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려주일] 그리스도의 고난
본문
낙타는 하루를 시작하고 마칠 때마다 주인 앞에 무릎을 꿇는다고 합니다. 즉, 하루를 보내고 일을 끝마칠 시간이 되면 낙타는 주인 앞에 무릎을 꿇고 등에 있는 짐이 내려지길 기다리며, 또 새날이 시작되면 또다시 주인 앞에 무릎을 꿇고 주인이 얹어 주는 짐을 짊어지는 것입니다. 주인은 낙타의 사정을 잘 압니다.
그렇기 때문에 낙타가 짊어질 수 있을 만큼만 짐을 얹어 줍니다. 낙타는 주인이 얹어 주는 짐을 마다하지 않습니다. 낙타는 당신입니다. 그리고 주인은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당신의 형편을 누구보다도 잘 아십니다. 그리고 당신이 짊어질 수 있을 만큼 당신에게 짐을 얹어 주십니다. 이 때 당신은 어떤 모습으로 짐을 받으십니까 낙타와 같은 겸손한 모습입니까 낙타의 운명은 짐을 지는 고난이 있습니다. 이 짐을 지는 고난이 없으면 주인에게 사랑을 받을 수 없습니다.
이 같이 우리에게도 고난의 짐이 있습니다.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심지어 예수님까지도 당신에게 주신 짐이 있어 이 짐을 잘 짐으로 구주가 되신 것입니다.
1 그리스도에게도 고난의 짐이 있습니다.
인간은 누구에게도 다 고난이 있습니다. 고난이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고난이 없다고 하면 그는 신이지 사람은 아닐 것입니다. 아담의 후예는 누구에게나 다 고난이 있습니다. 행여 고난이 없는 것처럼 보일는지 모르나 고난이 감추어진 것이지 실상은 고난이 있습니다. 재물로 가려지고 웃음으로 가려지고 권력으로 가려지고 화려한 의상으로 가려지는 아름다운 미모로도 가려지기도 합니다.
산다고 하는 것이 고난입니다. 삶 자체가 고난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살기 위해서는 먹어야 하고 마셔야하고 잠자야하고 일해야 하고 활동하여야 합니다. 인생은 고해라고 하였습니다.
베토벤 어머니의 고난
어느 대학 교수가 학생들에게 물었다. "사내는 알코올 중독자로 가구를 내다 팔아 술을 마시고 술 마실 돈이 없으면 아내를 두들겨 팼다. 거기다가 그 아내는 폐결핵에 걸려 콜록거린다. 그들은 셋방살이 형편이다. 그런데 아내가 임신을 했다. 여러분에게 묻겠는데 이 임신된 태아를 어떻게 해야 할까" 학생 하나가 재빠르게 손을 들고 일어서서 단호하게 대답했다. "낙태시켜야 합니다. " 대학 교수가 말했다.
"자네는 금방 베토벤을 죽였네!" 베토벤을 낳은 어머니는 그가 어렸을 때 지병인 폐결핵으로 죽었다. 그는 11살 때부터 극장을 돌며 구걸 예술을 해야만 했다. 거기다가 그는 서른 살 때 음악가의 생명인 귀를 잃었다. 그의 음악은 강한 주제를 지니고 있으며 대부분 끝부분에 가서는 환희를 노래한다. 고통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그의 고백대로 그는 "괴로움을 뚫고 나가서 기쁨을 발견"한 것이다. 로망 롤랑이 쓴 베토벤의 전기를 읽어보면 그는 나이가 들고 성공할수록 깊은 신앙의 세계에 빠졌다. 신앙이 그를 모든 파괴적이고 체념적인 불행의 조건에서 구출하여 높은 경지로 인도한 것이다. 고난은 불행과 동의어가 아니다. 오히려 고난은 신앙과 만날 때 가치와 행복의 어머니가 된다.
베토벤 하면 우리가 기억되는 것은 훌륭한 음악가로서 하려한 배경가운데서 성장하여 훌륭한 음악가로서 탄생한 것으로 알지만 그는 그의 삶의 한 가운데는 고난 그 자체입니다. 이같이 이 세상은 고난이 만연된 것을 생각합니다. 아담이후 그의 후예들은 고난 가운데 탄생하여 고난으로 마치는 것이 인생입니다.
어른들의 말을 들어 보면 나의 고생당한 것 누가 알아 하늘이나알고 땅이나 안다고 한다. 내 고생한 이야기 소설을 쓴다고 하면 몇권을 쓸 것이라고 한다.
사랑하는 우리 주님도 예외는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어린 시절에도 볼 것이면 그의 탄생서부터 고난의 탄생입니다.
말구유에서 탄생하여 자라나온 과정을 생각하면 훌륭하고 화려한 삶을 산 사람은 아닙니다. 나면서 애급으로 피난길에 서야하고 다시금 돌아온 그는 넉넉지 않은 아버지 목수의 직업을 따라 도와야하고 아버지가 돌아간 후에는 가족을 부양해야하는 고생스러운 삶을 이어가야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공생애에 나간 후에는 수많은 대중들에게 좋은 일을 많이 했습니다. 기적을 행하기도 하였습니다. 그토록 많은 선행을 하여도 그에게 박수갚채로 영접하지 않고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그의 행동을 하나 하나 주시하면서 어떤 잘못을 범하지 않는가고 살피는 가운데 흠집과 트집을 잡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선행을 하여도 환영 받지 못하고 기적을 행하여 치병을 받아도 차가운 시선으로 대하는 유대인들을 생각하면 그는 얼마나 마음 아팠을까 하는 생각을 가져본다.
그의 생 자체는 고난입니다. 마지막 십자가의 못을 밖아 죽어야 하는 순간을 맞는 그에게 불행스러운 고난의 길을 간 사람이라 본다.
인간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했으매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였다고 말합니다. 그러으로 죄가 있는 사람은 값을 지불해야하고 죄인은 죄로부터 오는 고난을 당해야 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예수님도 여호와 하나님이시지만 그는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인간과 같이 고난을 당하셔야 했습니다.
본문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고난
사 53:2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3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1)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다.
2) 인간에게 버림 받은 사람이다.
3) 모든 사람들을 귀히 여기지 않았다고 하였다.
이 말은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이요 인간의 구주로 오셨지만 전연 알아 주지 않는 형편에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이 것이 고난당한 사건이다.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고난스러움을 말하는 것이다.
자기 땅에 왔는데도 알아주지 않고 주인으로 왔는데 종이 알지 못하고 남편으로 왔는데 아내는 알아주지 않는다. 아버지인데도 아들은 몰라주는 것이다. 이 것 보다 더 고난스러운 일이 있을까 하는 이야기이다.
아들이 치매에 걸렸는데 안하무인이다. 아버지의 아픔이 얼마나 했을까 하는 것을 생각하자.
2 그리스도의 고난은 자신의 짐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들이 고난당하는 것은 자신을 위하여 당하는 고난이다. 즉 자신 때문이요 자신이 저지른 잘못으로 인한 고난당하는 것이다.
아담이후 인간은 그의 죄악에 동참하여 그의 허리에 있었던 인간들은 아담의 허리 안에 있음으로 그의 지은 죄가 전가하여 원죄를 이루어 이로 인한 고난당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리고 잡음 죄로 인한 가지가지의 사연으로 고난당하는 것이 인간의 고난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자신이 죄를 짓지도 않고 죄를 물려 받지도 않으에도 불구하고 고난당하신 분입니다. 그의 고난 받은 것은 자신을 위해 받는 고난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죄를 대신한 고난당하신 것에 우리의 시선을 모아야 하겠습니다. 신학적인 용어로서는 대속의 고난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분은 인간이지만 죄는 없으신 분입니다. 또한 누구에게서 전가 받은 죄가 없으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원죄와 잡음 죄가 없으신 분입니다. 그런 분이 당하신 고난은 대속의 고난임을 알아야 한다. 다시 말해서 그분은 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당하는 고난이 있다는 것은 죄 있는 사람을 대신하여 고난당하셨다는 것이다. 바로 구주 예수님은 나의 죄를 대신하시기 때문에 고난당하신 것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본문에 보면 사 53:4-6
1) 우리의 질고와 슬픔과 징벌을 담당하였다. 4절
2) 우리의 허물과 죄악으로 당하신 고난이시다. 5절
3) 그릇된 길로 간 우리를 위하여 고난이시다. 6절
3 그리스도의 대속의 고난의 모습입니다.
7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8 그가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갔으니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산 자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받을 내 백성의 허물을 인함이라 하였으리요 9 그는 강포를 행치 아니하였고 그 입에 궤사가 없었으나 그 무덤이 악인과 함께 되었으며 그 묘실이 부자와 함께 되었도다
이 말씀은 고난당하신 예수님의 태도입니다. 같은 사건이라도 사람마다 태도가 다릅니다. 한 사람이 죽을 암 병이나 고질병이 걸렸습니다. "이제 나는 죽는구나. "
낙망합니다. 부모를 원망합니다. 짜증납니다. 그리고는 많은 사람에 게 시비를 겁니다. 만사가 끝장이라고 말합니다. 스스로 절망의 구덩이에 빠져들어만 갑니다. 결국 육신만 죽어가지 아니하고 영혼까지 죽는 불행한 인생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 사람이 중 한 병에 걸렸습니다. 그는 말 합니다.
"인생은 약한 존재야" 그러면서 인생의 약한 존재의 의미를 배우니까 겸손해 질 것입니다. 내가 병든 것은 내 잘못이야 내 허물 때문이야 이렇게 죄를 깨닫고 보니 회개할 길이 열립니다. 그리고 "인생은 믿을 수가 없어" 생각하게 되니까 여호와 하나님만 의지하게 됩니다.
"여호와 하나님 저를 살려 주세요. 그리하면 이후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일을 위하여 충성하겠나이다. "
믿음이 생겨난다는 말입니다. 마침내 이 사람은 그 영혼도 살고 육신도 살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지실 십자가를 눈앞에 두고 어찌했습니까 그의 태도가 우리에 게 교훈을 줍니다. 7절 "그가 곤욕 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 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이 부분을 믿음 생활하는 우리 모두가 눈여겨보아야 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어찌 합니까 입을 열어야 할 때에 잠잠하고 입을 열지 않아야 할 때에 너무 입을 열어서 탈일 때가 많지 않습니까.
입을 열 바에야 성도들은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다섯 가지 입을 열어야 합니다.
눈을 감으면 기도의 입을 열고
눈을 뜨면 감사와 찬송의 입
불쌍한 사람들을 보면 구제의 입
죄인들이 망하는 것을 보면 전도의 입
때가 되어 천국가게 되면 여호와 하나님 앞에 보고의 입이 열려야 합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예수님처럼 입을 꼭 다무는 경건한 훈련도 해야 합니다. 자랑하는 입, 잘못을 핑계 하는 입, 욕심을 채우기 위한 입, 책임을 전가하는 입을 열지 말고 특별히 형제를 헐뜯는 입을 열지 말아야 합니다.
교회의 부흥이 되지 않은 일이 있든지 아니면 병든 것을 보는 일이 있을 때 어떤 태도가 있습니까 입이 근질근질한다.
병들면 약이 많다고 한다. 의원도 많고 좋은 의사도 많다.
교회의 부흥되지 않는 원인은 자신에게 있음을 알아야 한다. 무엇대문에 누구 때문에 탓도 많고 비난도 많다. 모두가 내 탓임을 알고 조용히 침묵으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는 아름다운 계기가 마련되기를 바랍니다.
지금 고난주간에 우리에게 보여주신 주님의 태도는 무엇입니 까
주님의 침묵을 배울 수가 있습니다. 원수들이 예수님의 얼굴에 침을 뱉고 주먹으로 치고 손바닥으로 때렸습니다. 그런데 입을 다무신 주님 너무 신기하지 않습니까.
눅23:1-2에 보면 예수님을 고소했습니다.
1) 백성을 미혹하는 사람
2) 세금을 가이사에게 바치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3) 자칭왕이라고 하였다. 이 같은 것은 유대인들이 지어낸 허무맹랑한 고소 내용이다. 전연 근거가 없는 고소 사건이다. 무고로 고소할 수 있는 주님이시지만 침묵했다.
예수님께 무슨 죄가 있다는 말입니까. 그런데도 입을 열지 아니했다.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과 같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괴로워도 억울해도 입을 열지 아니 했는데 왜 그랬을까요
1) 재판장은 여호와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2) 사랑 때문이다. 그의 사랑 때문입니다. 가슴에서 치밀어 오르는 사랑이 입을 다물게 한 것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자기를 못박는 무리를 보고 탓하지 아니했습니다. 시비를 걸지 아니했습니다. 그 저 "저들의 죄를 사하여주옵소서"
3) 무지하기 때문에 참았습니다.
저들이 알지 못하오니 용서하여 달라고 가상칠언 가운데 한 말씀으로 용서를 빌었던 것입니다. 고난을 감수하고 눈물을 꾹 삼키면서 기도했을 뿐입니다. 우리 모두는 믿음 생활하면서 이것을 본 받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면 우 리에게 복이 될 것입니다.
맺는 말
고난당하신 결과입니다. 12절을 보면 "내가 그로 존귀한 자 와 함께 분깃을 얻게 하며"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예수님으로 하여금 십자가 고난 그것으로 끝나 버리게 하지 아니하시고 마침내는 승리하도록 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섭리를 소개하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실패하지 아니 했습니다. 사망권세를 이기시고 부 활하시고 승천하시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상의 일곱 말씀 중 에 여섯 번째 말씀이 무엇입니까 요19:30 "다 이루었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선언이요, 승리입니다. '다 이루었다' 조금도 유감이 없고, 아쉬움이 없고 만족하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기에 틀림없는 예수님의 실패요, 낭패라 할 수 있고 기독교의 막이 내린 것같이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선언이 무엇입니까
"다 이루었다" 무슨 뜻입니까 심오한 진리가 있습니다. 성전의 휘장을 찢는 일을 다 이루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시 고 운명하셨을 때에 놀라운 장면이 지금 일어났습니다.
성전에 있는 지성소와 성소 사이에 휘장이 있었는데 위에서부터 저 아래까지 쫘악 찢어지는 이적 사건이라는 말입니다. 그 휘장이 찢어지지 않은체 있을 때에는 누구도 지성소에 들어 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휘장 이 찢어질 때에 누구나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었고 휘장이 찢어졌기에 지성소에 들어간 사람은 비로소 "아버지 여호와 하나님"이렇게 부를 수 있었습 니다. 그리고 죄인 된 인생들이 지 성소에 들어가 여호와 하나님을 직접 면회 할 수가 있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여기 찢어진 휘장이 무엇입니까 찢어진 예수님의 육체를 가리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 으로 여호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가로막 고 있었던 죄의 장벽 휘장이 찢어진 것입니다. 그리고는 새 길이 열렸습니다. 생명 길이 열렸습니다. 천국 가는 길이 활짝 열렸습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십자가 고난을 당하신 목적이요 결과라는 말입니다.
인생이 무엇입니까 철학자 하이덱거의 말대로 "죽음에의 존재"입니다. 사람은 때는 모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 있는데 반드시 죽는다는 것입니다. 예외가 없습니다. 놀다가, 잠자다가, 일하다가, 자동차를 타고가다,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죽 을 수 있습니다. 가장 행복한 죽음이 있다면 예수님을 믿고 죄 사함 받고 살다가 영원한 천국에 들어가 는 것이 아닙니까. 예수님을 믿습니까 죄 값은 사망인데 내 힘으로 는 내 죄를 어떻게 할 수 없기 때문 입니다. 내 힘으로는 내 생명 죽음 문제를 해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만이 이 문제를 해결하셨습니다.
고난주간에 우리에게 교훈 합니다. 십자가 고난당하신 주님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벗기고, 때리고, 조롱하고, 끌고 가고, 홍포를 입히고, 가시관을 씌우 고 침 뱉는 그래서 멸시와 굴욕과 천대를 받으신 예수님을 바라 볼 때 내가 만난 고난이 무슨 문제며 내가 당한 시련이 무슨 대견스러운 것인가. 내가 만난 수치 부끄러움 이 무슨 큰 것이나 된 것양 그렇게 슬퍼할 이유가 없다는 말입니다. 천대를 받으신 우리 주님을 바라다 보면서 우리 모두가 고백해야 합니다. "내가 주님을 믿나이다. 주님은 나의 구주로소이다"고 고백을 해야 합니다.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 고난을 당했습니까 환난을 만났습니까 질고를 당했습니까 예수님의 인내를 보십시오. 히12:2을 보면 "예수님은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 하시더니 여호와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고 했습니다.
고난주간에 우리 주님처럼 고난을 당하지 않아도 되는데 입을 다물고 침묵을 지키셨습니다. 주님처럼 침묵을 지켜서 주님의 고난을 나의 고난으로 승화하는 아름다운 성도의 삶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렇기 때문에 낙타가 짊어질 수 있을 만큼만 짐을 얹어 줍니다. 낙타는 주인이 얹어 주는 짐을 마다하지 않습니다. 낙타는 당신입니다. 그리고 주인은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당신의 형편을 누구보다도 잘 아십니다. 그리고 당신이 짊어질 수 있을 만큼 당신에게 짐을 얹어 주십니다. 이 때 당신은 어떤 모습으로 짐을 받으십니까 낙타와 같은 겸손한 모습입니까 낙타의 운명은 짐을 지는 고난이 있습니다. 이 짐을 지는 고난이 없으면 주인에게 사랑을 받을 수 없습니다.
이 같이 우리에게도 고난의 짐이 있습니다.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심지어 예수님까지도 당신에게 주신 짐이 있어 이 짐을 잘 짐으로 구주가 되신 것입니다.
1 그리스도에게도 고난의 짐이 있습니다.
인간은 누구에게도 다 고난이 있습니다. 고난이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고난이 없다고 하면 그는 신이지 사람은 아닐 것입니다. 아담의 후예는 누구에게나 다 고난이 있습니다. 행여 고난이 없는 것처럼 보일는지 모르나 고난이 감추어진 것이지 실상은 고난이 있습니다. 재물로 가려지고 웃음으로 가려지고 권력으로 가려지고 화려한 의상으로 가려지는 아름다운 미모로도 가려지기도 합니다.
산다고 하는 것이 고난입니다. 삶 자체가 고난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살기 위해서는 먹어야 하고 마셔야하고 잠자야하고 일해야 하고 활동하여야 합니다. 인생은 고해라고 하였습니다.
베토벤 어머니의 고난
어느 대학 교수가 학생들에게 물었다. "사내는 알코올 중독자로 가구를 내다 팔아 술을 마시고 술 마실 돈이 없으면 아내를 두들겨 팼다. 거기다가 그 아내는 폐결핵에 걸려 콜록거린다. 그들은 셋방살이 형편이다. 그런데 아내가 임신을 했다. 여러분에게 묻겠는데 이 임신된 태아를 어떻게 해야 할까" 학생 하나가 재빠르게 손을 들고 일어서서 단호하게 대답했다. "낙태시켜야 합니다. " 대학 교수가 말했다.
"자네는 금방 베토벤을 죽였네!" 베토벤을 낳은 어머니는 그가 어렸을 때 지병인 폐결핵으로 죽었다. 그는 11살 때부터 극장을 돌며 구걸 예술을 해야만 했다. 거기다가 그는 서른 살 때 음악가의 생명인 귀를 잃었다. 그의 음악은 강한 주제를 지니고 있으며 대부분 끝부분에 가서는 환희를 노래한다. 고통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그의 고백대로 그는 "괴로움을 뚫고 나가서 기쁨을 발견"한 것이다. 로망 롤랑이 쓴 베토벤의 전기를 읽어보면 그는 나이가 들고 성공할수록 깊은 신앙의 세계에 빠졌다. 신앙이 그를 모든 파괴적이고 체념적인 불행의 조건에서 구출하여 높은 경지로 인도한 것이다. 고난은 불행과 동의어가 아니다. 오히려 고난은 신앙과 만날 때 가치와 행복의 어머니가 된다.
베토벤 하면 우리가 기억되는 것은 훌륭한 음악가로서 하려한 배경가운데서 성장하여 훌륭한 음악가로서 탄생한 것으로 알지만 그는 그의 삶의 한 가운데는 고난 그 자체입니다. 이같이 이 세상은 고난이 만연된 것을 생각합니다. 아담이후 그의 후예들은 고난 가운데 탄생하여 고난으로 마치는 것이 인생입니다.
어른들의 말을 들어 보면 나의 고생당한 것 누가 알아 하늘이나알고 땅이나 안다고 한다. 내 고생한 이야기 소설을 쓴다고 하면 몇권을 쓸 것이라고 한다.
사랑하는 우리 주님도 예외는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어린 시절에도 볼 것이면 그의 탄생서부터 고난의 탄생입니다.
말구유에서 탄생하여 자라나온 과정을 생각하면 훌륭하고 화려한 삶을 산 사람은 아닙니다. 나면서 애급으로 피난길에 서야하고 다시금 돌아온 그는 넉넉지 않은 아버지 목수의 직업을 따라 도와야하고 아버지가 돌아간 후에는 가족을 부양해야하는 고생스러운 삶을 이어가야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공생애에 나간 후에는 수많은 대중들에게 좋은 일을 많이 했습니다. 기적을 행하기도 하였습니다. 그토록 많은 선행을 하여도 그에게 박수갚채로 영접하지 않고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그의 행동을 하나 하나 주시하면서 어떤 잘못을 범하지 않는가고 살피는 가운데 흠집과 트집을 잡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선행을 하여도 환영 받지 못하고 기적을 행하여 치병을 받아도 차가운 시선으로 대하는 유대인들을 생각하면 그는 얼마나 마음 아팠을까 하는 생각을 가져본다.
그의 생 자체는 고난입니다. 마지막 십자가의 못을 밖아 죽어야 하는 순간을 맞는 그에게 불행스러운 고난의 길을 간 사람이라 본다.
인간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했으매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였다고 말합니다. 그러으로 죄가 있는 사람은 값을 지불해야하고 죄인은 죄로부터 오는 고난을 당해야 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예수님도 여호와 하나님이시지만 그는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인간과 같이 고난을 당하셔야 했습니다.
본문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고난
사 53:2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3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1)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다.
2) 인간에게 버림 받은 사람이다.
3) 모든 사람들을 귀히 여기지 않았다고 하였다.
이 말은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이요 인간의 구주로 오셨지만 전연 알아 주지 않는 형편에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이 것이 고난당한 사건이다.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고난스러움을 말하는 것이다.
자기 땅에 왔는데도 알아주지 않고 주인으로 왔는데 종이 알지 못하고 남편으로 왔는데 아내는 알아주지 않는다. 아버지인데도 아들은 몰라주는 것이다. 이 것 보다 더 고난스러운 일이 있을까 하는 이야기이다.
아들이 치매에 걸렸는데 안하무인이다. 아버지의 아픔이 얼마나 했을까 하는 것을 생각하자.
2 그리스도의 고난은 자신의 짐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들이 고난당하는 것은 자신을 위하여 당하는 고난이다. 즉 자신 때문이요 자신이 저지른 잘못으로 인한 고난당하는 것이다.
아담이후 인간은 그의 죄악에 동참하여 그의 허리에 있었던 인간들은 아담의 허리 안에 있음으로 그의 지은 죄가 전가하여 원죄를 이루어 이로 인한 고난당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리고 잡음 죄로 인한 가지가지의 사연으로 고난당하는 것이 인간의 고난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자신이 죄를 짓지도 않고 죄를 물려 받지도 않으에도 불구하고 고난당하신 분입니다. 그의 고난 받은 것은 자신을 위해 받는 고난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죄를 대신한 고난당하신 것에 우리의 시선을 모아야 하겠습니다. 신학적인 용어로서는 대속의 고난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분은 인간이지만 죄는 없으신 분입니다. 또한 누구에게서 전가 받은 죄가 없으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원죄와 잡음 죄가 없으신 분입니다. 그런 분이 당하신 고난은 대속의 고난임을 알아야 한다. 다시 말해서 그분은 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당하는 고난이 있다는 것은 죄 있는 사람을 대신하여 고난당하셨다는 것이다. 바로 구주 예수님은 나의 죄를 대신하시기 때문에 고난당하신 것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본문에 보면 사 53:4-6
1) 우리의 질고와 슬픔과 징벌을 담당하였다. 4절
2) 우리의 허물과 죄악으로 당하신 고난이시다. 5절
3) 그릇된 길로 간 우리를 위하여 고난이시다. 6절
3 그리스도의 대속의 고난의 모습입니다.
7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8 그가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갔으니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산 자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받을 내 백성의 허물을 인함이라 하였으리요 9 그는 강포를 행치 아니하였고 그 입에 궤사가 없었으나 그 무덤이 악인과 함께 되었으며 그 묘실이 부자와 함께 되었도다
이 말씀은 고난당하신 예수님의 태도입니다. 같은 사건이라도 사람마다 태도가 다릅니다. 한 사람이 죽을 암 병이나 고질병이 걸렸습니다. "이제 나는 죽는구나. "
낙망합니다. 부모를 원망합니다. 짜증납니다. 그리고는 많은 사람에 게 시비를 겁니다. 만사가 끝장이라고 말합니다. 스스로 절망의 구덩이에 빠져들어만 갑니다. 결국 육신만 죽어가지 아니하고 영혼까지 죽는 불행한 인생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 사람이 중 한 병에 걸렸습니다. 그는 말 합니다.
"인생은 약한 존재야" 그러면서 인생의 약한 존재의 의미를 배우니까 겸손해 질 것입니다. 내가 병든 것은 내 잘못이야 내 허물 때문이야 이렇게 죄를 깨닫고 보니 회개할 길이 열립니다. 그리고 "인생은 믿을 수가 없어" 생각하게 되니까 여호와 하나님만 의지하게 됩니다.
"여호와 하나님 저를 살려 주세요. 그리하면 이후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일을 위하여 충성하겠나이다. "
믿음이 생겨난다는 말입니다. 마침내 이 사람은 그 영혼도 살고 육신도 살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지실 십자가를 눈앞에 두고 어찌했습니까 그의 태도가 우리에 게 교훈을 줍니다. 7절 "그가 곤욕 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 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이 부분을 믿음 생활하는 우리 모두가 눈여겨보아야 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어찌 합니까 입을 열어야 할 때에 잠잠하고 입을 열지 않아야 할 때에 너무 입을 열어서 탈일 때가 많지 않습니까.
입을 열 바에야 성도들은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다섯 가지 입을 열어야 합니다.
눈을 감으면 기도의 입을 열고
눈을 뜨면 감사와 찬송의 입
불쌍한 사람들을 보면 구제의 입
죄인들이 망하는 것을 보면 전도의 입
때가 되어 천국가게 되면 여호와 하나님 앞에 보고의 입이 열려야 합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예수님처럼 입을 꼭 다무는 경건한 훈련도 해야 합니다. 자랑하는 입, 잘못을 핑계 하는 입, 욕심을 채우기 위한 입, 책임을 전가하는 입을 열지 말고 특별히 형제를 헐뜯는 입을 열지 말아야 합니다.
교회의 부흥이 되지 않은 일이 있든지 아니면 병든 것을 보는 일이 있을 때 어떤 태도가 있습니까 입이 근질근질한다.
병들면 약이 많다고 한다. 의원도 많고 좋은 의사도 많다.
교회의 부흥되지 않는 원인은 자신에게 있음을 알아야 한다. 무엇대문에 누구 때문에 탓도 많고 비난도 많다. 모두가 내 탓임을 알고 조용히 침묵으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는 아름다운 계기가 마련되기를 바랍니다.
지금 고난주간에 우리에게 보여주신 주님의 태도는 무엇입니 까
주님의 침묵을 배울 수가 있습니다. 원수들이 예수님의 얼굴에 침을 뱉고 주먹으로 치고 손바닥으로 때렸습니다. 그런데 입을 다무신 주님 너무 신기하지 않습니까.
눅23:1-2에 보면 예수님을 고소했습니다.
1) 백성을 미혹하는 사람
2) 세금을 가이사에게 바치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3) 자칭왕이라고 하였다. 이 같은 것은 유대인들이 지어낸 허무맹랑한 고소 내용이다. 전연 근거가 없는 고소 사건이다. 무고로 고소할 수 있는 주님이시지만 침묵했다.
예수님께 무슨 죄가 있다는 말입니까. 그런데도 입을 열지 아니했다.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과 같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괴로워도 억울해도 입을 열지 아니 했는데 왜 그랬을까요
1) 재판장은 여호와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2) 사랑 때문이다. 그의 사랑 때문입니다. 가슴에서 치밀어 오르는 사랑이 입을 다물게 한 것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자기를 못박는 무리를 보고 탓하지 아니했습니다. 시비를 걸지 아니했습니다. 그 저 "저들의 죄를 사하여주옵소서"
3) 무지하기 때문에 참았습니다.
저들이 알지 못하오니 용서하여 달라고 가상칠언 가운데 한 말씀으로 용서를 빌었던 것입니다. 고난을 감수하고 눈물을 꾹 삼키면서 기도했을 뿐입니다. 우리 모두는 믿음 생활하면서 이것을 본 받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면 우 리에게 복이 될 것입니다.
맺는 말
고난당하신 결과입니다. 12절을 보면 "내가 그로 존귀한 자 와 함께 분깃을 얻게 하며"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예수님으로 하여금 십자가 고난 그것으로 끝나 버리게 하지 아니하시고 마침내는 승리하도록 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섭리를 소개하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실패하지 아니 했습니다. 사망권세를 이기시고 부 활하시고 승천하시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상의 일곱 말씀 중 에 여섯 번째 말씀이 무엇입니까 요19:30 "다 이루었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선언이요, 승리입니다. '다 이루었다' 조금도 유감이 없고, 아쉬움이 없고 만족하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기에 틀림없는 예수님의 실패요, 낭패라 할 수 있고 기독교의 막이 내린 것같이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선언이 무엇입니까
"다 이루었다" 무슨 뜻입니까 심오한 진리가 있습니다. 성전의 휘장을 찢는 일을 다 이루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시 고 운명하셨을 때에 놀라운 장면이 지금 일어났습니다.
성전에 있는 지성소와 성소 사이에 휘장이 있었는데 위에서부터 저 아래까지 쫘악 찢어지는 이적 사건이라는 말입니다. 그 휘장이 찢어지지 않은체 있을 때에는 누구도 지성소에 들어 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휘장 이 찢어질 때에 누구나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었고 휘장이 찢어졌기에 지성소에 들어간 사람은 비로소 "아버지 여호와 하나님"이렇게 부를 수 있었습 니다. 그리고 죄인 된 인생들이 지 성소에 들어가 여호와 하나님을 직접 면회 할 수가 있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여기 찢어진 휘장이 무엇입니까 찢어진 예수님의 육체를 가리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 으로 여호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가로막 고 있었던 죄의 장벽 휘장이 찢어진 것입니다. 그리고는 새 길이 열렸습니다. 생명 길이 열렸습니다. 천국 가는 길이 활짝 열렸습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십자가 고난을 당하신 목적이요 결과라는 말입니다.
인생이 무엇입니까 철학자 하이덱거의 말대로 "죽음에의 존재"입니다. 사람은 때는 모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 있는데 반드시 죽는다는 것입니다. 예외가 없습니다. 놀다가, 잠자다가, 일하다가, 자동차를 타고가다,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죽 을 수 있습니다. 가장 행복한 죽음이 있다면 예수님을 믿고 죄 사함 받고 살다가 영원한 천국에 들어가 는 것이 아닙니까. 예수님을 믿습니까 죄 값은 사망인데 내 힘으로 는 내 죄를 어떻게 할 수 없기 때문 입니다. 내 힘으로는 내 생명 죽음 문제를 해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만이 이 문제를 해결하셨습니다.
고난주간에 우리에게 교훈 합니다. 십자가 고난당하신 주님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벗기고, 때리고, 조롱하고, 끌고 가고, 홍포를 입히고, 가시관을 씌우 고 침 뱉는 그래서 멸시와 굴욕과 천대를 받으신 예수님을 바라 볼 때 내가 만난 고난이 무슨 문제며 내가 당한 시련이 무슨 대견스러운 것인가. 내가 만난 수치 부끄러움 이 무슨 큰 것이나 된 것양 그렇게 슬퍼할 이유가 없다는 말입니다. 천대를 받으신 우리 주님을 바라다 보면서 우리 모두가 고백해야 합니다. "내가 주님을 믿나이다. 주님은 나의 구주로소이다"고 고백을 해야 합니다.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 고난을 당했습니까 환난을 만났습니까 질고를 당했습니까 예수님의 인내를 보십시오. 히12:2을 보면 "예수님은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 하시더니 여호와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고 했습니다.
고난주간에 우리 주님처럼 고난을 당하지 않아도 되는데 입을 다물고 침묵을 지키셨습니다. 주님처럼 침묵을 지켜서 주님의 고난을 나의 고난으로 승화하는 아름다운 성도의 삶이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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