람들과 같이 되었다고 합니다. 온 우주의 주인 되시는 분이 그 영광의 자리를 버리시고 스스로 종이 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부자였다가 가난하게 된 정도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대통령을 하던 사람이 어느 날 평범한 시민이 된 정도를 말하고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온 우주 만물을 만드시고, 그 모든 것을 다스리시던 분이 스스로 그 모든 것을 포기하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모든 것을 당신 마음대로 하실 수 있던 분이 아기가 되어서 한 인간의 손에 자신의 모든 것을 맡기셨다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천사들의 찬양과 경배를 받으시던 분이 인간들에게 멸시와 천대를 받는 보잘것없는 존재가 되기로 결심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신학 용어로 `비하'라고 표현합니다. 즉, 자기가 있어야 할 자리에 있지 못하고 천길 만길 낭떠러지로 추락하는 것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예수께서는 바로 이와 같이 하늘 영광스런 보좌에서 가장 낮고 천한 인간, 그것도 `종의 신분'으로 `추락'하신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그가 자기 땅에 오셨지만 자기 백성이 외면했다고 했습니다(요 1:11).
여러분! 이 고통과 참담함을 아시겠습니까 그 고통과 고난의 강도를 느끼실 수 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신 예수께서는 우리로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추락의 고통', '비하의 고통'을 감내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왜 그런 고통을 자원해서 받으셨습니까 그것은 바로 저와 여러분을 사랑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저와 여러분을 여호와 하나님의 품으로 인도하시고 싶으셨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뜨거운 사랑이 주님의 마음속에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인간이 되시는 고난을 선택하셨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께서는 죄로 말미암아 영원한 죽음의 길로 달려가는 우리를 차마 두고 보실 수 없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과 그의 나라에 도저히 자력으로 갈 수 없는 우리를 당신의 나라로 이끄시기 위해 예수님은 이 자기 비하의 고난을 감수하신 것입니다. 이 얼마나 감사하고 감격스런 사실입니까 그러므로 이 고난주간에 예수님의 자기 비하를 깊이 묵상하시면서 자기를 돌아보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곡히 부탁합니다.
2. 극도의 육체적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미국의 어느 목사님이 믿지 않는 농부의 집에 하숙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아침에 농부가 목사님을 부르더니 자장에 같이 가보자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따라가 보니 자장 둥우리에 암탉이 앉아있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었습니다. 암탉이 둥우리 위에 앉아 있고, 그 날개 밑에서는 병아리들이 한 마리씩 기 어나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암탉은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알고 보니 암탉이 둥우리 위에 앉은 채로 죽어 있는 것이었습니다. 목사님이 그것을 보면서 이상하게 생각하고있는데, 옆에 있는 농부가 그 이유를 설명해 주었습니다.
"저 머리에 상처를 보십시오. 족제비란 놈이 이 암탉의 몸에서 피를 다 빨아먹었는데도 그 놈이 자기 새끼들을 잡아 먹을까봐 꼼짝도 하지 않고 그대로 죽은 것입니다. "
농부의 설명을 들은 목사님은 그 자리에서 농부에게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오! 저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죽음과 같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모든 고통을 참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움직일 수도, 십자가에서 내려와 자기 생명을 구원할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당신과 내가 멸망당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 모든 수치와 고통을 참으셨던 것입니다 "
그렇습니다. 그 목사님의 말과 같이 우리 주님께서는 십자가를 피하실 수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에도 마음만 먹었다면 얼마든지 내려오실 수도 있는 능력이 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힘이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십자가에 못 박히셨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마치 암탉이 병아리들을 위해서 앉은 채로 피를 다 빨아 먹혔던 것처럼 주님께서는 그렇게 모든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로마의 군인들이 머리에 가시관을 씌우면, 가시에 찔리면서도 그냥 받아 쓰셨습니다. 손과 발에 망치로 쇠못을 때려 박는 대로 그냥 당하셨습니다. 육체를 가진 인간으로서는 차마 견딜 수 없는 고통을 모두 당하셨습니다.
알려진 바에 의하면, 십자가에 달린 사람이 당하는 고통이 이렇다고 합니다. 먼저, 쇠못이 손과 발에 박혀서 살이 찢어지고, 피가 흐르게 됩니다. 그런 상태에서 부어오른 손과 발의 고통을 당하는 가운데, 심한 두통과 갈증을 느끼게 됩니다. 또한 목의 위치가 불안정하기 때문에 호흡이 곤란해져서 숨을 쉬기가 힘들어지게 됩니다. 거기다가 한낮의 태양 볕이 머리를 내리 쬐기 때문에 그 고통의 크기는 말로 다 할 수 없을 정도가 됩니다. 그래서 로마의 정치가였던 키케로는 십자가의 형벌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간이 고안한 형벌 중 가장 잔인하고 무서운 형벌이 바로 십자가의 형벌이다. "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주님께서 당하신 십자가의 고난이 바로 이런 것이었습니다. 육체를 가진 인간이 당할 수 있는 최고의 고통이었습니다. 그것은 마치 도살장에서 양을 죽이는 모습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는 본문 7절에서 주님의 모습을 마치 '도수 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같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죄를 대속하늘 어린양이 도살되는 것처럼 죽임을 당하셨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주님께서 이렇게 고통스러운 죽임을 당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로 저와 여러분을 너무나 사랑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저와 여러분을 구원하셔서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로 삼기 위해서였습니다. 오직 그 이유 하나 때문에 주님께서 그러한 고통을 당하셨던 것입니다. 무릇 이것을 깨달은 자마다 주님을 향한 무한한 감사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위해서 고난받기를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바라기는 여러분들도 주님의 십자가를 볼 때마다 감격하고, 그 감격으로 인해 여러분들 인생 앞에 닥치는 수많은 고난의 파도를 넘어서기를 바랍니다.
3.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단절되셨습니다.
미국의 남북 전쟁이 끝난 직후에 있었던 일입니다. 아들을 전쟁터에 내보낸 어느 가정이 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아들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아들의 전화를 받은 어머니는 너무 기뻐하면서 왜 빨리 집으로 돌아오지 않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말을 들은 아들이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어머니 곧 갈 겁니다. 그런데 내 친구와 함께 가려고 합니다. 이 친구는 나와 같이 전쟁에 나갔던 친구인데 전쟁에서 부상을 입어 눈과 팔 그리고 다리가 하나씩밖에 없습니다. "
"그래, 그럼 같이 와서 며칠 있도록 해라"
"아닙니다. 어머니 오랫동안 같이 있어야합니다. 아니, 일생 동안 같이 있을 겁니다"
아들의 말을 들은 어머니는 화를 내며 말했습니다.
"너 전쟁에 나가더니 갑자기 감상주의자가 되었구나. 그런 사람과 함께 지내는 것이 쉬운 줄 아느냐"
그런데 어머니의 화난 목소리를 들은 아들은 아무 말 없이 전화를 끊었습니다. 그리고 몇 시간이 지난 후에 아들이 속해 있던 군부대에서 전보가 날아왔습니다. 당신의 아들이 옥상에서 투신 자살했으니 시신을 찾아가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어머니는 이게 무슨 날벼락인가 하면서 아들의 시신을 찾으러 갔습니다. 그런데 막상 아들의 시신을 확인한 어머니는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습니다. 바로 눈앞에 있는 아들의 시신에는 눈과 팔과 다리가 하나씩 없는 것이었습니다.
전쟁터에서 불구가 되었던 아들은 어머니가 자신을 예전과 같이 받아주시기를 기대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전화를 했던 것인데 어머니의 반응을 보건대 자신을 짐스러워하실 것이 분명했습니다. 어머니가 자신을 있는 모습 그대로 사랑하시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너무나 절망스러워 자살을 택한 것입니다. 불구가 된 자신을 어머니마저 부담스러워 하실 것이라고 생각했을 때 그는 더 이상 살아갈 이유가 없었던
이처럼 자신이 가장 의지하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거절당하는 것은 몹시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그것은 인간이 받을 수 있는 마음의 상처 가운데 가장 고통스러운 상처 중의 하나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일을 당하게 되면, 극도의 슬픔이나 좌절에 빠지게 됩니다. 그리고 때로는 그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생명을 끊기도 합니다. 혹시
여러분들 중에 사랑하는 연인에게 버림받아본 적이 있는 사람들은 그 마음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마 그때의 상처들을 지금도 잊지 못하는 분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도 바로 그런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에게 버림을 받는 고통이었습니다. 영원 전부터 함께 하시던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철저하게 거절당하시는 상상할 수 없는 아픔이었습니다. 그 고통이 얼마나 컸던지 마태복음27:46에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리신 채 크게 부르짖고 있습니다.
"제 구시 즈음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질러 가라사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여호와 하나님, 나의 여호와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그런데, 전에 주님께서는 당신께서 항상 아버지와 함께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4:11을 보십시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을 인하여 나를 믿으라"
주님께서는 당신과 여호와 하나님께서 하나이심을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와 당신이 뗄래야 뗄 수 없이 연결되신 분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님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당신을 버리셨다고 고통 중에 울부짖고 계신 것입니다. 그 고통을 어떻게 감당할 수가 없어서 소리치고 계신 것입니다.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단 말입니까 도대체 무엇 때문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버리신 것입니까 예수님께서 여호와 하나님의 뜻에 불순종하셨기 때문입니까 아니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고통이 심해서 헛소리를 하고 계시는 것입니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여호와 하나님께 버림받는 고통을 당하게 된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끊어지게 된 것은 인간들의 죄를 모두 짊어지셨기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인간들이 당해야 할 죄의 저주를 주님께서 대신해서 당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인간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여호와 하나님께로 당신이 버림받는 엄청난 고통을 감수하셨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주님께서 당하신 이 고통을 어떻게 다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이 땅에서 어떤 고통을 당한다고 해도 주님께서 당하신 이 고통에 비길 수는 없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바로 그런 주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때문에 주님께서 그러한 고통을 당할 정도의 사랑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우리도 형제와 이웃을 위해서 그리고 교회를 위해서 고난을 감수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사랑을 받은 대로 베푸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일로 자랑할 것이 아니라 그저 우리를 위해 고난 당하신 주님께 감사드리며 묵묵히 충성할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랄 뿐입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나폴레옹은 세인트헬레나 섬으로 귀향을 가서 세상을 떠나게 되었을 때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나는 수백만 대군으로 세계를 정복하려했으나 실패했다. 그러나 나사렛 예수는 단한 명의 군사도 없이 온유와 사랑으로 세계를 정복했다. 오, 갈릴리 사람이여! 당신이 이겼소!"
그렇습니다. 주님께서 오늘날 저와 여러분의 주가 되신 것은 힘을 사용하셨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나폴레옹이나 알렉산더 대왕같이 위대한 정복자였기 때문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오늘날 수많은 나라와 백성들의 주님이 되신 것은 십자가의 고난을 통해서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철저하게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하심으로 우리들의 주님이 되셨습니다. 그 고난은 여호와 하나님과 동등한 분이셨음에도 그 모든 것을 포기하시고 미천한 인간이 되신 것이었습니다. 십자가에서 온 인류의 죄를 짊어지시고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은 것입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달리셔서 죽기까지 이루 말할 수 없는 육체의 고통을 당하신 것이었습니다. 죄 없으심에도 불구하고 죄인된 인간들을 위해 당하신 그 모든 고난을 통해 인류의 모든 죄를 사하셨으므로 우리들의 주님이 되신 것입니다. 그 고난 당하심을 통해 우리를 향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애절한 사랑을 확증하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의 마음에 이러한 주님의 고난의 의미가 깊이 새겨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주님의 고난 속에 담겨져 있는 여호와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은혜가 여러분들의 가슴을 촉촉이 적실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그 사랑으로 여러분이 충만하여지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도 이 땅에서 주님과 함께 기꺼이 그의 고난에 동참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나아가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 고난의 십자가를 질 줄 아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주 옛날에 인간들은 아직 불을 가지고 있지 못했습니다. 이것을 불쌍히 여겼던 프로메테우스는 신들에게서 불을 훔쳐다가 사람들에게 갖다 주었습니다. 후에 이 사실을 알게된 제우스는 격노하여 프로메테우스를 붙잡아 오게 했습니다.
그리고는 프로메테우스를 아드리아해의 한가운데 솟은 바위에 쇠사슬로 묶어 버렸습니다. 거기에서 프로메테우스는 낮에는 뜨거운 태양열로 고통을 당하고 밤에는 혹독한 추위에 시달려야만했습니다. 게다가 제우스는 독수리 한 마리를 보내어 그의 간을 파먹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프로메테우스는 신이었기 때문에 독수리가 간을 파먹어도 죽지 않았습니다. 독수리가 간을 파먹으면 계속해서 새로운 간이 생겨나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프로메테우스는 영원히 간을 파 먹히는 고통을 당해야 했습니다.
프로메테우스가 영원히 당해야만 했던 그 형벌은 참으로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생각만 해도 끔찍하고 몸서리가 쳐지는 고통 아닙니까 생각해 보십시오. 더위나 추위는 그렇다 치더라도 날마다 독수리에게 간을 파 먹히는 고통이라니요 그것도 하루나 이틀이 아니고 영원히 그 일을 당해야 했으니 말입니다. 차라리 죽을 수만 있다면 일찌감치 죽는 것이 행복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혹시 여러분들이 다른 사람을 대신해서 이런 고통을 당해야 할 일이 생긴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아마 그 다른 사람이 부모와 형제라고 할지라도 선뜻 응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를 위해 이와 같은 고난을 받으실 분이 있다고 소개합니다. 그가 누구입니까 바로 우리 구주 예수님이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공생애 3년 기간을 고난으로 점철된 삶을 사셨습니다. 그리고 끝내는 십자가에서 모진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물론 이런 예수님의 고난이 프로메테우스가 당한 고난에 비하면 더 가볍지 않느냐, 순간적이요 짧지 않느냐 하고 반문하실 분이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프로메테우스 이야기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한낱 허구적인 이야기에 불과하지만 우리 예수님이 당하신 이 수난은 역사적인 실제였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당하신 고난은 구체적으로 어떤 고난입니까
1 여호와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습니다.
한때 우리 사회에 고시를 준비하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사회 문제가 된 적이 있었습니다.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하지도 않은 사람들이 너도나도 할 것 없이 고시에 매달렸던 것입니다.
그런데 심각했던 것은 한번 고시에 마음을 두었던 사람들이 그것을 잘 포기하지 못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자꾸만 떨어지면서도 혹시나 하는 기대를 버리지 못해서 자꾸만 도전하다가 사회에서 낙오자가 되는 사람들이 많았던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너무 많아지다 보니 그것이 심각한 사회문제로 떠올랐던 것입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합격도 못하는 고시 공부에 매달려서 인생을 낭비하는지 아십니까 그것은 바로 신분 상승의 욕구 때문인 것입니다. 몇 번 떨어지더라도 붙기만 하면 한 번에 상류 계급의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야망 때문입니다. 이해가 안되는 것도 아닙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시험에 붙기만 하면, 법관이 되어서 영감님이라고 불리게 됩니다. 그리고 돈 많고 예쁜 신부감들이 줄을 서게 됩니다. 한꺼번에 부와 명예를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생각하니 월급쟁이로 살아간다는 것이 시시하게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욱더 고시 공부에 매달리게 되는 것이지요.
성도 여러분! 사실 이것은 단순히 몇몇 사람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가 부귀와 명예를 얻고 싶어합니다. 높아지기를 바랍니다. 가난해지고 낮아지기를 진심으로 바라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래서 어쩌다가 집안이 망해서 가난해지기라도 하면 깊은 절망에 빠지게 됩니다. 어쩌다가 직장을 잃고 실업자가 되기라도 하면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충격을 견디지 못하는 사람들은 자살을 하기도 합니다.
만약, 어느 날 여러분이 직장에 출근했는데 여러분의 책상이 치워지고 자리가 없어졌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의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아마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다는 말이 실감이 날것입니다. 살아갈 일도 막막하겠거니와 낙오자가 되었다는 절망감이 더욱 견디기 힘들 것입니다.
이처럼 사람들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조그마한 것만 잃어버려도 견디지 못합니다. 그것 때문에 절망에 빠져서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게 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스스로 하늘의 보좌를 버리셨던 것입니다. 온 우주 만물을 다스리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과 위엄을 버리셨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2:6-7은 그것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근본 여호와 하나님의 본체시나 여호와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바울은 주님께서 종의 형체를 가져서 사람들과 같이 되었다고 합니다. 온 우주의 주인 되시는 분이 그 영광의 자리를 버리시고 스스로 종이 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부자였다가 가난하게 된 정도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대통령을 하던 사람이 어느 날 평범한 시민이 된 정도를 말하고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온 우주 만물을 만드시고, 그 모든 것을 다스리시던 분이 스스로 그 모든 것을 포기하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모든 것을 당신 마음대로 하실 수 있던 분이 아기가 되어서 한 인간의 손에 자신의 모든 것을 맡기셨다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천사들의 찬양과 경배를 받으시던 분이 인간들에게 멸시와 천대를 받는 보잘것없는 존재가 되기로 결심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신학 용어로 `비하'라고 표현합니다. 즉, 자기가 있어야 할 자리에 있지 못하고 천길 만길 낭떠러지로 추락하는 것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예수께서는 바로 이와 같이 하늘 영광스런 보좌에서 가장 낮고 천한 인간, 그것도 `종의 신분'으로 `추락'하신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그가 자기 땅에 오셨지만 자기 백성이 외면했다고 했습니다(요 1:11).
여러분! 이 고통과 참담함을 아시겠습니까 그 고통과 고난의 강도를 느끼실 수 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신 예수께서는 우리로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추락의 고통', '비하의 고통'을 감내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왜 그런 고통을 자원해서 받으셨습니까 그것은 바로 저와 여러분을 사랑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저와 여러분을 여호와 하나님의 품으로 인도하시고 싶으셨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뜨거운 사랑이 주님의 마음속에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인간이 되시는 고난을 선택하셨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께서는 죄로 말미암아 영원한 죽음의 길로 달려가는 우리를 차마 두고 보실 수 없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과 그의 나라에 도저히 자력으로 갈 수 없는 우리를 당신의 나라로 이끄시기 위해 예수님은 이 자기 비하의 고난을 감수하신 것입니다. 이 얼마나 감사하고 감격스런 사실입니까 그러므로 이 고난주간에 예수님의 자기 비하를 깊이 묵상하시면서 자기를 돌아보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곡히 부탁합니다.
2. 극도의 육체적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미국의 어느 목사님이 믿지 않는 농부의 집에 하숙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아침에 농부가 목사님을 부르더니 자장에 같이 가보자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따라가 보니 자장 둥우리에 암탉이 앉아있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었습니다. 암탉이 둥우리 위에 앉아 있고, 그 날개 밑에서는 병아리들이 한 마리씩 기 어나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암탉은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알고 보니 암탉이 둥우리 위에 앉은 채로 죽어 있는 것이었습니다. 목사님이 그것을 보면서 이상하게 생각하고있는데, 옆에 있는 농부가 그 이유를 설명해 주었습니다.
"저 머리에 상처를 보십시오. 족제비란 놈이 이 암탉의 몸에서 피를 다 빨아먹었는데도 그 놈이 자기 새끼들을 잡아 먹을까봐 꼼짝도 하지 않고 그대로 죽은 것입니다. "
농부의 설명을 들은 목사님은 그 자리에서 농부에게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오! 저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죽음과 같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모든 고통을 참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움직일 수도, 십자가에서 내려와 자기 생명을 구원할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당신과 내가 멸망당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 모든 수치와 고통을 참으셨던 것입니다 "
그렇습니다. 그 목사님의 말과 같이 우리 주님께서는 십자가를 피하실 수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에도 마음만 먹었다면 얼마든지 내려오실 수도 있는 능력이 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힘이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십자가에 못 박히셨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마치 암탉이 병아리들을 위해서 앉은 채로 피를 다 빨아 먹혔던 것처럼 주님께서는 그렇게 모든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로마의 군인들이 머리에 가시관을 씌우면, 가시에 찔리면서도 그냥 받아 쓰셨습니다. 손과 발에 망치로 쇠못을 때려 박는 대로 그냥 당하셨습니다. 육체를 가진 인간으로서는 차마 견딜 수 없는 고통을 모두 당하셨습니다.
알려진 바에 의하면, 십자가에 달린 사람이 당하는 고통이 이렇다고 합니다. 먼저, 쇠못이 손과 발에 박혀서 살이 찢어지고, 피가 흐르게 됩니다. 그런 상태에서 부어오른 손과 발의 고통을 당하는 가운데, 심한 두통과 갈증을 느끼게 됩니다. 또한 목의 위치가 불안정하기 때문에 호흡이 곤란해져서 숨을 쉬기가 힘들어지게 됩니다. 거기다가 한낮의 태양 볕이 머리를 내리 쬐기 때문에 그 고통의 크기는 말로 다 할 수 없을 정도가 됩니다. 그래서 로마의 정치가였던 키케로는 십자가의 형벌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간이 고안한 형벌 중 가장 잔인하고 무서운 형벌이 바로 십자가의 형벌이다. "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주님께서 당하신 십자가의 고난이 바로 이런 것이었습니다. 육체를 가진 인간이 당할 수 있는 최고의 고통이었습니다. 그것은 마치 도살장에서 양을 죽이는 모습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는 본문 7절에서 주님의 모습을 마치 '도수 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같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죄를 대속하늘 어린양이 도살되는 것처럼 죽임을 당하셨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주님께서 이렇게 고통스러운 죽임을 당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로 저와 여러분을 너무나 사랑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저와 여러분을 구원하셔서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로 삼기 위해서였습니다. 오직 그 이유 하나 때문에 주님께서 그러한 고통을 당하셨던 것입니다. 무릇 이것을 깨달은 자마다 주님을 향한 무한한 감사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위해서 고난받기를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바라기는 여러분들도 주님의 십자가를 볼 때마다 감격하고, 그 감격으로 인해 여러분들 인생 앞에 닥치는 수많은 고난의 파도를 넘어서기를 바랍니다.
3.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단절되셨습니다.
미국의 남북 전쟁이 끝난 직후에 있었던 일입니다. 아들을 전쟁터에 내보낸 어느 가정이 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아들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아들의 전화를 받은 어머니는 너무 기뻐하면서 왜 빨리 집으로 돌아오지 않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말을 들은 아들이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어머니 곧 갈 겁니다. 그런데 내 친구와 함께 가려고 합니다. 이 친구는 나와 같이 전쟁에 나갔던 친구인데 전쟁에서 부상을 입어 눈과 팔 그리고 다리가 하나씩밖에 없습니다. "
"그래, 그럼 같이 와서 며칠 있도록 해라"
"아닙니다. 어머니 오랫동안 같이 있어야합니다. 아니, 일생 동안 같이 있을 겁니다"
아들의 말을 들은 어머니는 화를 내며 말했습니다.
"너 전쟁에 나가더니 갑자기 감상주의자가 되었구나. 그런 사람과 함께 지내는 것이 쉬운 줄 아느냐"
그런데 어머니의 화난 목소리를 들은 아들은 아무 말 없이 전화를 끊었습니다. 그리고 몇 시간이 지난 후에 아들이 속해 있던 군부대에서 전보가 날아왔습니다. 당신의 아들이 옥상에서 투신 자살했으니 시신을 찾아가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어머니는 이게 무슨 날벼락인가 하면서 아들의 시신을 찾으러 갔습니다. 그런데 막상 아들의 시신을 확인한 어머니는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습니다. 바로 눈앞에 있는 아들의 시신에는 눈과 팔과 다리가 하나씩 없는 것이었습니다.
전쟁터에서 불구가 되었던 아들은 어머니가 자신을 예전과 같이 받아주시기를 기대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전화를 했던 것인데 어머니의 반응을 보건대 자신을 짐스러워하실 것이 분명했습니다. 어머니가 자신을 있는 모습 그대로 사랑하시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너무나 절망스러워 자살을 택한 것입니다. 불구가 된 자신을 어머니마저 부담스러워 하실 것이라고 생각했을 때 그는 더 이상 살아갈 이유가 없었던
이처럼 자신이 가장 의지하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거절당하는 것은 몹시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그것은 인간이 받을 수 있는 마음의 상처 가운데 가장 고통스러운 상처 중의 하나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일을 당하게 되면, 극도의 슬픔이나 좌절에 빠지게 됩니다. 그리고 때로는 그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생명을 끊기도 합니다. 혹시
여러분들 중에 사랑하는 연인에게 버림받아본 적이 있는 사람들은 그 마음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마 그때의 상처들을 지금도 잊지 못하는 분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도 바로 그런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에게 버림을 받는 고통이었습니다. 영원 전부터 함께 하시던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철저하게 거절당하시는 상상할 수 없는 아픔이었습니다. 그 고통이 얼마나 컸던지 마태복음27:46에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리신 채 크게 부르짖고 있습니다.
"제 구시 즈음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질러 가라사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여호와 하나님, 나의 여호와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그런데, 전에 주님께서는 당신께서 항상 아버지와 함께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4:11을 보십시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을 인하여 나를 믿으라"
주님께서는 당신과 여호와 하나님께서 하나이심을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와 당신이 뗄래야 뗄 수 없이 연결되신 분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님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당신을 버리셨다고 고통 중에 울부짖고 계신 것입니다. 그 고통을 어떻게 감당할 수가 없어서 소리치고 계신 것입니다.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단 말입니까 도대체 무엇 때문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버리신 것입니까 예수님께서 여호와 하나님의 뜻에 불순종하셨기 때문입니까 아니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고통이 심해서 헛소리를 하고 계시는 것입니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여호와 하나님께 버림받는 고통을 당하게 된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끊어지게 된 것은 인간들의 죄를 모두 짊어지셨기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인간들이 당해야 할 죄의 저주를 주님께서 대신해서 당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인간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여호와 하나님께로 당신이 버림받는 엄청난 고통을 감수하셨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주님께서 당하신 이 고통을 어떻게 다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이 땅에서 어떤 고통을 당한다고 해도 주님께서 당하신 이 고통에 비길 수는 없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바로 그런 주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때문에 주님께서 그러한 고통을 당할 정도의 사랑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우리도 형제와 이웃을 위해서 그리고 교회를 위해서 고난을 감수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사랑을 받은 대로 베푸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일로 자랑할 것이 아니라 그저 우리를 위해 고난 당하신 주님께 감사드리며 묵묵히 충성할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랄 뿐입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나폴레옹은 세인트헬레나 섬으로 귀향을 가서 세상을 떠나게 되었을 때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나는 수백만 대군으로 세계를 정복하려했으나 실패했다. 그러나 나사렛 예수는 단한 명의 군사도 없이 온유와 사랑으로 세계를 정복했다. 오, 갈릴리 사람이여! 당신이 이겼소!"
그렇습니다. 주님께서 오늘날 저와 여러분의 주가 되신 것은 힘을 사용하셨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나폴레옹이나 알렉산더 대왕같이 위대한 정복자였기 때문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오늘날 수많은 나라와 백성들의 주님이 되신 것은 십자가의 고난을 통해서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철저하게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하심으로 우리들의 주님이 되셨습니다. 그 고난은 여호와 하나님과 동등한 분이셨음에도 그 모든 것을 포기하시고 미천한 인간이 되신 것이었습니다. 십자가에서 온 인류의 죄를 짊어지시고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은 것입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달리셔서 죽기까지 이루 말할 수 없는 육체의 고통을 당하신 것이었습니다. 죄 없으심에도 불구하고 죄인된 인간들을 위해 당하신 그 모든 고난을 통해 인류의 모든 죄를 사하셨으므로 우리들의 주님이 되신 것입니다. 그 고난 당하심을 통해 우리를 향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애절한 사랑을 확증하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의 마음에 이러한 주님의 고난의 의미가 깊이 새겨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주님의 고난 속에 담겨져 있는 여호와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은혜가 여러분들의 가슴을 촉촉이 적실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그 사랑으로 여러분이 충만하여지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도 이 땅에서 주님과 함께 기꺼이 그의 고난에 동참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나아가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 고난의 십자가를 질 줄 아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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