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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려주일] 고난에 동참하는 성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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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같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동물원에서 사슴이 새끼를 낳을 때 무통분만(無痛分娩)을 시켰더니 새끼를 본척만척하며 돌아보지를 않더라는 것입니다. 해산의 고통이 없이는 모성에도 발휘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고통을 통과하지 않은 창조란 있을 수 없고 고난을 통과하지 않은 영광은 참된 영광일 수 없는 것이 여호와 하나님의 창조의 법칙입니다.
그러나 우리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고난을 맛보지 않고 영광을 얻으려는 것이요 창조하는 아픔을 겪지 않고 창조의 기쁨을 맛보려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가짜를 선호하여 가짜를 탄생시키는 것입니다. 뼈를 깎는 것 같은 고통과 피나는 노력 없이 쉽게 얻어지는 학위를 받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남처럼 새벽부터 밤까지 일을 하지 않으면서 돈은 쓰고 싶어 위조지폐를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오늘 이러한 풍토는 신앙생활에까지 침투되어 아주 쉽게 편안하게 예수를 믿으려는 사람들로 교회는 만원을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우리를 대속했으니까 이제 우리는 믿기만 하면 된다고 가볍게 생각하고 믿는 일에 힘들이지 않으려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날 교회는 예수로 말미암아 오는 사죄의 은혜를 귀하게 생각지 않습니다. 이로 인한 신앙의 기반을 두고 기도도 하고 찬양도 하고 헌신과 봉사가 뒤따라야 할 것입니다.
 독일의 신학자인 본 회퍼는 이러한 교회의 풍토를 날카롭게 비판하였습니다. 교회는 은혜를 싸구려로 팔리는 상품과 같은 것으로 생각하고 또는 무진장한 식료품 창고에서 물품을 내오듯이 생각 없이 교회에서 털어 내는 것으로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은혜의 대가는 이미 지불되었기 때문에 언제나 공짜라고 말하면서 대가를 이미 지불한 자를 생각해서라도 무엇이나 거저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공짜가 아니라면 무엇이 은혜란 말입니까 본 회퍼는 이런 은혜를 '값없는 은혜'라고 불렀습니다.
"값없는 은혜는 회개 없이 죄의 사유가 가능하다는 설교이며 교회의 규율을 무시한 세례요 죄의 고백 없이 베푸는 성만찬 은밀한 참회 없는 면죄의 확인이다. 순종 없는 은혜 십자가 없는 은혜 산 사람 예수 그리스도를 무시한 은혜는 값없는 은혜"라고 하였습니다.
오늘의 한국 교회들은 교인들을 대량 생산해 내고 있습니다.
마치 조폐 공사에서 화폐를 마구 찍어내듯이 남발하므로 그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 오늘의 교회의 실정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교회는 교인의 수를 늘리기에만 급급해서 그리스도인의 책임이나 회개 그리고 져야 할 십자가는 이야기하지 아니하고 오직 축복과 위로만을 이야기하는 기복주의가 기승을 부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인들은 아무런 책임도 지려 하지 않는 것입니다.
 교회의 봉사를 돈을 내어 하고자 하는 교인
교인들은 교회밖에 나가서는 자기가 교인임을 밝히려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을 밝히므로 따르는 여러 가지 제약과 책임을 지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언제든지 자기에게 불리할 때는 그리스도를 헌신짝처럼 던져 버릴 용의가 있다. 왜냐하면 그는 그리스도를 얻기 위해 아무 것도 자기 것을 희생한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는 예수를 믿음으로 얻는 어떤 감격도 체험하지 못하였고 따라서 그를 위하여 자기의 모든 것을 다 버려도 아깝지 않다는 생각을 한번도 해 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교인들이 이웃을 위하여 자기를 희생 한다던가 이 땅에 복음화를 실현시키기 위해 헌신한다는 것은 전연 기대할 수 없는 것이다.
이들은 예수를 믿음으로 현재 자기가 이 땅에서 구축하고 있는 안정된 기반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 것을 원치 않는 것입니다. 하물며 그리스도 때문에 옥에 갇힌다든가 생명의 위협을 받는다는 것은 생각할 수조차 없는 일이다.
그런가 하면 어떤 교인들은 성령 체험을 통하여 방언도 하고 병도 고치고 귀신도 쫓아내지만 그래서 누구보다도 그리스도를 잘 믿는다고 자부하지만 막상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을 당하는 자리에선 뒤로 물러나 앉는다. 십자가를 져야 할 자리에선 뒤로 물러나 앉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져야 할 자리에선 이미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셨는데 왜 내가 십자가를 또 다시질 것인가 하면서 회피하는 성도들이다. 고난이 없는 신앙 십자가를 지지 않는 신앙이란 결국 알맹이 없는 쭉정이 같은 신앙인 것입니다.
오늘 신약 본문에 보면 사도 바울이 신앙 고백이 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고도 그 모든 것을 오물같이 여겼습니다. 그것은 내가 그리스도를 얻고 그리스도 안에서 내가 발견되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말하기를 "그리하여 내가 그리스도와 그의 부활의 권능을 알고 그의 고난에 함께 참여하여 그가 죽으신 모양대로 죽어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의 부활에까지 이르려는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대로 한다면 우리가 그리스도를 따르려면 먼저 모든 것을 다 버리고 다음에는 고난에 함께 동참해야하며 십자가를 져야 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은혜는 결코 값싼 것이 아닙니다.
본 회퍼는 말하기를 "은혜는 인간에게 생명을 요구하기 때문에 비싸고, 동시에 인간에게 생명을 선사하기 때문에 은혜인 것이다. "라고 하였다.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는 이 땅에 속한 우리의 모든 것을 요구하시기 때문에 비싼 것이요 그러나 또 하늘의 새 생명을 우리에게 주시기에 그것은 은혜인 것이다.
 베드로가 예수를 향하여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고 고백했을 때 그는 영광의 그리스도 왕 되신 그리스도만을 생각했던 것입니다. 우정승 좌정승의 꿈을 꾸면서 따랐다고 하는 이야기 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그 고백을 들으시고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음을 당했다가 사흘 만에 살아나게 될 것을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영광의 그리스도이기 전에 고난의 종이요 십자가에 죽을 수밖에 없는 그리스도임을 말씀하신 것이다. 그리고서는 말씀하시기를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버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이미 제자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를 따르고 있던 때입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다 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버려야 할 일과 그리고 십자가를 지는 일이 아직 남아 있다는 말씀입니다. 무엇인가 되어 보겠다는 꿈을 가지고 있던 제자들은 예수의 십자가 앞에서 깊은 좌절을 맛보게 되었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뵈올 때 어리둥절한 채 있는 그들을 예수는 부르시어 사명을 주셨던 것입니다.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고 오순절 다락방에서 그들은 화끈한 성령 체험을 한 후 온전히 그리스도를 따를 수 있는 사도들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사도 바울의 고백대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인 교회를 위하여 자기들 몸으로 채워 간 것입니다.
십자가의 고난을 이해함 없이 또 십자가를 통과하지 않고는 신앙을 가졌다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을 거치지 않고는 어떤 은혜도 축복도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함 없이 그의 부활을 이해할 수 없고 그가 약속한 영생을 우리가 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고 고백하는 것은 곧 십자가를 지겠다는 뜻입니다. 십자가의 관문을 통과하기 전까지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시간 십자가를 진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고난주일을 지키면서 한번 다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1 정과 욕심을 못 박는 것이다.
갈 5:24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심지어 자기 자신까지도 완전히 포기하여 버리는 것, 이것이 바로 십자가를 진다는 뜻입니다.
정이란 말은 내적인 욕망을 의미하며 인간의 욕심은 욕망으로 말하는 것이다. 이는 인간의 타락한 본성을 의미한다고 하겠다. 그리스도의 예수의 사람들은 인간의 타락한 본성을 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말이다.
개역 롬 8:13
13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정과 욕심을 십자가의 못을 밖는다고 하는 것은 바울은 로마서에서 몸의 행실을 죽인다고 하였다. 그리스도를 따라가기 위해서는 십자가의 못을 밖아 죽인다고 하는 것이다.
요일 2:16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17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인간의 타락한 본성을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이라고 하였다. 이 것은 아버지께로 온 것이 아니요 세상에서부터 온 것이라고 말한다.
영원을 살기 위해서는 이 같은 타락한 인간의 본성을 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날마다 십자가 이외에 것을 자랑하지 않는다고 하는 말씀을 바라볼 때 바울은 항상 자신을 쳐 복종시키는 신앙의 사람임을 보여준 말씀이다.
 공직의 비극
신발 6천 켤레를 하루에 한 번씩 신으려면 약 17년이 걸린다. 1주일에 한번씩 신으면 1백20년이 걸린다. 마르코스의 궁전에서 발견된 이멜다의 구두는 인간의 허영과 사치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다. 한 양장점에서 보내온 청구서에는 옷 여섯 벌에 11만 달러가 적혀 있었다. 도가 지나치면 사람은 눈멀고 어리석게 된다. 우리나라의 전직 대통령의 천문학적인 비자금이 알려져 사람들을 놀라게 했습니다. 백성을 위하여 섬기는 봉사자의 자리가 돈 버는 자리로 생각하면 그것은 국가의 불행이다. 눈 덩이처럼 불어난 외채는 어찌하겠습니까
진정한 세상에 대해서 죽는 것이 신앙이다. 여호와 하나님에 대해서는 산 것입니다. 죄에 대해서 죽고 의에 대해서 산 것이 신앙인입니다. 정과 욕심을 온전히 십자가에 못을 밖아 버리는 진실한 성도가 되기를 바라마지 않습니다.
신앙이란 자신과의 싸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정과 욕심이 없을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매 순간마다 타락한 성품이 불거지는 것을 억제하고 잔인하게 죽이는일 하는 것이 신앙이다.
2 세상 것을 포기하는 것이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이제까지 내가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포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십자가를 통하여 세상은 내게 대하여 못 박혀 죽었고 나는 세상에 대하여 못 박혀 죽었다"고 하였습니다. 이 세상에 기대하던 모든 것을 포기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세상의 모든 영광을 포기하는 것을 말한다. 세상도 나에 대해여 포기하도록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울의 예
빌 3:5-9 내가 팔 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6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 7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9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여호와 하나님께 로서 난 의라
바울은 사회에 대해서 기득권을 포기하고 자신의 모든 영광으로 바뀌어 질 것을 배설물처럼 여겼다고 한다. 참으로 훌륭한 신앙인입니다.
 예수님의 경우
빌 2:5-8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6 그는 근본 여호와 하나님의 본체시나 여호와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주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는 가운데 나의 원대로 하지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하였다. 십자가를 지신 것을 생각하면
1) 죄가 있어서가 아닙니다.
2) 힘이 없어 진 것도 아닙니다.
3) 스스로 지신 십자가이다.
그의 최고의 인기 절정에 도달할 때 모든 사람이 그를 좇았고 그를 왕으로 추대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그는 피하여 한적한 곳을 택하여 도망치듯 한 사건을 볼 수 있습니다.
이 같이 세상의 모든 부귀영화를 한순간에 포기하고 저버린 사람입니다. 이 것이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영국 신사되기를 포기한 간디
간디는 변호사 자격을 얻기 위하여 영국 유학을 결심한 후 사원에 가서 술과 고기와 여자를 끊을 것을 서약하였다. 그에게 영국생활을 위하여 우선 필요한 것은 생활방식을 익히는 것이었다. 그는 영국류의 신사가 되기 위하여 적지 않은 돈과 시간과 정력을 낭비하였다.
어느 날 연회에 참석했는데 푸짐한 고깃국이 마련되어 있었다. 간디는 조국을 떠날 때의 서약을 되새기며 고민에 빠져 있다가 마침내 벌떡 일어나 연회석을 걸어 나오는 무례를 저지르고 말았다. 후에 간디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서약을 지키기 위해 영국 신사되기를 포기했다. "
종교가 다른 사람 간디지만 자신의 종교를 위하여 모든 것을 포기하는 일은 신앙인이면 본 받아야할 문제이다.
3 자기 할일을 책임지는 것이다.
십자가를 지는 일은 자신의 일에 책임을 져야함을 의미합니다.
마 10:34-39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35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36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37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38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 39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합당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자기의 부하된 사명을 감당하고 좇아야 할 것을 의미합니다.
이 같은 일은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우선하는 일 참으로 귀하고 소중합니다. 그러나 자기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이 일은 가정에서도 맡은 일이 있습니다. 직장에서도 맡은 일이 있습니다. 한 나라에서도 맡은 일이 있습니다. 한 단체에서도 맡은 일이 있습니다. 주님을 따른다고 미명하에 자기의 할 일을 무책임하게 저버리는 일은 해서는 안 된다.
한 가정을 생각해 보면 남자는 주님을 따르는 일 참으로 귀하지만 가장으로서 가족을 부양하는 일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 입니다.
여자의 경우는 여자로서 내조의 일을 다하고 주님을 좆을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이 같이 자기의 부하된 사명을 감당하는 일을 기피하고 신앙을 우선하는 일은 잘못이다. 이 것이 바로 자기의 십자가입니다.
사회적인 면에서 책임이 무엇입니까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자유와 정의, 사랑과 평화의 복음을 위하여 헌신한다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신 까닭이 무엇입니까 이 땅에 편만하여 있는 죄와 부자유와 불의를 몰아내고 거기에 얽매인 인간들을 자유케 하시려고 십자가를 지셨던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 사이에 막혔던 담을 허시고 거기에 사랑과 평화를 가져오게 하기 위하여 그가 십자가를 지셨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우리 몸으로 채워 간다는 것을 바로 그리스도께서 하시고자 했던 그 일을 위해 헌신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 땅 위에 모든 불의한 일들과 대항하여 투쟁하며 억압당하는 인권의 회복을 위하여 기도하며 복음을 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일선에 나가 개혁을 외치고 시위하고 대중을 선동하여 자유와 정의를 밟는 자들을 물리치는 일은 정부나 아니면 민주화하는 사람들에게 맡기고 우리 신앙인들은 저들이 알지 못하서 그러하오니 이들을 위하여 기도하고 복음을 전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한다.
이것이 우리가 할일이며 사명이기도 하다. 이 땅 위에 자유를 억압하고 평화를 짓밟는 모든 세력과 투쟁하여 자유와 평화를 실현시키는 일은 복음과 기도를 통하여 정의를 실현하도록 헌신하는 신앙인이 되어야 한다. 이 것이 여호와 하나님이 맡겨주신 책임이요 의무이다.
맺는 말
십자가 없이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은 세상입니다. 오늘은 고난 주일입니다. 그리스도의 고난과 의미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우리가 오늘 져야 할 십자가가 무엇인지 깊이 생각해 보는 주일입니다. 교회의 외적인 성장 속에서 오늘 우리가 져야 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외면해 가고 있지 않은지 반성해 보는 주일입니다.
십자가는 언제나 우리에게 걸림돌 같이 생각되어 집니다. 십자가 없이는 우리의 구원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면서도 바로 그 십자가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걸려 넘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많은 교회들이 설교에서 십자가를 생략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 몸으로 감당해 가야 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일부러 설교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도 이제 교회당을 지었습니다만 아름다운 교회당 속에 안주하면서 오늘의 고난을 외면하게 될까 봐 두려워지는 것입니다. 오늘 목회자의 고민은 어떻게 하면 이 교회로 하여금 함께 고난에 참여하게 할까 하는데 있는 것입니다. 예수를 따라가야 영생을 얻을 줄 알면서도 자기가 가진 많은 재산 때문에 돌아설 수밖에 없었던 부자 청년의 고민과 같은 것입니다.
십자가는 우리에게 결단을 촉구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따를 것인지, 아니면 돌아설 것인지를 결단하도록 요구하는 것입니다. 마치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신 주님처럼 특단의 결단을 해야 할 때입니다. "그의 고난과 함께 참여하여 그가 죽으신 모양대로 죽어 어떻게 하든지 죽은 자의 부활에까지 이르려는" 결심이 없이는 오늘 우리는 그리스도를 바로 믿었다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할 수 있기 위하여 여호와 하나님께 능력을 간구하여야 하겠습니다.
기름 짜는 틀이 겟세마네라고 합니다. 이 같은 고난을 해야 할 일은 십자가를 지기 위해서 힘을 달라고 기도하는 주님처럼 성도들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합니다.
십자가를 진다고 하는 것은
1) 정과 욕심을 못 박는 것이다.
2) 세상의 것을 포기하는 것이다.
3) 자기 할 일을 책임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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