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려주일] 고난을 받으신 예수님
본문
우리는 계속하여 우리가 믿는 믿음의 핵심적인 내용을 고백하고 있는 사도신경을 연구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연구할 믿음의 내용은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셨다"는 것입니다. 앞에서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동정녀 마리아의 몸을 통하여 이 세상에 사람으로 오셨다는 사실을 연구한 바가 있습니다. 오늘부터 연구할 내용은 사람으로 오신 예수님이 이 세상에서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내용들입니다.
예수님의 고난과 죽으심을 전파하고 가르치는 일은 독특한 일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 역사가 평가하는 위인들의 전기를 읽어보아도 그 위인들의 행적은 많이 강조되고 있어도 그 죽음에 대하여서는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독특하게도 우리가 믿는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으심에 대하여 특별한 비중을 두고 전파합니다. 그것은 그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으심이 지니는 중요성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으심에 대하여 계속하여 전파하고 이 점을 강조하고 있는 것은 그 사건이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기 위한 구속사역의 핵심을 이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연구할 본문의 주제는 예수님이 고난을 받으신 사건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한 구원의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이 주제를 중심으로 첫 번째로는 예수님의 고난에 빌라도가 개입된 이유, 두 번째로는 예수님의 고난과 우리와의 관계문제, 세 번째로는 예수님의 고난의 결과에 대하여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빌라도가 개입된 이유
우리 사도신경에는 빌라도라고 하는 사람의 이름이 개입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이름이 왜 개입되어 있겠습니까 이 빌라도는 예수님 당시 유대 지방을 다스리던 로마의 총독이었습니다. 빌라도는 유대의 제 5대 총독이었습니다. 그는 A. D. 26년부터 36년까지 유대를 통치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빌라도의 재직시기와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과 맞물려 있다는 것은 흥미있는 일입니다. 빌라도라는 인물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의 정치제도를 잠시 살펴보는 것이 유익할 것입니다. 당시에는 로마가 세계를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로마는 세계를 지배하면서도 각 식민지마다 왕 제도를 인정하여 그 나라 사람을 왕으로 삼았습니다. 로마는 이들 왕에게 자치권을 주어서 정치를 하게 하면서도 반드시 로마에 복종하도록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탄생할 당시에 유대는 헤롯이 다스렸습니다. 그는 약 40년간 왕위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죽으면서 그 땅을 자기의 네 아들들에게 분할해 주면서 이들에게 왕의 지위를 줄 것을 로마에 요청하였습니다.
로마는 이 청을 받아들여서 네 명의 왕을 세웠는데 이들의 왕의 명칭이 성경에 분봉왕(헬. )으로 나오고 있습니다. 분봉왕의 문자적인 의미는 1/4통치자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한 왕권을 네 등분하였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헤롯은 그의 네 아들중 헤롯 안디바에게는 갈릴리를 주었고, 헤롯 빌립에게는 이두래와 드라고닛을, 루사니아에게는 다메섹을, 아켈라오에게는 유대와 사마리아를 분할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유대와 사마리아를 다스리던 아켈라오는 잔인 무도하였고 포학하였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자주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은 로마 황제에게 탄원을 하여 아켈라오를 파면시켜 달라고 요청하자 로마는 이 청을 받아들였습니다. 이 때부터 유대와 사마리아는 로마 총독이 부임해서 다스렸습니다. 빌라도는 그 중에 한 사람입니다.
빌라도라고 하면 가장 먼저 우리의 머리에 떠올리게 되는 것은 예수님을 재판하여 십자가에 못박게 하는 인물로 떠올립니다. 당시 유대인들의 최고의사 결정기구인 산헤드린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일종의 공회의 성격이었습니다. 이 공회에서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그래서 대제사장들은 공회에서 결정한대로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넘겨 로마법에 따라 십자가에 못을 박아 죽이기를 원하였습니다.
이들이 빌라도에게 예수님을 넘긴 것은 당시에 유대인의 법정에서는 사형판결을 내려 죽일 수 있는 권한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빌라도에게 예수님을 보내어 로마법에 따라 최고형인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도록 청원한 것입니다. 그래서 빌라도가 재판하여 예수님을 결국 십자가에 못박게 하였습니다. 빌라도가 예수님을 심문하시는 내용 가운데 예수님에 관하여 중요한 한 가지 사실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은 죄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심문하시고 난 뒤에 유대인들에게 나가서 그는 말하기를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겠느라"(요18:38; 19:6)고 하였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을 심문한 결과 예수님에게 죄가 없다고 하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을 풀어 줄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는 당시 유대인의 가장 중요한 명절인 유월절이 되면 한 사람을 놓아주는 관례에 따라 예수님과 강도인 바라바 중에 한 사람을 놓아 줄 것인데 한 사람을 택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백성들은 예수님 대신에 바라바를 선택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이 소리를 지르며 "이 사람을 놓으면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니이다 무릇 자기를 왕이라 하는 자는 가이사를 배반하는 것이니이다"(요19:12절)라고 하였습니다.
빌라도가 재판 결과 죄가 없음을 보고도 예수님을 석방하지 못하고 대신 바라바를 놓아준 것은 민란이 일어나는 것을 두려워하였기 때문입니다(마27:24). 그리고 자신의 정치적 생명을 염려하였기 때문이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빌라도의 행동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이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죄가 없으신 분이심에도 불구하고 죽으셨다고 하는 것을 증거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죄가 없으심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바로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한 것입니다(벧전3:18).
특히 빌라도에게 심문을 받으신 사건이 기록된 것은 두 가지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첫 번째로는 예수님이 고난과 십자가에 죽으시는 사건이 사람들이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라 실제 있었던 역사라고 하는 것입니다. 빌라도는 A. D. 26-36년 어간에 유대를 통치한 로마의 총독이었습니다. 이것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우리 역사 가운데 이루셨다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 점을 이해하는 것은 참 중요합니다.
특히 우리 사도신경이 그렇게 말하고 있는데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사도신경이 잘못 번역되어 이 점을 잘 드러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고백하는 신앙고백 가운데 사도신경에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라고 되어 있습니다만 원문은 "본디오 빌라도가 통치하는 시대에 고난을 받으셨다"(라틴. passus sub Pontio Pilato, suffered under Pontius Pilate)라고 해야 합니다. 그리고 성경에서 예수님 자신도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을 것을 말씀하지 않으시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고난을 당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16:21; 눅9:22).
그래서 예수님이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셨다고 말하는 것은 성경의 문맥에도 옳지 않습니다. 원문이 의미하고 있는 바대로 "빌라도가 통치하던 시대에 고난을 당하셨다. "고 번역해야 합니다. 이 의미는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죽으신 사건은 사람들이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도신경에 빌라도의 이름이 개입된 첫 번째 이유는 여호와 하나님의 구원이 역사 가운데 이루셨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본디오 빌라도의 이야기가 기록된 두 번째 이유는 여호와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행동과 세상 정부와의 관계를 보여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고난을 받은 역사를 보면 빌라도가 사형을 내리지만 실제로는 이 모든 일이 여호와 하나님의 구원역사 가운데서 여호와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구원을 이루시되 세상의 여러 제도나 심지어 국가 권력을 통하여서도 이루신다고 하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특히 흥미있는 부분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넘겨준 모든 일이 자기의 계획대로 되는 것같으나 오히려 여호와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성취하는 일임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래서 역사의 주도권을 사람들이 자기 스스로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그 역사의 배후에서 여호와 하나님이 주도권(initiative)을 가지고 계신다고 하는 사실을 잘 볼 수가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임으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지만 오히려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이 되었습니다. 심지어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유대인들이 로마인의 권력을 빌어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였으나 그것마저도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한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한 방편으로 사용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도신경에 빌라도의 이름이 개입된 두 번째 이유는 세상의 역사와 정부는 여호와 하나님의 구원역사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2. 예수님의 고난과 우리와 관계
그러면 예수님께서 왜 이 세상에 오셔서 빌라도가 통치하던 시대에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죽으셨을까요 예수님의 고난을 받으신 목적과 우리와의 관계에 대하여 가장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는 본문이 "종의 노래"라고 알려진 이사야 53장입니다. 여기 3절부터는 예수님이 세상에서 고난을 받으신 내용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멸시를 받고 싫어버린 바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본문에서 예수님을 간고를 많이 겪었고 질고를 아는 자( knowing sickness)로 묘사하였습니다.
표준새번역 성경에 이 부분은 번역하기를 "그는 언제나 병을 앓고 있었다"라고 번역하였는데 이 번역은 예수님이 항상 병자로 있었다고 해석한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의 의미는 그것이 아니고 예수님께서 고난을 받으심으로 인간이 겪는 간고나 고통이나 슬픔이 무엇인지 아신다고 하는 말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고난에 대하여 계속 설명하고 있습니다.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 그런데 이 구절을 정확하게 번역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 문제는 누가 얼굴을 가리우느냐 하는 것인데 이 절에서의 강조점은 고난받는 종이 그 얼굴을 가리우는 것이 아니라 고난을 받은 예수님에게 등을 돌리고 다 떠나갔다는 말입니다. 이 말씀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귀하게 여기지 아니하고 멸시한다는 예언입니다. 이 예언이 성취된 신약성경을 보면 그를 "호산나 다윗의 자손으로 오시는 이여!" 하며 환영하는 자들은 사라지고 심지어 제자들까지도 두려워하며 도망쳐 버렸습니다.
심지어 예수를 위하여 죽을 각오까지 되었다고 장담하던 베드로까지 그를 모른다고 부인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채찍에 맞으며 수치를 당함으로 고난과 멸시를 당하였습니다. 그의 머리에는 조롱과 고통의 가시관이 눌러져 있었고 악인들이 그러한 모습을 보고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마27:27-31; 막15:16-20; 요19:2,3)라고 희롱하였습니다. 모든 사람들에게서 멸시를 받고 싫어버린바가 되었고 아무도 그를 귀한 자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이러한 예수님의 고난과 슬픔은 누구 때문인 줄을 아십니까 이사야 53:4의 말씀을 보십시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여호와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 여기에 묘한 아이러니(irony)를 볼 수 있습니다. 실제로 여호와의 종이 고난을 당하는 것은 우리의 질고와 슬픔을 대신 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이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니라 종이 잘못하여 여호와 하나님에게 벌을 받는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이 구절에서 "그"(he)라는 대명사와 "우리"(we)라는 대명사가 서로 대조가 되고 있는 것을 보십시오. 이러한 대조는 여호와의 종이신 "그"가 행하신 일과 "우리"가 행한 것 사이에 나타나는 분명한 차이점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는 우리의 슬픔과 질고를 담당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 자신의 범죄 때문에 고난을 받는다고 생각하였다는 것입니다.
신약에서 마태는 예수님이 귀신들린 자와 병든 자들을 고치신 사건을 가리켜 이사야서에 있는 이 말씀을 인용하여서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라고 하는 말씀을 이루었다고 하였습니다(마8:16,17). 이사야 선지자가 이 본문에서 우리에게 보여주고자 하는 분명한 목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여호와의 종이 지은 죄로 인하여 야기되는 모든 슬픔과 질고를 담당하신 것은 우리를 위한 고난이라는 것입니다.
이어서 이사야 53:5-6에서는 예수님의 고난의 절정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의 고난과 우리와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를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5절의 말씀은 우리 번역에는 빠져있습니다만 "그러나"(, But NASB, N4)라는 역접부사로 시작합니다. 이것은 앞의 사실과 정반대의 사상을 가르쳐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앞에서 살펴본 이사야 53:3-4에서 예수님의 고난에 대한 잘못된 생각을 바로잡고 예수님이 왜 그러한 고난을 받아야 하는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5절의 사상을 우리가 정리해 보면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가 자신의 죄로 인하여 고난을 받으며 여호와 하나님께 맞았다고 생각하였으나 그가 실제로 여호와 하나님에게 벌을 받는 이유는 "우리의 허물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찔리고 상함을 받은 이유는 우리의 죄악과 허물 때문입니다.
그 죄악과 허물이 무엇인지 6절에서 밝혀주기를 "우리는 다 양같아서 그릇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다. "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목자가 지시해 준 길로 가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행하였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보여주신 길로 가지 않고 오히려 자신의 길을 따라가는 것을 말합니다. 이 불행한 사실이 창세기 3장에서부터 계속해서 볼 수 있습니다. 인간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고 자기 생각대로 살았습니다.
성경에 보면 사사기라는 책이 있습니다. 여기에 보면 인간의 생각대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때에 왕이 없음으로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다. "(삿17:6; 25:25) 사람은 마땅히 여호와 하나님을 알고 섬겨야 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자기 생각대로 행하였습니다. 이것이 죄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이러한 인간을 사랑하셔서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새 사람을 만드시기 위하여 예수님을 보내어서 우리가 받아야 할 형벌을 대신 받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6절 하반절에 "우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다. "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그 범죄가 포함하고 있는 모든 죄의 책임과 거기에 따른 형벌을 다 담당시키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은 죄로 인하여 바로 우리가 받아야 할 형벌을 여호와의 종이신 그리스도에게 다 담당시키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진노가 죄를 지은 우리가 아니라 죄없으신 예수님에게 내려졌습니다. 이것이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속죄교리입니다. 성경의 모든 사건은 이 속죄사건과 관련이 되어 있습니다.
3. 예수님의 고난의 결과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고난을 받으신 결과는 무엇일까요 여호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어 자유롭게 여호와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고난의 결과가 이사야 53:5에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 이 말씀에서 "그"와 "우리"의 대조를 보십시오. 주님이 고난을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얻게 되었습니다.
여기에 나타나는 평화와 나음은 죄로부터의 자유와 구원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죽어 주심으로 인하여 여호와 하나님과 평화로운 관계가 되었습니다. 이 평화는 우리가 이전에 지은 죄로 인하여 여호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놓여있었던 장벽을 제거하시고 여호와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바른 관계가 되었다고 하는 말입니다. 신약에서 사도 바울이 에베소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이것을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에베소서 2:14-16의 말씀을 보십시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하시고 원수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의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여호와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려 하심이라. "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의 종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우리의 모든 죄악을 담당하시고 고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여호와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평화로운 관계가 되게 하셨다고 하는 이 속죄교리를 믿습니까 이 교리는 성경의 가장 중심되는 교리입니다. 오늘날 교리가 별로 인기를 얻지 못하고 있습니다. 교리공부가 초대교회나 종교개혁시대에만 하더라도 가장 중요하고 가치있는 제도였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이 교리를 배우는 것을 터부시 하는 것이 교회의 보편적인 형편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교리의 중요성을 모르고 있거나 또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예수님에게 전가시켰다고 하는 속죄교리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말로 구원받지 못하였다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에 다니고 있는 사람들(church-goers)은 교회내의 프로그램에 흥미를 가지고 있고 그 프로그램을 방해하고 있는 것이 교리라고 생각하는 경향들이 교회 안에 지배적입니다. 하지만 교리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을 담고 있는지를 체계적으로 정리한 것입니다.
에드워드 영(Edward J. Young) 교수는 이 교리의 중요성에 대하여 말하기를 "이 세대에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은 교리적 가르침과 교리적 설교의 부흥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받아들이고 믿고 있는 교리의 핵심적인 내용이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담당하기 위하여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죽으셨다고 하는 속죄교리입니다. 이 교리는 성경의 모든 교리 가운데 가장 중심되는 교리입니다. 아직 이 교리를 붙잡지 못하신 분은 이 교리를 배우고 붙잡으십시오. 이 교리가 우리의 인생과 운명을 바꾸는 것입니다. 이미 이 교리를 이해하고 이 진리를 붙잡은 사람은 예수님으로 인하여 자신의 죄가 용서함을 받았다고 하는 사실을 알고 감사하며 주님의 말씀을 좇아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여전히 사람들은 이 속죄교리의 핵심인 예수님의 고난을 자기와 연관지어 생각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8절에 이러한 사상이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가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 갔으니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산 자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받은 내 백성의 허물을 인함이라 하였으리요. " 이 말씀은 당시의 사람들도 예수님의 고난과 십자가의 죽으심을 자기 백성의 죄를 담당하기 위한 사건으로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인간의 실상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고난을 당하신 사건으로 이해하고 이 사건의 중요성을 우리의 삶과 관련시키며 이 은혜를 감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우리가 예수를 모를 때 지금 모든 불신자들이나 세상이 하고 있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이러한 고난을 자신의 삶과 연관짓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우리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고 자신이 죄로 말미암아 그렇게 되었고 나와 관계없는 하나의 죽음으로 이해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지금 현재 우리는 예수님의 이 고난이 바로 우리의 지은 죄로 말미암아 야기되는 모든 슬픔과 질고를 담당하시기 위한 구원의 사건임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고난의 성격을 이해하고 그 사건이 바로 우리자신의 삶과 연계되어 있다고 하는 사실을 이해하게 된다면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세계를 보게될 것이고 거기에 따라 우리의 삶을 조정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적극적으로 여호와 하나님과 교제하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살 때 여러 가지 문제들을 만나기도 하고, 그것 때문에 고난을 겪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때에 고난을 받으신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히브리서 기자는 우리에게 예수님의 고난과 관련하여 두 가지 사실을 우리에게 적용해 주고 있습니다. "저가 시험을 많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 "(히2:17-18)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세상에서 여러 가지 문제들로 인하여 어려움과 고난을 당하고 있습니까 은혜의 보좌로 나아가십시오. 예수님은 빌라도가 통치하던 시대에 죄없으신 분으로서 우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이 고난을 받으신 것은 우리를 죄에서 구속하셔서 자유롭게 여호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님께 나아갈 때 우리의 연약함을 몸소 체험하셨던 주님께서 우리의 문제를 아시고 도와주실 것입니다. 이 일은 사람들이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고 역사 가운데 실제 일어난 일입니다.
예수님의 고난과 죽으심을 전파하고 가르치는 일은 독특한 일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 역사가 평가하는 위인들의 전기를 읽어보아도 그 위인들의 행적은 많이 강조되고 있어도 그 죽음에 대하여서는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독특하게도 우리가 믿는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으심에 대하여 특별한 비중을 두고 전파합니다. 그것은 그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으심이 지니는 중요성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으심에 대하여 계속하여 전파하고 이 점을 강조하고 있는 것은 그 사건이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기 위한 구속사역의 핵심을 이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연구할 본문의 주제는 예수님이 고난을 받으신 사건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한 구원의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이 주제를 중심으로 첫 번째로는 예수님의 고난에 빌라도가 개입된 이유, 두 번째로는 예수님의 고난과 우리와의 관계문제, 세 번째로는 예수님의 고난의 결과에 대하여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빌라도가 개입된 이유
우리 사도신경에는 빌라도라고 하는 사람의 이름이 개입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이름이 왜 개입되어 있겠습니까 이 빌라도는 예수님 당시 유대 지방을 다스리던 로마의 총독이었습니다. 빌라도는 유대의 제 5대 총독이었습니다. 그는 A. D. 26년부터 36년까지 유대를 통치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빌라도의 재직시기와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과 맞물려 있다는 것은 흥미있는 일입니다. 빌라도라는 인물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의 정치제도를 잠시 살펴보는 것이 유익할 것입니다. 당시에는 로마가 세계를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로마는 세계를 지배하면서도 각 식민지마다 왕 제도를 인정하여 그 나라 사람을 왕으로 삼았습니다. 로마는 이들 왕에게 자치권을 주어서 정치를 하게 하면서도 반드시 로마에 복종하도록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탄생할 당시에 유대는 헤롯이 다스렸습니다. 그는 약 40년간 왕위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죽으면서 그 땅을 자기의 네 아들들에게 분할해 주면서 이들에게 왕의 지위를 줄 것을 로마에 요청하였습니다.
로마는 이 청을 받아들여서 네 명의 왕을 세웠는데 이들의 왕의 명칭이 성경에 분봉왕(헬. )으로 나오고 있습니다. 분봉왕의 문자적인 의미는 1/4통치자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한 왕권을 네 등분하였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헤롯은 그의 네 아들중 헤롯 안디바에게는 갈릴리를 주었고, 헤롯 빌립에게는 이두래와 드라고닛을, 루사니아에게는 다메섹을, 아켈라오에게는 유대와 사마리아를 분할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유대와 사마리아를 다스리던 아켈라오는 잔인 무도하였고 포학하였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자주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은 로마 황제에게 탄원을 하여 아켈라오를 파면시켜 달라고 요청하자 로마는 이 청을 받아들였습니다. 이 때부터 유대와 사마리아는 로마 총독이 부임해서 다스렸습니다. 빌라도는 그 중에 한 사람입니다.
빌라도라고 하면 가장 먼저 우리의 머리에 떠올리게 되는 것은 예수님을 재판하여 십자가에 못박게 하는 인물로 떠올립니다. 당시 유대인들의 최고의사 결정기구인 산헤드린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일종의 공회의 성격이었습니다. 이 공회에서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그래서 대제사장들은 공회에서 결정한대로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넘겨 로마법에 따라 십자가에 못을 박아 죽이기를 원하였습니다.
이들이 빌라도에게 예수님을 넘긴 것은 당시에 유대인의 법정에서는 사형판결을 내려 죽일 수 있는 권한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빌라도에게 예수님을 보내어 로마법에 따라 최고형인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도록 청원한 것입니다. 그래서 빌라도가 재판하여 예수님을 결국 십자가에 못박게 하였습니다. 빌라도가 예수님을 심문하시는 내용 가운데 예수님에 관하여 중요한 한 가지 사실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은 죄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심문하시고 난 뒤에 유대인들에게 나가서 그는 말하기를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겠느라"(요18:38; 19:6)고 하였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을 심문한 결과 예수님에게 죄가 없다고 하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을 풀어 줄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는 당시 유대인의 가장 중요한 명절인 유월절이 되면 한 사람을 놓아주는 관례에 따라 예수님과 강도인 바라바 중에 한 사람을 놓아 줄 것인데 한 사람을 택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백성들은 예수님 대신에 바라바를 선택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이 소리를 지르며 "이 사람을 놓으면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니이다 무릇 자기를 왕이라 하는 자는 가이사를 배반하는 것이니이다"(요19:12절)라고 하였습니다.
빌라도가 재판 결과 죄가 없음을 보고도 예수님을 석방하지 못하고 대신 바라바를 놓아준 것은 민란이 일어나는 것을 두려워하였기 때문입니다(마27:24). 그리고 자신의 정치적 생명을 염려하였기 때문이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빌라도의 행동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이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죄가 없으신 분이심에도 불구하고 죽으셨다고 하는 것을 증거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죄가 없으심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바로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한 것입니다(벧전3:18).
특히 빌라도에게 심문을 받으신 사건이 기록된 것은 두 가지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첫 번째로는 예수님이 고난과 십자가에 죽으시는 사건이 사람들이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라 실제 있었던 역사라고 하는 것입니다. 빌라도는 A. D. 26-36년 어간에 유대를 통치한 로마의 총독이었습니다. 이것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우리 역사 가운데 이루셨다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 점을 이해하는 것은 참 중요합니다.
특히 우리 사도신경이 그렇게 말하고 있는데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사도신경이 잘못 번역되어 이 점을 잘 드러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고백하는 신앙고백 가운데 사도신경에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라고 되어 있습니다만 원문은 "본디오 빌라도가 통치하는 시대에 고난을 받으셨다"(라틴. passus sub Pontio Pilato, suffered under Pontius Pilate)라고 해야 합니다. 그리고 성경에서 예수님 자신도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을 것을 말씀하지 않으시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고난을 당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16:21; 눅9:22).
그래서 예수님이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셨다고 말하는 것은 성경의 문맥에도 옳지 않습니다. 원문이 의미하고 있는 바대로 "빌라도가 통치하던 시대에 고난을 당하셨다. "고 번역해야 합니다. 이 의미는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죽으신 사건은 사람들이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도신경에 빌라도의 이름이 개입된 첫 번째 이유는 여호와 하나님의 구원이 역사 가운데 이루셨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본디오 빌라도의 이야기가 기록된 두 번째 이유는 여호와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행동과 세상 정부와의 관계를 보여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고난을 받은 역사를 보면 빌라도가 사형을 내리지만 실제로는 이 모든 일이 여호와 하나님의 구원역사 가운데서 여호와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구원을 이루시되 세상의 여러 제도나 심지어 국가 권력을 통하여서도 이루신다고 하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특히 흥미있는 부분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넘겨준 모든 일이 자기의 계획대로 되는 것같으나 오히려 여호와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성취하는 일임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래서 역사의 주도권을 사람들이 자기 스스로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그 역사의 배후에서 여호와 하나님이 주도권(initiative)을 가지고 계신다고 하는 사실을 잘 볼 수가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임으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지만 오히려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이 되었습니다. 심지어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유대인들이 로마인의 권력을 빌어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였으나 그것마저도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한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한 방편으로 사용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도신경에 빌라도의 이름이 개입된 두 번째 이유는 세상의 역사와 정부는 여호와 하나님의 구원역사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2. 예수님의 고난과 우리와 관계
그러면 예수님께서 왜 이 세상에 오셔서 빌라도가 통치하던 시대에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죽으셨을까요 예수님의 고난을 받으신 목적과 우리와의 관계에 대하여 가장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는 본문이 "종의 노래"라고 알려진 이사야 53장입니다. 여기 3절부터는 예수님이 세상에서 고난을 받으신 내용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멸시를 받고 싫어버린 바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본문에서 예수님을 간고를 많이 겪었고 질고를 아는 자( knowing sickness)로 묘사하였습니다.
표준새번역 성경에 이 부분은 번역하기를 "그는 언제나 병을 앓고 있었다"라고 번역하였는데 이 번역은 예수님이 항상 병자로 있었다고 해석한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의 의미는 그것이 아니고 예수님께서 고난을 받으심으로 인간이 겪는 간고나 고통이나 슬픔이 무엇인지 아신다고 하는 말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고난에 대하여 계속 설명하고 있습니다.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 그런데 이 구절을 정확하게 번역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 문제는 누가 얼굴을 가리우느냐 하는 것인데 이 절에서의 강조점은 고난받는 종이 그 얼굴을 가리우는 것이 아니라 고난을 받은 예수님에게 등을 돌리고 다 떠나갔다는 말입니다. 이 말씀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귀하게 여기지 아니하고 멸시한다는 예언입니다. 이 예언이 성취된 신약성경을 보면 그를 "호산나 다윗의 자손으로 오시는 이여!" 하며 환영하는 자들은 사라지고 심지어 제자들까지도 두려워하며 도망쳐 버렸습니다.
심지어 예수를 위하여 죽을 각오까지 되었다고 장담하던 베드로까지 그를 모른다고 부인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채찍에 맞으며 수치를 당함으로 고난과 멸시를 당하였습니다. 그의 머리에는 조롱과 고통의 가시관이 눌러져 있었고 악인들이 그러한 모습을 보고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마27:27-31; 막15:16-20; 요19:2,3)라고 희롱하였습니다. 모든 사람들에게서 멸시를 받고 싫어버린바가 되었고 아무도 그를 귀한 자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이러한 예수님의 고난과 슬픔은 누구 때문인 줄을 아십니까 이사야 53:4의 말씀을 보십시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여호와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 여기에 묘한 아이러니(irony)를 볼 수 있습니다. 실제로 여호와의 종이 고난을 당하는 것은 우리의 질고와 슬픔을 대신 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이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니라 종이 잘못하여 여호와 하나님에게 벌을 받는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이 구절에서 "그"(he)라는 대명사와 "우리"(we)라는 대명사가 서로 대조가 되고 있는 것을 보십시오. 이러한 대조는 여호와의 종이신 "그"가 행하신 일과 "우리"가 행한 것 사이에 나타나는 분명한 차이점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는 우리의 슬픔과 질고를 담당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 자신의 범죄 때문에 고난을 받는다고 생각하였다는 것입니다.
신약에서 마태는 예수님이 귀신들린 자와 병든 자들을 고치신 사건을 가리켜 이사야서에 있는 이 말씀을 인용하여서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라고 하는 말씀을 이루었다고 하였습니다(마8:16,17). 이사야 선지자가 이 본문에서 우리에게 보여주고자 하는 분명한 목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여호와의 종이 지은 죄로 인하여 야기되는 모든 슬픔과 질고를 담당하신 것은 우리를 위한 고난이라는 것입니다.
이어서 이사야 53:5-6에서는 예수님의 고난의 절정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의 고난과 우리와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를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5절의 말씀은 우리 번역에는 빠져있습니다만 "그러나"(, But NASB, N4)라는 역접부사로 시작합니다. 이것은 앞의 사실과 정반대의 사상을 가르쳐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앞에서 살펴본 이사야 53:3-4에서 예수님의 고난에 대한 잘못된 생각을 바로잡고 예수님이 왜 그러한 고난을 받아야 하는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5절의 사상을 우리가 정리해 보면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가 자신의 죄로 인하여 고난을 받으며 여호와 하나님께 맞았다고 생각하였으나 그가 실제로 여호와 하나님에게 벌을 받는 이유는 "우리의 허물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찔리고 상함을 받은 이유는 우리의 죄악과 허물 때문입니다.
그 죄악과 허물이 무엇인지 6절에서 밝혀주기를 "우리는 다 양같아서 그릇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다. "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목자가 지시해 준 길로 가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행하였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보여주신 길로 가지 않고 오히려 자신의 길을 따라가는 것을 말합니다. 이 불행한 사실이 창세기 3장에서부터 계속해서 볼 수 있습니다. 인간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고 자기 생각대로 살았습니다.
성경에 보면 사사기라는 책이 있습니다. 여기에 보면 인간의 생각대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때에 왕이 없음으로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다. "(삿17:6; 25:25) 사람은 마땅히 여호와 하나님을 알고 섬겨야 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자기 생각대로 행하였습니다. 이것이 죄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이러한 인간을 사랑하셔서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새 사람을 만드시기 위하여 예수님을 보내어서 우리가 받아야 할 형벌을 대신 받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6절 하반절에 "우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다. "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그 범죄가 포함하고 있는 모든 죄의 책임과 거기에 따른 형벌을 다 담당시키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은 죄로 인하여 바로 우리가 받아야 할 형벌을 여호와의 종이신 그리스도에게 다 담당시키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진노가 죄를 지은 우리가 아니라 죄없으신 예수님에게 내려졌습니다. 이것이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속죄교리입니다. 성경의 모든 사건은 이 속죄사건과 관련이 되어 있습니다.
3. 예수님의 고난의 결과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고난을 받으신 결과는 무엇일까요 여호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어 자유롭게 여호와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고난의 결과가 이사야 53:5에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 이 말씀에서 "그"와 "우리"의 대조를 보십시오. 주님이 고난을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얻게 되었습니다.
여기에 나타나는 평화와 나음은 죄로부터의 자유와 구원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죽어 주심으로 인하여 여호와 하나님과 평화로운 관계가 되었습니다. 이 평화는 우리가 이전에 지은 죄로 인하여 여호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놓여있었던 장벽을 제거하시고 여호와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바른 관계가 되었다고 하는 말입니다. 신약에서 사도 바울이 에베소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이것을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에베소서 2:14-16의 말씀을 보십시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하시고 원수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의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여호와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려 하심이라. "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의 종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우리의 모든 죄악을 담당하시고 고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여호와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평화로운 관계가 되게 하셨다고 하는 이 속죄교리를 믿습니까 이 교리는 성경의 가장 중심되는 교리입니다. 오늘날 교리가 별로 인기를 얻지 못하고 있습니다. 교리공부가 초대교회나 종교개혁시대에만 하더라도 가장 중요하고 가치있는 제도였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이 교리를 배우는 것을 터부시 하는 것이 교회의 보편적인 형편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교리의 중요성을 모르고 있거나 또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예수님에게 전가시켰다고 하는 속죄교리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말로 구원받지 못하였다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에 다니고 있는 사람들(church-goers)은 교회내의 프로그램에 흥미를 가지고 있고 그 프로그램을 방해하고 있는 것이 교리라고 생각하는 경향들이 교회 안에 지배적입니다. 하지만 교리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을 담고 있는지를 체계적으로 정리한 것입니다.
에드워드 영(Edward J. Young) 교수는 이 교리의 중요성에 대하여 말하기를 "이 세대에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은 교리적 가르침과 교리적 설교의 부흥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받아들이고 믿고 있는 교리의 핵심적인 내용이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담당하기 위하여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죽으셨다고 하는 속죄교리입니다. 이 교리는 성경의 모든 교리 가운데 가장 중심되는 교리입니다. 아직 이 교리를 붙잡지 못하신 분은 이 교리를 배우고 붙잡으십시오. 이 교리가 우리의 인생과 운명을 바꾸는 것입니다. 이미 이 교리를 이해하고 이 진리를 붙잡은 사람은 예수님으로 인하여 자신의 죄가 용서함을 받았다고 하는 사실을 알고 감사하며 주님의 말씀을 좇아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여전히 사람들은 이 속죄교리의 핵심인 예수님의 고난을 자기와 연관지어 생각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8절에 이러한 사상이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가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 갔으니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산 자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받은 내 백성의 허물을 인함이라 하였으리요. " 이 말씀은 당시의 사람들도 예수님의 고난과 십자가의 죽으심을 자기 백성의 죄를 담당하기 위한 사건으로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인간의 실상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고난을 당하신 사건으로 이해하고 이 사건의 중요성을 우리의 삶과 관련시키며 이 은혜를 감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우리가 예수를 모를 때 지금 모든 불신자들이나 세상이 하고 있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이러한 고난을 자신의 삶과 연관짓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우리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고 자신이 죄로 말미암아 그렇게 되었고 나와 관계없는 하나의 죽음으로 이해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지금 현재 우리는 예수님의 이 고난이 바로 우리의 지은 죄로 말미암아 야기되는 모든 슬픔과 질고를 담당하시기 위한 구원의 사건임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고난의 성격을 이해하고 그 사건이 바로 우리자신의 삶과 연계되어 있다고 하는 사실을 이해하게 된다면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세계를 보게될 것이고 거기에 따라 우리의 삶을 조정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적극적으로 여호와 하나님과 교제하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살 때 여러 가지 문제들을 만나기도 하고, 그것 때문에 고난을 겪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때에 고난을 받으신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히브리서 기자는 우리에게 예수님의 고난과 관련하여 두 가지 사실을 우리에게 적용해 주고 있습니다. "저가 시험을 많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 "(히2:17-18)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세상에서 여러 가지 문제들로 인하여 어려움과 고난을 당하고 있습니까 은혜의 보좌로 나아가십시오. 예수님은 빌라도가 통치하던 시대에 죄없으신 분으로서 우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이 고난을 받으신 것은 우리를 죄에서 구속하셔서 자유롭게 여호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님께 나아갈 때 우리의 연약함을 몸소 체험하셨던 주님께서 우리의 문제를 아시고 도와주실 것입니다. 이 일은 사람들이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고 역사 가운데 실제 일어난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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