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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려주일] 고난의 승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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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의 생태계를 잘 관찰해보면 고통에 대한 반응에 따라 저급동물에서 고등동물, 인간으로 구분이 확실해집니다. 저급동물일수록 고통에 둔감하고, 고등동물일수록 고통에 민감하게 반응합니다.
제일 저급한 환형동물인 "지렁이"는 거의 고통이 없습니다. 짓밟혀 두 동강이 나도, 잘린 부분이 다시 나와 2마리가 돼버립니다. 환형동물보다 조금 나은 고급동물인 냉혈동물들 중에 "거북이"도 표피가 딱딱하여 거의 고통을 느끼지 못합니다. 목만 연결부분이 약간의 육체적 고통을 느낄 뿐입니다. 그러나 고등동물인 소, 개는 모든 육체적 고통을 다 느낄 뿐만 아니라 분위기까지 민감하게 느낌으로 정신적 고통도 느낍니다. 그래서 개는 위협적인 분위기가 되면 긴장하여 으르렁거립니다.
최고의 고등동물이라고 일컫는 만물의 영장인 인간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육체, 정신, 영혼의 모든 고통에 민감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인간을 가장 고통에 민감하게 창조하셨습니다. 그래서 몸에 조금만 이상이 와도 열나고, 아프고, 피곤하고 정신에 조금만 이상이 와도 기분 나쁘고, 약오르고, 화나고 영혼은 조그마한 죄에도 마음 아파하고, 괴로워합니다. 이러한 점에서 인간이 고통을 느낀다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로서 인간 됨의 증거입니다. 인간은 성숙할수록 고통의 폭을 넓혀 나갑니다.
이러한 면에서 인간을 3종류로 구분 할 수 있습니다.
이기적인 사람들은 자신의 고통만 느낍니다.
평범한 사람들은 자신, 가족, 친지의 아픔 정도를 느낍니다.
성숙한 사람들은 이웃사람, 자연, 동물의 고통까지 민감하게 느끼고, 아파합니다.
이러한 점에서 자신의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고통과 슬픔에 민감하여 같이 동고동락하는 사람이 진정한 기독교인입니다.
이렇게 볼 때 우리는 인류역사상 가장 예민하게, 생생하게 모든 피조물의 아픔과 슬픔을 자신의 고통으로 받아들여 우리와 함께 고통을 나누셨던 분이 누구이겠습니까 십자가 위에서 고난 당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고통은 실상 우리 인간들의 고통을 대신하신 고통입니다.
영화 "길"
1) 길(La Strada)
2) 흑백영화(상영시간 102분)
1954년 베니스 국제영화제 은사자상 수상
1956년 오스카 최우수 해외작품상 수상
감독 :페데리코 펠리니
3) 주인공
잠파노 - 안소니 퀸
젤소미나 - 줄리에타 마시나 (페데리코 펠리니 감독의 아내)
4) 1954년 이태리에서 제작된
페데리코 펠리니(1920-1993)감독의 첫 작품
5)여자 주인공 "젤소미나"(줄리에타 마시나)가 남자 주인공 광대 "잠파노"(안소니 퀸)의 살인죄를 대신 가슴아파하는 장면은 매우 감동적입니다. 여기에서 이 영화는 여주인공을 통해서 예수님이 우리 죄를 대신 하여 십자가에서 고통 당하신 아픔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당해야하는 고통의 느낌을 우리 자신보다 더 깊이 느끼셨습니다. 마치 사랑하는 어머니가 자식의 눈물을 보고 어머니는 피눈물을 흘리시는 것같이...... 양심에 화인 맞고, 영혼이 죽어버려 감각이 무디어진 우리보다 더 심각하게 처절히 우리가 저지른 죄의 고통을 십자가 위에서 우리 대신 느끼셨습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 말씀의 의미입니다.
이사야 53:3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은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로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질고를 아는 자라"는 이 말씀이 무슨 뜻입니까 우리의 고통을 주님이 느끼고 계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리석게도 우리의 죄로 인하여 영 육 간의 고통, 질고를 지고 고난 당하시는 주님을 보면서 오히려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주님은) 징벌을 받아서 여호와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 당한다고 잘못 생각하고 있다고 이사야 선지자는 한탄합니다!
이사야 53:4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여호와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십자가의 고난을 통해서 모든 인간이 구원을 얻게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의 의미를 모르고는 참된 복음의 의미를 알 수 없습니다.
십자가의 고난은 모든 인간의 고통과 아픔을 대신한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죄→고통→저주라고 생각하며 믿고 있습니다. 그래서 누가 고통, 고난, 실패 당하면 무슨 죄가 저렇게 많은고! 은근히 판단하고 나 자신조차도 실패, 고통, 고난이 오면 여호와 하나님! 무슨 죄가 있기에 이러합니까 라고 생각합니다. 결코 틀린 생각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러한 생각은 율법적인 유대교 신앙입니다.
주님의 십자가 고난은 우리의 죄로 인한 우리의 고난을 단순한 형벌이 아닌 고통을 느낄 줄 아는 인간 됨을 회복하게 하는 은혜가 되게 하였습니다.
누가복음 13:1-5에 보면 이러한 말씀이 나옵니다.
① 빌라도 - 갈릴리사람 잡아 피를 제물에 뿌림
② 실로암 망대가 무너짐 → 18명 압살당함
이 두 사건을 두고 그렇게 당한 그들은 죄가 많아서 그렇구나 생각함으로 사람들이 "억울한 고통", "까닭 모를 고난"을 죄와 연결시켜 생각함을 예수님이 아시고 단호히 거부합니다. 아니다! 너희도 회개치 아니하면 망한다! 모두 죄인이다. "고통 당하는 사람만이 특별히 죄인이 아니다" 오히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요한복음 9:1-7에 나면서부터 맹인으로 태어나는 것은 당시 잘못된 생각으로 자신의 죄와 조상의 죄까지 타고난 죄인이 형벌을 받은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요한복음 9:3절: "그에게서 여호와 하나님의 하시고자 하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고 선언하십니다. 즉, 이제 우리의 고난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고난으로 대신 고난 당하심으로 더 이상 죄의 형벌이 아니고 고통을 느낄 줄 아는 인간 됨을 회복하게 하는 은혜가 되었다 라는 선언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과 죽음을 전적으로 받아들이시고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여호와 하나님, 나의 여호와 하나님 어찌 나를 버리시나이까 절규 속에서 여호와 하나님과 우리와의 화해를 이루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이 절규 속에서 인간의 고난의 의미가 전환하는 신비를 봅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주님의 이 고난의 절규가 우리의 고난의 신음소리를 기도소리로 바뀌게 하여 우리를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 되게 하는 신비한 역사를 이루었습니다.
말씀의결론입니다.
십자가 고난 안에서, 우리의 고난은 저주, 형벌, 심판이 아니라 고통을 민감하게 느낄 줄 아는 인간 됨을 회복하는 은혜입니다.
그리하여 "십자가의 고난"이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의 고난을 본래의 은혜로 바꾸어 주시는 기회로 사용하시려는 목적을 이루신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사야 53:5-6이 이루어졌습니다.
53: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53: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 시키셨도다.
다시 강조하여 말씀드립니다. 주님의 십자가 고난으로 모든 고난 속에 있는 형벌, 저주, 심판은 소멸되고 아픔을 아는 인간 됨을 회복하는 기회로 바뀌었습니다. 이것이 십자가 고난의 신비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십자가 고난의 신비를 깨달은 사람은 다른 사람들의 아픔을 함께 아파합니다.
 3차 방북(2001,11,9 -14. )때 평양에서 느낀 아픔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저는 그 아픔을 주님의 아픔으로 느꼈습니다. 그래서 북한 선교를 멈출 수가 없습니다. 제가 남보다 애국심이 커서가 아니라 주님이 느끼게 하신 아픔 때문에 그 아픔이 가시기까지는 멈출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들에게 고난이 닥쳐왔습니까
주님 앞에 나아와 기도함으로 나를 대신하여 고난 당하신 십자가 안에서 다른 사람의 아픔을 아는 인간 됨을 회복하는 기회가 되게 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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