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려주일] 고난을 당하신 예수님
본문
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들어오실 때 많은 무리들이 종려나무를 들고 환영한 날입니다. 모든 시민들이 기쁨으로 환영하고 있는 예수님의 모습을 살펴보면 참으로 이상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입성할 때의 백마를 타고 오시는 것이 아니라 어린 나귀새끼를 타고 오신 것입니다. 지끔까지는 짐이라고는 지어보지도 못한 약한 짐승을 타고 들어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을 태우고 성으로 들어오는 어린 나귀의 모습은 참으로 고통스러워 하는 모습일 것입니다. 아직도 짐을 지어 보지 못한 나귀가 성인을 등에 엎고 걷는 것이 참으로 보기 힘든 일입니다. 하필이면 왜 주님께서 그러한 나귀를 타고 오신 것일까요
너무 잔인한 행위는 아닙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이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신 것은 자신의 모습을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여호와 하나님의 어린양의 모습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것은 곧 세상의 모든 짐을 지고 가는 우리 주님의 모습입니다. 세상 죄를 지고 고난을 당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의 모습은 영웅의 입성이 아니라 고난의 길을 걷게 될 분의 자신의 모습을 계시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종려주일이 지나고 십자가를 지는 길을 걷게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지고 가신 분이십니다. 우리가 지고 가야할 죄 값을 대신 지신 분이십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의 말씀을 중심으로 주님의 받으신 고난을 기억하며 왜 고난을 받으셔야 했는지 그에 대한 우리의 자세는 무엇인가를 깨닫기를 원합니다.
본문이 주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첫째로, 예수님의 삶이란 고난의 삶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살아가신 길은 인간적인 눈으로만 본다면 결코 좋은 길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삶은 태어남부터 힘든 것이었습니다. 가난한 가정에서의 성장이며 공생애의 기간도 힘들고 어려운 삶이었습니다. 외적으로 본다면 예수님의 삶은 볼품이 없는 삶이었습니다. 흠모할 것이 없으신 모습이었습니다. 본문의 말씀은 예수님의 모습을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와 같다고 하였습니다.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다고 하셨습니다.
본문의 말씀만을 비추어 봐도 예수님의 삶은 질병, 찔림, 상함, 채찍에 맞음으로 표현됩니다. 주님의 삶은 십자가로 대변이 됩니다.
예수님은 그러한 삶을 살 분이 아닙니다. 영광을 받으실 여호와 하나님이셨습니다.
빌 2:6 그는 근본 여호와 하나님의 본체시나 여호와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예수님은 고난의 삶을 살지 않아도 될 분이었습니다. 그러나 고난과 가난의 길을 걸었습니다. 가장 비참한 인생을 사신 분이십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님을 표현하는 말씀가운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병치레를 많이 하셨으며 병의 고통을 아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질고를 안다는 말은 의사의 입장에서 병을 아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당한 환자의 입장에서 병의 아픔을 아는 것을 말합니다. 이를 앓아 본 사람이 그 아픔을 압니다. 고통을 맛 본 사람만이 그 고통의 진가를 압니다. 예수님은 고난의 길을 걸으심으로 우리가 당하는 고통을 알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참 모습은 아니지만 우리를 위하여 선택하신 길입니다. 우리의 행복을 위한 자신의 고난의 길을 선택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고난의 삶과 불쌍한 삶의 모습은 무엇 때문입니까 우리의 죄 때문입니다.
중학교 때까지 어머니의 모습은 별로 아름답지 않은 모습이었습니다. 언제나 큰 대야를 머리에 이고 두부와 콩나물을 배달하시는 어머니의 모습은 잘 차려입은 이웃집 아주머니에 비하면 너무나 볼 품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느날 어머니께서 한복을 곱게 입고 가슴에 브롯찌를 달고 나가는 모습을 보고 우리 어머님이 참으로 아름다운 분임을 알았습니다.
본래 그런 아름다운 분이신데 가정과 자녀를 위하여 자신의 아름다움을 희생하셨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어느날 주무시는 어머니의 발뒷꿈치를 보았습니다. 거북등과 같이 갈라진 발뒷꿈치는 이리 자녀를 위한 희생의 결과임을 느꼈습니다.
둘째로, 그분의 고난은 우리를 사랑하심의 결과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러한 길을 걷게 된 것은 분명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고난을 당하는 경우는 여러 가지입니다.
어떠한 사람은 누명을 써서 고통을 당하기도 합니다. (예) 16년간 살인 누명을 쓰고 교도소에 산 사람 (예) 모함으로 인하여 고통을 당하기도 합니다. 원하지도 않는 어려움을 당하며 오랜 세월을 보냅니다. 원하지 않지만 벗어날 수 없어서 어쩔 수 없이 고난을 당하는 이들을 보게 됩니다. 자존심 때문에 고통을 당하는 분도 있습니다. (예) 태권도 배우던 아이: 안 아파! 안 아파! 안 아파! 잉-
그러나 주님의 고난은 그렇지 않습니다. 피할 수 있는 고난이었습니다. 싫으면 그만 둘 수 있는 고통이었습니다. 자존심의 문제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기꺼이 당하셨습니다.
그러한 길을 걷게 된 동기는 우리를 향한 사랑이었습니다. 우리의 죄 값을 대신 지심으로 우리의 짐을 풀어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한 고난의 길은 모두 우리들의 허물과 죄악 때문이라고 명확하게 지적합니다. 어머니의 고생이 자식의 행복을 위한 것이듯이 예수님의 고난은 우리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주님이 대신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요일 4:9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여호와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죄인을 사랑하심으로 대신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심으로 자신의 사랑을 나타내셨습니다. 예수님의 모든 삶의 근본은 사랑이었습니다. 희생의 사랑이었습니다. 우리가 보고 있는 십자가는 사랑의 표시입니다. 어머니의 낡은 옷은 자식을 향한 사랑의 표입니다. 예수님이 당하신 고난과 그 원인을 오늘 말씀은 분명히 보여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질병을 지셨습니다. 슬픔을 당하셨습니다. 창에 찔리는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온 몸이 상하기도 하셨습니다. 채찍에 맞음으로 아픔을 당하셨습니다. 징계를 받기도 하셨습니다.
이유는 무엇입니까
우리의 허물 때문이라고 합니다. 우리의 허물로 인한 저주와 수치의 짐을 대신 지신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참으로 허물이 많습니다. 우리는 부족한 투성이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여호와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그로 인하여 세상에는 가시와 엉겅퀴가 생겼습니다. 옥토가 가시밭으로 바뀌기 시작합니다. 우리에게는 참으로 허물이 많습니다. 아무도 모르는 깊은 산 속에서 솟아오르는 샘물처럼 우리의 허물은 솟아오릅니다. 그 허물은 저주를 가지고 옵니다. 가시의 찔림을 받으셨습니다. 찔림을 받으심으로 우리의 저주가 사라집니다.
우리의 죄악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와 허물로 인하여 찔리고 상함을 받으셨습니다. 원치 않는 죄를 얼마나 많이 짓는지 모릅니다. 죄의 종으로 살아갑니다. 누구나 죄를 지으면 죄 값을 치루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값을 치루어 주시었습니다. 죄값으로 그의 몸이 상하셨습니다.
죄를 지은 자는 불안해 집니다. 죄값을 치루게 되는 자는 불안해 집니다. 재판장앞에서 그의 선고가 내려질 때까지 두려워하게 됩니다. 죄를 지은 사람은 경찰관만 보아도 불안합니다. 언제 잡힐까 어떤 판정을 받을까 걱정이 됩니다. 이러한 불안을 주님이 대신 지고 가셨습니다. 우리에게 평안을 주십니다.
그리스도 안에는 결코 정죄함이 없음을 보여 주십니다. 선한 길로 이끄실 것을 믿게 됩니다.
우리의 불안한 때문입니다. 재판장 앞에서는 불안을 대신 당하셨습니다.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림: 우리의 평화를 위한 고난을 당하신 것입니다.
우리의 질병의 아픔을 대신하기 위하여 채찍에 맞는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우리의 병의 치료를 위하여 채찍에 맞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에는 치유의 사역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우리의 몸을 건강케 하십니다. 그 분은 우리의 병을 대신 지고 가셨기 때문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주님께 짐을 맡기셨습니다. 이러한 모든 것은 그분의 사랑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모든 삶의 근본은 사랑이었습니다. 희생의 사랑이었습니다.
셋째로, 사랑의 희생이 인정을 받지를 못하였습니다.
사람이 힘들게 살아도 인정을 받으면 감당할 힘이 생깁니다. 그러나 인정을 받지 못하고 하는 일보다 힘든 일이 없습니다.
(예) 고 2 지영이가 초등 1학년 하영에게 어릴 때 잘 못한 것에 대한 사죄의 편지를 썼다.
약간의 질투심과 감정에 따른 잘못을 인정하였다. 그 때 어린 하영이가 하는 말
" 다 나를 잘 되라고 한 것인데 뭐 괜찮아!
자식이 나를 잘 되라고 한 것인데 라고 인정하여 준다면 얼마나 힘이 되겠는가
어머니 힘드시죠 그 한마디가 모든 피로를 녹인다.
그러나 예수님의 고난의 길은 인정을 받지 못하는 길이었습니다.
도리어 비난을 받으며 조롱을 당하는 길이었습니다. 배신을 당하는 길이었습니다.
우리가 살다보면 때로 배신을 당하기도 합니다. 특히 최선을 다하여 준 사람에게 배신을 다하는 것보다 힘든 일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길은 대신 고난을 당하심에도 인정받지 못할 뿐 아니라 오해까지 받았습니다.
오해까지 받으신 분이시다. 당신의 문제로 그러한 고난을 당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나를 위한 고난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하는 자녀들을 둔 부모는 참으로 마음 고생이 큰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에게서 고난을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진정한 주님의 고통이었습니다.
얼마 전에 한 시를 읽었습니다. 참으로 가슴에 와 닿는 시였습니다. 울 엄마라는 제목인데 어머니를 기억나게 하며 또 예수님을 기억나게 하는 시였습니다
울 엄마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하루 종일 밭에서 주어라 힘들게 일해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찬밥 한 덩어리로 대충 부뚜막에 앉아 점심을 때워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한 겨울 냇물에서 맨손으로 빨래를 방망이질해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배부르다. 생각 없다. 식구들 마 먹이고 굶어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발뒤꿈치 다 헤져 이불이 소리를 내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손톱이 깎을 수 조차 없이 닳고 문드러져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아버지가 화내고 자식들이 속을 썩여도 끄떡없는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외할머니가 보고 싶다. 외할머니가 보고 싶라 그것이 그냥 넋두리인줄만
한밤중에 자다 깨어 방구석에서 한없이 소리 죽여 울던 엄마를 본 후론- 아!
엄마는 그러면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다시 한 번 주님의 고난의 의미, 나를 위한 고난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마져도 버렸습니다. 우리도 그를 귀중히 여기지 않았다.
오해까지 받으신 분이시다. 당신의 문제로 그러한 고난을 당한다는 사실을깨달아야 합니다.
나를 위한 고난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하는 자녀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러한 오해에 상관하지 않았습니다. 몰라줘도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오직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걸었습니다.
고난을 당하시는 주님의 모습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원망도 하지 않습니다. 변명도 하지 않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맡기신 일에 순종함으로 감당하신 분이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인정만을 바라고 그 길을 걸으셨습니다.
잠잠한 양과 같이 입을 열지 않으셨다. 오직 우리의 행복만을 바라시며 친히 담담히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주님으로 인하여 새롭게 살게 되었습니다. 그의 은혜로 인하여 저주의 사슬을 끊고 복된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은혜를 누리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괴로움과 불안을 던져 버리고 평안을 누리며 살게 되었습니다. 죄와 사망에서 자유함을 얻게 되었습니다.
오직 주님만 의지하며 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부모의 희생을 통하여 자녀들이 행복을 누리듯이 우리 주님의 십자가의 공로로 우리는 복된 삶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공로를 잊어서도 안되며 그의 공로가 헛되이 되어서도 안됩니다. 이제 우리는 그 분의 은혜를 누리며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풍성한 은혜를 누리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20010408-4
넷째로. 은혜를 아는 사람들의 자세는 어떠한 것입니까
은혜를 받은 우리의 자세는 어떠하여야 합니까
그의 고난을 기억하여야 합니다. 은혜로 사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항상 감사하여야 합니다. 은혜 받은 자답게 살아야 합니다.
교만을 버려야 합니다.
그의 고난이 헛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은혜를 받을 줄 알아야 합니다. 부모님이 도와줄 때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여야 합니다.
은혜의 강물을 마음껏 누려야 합니다. 자식이 부모님이 벌어주신 것을 가지고 잘 성장할 수 있고 성숙할 수 있다면 그것은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는 것입니다.
마음껏 구하여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마음껏 기도함으로 응답을 받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도 고난의 길을 걸어야 합니다. 사랑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제 우리도 십자가를 지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누군가 십자가를 질 때 세상은 살아납니다.
이제 우리가 주님의 십자가를 지고 걸어야 할 때입니다.
수고하는 농부가 있음으로 세상사람들은 먹고 삽니다. 땀을 흘리며 옷을 짜는 사람이 있기에 먼진 옷을 입고 살 수 있게 됩니다.
이제 주님은 우리에게 자신을 따르라고 명령하십니다.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을 태우고 성으로 들어오는 어린 나귀의 모습은 참으로 고통스러워 하는 모습일 것입니다. 아직도 짐을 지어 보지 못한 나귀가 성인을 등에 엎고 걷는 것이 참으로 보기 힘든 일입니다. 하필이면 왜 주님께서 그러한 나귀를 타고 오신 것일까요
너무 잔인한 행위는 아닙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이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신 것은 자신의 모습을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여호와 하나님의 어린양의 모습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것은 곧 세상의 모든 짐을 지고 가는 우리 주님의 모습입니다. 세상 죄를 지고 고난을 당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의 모습은 영웅의 입성이 아니라 고난의 길을 걷게 될 분의 자신의 모습을 계시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종려주일이 지나고 십자가를 지는 길을 걷게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지고 가신 분이십니다. 우리가 지고 가야할 죄 값을 대신 지신 분이십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의 말씀을 중심으로 주님의 받으신 고난을 기억하며 왜 고난을 받으셔야 했는지 그에 대한 우리의 자세는 무엇인가를 깨닫기를 원합니다.
본문이 주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첫째로, 예수님의 삶이란 고난의 삶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살아가신 길은 인간적인 눈으로만 본다면 결코 좋은 길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삶은 태어남부터 힘든 것이었습니다. 가난한 가정에서의 성장이며 공생애의 기간도 힘들고 어려운 삶이었습니다. 외적으로 본다면 예수님의 삶은 볼품이 없는 삶이었습니다. 흠모할 것이 없으신 모습이었습니다. 본문의 말씀은 예수님의 모습을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와 같다고 하였습니다.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다고 하셨습니다.
본문의 말씀만을 비추어 봐도 예수님의 삶은 질병, 찔림, 상함, 채찍에 맞음으로 표현됩니다. 주님의 삶은 십자가로 대변이 됩니다.
예수님은 그러한 삶을 살 분이 아닙니다. 영광을 받으실 여호와 하나님이셨습니다.
빌 2:6 그는 근본 여호와 하나님의 본체시나 여호와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예수님은 고난의 삶을 살지 않아도 될 분이었습니다. 그러나 고난과 가난의 길을 걸었습니다. 가장 비참한 인생을 사신 분이십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님을 표현하는 말씀가운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병치레를 많이 하셨으며 병의 고통을 아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질고를 안다는 말은 의사의 입장에서 병을 아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당한 환자의 입장에서 병의 아픔을 아는 것을 말합니다. 이를 앓아 본 사람이 그 아픔을 압니다. 고통을 맛 본 사람만이 그 고통의 진가를 압니다. 예수님은 고난의 길을 걸으심으로 우리가 당하는 고통을 알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참 모습은 아니지만 우리를 위하여 선택하신 길입니다. 우리의 행복을 위한 자신의 고난의 길을 선택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고난의 삶과 불쌍한 삶의 모습은 무엇 때문입니까 우리의 죄 때문입니다.
중학교 때까지 어머니의 모습은 별로 아름답지 않은 모습이었습니다. 언제나 큰 대야를 머리에 이고 두부와 콩나물을 배달하시는 어머니의 모습은 잘 차려입은 이웃집 아주머니에 비하면 너무나 볼 품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느날 어머니께서 한복을 곱게 입고 가슴에 브롯찌를 달고 나가는 모습을 보고 우리 어머님이 참으로 아름다운 분임을 알았습니다.
본래 그런 아름다운 분이신데 가정과 자녀를 위하여 자신의 아름다움을 희생하셨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어느날 주무시는 어머니의 발뒷꿈치를 보았습니다. 거북등과 같이 갈라진 발뒷꿈치는 이리 자녀를 위한 희생의 결과임을 느꼈습니다.
둘째로, 그분의 고난은 우리를 사랑하심의 결과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러한 길을 걷게 된 것은 분명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고난을 당하는 경우는 여러 가지입니다.
어떠한 사람은 누명을 써서 고통을 당하기도 합니다. (예) 16년간 살인 누명을 쓰고 교도소에 산 사람 (예) 모함으로 인하여 고통을 당하기도 합니다. 원하지도 않는 어려움을 당하며 오랜 세월을 보냅니다. 원하지 않지만 벗어날 수 없어서 어쩔 수 없이 고난을 당하는 이들을 보게 됩니다. 자존심 때문에 고통을 당하는 분도 있습니다. (예) 태권도 배우던 아이: 안 아파! 안 아파! 안 아파! 잉-
그러나 주님의 고난은 그렇지 않습니다. 피할 수 있는 고난이었습니다. 싫으면 그만 둘 수 있는 고통이었습니다. 자존심의 문제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기꺼이 당하셨습니다.
그러한 길을 걷게 된 동기는 우리를 향한 사랑이었습니다. 우리의 죄 값을 대신 지심으로 우리의 짐을 풀어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한 고난의 길은 모두 우리들의 허물과 죄악 때문이라고 명확하게 지적합니다. 어머니의 고생이 자식의 행복을 위한 것이듯이 예수님의 고난은 우리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주님이 대신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요일 4:9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여호와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죄인을 사랑하심으로 대신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심으로 자신의 사랑을 나타내셨습니다. 예수님의 모든 삶의 근본은 사랑이었습니다. 희생의 사랑이었습니다. 우리가 보고 있는 십자가는 사랑의 표시입니다. 어머니의 낡은 옷은 자식을 향한 사랑의 표입니다. 예수님이 당하신 고난과 그 원인을 오늘 말씀은 분명히 보여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질병을 지셨습니다. 슬픔을 당하셨습니다. 창에 찔리는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온 몸이 상하기도 하셨습니다. 채찍에 맞음으로 아픔을 당하셨습니다. 징계를 받기도 하셨습니다.
이유는 무엇입니까
우리의 허물 때문이라고 합니다. 우리의 허물로 인한 저주와 수치의 짐을 대신 지신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참으로 허물이 많습니다. 우리는 부족한 투성이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여호와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그로 인하여 세상에는 가시와 엉겅퀴가 생겼습니다. 옥토가 가시밭으로 바뀌기 시작합니다. 우리에게는 참으로 허물이 많습니다. 아무도 모르는 깊은 산 속에서 솟아오르는 샘물처럼 우리의 허물은 솟아오릅니다. 그 허물은 저주를 가지고 옵니다. 가시의 찔림을 받으셨습니다. 찔림을 받으심으로 우리의 저주가 사라집니다.
우리의 죄악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와 허물로 인하여 찔리고 상함을 받으셨습니다. 원치 않는 죄를 얼마나 많이 짓는지 모릅니다. 죄의 종으로 살아갑니다. 누구나 죄를 지으면 죄 값을 치루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값을 치루어 주시었습니다. 죄값으로 그의 몸이 상하셨습니다.
죄를 지은 자는 불안해 집니다. 죄값을 치루게 되는 자는 불안해 집니다. 재판장앞에서 그의 선고가 내려질 때까지 두려워하게 됩니다. 죄를 지은 사람은 경찰관만 보아도 불안합니다. 언제 잡힐까 어떤 판정을 받을까 걱정이 됩니다. 이러한 불안을 주님이 대신 지고 가셨습니다. 우리에게 평안을 주십니다.
그리스도 안에는 결코 정죄함이 없음을 보여 주십니다. 선한 길로 이끄실 것을 믿게 됩니다.
우리의 불안한 때문입니다. 재판장 앞에서는 불안을 대신 당하셨습니다.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림: 우리의 평화를 위한 고난을 당하신 것입니다.
우리의 질병의 아픔을 대신하기 위하여 채찍에 맞는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우리의 병의 치료를 위하여 채찍에 맞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에는 치유의 사역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우리의 몸을 건강케 하십니다. 그 분은 우리의 병을 대신 지고 가셨기 때문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주님께 짐을 맡기셨습니다. 이러한 모든 것은 그분의 사랑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모든 삶의 근본은 사랑이었습니다. 희생의 사랑이었습니다.
셋째로, 사랑의 희생이 인정을 받지를 못하였습니다.
사람이 힘들게 살아도 인정을 받으면 감당할 힘이 생깁니다. 그러나 인정을 받지 못하고 하는 일보다 힘든 일이 없습니다.
(예) 고 2 지영이가 초등 1학년 하영에게 어릴 때 잘 못한 것에 대한 사죄의 편지를 썼다.
약간의 질투심과 감정에 따른 잘못을 인정하였다. 그 때 어린 하영이가 하는 말
" 다 나를 잘 되라고 한 것인데 뭐 괜찮아!
자식이 나를 잘 되라고 한 것인데 라고 인정하여 준다면 얼마나 힘이 되겠는가
어머니 힘드시죠 그 한마디가 모든 피로를 녹인다.
그러나 예수님의 고난의 길은 인정을 받지 못하는 길이었습니다.
도리어 비난을 받으며 조롱을 당하는 길이었습니다. 배신을 당하는 길이었습니다.
우리가 살다보면 때로 배신을 당하기도 합니다. 특히 최선을 다하여 준 사람에게 배신을 다하는 것보다 힘든 일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길은 대신 고난을 당하심에도 인정받지 못할 뿐 아니라 오해까지 받았습니다.
오해까지 받으신 분이시다. 당신의 문제로 그러한 고난을 당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나를 위한 고난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하는 자녀들을 둔 부모는 참으로 마음 고생이 큰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에게서 고난을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진정한 주님의 고통이었습니다.
얼마 전에 한 시를 읽었습니다. 참으로 가슴에 와 닿는 시였습니다. 울 엄마라는 제목인데 어머니를 기억나게 하며 또 예수님을 기억나게 하는 시였습니다
울 엄마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하루 종일 밭에서 주어라 힘들게 일해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찬밥 한 덩어리로 대충 부뚜막에 앉아 점심을 때워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한 겨울 냇물에서 맨손으로 빨래를 방망이질해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배부르다. 생각 없다. 식구들 마 먹이고 굶어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발뒤꿈치 다 헤져 이불이 소리를 내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손톱이 깎을 수 조차 없이 닳고 문드러져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아버지가 화내고 자식들이 속을 썩여도 끄떡없는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외할머니가 보고 싶다. 외할머니가 보고 싶라 그것이 그냥 넋두리인줄만
한밤중에 자다 깨어 방구석에서 한없이 소리 죽여 울던 엄마를 본 후론- 아!
엄마는 그러면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다시 한 번 주님의 고난의 의미, 나를 위한 고난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마져도 버렸습니다. 우리도 그를 귀중히 여기지 않았다.
오해까지 받으신 분이시다. 당신의 문제로 그러한 고난을 당한다는 사실을깨달아야 합니다.
나를 위한 고난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하는 자녀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러한 오해에 상관하지 않았습니다. 몰라줘도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오직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걸었습니다.
고난을 당하시는 주님의 모습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원망도 하지 않습니다. 변명도 하지 않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맡기신 일에 순종함으로 감당하신 분이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인정만을 바라고 그 길을 걸으셨습니다.
잠잠한 양과 같이 입을 열지 않으셨다. 오직 우리의 행복만을 바라시며 친히 담담히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주님으로 인하여 새롭게 살게 되었습니다. 그의 은혜로 인하여 저주의 사슬을 끊고 복된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은혜를 누리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괴로움과 불안을 던져 버리고 평안을 누리며 살게 되었습니다. 죄와 사망에서 자유함을 얻게 되었습니다.
오직 주님만 의지하며 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부모의 희생을 통하여 자녀들이 행복을 누리듯이 우리 주님의 십자가의 공로로 우리는 복된 삶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공로를 잊어서도 안되며 그의 공로가 헛되이 되어서도 안됩니다. 이제 우리는 그 분의 은혜를 누리며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풍성한 은혜를 누리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20010408-4
넷째로. 은혜를 아는 사람들의 자세는 어떠한 것입니까
은혜를 받은 우리의 자세는 어떠하여야 합니까
그의 고난을 기억하여야 합니다. 은혜로 사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항상 감사하여야 합니다. 은혜 받은 자답게 살아야 합니다.
교만을 버려야 합니다.
그의 고난이 헛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은혜를 받을 줄 알아야 합니다. 부모님이 도와줄 때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여야 합니다.
은혜의 강물을 마음껏 누려야 합니다. 자식이 부모님이 벌어주신 것을 가지고 잘 성장할 수 있고 성숙할 수 있다면 그것은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는 것입니다.
마음껏 구하여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마음껏 기도함으로 응답을 받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도 고난의 길을 걸어야 합니다. 사랑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제 우리도 십자가를 지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누군가 십자가를 질 때 세상은 살아납니다.
이제 우리가 주님의 십자가를 지고 걸어야 할 때입니다.
수고하는 농부가 있음으로 세상사람들은 먹고 삽니다. 땀을 흘리며 옷을 짜는 사람이 있기에 먼진 옷을 입고 살 수 있게 됩니다.
이제 주님은 우리에게 자신을 따르라고 명령하십니다.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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