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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려주일] 예수라고 하는 그 사람! 그리스도의 고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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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찍이 유명한 교부 폴리갑(Policarp)은 이사야서 53장을 가리켜 '이는 구약 복음 저자의 황금 같은 정열의 장이다. '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주석가 델리취(Delitzsch)는 이사야서 53장을 가리켜 '이사야서 40-66장의 중심 부분이요, 또 구약성경 예언의 가장 중심 부분이요,
가장 깊고 가장 높은 것이다. '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는 또 말하기를 '이는 신약 복음서의 저자들과 함께 십자가 아래서 그린 그림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말하자면 이사야 53장은 구약의 지성소요, 신약의 거룩한 갈보리인 것입니다. 영감의 선지자 이사야는 그로부터 약 800여년 이후에 이루어질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수난을 예언한 것입니다. 세기적인 음악가였던 헨델(Hendel)은 저 유명한 곡 '메시야'를 작곡할 때, 바로 이
이사야서 53장 부분을 작곡하다가 그만 붓을 멈추고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식사시간도 잊은 채 울고 있었습니다. 그때 그에게 식사시간을 알려 오는 하인에게 "나는 지금 세상 죄를 짊어지고 가는 여호와 하나님의 어린양을 보고 있소. "라고 하였습니다. 그렇게 작곡한 헨델의 곡 '메시야'가
지금도 전세계의 영들을 감동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이사야는 바로 예수라고 하는 그 사람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1 그가 누구인가
이사야 53장의 주인공은 그라고 하는 사람입니다. 53장 2절에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났다고 하였습니다. 3절에 그는 멸시를 받았다,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
였다고 하였습니다. 4절에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졌다, 그는 징벌을 받았다고 하였고, 5절에 그가 찔림은…, 그가 상함은…, 그가 징계를 받았다,그가 책찍에 맞았다,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다고 하였습니다.
7절에 그가 곤욕을 당했다, …그 입을 열지 아니했다고 하였고, 8절에 그가 곤욕과 심문을 당했다, 9절에 그는 강포를 행치 아니했다, 10절에 여호와께서 그로 상함을 받게 하였다, 11절에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았다, …그로 존귀한 자와
함께,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지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사야가 영감으로 표현한 그가 누구인가
그는 ① 개인적 존재(사 52:14)로 그 얼굴이 타인보다 상한 자였습니다. ② 그는 단순한 순교자가 아닌 대신 수난자 예수입니다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라고 하였습니다(사 53:6). ③ 바로 이사야 53장에 계속해서 나타나는 우리, 곧 신령한
이스라엘, 곧 죄인의 대속자였습니다. 바로 '예수'라고 하는 그 사람 '메시야'를 지칭하고 있습니다.
2 그 사람 예수의 인간적 모습은 어떠하였는가
이사야 53장 2절에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다고 하엿습니다.
'연한 순'은 문자적으로 '어린나무'인데 나약하고 미미한 그의 모습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그의 탄생의 역사적 배경이 무너진 다윗의 왕가에서 출생할 사실을 의미합니다.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메시야의 탄생이 박토와 같은 그 시대의 주변 환경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나사렛에서 출생하였습니다.
그는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에게는 인간적인 매력과 조건들이 없어서 세상의 이목을 집중시킬 아무런 세상적인 영향력이 없었다는 뜻입니다.
이사야 53장 3절에 보면 오히려 그는 사람들에게 '멸시'를 받았고, 사람들은 그를 멀리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간고'를 많이 겪었습니다. 그는 '많은 슬픔의 사람', '온갖 고통의 사람'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는 온갖 질병에서 고통하는 사람들의 '질고'를 체휼하여 아는 자였습니
다. 그래서 그 사람 예수는 많은 사람들에게 철저한 외면을 당하신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바로 그의 낮아지신 비하의 신분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3 그 사람 예수는 수난(受難)의 종이었습니다(사 53:4-6). 그는 나실 때부터 죽으실 때까지
그의 한평생이 자초지종 수난 충만의 생애였습니다. 그의 수난은,
1. 대신 수난이었습니다. 이사야 53장 4절에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우리의 질고(병)와 우리의 슬픔을 대신 했다는 사실입니다. 5절에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라고 하였습니다. 다시 말합니다. 우리의 질고, 우리의 슬픔, 우리의 허물, 우리의 죄악을 대신한 수난이었습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며 각기 제 길로 가버린 죄악된 인간들이었습니다(사 53:6). 바로 여호와 하나님을 떠난 불순종의 죄인, 배신자, 배은자, 배반자, 배역자들의 길을 가버린 죄인들의 죄값을 대신하는 수난이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사야 53장
12절 하반절에 …그러나 실상은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지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고 하였습니다.
2. 대신 수난은 대속 수난이었습
니다.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
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라고 하였습니다. 그가 징계를 받음이 우리의 평화가 되고, 그가 채찍에 맞음이 우리의 나음이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말하자면 그 사람 예수의 대신 속죄의
수난은 우리의 영원한 구원을 위함이었다는 사실입니다. 대신 수난은 대속을 목표하는 수난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이사야 50장 6절에 나를 때리
는 자들에게 내 등을 맡기며 나의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나의 뺨을 맡기며 수욕과 침 뱉음을 피하려고 내 얼굴을 가리우지 아니하였느니라고 하였습니다. 그 결과는 우리의 얼굴이 여호와 하나님 앞에 영광스럽게 된 것입니다. 이사야 52장 14절에는 …그 얼굴이 타인보다 상하였고
그 모양이 인생보다 상하였으므로 무리가 그를 보고 놀랐다고 하였습니다.
그 대신 수난의 내용은 그의 '찔림'이었습니다. 그의 '상함'이었습니다. 그의 '징계'였습니다. 그의 '채찍에 맞음'이었습니다. 모두가 죄인들이 받는 고난의 형이었습니다. 또한 그의 '곤욕'과 '심문'이었습니다(사 53:7). 사지인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짐승이 되어버린 것이었습니다(사
53:7-8). 마침내 산 자의 땅에서 끊어짐(사51:8)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었습니다. 그것은 분명히 형벌 받을 죄인들을 대신하는 수난이었습니다(사 53:8).
그래서 디도서 2장 14절에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셨다고 하였습니다. 마태복음 20장 28절에도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하였습니다(막 10:45).
여기 '대속물'은 노예나 포로를 석방시키기 위해 대신 지불하는 몸값을 가리킵니다. 바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죄와 죽음의 종이 되었던 인류를 해방시키기 위해 자신을 그 몸값으로 지불한 것입니다. 바로 속전이었습니다.
3. 침묵의 수난이었습니다. 이사야 53장 7절에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사야 53장 9절에는 그는 강포를 행치 아니하였고 그 입에 궤사가 없었다고 하였습니다. 왜 침묵하였을까
그는 빌라도의 심문이나 백성들의 아우성치는 고소에 잠잠하였습니다. 이러한 그의 침묵의 수난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것은 선지자적 침묵입니다. 그
는 선지자로서 앞날의 승리를 미리 내다보셨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12장 2절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여호와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또한 왕적 침묵이었습니다. 그 자신이 왕이요, 만왕의 왕이요, 만유의 주가 되십니다. 그는 빌라도 총독 앞에서 내가 왕이니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진리의 왕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이 일을 위하여 세상에 왔고, 증거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요
18:37). 그는 자신의 최후 승리를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므로 전혀 다툴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것은 마치 공중에 높이 떠있는 학(鶴)이 좁쌀을 다투어 먹으려고 하는 참새들 가운데 내려앉지 않음과 같습니다. 그리고 제사장적 침묵입니다. 제
사장은 백성을 대신해서 제물을 준비하여 여호와 하나님의 단에 올려놓고 기도한 다음, 말없이 여호와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립니다. 바로 십자가상의 주님은 자신이 여호와 하나님께 제물로 드려지는 시간입니다. 제물은 말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제물은 죽어서 바침(드려짐)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사야도 그(예수)가 그 영혼을 속건 제물로 드렸다고 하였습니다(사 53:10). 그럼에도 그 침묵은 고난입니다. 말을 해야 될 사람이 다른 사람 때문에 말을 못하는 고통은 분명히 대
신 수난입니다. 말을 할 줄 알면서도 다른 사람들 때문에 말을 못하고 벙어리가 됨은 그 자체가 고통입니다.
4. 그것은 주권적 수난-자원적
수난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의 대신 수난, 침묵의 수난은 분명히 죄인을 대신하는, 죄
인 때문에 당하는 수난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대신 수난의 궁극적 원인은 더 높고, 더 깊고, 더 넓고, 더 영원한 데 있습니다. 바로 여호와 하나님 자신이 이 대신 수난의 원인자였습니다. 그래서 이사
야 53장 6절에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며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사람 가운데는 그 누구도, 그 아
무도 죄인 된 사람을 위한 대신 수난이나 대속의 수난을 감당할 자가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인생은 모두 다 함께 제 갈길로 가버린 죄인이었기 때문입니다. 죄인이 죄인의 죄를 속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은 사람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여호와 하나님 자신 편에서
그의 독생자를 사람, 무죄한 사람으로 보내어 사람의 죄값인 사망을(롬 6:23) 대신 지불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사야 53장 10절에도 여호와께서 그로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케 하셨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였습니다(벧전 2:24). 그래서 그는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고 하였습니다(빌 2:8). 이 위대한 사실을 가리켜 사도
요한은 여호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고 하였습니다(요 3:16).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고 하였습니다(요일 4:10).
바로 여기에 죄인 구원 종교로서의 기독교의 독특성, 유일성, 절대성, 소망성이 있는 것입니다. 죄인 속죄의 길은 여호와 하나님 자신께서 정하신 주권적 역사(役事)입니다. 죄인 속죄를 위한 그 아들 예수의 대속적 고난도 여호와 하나님 자신이 제정하신 것입니다. 범죄자를 향한 정
죄자(定罪者)가 여호와 하나님 자신이십니다. 그러므로 죄인 구원을 위한 사죄자(赦罪者)도 여호와 하나님 자신이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정죄자 외에 누가 그 정죄자의 뜻을 만족시킬만한 사죄의 방침을 낼 자가 있겠는가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대속적 고난은 여호와 하나님 자신의 주권적이요 자원적
공의와 사랑의 행위였습니다. 그래서 성부 여호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성자 예수께서 이 일을 성취하시고, 성령 여호와 하나님께서 역사의 현장에서 이 일을 진행(실시)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5. 목적적 수난이었습니다. 이사야 53장 10절에 여호와께서 그로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케 하셨은즉 그 영혼을 속건 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그 씨를 보게 되며 그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의 뜻을 성취하리로다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나오는 '상함'이나 '질고'는 모두 예수의 십자가 수난을 의미합니다. 그 십자가 수난을 가리켜 속건 제물이라고 했습니다. '속건 제물'이란 범법한 자가 그 범법
에 따르는 배상을 해야 해야하는 '배상물'을 가리킵니다. 그 배상물 가운데는 수양도 있었습니다(레 5:15-16, 6:6). 바로 그리스도의 대신 희생의 죽음이 인류의 죄에 대한 배상물이 될 것을 가리킵니다. 그 결과는 씨를 보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배상물 곧 예수
십자가 희생의 결과 죽었던 죄인들이 살아나는 구원의 생명을 가리킵니다. 그 날은 길 것이요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부활의 첫 열매 되신 예수로 말미암아 이어지는 영생 얻은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을 지칭하고 있습니다(롬 6:9, 고전 15:20). 그의 손으로 여호와의 뜻을 성취하리
로다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그의 손'은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의 권능 있는 십자가와 부활의 사역을 가리킵니다. 바로 그의 대신 수난이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성취시키는 목적이 된다는 뜻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뜻은 죄인들이 예수 십자가 앞으로 나오는 것이고, 예수에게 나오는 모든 죄인은 마지막 날에 하나도 남김없이 다 살리는 이것이라고 예수 자신이 선언하였습니다(요 6:38-39). 로마서 4장 25절에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 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고 하였습니다. 그의 수난은 결과적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는(사 53:11) 택자 구원 성취에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그 사람 예수의 수난은 계획
적 수난이요, 필연적 수난이요, 목적적 수난이요, 영광의 수난이 아닌가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십자가의 희생은 죄인을 향한 여호와 하나님 자기 공의와 사랑의 충만
입니다. 더 이상 채울 수 없는 무한대의 넘침입니다. 예수의 대속적 수난은 죄인을 향한 여호와 하나님 자기 사랑의 전 중량(重量)입니다. 그것은 죄인을 향한 여호와 하나님의 최고, 최종의 사랑입니다. 여호와 하나님 자신의 전부입니다. 그 여호와 하나님의 자기 공의와 사랑이 십자가에서 대속의 행동을 하
고 말았습니다. 그는 실로 많은 죄인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하기 위하여 저 십자가
상에서 희생의 빛을 발한 반짝이는 별이었습니다. 구원의 별이었습니다. 속죄의 별이었습니다. 구원의 별이었습니다. 실로 그는 어둠을 이기고 솟아오르는 돋는 해였습니다(눅 1:78). 아니 세상의 빛이었습니다(요 8:12).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습니다(요 1:4). 그는 실로 광명한 새
벽별이었습니다(계 22:16). 그래서 그는 별 중의 별이 되었습니다. 그는 그의 손에 일곱 금촛대와 일곱 별을 붙잡고 세기적인 별들의 전쟁을 주관하고 계십니다(계 2:1).
예수라고 하는 그 사람!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기 위하여 그 얼굴이 타인보다
상했습니다. 그 몸이 찔렸습니다. 상했습니다. 징계를 받았습니다. 채찍에 맞았습니다. 곤욕과 심문을 당했습니다. 끌려갔습니다. 마침내 산 자의 땅에서 끊어짐이 되었습니다. 바로 여기에 '속죄 종교', '대속 종교'의 특색이 있고, 내용이 있고, 의미가 있고, 목적이 있고, 가치가 있고,
영광이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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