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려주일] 고난의 종 예수!
본문
오 거룩하신 주님 그 상하신 머리 조롱과 욕에 싸여 가시관 쓰셨네 아침 해처럼 밝던 주님의 얼굴이 고통과 치욕으로 창백해지셨네
주 당하신 그 고난 죄인 위함이라 내 지은 죄로 인해 주 형벌 받았네 내 주여 비옵나니 이 약한 죄인을 은혜와 사랑으로 늘 지켜주소서
나 무슨 말로 주께 다 감사드리랴 끝없는 주의 사랑 한없이 고마워 보잘 것 없는 나를 주의 것 삼으사 주님만 사랑하며 나 살게 하소서
찬송가 145장에 수록된 이 찬송은 클레아보의 성 버나드(St. Bernard of Clairvaux)가 1153년에 작시한 것입니다.
"거룩하신 머리에 가시관 쓰시고 조롱과 모욕을 당하시면서도 침묵으로 고통을 감당하신 주님! 주님의 고난은 여호와 하나님께 저지른 인간의 불의와 죄악을 용서하기 위한 사랑의 희생이었습니다. 오! 주여, 보잘것없는 이 몸을 위해 질고를 당하시고 생명을 버리신 주님의 사랑에 저는 어쩔 줄 모릅니다. 어찌해야 주님의 지극한 사랑에 고마움을 표시할 수 있을지, 다만 이 몸 바쳐 주님 위해 살리이다"라는 헌신의 기도를 담고 있습니다.
확실히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세상 역사가 계속되는 동안 역사의 중심부에서 커다란 뉴스로 들려지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교독한 이사야서는 B. C 700여년 전에 선지자 이사야가 기록한 성경입니다.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뜻:여호와는 구원이시다)는 선지자 호세아, 아모스, 미가와 동시대인으로 그의 사역은 주전 740년경 즉,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시작되었습니다(사6:1).
이사야서의 중심 주제는 여호와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반역하는 자기 백성들을 심판하시지만(1:2), 궁극적으로는 자기 백성을 구속하시는 분이십니다(41:14,16).
인류 역사가 흐르는 동안 끊임없이 들려오는 노래가 있습니다.
죄와 허물로 죽어버린 인생을 구원하시기 위한 메시야의 고난을 선지자 이사야는 이미 주전 700년경에 갈보리 십자가 사건을 내다보면서 영감 어린 노래를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이사야 53장입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은 본서의 주제일 뿐만 아니라 구속사의 핵심이며, 기독교의 핵심입니다.
올해도 어김없이 종려주일을 맞이하였습니다.
고난주간을 맞아 오늘 본문을 중심으로 "고난의 종 예수"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눌 때 우리를 위해 조롱과 멸시와 배척을 당하시면서 끝내는 십자가에서 대속의 죽음을 담당하신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이제는 우리도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축복이 있기를 축원합니다.
사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은 십자가 형벌의 고난이 전부는 아니었습니다. 그의 전 생애가 고난이었습니다.
전능자요, 창조주이신 여호와 하나님이 피조 세계에 오심(성육신) 그 자체가 고난이었습니다. 생명의 떡이요, 생수의 근원이신 주님이 주리고 목마르신 자체가 고난이었습니다.
백성들의 배척, 제자들의 배반, 종교지도자들의 끊임없는 박해 등 예수님의 전 생애가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이 고난은 자신의 연약 때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죄악을 해결하기 위한 대속의 고난이었다는데 깊은 의의가 있는 것입니다.
고난의 종 예수!
1. 세상에 오신 예수입니다.
본문 2절에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하늘에서 내려온 분이십니다(요3:13). 예수님은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요6:51)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생명의 주(主)로서 이 땅에 오셨지만 오히려 세상은 예수님을 배척하고 말았습니다.
본문 1절에서도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라고 하였습니다.
요한복음 1장 9절에서 11절을 보면 "참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치 아니하였으나"라고 진술하고 있습니다.
피조물이 창조주이신 주인을 알지 못했습니다. 죄악에 빠져 죽은 인생을 구원하러 오신 생명의 주님을 영접치 아니하고 도리어 배척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로마의 압제에서 해방시켜 줄 혁명적이고 정치적인 메시야를 대망했기에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고,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고, 흠모할 만한 아름다움이 없는(2절) 메시야를 외면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여호와 하나님의 본체시나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습니다(빌2:6-8).
세상에 오신 예수님은 그 목적이 대속의 죽음이었습니다(빌2:8).
이 사실을 마태복음 20장 28절은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고난의 종 예수!
2. 우리 위해 고난받은 예수입니다.
본문 4절에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여호와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았습니다.
여기 '연한 순'은 세상에서 얼마든지 핍박을 받을 수 있는 상태를 보여주고 있고, '마른 땅'은 이 세상을 의미하는 것으로 광야 같은 세상에서 아무런 도움도 받지 못하심으로 고독과 빈곤한 상태를 보여줍니다.
3절에 보면 예수님은 간고를 많이 겪었습니다. 이는 비애(悲哀)의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슬픔의 사람이 된 것은 슬픔이 많은 우리를 체휼하시기 위함이요, 우리의 슬픔을 기쁨으로 변화시키기 위함이었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질고를 아는 자'였습니다(3절).
'질고를 안다'는 말은 '질병을 익히 아신다'는 뜻입니다.
이 말은 예수님이 질병을 많이 겪었다는 뜻이 아니고 모든 인생의 고통을 체휼하신다는 뜻입니다(마8:16-17).
예수님이 짊어지신 질고와 수난은 예수님 자신의 허물 때문이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의 죄악 때문이었습니다.
그가 찔림도 우리의 허물 때문이었고, 그가 상함도 우리의 죄악 때문이었습니다.
그가 징계를 받은 것도, 그가 채찍에 맞음도 모두 다 우리의 죄악 때문이었습니다.
결코 주님은 자신의 죄악 때문에 고난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그 분은 결코 죄를 범치도 않으셨고, 죄를 알지도 못하신 분이었습니다(히4:15).
예수님은 우리의 죄악을 대신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양손과 양발을 커다란 못에 찔렸습니다. 그의 머리는 가시면류관으로 찔려 피가 얼굴을 적셨습니다. 무정한 로마 군병이 예수님의 옆구리를 창으로 찔러 물과 피가 다 쏟아졌습니다.
우리의 죄악 때문에 그가 세상의 여러 가지 것들로 찔려 피를 흘렸습니다.
이것은 역사적인 사실로서 예수님의 재림 때에 그를 찌른 자들이 예수님을 볼 것임을 성경은 분명히 증거하고 있습니다(계1:7).
예수님은 우리의 죄악 때문에 대신 상하셨습니다(5절). 그의 상하심은 채찍에 맞은 결과입니다.
주님이 맞은 채찍은 당시 사형수들에게나 노예들에게 무차별하게 내리쳤던 채찍으로 여러 갈래의 가죽끈마다 쇠붙이와 납덩이가 달려 있어 채찍에 맞을 때마다 살갗이 터져 고통을 당하는 무서운 형벌이었습니다.
이러한 처절한 주님의 모습을 이사야 52장 14절에서는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왕에는 그 얼굴이 타인보다 상하였고 그 모양이 인생보다 상하였으므로 무리가 그를 보고 놀랐거니와"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7절).
하늘의 열두 영 더되는 천군 천사를 불러 모든 것을 제거할 수 있었으나 속죄 사역을 이루어야 하는 여호와 하나님의 뜻 때문에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처럼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능력이 있으나 없는 자처럼 잠잠하셨습니다.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시나 모르는 자처럼 잠잠했습니다.
의로우신 그 분이 죄인처럼 죽으시면서도 침묵을 지키셨습니다.
강포를 행치 않으신 분이셨지만(9절) 억울한 재판 판결 앞에서도 침묵으로 일관하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이렇게 찔림과 상함과 징계와 채찍에 맞음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우리 대신 죽음으로 당하셔야 했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돌발적인 사건도 아니었고, 우연히 발생한 죽음도 아니었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 3절에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라고 하심으로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곧 예언 성취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여호와 하나님의 뜻에 기인한 것입니다.
본문 6절에서도 "...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모든 인생이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여호와 하나님의 인도하시는 길로 가지 않고 다 각기 제 길로 갔기에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켰습니다.
10절에서도 여호와 하나님은 예수를 속건 제물로 삼으셨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속건 제물은 죄를 위하여 드려지는 제물을 가리킵니다(레5:6).
히브리서 9장 28절에서도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 "라고 하였습니다.
주님이 속건 제물로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은 우리를 위한 고난의 절정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라고 하심으로 여호와 하나님이 구별하신 선택된 자들의 속죄 사역 완성을 선언하셨습니다.
실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한, 우리 위해 고난받으신 승리하신 주님의 모습입니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무덤이 악인과 함께 되었습니다(9절).
이는 죽음을 당하실 이유가 없으신 주님이 악인처럼 죽으시리라는 것을 예언한 것입니다.
예수님에게는 무덤으로 쓸만한 자기 소유의 땅이 없었으나 그 묘실이 부자와 함께 되었습니다(9절,마27:57-60).
고난의 종 예수!
3. 우리에게 축복을 주신 예수입니다.
본문 5절에 "...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은 축복은
① 평화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은 죄인이 여호와 하나님과 화목케 되는 길이었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여호와 하나님과 화목케 됨을 뜻합니다(고후5:8).
죄악으로 말미암아 진노의 대상이었던 인생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여호와 하나님과 화목케 되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과 원수 관계에 있던 인간의 회복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루어졌습니다.
로마서 5장 10절에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여호와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이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에베소서 2장 16절에서도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여호와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라고 하였습니다.
골로새서 1장 20절에서도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심이라"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②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본문 10절에 "... 그 영혼을 속건 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그 씨를 보게 되며... "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그 씨"는 '영적 후손'을 의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게 되어(11절) 칭의(稱義)를 얻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의롭게 되는 것도,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도 예수를 통해서만이 가능합니다.
요한복음 1장 12절에서도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세상적인 어떤 조건도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데 도움을 주지 못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이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된 권세를 얻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오늘 고난의 종 예수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들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지시고 십자가에 돌아가심은 인류 역사 이래로 최고 최대의 사건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과거사로 끝나버린 사건이 아닙니다. 오늘도 계속해서 대속의 십자가 사건은 뭇사람들을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로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죄와 허물로 죽어버린 소망 없는 인생에게 여호와 하나님이신 그 분이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인생의 죄를 친히 담당하시고 우리를 대신하여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그 고난의 절정은 갈보리 산 위의 십자가였습니다.
그 십자가의 사건은 우리에게 여호와 하나님의 축복을 가져다주었습니다. 그것은 곧 여호와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우리가 이제는 평화를 누리는 것이요, 십자가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어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바울은 이 진리를 알고 난 다음부터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힌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않기로 작정했습니다(고전2:2).
그는 오직 십자가만을 자랑하며 살았습니다.
구속의 은총을 받은 우리들도 오직 십자가만을 자랑하며, 나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감사함으로 지고 저 천성을 향해서 오늘도 한 걸음 한 걸음 승리의 걸음을 내딛는 십자가의 군병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주 당하신 그 고난 죄인 위함이라 내 지은 죄로 인해 주 형벌 받았네 내 주여 비옵나니 이 약한 죄인을 은혜와 사랑으로 늘 지켜주소서
나 무슨 말로 주께 다 감사드리랴 끝없는 주의 사랑 한없이 고마워 보잘 것 없는 나를 주의 것 삼으사 주님만 사랑하며 나 살게 하소서
찬송가 145장에 수록된 이 찬송은 클레아보의 성 버나드(St. Bernard of Clairvaux)가 1153년에 작시한 것입니다.
"거룩하신 머리에 가시관 쓰시고 조롱과 모욕을 당하시면서도 침묵으로 고통을 감당하신 주님! 주님의 고난은 여호와 하나님께 저지른 인간의 불의와 죄악을 용서하기 위한 사랑의 희생이었습니다. 오! 주여, 보잘것없는 이 몸을 위해 질고를 당하시고 생명을 버리신 주님의 사랑에 저는 어쩔 줄 모릅니다. 어찌해야 주님의 지극한 사랑에 고마움을 표시할 수 있을지, 다만 이 몸 바쳐 주님 위해 살리이다"라는 헌신의 기도를 담고 있습니다.
확실히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세상 역사가 계속되는 동안 역사의 중심부에서 커다란 뉴스로 들려지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교독한 이사야서는 B. C 700여년 전에 선지자 이사야가 기록한 성경입니다.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뜻:여호와는 구원이시다)는 선지자 호세아, 아모스, 미가와 동시대인으로 그의 사역은 주전 740년경 즉,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시작되었습니다(사6:1).
이사야서의 중심 주제는 여호와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반역하는 자기 백성들을 심판하시지만(1:2), 궁극적으로는 자기 백성을 구속하시는 분이십니다(41:14,16).
인류 역사가 흐르는 동안 끊임없이 들려오는 노래가 있습니다.
죄와 허물로 죽어버린 인생을 구원하시기 위한 메시야의 고난을 선지자 이사야는 이미 주전 700년경에 갈보리 십자가 사건을 내다보면서 영감 어린 노래를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이사야 53장입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은 본서의 주제일 뿐만 아니라 구속사의 핵심이며, 기독교의 핵심입니다.
올해도 어김없이 종려주일을 맞이하였습니다.
고난주간을 맞아 오늘 본문을 중심으로 "고난의 종 예수"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눌 때 우리를 위해 조롱과 멸시와 배척을 당하시면서 끝내는 십자가에서 대속의 죽음을 담당하신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이제는 우리도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축복이 있기를 축원합니다.
사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은 십자가 형벌의 고난이 전부는 아니었습니다. 그의 전 생애가 고난이었습니다.
전능자요, 창조주이신 여호와 하나님이 피조 세계에 오심(성육신) 그 자체가 고난이었습니다. 생명의 떡이요, 생수의 근원이신 주님이 주리고 목마르신 자체가 고난이었습니다.
백성들의 배척, 제자들의 배반, 종교지도자들의 끊임없는 박해 등 예수님의 전 생애가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이 고난은 자신의 연약 때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죄악을 해결하기 위한 대속의 고난이었다는데 깊은 의의가 있는 것입니다.
고난의 종 예수!
1. 세상에 오신 예수입니다.
본문 2절에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하늘에서 내려온 분이십니다(요3:13). 예수님은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요6:51)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생명의 주(主)로서 이 땅에 오셨지만 오히려 세상은 예수님을 배척하고 말았습니다.
본문 1절에서도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라고 하였습니다.
요한복음 1장 9절에서 11절을 보면 "참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치 아니하였으나"라고 진술하고 있습니다.
피조물이 창조주이신 주인을 알지 못했습니다. 죄악에 빠져 죽은 인생을 구원하러 오신 생명의 주님을 영접치 아니하고 도리어 배척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로마의 압제에서 해방시켜 줄 혁명적이고 정치적인 메시야를 대망했기에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고,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고, 흠모할 만한 아름다움이 없는(2절) 메시야를 외면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여호와 하나님의 본체시나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습니다(빌2:6-8).
세상에 오신 예수님은 그 목적이 대속의 죽음이었습니다(빌2:8).
이 사실을 마태복음 20장 28절은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고난의 종 예수!
2. 우리 위해 고난받은 예수입니다.
본문 4절에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여호와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았습니다.
여기 '연한 순'은 세상에서 얼마든지 핍박을 받을 수 있는 상태를 보여주고 있고, '마른 땅'은 이 세상을 의미하는 것으로 광야 같은 세상에서 아무런 도움도 받지 못하심으로 고독과 빈곤한 상태를 보여줍니다.
3절에 보면 예수님은 간고를 많이 겪었습니다. 이는 비애(悲哀)의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슬픔의 사람이 된 것은 슬픔이 많은 우리를 체휼하시기 위함이요, 우리의 슬픔을 기쁨으로 변화시키기 위함이었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질고를 아는 자'였습니다(3절).
'질고를 안다'는 말은 '질병을 익히 아신다'는 뜻입니다.
이 말은 예수님이 질병을 많이 겪었다는 뜻이 아니고 모든 인생의 고통을 체휼하신다는 뜻입니다(마8:16-17).
예수님이 짊어지신 질고와 수난은 예수님 자신의 허물 때문이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의 죄악 때문이었습니다.
그가 찔림도 우리의 허물 때문이었고, 그가 상함도 우리의 죄악 때문이었습니다.
그가 징계를 받은 것도, 그가 채찍에 맞음도 모두 다 우리의 죄악 때문이었습니다.
결코 주님은 자신의 죄악 때문에 고난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그 분은 결코 죄를 범치도 않으셨고, 죄를 알지도 못하신 분이었습니다(히4:15).
예수님은 우리의 죄악을 대신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양손과 양발을 커다란 못에 찔렸습니다. 그의 머리는 가시면류관으로 찔려 피가 얼굴을 적셨습니다. 무정한 로마 군병이 예수님의 옆구리를 창으로 찔러 물과 피가 다 쏟아졌습니다.
우리의 죄악 때문에 그가 세상의 여러 가지 것들로 찔려 피를 흘렸습니다.
이것은 역사적인 사실로서 예수님의 재림 때에 그를 찌른 자들이 예수님을 볼 것임을 성경은 분명히 증거하고 있습니다(계1:7).
예수님은 우리의 죄악 때문에 대신 상하셨습니다(5절). 그의 상하심은 채찍에 맞은 결과입니다.
주님이 맞은 채찍은 당시 사형수들에게나 노예들에게 무차별하게 내리쳤던 채찍으로 여러 갈래의 가죽끈마다 쇠붙이와 납덩이가 달려 있어 채찍에 맞을 때마다 살갗이 터져 고통을 당하는 무서운 형벌이었습니다.
이러한 처절한 주님의 모습을 이사야 52장 14절에서는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왕에는 그 얼굴이 타인보다 상하였고 그 모양이 인생보다 상하였으므로 무리가 그를 보고 놀랐거니와"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7절).
하늘의 열두 영 더되는 천군 천사를 불러 모든 것을 제거할 수 있었으나 속죄 사역을 이루어야 하는 여호와 하나님의 뜻 때문에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처럼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능력이 있으나 없는 자처럼 잠잠하셨습니다.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시나 모르는 자처럼 잠잠했습니다.
의로우신 그 분이 죄인처럼 죽으시면서도 침묵을 지키셨습니다.
강포를 행치 않으신 분이셨지만(9절) 억울한 재판 판결 앞에서도 침묵으로 일관하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이렇게 찔림과 상함과 징계와 채찍에 맞음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우리 대신 죽음으로 당하셔야 했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돌발적인 사건도 아니었고, 우연히 발생한 죽음도 아니었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 3절에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라고 하심으로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곧 예언 성취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여호와 하나님의 뜻에 기인한 것입니다.
본문 6절에서도 "...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모든 인생이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여호와 하나님의 인도하시는 길로 가지 않고 다 각기 제 길로 갔기에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켰습니다.
10절에서도 여호와 하나님은 예수를 속건 제물로 삼으셨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속건 제물은 죄를 위하여 드려지는 제물을 가리킵니다(레5:6).
히브리서 9장 28절에서도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 "라고 하였습니다.
주님이 속건 제물로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은 우리를 위한 고난의 절정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라고 하심으로 여호와 하나님이 구별하신 선택된 자들의 속죄 사역 완성을 선언하셨습니다.
실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한, 우리 위해 고난받으신 승리하신 주님의 모습입니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무덤이 악인과 함께 되었습니다(9절).
이는 죽음을 당하실 이유가 없으신 주님이 악인처럼 죽으시리라는 것을 예언한 것입니다.
예수님에게는 무덤으로 쓸만한 자기 소유의 땅이 없었으나 그 묘실이 부자와 함께 되었습니다(9절,마27:57-60).
고난의 종 예수!
3. 우리에게 축복을 주신 예수입니다.
본문 5절에 "...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은 축복은
① 평화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은 죄인이 여호와 하나님과 화목케 되는 길이었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여호와 하나님과 화목케 됨을 뜻합니다(고후5:8).
죄악으로 말미암아 진노의 대상이었던 인생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여호와 하나님과 화목케 되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과 원수 관계에 있던 인간의 회복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루어졌습니다.
로마서 5장 10절에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여호와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이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에베소서 2장 16절에서도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여호와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라고 하였습니다.
골로새서 1장 20절에서도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심이라"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②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본문 10절에 "... 그 영혼을 속건 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그 씨를 보게 되며... "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그 씨"는 '영적 후손'을 의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게 되어(11절) 칭의(稱義)를 얻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의롭게 되는 것도,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도 예수를 통해서만이 가능합니다.
요한복음 1장 12절에서도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세상적인 어떤 조건도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데 도움을 주지 못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이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된 권세를 얻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오늘 고난의 종 예수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들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지시고 십자가에 돌아가심은 인류 역사 이래로 최고 최대의 사건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과거사로 끝나버린 사건이 아닙니다. 오늘도 계속해서 대속의 십자가 사건은 뭇사람들을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로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죄와 허물로 죽어버린 소망 없는 인생에게 여호와 하나님이신 그 분이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인생의 죄를 친히 담당하시고 우리를 대신하여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그 고난의 절정은 갈보리 산 위의 십자가였습니다.
그 십자가의 사건은 우리에게 여호와 하나님의 축복을 가져다주었습니다. 그것은 곧 여호와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우리가 이제는 평화를 누리는 것이요, 십자가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어 여호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바울은 이 진리를 알고 난 다음부터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힌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않기로 작정했습니다(고전2:2).
그는 오직 십자가만을 자랑하며 살았습니다.
구속의 은총을 받은 우리들도 오직 십자가만을 자랑하며, 나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감사함으로 지고 저 천성을 향해서 오늘도 한 걸음 한 걸음 승리의 걸음을 내딛는 십자가의 군병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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